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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0:53:36

배(성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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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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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be673>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


신라 6성 {{{#!wiki style="margin: -15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230><tablebordercolor=#dcffff> 慶州 裵氏 (月城 裵氏)
경주 배씨 (월성 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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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0> 관향 경상북도 경주시 성주군
비조 지타(祗陀)
도시조 배현경(裴玄慶)
중시조 배원룡(裵元龍)
배천룡(裵天龍)
배운룡(裵雲龍)
배오룡(裵五龍)
배맹달(裵孟達)
주요 본관 경주 배씨
성산 배씨(성주 배씨)
분성 배씨(김해 배씨)
달성 배씨(대구 배씨)
흥해 배씨
곤산 배씨(곤양 배씨)
협계 배씨
인구 400,641명(2015년)
1. 개요2. 유래3. 본관
3.1. 경주 배씨 3.2. 성주(성산) 배씨3.3. 분성(김해) 배씨 3.4. 달성(대구) 배씨3.5. 흥해 배씨 3.6. 곤양(곤산) 배씨3.7. 협계 배씨3.8. 그 외
4. 특징5. 배(裵)씨 인물
5.1. 중요 인물5.2. 실존 인물5.3. 가상 인물5.4. 가명(예명)
6. 다른 나라의 배(성씨)

[clearfix]

1. 개요

<colbgcolor=#dddddd,#222> 로마자 표기
RR식 표기 Bai, Bea
MR식 표기 Bae
통용 표기 Bae
우리나라 배(裵)씨는 문헌에 총 59본관[1]이 있으며, 성씨 인구순위는 26위로 2015년 기준 400,641명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배씨 대종회 기록에 의하면 배씨의 뿌리는 2천여 년 전 신라 건국 초기의 시대로 올라간다. 배씨는 한국의 대표 성씨로 일찍이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다. 고을 이름 비(非) 인명용 중국한자는 裴로 쓴다. 설문해자는 배(裵)는 긴 옷을 입은 모습이다. 의(衣)로 구성되고 비(非→배)가 소리라고 한다.

한국 배씨(裵氏)의 기원은 크게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신라 시대 사성 받은 배씨이고 하나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사성받은 배씨이다.

진한 개국 설화에 의하면, 사로 6촌(斯盧六村) 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촌장 지타(祗陀, 只他)는 다른 6부 촌장들과 함께 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였다. 32년 신라 유리왕은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가리부(加利部)를 한지부(漢祗部)로 고치고 배(裵)씨 성을 사성하였다. 정사(正史)에 처음 등장하는 배씨는 신라 성덕왕 때의 상대등(上大等) 배부(裴賦)[2]이며, 희강왕 때의 아찬(阿飡) 배훤백(裵萱伯)의 기록과, 정강왕 때의 현령(縣令) 배영숭(裵零崇)의 사적이 확인되며 현재는 계대를 고증할 보첩이 실전되어 각 본관마다 시조를 달리하고 있다.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의 처음 이름은 백옥(白玉) 또는 백옥삼(白玉衫)으로 성씨가 없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배씨 성을 사성받았다.

경주 배씨(慶州裵氏) 시조 배현경(裵玄慶)의 본명은 백옥삼(白玉衫)이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오르고 대광(大匡)을 역임했으며, 배씨 성을 사성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은우(殷祐) 이후의 후사가 전하지 않아, 조선시대의 배충과(裵忠果)를 시조로 삼는다. 배충과는 의술(醫術)에 능하여 조선 중종 때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에 제수되었으며, 경주처사(慶州處士)의 호(號)가 내려졌다.

한국의 배씨는 조선 중기부터 裵字를 사용해 오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한자 裴字를 사용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고래의 자전에서 "裵"字가 本來의 글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중국의 배(裴, 병음 Pei)씨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인물 백익(伯益)의 후예로 영성(嬴姓) 계통이며 비자(非子)의 12대손인 진환공(秦桓公)의 아들(子) 후자침(后子鍼)을 시조로 삼는다.

베트남에도 배(Bùi뿌이)씨가 있는데 인구 순위상 우위에 있다.

2. 유래

시조는 신라 초의 6부 촌장 중의 한 분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 지타(祗沱)[3]이다. 삼국사기에는 배씨 득성조(得姓祖)인 지타에 관련된 기록이 전하지만, 지타 이후 기록이 실전되어,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배현경의 현손인 가락군(駕洛君) 배사혁(裵斯革)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배원룡(裵元龍)은 분성 배씨(盆城 裵氏)[4], 둘째 배천룡(裵天龍)은 성산 배씨(星山 裵氏)[5], 셋째 배운룡(裵雲龍)은 달성 배씨(達城 裵氏)[6], 넷째 배오룡(裵五龍)은 흥해 배씨(興海 裵氏)로 각각 분적하였고, 달성 배씨에서 곤산 배씨(昆山 裵氏)[7]가, 흥해 배씨에서 협계 배씨(俠溪 裵氏)가 분적한 것으로 문헌에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시조 지타(祗沱)는 신라 6부 중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으로서 6부의 촌장들과 함께 혁거세를 추대한 신라 개국 원훈이다. 서기 32년 신라 유리왕은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가리부(加利部)를 한지부(漢祗部)로 고치고 배(裵)씨 성을 사성하였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개국무열공(開國武烈公) 배현경(裵玄慶) 고려 개국공신으로서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게 하였다. 태조(고려) 왕건 즉위 후 1등공신이 되었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배현경(裵玄慶)의 초명은 백옥삼(白玉衫, 白玉三)으로,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배(裵)씨 성을 사성받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개국 초기부터 측근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새 왕조를 수립하는 데 공을 세운 세력에게 성을 하사하게 했다.[8]

성산백(星山伯) 정절공(貞節公) 배극렴(裴克廉)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朝鮮)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9] 1392년 이성계의 혁명을 도와 개국공신 1등에 오르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되었다. 이처럼 배씨는 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시작 때마다 개국 공신을 내어 가문의 번영을 이룬 특색이 있다.

3. 본관

17세기전,우리나라 배씨의 본관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122개여의 본관이었다.역사와 함께 합병을 거쳐, 현재는 ,분성(盆城), 성산(星山), 달성(達城), 흥해(興海),성주복야공(星州僕射公),경주처사공(慶州處士公),화순(和順),함흥(咸興),남해(南海),협계(俠溪),등의 59개의 본관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모든 배씨는 시조(始祖)인 문양(文讓)공 지타의 후손이고, 무열(武烈)공 배현경(玄慶)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있다.
배씨는 분성(盆城:金海), 성산․성주(星山․星州), 달성(達成), 흥해(興海), 곤산(昆山) 5파 외에 경주처사공파, 성산복야공파, 화순진사공파 등으로 분파되며,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호적상 본관은 분성, 성산성주, 달성, 흥해, 곤산이 대부분이나 그 외 감해, 개성, 경남, 고령, 고양, 금성, 나주, 남양, 남원, 남해, 대구, 밀양, 상주, 서산, 선산, 수원, 안동, 온양, 의성, 전주, 정주, 진주, 창령, 청산, 청주, 평산, 풍산, 풍성, 해주, 협계, 화순 등 59여개의 본관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배씨는 시조인 문양공 지타와 중시조인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으로서 분파 ․ 분적(分籍)되었다.
<rowcolor=#dcffff> 17세기전, 우리나라 배씨의 본관
분성(盆城) 성산(星山) 달성(達城) 흥해(興海) 곤산(昆山) 경주(慶州)
화순(和順) 함흥(咸興) 협계(俠溪) 남해(南海) 경산(京山) 개성(開城)
광주(廣州) 여흥(驪興) 천녕(川寧) 한양(漢陽) 파평(坡平) 수원(水原)
남양(南陽) 정주(貞州) 이천(利川) 인천(仁川) 장단(長端) 죽산(竹山)
안산(安山) 삭녕(朔寧) 가평(加平) 양천(陽川) 과천(果川) 충주(忠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용천(龍川) 궁경(躬耕) 청풍(淸風) 단양(丹陽)
서천(舒川) 대흥(大興) 덕산(德山) 은진(恩津) 채운(彩雲) 연기(燕岐)
보은(報恩) 석성(石城) 비인(庇仁) 남포(藍浦) 진천(鎭川) 결성(結城)
신창(新昌) 전주(全州) 우주(紆州) 이성(伊城) 경명(景明) 남원(南原)
순천(順天) 여산(礪山) 장성(長城) 원율(原栗) 고부(古阜) 영암(靈巖)
순창(淳昌) 부산(富山) 임회(臨淮) 옥구(沃構) 고산(高山) 운제(雲梯)
장계(長溪) 이방(梨方) 강진(康津) 구레(求禮) 흥양(興陽) 해남(海南)
안동(安東) 풍산(豊山) 상주(尙州) 진주(晉州) 창원(昌原) 녕해(寧海)
밀양(密陽) 선산(善山) 순흥(順興) 초계(草溪) 영천(永川) 함안(咸安)
고성(固城) 개녕(開寧) 고령(高靈) 령산(靈山) 창녕(昌寧) 안음(安陰)
단성(丹城) 강릉(江陵) 철원(鐵原) 평해(平海) 양구(楊口) 해주(海州)
연안(延安) 평산(平山) 서흥(瑞興) 곡산(谷山) 백천(白川) 신천(信川)
송화(松禾) 토산(兎山) 덕원(德源) 평양(平壤) 정주(定州) 선천(宣川)
철산(鐵山) 희천(熙川) 강동(江東) 서산(西山) 석계(石溪) 대동(大同)
남안(南安) 단계(丹溪) 용산(龍山) 대동(大東) 하암(河巖)
<rowcolor=#dcffff> 분성파(盆城派)
분성파는 시조인 문양공 지타, 중시조인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인 배원룡(元龍)이 고려 우왕조에 계림부윤(鷄林府尹), 병부상서겸도원수(兵部尙書兼都元帥)를 지내고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수관조인 배원룡(元龍)을 1세(世)로 하여 분성(盆城:김해의 옛지명)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온다.분성파는 크게 분성군의 증손들인 구연공(龜淵公) 배정비(廷斐),진사공(進士公) 배정미(廷미), 진사공(進士公) 배정현(廷顯), 목사공(牧使公) 배수(守), 의 후손들이 각각 파(派)를 형성하여 계세(系世)하고있다.
※구연공(龜淵公) 배정비(廷斐)
고성군수공(高城郡守公) 차자(次子) 배황(晃)파
낙원재공(樂園齋公) 자(子) 배육(육)파
좌랑공(佐郞公) 자(子) 배인(寅)파
훈도공(訓導公) 자(子) 배곤(袞)파
진사공(進士公) 배정미(廷미) 후
※이조참판공(吏曹參判公) 배맹후(孟厚)파
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자(子) 배세적(世績)파
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차자(次子)배세집(世緝)파
오수찰방공(鰲樹察訪公) 배숙후(叔厚)파
선산도호부사공(善山都護府使公) 배계후(季厚)파
현감윤상(縣監允祥)공 장증손 배사관(士寬)파
현감윤상(縣監允祥)공 차증손 배담(湛)파
※진사공(進士公) 배정현(廷顯)
제주목사공(濟州牧使公) 배극수(克壽)파
애은공(厓隱公) 배진손(晉孫)파
율봉찰방공(栗峰察訪公) 배경장(慶章)파
현감공(縣監公) 배만기(萬期)파
※해주목사(海州牧使) 배수(守)
노은공(老隱公)장손(長孫) 배일동(一仝)파
노은공(老隱公)차손(次孫) 배이동(二仝)파
<rowcolor=#dcffff> 성산파(星山派)
성산파는 시조인 문양공 지타, 중시조인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인 배인경(仁慶)이 한림학사(翰林學士),보문각직학사(普文閣直學士)를 거쳐,고려 충숙왕때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흥안:성산의 옛지명)에 책봉됨에, 관향을 성산(星山)으로 삼게되었으며,배인경(仁慶)의 고조부인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璧上功臣) 배위준(位俊)을 1세(世)로하여 세계를 잇고있다. 특히 성산파는 부원군의 7세손인 정절공(貞節公) 배극렴(克廉)은 조선개국원훈이되어, 시조공의 신라개국원훈,중시조 무열공의 고려개국원훈을 이어,삼조(三朝)에 원훈으로, 배문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칭송 받게 되었다.성산파는 수관조인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배인경(仁慶)의 아들 배문적(文迪)과 배무적(武迪) 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양 맥을 이루어 번성 분파하였다.
참봉공(參奉公) 배게(게. 13세) 참봉공(酉山)파
생원공(生員公) 배탄(坦. 13세) 생원공파
매곡공(梅谷公) 배도(도. 13세) 매곡공파
산음현감(山蔭縣監) 배철보(哲輔.12세) 산음공파
찰방공(察訪公) 배선보(善輔.12세) 찰방공파
진사공(進士公) 배윤순(允詢.11세) 진사공파
직장공(直長公) 배윤침(允침.11세) 직장공파
참판공(參判公) 배윤언(允諺.11세) 참판공파
직제학공(直提學公) 배윤(閏.10세) 직제학공파
안렴사공(按廉使公) 배구(矩.9세) 안렴사공파
서암공(書巖公) 배덕문(德文.16세) 서암공파
군수공(郡守公) 배영성(永成.10세) 군수공파
녹야당공(綠野堂公) 배유(裕.9세) 녹야당공파
낙천공(洛川公) 배신(紳.12세) 낙천공파
정절공(貞節公) 배극렴(克廉.11세) 정절공파
미은공(薇隱公) 배극명(克明.11세) 미은공파
<rowcolor=#dcffff> 달성파(達城派)
달성파는 시조인 문양공  지타,중시조인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인 배운룡(雲龍)이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내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달성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있다.특히 달성파는 달성군의 8세손인 밀직부사(密直副使) 배정지(廷芝)의 후손들이 여러파로 나누어졌다.
회은공(晦隱公) 배문우(文祐. 11세) 회은공파
고부군(古阜君) 배인경(仁敬. 12세) 고부군파
판서공(判書公) 배균(均.11세) 판서공파
청정공(淸靖公) 배을서(乙瑞.11세) 청정공파
병판공(兵判公) 배경덕(敬德.11세) 병판공파
직제학공(直提學公) 배을보(乙甫.11세) 직제학공파
곤산군(昆山君) 배맹달(孟達.13세) 곤산군파[10]
문하사(門下事) 배광달(광달. 10세) 문하사공파
판도판서(版圖判書) 배광혁(光赫.10세) 판서공파
진사공(進士公) 배광완(光浣.10세) 진사공파
중랑장공(中郞將公) 배광전(光佺.10세) 중랑장공파
숭록공(崇祿公) 배광필(光弼.10세) 숭록공파
도원수(都元帥) 배정란(廷蘭.8세) 도원수공파
만헌공(晩軒公) 배윤우(潤祐.후손) 만헌공파
<rowcolor=#dcffff> 흥해파(興海派)
흥해파는 시조인 문양공 지타, 중시조인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인 배전(詮)이 고려 충혜왕조(忠惠王朝)에 삼중대광도첨의평리(三重大匡都僉議評理)에 올랏고 충숙왕 8년에 흥해군(興海君)에 봉 해짐으로 후손들이 흥해(興海)를 관향으로 삼고, 군의 5대조인 검교장군(檢校將軍) 배경분(景分)을 1세(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었으며,그 후손들이 여러파로 분파되어 오늘에 이르고있다.
직제학공(直提學公) 배상도(尙度. 7세) 직제학공파
백죽당공(栢竹堂公) 배상지(尙志. 7세) 백죽당공파[11]
지평공(持平公) 배권(權. 8세) 지평공파
관찰사(觀察使) 배환(桓. 8세) 관찰사공파
감찰공(監察公) 배남(楠. 8세) 감찰공파
정랑공(正郞公) 배강(강. 8세) 정랑공파
<rowcolor=#dcffff> 성주복야공(星州僕射公)
성주복야공파는 시조인 문양공 지타, 중시조인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인 배영찬(英贊)이 고려조에 중대광상서성좌복야(重大匡尙書省左僕射)에 올랏고, 공을 1세(世)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있다.
<rowcolor=#dcffff> 경주처사공(慶州處士公)
경주처사공파는 시조인 문양공 지타, 중시조인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인 배충과(忠果)를 1세(世)로 세계를 이어오고있다. 공은 자(字)는 사문(士文)으로 학문이 깊고, 의술(醫術)에 능하였고,중종조에 의서습독관에 제수되어 처사(處士)의 호를 받았다.
<rowcolor=#dcffff> 남해감사공(南海監司公)
남해감사공파는 시조인 문양공 지타, 중시조인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인 배순(循)을 1세(世)로 세계를 이어오고있다.남해감사공파는 500년을 넘게 전라북도 부안에 정착하였고,파조인 배순(循)의 손자인 배수의(守義)와 배종의(從義)형제가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창의하여 공을 세우는 등 자랑스런 가풍을 지켜왔다.
<rowcolor=#dcffff> 화순진사공(和順進士公)
화순진사공파는 시조인 문양공 지타, 중시조인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인 배련(練)(고려조 국자감진사)을 1세(世)로 세계를 이어오고있다.
<rowcolor=#dcffff> 함흥교서공(咸興校書公)
함흥교서공파는 시조인 문양공 지타, 중시조인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인 배덕수(德秀)(조선조 교서관박사)를 1세(世)로 세계를 이어오고있다.
<rowcolor=#dcffff> 협계합문사인공(俠溪閤門舍人公)
협계(俠溪)는 황해도 신계군(新溪郡)에 있던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수곡현성이다.관향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고려조에 합문사인을 지낸 배진(縉)을 파조로 삼고있다.

