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축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정지용(축구선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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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 대한민국의 시인 정지용 鄭芝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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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정지룡(鄭池龍) |
자 | 영지(靈之) |
본관 |
연일 정씨 (문정공파-이의공파 27세 용(溶) 항렬) |
출생 | 1902년 6월 20일 |
충청북도
옥천군 읍내면 향청리 (現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
|
사망 | 1950년 9월 25일 (향년 48세) |
평양시 또는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으로 추정 |
|
학력 |
옥천공립보통학교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도시샤대학 문학부 ( 영문학 / 학사)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 방지거) |
서훈 | 금관문화훈장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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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유리창 1」 중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유리창 1」 중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중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중
대한민국의 시인. 본관은 연일(延日), 아명은 지용(池龍), 세례명은 방지거(方濟角: 프란치스코)이다. 국내 모더니즘 시의 선구자로, 후술되어있듯 일각에선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는 소리도 들을 정도로 한국 문학사에도 비중이 높은 인물이다.
2. 생애
1902년 6월 20일 충청북도 옥천군 읍내면 향청리(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아버지 정태국(鄭泰國)과 어머니 하동 정씨 정미하(鄭美河)[1]사이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 정태국 대까지는 옥천군 군동면 수북리(현 옥천읍 수북리) 화계마을의 연일 정씨 집성촌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 정지용이 태어난 후 아버지 정태국은 이후 후실 문화 류씨를 들여 슬하에 남동생 정화용(鄭華溶)과 여동생 한 명을 더 두었다. 출생지인 옥천읍 하계리 39번지에 정지용 생가가 있다.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던 오장환의 스승이기도 하다. 구인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였고 일제의 탄압이 이어지자 모더니즘, 그 중에서도 이미지즘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1941년에 출판된 그의 시집 《백록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집은 청록파에 영향을 주었다.
청록파(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와 윤동주, 그리고 이상은 그가 추천하였다.[2] 1933년에는 《가톨릭 청년》의 편집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실어 등단 시켰고 1939(38세)에는 문장지의 시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마지막으로 윤동주는 강처중과 정병욱의 요청에 따라 추천사를 써주며 등단시킨 셈. 그리고 일제와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1942년 이후 정지용은 붓을 꺾고 글을 쓰지 않았다.
1930년대에 이미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당시의 시단을 대표했던 인물로 꼽힌다. 현대에 와서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개척자 등의 수식도 심심찮게 붙을 정도로 거물로 평가된다. 한국시인협회장이었던 이근배는 "정지용 시인 자체가 그냥 한국 시문학사다라고 할 만큼 정지용 시인이 끼친 우리 한국시사, 특히 현대시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당대 유명시인(청록파 시인 전부 포함)을 발굴하기도 하고 그들(윤동주 등)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주로, 절제된 어조와 이미지즘이 특징으로 꼽힌다.
일제 관련 시 딱 하나를 써서[3] 이것이 친일 문학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시의 어조 자체가 전쟁을 찬양하고 일제를 드높이는 어조인지는 굉장히 모호해서 친일시인지 자체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해당 시는 타지에서 죽어간 전사자에 대해 절제된 어조로 언급하기는 하나 그 이상의 전쟁과 일제에 대한 찬양이나 영광을 논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지용 시인의 당대 전쟁 관련 작품 자체가 <이토> 딱 한 작품이라 저것을 친일시라고 문제삼는 부류조차도 정지용 자체는 친일 시인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정지용은 일제로부터 무슨 작위를 받았거나 적극적으로 친일파로서 매국 행위를 한 것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압박에 못 이겨 전쟁 관련 두루뭉술한 작품 하나 내놓고는 붓을 꺾고 협력하지 않은 모양새에 가깝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 정지용 시인 자체가 당시 조선 문학계에서 상당히 주목받는 위치였어서 감시와 압박이 심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당시 일본 문학계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자국인들에게도 감시가 삼엄했었다. 정지용은 <이토> 이후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해방까지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이것에 대한 반작용인지 해방 이후에는 친일파에 대해서 꽤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한다.
