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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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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말 큰사전.jpg
우리말 큰사전
1. 개요2. 사건의 경과
2.1. 검거된 33인
3. 해방과 큰사전 출간4. 대중매체

1. 개요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중에서
일제는 한글 말살을 꾀해 각급 학교와 공식 모임에서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조선어 큰사전> 편찬작업을 하고 있던 조선어학회를 해체시키기 위하여 1942년 10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사건을 조작하여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사업에 협조한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조선어학회 수난의 발단은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기차 안에서 우리말로 대화하는 것을 경찰이 트집잡으면서 비롯되었다. 일제는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을 교육한 교사 정태진을 체포하였으며, 그가 관여하던 조선어학회가 ‘ 독립운동을 꾀했다’고 하여 33명의 조선어학회 회원을 체포하고 조선어학회를 해산시켰다.
독립기념관 공식 설명문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 事件)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일본 제국 조선어학회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판단해 관련 인사들을 집단으로 체포 및 투옥했던 사건이다. '한글학회 사건'[1] 또는 '한글학자 집단 체포사건' 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어학회가 해방 후 이름을 바꾼 한글학회에서는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국어사전 편찬 사업도 중단되었지만, 1945년 해방 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복역하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태진, 정인승 등이 풀려나면서 학회를 재건하였고,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중단되었던 국어사전 편찬 사업도 해방 후 재개되어 1957년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 사업이 완료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국어사전을 편찬했다.[2]

2. 사건의 경과

파일:조선어학회 회원들.jpg
조선어학회의 회원들
조선어학회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모종의 사건과 연루되어 1942년 9월 5일에 조선어학회 소속 한글학자인 정태진이 경찰의 취조를 받은 후 체포된 것이다. 그러나 정태진이 체포되기까지의 그 경위와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한 설에 의하면 함경남도 함흥에서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소속의 여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로 대화하자 이를 눈치챈 친일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한국명: 안정묵)'가 즉시 체포하였다. 박영옥은 일본 제국 경찰의 취조와 고문 끝에 조선어학회 소속 한글학자이자 서울에서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는 정태진이 그녀에게 민족정신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했다고 진술했다.

또 다른 설이 있다. 일본 유학생 박병업이 검문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집에 일본제국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조사하고 있을 때 한 경찰이 박병업의 조카 박영희의 일기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몇 장을 넘기자 “오늘은 학교에서 국어를 써서 혼이 났다.”고 적혀 있었다. 그 경찰이 이상하게 여기며 그때는 국어가 일본어였을 땐데 "왜 국어를 썼는데 혼이 났냐?"고 물으며 추궁을 시작하였다. 박영희는 "국어가 ‘조선어’인 줄 알고 그랬다"며 넘어가려 했지만 경찰의 고문과 추궁 끝에 조선어학회가 일본어를 배제하고 조선어를 몰래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참고로 이렇게 설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은 해방 후 이희승, 정인승, 김윤경 등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이 각각 이 사건에 대한 회고록을 투고했을 때 내용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와 영생고등보통학교의 교장을 지냈던 김상필은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모아 진상을 검토한 결과 이희승의 회고가 가장 사실과 가깝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그렇다고 다른 회고록을 완전히 부정할 근거를 수집할 여력이 다들 없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주장이 경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장신, 2016). 사건의 핵심이 되는 여학생의 이름이 '박영옥'인지 '박영희'인지 왔다갔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론적으로는 '박영희'가 맞다. 이희승이 당시 회고록을 쓸 때 관련 여학생의 이름을 '백영옥'이라는 가명으로 처리했는데 나중에 이를 고치는 과정에서 '박영옥'으로 잘못 고쳤고 이를 다른 사람들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체포된 정태진은 20여일간의 취조 끝에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단에서 여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했고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체라고 시인했다. 일본 경찰은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을 조장하는 단체라고 판단하고 1943년 4월까지 조선어학회에 관련된 총 33명의 한글학자들을 검거하였다. 학자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은 우리말 연구와 사전편찬에 신경을 쓴 것 외에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적이 없다고 변론하였는데 검거된 33명 중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거나 관련된 전적이 있는 14명이 치안유지법에 근거하여 '내란죄'를 죄명삼아 공판에 회부되었고 장현식은 무죄, 이 중 6명은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정태진은 만기복역 후 석방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이극로[3], 최현배[4], 이희승[5], 정인승[6] 4명만 남아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이윤재, 한징은 형무소 수감 중 옥사(獄死)하였으나 1945년 해방되면서 남은 학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2.1. 검거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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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aaa
권덕규 권승욱 김도연 김법린 김선기 김양수 김윤경 김종철 리극로 서민호 서승효
신윤국 안재홍 안호상 윤병호 이강래 이만규 이병기 이석린 이우식 이윤재 이은상
이인 이중화 이희승 장지영 장현식 정열모 정인섭 정인승 정태진 최현배 한징 }}}}}}}}}}}}