3.1. 경주 배씨[12]

<colbgcolor=#000080><colcolor=#dcffff> 집성촌 경기도 성남시
경기도 평택시
경기도 안성시
인천광역시 강화군
경상북도 경주시
서울특별시
강원도 원주시
시조 배현경(裵玄慶)
인구수 12,118명
계파 처사공파(處士公派)
성산 복야공파(星山 僕射公派)
화순 진사공파(和順 進士公派)
함흥 교서공파(咸興 校書公派)
협계 합문사인공파(俠溪 閤門舍人公派)
남해 감사공파(南海 監司公派)[13]
역사인물 배충과(의서습독관)
배련(화원)[14]
배유화 (의금부 도사)[15]
배소흥(사헌부 지평)
배구운(사헌부 감찰)

경주배씨 항렬표[16]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15 찬(燦)종(種) 16 기(基)식(埴) 17 호(鎬)경(鏡)
18 ○수(洙) 19 상(相)○ 20 ○희(熙)
21 재(在)○ 22 ○종(鐘) 23 한(漢)○
24 ○병(柄) 25 현(炫)○ 26
무과급제자 성명 성명
배경도(裵景度) 배곤(裵袞) 배룡(裵龍)
배명후(裵命厚) 배산복(裵山福) 배업룡(裵業龍)
배천남(裵天男) 배필창(裵必昌) 배한흥(裵漢興)
배험련(裵險連) 배홍엽(裵弘燁) 배홍적(裵弘迪)
경주 배씨 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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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cffff> 경주[17] 배씨 인물
배 서(裵 署) :고려조에 감무어사(監務御使)․전객령(典客令)을 역임하였다.

배종주(裵宗柱) : 고려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역임하였다.

배 단(裵 端) :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배공보(裵公輔) : 고려때 판도사사(版圖司事)․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배정비(裵廷婓) : 호(號)는 귀연(龜淵). 고려때 진사(進仕)였다.

배정미(裵廷亹) : 고려때 진사(進士)였다.

배정현(裵廷顯) : 고려조(高麗朝)에 진사(進士)였다.

배 수(裵 守) : 고려(高麗)때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지냈다. 1346년(충목왕2) 이곡(李穀)이 지은 연복사(演福寺) 종명(鐘銘)에 상호군(上護軍) 배천경(裵天慶), 흥해군(興海君) 배전(裵全)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배 찬(裵 襸) : 무창군수(茂昌郡守)에 기용(起用)되어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방어(防禦)하였다.

배 우(裵 櫌) :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배윤손(裵允遜) : 조선에서 부윤(府尹)을 지냈다.

배윤상(裵允祥) : 조선(朝鮮)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배상휘(裵尙輝) : 조선(朝鮮)에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냈다.

배유흥(裵有興) : 조선때 직장(直長)을 지내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배유선(裵有宣) : 조선조(朝鮮朝)에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역임하였다.

배극수(裵克壽) : 호(號)는 송헌(松軒). 천성(天性)이 영민(英敏)하고 독신성학(篤信性學)하였다. 그후 제주 점마차사(濟州點馬差使)에 등용(登用)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영남(嶺南)에서 강진 대곡 평덕리(康津大谷平德里)에 이거하여 송정정사(松亭精舍)를 세우고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며 거문고와 독서(讀書)로 여생을 보냈다.

배진손(裵晋孫) : 호(號)는 애음(厓陰). 조선때의 학자(學者)로 학문(學問)이 조숙(早熟)하여 영산(靈山)에서 청도(淸道) 운문(雲門)으로 이거(移居)하여 도학(道學)을 연구하였다.

배광우(裵光祐) : 자(字)는 이열(而烈). 조선세조(世祖)때 벼슬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으나 49세에 죽었다.

배극부(裵克富) : 자(字)는 사관(士寬), 호(號)는 둔촌(遯村). 조선때 문장(文章)이 뛰어난 학자(學者)로 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도의상교(道義相交)하였으며, 충주(忠州) 불정촌(佛丁村)에 이거(移居)하여 둔적(遁跡), 의(義)를 숭상(崇尙)하였다 하여 호(號)를 둔촌(遯村)이라 하였다.

배 하(裵 夏) : 자(字)는 순거(舜擧), 호(號)는 노은(老隱). 일찍이 벼슬하여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영동정(令同正)에 이르렀으나 사임하고 산음 봉곡(山陰鳳谷)에 은거(隱居)하여 다시는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으니 후세 사람들이 그 마을 이름을 노은(老隱)이라 하였다.

배문보(裵文甫) : 자(字)는 천장(天章), 호(號)는 세한재(歲寒齋). 정미보 1907년(丁未譜)와 병신보 1956년(丙申譜)에 의하면 1409년 생(生) 을축태종 9년(乙丑太宗9年)~1485년 9월 12일 졸(卒) 을사 성종17년(乙巳成宗17年) 1438년 무오세종20년에 등과(戊午世宗20年에 登科) 세종(世宗)때 관직을 거쳐 고성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하였고, 1485년(인종1)에 죽으니 왕(王)이 제문을 내리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장례(葬禮)를 치르도록 하였다.

배 특(裵 忒) : 조선조(朝鮮朝)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배광한(裵匡漢) : 조선(朝鮮)때 훈도(訓導)를 지냈다.

배 진(裵 縉) : 조선(朝鮮)때 음보(蔭補)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증직되었다. 문장필법(文章筆法)이 탁월(卓越)하였고, 유구생필(遺句生筆)이 전(傳)해온다.

배득호(裵得浩) :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백양덕(裵陽德) : 조선(朝鮮)에서 동정(同正)을 지냈다.

배맹후(裵孟厚) : 1448(세종30)~1478(성종8) 자(字)는 재지(載之), 호(號)는 계당(桂堂). 1462년(세조7) 생진양과장원(生進兩科壯元) 그해 추별시정과급제(秋別試丁科及第) 1463년 계미춘 황감급제(癸未春黃甘及第) 1466년 병술춘 중시장원(丙戌春重試壯元)에 급제한 맹후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1475년(성종6)때 사신(史臣)으로 일본(日本)에 다녀왔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조정의 기풍(氣風)을 바로잡고 옥천곡(玉川谷) 요승(妖僧)을 척결한 척불지공(斥佛之功)으로 청암산 일구급 부근답 복호 20결 상사(靑岩山一區及附近沓復戶 二十結 賞賜) 1477(성종8) 정유춘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丁酉春司憲府大司憲吏曹參判)을 지냈다.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되었다.

배중후(裵仲厚) : 조선조에 일찍이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에 합격했으나 과거(過擧)를 단념하고 학문(學問)을 연마(硏磨), 문장 도학(文章道學)이 뛰어나 당시 사림(士林)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이심원(李深源)․조려(趙旅)․조욱(趙昱) 등과 도의 상교(道義相交)하며 시문(詩文)을 창화(唱和)했다. 내내강사(奈內江舍)의 사운삼수(四韻三首)와 산인혜영(山人慧嶺)의 증시(贈詩) 1수(首)는 특히 유명(有名)하다.

