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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파일:금관문화훈장 약장.png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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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李禹煥 | Lee Ufan
파일:Lee-Ufan.jpg
<colbgcolor=#f4ecd5> 출생 1936년 6월 24일 ([age(1936-06-24)]세)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평광마을 구식골[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인천 이씨[2]
재용(在容)
직업 설치미술가, 화가, 평론가
학력 군북국민학교[3] (졸업)
경남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 중퇴)
니혼대학 (철학 / 학사)
가족 아버지 이인섭, 어머니 이위효, 1남 3녀 중 장남
웹사이트 Lee Ufan

1. 개요2. 생애
2.1. 작품세계
3. 작품 사상4. 위작5. 관련 항목6.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미술가이자 평론가. 일본의 예술운동인 모노파(物派)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2. 생애

1936년 6월 24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222번지 평광마을 구식골에서 아버지 이인섭(李仁燮)[4]과 어머니 여주 이씨 이위효(李渭孝)[5]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면 소재지인 덕대리 272-5번지[6]로 이주하여 살면서 군북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부산으로 넘어가서 경남중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상경하여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했다. 그는 당초 문학을 전공할 작정이었으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는 지원할 성적이 안 되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 했는데, "미대에 가서도 문학 하는 친구가 꽤 있다"는 담임교사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진학했다. #

그러다가 1956년 입학한 지 반년이 채 안 되었던 그해 여름, 21세의 이우환은 밀항해서 일본으로 건너간다. 당시 일본과는 적성국으로 미수교 상태였기에 일본을 가기 위한 수단은 밀항이었다. 이우환 본인의 말로는 숙부 이인갑(李仁甲)의 병문안 차 일본으로 갔다가 그대로 일본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니던 서울대학교를 중퇴한 뒤, 니혼대학 철학과에 편입했다. 그는 1961년에 니혼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나 고민 끝에 철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일본화(日本畵) 학원을 다니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일본에서 작가로 인정받기란 쉽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매일신문》의 <현대일본미술전>과 쉘 주최 <현대일본미술전>에 몇 차례 응모하지만 낙선한다.

한편 이 시기 한국에는, 일본의 모노파보다 8년 앞선 1962년에 물질에 대한 실험을 전개했던 곽인식이 있었다. 곽인식은 이미 1963년도에 유리, 황동, 철이나 점토, 종이 등 각 물질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이를 작품화하고 이후 한국 후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었다. 곽인식은 일찍이 이우환을 알아봤는데, 이우환은 이러한 곽인식의 추천으로 1968년 한일 문화교류 일환으로 열린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한국현대회화전>에 참여한다. 또한 1969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였던 김세중 역시 이우환을 알아본 인물 중 한 명. 김세중은 비엔날레 한국대표로 곽인식과 함께 이우환을 선정했다.

이듬해 1969년은 이우환에게 중요한 한 해였다. 이우환은 당시 일본 미술계에 ‘핫’한 비평 <존재와 무를 넘어서-세키네 노부오론>, <다카마쓰 지로-표현작업으로부터 만남의 세계로>를 써서 일본미술계에 입지를 굳혔다. 이 평론은 일본미술운동인 모노파(物派)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모노파가 일본에서 유행할수록 평론가 이우환의 이름 역시 덩달아 높아져갔다.

