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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9:09:37

하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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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정부 사건 주동 세력
<colbgcolor=#003478,#001123> 1948년 <colbgcolor=#29166f> 대한민국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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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남로당 무장반란 사건*
(제주 4.3 사건)
남로당 제주도당
( 김달삼· 이덕구 등)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
남조선로동당
(지창수·김지회 등)
1952년 1차 개헌
(발췌 개헌)
이승만 정권
1954년 2차 개헌
(사사오입 개헌)
1961년 대한민국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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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 군사혁명위원회
( 박정희· 김종필 등)
1965년 대한민국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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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충연 반혁명 사건* 원충연 대령 외 다수
1972년 7차 개헌
(10월 유신)
박정희 정권
1979년 대한민국 제4공화국
[[박정희 정부|{{{#!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3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835b38;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 font-size: 1.0em"]]
10.26 사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외 다수
대한민국 제4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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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 신군부
( 전두환· 노태우 등)
1980년 5.17 내란
1990년 대한민국 제6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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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계획*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국군보안사령부
2013년 대한민국 제6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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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
(이석기 내란선동 사건)
통합진보당
( 이석기 등)
*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 및 반란 }}}}}}}}}}}}


12.12 군사반란 반란군 가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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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군부 단체사진 고화질(컬러).jpg
1979년 12월 14일 12·12 군사반란 성공 기념사진
국군보안사령부 청사 앞
준장 남웅종 · 중령 김호영 · 중령 신윤희 · 중령 최석립 · 대령 심재국 · 대령 허삼수 · 대령 김진영 · 대령 허화평 · 대령 이상연 · 대령 이차군 · 준장 백운택
소장 박준병 · 대령 이필섭 · 대령 권정달 · 대령 고명승 · 대령 정도영 · 준장 장기오 · 준장 우국일 · 준장 최예섭 · 대령 조홍 · 대령 송응섭 · 대령 장세동 · 대령 김택수
준장 이상규 · 준장 최세창 · 준장 박희도 · 소장 노태우 · 소장 전두환 · 중장 차규헌 · 중장 유학성 · 중장 황영시 · 소장 김윤호 · 소장 정호용 · 준장 김기택
※ 사진 인물 배치 순서상 표기
※ 단 우국일 준장은 군사반란 가담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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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비 하나회였던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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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6e3ff,#000033><colcolor=#000,#fff> 전개 5.17 내란 · 배경 및 전개 · 계엄군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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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성3. 결성 과정
3.1. 이설
4. 활동 과정
4.1. 박정희의 비호4.2. 자리 물려주기
4.2.1. 빠른 진급
4.3. 소속원 실드4.4. 야전군 지휘 경험 부족
4.4.1. 폐해
4.5. 7.6. 거사 사건4.6. 하나회 주도권 잡기4.7. 윤필용 사건
5. 12.12 군사반란 당시 핵심 인물
5.1. 주동자5.2. 보안사5.3. 수경사5.4. 육군본부5.5. 사단5.6. 공수특전여단5.7. 청와대
6. 5공, 6공의 지배 세력
6.1.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 암투
7. 문민정부의 숙군 작업8. 이후9. 기타10. 창작물에서11. 관련 문서 및 자료12.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 군대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던 비밀 사조직 하나회. 이들의 가입의식은 비밀리에 치러졌고, 서약을 위반할 때에는 인격말살까지도 감수한다는 배신방지 조항까지 만들어 조직폭력배와 다름없는 군부 내 패거리를 만들어냈다.
드라마 제5공화국 22회, '비밀 사조직 하나회' 편 내레이션 안지환 中에서
하늘도 하나
태양도 하나
각하도 하나
우리도 하나
이름을 왜 '하나회'로 지었는지 묻는 박정희의 질문에 대한 전두환의 대답
하나會 / Hanahoe (Group of One)[1]

하나회 대한민국 육군 내에 있었던 비밀 사조직으로 신군부는 바로 하나회를 일컫는다.[2][3] 전두환 노태우가 중심이 되어 그들의 육군사관학교 11기(1951년 입학, 1955년 임관) 동기들과 후배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비밀리에 결성되었고, 친목회로 출발한 이 조직은 제3공화국 시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은밀한 후원 속에 성장해 나갔다.

본인도 쿠데타로 집권하여 배신 콤플렉스가 있었던 박정희는 자신에게 충성할 하나회 출신 위주 진급을 시켜 주었고, 전두환이 준장에 진급할 땐, 최고급 세단까지 하사했다. 육사 11기 준장 1차 진급자 4명이 전원 하나회였고, 2차 진급자 4명 중 2명이 하나회였다. 1차~2차 장성 진급자 8명 중에 6명이 하나회였을 정도였다. 이처럼 주요 요직은 하나회가 접수하는 푸시를 받았고 제4공화국 시절부터 사실상 최고 권력 집회로 군림하며 요직을 회원끼리 세습해나가는 독차지까지 자행하며 군대뿐만 아니라 정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뻗어나갔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정국 혼란을 틈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나회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이듬해인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후 전두환이 정부와 국회를 장악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렇듯 대통령까지 배출해내고 제5공화국으로 정치 체계를 뒤집었을 정도로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막강한 존재감을 과시한 조직으로 자리매김한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제6공화국이 출범한 이후에도 하나회의 2인자인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 속에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되어 하나회는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부 시절까지도 정권의 주요 세력으로 존속했다. 다만 전두환계와 노태우계가 갈라서면서 하나회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그 세력이 약화된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으로 속내를 감춘 채 하나회 숙청에 칼을 갈던 김영삼이 노태우의 뒤를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올라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전격 숙청이 단행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4]

2. 구성

파일:신군부 단체사진 고화질(컬러).jpg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하고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선 군 수뇌부의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5]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컬러화.[6]
남웅종
김호영
❁❁
신윤희
❁❁
최석립
❁❁
심재국
❁❁❁
허삼수
❁❁❁
김진영
❁❁❁
허화평
❁❁❁
이상연
❁❁❁
이차군
❁❁❁
백운택
박준병
✯✯
이필섭
❁❁❁
권정달
❁❁❁
고명승
❁❁❁
정도영
❁❁❁
장기오
우국일
최예섭
조홍
❁❁❁
송응섭
❁❁❁
장세동
❁❁❁
김택수
❁❁
이상규
최세창
박희도
노태우
✯✯
전두환
✯✯
차규헌
✯✯✯
유학성
✯✯✯
황영시
✯✯✯
김윤호
✯✯
정호용
✯✯
김기택
사진 속의 위치대로 이름을 기재함. ❁: 영관급, ✯: 장성급.

파일:attachment/hnh3.jpg

육군사관학교 11기부터 36기까지의 하나회 회원 全 250명의 명단은 2005년 2월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 신동아>에서 최초 공개되었다. 이 명단은 전술된 기존의 하나회 명단인 '백승도 명단(128명)'의 오류를 바로잡은 하나회 명단의 '완결판'이라고 한다. 하나회 회원 연명부 및 관련 자료

앞서 유념할 점은 하나회는 공식적인 직함이 아닌 사조직이기 때문에 회원이 공식적인 증표를 달거나 활동 내역을 기록으로 보존하고 있을 리가 만무하여[7] 아래 반론들처럼 회원들의 리스트를 확실하게 색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하나회 명단이 살포된 내역을 토대로는 36기를 마지막으로 이름이 올라와 있지만 이후 기수들도 생도 혹은 초임 장교라는 한계상 눈에 띄지 못하는 활동으로 적발되지 못했을 뿐 조직이 지속적으로 젊은 피를 수혈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으며 비슷한 시기 폭로된 만나회나 알자회 같은[8] 다른 사조직으로 개명 혹은 분화로 명맥을 이어나갔을 여지도 존재한다.

하나회 자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2005년 명단이다 보니 이마저도 불확실한데 가장 핵심이 되는 11기부터 틀려서 7명의 이름만 보인다. 하나회의 전신인 일심회 자체가 칠성회+3명으로 '텐 멤버'를 만들고 이들 10명으로 하나회 11기를 구성했다.

일단 육사 1학년 때부터 함께한 '오인회(2학년부터 오성회)' 여성(黎星) 김복동이 빠졌고 '최정택'은 혜성(慧星) 최성택의 오타이다. 그 다음으로 장교 시절 결성된 칠성회 멤버이자 이 문서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손영길이 없다. 그리고 일심회 창설을 위한 텐 멤버 박갑용이 빠졌다. 여기에 추가로 텐 멤버가 아닌 안교덕, 남중수까지 11기 하나회원이다.

이렇게 가장 핵심이 되는 11기부터 틀렸는데 그 아랫기수 명단의 정확성은 김진선[9], 안병호[10], 이현부가 하나회 회원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은 인물들이다. 이게 점조직이라서 서로가 하나회원인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김영삼 정부 당시 합수부의 하나회 색출 작전때 정치 장군들과 어울리며, 꽃보직만 받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추정했는데, 이건 하나회가 아닌 9-9라인도 같은 길을 걸어 구분하기 힘들었다.

3. 결성 과정

각하, 군대 내부에도 각하를 추종하는 세력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두환(당시 대위)이 군대에 남아있길 원해 박정희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사실상의 국회의원직 하사)를 거절하며 한 말.[11]

전두환, 노태우가 포함된 육군사관학교 11기는 1951년 한국 전쟁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에 육사가 개교하며 입학했다. 당시 가입교한 228명의 생도 중 경상남도 41명, 경상북도 29명 등 육사 인근 쪽 사람들이 다수이고, 기타 지역은 전라북도 27명을 제외하곤 10명 미만으로 이전의 군사영어학교 ~ 육사 10기에선 이북 출신이 다수인 것과는 인적 구성부터 차이가 크다. 직업으로 보자면 전쟁상황이라 현역과 군속 113명, 학생 97명, 공무원 4명, 기타 14명이다. 이들은 1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200명이 1952년 1월 20일 정식으로 입학한다.