배숙후(裵叔厚) : 호(號)는 백암(白庵).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 경리학(經理學)에 능(能)하였고, 종정(從政)에 뜻이 있어 문과(文科)에 급제, 1489년(성종20)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1494년(성종25)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495년(연산군1) 승예랑(承禮郞) 오수 찰방(鰲樹察訪)을 지냈다.

배계후(裵季厚) : 자(字)는 직방(直方), 호(號)는 모당(慕堂). 1474년(성종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478년(성종9) 경주 판관(慶州判官)이 되고, 1488년(성종19)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거쳐 1491년(성종22)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배이동(裵二仝) : 조선(朝鮮)때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냈다.

배세강(裵世綱) : 호(號)는 영락(永樂). 조선 성종(成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사(全羅都寺)를 지냈다.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복지축실(卜地築室)하니 그 동명(洞名)을 성당(聖塘)이라 하였고, 점산작사(占山作舍)하니 그 정자(亭子)를 영락정(永樂亭)이라 하였다.

배세적(裵世績) : 자(字)는 무숙(懋叔), 호(號)는 정곡(靜谷).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 문장 행의(文章行誼)가 중후(重厚)하였고, 1498년(연산군4)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봉직랑(奉直郞)으로서 군위(軍威)에 출재(出宰)하였는데 정사(政事)가 청백(淸白)하고 경내(境內)가 화흡(和翕)하였다.

재임중(在任中)에 죽으니 군민(君民)의 애통함이 부모상(父母喪)을 당함과 같았다. 칠원(漆原)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가 현재는 칠원(漆原)의 모현사(慕賢祠)에 복향(復享)되었다.

배 윤(裵 倫) : 자(字)는 무랑(務郞).
조선때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겸 어사(御史)를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배세현(裵世賢) : 자(字)는 성측(聖則).

조선에서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을 지냈다.

배세위(裵世緯) : 분성인(盆城人) 호(號) 명성(明城) 부사수후(府使秀厚) 자(子) 중종조(中宗朝) 성균진사(成均進士) 이학행(以學行) 증(贈) 참의(參議)에 천거되었다.

배 순(裵 純) : 자(字)는 세경(世經), 호(號)는 두암(杜庵).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를 지냈다.

배 학(裵 鶴) : 자(字)는 태충(太沖), 호(號)는 임천(林泉). 성품이 온후(溫厚)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1537년(중종 32)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기용(起用)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노천(老泉)에 별서계구당(別墅戒懼堂)을 세워 성리학(性理學)에 전심(專心)하면서 스스로 도천서원(道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성달(裵成達) : 자(字)는 선문(善文), 조선(朝鮮)때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내며 선저(善政)을 베풀어 이민(吏民)이 칭송(稱頌)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배신침(裵愼忱) : 자(字)는 정숙(靜叔), 호(號)는 임당(林塘),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행의(行誼)가 성실하여 세인(世人)의추앙(推仰)을 받았고, 노진(盧禛)․오건(吳健) 등과 더불어 도의(道義)와 성리학(性理學)을 강론(講論)하며 연마(硏磨)하였다. 1788년(정조12)에 사림(士林)의 추천(推薦)으로 산청(山淸)의 평천서원(平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윤침(裵允忱) : 자(字)는 윤숙(允淑), 호(號)는 지산(芝山). 조선(朝鮮)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역임하였다.

배철중(裵鐵重) :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기사(騎射)에 능하여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578년(선조11) 아산 현감(牙山縣監)․홍주 영장(洪州營將)에 기용(起用)되었다. 이듬해 모친(母親)의 병환(病患)이 위급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수혈(輸血)하여 소생(蘇生)케 하였다. 인조(仁祖)때 사림(士林)들의 주청(奏請)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배 담(裵 湛) : 자(字)는 화여(和汝), 호(號)는 야은(野隱). 조선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영덕 현령(盈德縣令)․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에 기용(起用)되어 3년간 재직(在職)하면서청백리(淸白吏)로 유명(有名)하였고, 사퇴한 후 군자동(君子洞)에 은거(隱居)하면서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힘썼다. 군자동(君子洞)에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

배 영(裵 渶) : 자(字)는 심원(深源), 호(號)는 인재(忍齋), 성품(性稟)이 순수(純粹)하여 당세(當世)의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자손(子孫)을 교훈(敎訓)함에 반드시 충효(忠孝)로써가르치고, 시(詩)를 지어 자제(子弟)를 가르치며 만년(晩年)을 전원(田園)에서 마쳤다. 학행(學行)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상겸(裵尙謙) : 자(字)는 수익(受益), 호(號)는 호은(湖隱). 조선때 문장필법(文章筆法)이 뛰어난 학자(學者)로 당세(當世)에 유명하였다.

배원우(裵元佑) : 자(字)는 자동(自東). 호(號)는 두곡(杜谷).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雲門陜)에서 회맹(會盟)하고, 적(敵)과 접전(接戰) 끝에 소탕(掃蕩)하고 향민(鄕民)을 보호(保護)하였다.

선무(宣武) 이등(二等)에 녹훈되고,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임명되었다. 경북 하양군(慶北 河陽郡) 하양사(河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세겸(裵世謙) : 자(字)는 공익(公益), 호(號)는 심원재(心遠齋),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공(功)을 세우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任命)되었다. 평천사(平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명원(裵明遠) : 자(字)는 군회(君晦), 호(號)는 월정(月汀), 천성(天性)이 강직(剛直)하고 의리(義理)가 깊어 조식(曺植) 문하(門下)에서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사우(士友)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벼슬이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이르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진관 병마절제사(鎭管兵馬節制使)가 되어 성(城)을 지키다가 군중(軍中)에서 순사(殉死)하였다.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대유(裵大維) : 1563(명종 18)~ ?

자(字)는 자장(子張), 호(號)는 모정(慕亭), 부정(副正) 영(瑛)의 아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다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했다.

1608년(선조 4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12년(광해군 4) 지평(持平), 이어 정언(正言)․장령(掌令)․보덕(輔德)․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1621년(광해군 13)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올랐다. 대북(大北)에 가담하여 폐모론(廢母論)에 참여 했으므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때 삭직(削職)당했다. 문장에 능했고 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썼다.

배형원(裵亨遠) : 자(字)는 군길(君吉), 호(號)는 정곡(汀谷). 효행(孝行)이 지극하고 학문(學問)에 뜻이 있어 전원(田園)에 은거(隱居)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창의(倡義)하여 형(兄) 명원(明遠)과 함께 종군(從軍), 전공(戰功)을 세우고 원종공신(原從功臣) 이등(二等)에 책록되었다. 난(亂)이 끝난 후에 공명(功名)을 자랑하지 않고 임천(林泉)에 은거(隱居)하였다. 유일(遺逸)로 선교랑(宣敎郞)에 오르고 김해교수(金海敎授)를 지냈고,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서온(裵敍溫) : 1563~?(명조~?) 자(字)화중(和仲) 호(號)는 엄송당(掩松堂) 분성군(盆城君) 휘 원룡(元龍)의 12세손이며, 휘 도수(道秀)의 아들이다.

1584년(선조17)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부친상을 당하여 3년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던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적에게 사로잡힌 공은 곧 왜국으로 압송되었는데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심이 한결같이하였으며, 이에 감복한 적이 9년만에 공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는데 인조조(仁祖朝)에 공의위국충절이 조정에 알려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에 중직되었고 논과 밭을 하사받았다.

배경남(裵慶南) : 자(字)는 문길(門吉).

1572년(선조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거쳐 단주 부사(端州府使)를 역임하였다. 시문(詩文)에 뛰어나 류성룡(柳成龍)․이정귀(李廷龜) 등과 사귀었다.

배웅남(裵應男) : 초명(初名)은 응남(應男), 자(字)는 인수(仁叟), 호(號)는 운계(雲溪). 어려서부터 영특(英特)하고 성장함에 외모(外貌)가 준수하고 성격이 쾌활하여 대장부(大丈夫)의 풍도(風度)가 있으므로 그의 백부(伯父) 원우(元佑)가 그 기량(器量)을 중시하고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윤리(倫理)와 오위진결(五衛陳結)의 방법(方法)을 공부하게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雲門峽)에서 회맹(會盟)하고 적(敵)과 접전(接戰) 끝에 이를 소탕(掃蕩)하고 향민(鄕民)을 보호하였다. 선무(宣武) 이등(二等)에 녹훈되고 백부(伯父) 원우(元佑)와 함께 하양사(河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양옥(裵良玉) : 자(字)는 기지(器之), 호(號)는 사오당(四吾堂). 학문(學問)이 조숙(早熟)하여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추앙(推仰) 받았으나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 탐구(探究)에 뜻을 두어 장암(藏巖)에 은입(隱入)하여 잠적(潛跡)하고 정자(亭子)를 선바위 뒤층대(層臺)에 세우고 도의강마(道義講磨)에 전심(專心)하였다. 황협(黃峽)․맹헌(孟獻)․강헌지(姜獻之) 등과 시장(詩章)을 창화(唱和)하고 학문(學問)을 상교(相交)하였다.


배홍우(裵弘祐) : 자(字)는 수보(綏甫), 호(號)는 양지재(養志齋), 1616년(광해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고, 1618년(광해군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를 거쳐 감찰(監察)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625년(인조 3)에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비문(碑文)을 썼고,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지휘하에 의병(義兵)을 모집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배홍록(裵弘祿) : 1586~1643(선조19~인조21) 자는 응보(應甫)로 분성군(盆城君) 휘 원룡(元龍)의 13세손이며 모정공(慕亭公) 휘 대유(大維)의 차남이다. 공은 1612년(광해4) 무과에 급제하여 1615년 절충장군 행용양위부사정(折衝將軍 行龍讓衛副司正)을 재수받고 1618년에는 통정대부행웅천현감(通政大夫行熊川縣監) 1620년에는 이천도호부사겸병마첨절제사(伊川都護府使兼兵馬僉節制使) 이듬해에는 충무위부사용(忠武衛副司勇)을 지냈다.

배 경(裵 絅) : 자(字)는 문보(文甫), 호(號)는 제헌(齊軒). 조선조(朝鮮朝)에 찰방(察訪)을 지냈다.

배득신(裵得信) : 자(字)는 가정(佳亭), 호(號)는 정와(靜窩). 조선(朝鮮)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배동도(裵東度) : 자(字)는 여헌(汝憲), 호(號)는 일암(逸庵). 조선때 재질(才質)이 뛰어나서 학문(學問)에 전심(專心)하였고, 죽림(竹林) 가운데 정사(精舍)를 세우고 후진(後進)을 위하여 도학(道學)을 강론(講論)했다. 그는 또한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어버이 상(喪)을 당(當)했을 때 여막(廬幕)에서 3년 거상(居喪)을 마쳤다.

인조(仁祖)때 학행(學行)으로 목릉 참봉(穆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辭讓)하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역임하였다.

배명윤(裵命胤) : 자(字)는 덕승(德承), 호(號)는 삼외당(三畏堂),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새벽에 부모(父母)의 침소(寢所)에 문안(問安)하고 재사(齋舍)에서 글을 읽었다.

부모상(父母喪)을 당(當)해서는 여막(廬幕)에서 집상(執喪)하니 향리 사림(鄕里士林)의 주청(奏請)으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여경(裵汝慶) : 자(字)는 선여(善餘), 호(號)는 일성재(一誠齋), 효우(孝友)가 출중(出衆)하여 형제(兄弟)가 한방에서 연상공금(聯床共衾)했다. 부모상(父母喪)을 거듭 당하니 계속해서 6년을 여막(廬幕)에서 거상(居喪)했고, 묘하(墓下)에 재실(齋室)을 세우니 사림(士林)들이 일성재(一誠齋)라 했다.

1695년(숙종21) 효행(孝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任命)되었으나 부임전에 죽었다.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追贈),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되었다.

배일장(裵一長) : 자(字)는 자첨(子襜), 호(號)는 계헌(戒軒). 조선때 산곡여막(山谷廬幕)에서 학구(學究) 끝에「심경보사(心經補辭)」를 저술(著述)하였다. 1675년(숙종1) 남구만(南九萬)의 천거(薦擧)로 강릉 참봉(康陵參奉)이 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전심했다.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진명(裵震明) : 자(字)는 덕휘(德輝), 호(號)는 모헌(慕軒), 박학(博學)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했다. 부모상(父母喪)을 당(當)하여 여막(廬幕)에서 거상(居喪)했고 부모(父母)를 종신(終身) 사모(思慕)하는 뜻에서 호(號)를 모헌(慕軒)이라 하였다.

