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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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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 |||
출생 | 1931년 1월 18일[1] | ||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263 (現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2길 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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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21년 11월 23일 (향년 90세)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 |||
사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27나길 11-14[3] | ||
묘소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임시안치] | ||
재임기간 | 제11대 대통령 | ||
1980년 8월 27일 ~ 1981년 2월 25일[5] | |||
제12대 대통령 | |||
1981년 2월 25일 ~ 1988년 2월 24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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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본관 | 완산 전씨[6][7] | |
등록기준지 |
경상도
초계군
갑산면 안천동 (現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
||
부모 | 아버지 전상우, 어머니 김점문 | ||
형제자매 |
형 전열환, 전규곤, 전기환[8] 누나 전홍렬, 전명렬, 전선학 남동생 전석환, 전경환 여동생 전학렬, 전점학 |
||
배우자 | 이순자 | ||
자녀 |
장남
전재국 장녀 전효선 차남 전재용 삼남 전재만 |
||
학력 | 삼신국민우급학교 ( 전학)[9] | ||
종교 | 무종교 → 불명[10][11][12][13] | ||
신체 | 키 171cm / 체중 66kg[14] / B형 | ||
약칭 | 全 | ||
자 | 용성(勇星) | ||
호 | 일해( 日 海) |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11기)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55년 ~ 1980년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육군) | ||
주요 보직 |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장 제1공수특전여단장 (9대)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 제1보병사단장 (24대) 국군보안사령관 (2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 |
||
병과 | 보병 | ||
참전 |
6.25 전쟁 베트남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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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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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 취임 선서[15]
|
2. 약력
- 1944.3. 희도소학교 졸업
- 1950.2.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 졸업
- 1950.6. 6.25 전쟁 발발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
- 1951.3. 육군사관학교 11기 입교[16]
- 1955.2. 육군사관학교 졸업 및 육군 보병 소위 임관, 제25보병사단 소대장
- 1955.10.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수료
- 1956. 중위 진급
- 1957.10.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교육장교, 구대장
- 1958. 대위 진급
- 1959.4. 육군고급부관학교 군사영어반 수료
- 1959.5. 육군 공수특전단 본부 배속
- 1959.12.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 특수전학교 및 심리전학교 수료
- 1960.6. 미국 조지아 주 포트베닝 레인저 스쿨 수료
- 1960.9. 미국 육군보병학교 유격 훈련 교관 과정 수료
- 1960.12.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 작전과장
- 1961.4. 대한민국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
- 1961.5. 예비장교훈련단 준비위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ROTC 교관
- 1961.5.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비서관
- 1961.7.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민원 비서관
- 1961.11. 중앙정보부 제2국 정보과장, 소령 진급 ( 박정희 정부)
- 1961.12. 중앙정보부 제1국 인사과장 (박정희 정부)
- 1963.1. 중령 진급[17],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장 (박정희 정부)
- 1963.9. 대한민국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배속
- 1965.6. 육군대학 수료
- 1966.8.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박정희 정부)
- 1967.8.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 대대장 (박정희 정부)
- 1969.12. 대령 진급, 육군참모총장[18] 수석부관 (박정희 정부)
- 1970.12.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장, 베트남 전쟁 참전 (박정희 정부)
- 1971.11. 제1공수특전단장 (박정희 정부)
- 1972.9. 제1공수특전여단장 직무대리[19] (박정희 정부)
- 1973.1. 준장 진급, 제1공수특전여단장 (박정희 정부)
- 1976.6. 대통령경호실 보안차장보 겸 작전차장보 (박정희 정부)
- 1977.2. 소장 진급
- 1978.1. 제1보병사단장 (박정희 정부)
- 1979.3. 국군보안사령관 (박정희 정부)
- 1979.10.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박정희 정부)
- 1980.3. 중장 진급
- 1980.4.14.~1980.7.17. 중앙정보부장 서리 ( 최규하 정부)
- 1980.5.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최규하 정부)
- 1980.6. 대장 진급
- 1980.8. 예비역 대장 전역
- 1980.8.27.~1981.2.24.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80.8. 무궁화대훈장 수훈
- 1981.1. 민주정의당 총재
- 1981.2.25.~1988.2.24.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84. 페퍼다인 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 1988.2.25.~1988.4.13.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20]
- 1992.10.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고문
- 1999.6.~2002.10.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21]
3. 일생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nopad> |
박정희 집권 이후 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1979년 3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같은 해 10.26 사건이 터지자 계엄법에 의거하여 국군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자신이 이끌고 있던 하나회를 위시한 신군부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을 장악하였고, 이듬해 1980년엔 5.17 내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이후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 광주에서 다수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그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함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러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올랐다.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22] 임기 말,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졌고, 이를 불식시키고자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으나 오히려 역풍이 일어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진행하였고, 이후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후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에 의해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으며[95고합1280], 이후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24]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기면서 그해 12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사면되었다.[25]
사면 후에도 24년 동안 건강을 유지했으나 이후 2021년 8월 악성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았고,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0분 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0세를 끝으로 사망하였다.[26]
3.1. 전두환 정부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 정부 문서 참고하십시오.3.1.1. 평가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 정부/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별명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별명 문서 참고하십시오.5.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rowbgcolor=#005ba6><tablebordercolor=#005ba6><tablebgcolor=#fff,#1c1d1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0 | 제11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524 (99.37%) | 당선 (1위) | 초선[27] |
1981 | 제12대 대통령 선거 |
|
4,745 (90.11%) | 재선[28] |
역대 선거 공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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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대선 | }}}}}}}}} |
역대 후보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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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대, 12대 대통령 선거는 모두 간선제로 치러졌으므로 전두환은 윤보선, 최규하와 함께 국민의 직접선거 없이 대통령에 당선된 세 사람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갖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았을 때 전두환은 사실상 유일하게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하지 않고 대통령에 선출되어 임기를 마친 인물[29]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독재로 비판받는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조차 국민의 직접선거로 치러진 대선에서 각각 2회, 3회 당선되었다는 것[30]과 대비되는 점이다.
6.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80 - 1981 | 정계 입문 |
|
1981 - 1988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88 - 2021 |
탈당[31] 정계 은퇴 사망 |
7. 여담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여담 문서 참고하십시오.8. 각종 타이틀
- 박정희에 이은 두 번째 육군 대장 출신 대통령.[32]
- 간선제로 당선된 마지막 대통령.[33]
- 국민의 직접 선거 없이 간선제로만 당선된 대통령.[34]
- 일당독재를 한 유일한 대통령.[35]
- 임기를 모두 끝마치고 만기퇴임한 최초의 대통령.[36]
- 가장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대통령.[37]
- 박정희에 이어 2번째 경상도 출신 대통령.
