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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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4년 1월 7일 |
전라도
보성군 문전면 가천리 (現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2][3] |
|
사망 | 1951년 1월 5일 (향년 86세)[4]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219호 |
국적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1890 ~ 1951) |
|
본관 | 대구 서씨[6] |
자 | 윤경(允卿) |
호 | 송재(松齋), 쌍경(雙慶) |
친인척 | 조부 서상기, 양조부 서상요 |
부모 | 아버지 생부 서광효, 양부 서광하 |
배우자 | 뮤리얼 메리 암스트롱 (Muriel Mary Armstrong)[7] |
자녀 |
슬하 1남 3녀[8][9] 장녀 스테페니 제이슨 보이드 (Stephanie Jaisohn Boyd)[10] 차녀 뮤리엘 제이슨 (Muriel Jaisohn)[11] 외손자 필립 제이슨 하디간 (Philip Jaisohn Hardican)[12] |
신장 | 177.8cm[13][14] |
정당 |
[[독립협회|]] |
사상 | 자유주의 ( 미국 / 대한민국) |
학력 |
문과 증광시 합격 (1882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세균학 / 학사)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과전문대학원[15] (MD) |
병역 |
조선 관군 병조 조련국 미합중국 육군[16] |
종교 | 유교 ( 성리학) → 개신교 ( 감리교회) |
서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1920년대 초, 워싱턴 군축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정장을 차려입은 구미위원부 한국위원회 부단장 서재필. |
1882년 문과 증광시에 최연소 합격한 후 20세던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찬밥 대우를 받자 다시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한국에 있던 친지들이 대부분 죽고 자신도 역모자가 되어 귀국조차 할 수 없던 상황에서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해 의대 강사가 되어 강의까지 했으나 그만두고 의사로 개업한다.[20] 1894년 갑오개혁 때 갑신정변 연루자들에 대한 징계가 풀리자 박영효의 제안으로 미국 시민으로서 귀국했다.[21]
고종과 미국을 연결해줬고 조선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민중을 바탕으로 한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의회 설립과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으나 고종의 반대로 실패한 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고 독립협회도 해산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는 미국에서 언론 활동으로 3.1 운동을 지원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 군정의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 일부에서 대통령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 출마하지 못했으며 미국으로 돌아가서 노후를 보내다 1951년 86세에 사망했다.
서재필은 나라를 바꾸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심지어는 집안이 멸문까지 당했으며 본인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미국인이 되어야만 했던 것으로 자신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조선에게 절대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모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정체성이나 공과 등에 대한 업적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한 인간으로만 보자면 비극적인 가정사부터 다사다난했던 인생사를 보면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고 고생 꽤나 한 인물이기는 했다. 어록을 봐도 알 수 있듯 최소한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 개혁적인 사상을 가졌던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2. 생애
2.1. 갑신정변 이전
1864년 1월 7일 전라도 보성군 문전면 가천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22] 가내마을)에 있던 외가 성주 이씨 집안에서 동복 현감[23] 아버지 서광효(徐光孝, 1830. 8. 22.~1884. 11. 2.)[24]와 어머니 성주 이씨 이조이(李召史, 1830~1885. 1. 12.)[25] 사이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출생 이후 아버지 서광효의 6촌 형제인 서광하(徐光夏)[26]의 양자로 가면서 충청도 공주목 진잠현(현 대전광역시 유성구)으로 이주하였다. 양부 서광하의 처가는 신 안동 김씨로 문충공(文忠公) 김상용의 후손이었는데, 이 때문에 서광하는 세도가문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이 때 서재필은 양어머니의 오빠인 예조참판 김성근(金聲根, 1835. 3. 19.~1919. 10. 3.)의 집에 갔다가 김옥균[27]을 만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1879년 왕이 주관하는 전강에서 1등을 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그 동안에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동대문 밖 절에 모여 일본 책들을 돌려보면서 개화에 대한 꿈을 꿨다. 1882년( 고종 19) 3월 22일 열린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하고 권지(權知:견습관원)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종9품), 훈련원 부봉사(訓練院副奉事:정9품) 등을 지내다, 일본으로 유학해 1884년 토야마 소년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했다. 귀국 후 신식 사관학교를 창설할 목적으로 설립된 병조 예하 조련국의 사관장(士官長)으로서 생도들을 양성하지만, 얼마 안있어 온건개화파의 방해로 훈련소가 폐지되고 해방영이 설치되면서 그 역시 보직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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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를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10월 17일 갑신정변을 일으키는데, 당시 20세였던 서재필은 생도들을 인솔하여 무사로서 활약했고 병조 참판 겸 육군 정령관(正領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아내 광산 김씨(1862~1885. 1. 12.)[28]는 자살하고[29] 하나 있던 2살 난 아들은 돌봐주는 이가 없어 굶어 죽는다.[30] 양가(養家)와 친가(親家) 가릴 것 없이, 양아버지 서광하는 갑신정변 직후 서재필을 파양했으나 결국 연좌제를 당하여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으며[31], 생부 서광효는 자결하였다.