이들 11기는 가입교 시절부터 출신 지역별로 뭉쳤는데, 추워서 모포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조차도 같은 지역끼리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같은 경북출신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박병하, 박갑용, 남중수 등이 몰려 다니고, 이후 손영길, 최성택 등 경남 쪽 생도까지 가세했다.

이 중에서 전두환, 노태우(전두환과 대구공립공업중학교 동기), 김복동(노태우의 경북고 1년 후배), 최성택, 박병하가 처음부터 의기투합한 '오인회'이다. 1년 후 백운택 생도가 가세하여 '식스 멤버'가 되었고, 최성택의 회고에 의하면 박병하가 유급하여 그를 제외하고 오성회(五星會)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사관생도들은 군인의 꿈은 별이므로 '추성(雛星, 아기별)'이라고 불렀고 생도 문예활동을 정리하는 <추성>이라는 잡지를 매년 1~2회 발간했다. 이 때문에 졸업 후 총동창회 명칭도 '북극성'이 되었다.

최성택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이들 무리중 1명이 "모임의 이름을 붙이자"고 하였고, 누군가 오성(五星) 그룹이라고 하자고 하였다. 이어 별 성(星)자 돌림으로 이름을 짓자고 하여, 용성(勇星) 전두환, 관성(冠星) 노태우, 여성(黎星) 김복동, 혜성(慧星) 최성택, 웅성(雄星) 백운택 으로 정해졌다.[12]

반면 노태우의 회고에 의하면 오성회는 오성회인데 인원은 휘성(輝星) 박병하를 포함하여 6명이라고 한다.[13] 최성택과 노태우 둘 다 오성회의 당사자이다 보니 양쪽 다 기재하지만, <제 5공화국>를 집필한 김철민씨는 여러 의견을 종합하여 최성택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여기에 성(星) 앞에 붙는 호칭은 그들의 특징을 잘 살려 붙였는데 다음과 같았다. 오늘날 와서 보면 중2병 감성도 좀 있어보인다.
오성회는 일명 김태환회로도 불렸다. 복동, 노우, 전두해서 김태환회이다. 그만큼 이 3명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셋이 절친이기도 했으며[14] 특히 김복동과 전두환은 오성회 시절부터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 싸움에는 전두환이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 때문에 칠성회 혹은 일심회 초기 김복동이 잠깐 축출되었었다는 주장도 있다. 승진으로 보면 항상 손영길이 반발자국 앞섰고, 노태우는 한발자국씩 늦었다. 통상 손영길의 보직을 전두환에게 넘겨주고,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넘겨주는 방식이었다. 준장 승진 때까지 치열한 경쟁이었는데 11기중 4명이 먼저 승진에 성공했는데 바로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이었다. 즉 100% 하나회원들끼리 승진했고 그중에서도 '김태환' + 손영길이 앞서 나갔다.[15]

손영길의 경우 공적으로는 박정희의 비서이고, 사적으로는 육영수가 집안 사람처럼 대우할 정도로 심복 중의 심복이었는데, 1973년 1월 준장으로 승진하자 그해 2월 박정희는 손영길과 전두환을 따로 불러 '일심'이라는 휘호가 새겨진 지휘봉과 함게 크라운 6기통 고급 승용차와 금일봉을 하사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전두환-김복동-손영길의 3자 경쟁이 하도 치열해 군내 최대 실력자이자 하나회 후원자였던 윤필용은 "중장, 대장 올라갈 때 다투어도 되는데 왜 벌써부터 의리없게 싸우냐"고 호통을 칠 정도였다. 그들이 자주 다투던 이유는 전두환이 하나회 동기들까지 부하로 대했고, 이때문에 11기들은 좀 삐걱댔는데 특히 전두환과 김복동의 사이가 안 좋았으며 결국 전두환은 노태우와 짜고 최대 라이벌인 손영길을 준장 시절인 73년 윤필용 사건을 통해 제거하며 하나회 내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김복동은 12.12에 반기를 들었다가 1982년 육사 교장을 끝으로 예편하였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조직원들의 나이를 고려해 보면 이 시기 오성회는 훗날 범죄 조직으로서의 모습보다는 친목 단체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를 노태우는 오성회가 공개적으로 어울려 다니면서 다른 생도들이 우러러보는 집단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공개 활동은 믿을 수 있어도 다른 생도들이 부러워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려운데, 오성회는 생도들이 동경할 만한 요소를 하나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사에서 꾸준히 앞선 성적을 거두던 김복동[16], 입학 당시 10위의 성적으로 영어가 유창하던 노태우 정도가 있지만[17] 전두환은 축구부 골키퍼로서 주장이었지만 성적이 좋지 못했다.

전두환은 국민학교를 4학년에야 뒤늦게 시작했고 그것도 중간에 만주로 피신했다 오느라 2년 쉬는 바람에 공부가 부족하여 육사 입학시험부터 1차로 합격을 못하고 예비 후보로 겨우 입학했고[18], 우수 생도가 하는 소대장 생도를 한 번도 못해본 것은 물론, 졸업 성적이 상당히 떨어져 성적순으로 부여되는 군번을 낮게 부여받았다. 심지어 다른 멤버 박병하는 아예 성적 미달로 유급당했다.

그렇다고 어디 잘 나가는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그저 그런 친목 단체에 불과했다.[19][20] 이런 문제로 사관생도 1학년 ~ 2학년 당시 전두환은 성적이 발목을 잡아 퇴교 위기에 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참고로 육사 11기의 수석 졸업자 김성진은 입학 시는 물론 재학 중과 졸업 시에도 몽땅 수석을 한 수학 천재였다. 일리노이대와 플로리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육사 교수사관, 주미대사관 국방무관, ADD 책임연구원 등으로 복무했다. 비하나회이며, 1980년 준장 예편한 뒤 전두환 정부에서 안기부 기조실장과 1차장, 2차장, ADD 소장, 체신부와 과학기술처 장관,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장을 지냈다. 김성진은 대통령과 동기여서 전역 후에도 중용된 매우 특이한 케이스고, 그를 제외하면 이후 육사 수석 졸업자인 대통령상 수상자들은 소대장을 마치고 육사 전임직 교수가 되어 대령으로 예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육사 11기에서도 김성진에 버금가는 성적 우수자들이었던 서우인, 강재륜, 김영국은 소대장 마치고 육사 교수로만 근무했다.

이 오성그룹 혹은 칠성회 회원들은 선민사상에 쩔어 있었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육사 11기 기수 문제다. 이른바 '기칭 파동'.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육사의 역사를 조금 알 필요가 있는데, 육군사관학교는 1949년까지는(훗날 1~9기) 단기 교육만 실시하던 사관학교였다. 그러던 중 1949년에 2년간 교육 과정을 정해서 교육생(훗날 10기)을 받았고[21], 다음 해인 1950년 6월 1일 처음으로 정규 4년제 교육 과정을 받는 교육생(기수 없음)을 받아 교육을 실시한다. 그러나 1949년 입학생이 임관을 코앞에 둔 시점이자, 1950년 입학생들이 기초군사훈련을 받던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져서 육군사관학교는 폐교되고, 아직 교육생 신분인 49년 입학생과 50년 입학생은 채병덕의 명령으로 전쟁 극초반에 소총병으로 포천에 투입되었다.[22] 이후 7월 10일, 교육이 거의 끝난 상태였던 49년 입학생들 중 생존자들을 찾아 임관식을 치렀다. 또한 국방부는 '전쟁 중이라도 장교 육성은 필요하다'[23] 고 깨달았고, 이후 아직 살아있던 50년 입학생들을 다시 찾아 육군종합학교에서 단기교육을 받게[24] 하는 한편, 1951년 10월 31일 경상남도 진해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다시 개교하고 새로 4년 교육 과정의 교육생을 모집하는데, 이들이 바로 하나회 일당들이 입학한 11기 교육생들이다.

그러나 선민사상이 끝내준 것에 비하면 역대 육군사관학교 졸업생 중 최악의 자질들이었다. 인격이나 행보는 둘째치더라도 다들 하나같이 공부들을 매우 못했으며, 캡틴 전두환이 그 중에서도 최고 열등생이었다. 이 시기의 육사 생도들과 비견되는 기수래봤자 내신 놀이로 입학한 54 ~ 58기, 그러니까 실업계 출신인데, 내신만 좋아서 입학한 기수[25] 정도에 불과했다. 이 당시 육군사관학교 11기는 현재와 달리 갑종간부후보생에게 입지가 밀려있었으며, 2020년 기준으로 따지자면 거의 학사장교급 위상을 갖고 있었다. 갑종간부후보생이 육군사관학교 11기보다 위상이 높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게, 이들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육사 11기가 생도이던 시절에 이미 현역 장교로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쉽게 말해 육사 11기가 편하게 후방에서 교육받을 동안 이들이 주장하는 정규 육사가 아닌 선배들은 전쟁터에서 동기가 북한군 총에 맞아 벌집이 되거나 요단강 건너는 꼴을 두 눈 뜨고 목격해 했으며 생사를 걱정해야 됐다. 그러니 당연히 위상 차이가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 육사 11기는 자신들이 공부를 못 했던 것에 대한 콤플렉스로, 이후 육사 출신 후배 장교들 중 하나회의 회원을 고를 때 학업 성적을 보는 경향이 강해졌으며 그리고 이 교육생들이 졸업할 때쯤인 1955년 4월 27일, 육군본부는 '참전용사들의 대우를 겸해서 과거에 입학했던 군인들에게 육사 1기~10기를 부여한다'는 명령을 했다. 그런데 전쟁 중에 후방에서 안전하게 교육을 받던 1951년 입학생들은 이 조치에 반발했고, 그중 최우수 생도 김성진과 웅성(雄星) 백운택이 대표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항의하려다 만나지도 못하고 헌병대에 끌려가는 일이 있었다. 반면 생도들 중 가장 싸움 실력이 좋았던 용성(勇星) 전두환은 되려 육사교장 박병권 장군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여 그냥 넘어 갈 수 있었다.