- 최초의 경남 지역 출신 대통령.
- 최초의 사정기관장( 중앙정보부장) 출신 대통령.[38]
- 유일한 전씨 대통령.
- 전임 대통령에 이어 자와 호 두 가지를 다 가진 대통령.[39]
- 예복 차림으로 취임식을 거행한 마지막 대통령.[40]
- 박정희에 이어 만 나이 기준으로 두 번째로 40대에 취임한 대통령.[41]
-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퇴임(57세)한 대통령이자, 유일하게 50대에 퇴임한 대통령.
- 마지막으로 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한 훈장을 대통령 본인에게 셀프 수여한 대통령.[42]
- 현재까지 유일한 대머리 대통령.[43]
-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낸 시간이 가장 길었던 대통령. (33년 9개월)[44][45]
- 두 번째로 장수한 대통령. (90세)[46]
- 이승만, 윤보선 이후 국가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대통령.[47]
- 마지막으로 사망한 일제강점기 출신 대통령.[48]
- 퇴임 후 가장 많은 후임 대통령을 본 대통령.[49][50]
- 역대 대통령 시신 중 3번째로 화장된 대통령[51]
- 처음으로 역대 대통령 중 사망 시 화장 의사를 밝힌 대통령.[52]
- 화장 된 대통령 중 최초로 시신이 화장 이후 사저에 안치 된 대통령.[53]
- 전직 대통령 장례식 때 조화를 마지막으로 빈소에 보내고서 얼마 안가 사망한 대통령.[54]
- 기일이 가장 늦은 대통령[55]
9. 어록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어록 문서 참고하십시오.10. 다른 대통령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다른 정치인 및 대통령과의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11. 대중매체에서
역대 대통령 중 카메오로든 주연으로든 대중매체에 가장 많이 등장한 대통령이다. 보통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정치 드라마에서는 군인 출신 독재자로서의 모습이 부각되는 반면, 카메오로 등장할 때는 숨은 흑막으로 나오거나 주연들과 우스꽝스럽게 엮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얼굴과 이름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고 그냥 안경 쓴 대머리 아저씨로 나온다.이렇게 많이 등장할 수 있는 이유는 오래 전에 재임하기도 했고, 1990년대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데다가 워낙 이미지가 나빠서 정치적 논란이 발생할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56][57] 또한 전두환이 활동한 8~90년대가 시대극의 주요 배경으로 자주 다뤄지는 이유도 있다.
11.1. 영화와 드라마
박용식이 연기한 전두환 (드라마 제4공화국) | 장광이 연기한 전두환 ( 삼김시대, 26년, 응답하라 시리즈[58]) |
이덕화가 연기한 전두환 (드라마 제5공화국) | 서현우가 연기한 전두환[59](영화 남산의 부장들) |
황정민이 연기한 전두환[60] (영화 서울의 봄) | 유재명이 연기한 전두환[61] (영화 행복의 나라) |
- 탤런트 박용식이 전두환과 용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갖은 고초를 겪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62] 박용식은 1991년 MBC 대하드라마 《땅》과 1993년 MBC 《제3공화국》 및 KBS1 《다큐멘터리극장》, 1995년 MBC 특별기획 《 제4공화국》, 1998년 《성공시대》 등지에서 전두환 역을 맡아 혼신의 열연을 보여주었다. 박용식 문서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 1995년 SBS 창사 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정종준이, MBN 다큐 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에서는 윤동환이 전두환 역할을 맡았다. 두 작품에서 모두 1979~80년 사이, 아직 대통령이 되기 전인 40대 후반의 전두환 장군으로 나온다.[63]
- 1998년 SBS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와 2012년 영화 26년에서는 장광이 전두환 역을 맡았다.[64] 해당 작품은 전두환의 퇴임 후 현재의 모습을 담아낸 이미지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와 작은 운동장 급의 광활한 그의 사택에서 쓸쓸히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 후반부에는 곽진배에게 붙들려 힘없이 표적에 잡히는 등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김갑세 회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선물을 주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데, 악역으로서 보이는 악랄한 연기가 일품이다.[65]
- 2005년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영화 평론가이며 한겨레신문 문화부장이었던 임범이 전두환으로 분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쐈어. 민주주의를 위해서. 알어 인마?"라고 심정을 말하는 김재규를 유리창 너머로 보다가 "어이, 어때? 저 또라이 저, 절마가 지 혼자서 총질하고 지랄한 게 맞제?"라고 상황을 정리하고 퇴장한다.
- 2005년 MBC 특별기획 주말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이덕화가 전두환 역할을 이어받으며 절륜한 연기를 펼쳤다. 비록 외모적인 유사성은 박용식에 미치진 못했지만 주인공으로서의 묵직한 포스를 내며, 특유의 말투까지 음성을 전두환 본인과 비교해도 거의 판박이로 재현해낸대다 특유의 대머리와 날카로운 용모 덕에 박용식에 못 미칠 뿐 전두환의 외모에도 상당한 싱크로율을 선보였다. 본인도 연기에 상당히 만족했다는 것이 후문이다. 이를 위해 집안 친척인 최병서에게 특훈을 받았다는 후문도 전해지기도. 그리고 이덕화 본인이 악역 전문 배우로 명성을 날린 적이 있는 사람인데 조선왕조오백년의 장희재, 사랑의 종말의 남현필, 사랑과 야망의 태수 등 완벽한 인간 말종 연기를 달인 수준으로 실감나게 잘했던 과거가 있어서 여기에서도 전두환의 냉혹한 면모를 잘 살려서 연기한 덕에 외모는 박용식에 비해 미치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되려 박용식을 압도했고, 박용식이 타계한 지금은 전두환 담당 배우 중 전두환과 제일 외모와 음성이 제일 흡사하다고 평가받는다. 확실히 장군 시절의 전두환의 모습은 웃음기 없는 냉철한 분위기로 연기했지만 대통령이 된 후의 모습은 그보다는 다소 희화화된 모습도 보여준다. 전두환은 실제로 이 드라마를 봤다고 한다. #
-
2006년작 영화
홀리데이에선 성우 겸 배우
이의선이 전두환을 본뜬 '전직 대통령' 역으로 나왔는데, 점퍼에 마스크 차림으로 나왔다.
