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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5:39:04

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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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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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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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주시경
周時經 | Ju Si-gyeong
파일:독립운동가 주시경.jpg
출생 1876년 12월 22일[1]
황해도 봉산군 돈뫼방(錢山坊; 전산방) 무릉동[2]
(現 황해북도 은파군 광명로동자구[3])
사망 1914년 7월 27일 (향년 37세)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인 돌연사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 묘역-3호
본관 상주 주씨 (尙州 周氏)[4]
직업 언어학자, 교육자
학력 배재학당 (졸업)
흥화학교 (양지과 / 졸업)
정리사 (수물과 / 졸업)
별칭 아명(兒名)은 주상호(周相鎬)
자(字)는 경재(經宰)
호(號)는 한힌샘[5], 한흰메[6], 백천(白泉), 일백천(一白泉), 태백산(太白山), 학신(學愼)
별명으로는 주보따리[7]가 있다.
가족 아버지 주면석, 어머니 연안 이씨
배우자 김순봉[8]
슬하 3남 2녀
경력 국어 교사
종교 유교 ( 성리학) 개신교 ( 감리회) 대종교 개신교 ( 감리회)

1. 개요2. 생애3. 어록4. 기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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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국어학자. 20세기 초의 한국어 최고 권위자로서 현대 한국인이 사용하고 있는 현대 한글 표준화, 철자법, 어휘는 주시경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제자들이 이어받아 완성된 것이다.

2. 생애

1876년 12월 22일(음력 11월 7일)에 황해도 봉산군 돈뫼(전산)방 무릉동, 현 황해북도 은파군 광명로동자구에서 아버지 구암(龜岩) 주면석(周冕錫, 1843 ~ 1884. 8. 14)[9]과 어머니 연안 이씨(1846 ~ 1918. 10. 30)[10] 사이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둘째 큰아버지 주면진(周冕鎭, 1838 ~ 1913. 8. 9)[11]의 양자가 되었다. # 조부 수강(首岡) 주방렬(周方烈, 1798 ~ 1881. 6. 10)[12] 금포군수를 지냈다.

둘째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며 서울 상동으로 올라왔는데 그 때 한 살이 더 많던 전덕기를 만나 친한 사이가 되었다.[13][14] #

주시경이 국어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한문 강독법에 의문을 품은데서 비롯된다. 당시 한문 강독법은 한문 원문에 구결 조사나 어미를 붙여 그대로 음독하여 달달 외우게 한 뒤에야 우리나라말로 무슨 뜻인지 풀어 주는 방식이었다. 이를테면 ‘學而時習之,不亦說乎’ →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와 같은 식이었다. 주시경은 마지막 우리나라말 단계에서야 애들이 말귀를 알아듣는 것을 보고 한문과 우리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말의 중요성을 깨달아 국어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을 접하고 이때부터 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이때 본인이 근대화에 열린 사고를 가져 가족과 의절하며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나서서 머리를 깎았단 얘기가 있다.

< 독립신문>이 출간될 때 1896년 5월 독립신문사 내에 독립신문의 국문표기 통일을 위해 한국 최초의 국어 연구회인 '국문동식회'를 창립해 순한글로 교정보는 일을 했으며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다가 서재필이 떠난 후에는 < 제국신문>에 글을 싣거나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의 한국어 강사, 상동청년학원 강사로 취직해서 살았다. 그 와중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으나 높은 학구열로 흥화학교 양지과(量地科), 정리사[15] 수물학(數物學)을 3년 동안 공부하고 졸업했다. 양지과는 지리학, 수물학은 수학 분야를 의미한다. 엄청난 학구열로 여러 학교에서 강사를 맡게 되었는데 간호학교, 공옥학교, 명신학교, 숙명여학교, 서우학교의 교원이었으며 협성학교, 오성학교, 이화학당, 흥화학교, 기호학교, 융희학교, 중앙학교, 휘문의숙, 보성중학교, 사범강습소, 배재학당의 강사를 맡았다. 국어 교사만 했을 것 같지만 양지과와 수물학을 나왔기에 주산 지리에도 능했다. 책가방을 쓰지 않고 보따리에 책을 넣고 다녔는데 빡빡한 수업 일정 때문에 늘 바쁘게 뛰어다녔고 그로 인해서 보따리가 대차게 휘날리는 탓에 별명이 '주보따리'였다. [16]

