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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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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 베트남 북부를 통치하던 국가에 대한 내용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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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관련 법률3. 특징
3.1. 동기3.2. 납북 왜곡 사례3.3. 현대
4. 실제 사례
4.1. 1940~50년대4.2. 1960년대4.3. 1970년대4.4. 1980년대4.5. 1990년대4.6. 2000년대4.7. 2010년대4.8. 2020년대
5. 기타 및 날짜 불명사건6. 기준에 대한 논쟁7. 월북자들의 결말8. 기타9. 해외 사례10. 월북자11.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 남한 사람이 자발적 의지로 북한에 주거를 목적으로 넘어가는 행위'를 뜻한다.

월북과 구별되는 개념들로는 외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입북(入北), 자유 의지가 아닌 납북(拉北), 북한에 잠깐 갔다 오는 방북(訪北) 등이 있다. 남한에선 당연히 국가보안법상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되는 범죄행위이지만 북한에서는 '의거입북'이라는 말로 미화된다고 한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는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이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정치 탄압으로부터의 도피[1]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월북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북한이 주체사상을 내건 사이비 종교에 가까운 국가가 된 1990년대부터는 정치적 탄압이나 사상적 신념을 이유로 월북하는 일은 거의 없다. 북한의 경제 상황이 매우 나빠지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에는 월북하러 가도 그냥 남한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경우도 많다.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받기 싫어서 월북하거나[2] 경제적 빈곤, 사회 비관으로 월북하는 등 북한에서 받아봐야 (북한 기준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 가면 특히 그렇다.

2. 관련 법률

국가보안법 제6조(잠입ㆍ탈출)
① 국가의 존립ㆍ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3]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잠입하거나[4] 그 지역으로 탈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②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지령을 받거나 받기 위하여 또는 그 목적수행을 협의하거나 협의하기 위하여 잠입하거나 탈출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5]
[ 미수ㆍ예비ㆍ음모죄 펼치기ㆍ접기 ]
③ 삭제
④ 제1항 및 제2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⑤ 제1항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⑥ 제2항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3. 특징

3.1. 동기

월북은 북한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차이가 현저하게 벌어진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자유도 없고 심지어 한국에서 무료배식을 받는 노숙자들보다 못 먹는 수준의 최빈국이기에 월북을 하는 행동에 대해 이해가 불가능하지만 단독정부 수립 이전과 6.25 전쟁 도중 월북한 좌익 세력의 경우에는 대개 납득이 가는 행위였다. 해방 정국에서 공산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계열을 포함한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적인 영향력을 가진 정치 세력이었는데 미군정은 고문 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일으키며 좌익 탄압을 본격화했다. 분단 체제가 고착화된 후 6.25 전쟁 중에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으로부터 살아남은 좌익은 생존의 문제였으므로 월북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 당시만 해도 북한은 훗날 김일성이 집권하는 만주파와 갑산파, 연안파, 소련파 등 여러 파벌이 존재한 연립정부의 형태로 그럭저럭 권력의 균형이 잡혀 있었기에 반공주의 성향이 매우 강했던 이승만 정부에서 활동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이에 반감을 품고 북한으로 간 경우도 있었다.[6] 거기에 6.25 전쟁 초기에 북한에게 사흘만에 서울이 점령당하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이나 기타 지역에 고립된 인사들이 '이제 대한민국은 끝났구나'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월북하거나 이를 이용해서 북한이 '어차피 전쟁은 우리가 이길 텐데 이참에 우리한테 협력하시오'라는 식으로 회유한 경우도 많다.

미군정이 통치 3년 동안 행정에 있어서 인민위원회와 건준을 해체시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화폐 발행 남발로 물가 폭등도 일어나고 토지 개혁도 미루는 등 정무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무능하기 짝이 없던 데 반해 소련군정 내지 김일성을 위시한 정치 세력은 이보다 훨씬 유능하거나 조직력이 뛰어나서 토지 개혁을 재빨리 단행하고[7] 인민위원회를 활용해서 행정의 안정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강력한 물가 통제 정책으로 물가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공업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따라서 남이든 북이든 초토화되었던 6.25 전쟁 시기를 제외해도 광복 후로부터 몇십 년간 북한 경제가 남한보다 안정세에 있었다는 것도 월북의 큰 동기였다. 아래의 민족주의자들이 월북한 사례도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면서 혹한 것이 동기였다.[8]

월북자들 가운데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들도 월북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주로 1948년 남북협상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극로와 홍명희가 있다. 이들은 원래 민족주의자들이었지만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오랫동안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영화계도 마찬가지였는데 1948년 이규환 감독의 작품 <해연>은 개봉 당시 문교부 추천 영화였지만 출연진 및 스태프진 중에 박학, 김동규, 남미림 등의 월북자가 있다는 이유로 관계당국에 의해 압수당했지만 당시에는 월북 영화 작품의 상영을 금지할 만한 법적 근거가 없어서 필름이 회수되어 부산, 광주 등지에서 상영을 재개한 바 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뒤엔 월북 영화인들의 영화는 전부 상영이 막혀 있었으며, 광복 이후 최초로 개봉된 한국 영화 < 자유만세(1946, 최인규 감독)>의 경우는 1975년 발견 당시 독은기, 박학 등 월북 영화인들의 이름을 지우고 대사마저 전부 재녹음했다. 또 원로 영화인들의 회고록에서조차 월북 영화인들은 역할이 축소되거나 행적이 왜곡돼 있고 1986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북으로 간 여배우>에서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위해 월북 영화인들의 행적을 암울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1989년 월북 예술인 해금 조치 이후에도 월북 영화인들은 1945년 8.15 광복 전에 제작된 작품들이 남아 있지 않아 논외 취급을 받았고 1980년대 후반 이후 이효인, 변재란 등에 의해 북한 영화 연구가 진전되었다 해도 월북 영화인들이 활동한 1950~60년대 작품들은 자료가 미비해 잘 다뤄지지 못했다. 그나마 1990년에 한국필름보관소가 일본으로부터 <망루의 결사대(1942, 이마이 타다시 감독)> 등 일제 말기 영화 3편을 입수해내 월북 영화인들의 행적을 찾아냈다. 1992년 제작자 이강수가 프랑스에서 공개한 < 마음의 고향(1949, 윤용규 감독)>도 있지만 이후 지지부진해지다가 2003년 이효인이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으로 취임한 뒤 중국 러시아 등지의 영화자료원을 찾아다니면서 일제 말 영화들을 점차 발견해 문예봉 등의 월북 영화인들의 행적을 발굴했지만 이들에 대해서 영화학계 등지에서 관심을 잘 가져주지 않았다. 이러한 사연은 영화연구가 한상언의 2019년 논문 < 해금할 수 없는 것을 해금하기>에서 잘 다루고 있다.