- MBC 라디오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격동 50년(1988년 4월 1일 ~ 2009년 10월 17일)에서는 성우 신성호가 맡았다.
- 2013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는 조윤진이 연희동에서 차 안에 있던 서태지를 촬영하였지만 차에 있던 사람은 알고 보니 전두환이었다. 사진에 찍힌 전두환을 본 조윤진의 찰진 욕설은 덤.
- 2020년작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전두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배우 서현우가 연기했다. 박통의 스위스 은행 계좌를 관리하는 '이아고'가 본인이었단 것이 암시되며, 김 부장이 박통을 쏜 이후의 결말부에선 대통령 집무실의 책상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본다.
- 2022년작 영화 헌트에서는 천수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68], 배우 손성호가 연기했다. 김정도가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이유가 과거 목격한 5.18 진압 때문인 것으로 나온다. 서명도 잘 보면 전두환의 서명을 약간 어레인지한 모양새.
- 2022년작 넷플릭스 영화 서울대작전에서는 배우 백현진이 분했으며, 역시 직접적으로는 그 이름이 나오지 않고 '전 장군'이라는 이름으로만 등장한다. 영화 성격 상 나올 때마다 이리저리 망가지는 모습을 보인다. 말투 역시 상기된 영화속에서 묘사된, 위압감 있거나 거친 말투가 아닌 뭔가 찌질하고 유약한 말투로 묘사되었다. 나올때마다 욕탕에 들어가있는 뒷모습만 나오고 대사도 몇 마디 없다 보니 비중은 매우 낮다.
- 2023년작 김성수 감독의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 전두광'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며, 배우 황정민이 연기했다. 정우성이 연기한, 장태완이 모티브인 이태신 소장과 함께 작중 비중을 양분하고 있는 캐릭터다 보니 제5공화국 드라마 이후 간만에 전두환이 제대로 주역으로 나오는 작품이 됐다. 다만 이전까지는 그래도 정치인, 장군에 가까웠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이번엔 교활하고 사악한 모습이 많이 부각되었다.[69]
11.2. 기타
- 웹툰 브이에서 김재규와 모의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당하던 김훈을 회유하면서 등장, 특유의 대머리 때문에 김훈이 눈부셔한다. 결국 김훈은 여기에 넘어가 육군 중위 계급을 받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에 동원된다.
- 대체역사물인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선 주인공 유진 킴에게 찍혀, 거의 반강제로 군에 전역하게 된다. 대놓고 삼국지의 위연이라면서 까이는 것이 압권. 때문에 사업이나 하면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며, 재기를 위해 김대중을 비롯한 호남 세력과[70] 손을 잡을 것이 암시된다.
- 상술한 26년의 원작 웹툰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음흉한 폭군으로써의 면모가 부각되는 영화와는 좀 다르게, 모든 일의 흑막과도 같은 모습이[71] 주로 드러난다. 눈물로 항의하는 김갑세를 보고도 무시하며 사태가 진정되는 추세가 보이자, 자신을 죽이려하는 자들까지 나타났음에도 반성이나 충격은 고사하고 골프 치러 갈 생각이나 한다. 이후 마지막에 심미진의 저격에 사망했는지는 불명.[72]
- 스틸레인에선 간접적으로 등장. 휴전선의 북한군 일부가 야밤에 갑자기 평양으로 전차 기수를 돌리자, 국정원장이 1961년 5월 16일과 1979년 12월 12일에 있었던 일이 북한에서 일어난 것 같다며 박정희와 전두환을[73] 회상한다.
- 워게임: 레드 드래곤에서는 부산 포위전 캠페인에서 언급으로만 등장, 부산 포위전 캠페인의 트롤러 취급으로, 6월 항쟁이 일어나자[74] 끝내 군을 진압작전에 투입하는 바람에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지고[75], 전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북한은 다시 한번 남침을 강행해 국군은 5일 만에 경남까지 밀려나게 된다.
- 웹툰 김부장에선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금 문의 회장 남우철을 보고 국무총리가 일개 방산업체 사장이 고작 사업체 하나로 쿠데타를 일으키는게 말이 되냐고 한다. 이때 남우철의 군인시절이 과거회상으로 나오며 전두ㅎ... 으로 나오는 인물에게 일을 하나 해보자고 제안 받게된다. 이후 직접적인 언급으로는 그 분이라고 묘사되며 제의 받았던 일은 비자금을 관리하던게 밝혀진다
12. 관련 문서
- 12.12 군사반란
- 서울의 봄
- 29만원
- 5.17 내란
- 5.18 민주화운동
- 6월 항쟁
- 박정희
- 최규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김종필
- 이순자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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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 부산 대아호텔 화재사고 ·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 개막 · 정치활동 규제자 2차 해금 · 청계피복 노조 합법화 투쟁 ·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결성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 대우어패럴 노조 탄압 · 정래혁 투서 사건 ·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 ·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결성 · 목동주민 철거 반대투쟁 · 전두환 방일 반대투쟁 · 1984년 한강 대홍수 · 함평 무안 농민대회 · 청량리경찰서 여대생 성추행 사건 · 전두환 대통령 방일 ·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 서울올림픽주경기장 개장 · 민주화추진위원회 결성 · 박영두 의문사 사건 · 민주통일국민회의 결성 · 망원동 수재 사건 · 학생의 날 부활 ·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농성 · 전국학생총연맹 결성 · 판문점 총격사건 · 박종만 노동자 분신 ·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창립 ·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결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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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 반란군 가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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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4일 12·12 군사반란 성공 기념사진 국군보안사령부 청사 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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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장 남웅종 · 중령 김호영 · 중령 신윤희 · 중령 최석립 · 대령 심재국 · 대령 허삼수 · 대령 김진영 · 대령 허화평 · 대령 이상연 · 대령 이차군 · 준장 백운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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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인물 배치 순서상 표기 ※ 단 우국일 준장은 군사반란 가담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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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비 하나회였던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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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 노태우 | 박근혜 | 박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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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929년생 또는
1930년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당시에는 영아 사망률이 워낙 높아 출생신고를 뒤늦게 하고 애당초 공교육이 의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만 2007년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택 방문을 했을 당시에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내가 1931년생이니까... 77살이거든?"이라 언급한 바 있기에 1931년생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족보와 민증에는
1931년
12월 6일 출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 물론 전두환 자신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2]
완산 전씨 집성촌이다.