생가 형제들 중 맏형 서재춘(徐載春, 1859. 3. 4.~1888. 8. 14.)은 감옥에 갇혔다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붙잡혀 참형을 당했다. 생모 성주 이씨는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고 서모와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미 족숙 서광래에 양자로 갔던 첫째 남동생 서재창 역시 도주하다 붙잡혀 처형당했으며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함경도로 피신한다. 화를 피한 사람들은 아직 어렸던 둘째 남동생 서재우(徐載雨, 1869. 9. 5.~1905. 1. 24.)와 맏형 서재춘의 외아들 서영석(徐英錫, 1879. 2. 5.~1966. 2. 29.)[32] 서재창의 유복자 서◯석[33] 등이 있었고 결혼한 누나들도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피했다.
2.2. 미국으로 망명
갑신정변 실패 후 서재필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제물포로 도망가 조선을 빠져나가려고 일본 상선에 오른다. 그들이 일본인 선장의 배에 탑승하여 숨어있을 때 관리들과 당시 조선에서 근무 중이던 독일 출신 외교관 묄렌도르프가 제물포항으로 급습하여 갑신정변의 역적들인 세 사람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서재필은 이 때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인 선장이 "일본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하게 할 수 없다"고 둘러대며 그들을 돌려보내 서재필은 생존할 수 있었다.[34] 그렇게 일본으로 망명하지만 이용 가치가 없어진 그들은 일본에서도 찬밥 대우를 받는다. 도쿄에서 1년간 생활하면서 자신들이 토사구팽당한 것을 알게 된 서재필은 서광범, 박영효[35]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36]했으며 김옥균은 청나라로 건너갔다가 이후 암살당한다.미국에 갔을 초기만 해도 서재필은 당연히 영어를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1년여 동안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 청년회에서 영어를 배우는 고단한 생활을 하였다. 초반에는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에 일자리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들어 전단지를 붙이는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흑인을 상대로 한 노예 제도가 폐지된지 고작 20년 밖에 지나지 않았던 미국 사회에서의 인종차별도 그의 삶을 힘들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는데 심지어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기차 짐칸으로까지 밀려날 정도로 멸시당했다. 함께 미국에 건너온 박영효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버렸고 서광범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에서 지내다가 잠시 일본으로 돌아가버리면서 서재필은 홀로 미국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조선에서는 끊임없이 자객을 보내 그를 감시하고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신변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1886년 행운이 따랐는지 존 홀렌백(John Welles Hollenback)이라는 미국인 독지가의 후원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 시(Wilkes Barre)로 이주한 뒤 이 곳에 있는 해리힐먼 고등학교(Harry Hillman Academy)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역사, 철학, 과학 등 서구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37] 서재필은 마땅히 지낼 거처가 없어 교장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마침 교장의 장인이 갓 퇴임한 법관이었고, 그와 함께 살며 서재필은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 사회 제도에 대해 학습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서재필은 수학, 그리스어, 라틴어 등에서 우등상을 받으며 졸업하게 된다.
해리힐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재필은 코코란 단과대학[38]에서 물리학과를 다녔다. 그러던 중 홀렌백은 서재필에게 라파예트 칼리지로 옮겨 전공 공부를 마친 뒤 프린스턴 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로 파송갈 것을 서면으로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홀렌뱃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더 이상 지원해주지 않겠다고 통첩을 했으나 서재필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홀렌백과 결별하게 된 서재필은 라파예트 칼리지의 한 교수와 인연이 닿아 계속 지원을 받으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워싱턴 D.C.로 이주하기 위해 라파예트 칼리지를 자퇴했다.
2.3. 미국 시민권 취득
서재필의 부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 |
서재필이 미국에서 의사 면허도 따고 결혼하여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꾸리는 동안 조선에서는 외세의 힘에 밀리는 조정으로 인해 국가 체계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10여년간 생활하며 미국 사회와 민주주의적 정치 시스템에 큰 동경을 가지게 된 서재필은 조선의 상황을 보며 미국식 민주제와 민권 사상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인다.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졌던 갑오개혁 과정에서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박영효, 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복권되었다. 특히 1895년 5월 박정양 내각이 성립되자 이 내각의 실세였던 내부 대신 박영효는 개화당 동지인 서재필을 외부 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당시 병원을 개업한 직후일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고 그 후 실각한 박영효가 미국을 방문하여 재차 귀국을 권유하자, 같은 해 12월 26일, 갑신정변의 실패로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옛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서재필은 원래 사면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신변의 위협과 고종과 민씨 척족, 조선 조정 대한 환멸에 귀국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그를 데리고 오기 위해 주미조선공사관의 방을 빌려주고 식비를 제공하며 그를 설득했다. 결정적으로 서재필이 귀국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워싱턴 D.C.를 방문중이던 갑신정변을 함께 일으킨 박영효가 그를 방문하여 설득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다시 한번 조선을 개혁해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신변 문제 때문에 서재필은 미국에서부터 사설 경호원을 고용하여 귀국길 내내 대동하도록 했다.