노태우는 이 일을 두고 회고록에서 "어려움과 배고픔을 견디고 간신히 졸업했는데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양반들이 후방에서 시험 걱정할 때 육사 1기 ~ 10기는 목숨 걱정부터 해야 하는 참전 군인들이었고, 객관적으로 봐도 3년간 실전 경험을 갖춘 군인들이었다. 참고로 이들은 전부 생존했지만 육사 1기 ~ 10기는 매우 많은 인원들이 북한군과 처절하게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26] 그냥 안전한 곳에서 교육만 받던 이들과, 감히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겪고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나라를 위해 싸운 참전용사를 감히 비교하는 것 자체가, 육사 1기~10기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이 행동은 미국 같은 나라였으면 군인이기 이전에 사회적 매장을 당할 개념 없는 발언이다. 그러나 1951년 입학생 중 유의진 단 1명만 퇴학 조치되는 걸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27]

이런 소동 끝에 육사 11기가 된 이들은 1955년 9월 30일자로 156명이 졸업하였다. 동년 10월 4일 소위 계급장을 달았으며, 초등군사반 과정을 마치고 다음해 3월 전방 소대장으로 일제히 나간다.[28]

한편 소대장 생활이 끝난 후 수석졸업자 김성진을 필두로 성적순으로 몇 명이 차출되어 미국 유학 또는 서울대 대학원 과정을 거쳐 1959년 2월 육사 교수요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이른바 '학구파'라고 불렸는데, 전두환·노태우 등 '운동부'의 최대 라이벌이었다. 학구파들은 육사 교수 생활을 하며 ' 청죽회(靑竹會)'(서울 또는 이북 출신)를 만들었고 운동부들은 '하나회'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매사에 부딪치게 되었으니 청죽회 vs. 하나회라고 할만하다.

1961년 4월에는 육사총동창회인 북극성회가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실력 있고 육사 후배들과 계속 관계를 맺는 위치였던 육사 교수 신분은 학구파가 중심이 되었다. 초대 회장도 육사 교수 강재륜이었다. 그리고 5.16 군사정변이 터졌다. 육사 교수는 애초에 공부에 원체 소질이 없었으니 글렀고, 대신 ROTC를 장악할 야심에 서울대 교관으로 나가 있다가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전두환 대위는 다음날인 17일에 육사에 나타나 생도들을 이끌고 지지 시위를 하자고 하였다. 강영훈 육사 교장이나 동기생인 강재륜 교수 등은 반대를 했지만, 전두환 대위가 박정희 소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로 인해 쿠데타에 반대하던 교수들이 한명씩 끌려가자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18일에 육사 18기 ~ 21기 재학생들의 지지 시위가 있었고 5.16 쿠데타를 결정적으로 성공시킨 사건으로 꼽힌다. 덕분에 전두환은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되었다.[29] 이후 박정희는 자신의 경호를 위해 충성스러운 젊은 장교들을 원했는데, 박종규 소령과 차지철 대위가 각각 10명씩 선발한다. 이중 차지철(갑종장교 출신) 쪽은 애당초 별 볼일 없고[30], 박종규(육사 8기)는 정규 육사 11기생 10명을 차출했는데, 이들이 바로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이상 오성회), 손영길, 권익현, 박갑용, 노정기(전원 경상도 출신이자 훗날 하나회 창설 멤버들) 등이다. 이들은 경호실 근무로 권력에 핵심에 있었으며, 이때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하던 박종규와 차지철, 윤필용 비서실장 대리는 훗날 하나회의 최대 후원자가 된다.

이들 청년 장교는 경호실 근무가 끝난 이후[31] 한 계급씩 진급하여 끗발 있는 보직으로 갔는데, 손영길은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전속 비서, 전두환 소령은 중정 인사과장(김복동, 권익현도 중정), 노태우는 보안사 방첩 과장이 되었다. 그리고 1962년 말부터 오성회 중 김복동을 제외하고 전두환, 노태우, 최성택, 백운택 4명에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를 포함하여 칠성회로 개편되었다.[32] 이들 칠성회는 이후 하나회의 모태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워낙 보안을 철저하게 지켜 1973년 윤필용 사건 때까지 하나회가 아닌 칠성회로만 알려졌다.

그러다가 1963년 2월 18일, 박정희 전 의장이 원대 복귀 및 민정이양을 발표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최고회의 앞마당에서 반대 데모를 하는데, 이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33]

육사 11기의 정치 군인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박정희 의장의 전속부관 손영길을 필두로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박갑용 등 5인은 의장 공관에 찾아가 원대 복귀 불가론을 제기한다. 그러자 박정희는 "여러분 뜻은 잘 알아. 그러나 정치는 그렇게 하는 거야."라며 자신의 민정이양이 페이크임을 알리고, "앞으로 일을 하려면 정규 육사 출신들이 똘똘 뭉쳐 나를 도와줘야겠어."라며 육사 장악을 지시한다. 이에 칠성회를 중심으로 노정기[34], 박갑용[35]이 합류했고, 김복동이 복귀하였는데, 이를 텐 멤버라고 부르며 이들 10명이 1963년 일심회 창설 멤버가 되었다. 이후 하나회로 개명. 즉, 오인회(1951년) → 오성회(1952년) → 칠성회(1962년) → 텐 멤버(1963년) → 일심회(1963년) → 하나회(1963년) 순으로 확대 발전한 것이다.

한편 육사 출신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11기생 중 생도 시절 성적이 우수했던 장교들이 모인 상술한 '청죽회'가 중심이었는데, 5.16. 군사정변 때 육사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요구할 때 당시 육사교수부에 배속된 청죽회는 이를 거부했다.[36] 평시였으면 당연히 성적이 좋았던 청죽회가 군대의 요직을 차지할 것인데, 박정희 입장에서는 청죽회의 충성심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전두환처럼 비청죽회 동문을 중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이런 지시를 한 것이었다. 여기에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박 실장, 앞으로 이 친구들 일하는 데 적극 도와줘!"라며 백업을 명한다.

이에 박정희를 만난 텐 멤버를 중심으로 육사 장악을 시도하는데, 청죽회 등 육사 교관단은 학창 시절부터 공부도 더럽게 못한 전두환 소령이 나대는 것을 보고 "네가 뭔데 나서냐?"라며 고깝게 여겼다. 또한 청죽회에는 이북파들이 많았고 이들이 육사 총동문회 '북극성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에 전두환은 당장 북극성회를 장악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고 영남 중심의 소규모 비밀 조직을 만들기로 한다. 이게 바로 육사 내부 영남 파벌의 일심회이다. 이 일심회가 바로 하나회의 초기 형태로, 뜻은 ' 태양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37]

멤버 선정은 물론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이 했다. 이때 노태우의 조직력과 리더십이 뛰어나 후배들에게 호평받았다. 그런데 동기생들은 운동부인 전두환 자체를 싫어하니 합류할 가능성이 만무했고, 12기 ~ 13기 역시 육사 생활을 함께 하며 전두환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기 때문에 껄끄러웠다. 이에 럭비부 출신의 14기 배명국[38]이 후배기수 포섭에 주력하였고, 이로 인해 12기 ~ 13기가 14기보다 늦게 가입했다.

이때 일심회 11기는 텐 멤버 10명+ 안교덕[39], 남중수[40]로 구성된다. 이후 명칭이 하나회로 변경되는데, '국가도, 우정도, 충성도 하나'라는 뜻으로 11기가 정했다.[41]

가입 절차는 몇 년 동안 철저히 심사한 후, 약속한 시간에 11기 중 어느 집에 가면 11기 전체 회원이 일렬로 앉아 있는 곳에 혼자 가서 무릎을 꿇는다. 한 가운데에 전두환 회장이 앉아 있었고, 가입자는 무릎을 꿇은 채 오른손을 펴들고 다음 4개 항의 선서를 한 뒤, 11기 중 1명이 따라준 적포도주를 마시면 가입이 완료된다.
하나, 국가와 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
하나, 선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합의된 명령에 복종한다.
하나, 회원 상호간에 경쟁하지 않는다.
하나, 의리와 맹세를 저버리면 인간적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을 각오한다.

한 단어로 야쿠자 그 자체로, 특히 마지막 조항은 이들이 비밀 조직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조건에 맞추어 일심회는 육사 졸업생 중에서 기수별로 10여 명을 선정하여 거의 스토킹에 가까운 설득과 강요로 가입시켰다. 선정 조건은 영남 지방 출신, 우수한 성적, 정치색 3가지였다. 대충 조건이 맞아 보이면 강제로 가입시키다시피 했다고 한다.

다만 처음부터 위 3가지 조건에 일치하는 사람만 골라 뽑기보다는 한두 가지가 빠지더라도 다른 하나가 월등히 좋은 조건이면 가입시켰다. 예를 들면 영남 출신에 성향도 맞으면 성적이 평타만 되더라도 가입시켜준다거나, 혹은 성적 우수가 가장 중요 요인이었기 때문에 육사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이들은 영남 출신이 아니라 심지어 호남 출신이라도 무조건 뽑았다. 대표적인 예로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 고명승이 있으며, 흔히 장세동도 호남 출신의 하나회원으로 꼽는데, 사실 그는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이지만, 국민학교 때 가족과 함께 서울특별시로 상경하여 계속 서울에서 거주하는 바람에 하나회 가입 전이든 후든 서울특별시 출신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가 하나회에 가입하게 된 건 육사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모든 조건과 상관 없이 하나회의 빽이 되어 줄 수 있는 고위 장성의 친인척이나 부관들이라면 최우선으로 무조건 가입시켰다.