[3]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웃 사촌으로,
연희궁이라는 논란이 있었다. 평소 명절때마다 주변 이웃들에게 고기, 과일등 선물을 돌린걸로 유명하다. 실제로 집 근처에 연희궁로라는 도로 표지가 있었다가 논란이 일자
지워졌다.
[임시안치]
전두환 본인은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고 싶다"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이를 실천하려면
대한민국 국방부의 협조가 필요하기에 장지를 정하지 못해 시신이
화장된 후 [age(2021-11-23)]년째 자택에 임시안치된 상태다.
경기도
파주시 장산리의 사유지를 매입해 안장을 시도했었으나
# 반대 여론이 많았고
# 이를 의식한 토지주가 매매를 안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 당분간 계속 자택에 보관할 것으로 보인다.
[5]
1979년의
12.12 군사반란은 군권을 장악한 사건이고 정권은 이듬해
5.17 내란과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를 통해 잡았다. 당시 헌법인 유신헌법상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는
박정희와
최규하의 잔여 임기인 1984년 12월 26일까지였지만 5공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조기(早期) 종료.
[6]
완산 전씨 23세손 ○환(○煥) 항렬이다.(
족보)
[7]
#
#
[8]
전열환과 전규곤은 전두환이 태어나기 전이였던 어렸을 때 사고로 사망했고 셋째형 전기환만이 본인과 같은 90세까지 장수했다.
[9]
만주국 반석현 호란진에 있었던 학교로 1944년 가족들이 대구로 돌아오면서 희도소학교로 전학하였다.
#
#]
희도심상소학교[76] ( 졸업)
대구공립공업중학교[77] (졸업 / 24회)
육군사관학교 (11기)[78] [10] 전두환의 종교는 대외적으로는 백담사에서 은거한 시간 때문에 불교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11] 천주교 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기념서인 “아, 김수환 추기경”에서는 전두환이 고등학생 때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전두환의 세례명이 베드로라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전두환이 언제 누구한테 어디서 세례를 받았는지 정보가 없다. 이는 전두환의 후임자인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이 언제 누구한테 어디서 세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것과 대비된다. 이들 중에서 확고하게 천주교 신앙을 유지하며 성당에도 출석했던 것은 김대중과 문재인 두 명뿐이지만, 철저히 교적 관리를 하고 있는 가톨릭 특성상 거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나머지 대통령들도 세례받은 기록이 있다면 쉬이 찾을 수 없을 리 없다. 평생 전두환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드러내는 행동을 한 적이 일절 없다. 대통령 시절에야 정치적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그렇다 쳐도, 정치적인 것과 좀 거리가 있었던 군인 시절에도 똑같았다. [12] 개신교설: 그는 김장환, 김삼환, 조용기 목사를 비롯한 보수 개신교 인사와도 활발한 교류를 나누고 아들인 전재용이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을 허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개신교 신자라고 볼 수도 없다. [13] 불교설: 과거 백담사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나 정작 전두환은 불교 신자도 아니다. 정식 수계도 받지 않았으며, 신자 생활도 특별히 하지 않았다. 일해는 법명이 아닌 호일 뿐이다. 하지만 전두환의 장례절차 중에 입관식은 불교식으로 진행되었다. [14] 대통령 재임 시절 공식 프로필 기준. 다만 노년에도 키는 크게 변함 없었고 체형은 암 투병 이전까지는 계속 유지가 잘 되었으며 70kg를 넘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건강 관리를 잘 하였다. [15] 이때는 아직 유신 헌법 시절이라 박정희, 최규하와 같은 내용을 읽었고 8차 개헌 이후 12대 취임 선서에서는 "국헌"을 "헌법"으로 고치고 "민족 문화의 발전"을 추가해서 읽었다. [16] 최초의 4년제 기수라서 처음엔 1기로 불렸다가 후에 11기로 변경. 이들은 1기~10기 선배 기수들과 달리 종전 시까지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에서 4년 교육을 받았다. 선배 기수들은 대부분 참전을 했기 때문에 6개월도 되지 않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급하게 투입된 경우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선배 기수들은 11기 이후 기수들을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은 기수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있고, 11기 이후 기수들은 선배 기수들과 달리 자신들이 4년 정기 과정을 수료한 진정한 기수라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육사 11기는 교육을 받은 자신들이 진정한 1기라고 말하며, 자신들 및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관학교 출신 군인들을 모아 하나회를 만들었으며, 이후 쿠데타 즉 12.12 군사반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였다. [17] 소령에서 중령 진급까지 불과 1년 2개월밖에 안 걸렸다. 이는 박정희의 대단한 신뢰가 있어서 가능했다. [18] 1969년 9월 서종철 대장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서종철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관생도 시절 훈육요원이었다. [19] 1972년 9월부로 제1공수특전'단'이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되어서 부대장도 대령에서 준장 보직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당시 대령이었던 전두환은 정식 여단장은 될 수 없어서 일단 '여단장 직무대리'의 형식으로 부대장직을 유지하다가 1973년 1월 임시제 준장이 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된던 것이다. [20] 취임 2개월여만에 사퇴. 노태우가 취임한 뒤 전두환이 자신의 상왕 노릇을 하는 걸 막기 위해 국가원로자문회의 설치를 하지 않았다. 헌법상 국가원로자문회의는 '설치해야 한다' 라는 의무성 조항이 아닌 '설치할 수 있다' 로 현직 대통령의 선택에 맡기기 때문이다. [21]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노태우와 함께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사면된 지 2년여밖에 안 된 시점이라 논란이 많았다. 2002년 기념관이 개관할 때까지 고문직 유지. [22] 제11대 대통령 때는 유신 헌법에 따라 선출되었기에 제4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95고합1280] [24]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최종적으로 인정된 죄명은 “반란수괴,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살인, 살인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이다(대법원 1997.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이 판결이 확정되어 경호·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었다. [25] 당시 문민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 모두 동의했고 여야 모두 찬성 의사를 밝힌 상태라 전두환의 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 전 노씨 사면 화합정치 전개 3당 일제.