조선어학회 33인 목록

이 중 김도연, 김법린, 김양수, 이극로, 이우식, 이윤재, 이인, 이중화, 이희승, 장지영, 장현식, 정열모, 정인승, 정태진, 최현배, 한징 16명은 기소되었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권덕규 안호상은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체포를 면했다.

기소된 사람은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그와중에 이윤재와 한징이 형무소에서 옥사(獄死)하고[7] 장지영과 정열모는 공소 소멸로 석방되어 최종적으로 공판을 받은 사람은 12명이다.

공판 결과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과 정태진 각각 징역 2년, 김도연, 김법린, 김양수, 이중화, 이우식, 이인 각각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가 선고되었다.

참고 자료

3. 해방과 큰사전 출간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과 함께 투옥됐던 한글학자들은 석방되었다. 당시 수감생활이 대단히 혹독했기 때문에 석방될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고 한다. 당시 함흥형무소에서 학자들이 석방되는 모습을 목격한 연세대학교 이근엽 명예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 4명이 풀려날 때 3명은 주위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걸어 나왔고 나머지 1명은 아예 들것에 들려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

이들은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국어사전 출간을 재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사건 당시 압수된 후 행방불명이었던 초고 26,500여 장의 원고를 경성역( 서울역) 조선운송 창고에서 찾아냈다.[8] 경성고등법원에 항소를 내면서 증거물로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광복 3일 전인 8월 12일에 상고 기각 판결이 나면서 보관된 것.

되찾은 원고를 기초로 내용을 추가하고 수정한 끝에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1권을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하였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국어사전을 출판하게 된 이들의 감개가 담긴 서문은 지금 읽어도 뭉클해지는 명문. 우리말 큰사전 머리말 전문

우리말 큰사전은 표제어가 16만 4천 125개에 달하고 200자 원고지 2만 5천 900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당시 전국 8도의 순우리말 한자어, 외래어, 관용어, 전문어, 옛말, 고유명사까지 포괄한 첫 종합사전이다. 또 음소부분의 발음과 문맥에 따른 사용처, 어휘구조까지 명기하여 학술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9] 지금은 한글학회 홈페이지에서 전자책 형태의 스캔본으로 볼 수 있다. #

1949년 조선어학회가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조선말 큰사전》에서 《우리말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3권까지 나왔으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큰사전의 출판은 다시 중단되었다. 전쟁통에 원고를 땅에 파묻고 피난을 가는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발간이 시작되었으며, 유네스코 및 록펠러 재단으로부터의 지원이 막히기도 하는 등[10]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57년 한글날에 6권으로 마무리되었다. 완간까지 무려 28년이 걸린 인고의 결과물이었다.

이희승은 사건 당시의 수감 생활을 소재로 한 칠불당(七佛堂)이란 제목의 수필을 썼다. 이희승 특유의 유머 감각이 잘 살아 있는 수필로 칠불당이란 필자인 이희승 본인을 포함한 감방 수감자 7명을 부처님에 비유한 것이다. 처참한 수감 생활을 유머 있게 표현함으로서 반어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제에게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해방 이후 독립유공자 건국훈장을 수여받거나 추서받았다.(광복 후 월북하여 북한에 부역한 이극로, 이만규, 정열모 제외) 즉 조선어학회 사건도 명실상부 국가 공인 독립운동이다.