그러나 이북 출신은 절대적으로 배제되었다. 이는 박정희가 하나회 창설 명령을 내린 이유 자체가 백선엽, 이종찬 등 당시 군을 장악하고 있던 이북 출신을 견제하기 위함이고, 전두환 입장에서는 서울·이북 출신이 중심이었던 청죽회랑 라이벌 관계였기 때문에 이북 출신은 철저히 배제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한수 이남 지역 출생자만 가입 가능'이라는 말이 있었다.

가입 후에는 점조직으로 관리했기 때문에 동기 회원들끼리도 누가 하나회 멤버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나마 초급 간부 시절에는 몰라도 하나회가 요직을 독점한 탓에 나중에 가면 진급이나 직책으로 어느 정도 어렵사리 파악이 가능했다.

워낙 가입이 엄격하다 보니 육사 13기 최세창[43]의 경우에는 심지어 12.12 사태 이후에나 간신히 가입이 가능하였다. 사전에 11기와 13기에게 엄격한 심사를 받아 왔고, 12.12 와중에 보여준 충성심이 호평을 받아 가입이 된 것이다.

이렇게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결성했기에 작업에 착수한 지 1년 반이나 지난 후에야 이순자의 친척집에서 첫 모임을 하게 되었다. 이때 참석자는 서울 인근에서 근무하는 20명. 이후 연합 모임은 없었고, 1년에 한번 기별 정기 총회가 있을 뿐이었다. 이때 11기 중 1명이 반드시 참석해서 격려해주는 전통이 있었다. 이 때문에 11기를 제외하고 같은 기수가 아니면 서로 하나회원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위계질서가 생명인 군대에서 이들은 '형님', '아우' 하고 호칭했으며, 특히 11기의 경우 '큰형님'이라고 불렀다. 하나회의 후원자 윤필용은 '대방동 큰형님'이라고 했으며, 박정희는 '태양'으로 칭하는데, 이들 사이에 일종의 암호 같은 역할을 하였다. 모르던 후임 장교가 와서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면 그제서야 하나회원인지 알게 되는 방식이다.

하나회를 영남 출신 위주로 꾸린 것은 5.16 쿠데타 이후의 파벌 싸움과 관계가 있다. 5.16 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 내에서 함경도 출신 정일권, 김동하, 박임항 평안도 출신 장도영, 백선엽 경상도 출신 박정희 간의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결국 박정희는 1961년 7월 3일 평안도 출신 장도영 장군을 쿠데타 음모 혐의로 구속하고, 11월에는 함경도 출신 김동하, 박창암도 쿠데타 혐의로 덤으로 체포하면서 군부 내에서 이북 출신 세력을 완전 제거하고 일인독재를 확립한다. 이런 이북 출신에 대한 일련의 숙청을 당시 군부 내에선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고 불렀다. 1948년 남북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하고, 1950년 ~ 1953년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이북에서 자유를 찾아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 중에서 적지 않은 수가 육사 5기와 군대에 입대하여 파벌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1945년 ~ 1950년에 이북은 '겉은 빨갛지만 속은 하얀 사과'였고, 남쪽은 그의 반대였기에 1953년 휴전 이후에 이북 출신들이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런데 비록 육사 2기였지만 박정희는 남로당 관련 논란으로 한때 사실상 군복을 벗고 있을 때도 있었기에 그 위치가 높지 못하였다. 이는 국가재건최고회의 활동 시기에 국정 주도권을 잡기 위한 권력 투쟁을 불러왔다.[44] 또한 위에서 나온 육사 '기수' 문제에서 정기 4년제 1기인 11기생들에 대한 장악은 김종필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에 대한 견제가 작용하였다. 전두환은 이 긴박하고 혼란했던 시기에 하나회를 만들어냈다. 함경도 출신 정일권, 평안도 출신 백선엽 등 몇몇 이북 출신들이 살아남았지만 이후 군 내에서 세력화는 하지 못하고 박정희한테 절대 충성하는 부하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가 "군을 완전히 휘어잡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내 고향 후배들로 구성된 사조직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3.1. 이설

하나회 결성의 주동자와 시기에 대해 전혀 다른 설들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창설 멤버인 육사 11기 권익현 전 민주정의당 대표는 2015년 월간조선을 통해, "1963년 김종필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4대 의혹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자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당시 박정희 전속 부관) 등과 함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비판 여론을 전달했다"라고 하였고, 이에 박정희는 "너희(육사 11기)가 뭘 좀 만들어봐라"라고 해서 박의장에게 힘을 주고 싶은 생각에 하나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위의 기사가 나가자 육사 11기이자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과 함께 7성회 멤버였던 손영길은 같은 연월 14일 신동아와 전화 통화에서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다. 전두환과 내가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를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내가 전두환을 30경비대대장 후임으로 추천하면서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하나회는 나라에 충성하는 능력 있는 군인 모임으로 내가 만들었고, 대통령을 경호하는 30대대장이 회장을 할 수 없으니 전두환에게 회장을, 이종구에게 총무를 맡겼던 것"이라고 하였다.[45]

2016년 1월 자 신동아 김충립 전 수경사 보안반장[46]의 육필수기에 의하면 손영길이 1965년 30대대장이 되고 나서 이듬해에 '우수 장교 친목 모임'을 만든 것이 출발점이라고 한다. 이 조직이 1967년 전두환이 30대 대장이 되면서 군 내 비밀 사조직이 되었다는 것이다.[47]

또 다른 하나회 창설 멤버인 육사 11기 노정기 필리핀 대사는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등은 예전부터 경쟁 관계여서, 그들의 주장에 대해선 노코멘트하겠다. 확실한 것은 하나회라는 육사 11기 모임은 전두환이 주도한 '5성회', '7성회'에서 출발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모임 명칭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동기생 10여 명이 모여 친목 모임을 했는데, 이후 후배들을 모아 하나회를 조직한 것은 기억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정기는 7성회 멤버가 아니었으며, 이른바 매 기수 별로 한두 명씩 상징적으로 가입시켰다는 비영남 출신의 대표적이 인물이다. 그 바람에 하나회의 속 사정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다. '7성회'란 모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어이없는 주장은, 어쩌면 그가 하나회 핵심에 전혀 접근하지 못했다는 방증일 수 있다.

"하나회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해체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 스스로의 결정으로 해산했는데, 괜히 김영삼이 쇼한 것"이라는 하나회 회원들의 변명도 있다. 문민정부 숙청 당시 육참총장, 보안사령관,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인사참모부장, 수방사 30, 33 경비단장이 모두 하나회원이었던건 우연입니다.

"전두환이 만들기는 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 용도 폐기했다"는 육사 20기 안병호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안병호는 아래 하나회 숙청 항목에서 당시 수방사령관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여기저기 줄 대고 있었다는 그 사람이다. 민병돈 또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군대 내에서 자유 비밀투표를 하다 좌천된 적이 있고 1987년 6월 위수령 또는 계엄 선포와 시위대 해체 계획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1980년 전두환은 참여하지 않았으나 박희도가 그의 명에 따라 자리를 주재하여 경복궁에서 공식적으로 해산 모임을 하였다고. #

이들의 주장만 보고 오해할까봐 첨언하자면 1987년 6월 항쟁에 따른 민주화 과정에서 고명승 보안사령관이 "세상이 어지러운데 유사시 우리 말을 잘 들을 젊은 놈들을 군내에 박아둬야 한다."라며 30기~36기(1980년 임관) 하나회를 한두 달 사이에 급조했다. 즉, 하나회는 전두환 말기까지도 계속 신규 회원을 가입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 1980년대는 하나회의 시대'라는 말이 회자되었는데, 군내 최대 사조직으로 알려진 하나회가 한국을 경영했기 때문이다. 일단 1980년대 2명의 하나회원 대통령이 있었고(전두환, 노태우), 안기부장, 청와대 경호실장, 국방부장관, 기무사령관 등 권력의 핵심은 계속하여 하나회였다. 군을 전역해도 정부각료, 고위공직, 감사원 감사위원, 대사, 국회사무총장, 각 청장, 정부투자기관의 감사 및 이사, 안기부 고위간부, 민주정의당 역대 사무총장 상당수와 전국구 의원 10명도 하나회 출신이었다.

4. 활동 과정

4.1. 박정희의 비호

1961년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 교관으로 근무 중이던 대위 전두환은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의 친위세력을 자처하면서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조직하였고, 이 공로로 박정희[48]의 비서관으로 보임되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군 수뇌부와는 별도로 군 내 자신의 친위세력을 심어둔다는 의미에서 하나회를 방조 혹은 적극적으로 육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윤필용 사건 이전부터 박정희는 전두환, 손영길 등 육사 11기의 준장 진급식에 파티를 열어주고, 별도로 고급 승용차까지 하사하였다. 노태우, 김복동에게는 '하나회'의 최초 명칭인 일심회의 '일심()'이라고 새겨진 지휘봉을 내려주었다. 이는 다른 장성들에게는 하지 않은 대단한 특혜였다. 하나회의 존재가 박정희에게 공식적으로 보고된 이후에도 전두환을 최고 요직 중 하나인 보안사령관에 임명하는 등 계속해서 신임을 보였다.[49]

드라마 ' 제5공화국'에서는 박정희가 하나회의 존재를 보고받자 격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와 다르다는 게 보편적인 평가다. 당시 박정희에게 충성을 경쟁하던 인간들은 널렸는데, 대통령이 조직의 존재 자체를 알고 격노할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면 실제 훗날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 이상의 강도로 하나회를 박살냈을 것이고, 핵심 구성원인 전두환과 노태우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슬퍼런 독재 권력을 가진 박정희의 노여움을 산 일개 사조직이 나중에 자신들의 보직을 이용하여 나라를 뒤엎었다는 게 말이 되는지 의문이다. 작중에서는 이를 박정희가 잠깐 격노하지만 전두환의 각하 친위대 드립[50]을 듣고 풀어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한편 박정희가 하나회를 적극 지원했다는 설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다. 박정희가 취임할 당시 총애하던 차지철과 전두환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는데, 차지철은 이를 흔쾌히 응해서 전역하고 정치인이 되었다. 반면에 전두환은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면서 의원직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게 맞다면 애초에 전두환은 군 내부에서 박정희 친위세력을 만든다는 이유로 전역을 거부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전두환 총애, 이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것이, 군인이라면 당연히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충성해야 한다.[51]

극우 성향의 일부 넷우익들 중에서는 "박정희와 전두환은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좌파 민주당이 전두환이 박정희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전두환은 1961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인 5월 18일에 열린 육사 생도들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막후에서 주도하게 된 공로로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비서관에 발탁되었을 만큼 박정희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심지어 박정희 일가의 가족 식사 자리에도 종종 초대를 받았을 만큼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몸이었다. #

4.2. 자리 물려주기

윤필용, 유학성, 서종철 등 군 상층부의 지원을 받은 하나회 회원들은 초급장교 시절부터 노골적인 인사특혜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국방부, 육군본부, 특전사, 보안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등 진급이 보장되는 요직들을 옮겨 다녔고, 특히 1960년대 말부터는 육군본부 진급과와 보안사 내사과[52] 실무자를 대물림하면서 자신들의 보직을 챙겼다.

