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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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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 |||||
7월 김정희 |
8월 장영실 |
9월 김소월 |
10월 세종대왕 |
11월 김홍도 |
12월 신재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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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 ||||||
1월 나운규 |
2월 정철 |
3월 한용운 |
4월 김정호 |
5월 방정환 |
6월 정약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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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문익점 |
8월 안익태 |
9월 허준 |
10월 주시경 |
11월 윤선도 |
12월 이해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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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
1월 이황 |
2월 정선 |
3월 박지원 |
4월 우장춘 |
5월 신사임당 |
6월 류성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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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일연 |
8월 홍난파 |
9월 고유섭 |
10월 이윤재 |
11월 안창호 |
12월 윤동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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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 ||||||
1월 이이 |
2월 이인문 |
3월 장보고 |
4월 이천 |
5월 윤극영 |
6월 원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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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지석영 |
8월 안중근 |
9월 박연 |
10월 최현배 |
11월 장지연 |
12월 윤백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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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 ||||||
1월 우륵 |
2월 황희 |
3월 김유정 |
4월 홍대용 |
5월 강소천 |
6월 이상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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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안견 |
8월 박은식 |
9월 박승희 |
10월 이희승 |
11월 정도전 |
12월 신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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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 ||||||
1월 강세황 |
2월 조식 |
3월 월터 정 |
4월 최무선 |
5월 이원수 |
6월 김병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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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이육사 |
8월 김구 |
9월 채동선 |
10월 김윤경 |
11월 이수광 |
12월 곽재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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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 ||||||
1월 김만중 |
2월 최치원 |
3월 이순지 |
4월 서재필 |
5월 김명국 |
6월 유일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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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도선 |
8월 심훈 |
9월 왕산악 |
10월 정인승 |
11월 전형필 |
12월 이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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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 ||||||
1월 송석하 |
2월 성현 |
3월 최윤덕 |
4월 이중환 |
5월 초의 (의순) |
6월 한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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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이세보 |
8월 박제가 |
9월 박진 |
10월 장지영 |
11월 왕인 |
12월 송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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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 ||||||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 |
<colbgcolor=white><colcolor=#000000,#dddddd> 1990년 12월 이달의 문화인물 신재효 申在孝 | Shin Jae-hyo |
|
출생 | 1812년 |
조선 전라도 고창현 | |
사망 | 1884년 (향년 73세) |
조선 전라도 고창현 | |
임기기간 | 조선국 가선대부 |
1878년 3월 2일 ~ 1879년 3월 16일 |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경기도 고양군 |
본관 | 평산 신씨[1] |
자 | 백원(百源) |
호 | 동리(桐里), 호장(戶長) |
부모 |
부친 - 신광흡(申光洽, ? ~ ?) 모친 - 경주 김씨 김상려(金常礪, ? ~ ?)의 딸 |
직업 | 판소리 연구가, 판소리 작가 |
[clearfix]
1. 개요
2. 생애
1812년 전라도 고창현(現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아버지 신광흡(申光洽)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상려(金常礪)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1877년(고종 14) 한량으로서 은수룡(殷壽龍)과 함께 빈민 구휼을 위해 돈 500냥을 기부하여 그에 대한 포상으로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 이후 가선대부 호조참판에까지 올랐다.
종래 계통없이 불리어오던 광대 소리를 통일하여 12마당을 《춘향가》, 《심청가》 등 6마당으로 정립, 체계를 이루고 독특한 판소리 사설 문학을 이룩하였다. 최초의 판소리 서적인 《조선창극사》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판소리의 흥행 가능성(?)을 내다보고 광대패를 조성하는가 하면 현재 개념으로 보자면 연예 기획사에서 아이돌 양성까지도 해냈다. 그 때까지의 판소리 가창자는 성량으로 승부하는 남성 위주였지만[3] 신재효는 여성 가창자를 키우는가 하면, 싹이 보이는 아동을 가르쳐 소리를 하게 했는데 이게 당시로선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시도였다.
자신의 집에 문하생을 들이고, 판소리 교육공간까지 마련한 신재효 덕분에 동편제에 속하는 박만순, 김세종[4], 전해종, 김창록과 서편제에 속하는 이날치, 김수영, 정창업 등이 그의 밑에서 판소리를 수련했다. 최초의 여성 명창이라 평가받는 진채선, 허금파도 그의 지도 아래 성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아동에게 소리를 하게 하는 것을 童唱이라 하는데, 신재효는 동창용 판소리를 또 따로 집필해(동창 춘향가) 부르게 했다. 문제는 이 동창용 판소리에 음담패설이 무지막지하게 많았다는 것... 사실 지금이나 당대에나 문제거리로 지적될 일이지만 어린애가 음담패설하는 걸 듣고 좋아라 한 인간이 많았던 모양이다.(...)[5]
평소 판소리를 매우 즐겼던 흥선대원군도 신재효와 진채선의 재능을 인정해서 운현궁에 자주 부르는 등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3. 관련 장소
평생을 고향인 고창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동리 신재효의 족적은 대부분 고창에 남아있다. 여러 문하생들이 수련했던 신재효의 고택은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보존되어 있다. 더불어 그 맞은편에는 여러 국악공연 및 문화예술행사가 열리는 동리국악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근처에 세워진 고창판소리박물관과 판소리공원도 신재효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현재는 이러한 장소들을 연결하는 도로를 판소리길로 지정하고 관광지로 운영하는 중이다.참고로 판소리길 끝에는 고창읍성이 위치하고 있어 같이 둘러보기 좋다.
4. 기타
- 신재효 판소리 필사본인 고수 청계본의 완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판소리 판본은 모두 1940년대 이후에 정리된 것이라 하며 19세기 당시의 언어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 한다. #
[1]
현령공파 27세 재(在) 항렬.
[2]
현령공파 27세 재(在) 항렬.
[3]
남창(男唱)
[4]
아예 문하생으로 들어갔으며 결국 명창 자리에 오른다.
[5]
다만 판소리 창법은 성대에 특수한 결절을 생성하는 노래 방식이기 때문에, 성장기의 성대에 결절이 생기면 성장 후엔
목소리를 아예 잃게 된다. 심심찮게 TV에 나오는 판소리 영재들이 성장 후엔 왜 소리없이 사라지는지에 대한 이유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