환영 1997.12.21 한겨레 [26] 오랜 친구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 후 딱 4주가 된 시점이었으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진행되었다. 전두환의 사망을 끝으로 20세기에 집권한(임기 시작부터 퇴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퇴임 후 생존한 기간은 33년으로 역대 대통령 중 최장 기록에 해당한다. [27]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 선거 [28] 대통령 선거인단제 간접 선거(통일주체국민회의 폐지) [29] 윤보선은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의원내각제 의회에서 선출하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였으며, 최규하는 10.26 사건 이후 보궐선거로 선출되어 박정희의 잔여임기만을 재임하고 빠른 시간 내에 개헌하여 유신 정권을 민주 정부에 정상적으로 이양한다는 약속을 하고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윤보선, 최규하 모두 각각 5.16 군사정변,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 [30] 간접선거까지 포함하면 이승만은 3회( 3.15 부정선거 제외), 박정희는 5회 당선되었다. [31] 백담사 은둔 시기에 탈당. 1988년 11월 23일. 그날로부터 정확하게 33년 후 사망했다. [32] 전두환에 이어 세 번째는 노태우인데, 이들 3명 외에는 대장은커녕 아예 직업군인 출신 대통령 자체가 없다. 참고로 김영삼은 6.25 전쟁으로 인한 학도병이었고, 노무현과 문재인은 각각 예비역 상병과 병장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병역의무에 따른 병역 수행이다. [33] 초임인 이승만, 임기가 짧았던 윤보선, 개헌으로 간선제를 만들어 집권했던 박정희, 그 뒤를 이은 최규하에 이어 마지막이다. 이들 중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제헌 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된 초대 선거를 빼고는 2회, 3회 모두 국민의 직접투표로 당선되었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였던 박정희도 제5대 대통령 선거부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까지는 3회간 국민 투표로 당선되었다. [34] 전두환은 11대, 12대 대선 모두 간선제를 통해서 당선됐다. 국민의 직접 선거로 단 한번도 대통령 당선이 된 적이 없는 것이다. 전두환처럼 간선제로만 대통령이 된 사례로는 윤보선, 최규하가 더 있지만 이 두 명은 전임자의 갑작스런 궐위로 인한 특수 케이스인 걸 감안하면 사실상 전두환이 유일하게 간선제로만 대통령이 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두환도 최규하의 궐위로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최규하가 하야하기 전까지 12.12 이후 8개월 가량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 둘과 같은 선상에서 볼수 없다. [35] 1980년부터 1985년 극초반까지 대한민국은 오늘날의 북한, 중국, 투르크메니스탄과 비슷하게 여당 민주정의당과 관제야당만 허용되는 사실상 일당제 국가였다. [36] 그 이전 대통령들은 모두 임기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였다.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로 인해 촉발된 4.19 혁명으로 하야하였고, 윤보선은 5.16 쿠데타의 압박으로 사임했고, 박정희는 유신체제와 18년 장기 집권으로 비판을 받다가 결국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재임 중에 사망하였으며, 최규하는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의 압박을 받다가 취임 8개월만에 사임했다. [37]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재판 1심은 사형, 2심, 3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노태우는 최고형량이 22년 6월, 박근혜는 20년, 이명박은 17년이었다. [38] 이후 윤석열이 검찰총장으로서 역대 2번째로 사정기관장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허나 전두환은 10.26으로 인한 대통령 박정희의 사망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구속으로 정식 중앙정보부장이라기보다 서리 중앙정보부장이었다. [39] 마지막으로 이름과 아호를 모두 가진 대통령은 이명박이다. 호는 청계. [40] 굳이 말하자면 11대 취임식에서는 수트에 무궁화대훈장을 패용했는데 이것도 공식 석상에서 대통령이 패용한 모습으로는 마지막이었으며 12대 취임식에서는 훈장 패용 없이 모닝코트 차림이었다. 19대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에 취임하여 일반적인 양복 차림으로 취임했으며, 20대 윤석열 대통령 역시 유권해석에 따라 2022년 5월 10일에 취임을 하게 되었다. [41] 1980년 11대 대통령 취임 당시 전두환의 나이는 만 49세였다. [42] 다만 훈장 수훈 규정이 바뀌고 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한 나머지 훈장들은 2006년 노태우와 함께 전부 취소되었다. [43] 탈모를 앓는 대통령은 있었지만( 1970년대의 박정희, 최규하, 이명박, 문재인) 대머리인 대통령은 전두환이 유일하다. 다만 이명박은 모발이식을 했고 문재인의 탈모 루머는 불명확하다. [44] 그 다음으로 긴 순서는 노태우(28년 8개월), 윤보선(28년 4개월), 최규하(26년 2개월) 순이다. 다만 전두환과 노태우는 예우가 박탈돼서 예우가 박탈된 대통령을 제외하면 윤보선이 가장 길다. 참고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7년 9개월이고 현재 살아있는 대통령중 가장 오래 지내고 있는 대통령은 이명박(11년 5개월)이다. 참고로 이명박 역시 뇌물 혐의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아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되었다. [45] 반면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낸 기간이 가장 짧은 대통령은 노무현(1년 3개월, 자살)이며, 자연사한 대통령들 중에서는 이승만(5년 3개월), 김대중(6년 6개월) 순이다. 박정희는 임기 도중 암살당했으니 제외. [46] 첫 번째는 윤보선. 이승만과 같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개월수로는 전두환이 7개월 가량 더 오래 살았다. [47]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승만에 이은 두번째로 국가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다. 윤보선도 가족장으로 치렀으나 당시 2공화국은 대통령이 국가원수였을 뿐 정부수반이 아니었다. [48] 이명박 전 대통령은 시기상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났으나 일본 제국 본토(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후에야 입국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다. [49] 19대인 문재인까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사망했다. [50] 미국의 8대 대통령인 마틴 밴 뷰런과 매우 비슷한데, 그는 퇴임 후 후임 대통령 8명을 보았으며, 전두환과 같이 바로 뒤의 후임자 4명이 사망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전두환이 사망한 시점은 20대 대선을 석달 반 정도 앞둔 시기였기 때문에, 전두환이 6개월만 더 살았다면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는 것까지 봤을 것이므로 마틴 밴 뷰런과 같은 기록을 갱신했을지도 모른다. [51] 2009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겨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화장되었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 역시 화장 유언을 남겨 화장되었다. [52] 전두환은 대통령까지 지낸 내가 화장을 하면 국민들도 생각이 달라질 것 이라면서, 묘를 쓰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먼저 화장된 노무현은 2009년 사망 직전 유서에서야 화장 의사를 밝혔지만 전두환은 최소 2003년부터 화장 의사를 밝혔기에 이 기준으로는 최초로 볼 수 있다. [53] 노무현 전 대통령은 화장 후 봉하마을에 마련된 묘역에 안장되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파주 검단사에 임시 안치되어 있다가 사망 이듬해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되었다. 