조정(朝廷)에서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 황협(黃峽)․맹헌(孟獻)과 호선락도(好善樂道)했다.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배덕성(裵悳星) : 자(字)는 종일(宗一), 호(號)는 송은(松隱). 조선(朝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배세두(裵世斗) : 1682~1750[숙종~영조] 자는 국언(國彦)이다. 공은 형 세중(世重)과 함께 효우(孝友)가 돈독하여 조정에서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추증하고 정려를 내렸다.

배왈대(裵曰大) : 자(字)는 군보(君甫), 호(號)는 운곡(雲谷). 조선(朝鮮)때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에 이르렀다.

배필문(裵弼文) : 자(字)는 성뢰(聖賚), 호(號)는 각봉(覺峰). 조선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배식근(裵植根) : 조선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배극소(裵克紹) : 1819~1871[순조~고종] 자는 내휴(乃休)이다. 공은 효행(孝行)과 문학으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1850년(철종1)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영달(榮達)에는 뜻이 없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이 열중하여 ‘사례간요(四禮簡要)’ 일부(一部)와 ‘묵암목판(黙庵木板)’, ‘개몽자학(開蒙字學)’이 있다.

영남루 월야봉 이상사설 전 신원체 장원시(嶺南樓 月夜 逢 李上舍說 前 身怨債 壯元詩)는 一世에 훤전(喧傳)하고 있다.

배 찬(裵 瓚) :자는 우서(禹瑞), 호는 금계(錦溪). 조선때 사마(司馬)를 지냈다.

배치문(裵致文) : 1890-1942(고종27) 호는 고파(高坡) 분성군 휘 원룡(元龍)의 23세손으로 휘 익화(翊化)의 장남이다. 1890년 2월 17일 경남 김해시 한림면에서 출생하여 1909년 생계가 어려워 전가족이 전남 목포시로 이주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여 울분을 토로하며, 독립투쟁의 뜻을 키웠다. 1919년 4월 8일 목포지구의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모진고문을 받고 1년6개월의옥고를 치렀다. 1920년 12월 출옥후 중국상해로 망명하여, 1923년 3월 5일에 대한민국입시정부 국민대표자회의에 보천교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의혈단에 가입활동하였다. 1924년 1월 귀국하여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류되어 또 옥고를 치렀고 출옥후 호남평론사의 객원기자로 독립투쟁과 신간회 목포지회장으로도 활동하다가 1941년 체포되어 출판법, 보안법,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 1942년 5월 20일 목포형무소에서 53세에 옥사하였다. 경남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에 기적비(紀蹟碑)가 세워졌다.

배동석(裵東奭) : 1891(고종28)~ 1921

성두(聖斗)의 아들. 경남 김해(金海) 출신. 1906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중, 배일사상 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간 복역하고 출옥 후 동교(同校)를 중퇴, 서울 경신학교(경신學校)를 졸업했다.

목포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다시 배일운동 협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와 국외로 탈출하여 만주에서 김좌진(金佐鎭) 등과 활동했다. 1918년 귀국, 경성연합의전(京城聯合醫專;세브란스)에 입학, 1919년2월 김원벽(金元壁)․이갑성(李甲成)․한위건(韓偉健) 등과 음악회를 가장하고 3․1운동의 전개를 의논, 3월 1일 학생 대표로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시위운동을 하다가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배덕수(裵德秀) : 한말(韓末)에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활약하였다.

열녀 경주 배씨의 남편은 진양 하씨 하충수河忠秀로 당진 면천에서 살았다. 남편 하충수가 1874년(고종 11년)에 병으로 위독해지자 경주 배씨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 회생시켰으나 마침내 4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의 전언에 의하면 경주 배씨가 남편 하충수의 장례를 모두 치른 후 식음을 전폐하여 2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배중세(裵重世) : 경남 창원 출신으로 1919. 5월 의열단(義烈團)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경에 붙들려 2번의 옥고를 치르고 계속 뜻을 굽히지 않고 투쟁하던 중 1944. 대구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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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성주(성산) 배씨

<colbgcolor=#000080><colcolor=#dcffff> 집성촌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송촌리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본리리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마산리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죽대리
함경남도 영흥군 억기면 양중리, 향하리
시조 배위준(裵位俊)[18]
인구수 148,672명
계파 화당공파(花堂公派)
안렴공파(按廉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달성파(達城派)
재신공파(宰臣公派)
역사인물 배인경(추밀원사)
배극렴(문하좌시중)
배천의(사천현감)
배경성(통훈대부)
배윤저(통정대부)
배덕형(동몽교관)
배성호(통정대부)

성주배씨 항렬표[19]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26 동(東)상(相)병(秉)락(樂)○ 27 ○환(煥)휴(烋)찬(燦)희(熙) 28 효(孝)중(重)경(坰)재(在)○
29 ○호(鎬)흠(欽)종(鍾)탁(鐸) 30 태(泰)영(泳)한(漢)호(浩)○ 31 ○식(植)근(根)주(柱)표(杓)
32 노(魯)용(容)연(然)병(炳)○ 33 ○곤(坤)규(圭)달(達)기(基) 34 현(鉉)용(鏞)용(鎔)진(鎭)○
35 ○원(源)해(海)담(湛)경(逕) 36 영(榮)정(禎)병(柄)종(棕)○ 37 ○현(炫)훈(熏)렬(烈)황(煌)
38 규(奎)장(墇)치(埴)재(載)○ 39 ○석(錫)주(鑄)옥(鈺)현(鋧) 40 수(洙)기(淇)윤(潤)락(洛)○
41 ○환(桓)락(極)근(槿)권(權) 42 희(熹)돈(焞)영(煐)형(炯)○ 43 ○원(垣)훈(塤)준(埈)증(增)
문과급제자 성명 성명
배윤(裵閏) 배추(裵樞) 배한(裵瀚)
배덕문(裵德文) 배응경(裵應褧) 배상익(裵尙益)
배정휘(裵正徽) 배무화(裵舞和) 배윤명(裵胤命)
배한(裵閑) 배헌장(裵憲璋)

3.3. 분성(김해) 배씨[20]

<colbgcolor=#000080><colcolor=#dcffff> 집성촌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평촌리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부윤리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정대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
창원시 웅동면 두동리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옥정리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정대리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경리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 오덕리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선창리
시조 배원룡(裵元龍)[21]
인구수 101,649명
계파 귀연공정배파(龜淵公廷裵派)
진사공정미파(進士公廷亹派)
진사공정현파(進士公廷顯派)
목사공수파(牧使公守派)
역사인물 배원룡(고려 병부상서, 분성군에 봉해짐)
배종주(고려 전리판서)
배 단(고려, 평장사)
배공보(고려, 판도사사상호군)
배광우(조선, 좌승지)
배맹후(조선, 이조참의)
배득신(조선, 공조참판)
배동도(조선, 좌승지)
배문보(고성군수)
배경남(좌별도장)

분성배씨 항렬표[22]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24 종,용(鍾,鏞) 25 한,순(漢,淳) 26 병,병​​(柄,秉)
27 열,환(烈,煥) 28 재,규(在,圭) 29 용,호(鎔,鎬)
30 홍,문(洪,汶) 31 표,근(杓,根) 32 병,형(炳,炯)
33 배,곤(培,坤) 34 은,진(銀,鎭) 35 낙,우(洛,雨)
36 상,낙(相,樂) 37 훈,섭(薰,燮)
분성 배씨 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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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cffff> 분성[23] 배씨 인물
배서(裵 署) 고려조에 감무어사(監務御使)․전객령(典客令)을 역임하였다.

배종주(裵宗柱) 고려 때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역임하였다.

배 단(裵 端)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배공보(裵公輔) 고려 때 판도사사(版圖司事)․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배정비(裵廷斐) 호(號)는 귀연(龜淵). 고려 때 진사(進士)였다.

배정미(裵廷亹) 고려 때 진사(進士)였다.

배정현(裵廷顯) 고려조(高麗朝)에 진사(進士)였다.

배 수(裵 守) 고려(高麗) 때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지냈다. 1346년(충목왕 2) 이곡(李穀)이 지은 연복사(演福寺) 종명(鐘銘)에 상호군(上將軍) 배천경(裵天慶), 흥해군(興海君) 배 전(裵 全)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배 찬(裵 襸) 1446년(세종 28) 무창 군수(茂昌郡守)에 기용(起用)되어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방어(防禦)하였다.

배 우(裵 礻憂)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배윤손(裵允遜) 조선에서 부윤(府尹)을 지냈다.

배윤상(裵允祥)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배상휘(裵尙輝) 조선(朝鮮)에서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지냈다.

배유흥(裵有興)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내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배유선(裵有宣) 조선조(朝鮮朝)에 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역임하였다.

배극수(裵克壽) 호(號)는 송헌(松軒). 천성(天性)이 영민(英敏)하고 독신성학(篤信性學)하였다. 그후 제주 점마차사(濟州點馬差使)에 등용(登用)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영남(嶺南)에서 강진 대곡 평덕리(康津大谷平德里)에 이거하여 송정정사(松亭精舍)를 세우고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며 거문고와 독서(讀書)로 여생을 보냈다.

배진손(裵晋孫) 호(號)는 애음(厓陰). 조선 때의 학자(學者)로 학문(學問)이 조숙(早熟)하여 영산(靈山)에서 청도(淸道) 운문(雲門)으로 이거(移居)하여 도학(道學)을 연구하였다.

배광우(裵光祐) 자(字)는 이열(而烈). 조선 세조(世祖) 때 벼슬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으나 49세에 죽었다.

배극부(裵克富) 자(字)는 사관(士寬), 호(號)는 둔촌(遯村). 조선 때 문장(文章)이 뛰어난 학자(學者)로 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도의상교(道義相交)하였으며, 충주(忠州) 불정촌(佛丁村)에 이거(移居)하여 둔적(遯跡), 의(義)를 숭상(崇尙)하였다 하여 호(號)를 둔촌(遯村)이라 하였다.

배 하(裵 夏) 자(字)는 순거(舜擧), 호(號)는 노은(老隱). 일찍이 벼슬하여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영동정(令同正)에 이르렀으나 사임하고 산음 봉곡(山陰鳳谷)에 은거(隱居)하여 다시는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으니 후세 사람들이 그 마을 이름을 노은(老隱)이라 하였다.

배문보(裵文甫) 자(字)는 천장(天章), 호(號)는 세한재(歲寒齋). 1526년(중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하였고, 1545년(인종 1)에 죽으니 왕(王)이 제문을 내리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장례(葬禮)를 치르도록 하였다.

배 특(裵 忒)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배광한(裵匡漢) 조선(朝鮮) 때 훈도(訓導)를 지냈다.

배 진(裵 縉) 조선(朝鮮) 때 음보(蔭補)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증직되었다. 문장필법(文章筆法)이 탁월(卓越)하였고, 유구생필(遺句生筆)이 전(傳)해온다.

배득호(裵得浩)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배양덕(裵陽德) 조선(朝鮮)에서 동정(同正)을 지냈다.

배맹후(裵孟厚) 자(字)는 재지(載之), 호(號)는 계당(桂堂). 1462년(세조 7) 생원(生員)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그후 예문관 수찬관(藝文館修撰官)․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승정원 부승지(承政院副承旨)․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등을 역임하였으며, 1475년(성종 6) 사신(使臣)의 기풍(氣風)을 바로잡고 왕(王)으로부터 포상(褒賞)을 받았다.

배중후(裵仲厚) 조선조에 일찍이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에 합격했으나 과거(過擧)를 단념하고 학문(學問)을 연마(硏磨), 문장 도학(文章道學)이 뛰어나 당시 사림(士林)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이심원(李深源)․조 려(趙 旅)․조 욱(趙 昱) 등과 도의 상교(道義相交)하며 시문(詩文)을 창화(唱和)했다. 내내강사(奈內江舍)의 사운삼수(四韻三首)와 산인혜영(山人慧穎)의 증시(贈詩) 1수(首)는 특히 유명(有名)하다.

배숙후(裵叔厚) 호(號)는 백암(白菴).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 경리학(經理學)에 능(能)하였고, 종정(從政)에 뜻이 있어 문과(文科)에 급제, 1489년(성종 20)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1494년(성종 25)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495년(연산군 1) 승예랑(承禮郞) 오수찰방(鰲樹察訪)을 지냈다.