귀국 직후인 1896년 1월 갑오개혁에 의해 입법 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여기서 서재필은 정부의 보조금으로 개화파 인사들의 후원 아래 1896년 4월 7일 국내 최초의 민간 대중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논설이나 각종 기사를 자신이 직접 썼다. 특히 논설을 중요시하였는데, 그것은 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근대 사상과 제도를 소개하여 국민을 계몽하려던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당시 서재필은 한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42] 행동하며 철저히 미국인으로서 영어만 사용했다고 한다.[43] 당시 서재필은 조선 사회에 대한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조선인들을 "you, korean"이라고 표현하거나 왕 앞에서도 신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세상에 불쌍한 인생이 조선 여편네다. 여편네가 사내보다 조금도 낮은 인생이 아닌데
사내들이 천대하는 까닭은 사내들이 개화되지 않은 데 있다.
- 1896년 4월 21일 독립신문 논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점점 정치화되었고, 초기에는 나름대로 양호하였던 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서재필은 결국 미국으로 추방된다.[44] 하지만 독립협회 내부에서는 여전히 입지가 남아 있어서, 독립협회 인사들이 참여한
중추원 최초 의제에서 서재필을 각료로 추천하는 인물도 있었다. 중추원에는 관료 추천권이 없었지만, 최초의 의제가 새로운 관료를 추천하는 것이었고 여기서 박영효,[45] 서재필 등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학을 떼던 인물들이 여럿 선출된다. 그리고 이는 중추원과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896년 4월 21일 독립신문 논설
2.4. 미국 생활과 독립 운동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스페인 전쟁에 미합중국 육군 군의관으로 참가하였다. 1898년 12월 전쟁이 끝나자 펜실베이니아에 개인 병원을 개업하고, 대학에서 해부학을 강의하면서 지냈다.1919년 3.1 운동을 전후하여 다시 기고문 등을 실으면서 외교적 선전 활동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미 외교 고문을 한동안 맡기도 했다.
일본은 한국에 가한 잘못을 교활하게 은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미국에 알려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게 만들어야 한다.
- 1919년 4월호 『코리아 평론』 논설
- 1919년 4월호 『코리아 평론』 논설
필라델피아 한인 자유 대회 실제 촬영 영상.[46] |
1919년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했고, 16일에는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며 대한독립을 외쳤던 ‘한인독립대회(Korean Inpendence League)’를 주도했다. 당시 필라델피아시는 군악대를 지원했다. # # 1921년 3월 2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서재필 박사(Dr. Philip Jaisohn, M.D.)는 3·1운동 2주년을 기념하는 '한인연합대회'의 개회를 선언하고 '기미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낭독했다. 이 행사에는 미국 동부지역 한인들과 함께 현지 미국인들까지 무려 1,300명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윌리엄 E. 메이슨( 일리노이) 당시 연방하원의원도 자리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미국의 주류 언론으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는데, 일간 뉴욕타임스는 이튿날 '메이슨 의원, 일본의 한국 침략을 맹비난하다'(Mason raps Japan for piracy in Korea) 제하의 기사를 게재했다. 메이슨 의원이 일본의 침략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미국 연방정부에 대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
1925년 6월 경, 하와이에서 열린 범태평양 회의에서의 이승만과 서재필.[47] |
1925년은 호놀룰루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여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규탄하기도 했다.
그의 독립 외교 및 선전 활동은 사비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48] 1926년에는 완전히 무일푼의 처지가 되었다. 이후 1942년 3월 1일 워싱턴에서 동포들이 개최한 태평양 전쟁 전승 기원 기념식에 참가했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미 육군 징병검사관으로 활동하여 미 국회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2.5. 광복 이후
한국이 통일되는 그 날이 빨리 오게 하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 1947년 7월 1일 입국 인사
- 1947년 7월 1일 입국 인사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의 초청으로 고문 자격으로 입국했다.
안창호파 최능진이 서재필 대통령 추대운동을 벌인 것처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이었기 때문에 피선거권이 없었다. 본인도 대통령 자리에 큰 미련이 없었고, 정세와 고령[49] 문제로 인해서 출마할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이때 라디오 방송 연설을 영어로 했다고 한다. 그래도 지지자가 없지는 않았는지, 국회에서 간선으로 실시한 제1회 대통령 선거에서 무효표가 되긴 했지만 1표를 얻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서재필의 고사로 인해 이승만과 서재필을 경쟁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은 틀어졌고, 이는 이승만이 이후 대통령에 한결 편하게 오르는 기회가 된다. 그래도 보은격으로 김규식에 이어 조선적십자사 2대 총재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곧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51년 사망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조선 적십자사 역대 총재 | ||||