반면 전두환은 화장 이후 현재까지 사저에 유골이 보관이 되어 있는데, 전두환이 생전 장지에 대한 유언을 모호하게 남긴 것도 있고 과거사에 대한 진정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사망해서 대중의 여론이 매우 나빠 장지를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안장이 미뤄지고 있다. 사망 2년 뒤인 2023년 유족이 파주시 장산리에 위치한 한 사유지를 매입해 묘지 자리를 마련했으나, 이 사실이 지역사회에 알려지며 크나큰 반발을 불러 결국 땅주인이 땅을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안장이 무산됐다. 이렇기 때문에 정식으로 사저에 안치된 것이 아니라 사저에 임시안치된 것일 뿐이다. [54] 무려 4주(28일) 만에 사망. [55] 김영삼(11월 22일 사망) 다음날에 사망했다. [56] 2005년 제5공화국 방영 당시 생존해있던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수십차례의 정정보도를 걸었지만 드라마는 내용 수정만 조금 해서 문제 없이 방영되었다. 다만 전두환이나 노태우 본인은 드라마에 대해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57] 전두환은 장세동 역을 맡은 홍학표 배우를 만나 "장세동이 나를 형님이라 부른 적은 없다.", "내 욕은 조금만 먹게 해달라."는 농담 정도만 했을 뿐이지 격하게 반발하거나 하진 않았다. [58]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는 카메오로 나왔다. [59] 영화에서는 전두혁으로 나온다. [60] 영화에서는 전두광으로 나온다. [61] 영화에서는 전상두로 나온다. [62] 다만 그가 고초를 겪은 것은 전두환이 지시해서가 아니라 당시 방송계 분위기가 워낙 험악하다 보니 방송사 사람들이 알아서 긴 것이라고 한다. 도리어 전두환 본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황당하다며 사과까지 했었고 한술 더 떠 옆에 있던 이순자는 왜 청와대에 탄원서를 넣지 않았느냐며 안타까워 했다고. 이 자리에서 전두환이 박용식에게 "앞으로 내 역할은 박선생이 다 하시오"라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라고 한다. [63] 다만 정종준은 체구가 푸짐한터라 싱크로율은 낮은 편이다. 윤동환은 인상이 샤프해서 제법 싱크로율이 높은 편. [64] 이 분 이전에 전두환 전담 배우로 유명했던 박용식 씨가 자신의 후배 성우인 박지윤의 친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게다가 둘 다 KBS 성우극회 소속이다. [65] 18대 총선 투표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했던,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발언도 대사에 수록되었다. [66] 황태섭 역을 이덕화가 맡았는데, 제5공화국에서 이덕화가 전두환 역을 맡아서 배우개그가 성립했다. [67] 이후 염동헌은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의 선배인 유학성을 모델로 한 배송학 역을 맡아 연기했다. [68] 이름은 작중 서명란에 등장한다. [69] 배우가 이전에 맡았던 수리남의 전요환 목사가 생각난다는 평가가 많았고 반란 성공 후 화장실에서 혼자 박장대소하는 장면에서는 아예 곡성의 악마가 생각난다는 평도 있다. [70] 원 역사를 생각하면 엄청난 나비 효과다. 이 세계관에선 하나회 결성 이전에 군에서 쫓겨나면서, 전라도 지역과 척질 일이 없었다. [71] 작중에서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기껏해야 마지막에 눈 위치가 살짝 바뀐 것 뿐이다. [72] 열린 결말이다. [73] 박정희는 정변 당시에 차지철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전두환은 그 유명한 신군부 단체 사진으로 나온다. [74] 김일성의 명령으로 북한이 시위대 내부에 간첩을 침투시켜서 현실보다 훨씬 혼란한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이다. [75] 정확히는 계속해서 몰려드는 시위대를 보고 패닉에 빠진 한 현장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휘하 병력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버리는 바람에 얼마 못가 서울 전역이 5.18과 마찬가지로 피바다가 되었다.
희도심상소학교[76] ( 졸업)
대구공립공업중학교[77] (졸업 / 24회)
육군사관학교 (11기)[78] [10] 전두환의 종교는 대외적으로는 백담사에서 은거한 시간 때문에 불교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11] 천주교 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기념서인 “아, 김수환 추기경”에서는 전두환이 고등학생 때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전두환의 세례명이 베드로라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전두환이 언제 누구한테 어디서 세례를 받았는지 정보가 없다. 이는 전두환의 후임자인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이 언제 누구한테 어디서 세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것과 대비된다. 이들 중에서 확고하게 천주교 신앙을 유지하며 성당에도 출석했던 것은 김대중과 문재인 두 명뿐이지만, 철저히 교적 관리를 하고 있는 가톨릭 특성상 거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나머지 대통령들도 세례받은 기록이 있다면 쉬이 찾을 수 없을 리 없다. 평생 전두환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드러내는 행동을 한 적이 일절 없다. 대통령 시절에야 정치적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그렇다 쳐도, 정치적인 것과 좀 거리가 있었던 군인 시절에도 똑같았다. [12] 개신교설: 그는 김장환, 김삼환, 조용기 목사를 비롯한 보수 개신교 인사와도 활발한 교류를 나누고 아들인 전재용이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을 허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개신교 신자라고 볼 수도 없다. [13] 불교설: 과거 백담사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나 정작 전두환은 불교 신자도 아니다. 정식 수계도 받지 않았으며, 신자 생활도 특별히 하지 않았다. 일해는 법명이 아닌 호일 뿐이다. 하지만 전두환의 장례절차 중에 입관식은 불교식으로 진행되었다. [14] 대통령 재임 시절 공식 프로필 기준. 다만 노년에도 키는 크게 변함 없었고 체형은 암 투병 이전까지는 계속 유지가 잘 되었으며 70kg를 넘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건강 관리를 잘 하였다. [15] 이때는 아직 유신 헌법 시절이라 박정희, 최규하와 같은 내용을 읽었고 8차 개헌 이후 12대 취임 선서에서는 "국헌"을 "헌법"으로 고치고 "민족 문화의 발전"을 추가해서 읽었다. [16] 최초의 4년제 기수라서 처음엔 1기로 불렸다가 후에 11기로 변경. 이들은 1기~10기 선배 기수들과 달리 종전 시까지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에서 4년 교육을 받았다. 