1980년대 성공적으로 중공업 테크를 타며 경제발전을 해나가며 북한과 맞먹는 경제력이 되고 추월을 하던 시기, 북한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이기겠다며 해외에서 유학하거나 거주중이던 한국 국적 사람들 중 뭔가 사정이 좋지않은 이들에게 직위와 돈을 약속을 하는 회유성 월북과 회유가 안 되는 인물들은 납치하여 북한으로 강제로 월북시킨 케이스가 존재한다. 고난의 행군으로 경제적으로는 물론 국방으로도 밀려 사실상 체제경쟁에서 패배한 북한은 대남공작 외에 해외에서 활동하는 공작비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납북은 자제하고 있고 월북은 이용가치에 따라 판단해 받아들이고 있다.

3.2. 납북 왜곡 사례

몇몇 납북자들은 월북자로 오해받아서 문제가 되었다. 특히 북한 쪽에서 납치해 놓고 "공화국을 동경하여 자진 월북하였다"고 대외 선전을 하고 여기에 한국 정부도 동조 내지는 착각을 해서 빨갱이 취급을 받은 경우가 있다. 실제로 1960~80년대에는 몇몇 납북당한 사람들이 한국으로 돌아온 뒤 간첩으로 몰리거나 심지어 공안사건으로 조작되기도 했다. 정지용 시인은 6.25 전쟁 중 실종되어[9] 월북인지 납북인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월북 작가로 낙인찍혀 1988년 납·월북 문인 해금 조치[10] 이전까지는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불온 시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11]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던 엄항섭, 조소앙, 김규식, 안재홍 등도 납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 시대에 자발적으로 월북했으며 북한 간첩으로 대대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식으로 알려져 버렸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거주하던 그들의 가족들은 연좌제의 피해를 봤다. 안재홍의 아들인 안정용은 혁신 계열 정치 활동을 했으나 납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어 생활하는 데 있어서 매우 곤궁했다고 한다. 이들은 6.25 전쟁 후 반공 성향이 강해진 국민들의 심적 안정과 정권의 정통성 홍보를 위해 자진 월북으로 결론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국군 포로중에서 북송된 경우가 상당히 많았는데. 포로가 된 북한군 심리전 장교의 증언[12][출처] 박정환 소위의 증언[14][출처]을 종합해보면 월맹군과 북한군은 포로들에게 여기서 죽을래? 북한에 갈래?를 강요했고 이겨내지 못한 포로들은 북한으로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정부와 군부에서는 인정과 문제해결은 커녕 배신자로 못을 박았고. 지금도 진상파악은 커녕 덮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는데. 자세한건 베트남 전쟁/국군 포로 안학수 항목에서 다룬다

실제로 자진 월북자와 납북자의 가족은 국가시험에 응시하거나 사관학교에 지원할 수도 없었고 출국도 제한을 받았던 데다 지독한 감시는 물론이고[16] 거주지를 옮기는 것까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고문까지 당하거나 아예 간첩으로 조작되기도 했다. 사실 남한 정부는 남한에 비해 북한의 경제 성장과 주민 생활 수준이 높았던 데다 북한의 도발이 지금보다 덜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이북은 어떻더라'는 귀환 어부들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북한이 납북 어부에게 간첩 교육을 시킨 사례도 있었기에 의심은 더욱 깊었다고. 또 어부들의 잦은 납북, 귀환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의도적인 행위로 비쳐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분단 체제가 만든 비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반대로 자진 월북하려던 사람을 납북으로 둔갑시키는 경우도 있었는데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윤태식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외에도 대한민국에 남은 가족들의 집안이 상류층이며 나라에 끼치는 영향도 많은 거물인 경우에는 연좌제 방지를 위해 월북자임에도 불구하고 납북으로 허위 기록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3.3. 현대

냉전 후에는 종북주의자[17] 또는 바보가 아니고서야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는 일이 되고 말았다. 선전해 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북한으로 넘어가도 북한에서 도움 안 된다고 그냥 남한으로 되돌려보낸다. 물론 1980년대까지야 그런 사람도 잘 받아주기는 했지만 북한도 국가에서 먹여 살리던 시대는 한참 전의 일이고 국가 재정의 빈곤화로 개개인이 알아서 장마당에서 벌어먹는 세상이라 그냥 포기하는 것이다. 범죄자 같은 사람이야 그냥 안 받아들이니만도 못한 작자들이기도 하고. 애초에 북한에서 일반인들에게 집 주고 쌀 주고 했던 것도 최빈국 수준으로 경제가 파탄나기 이전인 1995년까지지 경제가 완전히 파탄난 1996년 이후에는 식량 배급도 잘 못해줘서 서민들이 장마당에서 부업으로 벌이하는 것이 일상이 된 지도 이미 30년 가까이 되었다. 즉, 설령 월북해서 받아준다 쳐도 돈 없으면 그냥 듣보잡 내지 꿔다 놓는 보리자루 신세인 것이고 떵떵거릴 정도로 잘 먹고 잘 살려면 최소한 남한 돈 수천만 원 정도는 챙기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18]

거기에다가 오랜 시간 동안 인프라 보수 같은 것도 제때 진행되지 못해서 철도는 낡아빠졌고 도로는 비포장 천지에 수도나 전력 인프라도 낙후되어 있어 전기를 그나마 마음대로 쓰려면 비싼 돈 들여 태양열 전지를 사야 하고 물도 깨끗한 거 마시려면 비싼 돈 들여서 정수기를 사든지 아니면 생수를 사다 마셔야 된다. 즉, 북한 물가가 싸다고 해도 북한에서도 남한 중산층급의 생활을 하려면 생각보다 생활비가 많이 든다는 얘기다. 비록 공공 요금이나 교통비는 매우 값싸고, 부동산도 남한에 비하면 월등히 싸기는 하지만 공산품은 수입품이 많아서 생각보다 싸지 않고 공공 요금이 싸다고는 해도 인프라가 워낙에 낙후되어 있어서 추가로 돈이 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남한 드라마 등 서방 국가 대중매체도 잘못 보다 걸리면 며칠간 험하게 삽질을 할 각오도 해야 된다. 물론 1980년대 이전의 빈곤한 생활을 애써서 경험하고 싶으면 못할 것도 없기는 하지만(...) 북한 당국에서도 그런 사람은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며 그냥 남한으로 되돌려보낸다.

