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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2:12:28

이강래(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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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운동가 이강래.jpg
출생 1891년 11월 16일
충청도 충주목
(현 충청북도 충주시) #
사망 1967년 2월 19일 (향년 68세)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립묘지
본관 광주 이씨
화여(和汝)
추정(秋汀)
학력 관립공업전습소 (중퇴)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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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언어학자이다.

2. 생애

이강래는 1891년 11월 16일 한성부 서부 인달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성부 필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 본적을 두었으며, 누상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에 살기도 했다.

그는 1910년 관립공업전습소 도기과를 중퇴하고 1911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 그후 1923년까지 문화운동을 통한 민족의 언어와 글을 수호하기 위하여 중국 동삼성· 연해주· 일본 등을 순회하며 해외동포에게 한글 순회교육을 실시했으며, 1927년 12월 20일 조선어연구회에 참여하여 1933년부터 1934년까지는 황해도 신천 안악 등지를 순회하며 한글강연회와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또 개성 정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송도고등보통학교 등 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한글 계몽에 힘쓰고 방언을 수집하는 등 한글의 문법연구와 보급에도 힘썼다.

1932년에는 《한글》 창간호 발간에 참여하였고, 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조선어 강습회 강사를 역임했다. 1935년 1월 1일 표준어사정위원(標準語査定委員)으로 참가하여 3년여간의 표준어사정을 통해 한글맞춤법통일안을 확정하는데 힘썼다.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37년 신흥우 등이 조직한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후 1938년 9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42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해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게 되자 간사(幹事)로 선임되어 모든 준비와 실무를 추진하였는데, 사전 완성단계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같은 해 10월 21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여간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다가 1943년 9월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 후에는 배화여자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에서 각각 교장 및 교감을 지내는 등 교원생활을 지속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1956년에는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로부터 교육 공로 표창을 수여받았고, 1967년 2월 19일 별세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