1945년 8.15 광복 후 좌파 문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문학분과의 위원장이 되었으나 문학 활동은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대신 문학 외의 글을 투고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그의 일반적인 문학작품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과격한 어조의 글도 종종 보인다. 이 시절 투고한 글 중에서 일본의 침략자 근성을 비난할 때 모모타로를 언급하면서 섬나라 도둑근성 동화라면서 디스하기도 하며[4] 대만 원주민에 대한 기고를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좌우의 대립이 극렬해지자 월북을 선택한 동료들과는 달리 전향을 선택,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런데 전향도 보도연맹 입안추진자였던 오제도가 정지용에게 가서 강요로 가입해달라고 재촉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6.25 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특별시에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인천 상륙 작전이 끝나고 수복한 서울에서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한 때 납북된 것인지 월북한 것인지를 확인하지 못해 1988년 7.19 해금조치를 통해 그의 시가 해금되기 전까지 정X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현재 그의 사인은 납북되던 중 소요산 부근에서 폭격에 휘말려 사망하였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기사 이 증언은 북한 시인 박산운이 정지용과 함께 납북되던 중 정지용의 최후를 목격했던 소설가 석인해의 이야기를 소개한 회고문을 통해 알려졌다.
그런데 박산운은 정지용이 자진해서 월북하다가 소요산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정지용이 소요산에서 사망한 것은 맞는 걸로 보이지만 자진월북 운운은 박산운이 정치적 의도에서 포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정지용의 사망 당시 정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은 증언이라 보인다. 이 증언이 소개되기 전까진 평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투옥되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알려져있었다. 역시 평양 감옥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한 계광순 전 의원(1909~1990, 4, 5, 6대 국회의원 역임)의 증언으로 계광순은 자신은 9월 23일 탈출했지만 정지용은 감옥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증언한 바 있었다.
한편, 이와 별개로 정지용이 월북한 후 북에서 활동하다 숙청 혹은 탄광행이 되었다는 말도 있어서 확실한 최후는 지금도 명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정작 북한에선, 2000년 북에 있던 셋째 아들(정구인)이 아버지 정지용을 찾겠다고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서 찾아온 적이 있었다. 상봉대상자에 아버지, 어머니, 형, 조카를 다 넣은 것. 결국 큰 형(정구관)과 상봉했는데,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 형에게 북으로 가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숙청이나 탄광행이라면 유가족이 이렇게 활동할 리는 없을 거라는 점에서 정지용의 월북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구인은 량강도 방송위원회 중서군 주재원 책임기자로 일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정지용의 사망일자를 9월 25일로 쓰고 있다. 다만 조선대백과사전에선 정지용의 사인에 대해선 밝히지 않고 있다.
자녀로는 3남 1녀가 있다. 앞서 언급한 정구관(鄭求寬)(2004년 4월 24일 별세) 정구익, 정구인, 정구원이다. 연일 정씨 문정공파 족보에는 정구관만 정지용의 자식으로 등재되어 있다. 정구인은 북한에 남았으며 정구익은 한국전쟁 때 병사했다. 장남인 정구관과 딸 정구원은 남한에 남았다. 장남인 정구관은 정지용이 1988년 해금 조치된 직후 '지용회'를 세우고 정지용의 복권 활동을 행했다. 이 지용회에서 매년 정지용 문학상을 발표한다.
3. 여담
-
군사정권 시절 그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금기'의 대상 자체였다.
전두환 정부 때인
1987년, 정보당국에 고용된 한민성(韓民聲)이라는 사람이 『
(追跡)鄭芝溶 : 고오노 에이지氏에게 警告한다(추적 정지용 : 고노 에이지씨에게 경고한다)』(서울: 갑자문화사, 1987)라는
단행본을 펴냈는데, 이 책은 저자가 실존인물인지 자체가 불명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정지용에 대해 어떤 정치적 이미지를 고정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잡다한 언설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사실에 관한 논의를 '마녀사냥'식 사상논쟁으로 몰고가려는 의도가 아주 강한 내용이다.