하지만 북한이탈주민의 월북 시도는 냉전 이후에도 드물게 발생하는 편이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탈북자라는 좋지 않은 시선 때문에 남한 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북에 있는 가족과 고향이 그리워 재입북을 시도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심지어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또 다시 북한을 탈출하여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엄청난 케이스도 드물게 있다.[19]

의외로 간첩들은 합법적으로 제3국을 경유하면 그만이다. 북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상당수가 무역업이나 교역, 유학, 외화벌이 사업이나 식당 근무, 제조업체 근무 같은 해외 파견 근무, 친척과의 만남으로 중국을 드나드는 경우가 상당한지라 이런 쪽 직업이나 관계를 한다고 적당히 신분세탁을 하면 되고, 남한 입국의 경우에는 중국에 진출한 남한 사람들이나 조선족들과 적당히 인맥 관계 만들어서 입국하거나 의심받으면 몽골이나 베트남, 캄보디아 등으로 가면 된다. 중국에서도 간첩은 간첩이니 뭐 잡기야 하겠지만 일단 명목상 우호국인지라 무작정 잡는다고 난리를 치는 것은 모양새가 아니기 때문에 대만 간첩 잡는 것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잡지는 않는다. 그래서 번거롭게 땅굴을 파거나 휴전선을 넘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1990년대에 휴전선을 통해 무장공비가 넘어온 경우는 있었다. 21세기의 간첩들은 20세기처럼 도보 또는 잠수함 등을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오지 않고 위조 여권을 가지고 조선족, 탈북자, 한국계 일본인 등의 행세를 하면서 몰래 들어온다.

이 때문에 2000년대까지는 단순 사회불만을 이유로 월북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이마저도 거의 없어졌으며 시도하더라도 북한 당국에서 선전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대부분 추방시킨다. 때문에 2010년대부터 월북자라고 하면 대부분 일부 탈북자들이 재입북하는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4. 실제 사례

1995년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월북 군인 수는 1953년부터 1995년까지 453명으로, 이 중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391명, 1970년대에는 42명, 1980년대에는 17명, 1990년부터 1995년까지 3명이 월북했다. #

1980년대까지라면 월북자에 대한 대접이 괜찮았기 때문에(감시는 심하기는 했지만), 궁지에 몰린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일이었지만 1990년대에 북한이 빈곤한 국가로 전락하면서 왜 하는지 모르는 짓이 되었고 북한에서도 먹여 살리기 힘들다며 송환하는 것이 일반적이게 되었다. 하술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사고나 범죄를 일으킨 사람이나 군인들도 상당히 많이 월북했다.

공식적으로 탈북민 출신이 아닌, 순수 남한 출신의 월북이 승인된 것은 2009년 강동림 월북 사건이 마지막이다.

2020년 10월 6일, 통일부의 통계에 따르면 근 10년간 총 55명이 월북했으며 이 중 북한에 그대로 체류한 것은 30명이었고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것은 25명이었다. 모든 월북자 중에서 북한이탈주민은 29명이었다고 한다. #

연도별로는 2012년 7명, 2013년 7명, 2014년 3명, 2015년 3명, 2016년 4명, 2017년 4명, 2019년 1명이었다. 북한이탈주민의 재입북 사유로는 남한 정착 과정의 어려움, 재북가족에 대한 그리움, 기타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통일부는 밝혔다.

4.1. 1940~50년대

4.2. 1960년대

4.3. 1970년대

4.4. 1980년대

4.5. 1990년대

4.6. 2000년대

4.7. 2010년대

4.8. 2020년대

5. 기타 및 날짜 불명사건

6. 기준에 대한 논쟁

월북자를 해방 후 38선 이남에 살다가 이북으로 넘어간 이들, 그리고 휴전 후에는 휴전선 이남에 살다가 이북으로 넘어간 이들로 분류한다는 기준은 명확하다. 하지만 고향이나 활동 지역이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북부 지방이었으며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간 이들을 월북자로 분류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물론 한국 입장에서 보면 북한으로 '가 버린' 인물들이라 월북자로 분류할 수 있지만 '월북한' 이들 입장에서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갔다고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인 백석이나 작곡가 이면상 같은 경우에는 각각 평안북도 정주 함경남도 함주 출신이지만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월북자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월북이라는 단어의 기준을 재정립하거나 북한 지방이 고향이었던 인물들에 대한 재분류용 단어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귀북이라든가...

이런 모호한 면은 냉전 시절에 위의 납북자를 자진 월북자로 왜곡한 것처럼 악용되기도 했다. 본인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와는 상관 없이 그냥 고향에 있고 싶었거나 다른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처 떠나지 못했을 뿐인데 마치 공산주의자라서 북한에 협력하기 위해 남은 것으로 왜곡한 사례가 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유 대한'으로 월남했어야 마땅한데[23] 북한에 남았으니 '빨갱이'라는 식. 위에 언급한 백석과 그의 작품들도 이런 식으로 다른 월북 작가와 함께 금지했다. 리면상이 작곡한 유명한 노래가 있는데 작곡자 생략하고 '민요'로 언급해서 남한에서 잘만 불렸다. 대표적으로 이 노래.

7. 월북자들의 결말

북한이 안 받아주거나 남한으로 돌려보내는 게 오히려 장기적으로 다행이다. 받아줄 경우 거의 대부분은 정치범수용소 행으로 일생을 비참하게 마치게 된다. 이용가치에 따라 몇 달 있다가 갈지, 몇 년 있다가 갈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끔 넘어가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귀빈 대접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건 북한 경제가 여유가 있던 1990년대 이전의 일이다. 북한의 경제가 급속히 빈곤화된 1990년대 이후에는 상술하듯이 평범하게 경제적인 동기나 소속된 공동체에 대한 비관으로 인하여 월북했거나 범죄를 일으킨 다음에 북한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그냥 되돌려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고위급 인사 또는 탈북을 했다가 다시 북한으로 넘어간 재입북자 정도만 체제 선전용으로 쓸모 있으니 대접받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도 얼마 가지 않아 대부분 말 그대로 증발하게 되는데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월북자들은 따로 구역을 정해서 아파트처럼 살림집으로 관리되어 있는 곳에서 생활하며 가끔씩 당국에서 월북한 고령자의 생일잔치를 할 때 장병들을 모아서 생일 축하파티를 열어주곤 하는데 월북한 군인을 동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1961년에 소대원들을 데리고 월북한 당시 소위였던 이태복은 2018년에 80세를 맞이하여 생일상을 차려주었는데 그것이 대남선전전단을 통해 알려지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의 최신 사정에 능통하다는 이점 때문에 대남공작 관련 훈련 기관의 교관 내지는 대남방송 관련 업무에 배치하는 경우가 월북한 사람들 중 일부다.[24] 대외 선전 값어치가 높은 사람은 방송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또한 소수다. 조선일보 NK 리포트에 따르면 고위직의 월북자를 제외한 그냥 월북자들 중 적어도 2~3명 정도는 선전 잡지에 고정 출연한다고 한다. 또 대남선전도 사실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런 류의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월북자들 중 정치인은 상당수가 뒤끝이 좋지 못했다. 박헌영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김일성은 월북한 남조선로동당 출신들을 정적으로 취급했다. 한국근현대사 공부를 열심히 해 보면 알겠지만 북한 정치판은 창립 이후 숙청을 거듭하여 김일성파(갑산파 중 강경파와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파 두 계파 모두)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비단 한국사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사 전반을 공부하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지만 스탈린부터 마오쩌둥까지 소위 현실사회주의권의 지도자들은 막상 필요하면 트루먼, 닉슨 같은 양반들이랑 악수하고 '우리는 공존을 원한다' 따위 서방에 대한 립서비스는 잘만 하면서도 자기들 손이 닿는 코민테른, 트로츠키 주의자, 비 마오쩌둥 계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같은 자기 말 안 들을 것 같은 다른 좌파들 숙청하는 데 훨씬 더 열을 올렸다.