내부 서기관(內部書記官)을 지내다가 1907년 학부에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가 창립되자 그해 7월 12일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국어 음운 연구와 국어 문법 등을 짜임새있게 정리하는 등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하였다. 호인 '한힌샘'을 비롯하여 문법 용어와 학술 용어들을 토박이말로 지으려고 처음으로 시도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문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주시경을 한자-周時經(두루 주, 때 시, 글 경)- 뜻(훈)으로 읽어 '두루때글'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1910년 국어에 문법서 「국어문법」을 저술하였다.

마지막 저술서 <말의 소리>는 1914년 발간되었으며 서구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론을 앞서 적용한 본격적인 문법서였는데 구조주의의 초기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국어학에서는 <말의 소리>에서 나오는 개념인 '고나'를 구조주의 언어학의 분절음 개념으로, '늣씨'를 형태소 개념과 동등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만큼 서구의 선진 이론들을 국어에 적용하려고 노력하였고 현대적 한국어 음운론 연구의 기틀을 다진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근세국어(17세기) 이후 음가를 잃은 아래아를 정서법에서 폐기하고 혹은 로 환원시키자는 주장을 최초로 한 것이 바로 <말의 소리>였기에 현대 남북한의 정서법에서도 의미있는 책이다.

그러나 <말의 소리>의 개념 체계 중 여전히 국어음운론 체계에서 좀비처럼 남아있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음소와 운소를 각각의 소(素)로 이해한 것이 <말의 소리> 당시의 최신 이론이었으나 언어학에서는 구조주의 중후반 이후 운소를 소가 아닌 자질로 이해한다. 그러나 현대 국어학에서는 여전히 운소 개념을 고수하고 있어 현대의 최신 언어학과의 괴리가 심하다. # 이것은 주시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주시경 정신을 새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지 못한 후학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말의 소리>의 논리 중 오늘날 국어학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주시경은 <말의 소리> 이전까지 형태 음소적 표기를 지향했으나 <말의 소리>에서 이를 번복한다. 즉, 초기 주시경 이론은 오늘날 사용되는 한국어 표기법과 같이 형태를 살려 쓰고 소리에 이끌려 쓰지 않는다. 예컨대, "이름이", "끝", "까닭" 이라고 쓰는 것이 바로 주시경 이론 초기의 정서법이다. 그러나 주시경은 <말의 소리>에서 소리에 이끌린 표기를 주장한다. 예컨대, "이르미", "끗", "가닥"으로 쓸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국어학계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이론이다.

1914년 7월 27일에 급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다가 사망하였다. 사인이 정확히 표기되지 않지만 대부분은 급체로 인해 사망했다고 알려졌다.[17] 37세라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의 요절이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국어학계는 아까운 인재를 보내야 했다. 제자인 한글학자 열운 장지영은 주시경 선생 50주기 추도식에서 통곡하며 스승의 요절을 애석해 했으며 장지영이 쓴 <주시경 회고록>은 1990년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가난했던[18] 주시경 이야기를 안타깝게 언급했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인 ( 새문밖 ) 수색 고택골(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가 1960년 한글학회의 주선으로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로 이장[19] 하였고 1981년 12월 12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 묘역으로 재이장하였다. 남양주에 묻혔을 때의 묘비는 서울 동대문구의 세종대왕기념관에 남아 있다.