초대 김규식 | → | 2대 서재필 | → | 대한적십자사 설립, 초대 총재 양주삼 |
사망 후 필라델피아 공동묘지 납골당에 안치된 서재필과 그의 아내 유골은 돌봐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묘지 관리인이 주인 없는 유골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수십년째 방치되고 있었다. 이를 1983년 현지 교민 장익태 씨와 서재필 친형의 증손자인 서동성 씨가 사비 2천 달러를 들여 좀 더 좋은 납골당으로 이장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으로 활동하느라 모아둔 재산이 없이 가난하게 살았으며,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둘째 딸도 한겨울에 난방도 못하고 살만큼 궁핍했다고 한다. 생전에 딸을 둘 두었으나 장녀와는 사이가 소원했는지 장녀에게서 난 손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연락이 두절되었고, 차녀는 독신으로 사망해 사실상 혈육이 없는 것과 같았다. 차녀 뮤리엘은 사망하기 전 서동성에게 “아버지의 유골을 한국으로 모셔달라”며 울면서 부탁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
1994년에는 그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어 그해 4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외증손 이상호 씨가 유해를 운구했다.[50]
3. 비판적 평가
- 아관파천 성공 직후 박정양의 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고종은 ‘독립신문’이란 제자(題字)를 부여하고 정부 자금을 차관 형식으로 제공했다. 독립신문이 민간 신문의 외양을 취하기 위해 나중에 서재필을 등장시키지만 사실상 ‘정부대변지’로 창간된 것이다. 그런데 서재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본인이 독립신문을 “조선 사람의 근소한 후원을 얻어” 발행했으며 자신이 독립신문으로 명명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 238쪽) #
-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독립신문 발간 계획을 유길준에게 설파해 유길준에 의해 승인되고 준비된 것인 양 거짓 서술하고 있다. 그는 유길준의 신문 계획이 좌초된 일과 박정양의 이름 자체를 숨기고 있다. 그러면서 독립신문이 자신의 창안으로 이뤄졌다고 꾸며댔다. 그런데 일찍이 독립신문 연구의 기초를 놓은 신용하는 서재필의 이 거짓말을 참말인 양 인용하며 서재필과 독립신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신용하, 『독립협회 연구(상)』 24~25, 28, 42쪽) #
- 2017년 황태연 교수[52]가 서재필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을 중앙일보에서 제기하였다. # 다만 해당 기사에도 자세한 내용은 없는데 다른 기사에 따르면 서재필이 추방당했던 1898년(광무 2년)에 독립신문 소유권을 일본에 매각할 의사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황태연 교수도 서재필이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건 친일 성향이 강했던 독립협회 시절일 때라고 하였다.
-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견된 민영환 특사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교섭한 내용을 당시 수행통역관 윤치호로부터 전해들은 서재필은 이를 일본공사에게 ‘밀고’하고 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7. 11. 17.)에 ‘밀고’라고 적혀 있다. 또 미국공사 존 실(John M. B. Sill)이 이완용에게 러시아 장교의 교관 고빙(雇聘) 반대 행위를 그만두라고 요구한 일이 있는데 이런 사실도 서재필이 일본공사관에 알려주고 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97. 5. 25.) 고종이 러시아와의 동맹을 가장 중시했던 민감한 외교전쟁 시기에 일본 측이 먼저 알아서는 안 되는 외교비밀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
-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민철 연구실장은 "서재필과 독립신문이 친일적 논조를 펼친 것은 러시아의 침략을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서재필 본인은 이후 미국 정부에 연줄이 닿은 뒤로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개화되지 못한 나라들인건 똑같다고 보았다. 다른 독립협회 인사들처럼 일제에 너무 낙관적인 장밋빛 전망을 가졌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국 병합 이후에는 일제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4. 기타
- 제이손이란 이름은 '서재필'을 '필재서'로 바꿔 필립 제이손으로 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Jason'이 아닌 'Jaisohn'으로 적은 이유에 대해 미국인 기자들이 발음나는 대로 적은 거라는 의견이 있다.
- 1896년 독립신문 사설에 조선도 미국과 영국처럼 발전할 수 있다며, 그리만 되면 요동, 만주, 대마도도 찾아올 수 있지 않겠냐는 일종의 조선판 제국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 오늘날 보면 황당할 수 있지만 개화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미국 제국주의와 자유제국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를 추구한 지식인도 많았다. 본인도 '하면 될 터이니 결심하여 성공할 생각들만 하고, 못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지어다'라고 개화의 포부를 크게 가질 것을 역설하는데, 허망한 영토뽕을 주입시켜서라도 조선이 변화하길 갈망한 모양이다. 이후 조선이 제국주의에 먹히는 꼴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을지는 미지수다.