북한 정권에서 남로당파와 갑산파 숙청 같은 좌익 내 팀킬 작업 또한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무엇을 했으며 얼마나 열성적인 좌익이었는지에 상관 없이 김원봉 같이 노선이 조금이라도 달랐거나 조금이라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했던 사상적 월북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경우가 대다수다. 다만 이러한 경우와 별 상관이 없는 학술인, 예술인은 양극으로 갈리는데 본업에 종사하면서 괜찮은 삶을 살거나 노동 지역으로 배정받아 활동이 완전히 끊긴 채 심한 경우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25] 반면 일부 월북한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 가운데 극진한 대접을 받은 사람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홍명희가 있다. 해방 직후 좌익으로 널리 알려진 문인들이 월북 이후 대부분 숙청당한 데 반해 홍명희는 종신토록 고위직을 지내며 북한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명망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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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부터 차례로 설명하자면
월북자들은 보다시피 1980년대까지는 이런 삐라에 출연했다. 현재 정보가 없기 때문에 저 삐라에 출연한 사람들의 생사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018년 대남선전방송에 사진에 있는 사람들 중 80%는 모두 조선인민군 군관복을 입고 출연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걸로 보인다.

6.25 전쟁 직후부터 70년대까지는 대한민국 내 사정에 정통하거나 친척과 같은 연고자가 있는 것을 이용하여 남파 간첩으로 훈련시켜 역침투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순재가 주연한 고영남 감독의 영화 ' 탈출' 이 바로 이런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 모 국군 하사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정 하사가 북에 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지만 적어도 그 영화에서는 이순재가 연기한 정 하사는 자진 월북이 아니라 비무장지대에서 납치되어서 자진 월북으로 위장되었다. 그가 간첩훈련소에서 만나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진 월북자이다. 결국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척 연기하여 북한의 신뢰를 받고 남파 간첩으로 대한민국에 돌아오자마자 동료들을 모두 쏴죽이고 국군 부대에 투항한다. 남과 북 모두 연좌제를 실행한 이유가 사실 이런 인간 관계를 염두에 두고 첩보 활동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2013년 10월에는 월북자 6명과 시신 1구를 돌려보냈는데 이 때 송환된 사람들은 월북한 이후 2~3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남쪽으로 송환되었고[26] 여기에 한 명은 부부 불화로 살해한 사실까지 확인되어 모두 남한에서 처벌받았다.[27] 이것은 대한민국 당국에 '우리도 월북자 돌려보낼 테니까 탈북자 문제로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도 담겨있다.[28]

북한 입장에서도 돈이 없는 채로 월북하면 뭘 뜯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문제를 일으킬 이유도 없다. 위에서 월북 시도를 하다가 거절당한 이야기처럼 본인이 북한의 기준[29]으로 대한민국에서 거물이라든가 소수의 특기를 지닌 사람이 아닌 이상 북한에서도 월북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부분 돌려보내며 국정원에서 인수해 간다. 2010년대 이후에는 북한에서 월북을 받아들인 사례는 최덕신의 아들로 상징성이 있는 최인국 정도다.

월북했다가 기적적으로 탈북해 살아서 남한으로 돌아오게 되면 가장 먼저 가는 곳은 국정원 또는 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 방첩사, 검찰청 공공수사부 조사실일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대놓고 위반했으니 교도소에서 지내야 할 수도 있다. 사안에 따라 국가보안법상으로는 무죄가 될지는 몰라도[30] 최소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처벌된다.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모르고 월북하더라도 북한에 방문하려면 반드시 통일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남북교류협력법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이 되면 아주 운이 좋아서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 내지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는데 바꿔서 말하면 인생에 빨간 줄 그이는 건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에 자진해서 간 외국인들도 있는데, 특히 미국인이 더 좋은 대접을 받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처럼. 그들의 자칭 '원수 미제놈들이 어버이 수령님의 은혜를 깨우치고 귀순했다'는 등으로 온갖 선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옛말이라 트레비스 킹은 엄연한 미국인 월북자임에도 추방 결정 되었다. 물론 이는 트래비스 킹이 월북 전에도 사고만 치던 인물이라 북한 입장에서도 받아줘받자 전혀 이득이 없어 추방한 것이기도 하다.

8. 기타

9. 해외 사례

9.1. 독일

독일은 남북이 아닌 동서로 분단되어 있었는데 한국으로 치면 월북자가 되는 경우는 독일에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가는 월동자다. 다만 당시의 동독은 서방 국가들도 인정할 만큼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와 함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잘 사는 축에 속해서 동서독 간에 삶의 질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32] 때문에 동독인이 서독으로 넘어간다면 이는 자유를 얻으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대부분이었지[33] 경제적인 이유는 거의 없었다.[34]

당연히 서독인이 월동하는 경우도 공산주의자들의 사례가 절대다수이기도 했지만 동독인과 사랑을 해서 결혼하고 동독으로 이주한 사례도 극소수 있었다. 그 외에 징병제가 싫어서 도망갔던 자[35], 범죄자, 일부 목회자 등이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36]. 그나마도 서독-동독 관계는 지금의 남북관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굉장히 돈독하고 상호 교류도 상당했기 때문에[37] 서로의 현실에 대해 잘 알았던 만큼 구태여 월동을 하려는 사람도 드물었다. 남북한 간의 교류가 전무하다시피 해서 북한 측의 어줍잖은 선전에 낚여서 월북한 경우가 많았던 70년대의 남한과는 다른 부분이다. 자세한 사항은 동독 베를린 장벽 문서로.

독일의 전 총리 앙겔라 메르켈 가족이 월동자였다. 메르켈은 서독의 함부르크 출신이었지만 어렸을 때 목사인 아버지가 동독으로 발령 나면서 동독으로 건너갔다.

9.2. 베트남

베트남은 1954년 북위 17도선이 굳어지면서 대규모의 월남자가 나왔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막장 이미지와 호찌민 정권의 민족주의 이미지 때문에 월남자가 거의 없었으리라 지레짐작하기 쉬운데 북베트남은 엄연히 종교와 야당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리고 선술한 월남자들은 응오딘지엠이 집권하기도 전인 바오다이 집권 시절에 발생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북베트남을 탈출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가톨릭 교도들이었다. 대표적으로 1954~55년 사이 미 해군이 수행한 자유의 길 작전에서 북베트남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군 20만 명을 포함해 약 80만 명이 북에서 남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38] 마지막 주한 베트남 공화국 대사였던 팜 수안 치우도 북베트남에서 1946년에 넘어온 사람이다. #

한편 남에서 북으로 간 사람들은 민간인 14,000~45,000명, 베트민 소속 10만 명으로 추정된다.[39]

9.3. 예멘

예멘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던 시절은 월북자가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를 입증할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예멘이 비록 한국과 반대로 남예멘이 공산주의 국가였고 북예멘 자본주의 국가였긴 하지만 북예멘은 친서방 자본주의가 아니라 아랍 사회주의 국가였고[40] 남예멘은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인 주제에 유일하게 국교를 지정해 놓은 나라였기 때문에 서로의 이념적 차이가 크지만은 않았으며 국민소득도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예멘 통일 이후 2015년에 예멘 내전이 발생했고 대한민국에서도 2018년 제주 난민 사태가 불거졌다.