3. 어록

말(言)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 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 주시경의 저서 <국어문전음학> 중에서 -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국의 문자를 사용한다.[20] [21]

4. 기타

5. 관련 문서



[1] 음력 11월 7일. [2] # [3] 황해도 봉산군 무릉동(무릉골) - 북한지역정보넷에서 인용. 대한민국 이북5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궁대리.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 북한지역정보넷 [4] 문민공파 17세손 시(時) 항렬이다. [5] '크고 하얀 샘'이라는 뜻의 순 한글 이름. [6] 태백산. [7] 시경 보따리. 주시경이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8] 金舜烽. 1880. 4. 27 ~ 1925. 8. 7. 경주 김씨 김명훈(金明勳)의 딸이다. [9] 족보상 이름은 주학원(周鶴苑). 자는 경서(卿瑞). [10] 이성수(李聖壽)의 딸이다. [11] 족보상 이름은 주학만(周鶴萬). 자는 서수(瑞壽). [12] 초명 주봉래(周鳳來). 자는 화보(化甫). [13] 그 때 당시 주시경은 12살 전덕기는 13살이었다. [14] 전덕기는 주시경 선생의 주 활동무대가 되는 상동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5] 3년제 전문학교. [16] 어린이용 위인전 등에선 이에 대한 일화도 추가되기도 한다. 어느 학생이 보따리 대신 사용하라며 가방을 선물하자, 주시경은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선 가방보다 이 보따리가 더 어울린다'라며 사양했다는 이야기. [17] 물론 급체하는 원인이 다양하다. 단순 배탈로 죽을 리는 없으니 심근경색이나 복막염으로 추정이 되나 일단 밝혀진 것이 없으니 추정으로 둔다. [18] 아기 때 허기를 견디다 못해 실신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던 것도 집안 형편 때문이었고, 사망했을 당시에도 굶주린 상태에서 밥을 허겁지겁 먹다 급체를 일으켰다는 설이 거론된다. [19] 오늘날 장현농협 뒤편에 있는 야산에 있었는데, 이 야산이 한글학회 소유의 산이었다고 한다. 최현배의 묘도 주시경의 묘 옆에 있었는데, 최현배의 묘는 2009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20] 문명 강대국이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청나라, 러시아 제국 같은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옳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같은 당시 열강이 자국의 문자를 쓴다고 보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그들의 문자는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시경이 살아생전 당시 존재했던 일본 제국 역시 중국에서 유래된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나라였다.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한자를 보조하기 위함이다. [21] 다만 영화 <말모이>에서 주시경의 모토처럼 등장한 이 대사의 역사적 근거는 없다. 1907년 출간된 장지연의 『대동문수(大東文粹)』에 '요즈음 세계의 열강들이 문자와 언어의 일치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 이것이다.' 라는 비슷한 문구가 등장하고, 동년도에 주시경의 『필상자국문언(必尙自國文言)』이 신문에 기고되기도 했지만, 주시경은 따로 자서전을 집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저러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시경이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국의 문자를 사용한다'고 깨달았다는 내용은 KBS의 2012년 기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며, 이후 타 사이트들에서 동일한 표현을 싣기 시작한 것이 확인된다. 이를 실제 주시경의 발언처럼 인용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22] 말년에 별세할 때까지 상동청년학원, 배재학교, 이화학교 등 개신교 계통 학교 교사로 활동했으며 장례식 또한 감리교 상동교회에서 거행됐다고 한다. # [23] 전덕기 목사 역시 주시경 선생처럼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였는데 나이도 비슷했고 1914년 한창 나이로 비슷하게 38세에 요절했다. [24] '언문'의 경우 훈민정음 언해본 등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비교적 중립적으로 훈민정음을 지칭하는 표현이었으나, 암클은 '암놈이나 쓰는 글', 아해클은 '아이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비하적 표현이다. [25] 다만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인 언어관으로서 규범이 언어생활을 규제하고 선도해야 한다는 규범주의이다. 기술주의적 관점에서 남북의 언어가 애초에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는 같은 스승을 둔 제자가 각각 남과 북에서 언중들을 영도/령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차이가 크지 않았던 서울말과 평양말을 중심으로 표준어/문화어가 발전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