-
서재필은 미국 망명 중에
개신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광고지를 돌리다가 또 어떤 때는 농장에 가서 포도도 따주고 빵을 빌어먹어가면서 나는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시내 기독교청년회에서 경영하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연설회에 구경도 가고, 주일이면 예배당에 반드시 출석하였다. 나는 메이슨 거리에 있는 장로교회 예배당에 다녔는데, 그곳을 주일마다 반드시 갔다. 영어를 배우려는 것이 주안이었으나, 차츰 다니기 시작하니 종교적 신앙심도 차차 두터워가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바르고 깨끗한 길을 걸어갈 결심을 한 것도 이때였다. 믿음과 사랑의 복음을 인생에게 전해준 그리스도의 뒤를 잇기로 맹세한 것도 이때였다. 이 종교적 영향은 나의 인생을 통하여 위대한 힘을 주었다.[53]
- 흔히 서재필 '박사'라고 많이 언급하지만 서재필은 (학술)박사 학위(Ph D)를 받은 적이 없다. 이는 사람들이 Dr. Jaisohn을 '의사 서재필'이 아닌 '박사 서재필'로 잘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의사자격증(Medical (Doctor) License)은 일반 박사학위급으로 인정받으며, 실제로 서재필은 1893년 의과전문대학(Medical School)을 졸업하여 의무박사(M.D. 또는 MD는 "Doctor of Medicine")[54]는 게 사실이기에 마냥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게다가 의무박사와 의사면허증을 둘 다 취득하면, 그 사람은 자신을 "의사 면허를 가진 의학박사"(M.D.-Ph.D."Doctor of Medicine, Philosophiae Doctor")[55]라고 소개할 수 있고, 명함에도 공식 직함으로 새길 수 있다. 서재필이 다닌 대학은 워싱턴의 컬럼비아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코란 자연과학 대학(Corcoran Scientific School)의 의과전문대학(School of Medicine)인데, 이 대학은 워싱턴의 고졸 공무원들을 위해 세운 야간 대학으로 컬럼비아 대학교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는 1888년 코코란 대학에 입학하여 자연과학을 주로 공부한 후, 다음해에 역시 야간 3년제 외과 대학에 등록하였고, 1892년 의학사 학위를 받은 후 1년간의 인턴 생활을 거쳐 1893년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 1896년 4월 23일 한성부에 거주하는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들의 야구 친선 경기가 있었는데, 그중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 이름으로 출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6번 타자 중견수로 출전하여 2득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 유일한이 1926년에 설립한 제약 회사인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마크는 서재필이 조각가인 둘째딸에게 의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유일한이 회사 설립을 위해 귀국하기 전에 만난 자리에서 서재필이 주었다고 한다.
-
독립협회 활동 당시에는 한국어를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하였지만, 그로부터 먼 훗날인 1949년 3월 1일에는 한국어로 장시간 연설했으며 육성 녹음도 남아 있다. 음반 원본은 분실되었지만 복사본이 남아있으며 전체 분량은 약 9분 정도다. 전반적으로는 19세기 근대 양반가에서 썼을 법한 서울 방언 억양이지만, 이미 연로했던 데다 영어의 음색[56]이 많이 섞인 탓에 듣기에 따라서는 이승만보다도 훨씬 어눌하게 들리는 게 특징이다.[57]
- 1950년 9월 14일 병석에서 존 하지 장군에게 보낸 서신이 남아있다. # 요약하자면, '자신이 한국인들로부터 건네받은 한국의 정치 및 경제적 상황에 대한, 치우치지 않은 정보'를 월터 스미스 장군 산하의 육군 정보처에 제공하고 싶다는 내용이다.
- 서재필이 태어난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 서재필 기념 공원이 있다. 미국 워싱턴시에도 2008년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기념물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공원에 세워진 동상(송재 서재필 상. 1990년 건립)이다. 자신이 창간한 <독립신문>을 움켜쥔 모습을 하고 있다.
- 갑신정변 연루자들의 가문은 대부분 항렬자를 바꾸었다고 하는데, 서광범·서재필의 대구 서씨 가문도 25세 광(光) 항렬과 26세 재(載) 항렬을 각각 병(丙)과 정(廷)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실제로 갑신정변 직후인 1884년 11월 29일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전 수사(水使) 서광정(徐光鼎)이 이름을 병응(丙應)으로 바꾸고, 전 병사(兵使) 서광복(徐光復)이 이름을 병무(丙懋)로 바꾸고, 전 수사 서광현(徐光顯)이 이름을 병훈(丙勳)으로 바꾸고, 전 영장(營將) 서광태(徐光泰)가 이름을 병희(丙憙)로 바꾸고, 전 부사 서재풍(徐載豐)이 이름을 정규(廷圭)로 바꾸고, 훈련원 첨정 서재두(徐載斗)가 이름을 정두(廷斗)로 바꾸어 윤허를 받은 기록이 있으며, 이 밖에도 여러 사례가 있다.
- 다만 반례가 없지는 않다. 서병필(徐丙弼, 1852년생)이라는 무신은 갑신정변 이전인 1882년(고종 19) 증광시 무과 원방(原榜)에 을과 2위로 급제했는데, 이 당시 무과의 급제자명단을 기록한『숭정후5임오경과증광문무과전시방목(崇禎後五壬午慶科增廣文武科殿試榜目)』을 보면 그대로 서병필로 기재되어 있어 갑신정변 직후에 개명한 것이 아닌 원래 본명이 서병필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이름이 서상은(徐相殷)이므로 서병필이 대구 서씨 25세임도 틀림없다.
-
1940년 미국 인구 조사 기록에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아내와 둘째 딸과 손자와 함께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 현대에 봐도 엄청난 노력파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원래 조선 문과 시험에 합격하고도 개화 사상을 받아들이고 조선 개화를 위해 일본으로 스스로 건너가 장교도 아닌 하사관 교육 과정을 스스로 지원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갑신정변을 겪고 영어를 못하는 상태에 미국으로 가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며 의사까지 되었을 정도니. 미국으로 가자는 제안을 했던 동료 박영효도 미국 생활을 못 견디고 일본으로 갔을 정도다.
- 말년에는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의 사후 차녀가 겨울에 난방도 못할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고, 손자도 서재필 부부의 무덤을 돌볼 처지가 되지 않아 서재필 형의 증손자와 미국 교민이 사비를 들여 공동묘지에 방치되던 유골을 이장시킬 정도였다. #
5. 대중매체에서
- 1959년 영화 <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에서는 배우 이해랑이 연기했다.
