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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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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훈민정음.png
나눔명조 옛한글 체로 쓴 '훈민져ᇰᅙᅳᆷ'

1. 개요2. 서문3. 관련 서적
3.1. 해례본3.2. 언해본3.3. 예의본
3.3.1. 실록본
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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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세종어제 훈민정음.jpg
1459년( 세조 5년)에 간행된 《 훈민정음언해
訓民正音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1443년 음력 12월(양력 1444년 1월)에 세종대왕이 만든 한국어의 표기 체계, 즉 오늘날의 한글을 창제 당시에 부른 이름이고, 또 하나는 1446년 9월[1]에 발간된 책 이름이다. 여기서는 후자, 즉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설명한다.

2. 서문

훈민정음 서문은 본래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를 당대의 한국어로 번역(언해)한 서문이 세조연간에 발행된 훈민정음 언해본에 기록되어 있다.
언어학 유튜버 향문천의 언해본 서문 낭독[2] 충남대학교 언어학과 김차균 교수의 언해본 서문 낭독[3]
파일:attachment/hunminjeongeum.jpg
해례본 원문
訓民正音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언해본 원문
{{{#!wiki style="font-family: 'NanumMyeongjo YetHangul', 'NanumBarunGothic YetHangul', 'Noto Sans CJK KR';"
솅〮조ᇰᅌᅥᆼ〮졩〮훈〮져ᇰ〮ᅙᅳ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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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ᇰᅌᅥᆼ져ᇰᅙᅳᆷ
나랏말ᄊᆞ미
듀ᇰ에달아
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셔ᇰ이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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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어
세종 어제[4] 훈민정음
나라의 말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5]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쉬이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3. 관련 서적

3.1. 해례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훈민정음 해례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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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때 간행한 최초의 원본과 동일한 훈민정음의 판본이다. 이에 '훈민정음 원본'이라고 불리기도 하나, 다만 현재 남아있어 대한민국의 국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훈민정음 간송본 역시 세종연간에 발행된 첫 판본으로 보기는 어렵기에, 역사학계에서는 '원본'이라고 부르지는 않고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해례(解例)란, 훈민정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문자 창제 과정을 종합해 기록하였다는 의미이다.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세조 때 간행된 아래의 언해본만 존재하였는데, 언해본에는 한글의 제작 원리를 기록한 부분이 누락되어 있어 일제강점기 까지만 해도 “한글 자모는 한옥 창살을 보고 만든 것”이라는 등 온갖 루머가 난무했다.[6]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한글 자음은 인체의 발음기관을 본뜬 것이고, 한글 모음은 천지인 삼재(三才)를 음양 오행의 원리에 따라 배치해 만들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흔히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훈민정음 원본은 한문 서적이다. 한글 창제 당시 한글은 문자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존재하던 한문으로 한글을 해설해야 했다.

원문과 해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3.2. 언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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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g.hani.co.kr/120045918840_20080117.jpg
파일:external/cfs12.blog.daum.net/4844cdcd017e4&filename=%EC%8A%A4%EC%BA%940001.jpg