#
모 월간지에선 정지용의 자진월북설을 제기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기사에 의하면 정지용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모윤숙('렌의 애가'로 유명, 친일인명사전에 실림)이 정지용의 행방을 거제도에서 필사적으로 찾았지만 정지용이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감추고 북한행을 선택했다는 것. 그러나 이 기사는 정지용의 유족들이나 지인들에 의해서 터무니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향수>, < 유리창> 등이 있다. <향수>의 경우 가곡으로도 나왔기 때문에 이쪽으로 알 사람도 꽤 될듯. 가곡 <향수>의 인트로는 90년대 모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보릿고개시대를 소재로 한 코너의 삽입음으로도 쓰였다.
-
노태우 정부 시절 전까지는 친북인사로 규정되는 바람에 시가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다고 한다. 전두환 정부 시절까지는 정지용 시인이라는 인물 자체가
대한민국 정부 공인의 친북 성향 문인으로 낙인되어서 그의 시작(詩作) 대부분이 모두 금서목록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인데 당시 서점 및 출판계에서도 정지용 시인에 대한 시집을 출간할 수 없었고 당시 정지용 시인의 시집을 출간할 경우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출판계 어느 곳도 정지용 시인의 시집에 대한 출간이나 출판을 꺼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득이 이를 출간해도 통일원(현재의 대한민국 통일부) 및 통일원 장관의 특별 허가가 내려져야 출간이 가능하겠지만 시기가 그런지라 이 역시 쉽지 않았다. 본래 출판 관련은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의 소관이지만 정지용 시인의 시집들은 당시 기준으로 정부 공인 금서목록으로 지정되었고 또한 친북 인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당시 통일원의 특별 허가가 있어야만 출간이 가능하였다. 다만 단순 열람이나 상업 판매보다는 대부분 학술 및 연구 목적으로만 허가가 가능하였다. 납북으로 인정되어 해금된 1988년부터는 이같은 절차가 폐지되어서 문화체육관광부의 고유 소관하에 정지용 시인의 시집의 출간이 허가되었다.
1988년에 정지용 시인 시작들이 금서목록에서 해금되면서 이 때부터 출판계에서 본격적으로 정지용 시인의 시집이 뒤늦게 출간되었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 중에는 늘 정X용으로 표현되던 정지용의 시가 수능 시험 등에 출제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다.
- 정지용 시에 가락을 붙여 만들었던 노래들이 금지곡 지정을 면하고자 가사를 바꾸게 되는 일도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채동선의 고향. 박화목이 개사한 망향, 이은상이 개사한 그리워로도 알려져 있다.
- 출생지인 옥천군에서는 정지용 시인을 기념하는 지용제가 매년 개최하고 지용제 중에 지용문학상도 진행된다. 생가도 있는데, 가보면 동명이인 정지용의 싸인을 많이 볼 수 있다. 옥천역에 그의 시비가 있다. #
-
일본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은 그가 나온 학교이며, 마찬가지로 동 대학을 나온
윤동주 시인과[5] 함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인물을 일본에서 기념하고 있는게 아이러니하기도 하나, 그 특이함 때문인지 교토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간간히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도시샤대학에 있는 정지용 시인의 시비[6] |
-
부천시 소사본동에 3년동안 살았던 은거지 터가 있으나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이 사실을 아는 부천 시민은 적다. 로드뷰. 그나마 2020년대 와서 이 곳앞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 구글 메인페이지에 탄생 117주년 기념일 로고가 걸렸었다.(2019년 6월 17일) #
4. 시
- 고향(시)
-
별똥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 비
-
호수
폭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 雨 水 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세삼스레 눈이 덮인 멧부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 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웅숭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 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5. 둘러보기
한국의 현대문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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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
[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
[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
[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의
날개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
[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의
태평천하,
염상섭의
삼대가 있다.
[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
[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의
'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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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명현(鄭明鉉)의 딸.
[2]
실제
윤동주는 정지용을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다. 유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윤동주가 사망한 후 서문을 정지용이 썼다.
[3]
<이토>
[4]
실제로 동화의 원전에 나오는 악당이 한반도계 도래인의 모티브라는 설이 있다.
[5]
윤동주 시인의 경우 도시샤대학 외에도 연세대 등을 나왔다.
[6]
시비에 새겨진 시는
압천으로 한국어와 일본어로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