배계후(裵季厚) 자(字)는 직방(直方), 호(號)는 모당(慕堂). 1474년(성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478년(성종 9) 경주 판관(慶州判官)이 되고, 1488년(성종 19)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거쳐 1491년(성종 22)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배이동(裵二仝) 조선(朝鮮) 때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냈다.

배세강(裵世綱) 호(號)는 영락(永樂). 조선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복지축실(卜地築室)하니 그 동명(洞名)을 성당(盛塘)이라 하였고, 점산작사(占山作舍)하니 그 정자(亭子)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

배세적(裵世績) 자(字)는 무숙(懋叔), 호(號)는 정곡(靜谷).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문장 행의(文章行誼)가 중후(重厚)하였고, 1498년(연산군 4)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봉직랑(奉直郞)으로서 군위(軍威)에 출재(出宰)하였는데 정사(政事)가 청백(淸白)하고 경내(境內)가 화흡(和翕)하였다.

재임중(在任中)에 죽으니 군민(郡民)의 애통함이 부모상(父母喪)을 당함과 같았다. 칠원(漆原)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가 현재는 칠원(漆原)의 모현사(慕賢祠)에 복향(復享)되었다.

배 윤(裵 倫) 자(字)는 무랑(務郞). 조선 때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 겸 어사(御史)를 지내고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배세현(裵世賢) 자(字)는 성측(聖則). 조선에서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을 지냈다.

배 순(裵 純) 자(字)는 세경(世經), 호(號)는 두암(杜菴).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지냈다.

배 학(裵 鶴) 자(字)는 태충(太冲), 호(號)는 임천(林泉). 성품이 온후(溫厚)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1537년(중종 32)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기용(起用)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노천(老泉) 김식(金湜)을 사사(師事)하였으며, 도천(道泉)에 별서계구당(別墅戒懼堂)을 세워 성리학(性理學)에 전심(專心)하면서 스스로 호(號)를 임천(林泉)이라 하였다. 영산(靈山)의 도천서원(道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성달(裵成達) 자(字)는 선문(善文). 조선(朝鮮) 때 삼척 부사(三陟府使)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이민(吏民)이 칭송(稱頌)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배신침(裵愼忱) 자(字)는 정숙(靜叔), 호(號)는 임당(林塘).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행의(行誼)가 성실하여 세인(世人)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노진(盧禛)․오건( 健)등과 더불어 도의(道義)와 성리학(性理學)을 강론(講論)하며 연마(硏磨)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사림(士林)의 추천(推薦)으로 산청(山淸)의 평천서원(平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윤침(裵允忱) 자(字)는 윤숙(允淑), 호(號)는 지산(芝山).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역임하였다.
배철중(裵鐵重)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기사(騎射)에 능하여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578년(선조 11) 아산 현감(牙山縣監)․홍주 영장(洪州營將)에 기용(起用)되었다. 이듬해 모친(母親)의 병환(病患)이 위급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수혈(輸血)하여 소생(蘇生)케 하였다. 인조(仁祖) 때 사림(士林)들의 주청(奏請)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배 담(裵 湛) 자(字)는 화여(和汝), 호(號)는 야은(野隱).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영덕 현령(盈德縣令)․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에 기용(起用)되어 3년간 재직(在職)하면서 청백리(淸白吏)로 유명(有名)하였고, 사퇴한 후 군자동(君子洞)에 은거(隱居)하면서 후진 양성(後進養城)에 힘썼다. 군자동(君子洞)에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

배 영(裵 渶) 자(字)는 심원(深源), 호(號)는 인재(忍齋). 성품(性稟)이 순수(純粹)하여 당세(當世)의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자손(子孫)을 교훈(敎訓)함에 반드시 충효(忠孝)로써 가르치고, 시(詩)를 지어 자제(子弟)를 가르치며 만년(晩年)을 전원(田園)에서 마쳤다. 학행(學行)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상겸(裵尙謙) 자(字)는 수익(受益), 호(號)는 호은(湖隱). 조선 때 문장필법(文章筆法)이 뛰어난 학자(學者)로 당세(當世)에 유명하였다.

배원우(裵元佑) 자(字)는 자동(自東), 호(號)는 두곡(杜谷).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雲門陜)에서 회맹(會盟)하고, 적(敵)과 접전(接戰) 끝에 소탕(掃蕩)하고 향민(鄕民)을 보호(保護)하였다.

선무(宣武) 이등(二等)에 녹훈되고,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임명되었다. 경북 하양군(慶北河陽郡) 하양사(河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세겸(裵世謙) 자(字)는 공익(公益), 호(號)는 심원재(心遠齋).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공(功)을 세우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任命)되었다. 평천사(平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명원(裵明遠) 자(字)는 군회(君晦), 호(號)는 월정(月汀). 천성(天性)이 강직(剛直)하고 의리(義理)가 깊어 조 식(曺 植) 문하(門下)에서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사우(士友)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벼슬이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이르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진관 병마절제사(鎭管兵馬節制使)가 되어 성(城)을 지키다가 군중(軍中)에서 순사(殉死)하였다.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대유(裵大維) 1563 (명종 18) ~ ?

자(字)는 자장(子張), 호(號)는 모정(慕亭), 부정(副正) 영(瑛)의 아들. 1590년(선조 2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성(化旺山城)을 수비했다.

1608년(선조 4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12년(광해군 4) 지평(持平), 이어 정언(正言)․장령(掌令)․보덕(輔德)․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1621년(광해군 13)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올랐다.

대북(大北)에 가담하여 폐모론(廢母論)에 참여했으므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때 삭직(削職)당했다. 문장에 능했고 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썼다.

배형원(裵亨遠) 자(字)는 군길(君吉), 호(號)는 정곡(汀谷). 효행(孝行)이 지극하고 학문(學問)에 뜻이 있어 전원(田園)에 은거(隱居)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倡義)하여 형(兄) 명원(明遠)과 함께 종군(從軍), 전공(戰功)을 세우고 원종공신(原從功臣) 이등(二等)에 책록되었다. 난(亂)이 끝난 후에 공명(功名)을 자랑하지 않고 임천(林泉)에 은거(隱居)하였다. 유일(遺逸)로 선교랑(宣敎郞)에 오르고 김해교수(金海敎授)를 지냈고,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員)에 제향(祭享)되었다.

배경남(裵慶南) 자(字)는 문길(門吉). 1572년(선조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거쳐 단주 부사(端州府使)를 역임하였다. 시문(詩文)에 뛰어나 류성룡(柳成龍)․이정귀(李廷龜) 등과 사귀었다.

배응남(裵應男) 초명(初名)은 응남(應男), 자(字)는 인수(仁叟), 호(號)는 운계(雲溪). 어려서부터 영특(英特)하고 성장함에 외모(外貌)가 준수하고 성격이 쾌활하여 대장부(大丈夫)의 풍도(風度)가 있으므로 그의 숙부(叔父) 원우(元佑)가 그 기량(器量)을 중시하고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윤리(倫理)와 오위진결(五衛陳結)의 방법(方法)을 공부하게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雲門峽)에서 회맹(會盟)하고 적(敵)과 접전(接戰) 끝에 이를 소탕(掃蕩)하고 향민(鄕民)을 보호하였다. 선무(宣武) 이등(二等)에 녹훈되고 숙부(叔父) 원우(元佑)와 함께 하양사(河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양옥(裵良玉) 자(字)는 기지(器之), 호(號)는 사오당(四吾堂). 학문(學問)이 조숙(早熟)하여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추앙(推仰) 받았으나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 탐구(探究)에 뜻을 두어 장암(藏巖)에 은입(隱入)하여 잠적(潛跡)하고 정자(亭子)를 선바위 뒤 층대(層臺)에 세우고 도의강마(道義講磨)에 전심(專心)하였다. 황협(黃峽)․맹헌(孟獻)․강헌지(姜獻之) 등과 시장(詩章)을 창화(唱和)하고 학문(學問)을 상교(相交)하였다.

배홍우(裵弘祐) 자(字)는 수보(綏甫), 호(號)는 양지재(養志齋). 1616년(광해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고,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를 거쳐 감찰(監察)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625년(인조 3)에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비문(碑文)을 썼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지휘하에 의병(義兵)을 모집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배 경(裵 絅) 자(字)는 문보(文甫), 호(號)는 제헌(齊軒). 조선조(朝鮮朝)에 찰방(察訪)을 지냈다.

배득신(裵得信) 자(字)는 가정(佳亭), 호(號)는 정와(靜窩). 조선(朝鮮) 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배동도(裵東度) 자(字)는 여헌(汝憲), 호(號)는 일암(逸庵). 조선 때 재질(才質)이 뛰어나서 학문(學問)에 전심(專心)하였고, 죽림(竹林) 가운데 정사(精舍)를 세우고 후진(後進)을 위하여 도학(道學)을 강론(講論)했다. 그는 또한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어버이 상(喪)을 당(當)했을 때 여막(廬幕)에서 3년 거상(居喪)을 마쳤다.

인조(仁祖) 때 학행(學行)으로 목릉 참봉(穆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辭讓)하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역임하였다.

배명윤(裵命胤) 자(字)는 덕승(德承), 호(號)는 삼외당(三畏堂).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새벽에 부모(父母)의 침소(寢所)에 문안(問安)하고 재사(齋舍)에서 글을 읽었다.

부모상(父母喪)을 당(當)해서는 여막(廬幕)에서 집상(執喪)하니 향리 사림(鄕里士林)의 주청(奏請)으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여경(裵汝慶) 자(字)는 선여(善餘), 호(號)는 일성재(一誠齋). 효우(孝友)가 출중(出衆)하여 형제(兄弟)가 한방에서 연상공금(聯床共衾)했다. 부모상(父母喪)을 거듭 당하니 계속해서 6년을 여막(廬幕)에서 거상(居喪)했고, 묘하(墓下)에 재실(齋室)을 세우니 사림(士林)들이 일성재(一誠齋)라 했다.

1695년(숙종 21) 효행(孝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任命) 되었으나 부임전에 죽었다.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추증(追贈),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되었다.

배일장(裵一長) 자(字)는 자첨(子襜), 호(號)는 계헌(戒軒). 조선 때 산곡여막(山谷廬幕)에서 학구(學究) 끝에 「심경보사(心經補辭)」를 저술(著述)하였다.

1675년(숙종 1) 남구만(南九萬)의 천거(薦擧)로 강릉 참봉(康陵參奉)이 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전심했다.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진명(裵震明) 자(字)는 덕휘(德輝), 호(號)는 모헌(慕軒). 박학(博學)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했다. 부모상(父母喪)을 당(當)하여 여막(廬幕)에서 거상(居喪)했고 부모(父母)를 종신(終身) 사모(思慕)하는 뜻에서 호(號)를 모헌(慕軒)이라 하였다.

조정(朝廷)에서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 황협(黃 峽)․맹헌(孟獻)과 호선락도(好善樂道)했다.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배덕성(裵悳星) 자(字)는 종일(宗一), 호(號)는 송은(松隱). 조선(朝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배왈대(裵曰大) 자(字)는 군보(君甫), 호(號)는 운곡(雲谷). 조선(朝鮮) 때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에 이르렀다.

배필문(裵弼文) 자(字)는 성뢰(聖賚), 호(號)는 각봉(覺峰).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배식근(裵植根) 조선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배 찬(裵 瓚) 자는 우서(禹瑞), 호는 금계(錦溪). 조선 때 사마(司馬)를 지냈다.

배동석(裵東奭) 1891 (고종 28) ~ 1921

성두(聖斗)의 아들. 경남 김해(金海) 출신. 1906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중, 배일사상 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간 복역하고 출옥 후 동교(同校)를 중퇴,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했다.