야전부대 지휘관 경력이 필요하면 서울 근교의 제9보병사단이나 제9공수특전여단의 지휘관을 맡는 식이었다. 특히 9사단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실전 부대로, 쿠데타나 대규모 시위 발생시 정치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부대이다. 박정희가 하나회 출신들을 9사단에 집중 배치한 건 단순히 서울과 가까워서만은 아니었다. 이처럼 권력과 밀착된 위치인 대통령경호실, 중앙정보부 파견 근무도 이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정작 하나회 회원들의 진급 에스컬레이터마냥 이용되던 9공수가 12.12. 군사반란 당시 하나회의 가장 무서운 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반란 당시 수도권 소재 4개 공수특전여단(1여단, 3여단, 5여단, 9여단) 중 9여단장 윤흥기[53] 준장 갑종장교 출신으로 하나회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고, 나머지 1여단, 3여단, 5여단장은 전부 하나회 회원이었다. 그래서 9여단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지만 반란군 측에서 제안한 신사협정에 진압군 수뇌부가 속아 넘어가며 9여단 병력은 원대 복귀했고, 결국 반란을 진압할 최대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수도방위사령부는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자리라는 특성 때문에 한미연합군사령부의 지휘 라인에 벗어나 있다. 만약 쿠데타가 일어나 충정작전을 위해서는 수도 인근의 9사단을 지휘하는 중요한 자리. 평시에 수방사는 30경비단과 33경비단, 헌병단 밖에 없는데 사실상 이들이 근위대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30경비대대(30경비단의 전신) 초대 대대장이 바로 하나회원 손영길 중령. 그리고 손영길의 추천으로 67년에 전두환이 30 경비대대장에 임명된다. 그는 이 자리의 중요성을 충분히 깨닫고 있어 부대대장에 하나회원인 오한구 소령(13기)과 이종구 소령(14기. 하나회 총무)를 작전장교에 장세동 대위(16기)와 안현태 대위(17기), 정보장교에 김진영 대위(17기)를 임명했으며 중대장들 역시 이현우 대위(17기), 조남풍 대위(17기), 서완수 대위(19기), 전영진 대위(21기) 등으로 아예 도배를 해버렸다.[54]

아무튼 단적으로 1980년부터 1993년까지의 하나회 멤버들이 맡은 주요 보직을 보자면,
전두환이 권력을 잡기 이전인 박정희 때도 마찬가지라 당시 영관급 요직이었던 수방사 경비단장, 보안사 실·처·지구대장, 수방사 대대장·작전참모, 특전사 작전참모, 수도권에 있는 9사단, 30사단 연대장·작전참모가 대부분 하나회원이었다.

4.2.1. 빠른 진급

하나회는 다른 장교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진급이 빨랐으며 하나회 내부에서조차도 전두환이 가장 빨랐다. 일단 전두환의 경우, 소령은 재직 기간이 1년 정도에 불과해 사실상 대위에서 바로 중령이 된 거나 다름 없었으며 1973년 고작 42살의 나이에 준장에 진급했다. 경력으로 따지자면 소위로 임관한 지 고작 18년 만에 장성급 장교가 된 것이며 이는 현직 준장보다 약 10년 정도 진급이 빠른 것이다. 게다가 1955년 소위로 임관한 전두환 1950년에 임관한 장태완과 비교했을 때 1978년에는 둘이 동일한 소장이었다. 문제는 장태완은 명백히 6.25 전쟁 참전용사인 것에 비해 전두환은 같은 기간 육군사관학교 생도로서 후방에서 학업에 전념했을 뿐이었는 점이다. 전두환 뿐만 아니라 노태우 역시 1년 남짓 정도의 차이를 두고 전두환과 거의 동일한 루트와 동일한 진급 속도로 군복무를 했다. 게다가 박희도, 최세창 등 하나회 장교들은 이런 식으로 진급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참고로 육사 10기 다음해에 전두환의 육사 11기가 있던 것이 아니라 6.25 이전 군영, 육사 1~9기, 갑종 1~2기가 있었고, 6.25 중에 육사 10기, 육종 1~32기, 갑종 3~50기쯤, 6.25 전쟁 이후 갑종 50기~111기쯤 그 다음 기수가 1955년 졸업한 육사 11기이다.

즉, 육사 10기와 11기 사이에는 까마득한 차이가 있었고 6.25 전쟁 때 맹활약한 수천명의 갑종, 육종 출신 선배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정책으로 육사 11기가 선배들을 다 뛰어넘고 육사 10기 턱밑 까지 따라 왔다. 육사 10기가 1950년 7월 임관했으니 1955년 임관한 육사 11기는 말도 안되는 속도의 승진이었던 것. 절대 육사 10기 다음해가 11기가 아닌 것이다.

이런 초고속 승진을 하나회는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하나회가 속한 육사 11기는 정규 4년제이고, 육사 9기는 1년제, 그 이전 기수는 몇 달, 육종과 갑종은 몇주 교육 밖에 안 받았다는 게 이유 중 하나였다. 극단적으로 말해 군영부터 육사 8기까지 전체 교육을 다 합쳐봤자 3년이 안되어 육사 11기의 4년에 비교할 수 없이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육사 11기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르고, 몇 주 교육 받고 임관한 갑종과 육종 선배들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리고 육사 선배들도 5년을 건너뛴 이들 후배만을 당겨주고 밀어주었다. 이는 12.12. 쿠데타를 이해 하는데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것이, 그들이 무시한 그 갑종과 육종 선배들이 짧게 교육받은 이유는 전쟁의 급박함 속에서 현장 지휘관들이 임관하자마자 죽어나가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여 빨리 그 수를 채워야하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무시당한 선배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 후배들을 지켜줬더니 후배들은 교육기간을 따지면서 오히려 선배들을 무시하는 꼴이었던 것이다.

4.3. 소속원 실드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면 대개 진급은 커녕 아예 군복을 벗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런데 해당 인물들은 아무도 군복을 벗지 않았고, 진급에 있어서 아무런 피해도 보지 않았다.

4.4. 야전군 지휘 경험 부족

하나회의 리더 전두환의 군 경력들을 살펴보면, 1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적을 빼고는 제대로 된 전방부대에서의 근무 경력이 사실상 없다. 다른 하나회 핵심 멤버들도 비슷하다. 대부분 실전부대 근무는 서울 근교의 충정부대[58]에서의 근무 경력뿐이다.

대표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까지 노태우의 전체 군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력을 대충만 살펴봐도 대대장 시절, 그리고 8사단 21연대장 시절을 제외하면 격오지에서 근무한 적은 거의 없고 철저히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근교와 후방에서만 근무했음을 알 수 있다.[63] 승승장구했으며 특히 대위 시절에는 소령 진급의 필수 조건인 중대장 경력이 없다. 육군에서 소령으로 진급하려면 기본적으로 중대장 보직을 2회 맡아야 하고[64], 장성까지 진급하려면 저 두 번의 중대장 중에 한 번은 반드시 전방 사단에서 중대장을 해야 한다. 그런데 중대장 자체를 거치지 않았는데 장성까지 진급한 것은 뭔가 이상한 이력이다.

게다가 연수나 교관직, 구대장직 등의 교육 훈련 기관이나 철원 배치 및 해외 파병 이외에는 모조리 수도권을 벗어난 적이 없고, 보안사, 육군 본부, 청와대 등이 전체 경력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다만 학사 출신이 매우 드문 당시 한국군 사정상 정규 4년제 1기인 육사 11기부터는 군 내에서도 우대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4.4.1. 폐해

이러한 야전 경험의 부재는 당시 전투병과 장교라면 의무적이었던 베트남 전쟁 파병에서 말썽을 일으켰다. 전방부대에서 다양한 훈련과 여러가지 상황을 직접 겪어봐야 경험이 쌓일 텐데 하나회 장교들은 이런 게 전혀 없었다. 후방 사령부에서 펜대만 줄창 굴리면서 야전부대 지휘에 관해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실전에 냅다 투입되니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베트남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면 1계급 진급과 무공훈장 수여가 관례였기에 하나회 장교들은 뒤에서만 일하면서 자기 승진용으로 전쟁을 써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9사단 29연대장으로 베트남에서 1년을 근무한 전두환이 귀국하자 훈장 심사에서 상관들이 직을 걸 수준으로 결사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야전에서 전두환의 실전 지휘는 심각하게 엉망이었고, 온갖 볼썽 사나운 행동들을 계속하더니 일선에서 싸우는 장병의 사기를 끊임없이 떨어뜨렸다는 것. 몇 가지가 당시 현장에서 사유로 지적됐는데, 자신의 전과를 조작하기 위하여 암시장에서 베트콩 무기를 구입하여 상부에 전리품으로 보고하다가 직속 상관 조천성에게 발각되었고, 부대의 식수가 부족해 병사들이 물을 찾는 상황에서 혼자만 온수 샤워를 즐기고 한가롭게 테니스를 치다가 병사들이 폭주하는 등, 부적절한 처신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결국 진급과 훈장 수여는 무산되었다.