선배 기수들은 대부분 참전을 했기 때문에 6개월도 되지 않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급하게 투입된 경우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선배 기수들은 11기 이후 기수들을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은 기수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있고, 11기 이후 기수들은 선배 기수들과 달리 자신들이 4년 정기 과정을 수료한 진정한 기수라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육사 11기는 교육을 받은 자신들이 진정한 1기라고 말하며, 자신들 및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관학교 출신 군인들을 모아 하나회를 만들었으며, 이후 쿠데타 즉 12.12 군사반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였다. [17] 소령에서 중령 진급까지 불과 1년 2개월밖에 안 걸렸다. 이는 박정희의 대단한 신뢰가 있어서 가능했다. [18] 1969년 9월 서종철 대장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서종철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관생도 시절 훈육요원이었다. [19] 1972년 9월부로 제1공수특전'단'이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되어서 부대장도 대령에서 준장 보직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당시 대령이었던 전두환은 정식 여단장은 될 수 없어서 일단 '여단장 직무대리'의 형식으로 부대장직을 유지하다가 1973년 1월 임시제 준장이 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된던 것이다. [20] 취임 2개월여만에 사퇴. 노태우가 취임한 뒤 전두환이 자신의 상왕 노릇을 하는 걸 막기 위해 국가원로자문회의 설치를 하지 않았다. 헌법상 국가원로자문회의는 '설치해야 한다' 라는 의무성 조항이 아닌 '설치할 수 있다' 로 현직 대통령의 선택에 맡기기 때문이다. [21]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노태우와 함께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사면된 지 2년여밖에 안 된 시점이라 논란이 많았다. 2002년 기념관이 개관할 때까지 고문직 유지. [22] 제11대 대통령 때는 유신 헌법에 따라 선출되었기에 제4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95고합1280] [24]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최종적으로 인정된 죄명은 “반란수괴,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살인, 살인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이다(대법원 1997.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이 판결이 확정되어 경호·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었다. [25] 당시 문민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 모두 동의했고 여야 모두 찬성 의사를 밝힌 상태라 전두환의 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 전 노씨 사면 화합정치 전개 3당 일제.환영 1997.12.21 한겨레 [26] 오랜 친구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 후 딱 4주가 된 시점이었으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진행되었다. 전두환의 사망을 끝으로 20세기에 집권한(임기 시작부터 퇴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퇴임 후 생존한 기간은 33년으로 역대 대통령 중 최장 기록에 해당한다. [27]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 선거 [28] 대통령 선거인단제 간접 선거(통일주체국민회의 폐지) [29] 윤보선은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의원내각제 의회에서 선출하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였으며, 최규하는 10.26 사건 이후 보궐선거로 선출되어 박정희의 잔여임기만을 재임하고 빠른 시간 내에 개헌하여 유신 정권을 민주 정부에 정상적으로 이양한다는 약속을 하고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윤보선, 최규하 모두 각각 5.16 군사정변,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 [30] 간접선거까지 포함하면 이승만은 3회( 3.15 부정선거 제외), 박정희는 5회 당선되었다. [31] 백담사 은둔 시기에 탈당. 1988년 11월 23일. 그날로부터 정확하게 33년 후 사망했다. [32] 전두환에 이어 세 번째는 노태우인데, 이들 3명 외에는 대장은커녕 아예 직업군인 출신 대통령 자체가 없다. 참고로 김영삼은 6.25 전쟁으로 인한 학도병이었고, 노무현과 문재인은 각각 예비역 상병과 병장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병역의무에 따른 병역 수행이다. [33] 초임인 이승만, 임기가 짧았던 윤보선, 개헌으로 간선제를 만들어 집권했던 박정희, 그 뒤를 이은 최규하에 이어 마지막이다. 이들 중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제헌 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된 초대 선거를 빼고는 2회, 3회 모두 국민의 직접투표로 당선되었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였던 박정희도 제5대 대통령 선거부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까지는 3회간 국민 투표로 당선되었다. [34] 전두환은 11대, 12대 대선 모두 간선제를 통해서 당선됐다. 국민의 직접 선거로 단 한번도 대통령 당선이 된 적이 없는 것이다. 전두환처럼 간선제로만 대통령이 된 사례로는 윤보선, 최규하가 더 있지만 이 두 명은 전임자의 갑작스런 궐위로 인한 특수 케이스인 걸 감안하면 사실상 전두환이 유일하게 간선제로만 대통령이 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두환도 최규하의 궐위로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최규하가 하야하기 전까지 12.12 이후 8개월 가량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 둘과 같은 선상에서 볼수 없다. [35] 1980년부터 1985년 극초반까지 대한민국은 오늘날의 북한, 중국, 투르크메니스탄과 비슷하게 여당 민주정의당과 관제야당만 허용되는 사실상 일당제 국가였다. [36] 그 이전 대통령들은 모두 임기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였다.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로 인해 촉발된 4.19 혁명으로 하야하였고, 윤보선은 5.16 쿠데타의 압박으로 사임했고, 박정희는 유신체제와 18년 장기 집권으로 비판을 받다가 결국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재임 중에 사망하였으며, 최규하는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의 압박을 받다가 취임 8개월만에 사임했다. [37]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재판 1심은 사형, 2심, 3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노태우는 최고형량이 22년 6월, 박근혜는 20년, 이명박은 17년이었다. [38] 이후 윤석열이 검찰총장으로서 역대 2번째로 사정기관장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허나 전두환은 10.26으로 인한 대통령 박정희의 사망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구속으로 정식 중앙정보부장이라기보다 서리 중앙정보부장이었다. [39] 마지막으로 이름과 아호를 모두 가진 대통령은 이명박이다. 호는 청계. [40] 굳이 말하자면 11대 취임식에서는 수트에 무궁화대훈장을 패용했는데 이것도 공식 석상에서 대통령이 패용한 모습으로는 마지막이었으며 12대 취임식에서는 훈장 패용 없이 모닝코트 차림이었다. 