- 1969년 영화 <전하 어디로 가시나이까>에서는 배우 문오장이 연기했다.
- 1973년 영화 < 삼일천하>에서는 배우 방수일이 연기했다.
- 황기환 지사 등과 함께 2018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의 모티브가 된 인물 중 한명으로 보인다. 집안이 몰락해[58] 미국으로 도피해 미국인이 된 점,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가한 점, 애증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조선에 돌아와 도움을 주긴 한 점 등이 비슷하다. 물론 차이점도 많아서 부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 Hearts of Korea에서는 러일전쟁을 틈타 공화주의 혁명에 성공하자[59] 한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한국의 공화정 기틀을 마무리해서 작중에서는 조지 워싱턴 만큼 존경받는 인사로 나오며, 과로로 인해 원래역사보다 이른 나이인 1927년에 사망한다.
- 레볼루션 1896에선 대한제국을 말아먹은 총리로 나온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 대한제국 제 6대 총리대신으로 등장한다.
-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서는 과거에 말했던 제국주의적 발언에 이불킥을 하면서도 여전히 야욕을 못버린것으로 나온다. 우습게도 비슷하게 제국주의자인 고종도 만주에 눈이 멀어 갑신년의 역적이라며 혐오하던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신문을 참된 언론이라는 공치사까지 붙여 전폭 후원해준다.
[1]
한국명 '서재필'을 '필재서'로 거꾸로 한 뒤 비슷한 어감의 영어 이름으로 개명한 것. '필립 제이슨' 혹은 '필립 제이손' 등으로 읽으나, 'Phillip Jason'은 아니다.
[2]
생가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내길 18-35
[3]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은 1320년경
성주 이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형성한 곳으로, 서재필의 외가도
성주 이씨였다.
[4]
87세 생일을 불과 2일 앞두고 사망했다. 참고로
1.4 후퇴 다음 날에 사망했다.
[5]
미국으로 귀화한 뒤 조선 국적은 소멸됐다. 이 때문에 광복 이후 각계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를 권유받았지만 해당 사유로 무산됐다.
[6]
전첨공(典籤公) 경수(景需)파 26세 재(載) 항렬.
[7]
서재필이
미국에서 거주할 때 결혼한 부인으로
제임스 뷰캐넌 전 미국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 전쟁 당시 철도 우편국을 창설했던 미국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 (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이다. 1871~1944
[8]
한국인 전처 소생 1남 1녀, 뮤리엘 암스트롱 소생 2녀, 총 세 번 결혼했으며,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9]
조선에서 태어난 1남 1녀 중 아들은 어린 나이에 죽어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딸의 경우 불명이다. 뮤리얼과의 사이에서 생긴 2녀 중 차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장녀 스테파니는 첫 번째 남편과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각각 아들 하나씩을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기록이 맞다면 서재필의 손주로는 스테파니 소생의 외손자 둘이 있는 셈이다.
[10]
1896~1991, 윌리엄 워런 로스 하디칸 (Willam Warren Ross Hardican)과 결혼했으나 이혼 후 폴 카메론 보이드 (Paul Cameron Boyd)과 재혼
[11]
1898~1987
[12]
1917~1993.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70418091/philip-jaisohn-hardican
[13]
그의 미국 여권에 신장이 5피트 10인치로 기록되어 있다고 전한다. 참고로 1인치 작은 5피트 9인치는 175.26cm이다.
[14]
그가 청년기였던 1880년대 19세기 후반의 미국 백인 남성 평균키가 173cm 정도였는데, 당시의 조선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는 장신이였다. 오늘날의 187cm 정도의 위치다.
[15]
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 중 한 명이다. 조선 후기 근대 개혁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갔지만 미국에서 학력을 딴 경우는 서재필이 처음이다. 참고로 최초의 조선인 미국 유학생은
유길준이다. 유길준은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방문했다가 미국에 그대로 남아서 유학생이 되었으나 1년여 만에 유학생활을 그만두고 유럽을 여행한 뒤 조선으로 귀국했다. 서재필이 입학한 곳은 콜롬비아 대학교 부설 코코란 자연과학대학의 의과전문대학(원)(School of Medicine)이며, 졸업시 받는 학위는 의무박사(Doctor of Medicine, M.D. or MD) 학위이다. 한국에서는 의학 관련 대학을 나오면 의학사와 의무석사를 받지만, 미국은 곧바로 의무박사를 받는다. 간혹 의무학사(의학사)나 의무석사를 받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학제가 세분화된 근래의 일이라서, 서재필의 경우는 아니다.
[16]
군의관 신분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했다.
[17]
한때 미
육군 군의관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가했다.
[18]
본인의 자전적 얘기격인 소설 ‘한수의 여행’(1922)을 썼다.