10. 월북자

10.1. 한국인

※ 고향이 북한인 사람들은 ★ 표시를 한다.
※ 재탈북한 경우나 단순한 방북인 경우[41]는 ☆ 표시를 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월북자들이 존재한다.

한국이 민주화되고 북한이 경제적으로 파탄이 난 90년대 이후에도 정말 곤란한 처지가 되어서 월북한 사람들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2005년경 방송된 조선중앙방송의 방송 내용에 따르면 길게는 1990년대 초반 JSA에서 근무를 하던 도중 월북(1991년 3월1일 김유찬 카투사 일병)한 경우도 있는 반면, 짧게는 2000년대 중반 평범한 연구직이나 사무직에 근무하다 월북한 사례도 있다.

사실 남북 체제 대결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기 때문에 종북주의자들의 월북은 오늘날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는 경제적 혹은 범죄 관련으로 곤경을 모면하고자 하는 것이 근래 월북자들의 주된 동기로 보인다. 즉 2000년대 이후의 월북 사유를 살펴보면 2004년에 막대한 사채 빚을 진 군 간부가 월북한 사건이 있고, 2009년에 폭행죄로 지명수배된 강동림이 월북했다고 알려진 사건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안으로 북한을 고르는 것은 정상적인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짓이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의 실태를 생각해본다면 자신이 사형을 선고 받을 만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남한에서 사형을 받거나 징역을 사는 것이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현재 남한은 실질적인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어 있는 데다가, 북한의 수용소처럼 고문, 인체실험이나 수형자 착취를 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가 남한이 설령 사형을 재개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사형수에게 집행 당일날까지 최대한 인간적인 대우를 하기 때문에[51], 북한 같은 데서 사람 취급도 못 받고 혹사 당하다가 인사불성인 채로 죽임을 당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 또 북한 입장에서도 이미 체제 대결이 끝나 선전용 월북자가 굳이 필요 없고, 더군다나 자신들 사회에 사실상 적응이 불가능한 범죄자의 월북은 오히려 골칫덩이만 떠안는 셈이라 전혀 반기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무엇보다 월북자들은 이미 남한 땅에서 살아왔으므로 누구보다도 남한의 실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인민에게 대고 남한의 실상을 떠벌리고 다니기라도 하면 그간 남한을 엄청 비참하다고 허위선전해온 북한 정부 입장에서는 골치 깨나 썩게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월북자들이 자신이 생각한 북한의 모습과 실상이 너무 다르다면 더더욱 그 위험성은 커진다. 사실 월북자들 중 대부분은 북한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남한이 싫어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을 텐데, 자유를 잃기 싫어 도망나온 사람이 꽉 막힌 북한 스타일을 더 좋아할지는 미지수다. 그래서 남한 출신 월북자들을 받는 것은 꺼리지만,[52] 탈북했다 되돌아온 재월북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으로 북한인들에게 "탈북해봤자 별 볼 일 없구나"라는 식의 인식을 심어주어 체제 단속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북한은 갖은 수를 동원해 이들을 다시 유인하고 있다.

탈북했다가 재입북해서 한동안 북한의 이런 선전에 동원된 뒤 2013년 재탈북한 김광호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김광호는 남북한을 오가며 각종 정보를 양측에 누설했다는 죄로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김광호처럼 탈북과 월북을 반복한 파란만장한 행적을 보인 자도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재월북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의 몰지각한 편견과 행위 때문에 남한에서 탈북자들이 여러 모로 불이익을 받고 사는 것은 사실이나, 탈북할 때의 초심과 현재 북한이 어느 정도로 미쳐 돌아가는 국가인지 생각하면 남한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에 비해 재월북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특히 이미 남한의 문물을 체험해봤던 사람들을 북한이 미쳤다고 마음대로 풀어줘서 살게 놔두겠냐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김광호 씨도 재입북한 뒤 그곳에서 무심코 내뱉은 '남한이 더 잘 산다'는 말 한 마디 때문에 문제가 생겨서 재탈북했다고 한다.

목적이 방북이었어도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국가보안법 상 월북으로 간주한다.

10.2. 미국인

2023년 7월 기준, 최근의 트래비스 킹 이병을 포함하여 월북한 미국인은 총 8명[53]이다 #. 그 가운데 7명은 당시 미 육군 소속이었다. 구체적으로, 1960년대 4명(1962년 5월 래리 앨런 앱셔 일병과 동년 8월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 일병, 1963년 12월 제리 웨인 패리시 병장, 1965년 1월 찰스 로버트 젠킨스 병장)[54], 1979년 1명(동년 6월 실종된 서독 주둔 미군으로써 동구권 국가를 통해 7~8월 입북[55]했다고 알려진 재미교포 로이 정(정려섭) 일병, 2004년 전후 사망) 및 1982년 8월 1명(조지프 화이트 일병, 1985년 청천강에서 익사)이다. 나머지 1명은 민간인 신분으로 2014년 중국 단둥에서 압록강을 넘은 아르투로 피에레 마르티네스이다. 따라서, 군인 신분의 미국인 월북은 41년 만에 발생했다.

특이하게도 이 미국인 월북자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가정 불화 또는 자라온 배경이 정상적이지 않거나, 심신장애 등 순탄치 않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 엽기적이고 황당한 것은 남한인들뿐만 아니라 주한미군들 중에서도 월북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애초에 미군 측에서도 문제가 있다 여겨지고 있었던 인물들이며 어떠한 사유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북으로 넘어간 것인데, 미국으로 돌아갔어도 제대로 된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56][57] 그 중 여섯은 육군 소속의 부사관 및 병들로서 장교가 월북한 사례 및 해군, 공군, 해병대, 해안 경비대 장병의 월북 사례는 다행히 아직까지 없다고 한다. 엄밀하게 말해서는 한국전쟁 종결 후 공산권을 택한 유엔군 포로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북한이 아닌 중국으로 이주했다. 게다가 상당수는 견디다 못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일하게 그리스계 미군 이등병 제임스 베네리스( James Veneris, 1922 ~ 2004)[58]만 중국에서 일생을 마쳤고, 중국의 '노력 영웅'이 되었다. 참고로 2009년 이들의 삶을 다룬 중국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어 파문을 일으켰다.

