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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9:49:05

광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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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光州) 이씨라고 불리기도 하는 광산(光山) 이씨에 대한 내용은 광산 이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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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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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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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colbgcolor=#fff,#191919> 경기도 광주시
시조 이자성 (李自成)
중시조 이당 (李唐)
집성촌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만선리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무갑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매원민속마을)[1]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신당리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삼신리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해리면 사반리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
황해도 신계군 마서면 양곡리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당목동
인구 181,377명(2015년) | 국내 53위
1. 개요2. 역사
2.1. 조선 이전2.2. 조선 시대
3. 분파4. 특이사항5. 인물
5.1. 전근대5.2. 근현대

[clearfix]

1. 개요

경기도 광주시(廣州市)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는 신라 내물왕 시절에 내사령을 지냈다고 전해지는 이자성(李自成)이며 중시조는 고려 말에 국자감 생원시에 합격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지낸 이당(李唐)이다. 그러나 광주이씨 계파 간에 시조에 대한 의견이 다른데, 석탄공파(石灘公派), 암탄공파, 율정공파는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고 있다. 광주이씨 대동보에는 이당 이전의 계보도 소개되어 있다.

광주 이씨의 광주는 경기도 광주시(廣州市)이고, 광주광역시를 본으로 하는 이씨는 광산 이씨(光山 李氏)다.

2. 역사

2.1. 조선 이전

광주이씨족보서는 그 조상들이 남북국시대 신라의 칠원성(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2]을 근거지로 삼았던 호족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을 시조로 하여 내려온 칠원성은 신라의 모든 성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도 마의태자만을 왕으로 섬길 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 하여 끝까지 항거하였으므로 크게 노한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친히 성을 함락시킨 뒤 칠원성에서 이씨 성을 가진 일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회안(현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3] 지방 관헌들에게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광주의 노비들 중에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다고 주위에 알려지면서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어 고려 말경에 이르러서는 더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들 중에 이당(唐)이 고을 수령의 아전을 살고 있었는데 그 수령의 딸과 혼인을 맺어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은 자손들이 번창하니, 한음 이덕형을 비롯하여 광주 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당의 후손들이다.

이당의 다섯 아들 이인령, 이원령(이집), 이희령, 이자령, 이천령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아전의 자식으로 오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다섯 아들 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으로 고려 말인 1355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4]이 되었다.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광주 이씨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의 8대조 되는 위의 둔촌 이집이므로 대부분의 광주 이씨들은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 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으로 칭관하다가, 940년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2.2. 조선 시대

조선 시대 때는 몰락과 중흥을 반복하다시피 했다. 조선 초기때만 하더라도 이극돈, 이극균, 이장손 등으로 대표되며 가장 잘나가는 명문가 중 하나였는데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지금 가문의 융성함으론 광주 이씨를 따라갈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5] 굳이 덧붙여 말하자면 왕이 집안의 기운을 부러워할 정도였다. 예종이 이인손의 묘를 이장시키고 세종대왕의 묘로 삼는다든가,[6] 성종이 아들을 낳을 때 이극배의 집에서 낳게 한다든가 할 정도였다. 이극배는 연산군 초기에 영의정으로서 섭정승을 맡기도 했다. 19살 된 연산군이 하도 똑부러져서[7] 3개월만 맡고 내려왔다고. 그러나 이극균이 왕의 횡음을 바로잡으려고 쓴소리를 하다가 그 조카인 이세좌와 함께 갑자사화 때 처형됨으로써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세좌의 죄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갔다는 죄 아닌 죄.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며 그야말로 싹 다 쓸려나갔다. 그 후 이준경[8], 이덕형 대에 들어 다시 부활했지만 광해군 대의 권신 이이첨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다시 한번 쓸려나갔다. 이이첨 이후에는 큰 몰락도 중흥도 없이 그냥 무난하고 조용하게 지낸 듯. 현종 대엔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도빈[9]을 배출하기도 하였으며 그 아들인 우항 역시 경종대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다만 이우항은 신임사화 때 무고하게 죽었다. 숙종 대엔 대사헌을 지낸 이원록과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원정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들 경북 칠곡군에 위치한 광주이씨 칠곡파 매원마을은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남인 양반 집성촌이었다.[10]] 그 아들인 이담명은 사노친곡십이장이란 시조로 유명한데 이는 갑술옥사로 아버지와 함께 유배당했을 때 쓴 것. 영정조대의 인물로는 영조대의 청백리 이하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의관을 부르거나 왕세손과 만나게 해주는 등의 일을 한 이광현, 정조대의 실학자 이기양 등이 있다.

조선 시대 광주이씨는 문묘 종사 대현은 배출하지 못했지만 종묘 배향공신 1명을 배출했다. 이밖에 상신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등도 나왔다. 총 문과 급제자는 188명에 달했으며[11], 무과 급제자 또한 124명이 있다.[12] 생원진사시, 역과, 음양과, 율과, 의과 등까지 모두 합쳐 총 71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의 유명인물은 많지 않은데, 을사늑약 후 활약했던 의병장 이백래, 이동하,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항쟁을 하던 이수택이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종훈이 있다. 석공예가 이순석[13] 등도 있다.

3. 분파

4. 특이사항

5. 인물


5.1. 전근대

5.2. 근현대


[1] 2023년 6월 15일 마을 단위로는 전국 최초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민속마을이다. [2] 신라 행정구역 기준 삽량주 칠토현, 개칭명 기준으론 양주 칠제현. [3] 설화 속에 나타나는 마한의 소국인 회안국(淮安國)에서 유래했는데, 거꾸로 ‘회안’이라는 지명에서 이 회안국 설화가 유래했을 수도 있다. [4] 이곳은 역사적으로는 광주에 포함되었다. [5] 當今門閥之盛 廣州李氏爲最 [6]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이인손의 묘를 파보니 거기에는 연과 함께 편지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편지에는 연을 하늘 높이 날려 줄을 끊고 연이 떨어진 자리에 자기 묘를 이장하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고. 죽기 전에 이미 자기 묘를 왕에게 뺏길 것을 알았던 것. 이 일화는 여주 연하리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7] 연산군 집권 10년 가량은 나름 상당한 치세였다. 문제는 그 이후. [8] 이세좌의 손자이다. [9] 헨드릭 하멜 일행이 귀양왔을 때 공정하게 대우해 줘서 하멜도 조선에서 보기 드문 좋은 사또라고 칭찬하는 기록을 하멜 표류기에 남겼다. [10] 이 칠곡을 비롯하여 TK 출신 광주이씨 중 잘 알려진 인물들로 서울대학교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수성, 개그맨 이윤석, 정치인 이준석 등이 있다. [11] 두산백과 기준인데 191명 맞는 듯하다. 196명이라는 말도, 197명이라는 말도 있다!(...) [12] 이쪽도 246명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쪽은 사실이 아닌 듯. [13] 1905 ~ 1986. 어린이대공원의 유관순 열사, 국회의사당의 해태를 조각했다. 공예쪽에선 유명한 인물. [14] 셋째 딸은 딸들 중 가장 예쁘고 귀엽다는 이상한 속설이 있다. 거기서 나온 게 '셋째 딸은 얼굴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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