이를 다시 말하면, 이우환이 그전부터 급진적인 작업을 이미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미술계에서는 작품보다 평론으로 주목받았다는 말이다. 1971년 이우환은 일본에서 평론집 <만남을 찾아서>를 출판한다. 당시 이우환의 평론은 철학과 출신답게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의 이론을 미술에 접목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하이데거의 예술개념과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신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성 개념을 ‘모노파’에 접목시켰다. 이렇게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40여 편이 넘는 평론을 발표하였고, 이우환의 평론과 함께 모노파 운동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까지 선풍적으로 유행하였다. 어느 정도 일본미술계에서 이름을 얻었다고 생각한 이우환은, 이후 미술비평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1970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사건과 1971년 파리비엔날레 사건이 그 단적인 예다. 구겐하임미술관은 <재팬, 아트, 페스티벌>에 이우환을 선발했지만, 일본 측은 이우환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시 초대를 거절했다. 그리고 《르몽드》를 위시해 적잖은 파리 언론매체에서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이우환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결국 그는 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그는 일본 측으로부터 일본작가 신분으로 출품할 수 없겠냐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우환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3년 이우환은 일본 타마미술대학 교수로 임명되고 이를 계기로 당시 일본 메이저 갤러리 중의 하나인 '도쿄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후 1974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열린 <일본현대미술전>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데, 1970년 구겐하임미술관에 출품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당시 이우환은 메이저 갤러리(화랑)의 파워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는 뒤셀도르프 미술관 그룹전을 계기로 사방팔방으로 독일 메이저 갤러리들을 물색하여 1976년 유럽 메이저 갤러리 중의 하나인 독일 보쿰 '갤러리m'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윽고, 1978년에는 불과 4년 전 그룹전으로 참여했던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당당하게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프랑스 에꼴 데 보자르의 객원교수 및 초빙교수를 지냈고, 2000년 유네스코 미술상, 2007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2011년에는 마침내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자신만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2014년에는 베르사유궁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했다. 2013년에는 대한민국의 문화, 예술발전에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1. 작품세계

이우환이 미술계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일본 미술계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모노파[7] 운동이었는데, 이우환은 1969년 모노파의 대표적인 작가 세키네 노부오를 다룬 평론인 '존재와 무를 넘어서'를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후 모노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서 큰 영향을 끼쳤다. 1971년에는 평론집 '만남을 찾아서'를 출간해 한국 미술계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다만 철학과 출신답게 미술평론에 하이데거의 이론을 접목하는 등(...) 가볍게 읽기는 어려운 글을 많이 썼다.

하지만 외국인 작가로서 자국 미술계에서 큰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던 이우환에 대한 일본 작가들의 시각은 곱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모노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역시 적지 않았지만 1970년대까지 모노파는 일본 미술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파일:external/www.galleryhyundai.com/20141111163044_ecefea4d.jpg
<점으로부터>(1975)
파일:external/www.galleryhyundai.com/20141128114725_e85e8c90.jpg
<선으로부터>(1978)[8]
그림으로는 초기엔 <점으로부터> 또는 <점에서> 등의 제목을 붙인 점 연작을 그리다가 1970년대부터는 선을 사용한 선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표현에 있어서 감정의 표출을 상당히 절제하고, 일정한 패턴이나 질서를 유지하면서 리듬감을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파일:external/www.plateau.or.kr/s3_8_1.jpg
조각작품인 <관계항>(1978)
같은 시기 조각 작업도 병행해 <관계항> 시리즈를 제작하여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초기에는 솜, 철골, 유리, 노끈, 목재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으나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들이 바로 돌과 철판이다. 이 두 소재는 형태와 만들어진 과정에 있어서도 만들어진 것과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대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철판이라는 것이 돌로부터 성분을 뽑아내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닮았지만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두 소재를 서로 만나게 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의미를 찾고 있다.[9]
파일:external/da-arts.knaa.or.kr/P0000340_0012.jpg
<바람과 함께>(1987)
하지만 1980년대에 와서는 자신의 이러한 작업에 대해 내적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혼란은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앞서의 정연한 스타일이 깨지는 양상을 띠고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 그린 것 같은 화풍까지는 또 아니라는 것이 중평.
<조응> 시리즈
파일:external/www.galleryhyundai.com/20141201112447_0f2753bd.jpg
(1994)
파일:external/www.galleryhyundai.com/20141201101846_0884e391.jpg
(2003)
파일:external/www.galleryhyundai.com/20141121174848_76a46b0b.jpg
(2011)

1990년대에 이르러서 이우환의 화풍은 다시 안정으로 돌아온다. 이전까지 여러 개의 점이나 선이 등장하던 것과는 달리 캔버스에 점이 한 개나 두 개만 찍힌 아주 간단한 구조로 변화했다. 그렇다 보니 작품을 접한 일반 사람들은 저런 건 나도 그리겠다는 소리를 하기가 일쑤지만, 이런 그림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당연히 그리 쉽지는 않다.

우선 작품 제작에 사용되는 캔버스, 물감, 붓이 모두 특수 제작된다. 캔버스는 두께가 보다 두껍고 미리 흰색으로 네 번에서 다섯 번 정도 칠해져 있다고 한다. 물감은 구입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돌을 공수해 와 갈아서 사용하고, 붓 역시 표현하기 알맞게 크기를 맞춰서 제작한 것이다.