한편 놀랍게도 미국이라면 죽도록 이를 가는 북한에서는 월북한 미군들을 매우 소중히 대우했는데, 그 이유는 체제 선전용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도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자본주의 제국주의를 중시하는 미제의 앞잡이였다가 자진해서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중시하는 우리 수령님의 품으로 다가오길 택한 영웅'이라는 선전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그 대가로 이들에게 평양에 최고급 주택을 지어서 그곳에 살게 해주고, 해외에서 납치해온(...) 외국인과 결혼[59] 시켜준 데다가 적지 않은 액수의 연금도 지급했다. 이들은 그 후에 '이름 없는 영웅들' 류의 북한의 체제선전 영화에서 '출처를 밝힐 수 없는 미 정보국 책임자급' 등의 악역 배우를 주로 담당했다.

한때 이들을 두고 조선일보에서는 한국 전쟁 당시 미귀환 미군 포로였다고 기사를 낸 적이 있었는데, 미 국무부가 공식적으로 월북 미군으로 확인했다. <어떤 국가>, < 천리마 축구단> 등 북한을 소재로 다룬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영국의 대니얼 고든이 이들을 주제로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으니 참고할 것. 한국에서는 2007년 8월 23일에 개봉했다.

10.3. 일본인

1970년에 일어난 요도호 사건의 범죄 그룹 ' 적군파' 멤버인 타미야 타카마로 외 8명은 민항기를 납치한 뒤 북한으로의 망명을 하였다. 그들은 평양에서 살고 있고 그곳에서 가정도 꾸렸다고 한다.[60] 그들 중 3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였으며, 또는 일본인들을 납치하여 북한으로 데려오는 등의 공작원 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일본으로 송환된 이도 있다. 이들은 모두 국제 지명수배되어있으며, 자녀들은 일본에 귀국하여 일본인으로서 살고 있다. 일본인들의 경우에는 월북이라기보다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 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세한 설명은 납북 일본인 문서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의문의 실종 사고로 오랜 기간 모습을 볼 수 없는 실종자들은 납북 당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나돌고 있다.