19대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에 취임하여 일반적인 양복 차림으로 취임했으며, 20대 윤석열 대통령 역시 유권해석에 따라 2022년 5월 10일에 취임을 하게 되었다. [41] 1980년 11대 대통령 취임 당시 전두환의 나이는 만 49세였다. [42] 다만 훈장 수훈 규정이 바뀌고 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한 나머지 훈장들은 2006년 노태우와 함께 전부 취소되었다. [43] 탈모를 앓는 대통령은 있었지만( 1970년대의 박정희, 최규하, 이명박, 문재인) 대머리인 대통령은 전두환이 유일하다. 다만 이명박은 모발이식을 했고 문재인의 탈모 루머는 불명확하다. [44] 그 다음으로 긴 순서는 노태우(28년 8개월), 윤보선(28년 4개월), 최규하(26년 2개월) 순이다. 다만 전두환과 노태우는 예우가 박탈돼서 예우가 박탈된 대통령을 제외하면 윤보선이 가장 길다. 참고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7년 9개월이고 현재 살아있는 대통령중 가장 오래 지내고 있는 대통령은 이명박(11년 5개월)이다. 참고로 이명박 역시 뇌물 혐의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아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되었다. [45] 반면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낸 기간이 가장 짧은 대통령은 노무현(1년 3개월, 자살)이며, 자연사한 대통령들 중에서는 이승만(5년 3개월), 김대중(6년 6개월) 순이다. 박정희는 임기 도중 암살당했으니 제외. [46] 첫 번째는 윤보선. 이승만과 같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개월수로는 전두환이 7개월 가량 더 오래 살았다. [47]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승만에 이은 두번째로 국가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다. 윤보선도 가족장으로 치렀으나 당시 2공화국은 대통령이 국가원수였을 뿐 정부수반이 아니었다. [48] 이명박 전 대통령은 시기상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났으나 일본 제국 본토(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후에야 입국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다. [49] 19대인 문재인까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사망했다. [50] 미국의 8대 대통령인 마틴 밴 뷰런과 매우 비슷한데, 그는 퇴임 후 후임 대통령 8명을 보았으며, 전두환과 같이 바로 뒤의 후임자 4명이 사망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전두환이 사망한 시점은 20대 대선을 석달 반 정도 앞둔 시기였기 때문에, 전두환이 6개월만 더 살았다면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는 것까지 봤을 것이므로 마틴 밴 뷰런과 같은 기록을 갱신했을지도 모른다. [51] 2009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겨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화장되었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 역시 화장 유언을 남겨 화장되었다. [52] 전두환은 대통령까지 지낸 내가 화장을 하면 국민들도 생각이 달라질 것 이라면서, 묘를 쓰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먼저 화장된 노무현은 2009년 사망 직전 유서에서야 화장 의사를 밝혔지만 전두환은 최소 2003년부터 화장 의사를 밝혔기에 이 기준으로는 최초로 볼 수 있다. [53] 노무현 전 대통령은 화장 후 봉하마을에 마련된 묘역에 안장되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파주 검단사에 임시 안치되어 있다가 사망 이듬해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되었다. 반면 전두환은 화장 이후 현재까지 사저에 유골이 보관이 되어 있는데, 전두환이 생전 장지에 대한 유언을 모호하게 남긴 것도 있고 과거사에 대한 진정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사망해서 대중의 여론이 매우 나빠 장지를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안장이 미뤄지고 있다. 사망 2년 뒤인 2023년 유족이 파주시 장산리에 위치한 한 사유지를 매입해 묘지 자리를 마련했으나, 이 사실이 지역사회에 알려지며 크나큰 반발을 불러 결국 땅주인이 땅을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안장이 무산됐다. 이렇기 때문에 정식으로 사저에 안치된 것이 아니라 사저에 임시안치된 것일 뿐이다. [54] 무려 4주(28일) 만에 사망. [55] 김영삼(11월 22일 사망) 다음날에 사망했다. [56] 2005년 제5공화국 방영 당시 생존해있던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수십차례의 정정보도를 걸었지만 드라마는 내용 수정만 조금 해서 문제 없이 방영되었다. 다만 전두환이나 노태우 본인은 드라마에 대해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57] 전두환은 장세동 역을 맡은 홍학표 배우를 만나 "장세동이 나를 형님이라 부른 적은 없다.", "내 욕은 조금만 먹게 해달라."는 농담 정도만 했을 뿐이지 격하게 반발하거나 하진 않았다. [58]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는 카메오로 나왔다. [59] 영화에서는 전두혁으로 나온다. [60] 영화에서는 전두광으로 나온다. [61] 영화에서는 전상두로 나온다. [62] 다만 그가 고초를 겪은 것은 전두환이 지시해서가 아니라 당시 방송계 분위기가 워낙 험악하다 보니 방송사 사람들이 알아서 긴 것이라고 한다. 도리어 전두환 본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황당하다며 사과까지 했었고 한술 더 떠 옆에 있던 이순자는 왜 청와대에 탄원서를 넣지 않았느냐며 안타까워 했다고. 이 자리에서 전두환이 박용식에게 "앞으로 내 역할은 박선생이 다 하시오"라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라고 한다. [63] 다만 정종준은 체구가 푸짐한터라 싱크로율은 낮은 편이다. 윤동환은 인상이 샤프해서 제법 싱크로율이 높은 편. [64] 이 분 이전에 전두환 전담 배우로 유명했던 박용식 씨가 자신의 후배 성우인 박지윤의 친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게다가 둘 다 KBS 성우극회 소속이다. [65] 18대 총선 투표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했던,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발언도 대사에 수록되었다. [66] 황태섭 역을 이덕화가 맡았는데, 제5공화국에서 이덕화가 전두환 역을 맡아서 배우개그가 성립했다. [67] 이후 염동헌은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의 선배인 유학성을 모델로 한 배송학 역을 맡아 연기했다. [68] 이름은 작중 서명란에 등장한다. [69] 배우가 이전에 맡았던 수리남의 전요환 목사가 생각난다는 평가가 많았고 반란 성공 후 화장실에서 혼자 박장대소하는 장면에서는 아예 곡성의 악마가 생각난다는 평도 있다. [70] 원 역사를 생각하면 엄청난 나비 효과다. 이 세계관에선 하나회 결성 이전에 군에서 쫓겨나면서, 전라도 지역과 척질 일이 없었다. [71] 작중에서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기껏해야 마지막에 눈 위치가 살짝 바뀐 것 뿐이다. [72] 열린 결말이다. [73] 박정희는 정변 당시에 차지철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전두환은 그 유명한 신군부 단체 사진으로 나온다. [74] 김일성의 명령으로 북한이 시위대 내부에 간첩을 침투시켜서 현실보다 훨씬 혼란한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이다. [75] 정확히는 계속해서 몰려드는 시위대를 보고 패닉에 빠진 한 현장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휘하 병력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버리는 바람에 얼마 못가 서울 전역이 5.18과 마찬가지로 피바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