한 마디로 야전 군인으로는 무능하고 정치적 감각만 발달한 군 내의 민폐 집단. 노태우 정부 시절 1992년 지만원[65]이 군부 내 사조직의 병폐를 적나라하게 비판한 칼럼 한겨레신문에 기고되었다. 사실 지만원 본인이 육사 22기로 하나회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군 생활을 했기 때문에, 상당히 쌓인 게 많았을 것이다.

일례로 전두환이 1978년에 육군 소장으로서 제1보병사단장에 발령된 나이가 48세. 2013년 기준으로 육군 대령에 진급하는 나이가 46세이며, 소장에 진급하는 나이가 53세 전후임을 감안할 때 말도 안 되는 나이에 이 위치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육사 10기는 강창성이 40세에 5사단장이 되는 것처럼 전두환보다 진급이 더 빠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육사 11기 이전의 장교들이 한국전쟁으로 갈려나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생존만 한다면 진급을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처지라서 진급이 빨랐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때는 주요 한국군 수뇌부가 30대 정일권 장군이 33세에 소장 계급으로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을 맡고, 유재흥 장군은 29세에 준장 계급으로 7사단장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33세에 대장으로 진급할 정도였고, 이런 빠른 진급은 심각한 인사적체를 불러왔다. 5.16 군사정변의 원인 중 하나가 인사 적체로 인한 육사 8기의 반발이라는 주장도 있다.[66] 한국전쟁 이후 임관해서 어쩌면 현대 한국군보다 더 심한 인사 적체를 맞은 육사 11기는 당연히 진급 속도가 더 느려야 하는 게 정상인데, 하나회 일당들의 진급 속도는 현대 한국군과는 비교할 수 없고, 전쟁을 겪고 살아남았던 육사 10기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진급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물론 이에 대한 변명이 하나 있는데, 박정희는 하나회 일당들의 진급 속도가 빠른 사유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하나하나 돌려가면서 베트남 전쟁에 파병시켰다. 일례로 전두환 → 노태우 → 박희도 이런 식으로 베트남에서 조금씩만 복무시키면서 하나회 일당들을 최대한 베트남 전쟁에 파병시킨 것이며, 전쟁을 겪고 살아남았던 육사 10기가 한국전쟁을 내세울 때 하나회 일당들은 베트남 전쟁을 내세우게 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게 비교 대상일 수가 없는 게 육사 10기는 진짜로 지옥을 뚫고 소위로 임관한 자질들인데 비해 하나회 일당들은 그럴 시간에 후방에서 띵까띵까 꿀이나 빨면서 사고치고 있었으며, 베트남에서조차 하는 일도 없이 시간만 날려먹고 있었던 게 전부였다.

MBC 제5공화국 드라마를 봤다면 알겠지만, 육군사관학교 10기 소준열 장군이 소장 계급으로 한직 육군종합행정학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반면, 후배들인 전두환 장군은 중장 계급으로 보안사령관, 노태우 장군은 소장 계급으로 수경사령관, 정호용 장군도 소장 계급으로 특전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또한 1947년에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6.25 전쟁 중 장교로 현지임관 최갑석 장군이 소령 계급으로 포병 대대장을 맡고 있을 때 육사 11기 졸업생들을 신임 소대장으로 받았는데, 최 장군과 육사 11기가 74년에 같이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게 어떤 의미냐면 2024년 현재 소대장급인 소위 대대장급인 중령의 짬밥 차이는 대대장급의 중령 군단장급의 중장만큼 차이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대대장과 군단장이 맞먹은 셈이다.

거기에 이 하나회 일당들은 심각한 선민사상으로 악명을 떨쳐 자기 선배나 상관을 무시하는 하는 행태를 12.12 군사반란 이전부터 자행하고 다녔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 일개 생도 시절에도 참전용사 선배들을 육사 1 ~ 10기로 임명하는 것을 항의하며 심각한 물의를 빚었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를 받기 시작하자 아주 막 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73년 경에 수경사에 있었던 장태완 장군과 김상구 중령의 갈등 사례로, 장태완 준장이 수경사 참모장으로 부임하여 관할 부대를 시찰하는데 발칸 방공포대의 은엄폐 상태가 불량한 것을 보고 책임자 방공대대장 김상구 중령에게 지적을 한다. 그런데 일개 중령에 불과한 김상구가 본인의 상관이자 참전용사였던 장태완 준장에게 하극상과 심지어 갑종장교 출신이던 장태완 준장을 못배워먹었다는 식으로 폭언을 저지른다. 김상구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 김상구의 동서가 바로 하나회 수장 전두환이었고, 김상구도 하나회 일당으로 그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장태완은 사생결단으로 김상구을 전역시키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 되었지만, 전두환은 이 일로 장태완한테 반감을 가지게 된다.

4.5. 7.6. 거사 사건

그러다 전두환, 노태우(당시 육사 총동창회 3대 회장)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와 1963년 7월 6일 거사를 모의한다. 명분은 4대 의혹 사건으로 인한 부패 척결과 육사 출신 장교의 진급의 불공정이다. 그래서 거사 날짜를 7월 6일로 잡고 자신들이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중정, 방첩부대와 함께 공화당과 자민당의 합작을 반대하는 최고위원 및 공화당 요인 40여 명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위해 손영길, 노태우는 중정부장 김재춘(육사 5기)을 찾아가 "부장님만 묵인하면 그런 부패한 인물(김종필 계열을 뜻함)들을 전부 퇴진 시키겠습니다."라고 의향을 비추기도 하였다. 그리고 7월 6일 아침 경찰이 먼저 알게 되어 비상이 걸리고, 이를 보고받은 김재춘이 즉시 박정희에게 알렸다. 이에 쿠데타 음모는 분쇄되었고 이들 육사 11기생들은 구속이 거론되었지만 결국 선처로 끝났고[67] 김재춘은 중정 부장에서 물러나고 후임으로 김형욱(육사 8기)이 임명되었다. 이것이 1963년 '7.6. 거사 모의' 사건으로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고 조사로만 끝났다.

거사 모의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은 5.16. 자체가 군을 동원한 육사 5기와 계획을 짠 8기라는 두가지 세력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쿠데타 후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김재춘등 육사 5기와 JP등 육사 8기는 계속 충돌하였는데 초대 중정부장에 이어 제3대 중정부장이 된[68] 김재춘은 중정내 차장, 과장, 지부장을 하던 육사 8기 31명을 잘라 버렸고,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육사 11기와 손을 잡은 것이다. 마침 전두환 소령과 노태우 대위 등은 쿠데타로 인해 육사 8기인 JP가 중정부장 등 요직은 다해먹는 사이에 나이[69]로 보나 기수로 보나 별 차이가 안나며, 게다가 4년제 정규 교육을 받은 자기들은 중정에서 말단으로 있는 상황에 열받은 것이다. 즉, 진급에 불만이 매우 강했다. 물론 이들 뒤에는 육사 8기와 JP를 견제 하고 싶은 박정희가 있긴 했는데, 어디까지나 견제 정도였지 친위 쿠데타까지 원한건 아니었다.

어쨌든 전두환과 노태우는 쿠데타는 쿠데타인데 박정희와 김재춘이 견제하던 JP와 육사 8기 40명만 목표로 하는 희한한 쿠데타였다. 이때 사건을 조사한 것이 정승화 방첩대장이라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정승화는 이때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처벌하려 하였으나 김재춘이 직을 내놓고 용서해달라고 했고, 박정희도 자신의 충복들이라 그냥저냥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무엇보다도 처벌을 하려면 쿠데타가 일어난지 2년밖에 안되었는데 또 다시 쿠데타가 발생할 뻔 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정권에 부담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부하들끼리 상호 견제가 정치 스타일인 박정희의 뜻대로 김재춘 중정 부장의 후임은 육사 8기 강경파인 김형욱이 되었다.

이것이 하나회의 첫번째 위기였다. 하나회의 싹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냥 이렇게 어영부영 지나가버린 것이다. 노태우 회고록에 의하면 4대 의혹 사건으로 인한 국민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충정 발언을 바친 것뿐이라며 간단히 지나간다. 2번째 위기는 10년 후 터지는데 바로 윤필용 사건이다.

4.6. 하나회 주도권 잡기

하나회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육사 시절 공부 대신 공 차기로 시간을 보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 등 칠성회가 주축이 된다.

이들 중에서 손영길은 박정희의 7사단장 시절 최우수 중대장이 되어 눈에 들기 시작하여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전속부관이 된다. 이후 손영길이 전두환 대위를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 민정비서로 꽂아주기도 했고, 1963년 쿠데타 음모 사건 때는 손영길 소령의 도움으로 훈방되었다. 1963년경 박정희를 찾아갔다가, 박정희에게 육사 내에 사조직을 만들라고 지시 받은 것도 이들 칠성회의 '손영길, 전두환, 권익현, 노태우' 였다.

손영길은 청와대 외곽을 경호하는 30대 대장으로 4년간 근무하다가 1967년 육군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후임으로 전두환을 꽂아 주게 된다. 여기에 전두환보다 한 해씩 승진이 늦으면서 전두환이 지나왔던 자리를 그대로 넙죽넙죽 받아 먹으면서 성장한 것이 노태우이다. 즉 1번주자 손영길, 2번주자 전두환, 3번 주자 노태우의 서열이 형성되어 있다.