한문으로 기록된 해례본을 훈민정음을 이용해 옮긴(언해, 諺解) 책. 현재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은 1459년( 세조 5년)에 발간된 《 월인석보》의 권두에 수록된 것이다. 세종대왕의 서문, 본문(예의) 부분이 수록되어 있고, 해례본에 있는 제자해(製字解)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한문(+현토)+언해'의 방식으로 쓰여 있는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나랏말싸미…'도 언해본에 훈민정음으로 수록된 서문의 첫 구절이다. 흔히 훈민정음의 모습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월인석보 외의 언해본으로 2종(박승빈 본, 일본 궁내청 소장본)이 더 현전하지만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다만 현대의 학자들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직후에도 훈민정음 언해본은 존재하였을 것이라 추측하여 왔다. 위 두 그림 중 아래 그림이 실제 《월인석보》에 실린 내용이고 원본의 전체를 보고 싶다면 여기로. 위의 그림은 창제 당시의 것으로 추측되는 모습을 국어사학회에서 디지털 기술로 재구성한 것이다. 관련 기사. 서울대 김주원 교수의 저서 《훈민정음》(2013)에도 관련 서술이 나온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일단 제목이 《훈민정음》과 《세종어제 훈민정음》으로 각각 다르다. 또한 아래의 《월인석보》에 실린 언해 부분[7]의 첫 네 줄은 같은 책 다른 대목의 언해 부분과 글자체나 글자 간격 등이 상당히 다르다. 전자가 뭔가 더 각진 글씨인 데다 글자를 욱여넣은 듯한 모습이며 여타 대목에서는 한 줄에 작은 글자 16자가 들어가지만 첫 네 행에서만은 20자까지 들어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세조 시대에 《월인석보》가 발간되었으므로 선대 왕 세종이 직접 지었다는 뜻인 '세종어제'를 추가하는 과정에서 글자 수가 늘어나 목판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즉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그냥 《훈민정음》이라는 제목을 단 채로 위 그림과 같이 가지런한 언해가 붙었을 것이지만 세조 시대에 발간된 《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에는 '세종어제'를 추가하면서 언해 부분에도 글자를 추가로 욱여넣었던 것. 사실 '세종' 등의 묘호는 임금이 죽은 뒤에야 붙었으므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쓰인 책에 '세종어제'라는 말이 쓰였을 리 만무하다.

2012년 10월 9일 한글날에 네이버에서 디지타이징 버전으로 무료 공개한 버전은 국어사학회에서 재구한 위 버전이 아닌 《월인석보》에 실린 모습인 아래 버전이다. 보러 가기

3.3. 예의본

해례(解例)와 예의(例義)가 모두 포함된 해례본과 달리 예의 부분만 들어 있는 것을 예의본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예의본은 단행본이 아니라, 《세종실록》과 《월인석보》에 실린 한글번역본인 언해본이 있다. 《예의본》은 1940년에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처음 발견되기 이전에 훈민정음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일차적 문헌이었다.

3.3.1. 실록본

《훈민정음》의 본문은 《세종실록》에도 수록되었다. 해례본에는 실려 있는 '해례'를 제외한 '세종 서문', '본문(예의)', '정인지 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실록본이라고 따로 칭하기도 한다.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6. 관련 문서



[1] 반포일 기준 1446년 9월 상한(10일) → 양력 환산 → 1446년 10월 9일 [2] 물론 현대 학자들의 재구음이므로 실제 발음이 이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래아를 /ʌ/, ㅟ를 /uj/로 발음하는 등 보다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나, 아직 전반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ㄹ의 발음을 일률적으로 /l/로 발음하는 등 여전히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유튜버 본인이 이에 대한 영상을 제작하였다. # [3] 이 또한 이렇게 소리를 낸 것 같다고 추측한 것이지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아래아를 /a/로 발음하고 ㅟ를 /wi/로 발음하는 등 최신 연구 결과와는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이 영상에서는 '달아'에서의 ㅇ을 음가가 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최근 언어학계에서는 ㄹ 뒤에서 분철 표기된 ㅇ이 /ɦ/ 또는 /ɣ/의 음가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 임금이 몸소 짓거나 만듦 [5] 참고로 이 부분의 의미는 현대의 '어리석다'가 가지는 부정적인 뉘앙스와는 거리가 있으며, 여기서 '어리석은/어린 백성'은 한자와 한문 교육을 받지 못한 '배우지 못한/불쌍한 백성'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6] 아직도 역사에 무지한 사람들이나 조선을 폄하하려는 혐한 성향 인사들이 그런 식의 주장을 하기도 한다. [7] 한 줄에 우리말 작은 글자로 두 행을 써 넣은 부분이다. [8] 이 와중에 최해산은 명 환관들에게 해를 입기까지 한다. [9] 드라마에서도 강채윤의 입을 통해서 그 실상이 나오는데 강채윤은 작중 광평대군에게 '윗분들이야 공부가 일이니 5만 자나 되는 한자를 외우지만, 동트기 전에 일어나 해지기 전까지 허리 한 번 못 펴고 일만 해야하는 백성들이 글자를 공부할 시간이 어딨냐' 며 반박하던 것이 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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