목포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다시 배일운동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와 국외로 탈출하여 만주에서 김좌진(金佐鎭) 등과 활동했다. 1918년 귀국, 경성연합의전(京城聯合醫專: 세브란스)에 입학, 1919년 2월 김원벽(金元壁)․이갑성(李甲成)․한위건(韓偉健)등과 음악회를 가장하고 3․1운동의 전개를 의논, 3월 1일 학생 대표로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시위운동을 하다가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배덕수(裵德秀) 한말(韓末)에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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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달성(대구) 배씨[24]

<colbgcolor=#000080><colcolor=#dcffff> 집성촌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영오리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외이리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광승리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태봉리 청천리
전라남도 광산군 동곡면 황용리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
시조 배운룡(裵雲龍)
인구수 77,942명
역사인물 배정지(고려 밀직부사)
배천경(고려 동경윤)
배익신(청송 부사)
배윤박(수계가선대부)
배세관(행금천찰방)
배광집(군자감정)
배광윤(가선대부)

달성배씨 항렬표[25]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30 漢(한),潤(윤),淇(기) 31 植(식),模(모),權(권) 32 煥(환),炳(병),啓(계)
33 斗(두),奎(규),星(성) 34 錫(석),鎭(진),鍾(종) 35 洙(수),​泰(태),淳(순)
36 東(동),相(상),秉(병) 37 烈(렬),黙(묵),熙(희) 38 世(세),時(시),達(달)
39 鉉(현),鏞(용),鎬(호) 40 泳(영),濟(제),彦(언) 41 秀(수),祐(우),綵(채)
42 昌(창),日(일),冕(면) 43 箕(기),表(표),赫(혁) 44 璋(장),錦(금),琦(기)
45 海(해),浩(호),鴻(홍) 46 炳(병),桂(계),根(근) 47 燁(엽),燮(섭),謙(겸)
48 聖(성),在(재),基(기) 49 欽(흠),鐸(탁),銓(전) 50 源(원),洪(홍),洛(락)

3.5. 흥해 배씨[26]

<colbgcolor=#000080><colcolor=#dcffff> 집성촌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인면 삼분리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매곡동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 율리
황해도 신천군 문무면 추릉리
황해도 재령군 삼강면 청룡리
시조 배경분(裵景分)
인구수 34,259명
계파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 배상도
백죽당공파(栢竹堂公派) - 배상지
지평공파(持平公派) - 배권
관찰사파(觀察使派) - 배환
감찰공파(監察公派) - 배남
정랑공파(正郞公派) - 배강
역사인물 배상도(보문각직제학)
배둔(황해도 관찰사)
배효숭(여흥 부사)
배효건(옥과 현감)
배천석(충좌위부사과)
배삼익(황해도 관찰사)
배삼근(정릉 참봉)
배상지(판사복시사)
배광우(위위승 동정)
배약경(위위승 동정)
배유손(보승 별장)
배영지(밀직사사)
배전(군부판서)[27]
배권(형조 좌랑)
배환(병조 참의)
배남(사헌부 감찰)
배용길(충청도 도사)[28].
배경(호조 좌랑)
흥해배씨 항렬표[29]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25 연(淵)영(泳) 26 근(根)직(稷)동(東)영(榮)병(秉) 27 환(煥)희(熙)섭(燮)열(烈)
28 재(在)기(基) 29 일(鎰)종(鍾) 30 수(洙)
31 모(模)주(柱) 32 노(魯)문(文)훈(薰)렬(烈)
과거급제자 성명 성명
과거 급제자 배용길(裵龍吉) 배상규(裵相奎)
배 남(裵 楠) 배 소(裵 素) 배효숭(裵孝崇)
배상현(裵象鉉) 배윤명(裵胤命 ) 배 둔(裵 屯)
배덕문(裵德文) 배 강(배 강)

3.6. 곤양(곤산) 배씨

<colbgcolor=#000080><colcolor=#dcffff> 집성촌 경상북도 칠곡군
경상남도 사천군
충청남도 공주시
충청북도 청주시
시조 배맹달(裵孟達)
인구수 9,102명
역사인물 배맹달(병조판서)
배숙흥(진주병마 절도사)
배사종(양지현감)[30]
배치례(병조참판)
배인길(첨사)
배영균(용양위 부호군)
배영성(병마동첨절제사)
배은‎성(병조정랑)[31]
문과급제자 성명 성명
배영성(裵榮成) 배은성(裵殷星) 배은성(裵殷星)
무과급제자 성명 성명
배곤희(裵昆希) 배봉해(裵奉海) 배상질(裵尙質)
배성관(裵聖觀) 배인호(裵仁好) 배진형(裵晉亨)
배홍도(裵弘道)
곤산 배씨 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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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cffff> 곤산[32] 배씨[33] 인물
배사종(裵嗣宗) 자(字)는 채보(采甫), 호(號)는 효구헌(孝逑軒). 조선 성종(成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양지 현감(陽智縣監)을 지냈는데 연산군(燕山君)이 즉위(卽位)하여 국정(國政)이 날로 혼미(昏迷)해짐을 개탄(慨嘆)하고 치사(致仕)하였다.

배숙흥(裵淑興) 자(字)는 여청(汝淸). 조선조(朝鮮朝)에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거쳐 진주병마절도사(晋州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배언구(裵彦矩) 조선조(朝鮮朝)에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배언손(裵彦孫)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배언필(裵彦弼) 자(字)는 무대(武大). 조선(朝鮮) 때 선전관(宣傳官)에 이르렀다.

배수(裵 洙) 자(字)는 성광(聖光).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배증갑(裵曾甲) 자(字)는 효선(孝先), 호(號)는 용계(龍溪). 호군(護軍)을 지냈다.

배자현(裵自賢) 조선(朝鮮)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배승조(裵承祖) 자(字)는 여구(汝逑), 호(號)는 농와(聾窩).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 선조(宣祖)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김 집(김 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수교(修交)하였으며,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썼다.

배운조(裵雲祖) 자(字)는 여운(汝運). 조선(朝鮮) 때 수직(壽職)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올랐다.

배수남(裵秀男)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부사용(副司勇)을 지냈다.

배덕남(裵德男) 조선(朝鮮)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배준남(裵俊男) 조선조(朝鮮朝)에 병절교위(秉節校尉)에 올랐고,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배근남(裵根男)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배익립(裵翊立) 자(字)는 군보(君輔). 조선(朝鮮) 때 중직대부(中直大夫)로 광흥도사(廣興都事)이 이르렀고,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시익(裵時益) 조선조(朝鮮朝)에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배시탁(裵時鐸)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배충서(裵忠恕) 조선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배시창(裵時昌) 자(字)는 성지(盛之). 조선 때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을 지냈다.

배명성(裵命晟) 조선(朝鮮) 때 횡성 縣監(橫城縣監)을 역임했다.

배시열(裵時說) 조선조(朝鮮朝)에 부사용(副司勇)을 역임하였다.

배시상(裵時尙) 조선(朝鮮)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에 올랐다.

배시계(裵時啓) 자(字)는 여둔(汝遯).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배침(裵 沉) 조선조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다.

배영성(裵榮成) 자(字)는 취지(就之). 조선(朝鮮) 현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결성 현감(結城縣監)을 거쳐 첨절제도위(僉節制都尉)를 지냈다.

배귀생(裵貴生) 자(字)는 희보(希甫), 호(號)는 죽계(竹溪). 조선조에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배만절(裵萬節)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배무훈(裵茂勳) 자(字)는 훈지(勳之).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배영세(裵榮世) 자(字)는 영지(英之). 조선에서 선무랑(선무랑)에 이르렀다.

배종주(裵宗冑) 자(字)는 대여(大汝), 호(號)는 용강(龍岡). 조선(朝鮮)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배원경(裵元慶) 자(字)는 선백(善伯). 조선 때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배명일(裵命一) 자(字)는 일보(一甫). 조선(朝鮮)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배명상(裵命常) 자(字)는 상지(常之).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배경욱(裵敬郁) 자(字)는 사문(士文). 조선에서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랐다.

배영길(裵永吉) 자(字)는 이철(而喆).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배흥도(裵興道)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배숙종(裵淑綜) 조선조(朝鮮朝)에 장사랑(將仕郞)에 이르렀다.

배숙온(裵淑溫)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배덕남(裵德男) 조선에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배기생(裵起生) 조선(朝鮮) 때 진사(進士)였다.

배대해(裵大海)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배준(裵 峻) 초명(初名)은 준해(峻海).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광양 현감(光陽縣監)을 지냈다.

배붕해(裵鵬海) 자(字)는 구만(九萬). 조선(朝鮮)에서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배겸(裵 謙)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배세화(裵世華) 자(字)는 화보(華甫). 조선 때 선무랑(宣務郞)에 올랐다.

배숙정(裵叔禎) 자(字)는 여서(汝瑞). 조선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배몽룡(裵夢龍)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배견용(裵見龍) 조선조(朝鮮朝)에 선무랑(宣務郞)에 올랐다.

배이경(裵以絅) 자(字)는 君三(군삼). 조선조(朝鮮朝)에 선전관(宣傳官)․풍산 만호(豊山萬戶)를 지냈다.

배순효(裵舜孝) 조선에서 공조 좌랑(工曹佐郞)․길주 교수(吉州敎授)를 지냈다.

배대윤(裵大潤) 조선 때 장사랑(將仕郞)으로 숭릉 참봉(崇陵參奉)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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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협계 배씨

<colbgcolor=#000080><colcolor=#dcffff> 집성촌 황해북도(黃海北道) 신계군(新溪郡)
시조 배진(裵縉)
인구수 65명
역사인물 배경성(裵景誠)
배충우(裵忠佑)

3.8. 그 외

4. 특징

오늘날 한국에서는 주로 裵를 쓰지만, 근대 이전, 특히 조선 초기까지는 裴를 썼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오늘날에도 裴를 정자체로 사용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그냥 裴만 쓴다.[36] 배(裴)씨는, 고대 중국에서 부터 먼저 창성(創姓) 되였음을 알수 있다.중국의 배(裴)씨는 명문이었고, 그 후손들이 중국 각처에 산재하고 있는 대문벌이나, 우리나라의 배(裵)씨와는 혈통이 다르다.우리나라의 배(裵)씨 역사는, 우리나라 토성(土姓)으로 두 차례에 걸쳐 사성(賜姓)된 성이다. 같은 한자 문화권의 영향으로 같은 글자의 배(裴ㆍ裵)자를 사용하게 된것이며, 중국 유래의 성씨가 아니라고 중국 위키에 따로 명기가 되어있다.

국조 단군이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 후 하늘로부터 비의남아緋衣男兒를 얻게 되었고, ‘비緋’자에서 ‘사糸’를 빼고 ‘의衣’자를 붙여 배裴를 성으로 삼았으므로 한국의 토성이라 할 수 있다.
한자 자전을 보면, ‘배裵’자와 ‘배裴’자는 같은 자로서 옷이 긴 모양(장의모長衣貌), 옷이 치렁치렁함, 천천히 이리저리 거닐음(배회徘徊), 성姓, 나라 이름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리고 ‘배裴’자가 ‘배裵’자의 본자本字로 되어 있기도 하고 고체古體로 설명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비곡직을 따질 필요 없이 같은 자로 보면 된다.

5. 배(裵)씨 인물

5.1. 중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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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be673>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


* 배지타 - 배씨의 시조, 신라 개국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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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공신
1등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2등
견권 능식 권신 염상
김락 연주 마난
3등
2천여 명(사서에 전하지 않음)
삼한공신
유금필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양유 · 김견술 · 서필
이상 배향공신
강공훤 · 강궁진 · 권행 · 금용식 · 김극렴 · 김선평 · 김유렴 · 김인윤 · 김일긍 · 나총례 · 류차달 · 박지윤 · 소격달 · 왕경 · 염형명 · 원극유 · 윤신달 · 이금서 · 이능일 · 장정필 · 최정헌 · 허선명
그 외 다수
}}}}}}}}}
* 배현경 - 배씨의 중시조, 고려 개국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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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8월 20일 태조에 의해 책록
좌명개국공신 (1등)
김사형 남은 남재 배극렴
오몽을 이제 이지란 이화
장사길 정도전 정총 정탁
정희계 조박 조인옥 조준
김인찬 이방간 이방원 이방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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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찬개국공신 (2등)
정지 유창 윤호 이민도
황희석 정용수 조기 조반
조영규 조온 홍길민 조견
박포 장담
익대개국공신 (3등)
고여 김균 김로 손흥종
심효생 안경공 오사충 유원정
이근 이백유 이부 이서
이직 장지화 함부림 황거정
민여익 임언충 장사정 조영무
한상경 한충 }}}}}}}}}