다음으로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뒤 점과 비슷한 크기의 종이를 꺼내 이리저리 놓아보며 그릴 위치를 정한다. 점 한두 개만으로 작품 전체를 표현해야 하다 보니 전체 작업에 있어서 점의 위치 선정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기 때문에 고민을 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위치를 잡았으면 물감을 찍은 붓으로 점을 찍는데, 이때 캔버스를 뉘어놓고 작업을 하므로 허리를 구부린 채로 점을 그려야 한다. 자세가 상당히 힘들지만 캔버스를 세워놓고 그리는 것보다는 더 잘 그릴 수 있다고 한다. 호흡 역시 한 번 숨을 잘못 쉬어서 삐끗하면 점의 형태가 완전히 망가지기 때문에 숨을 내쉬면서 하거나 아예 숨을 참고 그려야 한다. 이 과정을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마르면 다시 그리기를 반복해야 작품이 완성되어 최종적으로 점 하나를 그리는 데 두어 달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위조작가들이 가장 쉽게 위조하는 작품으로 이우환 작품이 손꼽힌다. 심지어 위조 당한 본인 이우환 자신도 자신의 위조품을 보고 '호흡'이 똑같다며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 자세한 것은 아래 참조.

3. 작품 사상

커다란 방에 큰 캔버스가 걸려있고 캔버스에 점이 하나나 둘 휑그렁하니 찍혀있어요. 그러면은 거기 들어가서 좋게 보는 어떤 분들은 무언가 느낌이 좋다든지, 긴장감이 돈다든지, 그 분위기에 뭐랄까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든지, 그렇게 좋게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전람회라고 갔는데 가보니까 텅 빈 캔버스에 점 하나만 뎅그러니 찍어놓고, 볼거리가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뭐야? 점 하나 찍어놓고 뭘 보라는 거야? 웃기네?" 그러고는 그냥 히죽이 웃고 가버리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면 그건 틀린 것인가. 그건 어느 쪽이 맞다고도 틀렸다고도 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사실은 작가는 거기 들어가서 뭘 본다기보다도 가능한 대로 어떤 느낌을 주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보통은 미술작품을 보러 간 분들이 대상물을 보러 가는 그런 습관이, 그리고 그런 교육이 오랫동안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전람회에 가서 그 대상이 뭔가, 뭐가 그려져 있는가, 그걸 보는 입장에 서면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게 없어요. 뻔하다,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10]
이우환의 작품세계에서 주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관계다. 작품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단순한 것들이지만 그와 함께 여백이 있는 전체 공간을 조망하면서 작품과 작품 바깥의 주변을 새롭게 인식하고 느끼게 하는 등의 효과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주로 내세우는 개념은 조응(correspondence)이다.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모습을 통해 '조응하는 관계'를 표현한다는 것. 쉽게 등식에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이 대응하는 식이다.

예술 작업 - 은유 대상
사물 : 사물 ≒ 인간 : 인간
사물 : 사물 ≒ 사물 : 인간
사물 : 사물 ≒ 인간 : 세계

이우환의 작업을 보면 철판과 돌을 쌍으로 놓아둔다든지, 큰 붓으로 물감을 묻혀서 화폭에 찍는다든지, 붓에 물감을 묻혀 물감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선을 긋는 작업을 반복한다든지 하는 작업이 많다. 철판 : 돌이나 물감 : 화폭의 관계에 서로 만나는 관계를 대응시키고, 이를 현상학적으로 해석하라고 던져 주는 식인 것이다. 적어도 작가 이우환 본인은 작품이 이론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여기고 작품을 만든 것이다. 사실 미술 작품은 자신이 느낀 바에 따라 감상하면 그만이다. 다만 이우환이 미술이론가로 활동하며 작품에 그런 이론을 담았고, 그 이론에 비해 작품이 외형적으로 상당히 단순하게 생겼기 때문에 대중은 그를 어려운 작가라고 인식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이우환의 작업에서 관계가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 것은 아무래도 오랜 이방인 생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우환은 시골에서 서울로, 그 다음에는 일본으로, 또 미국과 유럽 등지로 계속 이동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도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는 중간자로서의 역할에 보다 관심을 두어 왔다고 본 것이다.

