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85년 10월 29일 검찰이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해 관련자 26명을 구속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깃발 사건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2012년 말에 개봉한 영화인 ' 남영동1985'의 배경이 된 사건이다.2. 내용
민주화추진위원회는 1980년대 초에 만들어진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 조직으로, 약칭은 '민추위'다. 산하에 노동문제투쟁위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원회, 대학간 연락책 등 4개 기구를 두고 1985년 3월 삼민투쟁위원회(삼민투)를 결성해 5월의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을 주도하였으며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대우어패럴 동조 시위 등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1984년에는 민추위의 활동에 대한 평가, 올바른 운동 방법, 정치 상황에 대한 분석 등을 내용으로 하는 지하신문 《깃발》을 두 차례에 걸쳐 발행하였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이 세간에 '깃발 사건'으로 알려졌다.이로 인해 5공화국 정부는 깃발 전담반을 설치하고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이후에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검찰은 민추위 관련자들을 자생적 사회주의자들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과 관련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 김근태 의장은 1985년 9월 4일 새벽 5시 30분 서울서부경찰서에서 구류 10일을 마치기 직전이었으나 경찰 7명에게 붙들려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 이곳에서 23일간 김수현 및 백남은 경정, 이근안 경감, 김영두 경위,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 경장, 전사문[1] 등 경찰관 8명으로부터 물고문·전기고문 등을 받았고 특히 김근태는 그해 9월 7일 국가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9월 26일 검찰 송치 도중 검찰 청사에서 대기 중이던 아내 인재근에게 고문 사실을 알리자 이 때문에 가족 면회와 변호인 접견이 실질 금지되었다가 12월 9일 홍성우 변호사가 20여차례의 거부 끝에 처음으로 접견했다. 13일 변호인 접견 중 고문의 증거인 양쪽 발뒤꿈치 상처딱지를 재판 증거로 제출할 것을 요청했으나 구치소에서 탈취당했고, 19일 1차 공판에서 모두진술을 통해 고문 사실을 폭로했다. 이 사실은 1987년 중원문화에서 수기 <이제 다시 일어나(남영동)>로 엮어져 출간되었다.[2]
1985년 12월 30일에 대한변호사협회와 김근태가 수사관 8명을 고문 및 불법구속 혐의로 고발했고 1986년 1월 30일 인재근 등도 수사관 8명 외에 김원치 등 공안부 검사 4명을 불법감금, 가혹행위, 직무유기 등으로 고발, 10월에는 5,100만원 가량의 국가배상 청구소송까지 냈다. 그러나 고문경관 건은 1987년 1월 6일 불기소처분되었고 김근태 자신은 1986년 9월 24일 대법원에서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을 판결받았다.
한편 당시 민추위 위원장은 PC통신 나우누리와 인터넷 방송 아프리카TV로 유명한 나우콤의 문용식 전 사장이었다. 문용식은 서울대 국사학과 79학번으로 총학생회장을 거쳐서 1985년 민추위를 결성했다가 구속돼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총 5년간 복역하다가 1990년 출소했으며 늦게 학교를 졸업한 후 1992년 나우콤의 전신인 BNK에 입사해서 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학생운동의 족보를 보면 당시 서울대 민추위는 사구체 논쟁 중에 정립된 소위 ND 그룹의 핵심으로 분류된다.
3. 사건의 배경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1983년 12월 유화조치로 피어오른 민주화의 불길이 1985년 2월 12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정권 반대를 외치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신민당이 떠오르고 대학생들이 미국 문화원을 점령하고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당시는 전두환의 독재에 대한 저항이 날로 거세지던 시기였다.이 때문에 안 그래도 군사 반란과 광주 학살로 정권을 찬탈한 독재자였던 전두환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똑같은 반란군 출신인 전전임 대통령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민주화를 요구했던 국민들에게 고문으로 답했다.
4. 사건 이후
사건 이후 이들은 교도소 내에서도 힘든 수형생활과 인권 침해를 당해야 했으며 특히 관련자 중 안병룡은 1986년 7월 28일에 교도소 내 양심수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다가 경비교도대 등에게 고무호스 등으로 두들겨 맞아 왼쪽 눈 언저리가 찢어지는 비극을 겪었고[3] 김근태만큼 잔혹한 고문을 당한 이을호 민청련 상임위 부위원장은 2011년 이전까지 1년에 3개월 꼴로 입원할 정도로 정신분열증을 안고 가게 되었다.국민의 숨소리까지 감시하던 군사정권 시절이라[4] 사건은 이대로 묻히는가 싶었지만 김근태의 아내 인재근이 당시 고문 사실을 미국 언론과 인권단체에 폭로하여 전세계에 알려졌고 1987년 부부가 공동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였고 이듬해에는 독일 함부르크재단이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였다.
1987년 6.29 선언 후 명예회복의 계기가 열렸다. 김근태는 1988년 6월 가석방 후 12월 서울고등법원에 1년 전 제출한 재정신청이 수용되었으나 김수현 등 수사관 4명만 재판에 회부, 1991년 1월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김수현 경감은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 백남은 경정은 징역 3년 6개월, 김영두 경위는 징역 2년 6개월, 최상남 경위는 징역 2년이 각각 선고되었으나 도주 위험이 없다는 이유로 법정 구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8월 서울고등법원에서 김수현에게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2년, 백남은 외 3명에 징역 2년 ~ 1년 6개월 등을 각각 선고하여 법정 구속, 12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2심과 똑같이 확정되었다. 한편 고문 수사관 중 하나인 이근안은 1988년 12월 <한겨레>를 통해 실명이 밝혀진 후 10년 넘게 도피하다 1999년 10월 자수, 2000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이 선고되어 2006년까지 옥살이했다.
김근태는 1992년 1월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5천만 원 가량의 국가배상 판결을 받고 2003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 그가 사망한 뒤인 2012년 아내 인재근 의원이 이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재심 후 무죄를 선고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김근태뿐 아니라 사건 관계자들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
재판부는 "사건 관계자들이 협박·강요·고문을 당했다며 법정 진술을 번복했다"면서 "고문 등 당시 경험에 대한 이들 진술의 상세성, 당시 연행 과정에서도 영장 제시 등 적법한 절차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위법한 수사가 이뤄졌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민추위 사건의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를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들이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가 물고문해 사망케 한 것이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는 1987년 당시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의 기자 회견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이다.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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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2월 21일 MBC <성공시대> 인권변호사 이돈명 편에서 어느 정도 다뤘는데, 당시 이돈명 역은 배우
강태기, 김근태 역은
서영진이 맡았다.
- 2012년 개봉 영화 < 남영동1985>가 이 사건을 토대로 했다.
6. 참고 문헌
- 두산백과 항목
- 경향신문 2004년 5월 30일자 '실록 민주화운동 - 김근태 고문사건'
-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피해 실태 기초조사 - 진실의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