이런 서열 관계는 부인들끼리도 유지되어, 전두환의 부인인 이순자는 노태우의 부인인 김옥숙을 대놓고 하급자 대우를 하였다. 몇십 년간 수모를 당하고 있던 김옥숙이 1988년 남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순자에게 "이제 나는 당신과 다르다. 당신은 체육관 출신 대통령 부인이고, 나는 전 국민이 뽑은 직선 대통령 부인이야! 옛날에는 많이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일갈한 것은 언론에서도 공개된 아주 유명한 일화다.[70]

사실은, 위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굳이 하나회가 아니더라도 직업군인의 부인들 사이에서는 남편의 계급대로 서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대한민국 국군의 오래된 병폐다. 하다못해 부인들이 다같이 모여서 김장을 하더라도 부대장 부인은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까딱까딱하고, 하급자 부인들은 서열대로 개처럼 구르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남편의 계급대로 서열이 정해지기 때문에, 높은 지휘관이 나이 차이가 좀 있는 여군 부사관과 결혼했고 휘하 장교들이 동기 여군 장교와 결혼을 했더라도 높은 지휘관의 부인인 여군 부사관이 부하장교 부인인 여군 장교들을 상대로 윗전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명하복이 필수인 군대에서 위아래가 없이 썩어버린 병폐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래도 1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역시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이었는데 이들 4명은 함께 대령으로 특진했고, 1973년 1월 1일자로 육사 11기 중 최초로 준장 승진하게 된다. 특히 전두환 vs 손영길 vs 김복동의 경우 육사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최성택의 경우 포병 출신으로 덕을 본게 있어 앞서 3명에 비하면 파워가 떨어지는 편이다.

4.7. 윤필용 사건

하나회의 존재가 처음 불거진 것은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었다. 당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윤필용과 가까운 군 내 후배들을 조사하면서 하나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 하나회의 존재에 대한 보고를 받고 박정희가 격노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는 실제 사실과 명백하게 다르다. 오히려 박정희에게 하나회 제거를 건의했던 강창성은 제3군관구사령부로 좌천되어 권력 핵심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렸다.

그런데 이들이 막 준장으로 승진한 1973년 3월 8일 윤필용 사건으로 수경사 사령관 윤필용이 구속되고, 사건 다음날 참모장 손영길 준장은 15사단 부사단장에 보임되었다가 1주일 후 보직해임되고, 보안부대원들에게 압송되어 서빙고에 구속되어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전역서를 쓰라"며 멧돼지 통구이 하듯 손발이 묶인 채 고문을 당했다.

윤필용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불경한 말을 했다는 혐의라도 있지, 손영길은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로 2015년 7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이 사건으로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윤필용 사건에 손영길을 엮어 넣은 것이 전두환 준장과 노태우 대령이라는 의혹이 있다.(손영길 장군의 증언)

사건 이전에 윤필용이 사석에서 1공수여단장 전두환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손영길을 참모총장으로 키우라'는 당부가 있었으니, 너는 더 분발해야겠어"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육사 11기 중 가장 먼저 참모총장이 되겠다는 포부와 자부심을 갖고 있던 전두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결국 박종규 경호실장 vs 윤필용 수경사령관 vs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라는 거물들의 파워 게임 속에, 박종규계인 전두환, 노태우가 그 틈을 타고 자신들의 라이벌인 손영길을 제거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손영길이 제거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윤필용과 이후락의 관계 회복을 위해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1:1:1 구도에서 1:2로 몰리게 된 박종규는 반전을 꾀하기 위해 윤필용과 그 오른팔인 손영길을 제거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회 소속 장교 중에 희생양으로 손영길 준장과 11기 안교덕, 14기 핵심 배명국 등 31명이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하나회의 핵심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박정희가 직접 나서 덮어 버렸고, 오히려 하나회 일망타진을 주장하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좌천시켜버렸다. 이후에도 위에 서술된 것처럼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장교들은 권력과 밀착된 핵심보직을 옮겨다니면서 승승장구했다.

하나회 제거를 건의했다가 오히려 박정희에게 내쳐졌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12.12 군사 반란으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무려 4회, 거의 7개월이나 삼청교육대를 들어갔다 나왔다 해야만 했고, 후유증으로 드라마 제5공화국이 방영되는 무렵에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6.25. 전쟁에서 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로 본래는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지만, '금고 2년 이상 선고받은 자'는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을 만들면서 1980년에 신군부에서 탄압받는 과정에서 4년형을 선고받은 그도 국립묘지 안장이 부결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자면 비록 사면은 받았어도 실형을 선고받은 신군부 인사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을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탄압받은 강창성까지 대상이 된 셈이다.

5. 12.12 군사반란 당시 핵심 인물

이하의 하나회 구성원은 어디까지나 정규 육사로 일컫는 11기 이후로만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당시 국방부 군수 차관보 유학성 중장, 1군단장 황영시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등 11기 이전 출신 인사들은 "신군부이자 하나회의 후원자"라고 하면 맞지만, 하나회 회원은 아니다.

5.1. 주동자

육사 11기. 하나회 회장이자 12.12 군사반란 주도자. 셀프로 중장, 대장 진급 후 예편하여 대한민국 제11, 12대 대통령[71] 셀프 당선.

5.2. 보안사

5.3. 수경사

5.4. 육군본부

5.5. 사단

육사 11기. 12.12. 군사반란 당시에 후방에 있었다. 쿠데타 이후 육군특수전사령관(중장)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하여 제3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한 하나회 정권 서열 3위다. 하지만 노태우는 그를 상당히 껄끄럽게 여겨서 국회의원직을 사퇴시켰고 정치적으로 탄압했다. 그래서 김영삼에게 줄을 대서 다시 원내 복귀에는 성공했지만 12.12. 군사반란 심판 과정에서 다시 갈려나갔다.

5.6. 공수특전여단

5.7. 청와대

6. 5공, 6공의 지배 세력

하나회는 정권을 장악한 1980년부터 김영삼에 의해 숙청당한 1993년까지 사실상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 세력이었다. 12.12. 군사 반란이 터진 뒤부터 하나회 주요 인물들은 승승장구했다. 직책은 당시의 직책으로 기록한다.
주요 인물들의 커리어에서 보이듯이, 하나회 출신들은 군내 핵심 요직들을 독차지한 것은 물론이고, 군인들이 자주 기용되는 대통령경호실장 안기부장을 독점했으며, 군에서 전역한 뒤에도 장관, 국회의원, 공기업 사장 등 고위직을 1자리씩은 꿰차는 등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은 그야말로 하나회의 시대였다.

하나회 인사들은 비하나회 인물들도 대장으로 진급했고 요직에 기용되었다는 반론도 하지만, 그것은 군 내 여론을 의식해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인물들을 요직 중에서도 비교적 힘이 없는 자리들에 기용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갑종 장교 출신으로 첫 대장이 되고 제2야전군사령관, 합참의장,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오자복은 얼핏 보면 탈계파적인 인사로 보이나 신군부의 정권 장악 과정 당시 국보위 위원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신군부에 협조한 인물이었다. 그가 역임한 제2야전군사령관[97]이나 합참의장[98]은 대장 계급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는 자리들이었다. 11기 이후의 비하나회 출신 대장인 한철수(12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예편 후 주 브라질 대사, 서경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했다.), 민경배(14기, 노태우 정부 때 국가보훈처장을 역임했다.), 김동진, 김연각(이상 17기, 김연각은 2군사령관으로 있다가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동기 김동진이 참모총장이 되자 전역했다.) 등은 요직에는 거의 기용되지 않았다.

실제 군사 정권하에서 정권의 안전장치이자 실세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제3야전군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국군기무사령관, 대통령경호실장은 100% 하나회가 독점했다. 비하나회 인물은 1명도 기용되지 않았다. 비하나회는 당시에는 명예직이었던 합참의장이나,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수도권을 방위하는 3군사령관에 비해 힘이 적은 1군사령관이나 2군사령관에 하나회와 번갈아가며 기용되곤 했다. 비협조적인 비하나회 장교들은 유능하다 하더라도 좌천과 진급 실패 속에 군복을 벗어야 했다. 하나회 육사 11기 최고 엘리트로 전략통으로 꼽히던 김복동도 전두환과 노태우 눈 밖에 나서 전역해야 했는데, 하물며 비하나회 장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야전에서 묵묵히 길을 닦아온 유능한 엘리트 장교들은 하나회 정권에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6.1.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 암투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하나회는 분열되어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의 암투가 벌어졌다. 12.12 군사반란 이후부터 이미 하나회의 2인자로 여겨졌던 노태우는 오랜 기간 동안 2인자로서의 설움[99]을 견뎌야 했다. 권력의 특성상 2인자에게는 견제가 쏟아질 수밖에 없었지만 노태우는 이를 견디고 겉으로는 친구인 전두환에게 충성을 다했고, 전두환은 노태우의 충성과 우정을 확신하며 그에게 권력을 넘겼으나 노태우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국민들의 5공 청산 요구를 등에 업고 전두환계를 가차없이 숙청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전두환계 중에서 전두환의 세자라고 불렸던 박희도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경질 및 불명예 전역시킨 일이다.

암투의 발단은 1987년 말 군 인사에서 시작되었다. 전두환은 결코 중임하지 않겠다고 지겹도록 선언해 왔지만, 퇴임 즈음에 헌법을 고치면서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만들었고 그 의장으로서 노태우 위에서 상왕처럼 군림하는 것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퇴임 직전인 1987년 12월, 전두환은 군 인사에서 군부 핵심 요직들에 자신의 직계 충복들을 깔아두었다. 정권을 이양하는 시기임에도 노골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다지는 군 인사를 행하며 향후 자신의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전두환은 자신의 충복 육군참모총장 박희도의 임기가 끝났음에도 1년 더 유임시킨 것을 시작으로 합참의장 최세창, 3군 사령관에 고명승, 보안사령관에 최평욱, 수방사령관 김진영 등 자신이 키워온 하나회 내 전두환 직계들을 군부 핵심 요직에 깔아두었다. 수도권 군사령관인 3군 사령관, 군을 감시하는 보안사령관, 수도를 지키는 수방사령관은 정권의 안전과 직결된 핵심 요직들이다. 다른 보직들은 비하나회도 기용했지만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서 이 세 보직만은 절대적으로 전원 하나회가 독점했다. 거기다가 쿠데타 시 병력 동원이 가장 유용한 특전사령관도 전두환계인 민병돈이었므로 쉽게 말해 마음만 먹으면 또 다시 군대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정권을 넘겨주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날려버리려는 의도였다.