5.2. 실존 인물

<rowcolor=#fff> 인명
배국환 - 前 기획재정부 차관, 前 현대아산 대표
배기선 - 제14·16·17대 국회의원
배기운 - 제16·19대 국회의원
배길랑 - 제14대 국회의원
배덕광 - 제19·20대 국회의원
배덕진 - 前 체신부장관
배명국 - 제11·12·14대 국회의원
배명인 - 前 법무부장관, 前 국가안전기획부장
배상욱 - 前 체신부장관, 초대 특허청장
배성동 - 제11·12대 국회의원
배성범 - 前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배수곤 - 前 금융감독원장
배순훈 - 前 정보통신부장관
배영식 - 제18대 국회의원
배영호 - 前 법무부장관, 前 국회사무총장
배은희 - 제2대 국회의원
배의환 - 前 한국은행 총재
배정현 - 前 대법관, 前 대법원장 권한대행
배준영 - 제21·22대 국회의원
배중혁 - 제헌 국회의원
배재정 - 국회의원
배헌 - 제헌 국회의원
배현진 - 제21·22대 국회의원, 前 아나운서
배은희 - 국회의원
배일도 - 국회의원
배진교 - 국회의원
배기원 - 前 대법관
배만운 - 前 대법관
배석 - 前 대법관
배상갑 - 제7·8대 부산광역시장
배성례 - 공직자
배철현 - 고전문학 학자
배기동 - 국립중앙 박물관장
배용주 - 前 경찰공무원
배득식 - 前 국군기무사령관
배문환 - 前 육군 수도군단장
배현규 - 삼성증권 前회장
배창수 - SECO 창업주
배종렬 - 한양그룹 창업주
배정일 - 남광토건 창업주
배상면 - 국순당 창업주
배상명 - 상명대학교 설립자
배상갑 - 독립운동가
배정자 - 친일반민족행위자
배학보 - 독립유공자
배국태 - 대한제국 한성부판윤
배중손 - 고려 무신
배설 - 조선 무신
배흥립 - 조선 무신
배부 - 신라 상대등
배달근 - 대한제국 관료
배중세 - 독립유공자
배치문 - 독립유공자
배성룡 - 독립운동가
배정도 - 前 육군 사단장
배현국 - 前 육군 3사관학교장
배태수 - 前 부산교통공사 사장
배순태 - 한국도선사협회 前초대회장
배종렬 - 前 제일기획 대표이사
배동만 - 前 제일기획 대표이사
배조웅 - 기업인, 국민레미콘 대표
배재훈 - 기업인, 前HMM 대표
배두용 - 기업인, LG전자 대표
배상민 - 기업인, 前 롯데지주 센터장
배용범 - 기업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그룹 CEO
배종한 - 기업인, 이담엔터테인먼트 대표
배흥준 - 기업인
배상현 - 기업인
배기식 - 기업인
배정현 - 기업인
배호열 - 기업인
배보찬 - 기업인
배종찬 - 연구소장
배민수 - 삼애농업기술학원 설립자
배한철 - 정치인
배종호 - 정치인
배관구 - 정치인
배길도 - 제6·7대 국회의원
배덕곤 - 前 소방공무원
배석홍 - 前 소방공무원
배혁 - 前 소방공무원
배그린 - 배우
배정대 - kt wiz 외야수
배기완 - 아나운서
배윤정 - 안무가
배혜윤 - 농구선수
배재민 - 프로게이머, 예명 Knee
배성빈 - 프로게이머
배성웅 - 프로게이머, 예명 Bengi
배민성 - 프로게이머
배재학 - 기자, 앵커
배순탁 - 방송인
배민서 - NC 다이노스 투수
배지현 - 아나운서
배호근 - 배우
배영수 - 前 삼성 라이온즈 외야수,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배성재 - 아나운서
배동성 - 코미디언
배성근 - 前 롯데 자이언츠 내야수, 투수
배창복 - 아나운서
배수영 - 설치미술가
배다해 - 가수
배누리 - 배우
배영섭 -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배수연 - 기상캐스터
배준서 - 태권도 선수
배혜지 - 기상캐스터
배지환 - 피츠버그 파이리츠 내야수, 외야수
배소빈 - 기상캐스터
배유나 - 배구선수
배수경 - 아나운서
배병두 - KBO 리그 심판위원
배수빈[38] - 강원MBC 아나운서
배준호 - 축구선수
배인혁 - 배우
배다빈 - 배우
배수정 - 가수
배성우 - 방송인, 예명 탁재훈
배유람 - 배우
배철수 - 가수, 방송인
배정남 - 모델 겸 배우
배준영 - 보이그룹 더보이즈의 멤버, 예명 제이콥
배호영 - 보이그룹 VERIVERY의 멤버
배유빈 - 가수, 예명 은이
배유미 - 밀크의 前 멤버, 가수 뮤지컬 배우
배이삭 - 래퍼, 이루펀트 멤버, 예명 키비 (Kebee)
배수빈 - 1994년생 배우, 예명 채수빈
배용준 - 배우, 화관문화훈장
배두나 - 배우
배윤경 - 배우
배한성 - 성우
배일집 - 희극인
배세영- 작가
배종대 - 영화감독
배지희 - 인터넷 강사
배유미 - 드라마 작가
배영한 - 영화감독
배성민 - 인터넷 강사
배정민 - 프로게이머
배정미 - 성우
배정근 - 희극인
배진렬 - 프로듀서
배장윤 - 인터넷 강사
배숙현 - 프로듀서
배형준- 감독
배형진- 프로듀서
배한준 - 래퍼, 소울다이브 멤버
배현호 - 야구선수
배수현 - 치어리더
배해선 - 배우
배승민 - 보이그룹 골든차일드의 멤버
배우희 - 배우, 걸그룹 달샤벳의 前멤버
배성연 - 걸그룹 프리스틴의 前 멤버
배호 - 가수, 옥관문화훈장
배종옥 - 배우
배승희 - 법조인
배지훈 - 프로게이머
배진홍 - 성우
배영만 - 희극인
배은지 - 기업인
배재환 - NC 다이노스 소속 야구선수
배한진 - 법조인
배영선 - 배우, 예명 배소빈
배기종 - 축구선수
배제성 - 야구선수
배주현 - 걸그룹 Red Velvet의 멤버, 예명 아이린
배성서 - 前 야구감독
배요한- 야구선수
배지현 - MBC스포츠 플러스 아나운서
배수경 - 배우
배효성 - 축구선수
배건우 - 유튜버
배소연 - 가수
배금택 - 만화가
배성종- 배우
배기성 - 그룹 의 멤버
배유리 - 배우
배현준 - 보이그룹 ATBO의 멤버
배나라 - 뮤지컬 배우
배성우 - 배우
배현영 - 걸그룹 Queenz Eye의 멤버. 예명 해나
배해민 - 축구선수
배수연 - 시인
배민정 - 배우
배대열 - 프로게이머
배주영 - 디자이너
배소현 - 골프선수
배민희 - 배우
배도환 - 배우
배명훈 - 소설가
배수아 - 문학가
배성빈 - 프로게이머
배중식 - 배우
배한봉 - 작가
배소민 - 가수 상상밴드의 멤버
배수연 - 프로듀스 48 출연자
배정화 - 배우
배진예 - 걸그룹 라붐의 멤버
배진영 - (펀치)가수
배제욱 - 보이그룹 비아이지의 멤버. 예명 벤지
배승길 - 뮤지컬 배우
배현성 - 배우
배윤규 - 배우
배해진 - 모델
배하연 - 기업인
배솔비 - 배우
배은주 - 가수
배경수 - 책임프로듀서
배혜진 - 배우
배천석 - 축구선수
배명직 - 기업인
배소은 - 배우
배길태 - 농구선수
배은영 - 배우
배주영 - 성우
배윤영 - 모델
배효원- 배우
배유빈 - 걸그룹 오마이걸의 멤버
배진영 - 보이그룹 CIX의 멤버
배수지 - 배우, 걸그룹 미쓰에이의 前 멤버
배유진 - 그룹 걸카인드 멤버
배창호 - 영화감독
배기범 - 인터넷 강사
배준성 - 프로게이머
배영빈 - 야구선수
배진수 - 웹툰작가
배강욱 - 기업인
배유진 - 모델
배호영 - 프로게이머
배효주 - 뉴스엔 기자
배성서 - 前 야구감독
배윤지 - 모델
배현우 - 그룹 'C.RED' 멤버
배형근 - 국가대표 코치
배하나 - 가수
배한용 - 배우
배강률 - 농구선수
배강희 - 배우
배수민 - 걸그룹 STAYC의 멤버
배진솔 - 걸그룹 NMIXX의 멤버. 예명 배이
배준식 - 프로게이머, 예명 Bang
배영규 - 성우
배삼룡 - 희극인
배슬기 - 방송인
배승후 - 배틀그라운드 감독
배경민 - 배우
배종대 - 고려대학교 교수
배현준 - 배우
배홍석 - 배우
배장호 - 야구 선수
배재경 - 양궁선수
배세현 - 축구선수
배창현 - 야구
배수정 - 뮤지컬 배우
배규리 - 배우
배유진 - 모델
배상호 - 야구선수
배민서 - 농구선수
배태형 - 프로게이머
배지혁 - 프로게이머
배영빈 - 야구 선수
배두훈 - 뮤지컬 배우
배정아 - 배우
배하은 - 가수
배하경 - 성우
배한솔 - 배우
배성근 - 야구선수
배희한 - 무형문화재
배지연 - 가수
배연주 - 배드민턴 선수
배연희 - 가수
배선희 - 배우
배형원 - 교수
배현정 - 한국국적을 취득한 의사
배형규 - 순교자, 목사
배서우 - 배우
배성진 - 축구 선수
배현서 - 축구 선수
배재성 - 배우
배재영 - 배우
배재연 - 정치인, 대학교수
배보람 - 배우
배현희 - 국악인
배희진 - 뮤지컬 배우
배수현 - 모델
배시현 - 뮤지컬 배우
배단희 - 배우
배재현 - 배우
배서현 - 뮤지컬 배우
배민수 - 피아니스트, 연주가
배나리 - 방송인
배진아 -가수
배아현 - 가수
배현경- 배우
배재준- 배우
배경한 - 농구 선수
배광복 - 전 통일부국장
배길송 - 정치인
배효문 - 정치인
배윤주 - 정치인
배대희 - 경찰 공무원
배용태 - 정치인
배원정 - 영화 감독
배영미 - 연주가
배원희 - 바이올리니스트
배경환 - 축구선수
배진호 - 야구 선수
배형욱 - 최고경영자(CEO)
배재성 - 언론인
배희관 - 가수
배상환 - 가수
배효진 - 배우
배성윤 - 배우
배성종 - 배우
배윤주- 정치인
배예람- 유니버스 티켓 참가자
배하람- 유니버스 티켓 참가자
배현우 - 가수
배한비 - 치어리더
배한꿈 - 댄서

5.3. 가상 인물

5.4. 가명(예명)

6. 다른 나라의 배(성씨)

중국 산서성(山西省) 희현(喜縣) 예원진(禮元鎭) 배백촌(裴柏村)은 중국의 재상촌(宰相村)이라고 불리운다. 이 마을의 배씨는 역사상 최고의 명문집안이라고 할 만하다. 배씨는 진(秦:기원전200년대)ㆍ한(漢)의 고대에서부터, 위(魏)ㆍ진(晋)을 거쳐 수(隋)ㆍ당(唐) 때 전성기를 누렸다. 그 이후에도 그 여세는 남아 있었다. 배씨 중에 인물이 많고, 덕이 있는 자와 문장을 잘하는 자가 융성한 것도 중국 역사상 극히 드문 정도였다. 청(淸)나라 때 편찬한 <배씨세보(裴氏世譜)>에 따르면, 배씨는 중국역사상 재상 59명, 대장군 59명, 중서시랑 14명, 상서 59명, 상시 11명, 어사 10명, 절도사. 관찰사. 방어사 25명, 지사 211명, 태수 77명을 배출했다. 그리고 작위가 공(公)이 89명, 후(候)가 33명, 백(伯)이 11명, 자(子)가 18명, 남(男)이 13명이었다. 황실과의 인척관계를 보면, 황후가 3명, 태자비가 4명, 왕비가 2명, 부마가 21명이었다.

중국 배씨의 고향에는 사당(祠堂)이 있는데, 당나라 정관 3년(629년)에 짓기 시작했다. 규모가 크고 기세가 대단하여, 역대이래로 계속 중건했다. 현재는 전전ㆍ후전ㆍ장원방 등 건축유적만 남아 있다. 배씨 비랑(碑廊)은 중국 서예 석각의 백과전서라 할 만하다. 원래는 고배 수십 개가 있었고, 사학과 서예에 큰 가치가 있었다. 유명한 것은 <배홍비> <배경민비> <배광정신도비>와 <평화시비>이다. 이들 진귀한 석비는 천 백년 후에 문혁의 겁란을 당하고 마니 정말 아쉬운 일이다. 겨우 평화시비만 남았다.