[19]
"(전략) 또 위조한 조서(詔書)에 서명한 대신들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때의 내부 대신 박정양(朴定陽)은 애초에 관청에 나가지 않고 상소를 올려 해임되었으며,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심상훈(沈相薰)은 변란에 대하여 듣자마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서명한 것이 전적으로 적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 명백하므로 지금 다시 논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 군부 대신(軍部大臣) 조희연(趙羲淵), 법부 대신(法部大臣) 서광범(徐光範), 학부 대신 서리(學部大臣署理) 서재필(徐載弼), 농상공부 대신 서리(農商工部大臣署理) 정병하(鄭秉夏)는 혹은 죽었거나 도망쳤는데 지금까지 살려 둔 자는 바로 그때의 궁내부 대신 이재면(李載冕)과 외부 대신(外部大臣) 김윤식(金允植)입니다. 진실로 타고난 떳떳한 본성이 있다면 어떻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 자신이 그들 자신을 증명한다 해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니, 이것은 일체 법에 따라 정죄(定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의 조서를 비록 거두어 없애 버린다 해도 여론이 격렬하게 일어난 후이니, 신들이 어떻게 감히 침묵만을 지키겠습니까? 이에 감히 서로 이끌고 와서 폐하께 연명으로 호소하는 바입니다."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6월 18일 양력 4번째기사
[20]
영어 한 마디 못했던
이민자 출신의 동양인이 미국에서 의사가 된 것이니 대단하다.
[21]
서재필은 조선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대부분 해외에 머물며
독립운동 및 의사 활동을 했으나 종종 귀국하여 머물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서재필이
일제강점기 시절
이상재나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을 때도
조선총독부는 그가 미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체포하지 못했다. 그 대신 일제는
하와이나
필라델피아 등 서재필의 활동지에
첩자를 파견해서 서재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22]
용암 삼거리 인근에 2008년 들어선 서재필 기념
공원이 있으며
독립문 실사 모형이 서있다.
[23]
동복현은 현 화순군 동복면, 사평면, 이서면, 백아면에 해당하는 군현이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후
화순군에 합병되었다.
[24]
이후 서광언(徐光彦)으로 개명한 듯 하다. 1859년(
철종 10) 증광시 생원시에 3등 17위로
입격했는데, 이때는 이름을 서광언으로 썼다.
[25]
이기대(李箕大, 이명 이기래李箕來)의 딸이다.
[26]
무슨 이유에선지 2003년 간행된 대구서씨세보 권2 전첨공파 병편(丙編)에는 서광하의 아버지로 알려진 서상목(徐相穆)과 서광하 자신이 누락되어 있으며, 서재필이 서광하의 양자로 입적된 사실 또한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도
갑신정변의 여파로 연좌되어 처형되었기 때문인 듯 하다.
[27]
김성근은 김옥균에게 족조(族祖)로 14촌 지간이 된다.
[28]
김장생의 후손이다.
[29]
아내가 자살한 이유에 대해서는, 친정으로 도망갔더니 역적의 부인이니 자결하라고 친정 아버지 김영석(金永奭)과 친정 어머니
반남 박씨(?~1893. 2. 20.) 박호수(朴鎬壽)의 딸이 독약을 줘서 자살했다는 썰이 있다. 나중에 장인이 서재필을 찾아 왔는데 서재필이 자기 딸하고 외손을 죽인 금수만도 못한 인간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겠다면서 내쳤다고 한다.
[30]
음독한 어머니 광산 김씨의 젖을 빨다가 같이 죽었다는 설도 있다.
[31]
양어머니 안동 김씨는 갑신정변 이전인 1884년 초에 이미 사망했다. 뒷날 서재필에게 찾아왔다고 하는데, 서재필은 돈 몇 푼을 던지며 냉대했다고 하여
김구와
윤치호는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32]
서영석의 증손자 서동성은 미국 LA에서 변호사로 활동했고, 거의 버려져 방치되던 서재필의 유골을 개인돈을 들여 이장했다.
[33]
친자식이기는 하나 서자였으며, 이름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재창의 명목상 후사는 사촌동생 서재영(徐載榮, 1867. 10. 5.~1922. 2. 24.)의 차남 서찬석(徐灒錫, 1893. 11. 29.~1979. 11. 21.)이 사후 입양되었다.
[34]
한 설에 의하면 서재필 등을 인도하라는 고종의 요구에 다케조에 일본 공사가 이들을 내리라고 했으나 용기 있는 일본 상선 선장의 거부로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사실 이 얘기는 허구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일본발 창작물 외에는 딱히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 창작물 원본에는 일본 공사가 하나부사라고 통용되었는데 실제로는 당시 공사가 다케조에였기 때문에 이 공사명만 바뀌어서 기록된 것이다.
[35]
훗날 박영효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여 서재필과는 노선을 달리하게 된다.
[36]
이 때 미국
선교사들이 그들의 미국 망명을 적극 도왔고 이 때문에 서재필은
개신교로 개종하게 된다.
[37]
그의 미국 이름 필립 제이슨도 홀렌백이 작명해 주었다.