4. 위작

결론은 하나도 이상한 걸 발견하지 못했다. 전부 진품이다. 호흡이나 리듬이나 채색을 쓰는 방법이나 다 내 것.
이우환의 코멘트. 2016년 13점의 위작이 드러나서 판매상과 위조범이 잡히자, 진품인지 확인하는 경찰서 출석에서 그 위작은 자신의 작품이라고 인터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반면 법원은 이우환 작가가 쓴 적 없는 유리가루를 사용한 점, 캔버스 제작 연도, 어색한 서명을 들어 위작이라고 판단했다.
"작가는 '맞다'하고 나는 아니라고 하고... 내가 죽일 놈이야.. 죽일 놈인 건 아는데.. 그거는 캔버스 자체가 다르잖아요. 우리 거는..."
KBS 시사기획 창에서, 위작 조직 총책임자와의 인터뷰. 이우환 작가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70년대 후반 작품의 캔버스'와 '자신이 위작한 캔버스'는 제작 연도에 따른 캔버스 재질이 다르다면서...
다만 이우환 작가의 커리어에 타격을 주는 것이 있다면, 위작 문제다. 보시다시피 간단한 그림이기 때문에 위작을 시도하려는 조직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작 문제가 불거졌을 때, 위작이라고 밝혀진 그림을 이우환 스스로가 '호흡과 리듬이 내 것'이라면서 '위작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근데 이 위작들은 캔버스 제작년도가 작품의 제작년도와 다르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져 있는 상태였다. 즉, 자신의 작품이 아닌 것을 보고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한 것.

그가 자신의 그림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평소에 이우환이 그림 그릴 때 자신만의 '호흡과 리듬'을 가지기 때문에 똑같이 베낄 수 없으며, 그렇기에 하나를 그리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거짓으로 드러난 셈. 이쯤되면 작가의 그림 철학마저 의심되는 수준이다. 그냥 아무 힘들이지 않고 점 하나 찍어놓고는 거기에다 철학적인 설명을 붙여 놓았다고 생각한다면, 위작의 점에도 똑같이 철학적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며, 만약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그 원작만의 '아우라'가 있는 것이라면, 작가 스스로가 위작을 자기 작품이라고 말하는데 이르러서는, 이우환 작가 역시 위작에서 '아우라'를 느끼는데 다른 사람들도 위작에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결정적인 비판을 도저히 해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원작에는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이 있어 '아우라'가 생기기 때문에 가치가 생긴다고 보았다.[11] 이는 원작의 가치를 설명할 때에 항상 나오는 이야기이며, 복제품 보다 높은 '원작의 가격'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미술계 내에서는 매우 중요하고도 유명한 이론이다. 따라서 위의 경우처럼 그림을 그린 당사자인 이우환 작가마저 위작에서 원작의 '아우라(호흡과 리듬)'를 느낄 수 있다면, 굳이 원작을 살 필요가 없으며 작품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심지어 베끼기도 쉬우니...
시사기획 창에서 다룬 본편[12]

자세한 경과는 이렇다. 2016년 들어 이우환의 위작 그림이 1억 8600만 원에 홍콩 경매에서 팔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 같은 해 2월 18일 최명윤 국제미술과학연구소장은 경찰이 압수한 이우환의 작품 12점에 대해 과학감정, 안목감정을 실시한 결과 모두 위작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 이우환 측은 위작과 관련해 할 말이 없다고 했으나 #, 결국 변호사를 선임하고 관련 문제에 대해 법적 대응을 했다. 이로 인해 이우환 위작 관련 논란은 장기화가 불가피해졌다. 법정에서 판가름이 나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법원이 위작이다, 아니다 판단을 내려도 미술시장에는 해당 작품이 거래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복잡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 결국 과학 감정 결과 13작품이 위작 판정을 받았다. #

하지만 이우환 측은 위작이 아니라고 맞서고 있다. 문제는 카탈로그 레조네가 부실하다는 것. 이우환에 따르면 1978~1979년에 그린 작품 수가 2천여 점도 넘고 그 작품이 모두 도록에 기록으로 남은 게 아니라고 한다. # 이런 상황에서 이우환 측은 단순히 '작가가 보면 안다.'는 식의 주장으로 일관하므로 과학감정으로 반박하는 검찰 측에 논리적으로 밀렸다. #