11. 관련 문서



[1] 이런 경우는 서독으로 망명했다가 북한 공작원의 꾀임에 넘어가 월북하는 경우가 많았다. [2] 대표적인 게 윤태식 트래비스 킹. [3] 법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지만 한반도의 반국가단체는 북쪽에 엄청 큰 것 하나 빼면 없다. 참고로 1990년대 이전에는 북한은 물론 다른 공산국가 역시 반국가단체로 간주되었기에 이들 국가에 입국하는 것 역시 이 법으로 처벌했다. 자세한 내용은 여행금지 문서의 북한 문단을 참조. [4] 따라서 거짓 탈북도 이 죄로 처벌받는다. [5] 살인죄와 형량이 같다. [6] 1인 독재 체제보다는 집단지도체제가 더 민주적인 건 사실이니까. [7] 물론 기존 지주들은 알거지 신세가 되었고 이들은 남한으로 월남하게 되었다. 1940년대 후반에 악명을 떨치던 서북청년단도 이러한 지주 출신 월남자들이 많았다. 토지 개혁은 소련의 손길이 미친 동유럽과도 다른 부분이 많았기에 사실상 소련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설득시킨 김일성의 작품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8] 의외로 공산주의 국가들은 엄청난 행정력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공산주의로써 전국의 자산을 파악해야하며, 개인의 자산을 공공으로 돌리기 위해선 시민들의 의견을 어느정도 묵살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강력한 행정력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뭐 했다하면 경제가 발전하는 후진국이라는 특성과 맞물려 공산주의가 초반에 급성장하는 이유. 물론 한번 말아먹기 시작한 후로 행정력은 김씨 일가가 잘 써먹고 있다. [9] 현대의 정설에 따르면 납북당해서 북한으로 가던 도중에 폭격을 맞아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0] 1988년 3월 31일에 납북인지 자진 월북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정지용·김기림이 해금된 후 7.19 해금 조치를 통해 백석을 비롯한 120여 명의 납·월북 작가들이 전면적으로 해금되었으며 1989년에 홍명희, 이기영, 한설야, 조영출, 백인준이 최종적으로 해금되었다. [11] 대만의 경우는 이게 워낙 애매하긴 하다. 중국 전체를 놓고 본다면 연고지가 대만인 예술가들이 드물고 대개 대륙에서 활동했고 대만으로 넘어왔냐 안(못) 넘어왔냐만 따지기도 애매하다. 대체로 대륙에서 잘 나간 사람들은 잘 언급하지 않고 대륙에서 영 좋지 않은 상황을 맞이한 사람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냉전 이후에는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1960년대 음악 교과서에서 양안 분단 전 만들어진 유명한 동요의 작사자를 표시하지 않고 작곡자만 표시한 사례도 있다. 작사자가 양안 분단 후 대륙에서 잘 나간 편이며 작곡자는 분단 전에 사망했다. [12] "그는 당시 월맹 측에 3000달러를 주고, 포로로 붙잡혀 있던 안학수 하사의 신병을 넘겨받은 뒤 북한에 강제로 데려가 대남 심리전 방송에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심리전 장교 피씨는 심문 순간에도 한국군 포로 6명이 하노이 포로수용소에서 곧 북한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출처] # [14] “내가 포로가 된 뒤 탈출을 시도하면서, 살아 돌아가면 환영을 받으려나 바보가 되려나 고민이 많았다. 캄보디아에서 감옥 생활 중 재판받고 실형을 다 산 뒤 고국에 돌아가면 어떤 대접을 해줄지 자신이 없었다. 미군은 포로가 되어도 조국이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군 포로는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걱정했다. 그 와중에 자신감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북한에 끌려간 포로도 상당수였을 것이다.” [출처] [16] 재산이 늘어나면 그 경위까지 상세히 조사받아야 했을 정도였다. [17] 물론 이들도 북한의 실상을 잘 알기에, 종북주의자라고 할 지라도 그 잘난 북한으로 정말 월북하려는 인간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18] 북한에서 재일교포 화교, 조선족이나 친인척인 사람들이 정치적 계급과 별개로 잘 사는 계층 취급받는 것도 이들이 중국 일본에서 수백~수천만 원 정도의 돈을 챙겨갈 여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 월남자 가족도 2000년대 이후로 잘 사는 계층으로 취급받게 되었는데 이들도 남한에서 탈북자들이 받는 돈 수백만 원이면 북한에서 부유층 취급 받고도 남기 때문이다. [19] 이 경우는 남한이 살기 좋다는 이유로 북에 있는 가족들을 남한에서 살게 하겠다는 등의 이유로 잠입해서 가족들을 탈북시키는 케이스가 많다. 대부분 국가보안법에서는 무죄가 되었으나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20] 영상 속 게스트는 윤노빈 교수와 이웃으로 지낸 북한이탈주민이다. 그의 성격과 월북 이후 일생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영상이다. [21] 물론 북한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굴러가던 시절에는 정해진 월급만 받았기에 의사가 어렵기만 한 직업으로 취급받았지만 북한의 계획경제가 붕괴하면서 돈 벌 방법이 무궁무진해진 후 의사의 몸값이 많이 뛰었다고 한다. 운이 좋아서 해외 파견이라도 한 번 갔다 오면 10만 달러 이상 벌어오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공부가 어렵기만 하고 승진하기 힘든 의대를 기피하던 예전과는 다르게 인기 학과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개인의 직업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지, 사회 기여도와는 관계 없는 문제다. [22] 야산에서 중국 통신사와 로밍된 아이폰으로 한국 내 지인과 통화하여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23] 실제로 월남자 출신 인사들 중 이 부분을 이용해서 스스로를 투철한 반공 우익 인사로 선전한 사례가 존재한다. [24] 오히려 월북자보다는 납북자를 많이 쓴다고 한다. 이는 월북자 중에서 교관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1981년 6월 월북한 1사단 수색대 대위 석정현 대위로 탈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한다. [25] 보통 정치적인 발언, 행동을 하거나 아예 정계에 진출한 사람이면 숙청돼서 비참하게 죽거나, 나중에는 복권돼서 고위직에 돌아오더라도 중간에 몇 년 간 농장에서 고생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행동, 발언을 일절 삼가고 본업에만 충실한 사람들은 대부분 본업에 종사하면서 평탄히 살다 갔다. 그리고 전공 특성상 인문사회계, 예술계 지식인들은 대부분 전자였고 이공계 지식인들은 대부분 후자였다. 인문, 사회, 예술 쪽은 자기 공부만 해도 정치적인 부분을 안 건드리기 쉽지 않으니 당연한 것. [26] 보통 월북자를 돌려보내지 않을 생각이면 관리소에 보낸다. 이들이 갇힌 수용소가 관리소가 아니라 단순 수용소 정도였다는 점으로 볼 때 애초에 가치가 없어서 송환할 생각이었고 남한과의 협상 카드로 쓰려고 억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27] 참고로 이때 피살자의 시신을 인계하면서 북한 측이 직접 '월북자 이모 씨가 자기 아내를 살해하였다'고 통보했고, 검찰의 조사 결과 사실로 확인되어 집유를 받은 다른 월북자와 달리 유일하게 징역 10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되었다. [28]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이 탈북자를 조건 없이 수용하는 이유는 '북한 주민들은 헌법상 자국민인데 거주 이전의 자유가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이상 자국민이 자국 정부의 통치가 미치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코미디이기 때문'인데 애초에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주민들의 단순 이동마저도 통제하며 최고 통치자의 명령이 헌법보다 상위에 있는 북한이 당연히 같은 원칙을 따를 리는 없다. [29] 북한의 기준으로 한국의 거물급 인사를 꼽아보자면 국회의원 이상급의 정치인, 장성급 장교, 재벌급 경제인 정도가 될 텐데 이들은 한국에서도 엄청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뭔가 큰 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수감됐다고 해도 오래 지나지 않아서 풀려날 확률이 높으므로 월북을 할 동기가 전혀 없다. 아니, 설령 자신이 지닌 돈이나 권력이 씨알도 안 먹혀서 일평생 교도소에서 썩을 처지가 돼도 김우중처럼 해외로 도망치거나 박근혜처럼 그냥 체념하고 형을 살려고 하지(심지어 후자는 특별 사면까지 받았다.) 북한으로 갈 정신 나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30] 육로로 중국, 유럽 등으로 가기 위해 단순 통과를 목적으로 방북했다던지 등. [31] 2019년 12월 부대 해체. 그나마 상징명칭 '결전'은 舊 20사단 예하였던 61기보여단이 그대로 11기동사단 아래로 들어가면서 명맥이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원래 26기보사단 소속 73기보여단이 26기보사단 해체 후 그대로 8기동사단으로 편입되면서 26기보사단의 상징명칭이었던 '불무리'를 그대로 계승하게 된 것. [32] 물론 경제 규모는 차이가 났다. 동독의 경제 규모는 서독의 3분의 1 정도였고 이는 독일 재통일 이후 고스란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남북한에 비해서는 작은 차이다. [33] 그렇다고 북한과는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영화 굿바이 레닌에 나오듯이 통일을 앞두고 있는 터라 규제와 감시가 느슨해진 상황임을 감안해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본주의 국가를 배경으로 했다고 착각할 정도로 동독은 북한에 비해 부유하고 풍족했다. [34] 통계상으로 1960년대 이후 은퇴자들이 가장 많았다. 이는 동독 정부에서 복지비용을 줄일 의도로 일부러 은퇴자들이 서독으로 가는 것을 강력히 막지 않아 은퇴자들은 상대적으로 출국이 쉬웠기 때문이다. 