[38]
코코란 자연과학 대학(Corcoran Scientific School)은 코코란 단과대학의 일부이며, 1884년 콜럼비아 대학교의 일부로서 개교하여 1961년 분리되었습니다. William Wilson Corcoran이 기부한 재산으로 만들어진 대학입니다. 코코란 대학을 졸업해도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대우했습니다. 1961년 코코란 자연과학 대학은 분리되었으나, 지금도 코코란 예술대학(Corcoran School of the Arts and Design)은 여전히 조지 워싱턴 대학교 소속입니다. 코코란 자연과학 대학은 설립 초기부터 여학생의 입학을 받아들인 소수의 대학입니다. 미국에서 최초로 학위를 취득한 여의사도 코코란 의과전문대학 출신입니다.
[39]
근데 연도는 인터넷을 뒤져봐도 문서마다 글마다 몇 해씩 차이가 있긴 하다. 사실 대학 졸업 시기뿐만 아니라 시민권 취득년도, 뮤리얼 암스트롱과의 결혼 연도 등도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40]
서재필이 갑신정변 때 직접 칼을 들고 싸웠을 만큼 뛰어난 무력과 완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불량배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41]
화가, 독신으로 살았다.
사진
[42]
실제 서재필은 미국에 완전히 정착한 노년기에도 한국어를 잊지 않고 살았다. 노년에 잠시 방한했을 때 한국어로 연설할 정도.
[43]
이를 반영했는지 당시
국민학생을 대상으로 한 계몽사 학습만화한국사에서도 귀국한 서재필에게 조선관리가 '서재필 씨' 라고 부르자 '나를 서재필이라 부르지 마시오, 나는 필립 제이슨이오!' 라는 장면을 삽입했다.
[44]
이에 대해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는 <독립협회 연구 : 독립신문,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사상과 운동> (일조간, 1996년, 55쪽)에서 정부가 독립신문을 탄압한 이유로 "수구파 정부에 대한 비판, 제정 러시아의 침략 간섭 정책 비판,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고발, 전제 군주권에 대한 비판, 국정 개혁과 민권 신장 주장, 서재필의 오만한 처신"을 뽑기도 했다.
[45]
갑오개혁 과정에서 반역죄가 걸려서,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상황이었다. 이후 꾸준히 자신의 정치적 복권을 시도하고, 쿠데타 시도도 하면서 사람들을 파견하고 있어서 1급 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이 때문에 박영효는 고종 퇴위 이후에야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46]
인디펜던스 홀까지 이어지는 참석자들의
행진
퍼레이드와
이승만이 어딘가를 향해 소리치는 모습, 서재필이
카메라를 보고 긴장한 듯 손을 만지작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47]
한눈에 봐도 키가 압도적으로 큰 것을 알 수 있다.
[48]
서재필이 공식적으로 참여한 것은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부위원장 같은 직책 정도였다.
[49]
이승만보다도 무려 10살이상 많았다.
[50]
이상호 씨는
노무현 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이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후임
이명박 정부로부터 임기가 남았음에도 사퇴를 요구받아 갈등을 빚었다. 이때 이씨는 본인이 서재필의 유해를 운구할 때 후손으로서 "내가 죽은 다음에 나쁜 놈, 더러운 놈 소리 듣지 않도록 해야겠다" 생각했다며 당시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 본인은 그때의 다짐대로 그동안 떳떳하게 활동해 왔는데, 단순히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법적으로 임기가 보장받은 직위를 그만두라고 요구하며 온갖 압력을 행사한 것에 항의하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51]
기사
논문.
[52]
고종을 매우 고평가하는 인물이다. 해당 교수의 저서로는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공자와 세계』(전 5권·2011년) 등이 있다.
[53]
김도태, 《서재필박사자서전 : 한말사를 중심으로》, 1948, 수선사, p. 179.
[54]
의무박사(M.D. 또는 MD는 "Doctor of Medicine", 의무 전문박사)는 그 약어 때문에 종종 의사자격증으로 오해 받는다. 한국에서는 의사자격을 Medical Doctor라고 부르지만, 미국에서는 Medical License(엄밀히 말해, 의과대학 의학부에서 받는 Medical (Doctor) License가 의사자격증이다.)라고 부른다. M.D.는 미국에서 법무박사(법무 전문박사)처럼 다른 학과의 학술박사학위로 대우 받는다.
[55]
미국에서는 주마다 학위와 자격 제도가 다르다. 일부 주에서는 의학박사 학위취득 제도가 없기도 하기 때문에 의무박사+의사자격을 모두 취득하면 의학박사로 인정해 주기도 한다.
[56]
특히 받침 ㄹ을 계속해서 영어 L처럼 발음한다든지.
[57]
사실 언어능력이 다 자라기 전 유년기 시절에 해외로 건너가지 않은 이상, 자신이 원래 사용하던 언어를 잊어먹기란 어렵다.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라는 것.
유일한
유한양행 초대 회장 역시 유년기에 도미하여 오랫동안 미국에서 지낸 탓에 한국어 말하기가 서툴러지고 한국어보다 영어 구사가 더 익숙했지만 한국어를 잊어버리지는 않았고 한국어 발화 육성 녹음도 남아 있다.
[58]
작중 유진 초이는 노비 집안 출신에 양반한테 탄압받았다는 차이는 있지만, 가문이 사실상 멸문지화 당했다는 점에선 공통점이 있다.
[59]
서재필이 주도한것은 아니고, 한국내 영향력 확장을 바라는 미국의 묵인하에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