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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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작중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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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어학회는 광복 이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즉 현재의 한글학회는 조선어학회의 후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조직 그 자체인 것. [2] 한편 북한에서는 조선어학회와 그 후신인 한글학회의 국어사전과는 별개로 김두봉 등의 주도로 《조선말사전》이 편찬되었다. [3] 「朝鮮語學會事件 日帝最終判決文」“피고인 李克魯는 전기 제1회 세계 약소민족대회에 출석 하여 下關條約에의 하여 보증된 조선독립의 실행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것, 조선에서 총독정치의 즉시 중지 上海 大韓民國臨時政府를 승인할 것 등 3항목에 걸치는 議案을 제출하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원조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약소민족 대표자간에서도 조선의 존재를 무시당한 것으로 朝鮮의 독립에는 外 力 의존의 근본관념을 시정하여 朝鮮民族의 문화와 경제력을 양성 향상시킴과 동시에 민족의식을 환기 앙양하여 독립의 실력을 양성한 후에 정세에 따라 의거의 방법으로 독립을 실현시켜야 한다고 하여 그 문화운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이 語文運動이다”라고 하였다.” [4] 「朝鮮語學會事件 日帝最終判決文」 “崔鉉培는 (중략) 1926년「民族更生의 길」이라는 민족주의적 논문을『東亞日報』지상에 연재하고 1930년 이것을 저서로 발간했는데 이 저서에서 “조선민족을 갱생시키려면 먼저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문화인 동지들에게 호소하여 일대 민족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조선민족은 그 갱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다. 조선민족은 3·1運動에의 해서 그 생기를 진기시켰다”라고 하여 3·1運動을 격찬하고 또한 “우리말은 우리민족의 정신적 산물의 종합체이다. 우리말을 듣는 데에 朝鮮心이 있고 우리말을 전하는데에 朝鮮魂이 있다”고 하여 어문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1927년 경부터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자주 그 집회에 참가한 까닭으로 1938년 9월 京城地方法院검사국에서 治安維持法 위반에 의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京城保護觀察所의 保 護觀察處分에 처해졌는데도 不拘하고 여전히 조선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던 자이다.” [5] 「朝鮮語學會事件 日帝最終判決」“李照昇은 보통학교 졸업 후 1925년 4월 29일 京城帝國大學 예과에 입학하고 1930년 3월 동대학 법문학부 朝鮮 語學 및 朝鮮文學科를 졸업 동년 4월 관립 경성사범학교 교유가 되었다가 1932년 3월 이것을 사임하고 그후 1935년 4월 이래 梨花女子專門學校 교수가 되어 朝鮮語·朝鮮文學·漢文 等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조선독립만세 소요사건 당시부터 자극을 받고 민족의식을 갖게 되어 조선역사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朝鮮統治에 대한 불만을 갖고 京城帝國大學 재학 당시부터 朝鮮의 독립을 열망해 온 자이다.” [6] 「朝鮮語學會事件 日帝最終判決文」“鄭寅承은 보통학교 졸업 후 專門學校入學資格試驗에 합격하고 1925년 3월 延禧專門學校를 졸업하고 약 10년간 全北 高敞高等普通學校 敎員으로 있다가 목장을 경영하고 있던 자로 1919년 조선독립만세 소요사건의 자극을 받아 조선의 독립을 희망해 온 자이다.” [7] 이윤재 선생의 유골은 아들이 수습하였다. [8] CJ대한통운의 전신 중 하나이며, 2019년 CJ그룹에서도 CJ대한통운 80년 사사를 기념하여 홍보한 적이 있다. # [9] 사전 편찬위원들은 수 년에 걸쳐 어휘를 모았는데 이극로, 이윤재, 김선기, 이용기, 한징 등이 순수한 조선어를 맡았고 한문 계통의 어휘를 각각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재정 문제로 중단되기도 하고 사전 편찬위원들은 생업을 위해 신문기자 등으로 투잡을 뛰는 등 안타까운 일화들이 많다. 종로경찰서의 탄압은 덤. 조선어학회 사건 이전에도 조선어학회는 주요 구성원 중에 수양동우회 사건, 흥업구락부, 대동단 사건 연루자들이 많아 늘 요시찰 대상이었다. [10] 한글학회가 이승만 정권의 한글 간소화 훈령에 반대했기 때문에 당한 괘씸죄(…)였다. 우습게도 이 간소화 훈령의 계기도 한글학회와 조율했다던가 또는 다른 단체에서 한국어의 교정을 목표로 제시한 안 따위가 아니라 순전히 이승만 대통령 본인이 요즘말을 쓰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 우리말 큰사전과 한글학회가 겪어온 갖은 고초를 생각해 보았을 때 참으로 말도 안되는 처사였다. 이승만 본인이 사용하는 구한말 역시 큰사전 안에 자세히 기록되고 정립되어 있었음을 생각하면 더욱이. 1955년에 결국 이승만이 한발짝 물러서면서 다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956년이 제3대 대통령으로 재당선된 년도임을 고려하였을 때, 권력이 뚜렷했던 시기에 간소화를 추진했다면 영영 지원을 못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1] 일본어 강요에서 독일어 강요로 바뀐 듯 하다. 실제로 나치는 룩셈부르크를 점령한 후 프랑스계 주민들에게 프랑스어 사용을 금지하고 독일식 이름으로 바꾸라고 강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