중국 배씨의 족보는 배송지(裴松之:남조 때의 사학자)가 쓴 <배씨가기(裴氏家記)>부터 시작한다. 그 후 청나라 가경제(재위:1796~1820) 때의 <배씨세보>는 지금까지의 배씨족보 중 가장 완벽한 족보이다. 이족보는 배씨의 62대손 배솔도와 그의 아들 배종사, 그의 손자 배정문의 조. 손(祖孫) 3대가 이어서 완성한 것이다. 거의 1세기에 걸쳐 완성된다. 다행인 것은 76대손이자 당시 족장인 배부인이 문혁의 겁난 중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6권의 <배씨세보>를 기름종이로 싸서 몰래 마을의 큰 홰나무 가운데 숨겨두었다. 그리하여 족보가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중국 배씨 후손 중에서 역사에 전(傳)을 남기거나 열거된 자가 600여 명에 이르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자 만도 1000여 명 이상이다. 7품 이상 관리들만 3천여 명에 달한다. 배씨에서 배출된 인재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뿐 만 아니라 철학가. 사학가. 법학가. 지도학가. 시인 등도 배출했다. 서진(西晋)의 정치가 배수(裴秀)는 정치 쪽에서 일생동안 활동했지만 중국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창제한 <제도육체(製圖六體)>는 중국고대 지도제작학의 이론적 기초가 되고, 고대의 지도 제작에 수학적 과학적 근거를 마련해 준다. 이 이론은 이후 명나라 말기까지 1400여 년간 활용 된다. 그가 쓴 <우공지역도> 18편은 중국 최초의 지도학의 전문서적이다. 영국의 과학기술사가인 ‘니당’은 중국지도 제작학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배수의 아들 배위(裴頠)는 <숭유론(崇有論)>을 썼다.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무(無)는 유(有)를 창조할 수 없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유”는 만물의 존재변화의 기초라고 하는 등 소박한 유물주의관념을 보여준다. 이리하여 그는 서진시기의 현학귀무론에 대항하는 유물주의 철학사상가가 된다.

남조의 사학자 배송지(裴松之)는 <삼국지>에 주석을 다는데, 원저의 3배 분량이 된다. 그는 역사에서 주석을 다는 새로운 체제를 확립한다. 송문제(宋文帝)는 이를 읽어본 후에 “이것은 불휴의 명작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아들 배인(裴駰)은 <사기>에 주석을 달아서 <사기집해> 80권을 쓴다. 이는 <사기>가 세상에 나온 후 처음으로 나온 종합적 주서서이다. 당나라 때 사마정의 <사기색은>. 장수절의 <사기정의>와 합쳐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라고 불린다. 배송지의 증손인 배자야(裴子野)는 <송략(宋略)> 20권을 편찬한다. 송서의 작자인 심약은 이를 보고 감탄한다. “내가 미칠 수 가 없다” 당나라 때 유지기는 “세상에 송나라 역사를 말하는 자는 배자야의「략」을 최고로 치고, 심약의「서」를 다음으로 친다. 배송지ㆍ배인ㆍ 배자야를 합쳐서『사학삼배(史學三裴)』라고 부른다. 명신 배구(裴矩)는 후주ㆍ수ㆍ당의 3조 원로이다. 정치를 함에 있어서 청렴하고 조심했으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민부시랑, 내사시랑, 상서좌승, 이부상서 등의 직을 지냈다. 수양제 때 배구는 명을 받아 장액(지금의 감숙)으로 가서 서역각국과의 무역을 담당했다. 각국 상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는 서역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 등에 대한 대량의 정보를 획득한다. 이를 책으로 정리해서「서역도기」3권을 쓴다. 책에서 서역 각국의 상황을 대량 소개하고 여러 지도를 그린다. 돈황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3갈래의 길을 표시하는데, 그 중 중도(中道)와 남도(南道)가 역사상 유명한「실크로드」이다. "서역도기"는 중국의 수ㆍ당시기 서부지역사회 상황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중국은 물론 베트남에도 배씨가 있다. 중국의 배씨(발음 Pei)는 2013년 기준 중국 성씨 인구 순위 153위 약 104만 명이다. 진(秦) 환공[41]의 아들인 후자침(后子鍼)을 시조로 삼으며[42], 중국 중세의 문벌 귀족이었던 성씨[43]로 현재는 河南(허난)에 주로 분포한다. 베트남의 배씨(발음 Bùi)는 2022년 기준 베트남 성씨 인구 순위 9위 약 207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1%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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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순 배씨(和順裵氏) 시조 배련(裵練) 있으며, 남해 배씨(南海裵氏) 시조 배순(裵循) 등이 있다. [2] 삼국사기에는 裴賦로 기록되어 있음. [3] 只他라고도 한다. [4] 분성은 현재의 김해 지역이다. [5] 성주 배씨라고도 한다. 성산은 현재의 성주이다. [6] 달성은 현재의 대구이다. [7] 곤산은 현재의 곤양이다. [8]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 (卜智謙)등이 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성이 없었다.고려 건국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홍술(弘述)을 홍유(洪儒), 백옥삼(白玉衫)을 배현경(裵玄慶), 삼능산(三能山)을 신숭겸(申崇謙), 사귀(沙貴)를 복지겸(卜智謙)등으로 태조 왕건이 성을 하사했다. 홍유는 부계홍씨(缶溪洪氏), 배현경은 경주배씨(慶州裵氏), 신숭겸은 평산신씨(平山申氏), 복지겸은 면천복씨 (沔川卜氏)로 성관(姓貫)도 함께 받았다 한다. [9] 배상공(裵尙恭)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는데 이때 이성계(李成桂)가 공양왕(恭讓王)을 폐(廢)하고 왕위(王位)에 오르려 하므로 이를 개탄(慨嘆)하고 물러나 안동(安東)에 내려와서 전원생활을 하였다. [10] 해당파에서 독립이라 기록하였다. [11] 배상지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權(배권)은 사헌부 지평, 桓(배환), 楠(배남), 杠(배강)은 문과에 급제하여 桓(배환)은 관찰사, 楠(배남)은 사헌부 감찰, 杠(배강)은 이조정랑을 지냈다. 동생 尙恭(배상공)도 문과에 급제하여 전서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素(배소)도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지냈다. [12] 태조 왕건은 고려 개국 후 배현경에게 경주 배씨(慶州 裵氏)를 사성하였고, 조선 중종에는 배충과에게 경주처사(慶州處士)의 호(號)가 내려졌다. 후손들은 경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13] 분성(盆城), 성산성주(星山星州), 달성(達城), 흥해(興海), 곤산(昆山)을 제외한 분파 [14] 조선전기 금강산도, 세한삼우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15] 전라도사 배상익(裵尙益)의 아들이며,조선후기 팔사유고를 저술한 학자 [16] 기원전 57년,수도 금성이었고,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 [17] 경주慶州는 본래 신라의 옛 수도이나,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이 항복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다만 경주라 칭하였다. 성종 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쳐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고 현종조에는 강등시켜 경주방어사로 하였으며 신라 복귀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관내의 주·부·군·현을 빼앗아 안동,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도 하였다. 조선조 태종 때에 경주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고 1895년에 군이 되었으며 1955년 경주시 설치와 더불어 나머지 지역은 월성군으로 되었다. [18] 배위준의 현손 배인경이 충선왕때 흥안(성산) 부원군에 봉해졌기에 성주(星州)배씨라 하였다 [19] 성산은 성주의 옛지명으로 경상북도남서쪽에 위치한 성주의 옛 지명이다. [20] 분성배씨(盆城裵氏)는 고려 창업의 일등원훈 배현경의 6세손인 배원룡(裵元龍)을 1세조로 받들고 있다.‘분성배씨대동보’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가락군에 봉해진 배사혁(裵斯革)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공민왕때 병부상서 겸 도원수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분성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1세조로 하고 분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분성배씨는 배원용의 증손자 대에서 4파로 갈라진다. 한편 분성은 김해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분성배씨를 김해배씨라고도 한다. [21] 배사혁의 첫째 아들로 고려 공민왕때 병부상서를 지냈고 분성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배원룡을 시조로 하고 본관(本貫)을 분성으로 하였다. [22] 분성은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가락국의 문화중심지였다. [23] ‘기묘보己卯譜’에서는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배헌裵軒을 시조로, 고려 공민왕 때 도원수都元帥로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진 배원룡裵元龍을 3세로 계통을 세웠다.신유보辛酉譜’에 따르면 수관조受貫祖(관을 받은 조상)를 배원룡裵元龍으로 하여 기세조起世祖로 계대하고 있다. 발간사에는 ‘시조인 신라 한지부장공漢祗部長公 이래 고려 건국에 수훈을 세운 태사무열공太師武烈公이 중세현조中世顯祖이며 수관대조受貫大祖인 분성군盆城君’이라 전해진다. [24] 대구광역시 달성(達城)은 현재 대구광역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삼한시대에는 달구화 또는 달구벌이라 불렀다. 6세기 경에는 신라에 귀속되었다 [25] 달성 배씨의 시조는 배운룡(裵雲龍)이고 시조(始祖) 배현경(裵玄慶)의 손자의 손자 배사혁의 셋째 아들이다. [26] 흥해배씨는 고려조에 검교장군에 오른 배경분(景分)을 일세조로 계대하며, 그의 6세손 전(詮: 전리판서 영지의 아들)이 충혜왕(忠惠王) 때 호군을 거쳐 군부판서로 조적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功)을 세워 일등좌명공신에 책록되고 흥해군에 봉해졌으며 흥해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27] 궁비(宮婢)의 소생. 충혜왕의 총애로 호군이 되어 기무를 장악했으며 뒤에 군부 판서에 올랐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의 난 때 왕을 호종, 그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흥해군에 봉해졌다. [28] 자는 명서, 호는 금역당, 관찰사 삼익의 아들. 1585년(선조 18) 성균관에 입학,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대장 김해(金垓)의 휘하에서 부장(副將)으로 활약했다 [29] 흥해(興海)는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일대의 옛 지명 [30] 조선시대에 양지 현감을 지냈으나 연산군의 난정이 계속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31] 조선 말에 이조좌랑을 거쳐 병조정랑을 지냈으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32] 곤산(昆山)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사천군(泗川郡)에 속해있는 곤양(昆陽)의 옛 지명으로 고려(高麗) 때 곤명현(昆明縣)이라 하였고, 1018년(현종 9) 진주(晋州)에 속하였다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곤양(昆陽)으로 고쳤다.1895년(고종 32) 사천(泗川)에 속하였다가 곧 회복하여 군(郡)이 되어 진주부 관할이 되었고, 1913년 군을 폐하고 서면(西面)․금양면(今陽面)은 하동(河東)에 소속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사천에 병합되어 곤양면(昆陽面)․곤명면(昆明面)으로 남아 있다. [33] 곤산 배씨는 배맹달(孟達)의 아들 4형제가 현달(顯達)했고, 그들의 후대에서 훌륭한 인재(人財)가 많이 배출되어 가세(家勢)가 크게 융성하기 시작했다.배맹달의 맏아들 배숙흥(叔興)은 조선조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거쳐 진주 병마절도사(晋州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둘째 배사종(嗣宗)은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양지 현감(陽智縣監)을 역임했으나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여 난정이 계속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음애(陰崖) 이운(李耘)을 비롯한 충암(沖菴) 김정(金淨) 등과 도의(道義)를 교유했다. [34] 조선 중기 교서관 [35] 고려시대 국자감진사 [36] 조씨 또한 그렇다. 정자체: 曹( 조조, 차오루가 쓰는 글자), 국내용: 曺 [37] 문하좌시중은 문하좌정승을 거쳐 좌의정으로 변한다. 이런 점에서 태조 때 문화좌시중을 지낸 배극렴은 초대 좌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의정은 태종 때에 가서야 생긴다. [38] 한끼줍쇼에 출연한적이 있는 KG그룹의 첫째 며느리로 결혼 이후로는 아나운서를 은퇴하였다. [39] 신작에서는 연그린으로 로컬라이징 되었다. [40] 본관은 주한미군사령부가 있는 평택으로 하여 평택 배씨이다. 한미동맹협회가 작명하여 선물한 이름이다. [41] 재위 기원전 603~577 [42] 환공의 재위 기간으로 미루어 보아 한국보다 약 6세기 가량 앞선다. [43] 하동 배씨(河東裴氏)로 시칭(時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