위작 의심 작품 13점 중 4점과 관련하여 검찰이 기소하여 2017년 1월 1심 재판에서 골동품상 이 모씨(68)와 화상 현 모씨(67)에게 각각 징역 7년과 징역 4년이 선고됐다. 이들의 요청을 받아 실제로 그림을 그린 화가 이 모씨(40)에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됐다. # 2심에서 역시 같은 형이 선고 되었다. #

한편 위 사건과는 별개로 이우환의 위작을 만들어 판매한 혐의로 인사동 K화랑 화상 김모(59) 씨와 김씨의 부인 구모(46) 씨, 범행에 가담한 화가 박모(57) 씨가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은 이우환의 작품 7점을 위조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된 후 #, 이듬해 새로 2점이 추가되어 기소됐다. # 감평원 측은 2013년 초 위작이 의심되는 이우환 작품이 갑자기 감정 의뢰가 많이 들어오면서부터 이우환 작품 감정을 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내놓았다. #

이후 이우환 작가 자신은 계속해서 '위작은 없다', '내 그림은 나만의 호흡으로 그리기 때문에 위작이 어렵다.'고 말하고 있지만, 시사기획 창과의 인터뷰에서는 "작가라는게 그냥 보고 내가 신뢰하고 있는 화랑이니까 그림 가져오면 '이게 어디서 나왔어요?' 내가 물어요. 그러면 '콜렉터한테 나왔다' 하면 그런가 보다 그러고 다 사인해줘요."라면서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거래처인 화랑(갤러리현대)의 판단으로 작가확인서를 써 준다고 말했다. 즉, 이 인터뷰에서는 자신 역시 자신의 작품이 진품인지 아닌지를 확인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며, 화랑(갤러리현대)이 독단으로 위조범과 중계하여 위작을 만들어내더라도 이를 파악할 능력이 안되거나 그럴 의지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의 입으로 말한 것이다. #

5. 관련 항목

6. 여담


[1] 인천 이씨 집성촌으로, 독립유공자 이태준도 이 마을 출신이다. # [2] 공도공파 34세 환(煥) 항렬. [3] 現 군북초등학교 [4] 호적명 이창근(李昌根). [5] 이득구(李得九)의 딸이다. [6] 군북중학교와 군북중앙교회 사이에 위치해 있다. # 이우환 화백은 지난 2006년 8월 27일 이 생가터에 '항(項)-조용히'라는 조각을 설치하고 작은 조각공원으로 꾸몄다. # [7] 회화나 조각에서 사용되는 나무나 돌 등의 소재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제시하는 경향의 미술 [8] 민음사에서 재출판된 노르웨이의 숲의 표지에 쓰였다. [9] 작품에 사용되는 돌은 이우환 자신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골라내는데 '아무렇게나 생긴 돌'을 찾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긴 돌이 의외로 별로 없다고.. 간혹 주변 사람들과 함께 움직일 때 이 돌은 어떠냐, 저 돌은 어떠냐고 물어봤을 때 저렇게 생긴 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 그 기준을 모르겠다며 의아해하기도 한다고 한다. [10] 2015년의 강연에서 이우환이 한 말이다. 작가가 전시에서 의도한 것은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작품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 것이라는 게 그 요지. 아무래도 키보드 워리어들보다는 전시를 직접 보러 오는 관람객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설명해준 것으로 보인다. [11] 물론 벤야민은 현대는 복제가 가능한 시대이므로 복제품에 의해 원작의 '아우라는 몰락한다'고 말했다. 애시당초 벤야민은 카를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자로 아우라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기술복제를 통한 예술의 복제성에 호의적인 편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작품의 원작에 대한 가치는 높게 평가되고 있으니, 벤야민의 아우라에 대한 얘기는 아직까지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복제기술이 높아짐과 동시에 그러한 복제품으로부터 원작을 구별해내는 과학기술 역시 발전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얘기는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다. [12] 비하인드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 이 영상도 참고하면 좋다. 이 에피소드는 사실상의 후일담 겸 해설영상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봐도 무방하다. [13] 세계 2위로 1위인 가고시안과 라이벌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