이 경우 휴가를 명목으로 체코슬로바키아로 간다고 하면 큰 어려움 없이 출국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통 여기서 다시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들어간 다음 서독 대사관을 거쳐 탈출했다. [35] 이쪽의 경우는 분단기 서베를린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게다가 당시 동독은 동베를린을 자신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로 간주했기 때문에 동독의 징병제는 동베를린에도 적용되어서 굳이 국가인민군에 복무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월동은 더더욱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36] 이쪽의 경우는 소속 교단에서 파견한 경우가 상당수였는데, 동독은 그나마 감시를 붙이고 출세에 불이익을 줄지언정, 타 공산권 국가들과는 달리, 폴란드처럼 수백 년 동안 전래된 기독교의 영향이 강해서 실제로도 약간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나라였다. 이 때문에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이렇게 동독으로 파견된 월동 목사의 딸이었다. [37] 이는 당시 동독의 공산당 서기장인 에리히 호네커 서독 출신이었던 것 때문인 것도 있었다. 그도 서독에 있는 고향인 노인키르헨에 분단으로 인해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여동생이 살고 있었고 실제로 서독 방문 중에 고향으로 가서 여동생과 재회하기도 했기에 이산가족들의 슬픔에 크게 공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네커부터가 공산권의 정치 지도자들 중에서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가장 상식적인 인물이었던 것도 한 몫 했다. 특히 문화 교류는 지금의 남북한과의 교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활발했는데 동독 최고의 인기 록 밴드인 카라트 서독까지 투어를 뛰면서 동서독 양쪽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물론 투어를 가기 전에 엄격한 절차를 거쳐서 겨우 해외로 나갈 수 있었지만. [38] Frankum, Ronald (2007). Operation Passage to Freedom: The United States Navy in Vietnam, 1954–55. Lubbock, Texas: Texas Tech University Press., Prados, John (January 2005). "The Numbers Game: How Many Vietnamese Fled South In 1954?". The Veteran. [39] Ruane, Kevin (1998). War and Revolution in Vietnam. London: Routledge., Tran, Thi Lien (November 2005). "The Catholic Question in North Vietnam". Cold War History. London: Routledge. [40] 심지어 북한보다 남한과 더 늦게 수교(1985년)했다. [41] 정확히는 방북 과정에 불법적인 요소가 있어서 법리적으로 월북이 된 경우를 말한다. [42] 현재 해당 연대는 제7보병사단 예하 연대로 편입되었고 해당 연대 역시 이 사건을 두고두고 엄청난 불명예로 여기고 있다. [43] 당시 이들도 창군 초창기 다른 부대들이 그러하듯 소령 계급으로 대대장 직급을 맡았다. [44] 다만 이는 같은 고향 출신인 두 대대장 간 밀약이었는지, 북한군에게 투항하기 전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챈 중대장을 포함한 몇몇이 저항하거나 3개 중대가 포위망을 뚫고 가까스로 탈출한 사례는 있었다. 이때 부대에 잔류해 월북당하지 않았던 사람들 중 12.12 군사반란의 현장에 있었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도 있었다. 블로그. [45] 연출이 아니라면 정황상 현리 전투 와중 군단 전체가 와해된 상황에서 별 수 없이 월북한걸로 보인다. [46] 단순한 방북이 목적이라도 통일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 땅을 밟으면 금방 다시 나왔더라도 공식적으로 월북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정부 허가도 없이 북한에 멋대로 들어갔다 나온 문선명 부부, 임수경이나 술에 취해 멋 모르고 북한 땅에 들어가버린 김하기 등의 본의 아닌 월북자들도 종종 나오는 것이다. 사실 법적으로는 북한군과 교전 중 후퇴하는 북한군을 추격하거나 기타 상황이 벌어지던 중 우발적으로 국경을 넘는다고 해도 월북이다. [47] 다만 어린 시절부터 월북 직전까지 계속 서울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출생지만 철원이고 실질적인 고향은 서울로 볼 수도 있다. [48]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출신으로, 안기영과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처음 만났다. 안기영은 아내와 아이들도 있는 유부남이었지만, 제자 김현순과 불륜 관계를 맺다가 결국 가정을 버리고 김현순과 재혼했다. [49] 재탈북한 게 아니라 자기 맘대로 북한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다. 국적상 독일인이라서 법적으로는 방북이 자유로운 편이긴 하다. [50] 당시에는 연천 지역에 주둔하던 일반 보병사단이었다.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된 시기는 주둔지를 양평으로 이전하고 5년 뒤인 1983년이다. [51] 사실 웬만한 나라는 사형제가 유지되었건 말건 죄수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하는 편이다. 심지어 인권 수준이 바닥인 중국조차도 사형수에게 집행 직전에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먹이고 형장으로 보낼 만큼 죄인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한다. 북한이 오히려 특이한 경우인 것이다. [52] 감시하느라 쌩돈과 인력만 낭비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불평분자이기 때문에 북에서도 적응 못하고 시한폭탄이 될 확률이 높다. [53] 두 명을 제외한 6명은 DMZ를 월경하여 바로 북한으로 향했다. [54] 이들 4명은 순서대로 1983년, 2016년, 1998년 북한에서, 2017년 일본에서 각각 사망했다. [55] 당사자 가족들은 납치(납북)라고 주장 [56] 애초에 미군에서 질이 나쁜 인원을 내보내는 방법은 대부분 군사법원 판결로 불명예전역 혹은 징계전역 처분을 내려서 내보내는 게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로 인한 OTH 등급 혹은 일반전역 등급으로 중도추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반 형사처벌을 받고 추방 당한 게 아닌 만큼 전역 군인 혜택을 완전 박탈 당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나갔다는 것 자체가 사회부적격자라는 증거가 돼서 이후 사회 생활이 거의 불가능해지게 된다. [57] 예외로, 찰스 로버트 젠킨스는 어릴 적에 친아버지를 여의었고 빈곤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미군 입대 후에는 중사 진급에서 탈락한 것만 빼면 모범적인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에 주한미군의 일부가 베트남 전쟁에 투입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당시에 베트남에서 자국이 가망없는 소모전을 지속하면서 수렁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이 미군 내에서 널리 퍼져있던지라, 베트남 파병이 두려워서 소련 입국 후에 미국으로 재추방당하는 식으로 이를 피하고자 월북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이게 인생을 크게 말아먹은 패착이었지만, 다른 월북 미군들과는 달리, 그 사유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긴 했다. 물론 이는 북한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어설픈 지식만으로 막연히 소련과 한패겠거려니 지레짐작해서 저지른, 속된말로 선무당이 사람 잡은 케이스라 동정의 여지는 없지만. [58] 범죄 입대로 미군에 입대한 병사. 범죄 입대란 3년 이하의 징역을 살 범죄자에게 현역으로 군복무하는 것과 교도소에 수감되는 것 중 양자택일을 시키는 제도이다.(그 때문에 장교는 안되고 오직 이등병으로만 입대할 수 있다.) 베네리스는 젊은 시절 사소한 범죄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징역 대신 군복무를 선택해서(경찰이 군대에 입대하면 기술을 가르쳐주고 자격증도 취득하게 해 준다고 꼬득였다.) 이등병으로 입대했는데 그 때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였고 베네리스는 남태평양에서 복무했다. 종전 후 일단 제대했지만 사회 생활에 도통 적응을 못해서 재입대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재입대한 지 얼마 못 가 6.25 전쟁이 터져서 전쟁터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베네리스는 애초에 군대가 좋아서 입대한 것도 아니고,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억지로 입대한 군대이니만큼 군복무가 싫었다. 결국 1.4 후퇴때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히자 그대로 중국에 귀순했으며 이후 여생을 중국인으로 살다 갔다. 중국에서는 노온(老温)이라는 이름도 받았으며 중국 공산당은 베네리스에게 종이 재생 공장에 취직시켜줬다. 미군 측에서는 베네리스가 포로교환을 거절하자 즉시 불명예 제대 처리했다. [59] 주로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에서 납북된 다른 외국인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북한에 채류하는 서양인들은 러시아나 동구권, 남미 출신의 극소수인데, 이들은 자국에서도 명문가에 고위직인 데다가 외교 등 공적인 목적으로 북한에 채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미국 출신의 어중이 떠중이에 불과한 월북자들과 결혼할 일이 없다. 또한 이런 외국인 월북자들이 북한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도 거의 어렵다. 북한은 민족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고, 당국에서도 북한인과 외국인이 연애하는 곤란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철저히 접촉을 막는다. 북한인이 외국인과 결혼할 경우 혼혈이 생겨서 단일민족 사상이 훼손되는 데다가 가정에서 외국 문화에 물들게 되고, 심지어 배우자의 국적을 통해 북한인이나 자녀가 탈북할 수 있는 빌미가 생기기 때문에, 국제결혼 자체가 하위직과 고위직을 불문하고 체제 위협이 되기 때문에 철저히 통제한다. [60] 예전에 해외 방송에서 취재했었는데, 평양 모처에 이들 일본인들만 격리 비스무리한 상태로 살고 있다고 한다. 식량이나 생필품 등은 넉넉하게 지급해주며, 집에는 인터넷 접속 환경도 갖추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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