'상왕'으로 군림하려는 전두환의 이런 의도에 노태우는 분노했지만 속으로 분을 삭히며 일단 참았다.[100] 노태우는 겉으로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잘 참았다가 원한을 잊지 않고 보복하는 스타일이라는 평이 있다. 그 평대로 노태우는 시간을 기다린 후 전두환계 숙청에 나서 자신이 겪은 설움과 분노를 갚아주었다. 2인자로서 전두환에게 숱하게 갈굼받고 늘 고개 숙여 처신해 온 노태우였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첫째로, 노태우는 대통령을 간선제 형식으로 물려받지 않았다. 비록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과 김종필의 출마까지 더해진 결과로 인한 당선이었고 전두환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거나 체육관 대통령이 아닌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으로서 민주적 정당성이 있었다.[101] 둘째, 노태우는 전두환계를 숙청할 명분도 충분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의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한 단죄를 요구하는 국민 정서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듬해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패배하며 여소야대 국면으로 흐르게 되며 더욱 증폭된다.

1988년 6월, 노태우는 취임 후 첫 군 장성 인사에서 5공 청산에 대한 국민 여론을 구실로 박희도를 참모총장에서 경질하면서 전두환계 군맥 제거 작업을 시작했다.[102] 그리고 그 후 1년 안에 합참의장 최세창, 특전사령관 민병돈, 기무사령관 최평욱, 수방사령관 김진영, 참모차장 권병식, 5군단장 정만길 등이 차례차례 한직으로 좌천되거나 예편되었고, 노태우는 자리가 빈 요직들에 그동안 소외되었던 자신의 직계 하나회 장교들을 깔아두어 군을 장악했다. 군 밖에서도 국민 여론이 강해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백담사 귀양보냈고, 5공 청문회 등을 활용하여 장세동, 이학봉 등 전두환의 충복들을 구속했다. 전두환계는 반발했지만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은 노태우에게 사정없이 당했다. 17기 선두 주자이자 자타가 공인하던 차기 육군참모총장 김진영은 불만을 드러내다가 수방사령관이라는 실세 자리에서 예나 지금이나 중장 한직인 교육사령관으로 쫓겨났다. 특전사령관에서 쫓겨나 또 다른 중장 한직인 육사 교장으로 갔던 민병돈은 육사 졸업식에서 임석해 있던 노태우의 북방 정책을 강하게 비난하고 경례마저 하지 않으며 노태우를 엿먹였다가 예편당했으며, 15기 선두 주자 고명승은 3군 사령관 임기가 끝나자마자 영전 없이[103] 전역해야 했다. 16기 선두주자 최평욱 역시 좌천 후 예편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빈자리는 노태우의 직계 군맥, 이른바 '9-9 인맥'[104]들이 차지했다. 이진삼[105] 같이 전두환 정부에서 노태우를 견제하느라 전두환 직계들에게 밀려왔던 인물들은 급부상하여 승승장구했다. 9-9 인맥은 비하나회, 비육사[106] 출신들도 있었지만 역시 주류는 하나회 내 노태우계 장교들이었다. 대장 4차 진급자임에도 참모총장을 차지한 15기 이진삼, 합참의장 16기 이필섭, 특전사령관과 1군사령관을 역임한 17기 이문석, 수방/기무/3군 사령관을 모두 역임한 18기 구창회[107] 기무사령관을 거쳐 1군사령관이 된 18기 조남풍, 수방사령관을 역임한 19기 김진선과 20기 안병호가 대표적인 9-9 인맥 내 하나회 장교들로 이들은 선두에 섰던 전두환계를 제치고 승승장구했다. 자연스럽게 살아남은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사이에는 암투가 벌어졌고, 대표적으로 노태우 직계 김진선[108]은 지나치게 전두환계 하나회를 공격하다가 금족령까지 받았다. 또한 전두환계의 수장인 국방부장관 이종구와 노태우계의 수장인 참모총장 이진삼은 인사권 문제를 두고 서로를 비난하며 극렬하게 대립했다. 이렇듯 하나로 똘똘 뭉쳐 대한민국을 장악한 하나회도 권력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노태우는 임기 중반 정국 장악을 위해 김종필, 김영삼과 연합하는 3당 합당을 선택했다. 이는 단순한 정국 장악을 의도한 것이기도 했지만 노태우 입장에서 위협적이었던 김종필와 김영삼을 휘어잡으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결코 노태우의 똘마니로 머무르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당 내 야당'으로서 입지를 다져 정권의 인기가 바닥에 떨어진 노태우의 임기 말에는 민주자유당을 거의 휘어잡기에 이른다. 노태우와 민정계는 김대중에 대항할 만한 후보자를 찾지 못했고, 결국 김영삼이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노태우는 임기 말이 되자 본인도 뒷날이 걱정되었는지 전두환계에 대해 유화적인 스탠스를 취해 하나회를 단결시키려 했다. 우선 자신이 좌천시킨 전두환계의 핵심 김진영을 복권시켜 참모총장으로 임명했고, 기무사령관에도 전두환계인 서완수를 임명했다. 노태우는 전두환처럼 임기 말 군 인사로 수족들을 깔아두는 행위는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군 내 핵심 요직들을 하나회로 장악시켜놓은 상태였다. 간단히 말해 당시 정권의 안전과 직결된 3군/보안/수경 사령관은 모두 하나회였다. 또한 거기서 나아가 17기 김진영을 이어 차기 참모총장이 될 만한 18기 대장 자리를 구창회, 조남풍, 김재창의 하나회 18기 3인으로 구성해 놓아 당분간은 하나회가 지속되게 만들어 놓았다.[109] 이렇게 노태우는 하나회로 군부를 장악했으므로 쿠데타 가능성 때문에 김영삼이 설마 자신을 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고, 세간의 예상 역시 김영삼이 하나회와 불편한 동거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노태우의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노태우와 하나회의 예상을 비웃듯 김영삼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전두환계와 노태우계를 가리지 않고 하나회를 해체하고 관련 인사를 숙청하기 위해 비밀리에 하나회 숙청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7. 문민정부의 숙군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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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후

일련의 숙청 칼질을 받은 하나회는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후일 정권들도 군대가 사조직을 만들어 정권을 탈취할 것을 염려해 미국처럼 통제하기 위해 군대 사조직은 철저하게 색출되어 대한민국 내 군부의 시대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회에 참여 및 12.12. 군사반란에 하나회에 줄 섰던 핵심 군인들과 예비역들은 형사처벌을 받으면서 군인 연금을 비롯한 모든 예우들을 박탈 당했다.

하나회를 계기로 군내 사조직을 향한 국민적인 경각심은 고취되었고, 여러 대중매체들에서도 군부독재의 어둡고 부정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젊은 세대들은 교육을 받으면서 스스로 판단이 가능한 데다 검열, 통제를 싫어하는 자유를 몸에 익혀서 이러한 동력으로 만나회, 알자회, 나눔회 등 사조직들도 후일 적발되어 하나회와 함께 철퇴를 맞아 사이좋게 군복을 벗고 해체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특히 이 모임들 회원 리스트엔 하나회의 34~36기 최후반기 기수들이 겸임하는 이름들도 더러 발견되어 하나회의 후신이 도래할지도 모를 판국이었지만, 발각 당시 기준으로선 20대~30대에 불과한 신인 장교였기에 규모도 크진 못했고 행동 반경은 넓지 않아 대부분은 근신 징계에 그쳤다고 한다. #

허나 이렇게 사라지고 근절된 줄로 알았지만, 2000년 이후에도 나눔회 인맥이 조직적으로 군인사에 개입한다는 폭로성 언론 기사가 몇 차례나 나왔다. 2016년에는 알자회에 대한 언론 기사가 많이 나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청문회 과정에서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거라고 믿었던 군대 내 사조직이 아직도 건재하며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이 폭로되었다. 관련 뉴스 1, 관련 뉴스 2 2014년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육사 34기부터 43기까지 기수 별 10명씩 총 120명이 가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름의 유래는 "알고 지내자"는 모임이란 뜻에서 알자회라고 한다. 육군 내에서는 알짜 보직을 주고받아 '알짜회'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알자회 출신 인사가 기무사 사령관, 국정원 국장에 # 임명되는 등 아직 건재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또한 다음 인사이동 시 알자회 출신 인사들로 수도권 일대를 채우려 했다는 내용도 청문회를 통해 나왔다. 하나회의 전례를 볼 때 매우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하나회 본체의 남겨진 잔당들은 국민적 관심속에서 단체로서 활동으론 제약이 많아 각자도생으로 몸을 사리면서 군대 윗선에서 활동중에 있었다. 청와대 출신 인사로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위기관리실장을 역임한 안광찬(육사 25기. 예비역 소장)[110]이 있다. 강창희 전 의장과 황진하 전 의원, 권경석 전 의원, 안광찬 전 실장은 12.12. 사태 때 쿠데타군을 막고자 했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지키다가 반란군의 흉탄에 전사한 특전사 비서실장 김오랑 중령과 동기다. 심지어 강창희 의장과 김오랑 중령은 1978년 소령 때 육군대학에서 교육을 받던 중 같이 찍은 기념사진도 존재한다. 기사.

정부가 2011년 4월 21일 자로 단행한 '상반기 장성 진급 및 보직 인사'에서 중장으로 진급한 육사 35기인 류제승 제8군단장, 그리고 같은 해 11월 10일 단행한 '하반기 장성 진급 및 보직 인사' 가운데 중장으로 진급시킨 육군 소장 5명 중 2명인 최익봉 소장, 김현집 소장은 하나회 출신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심지어 이 2명만 육사 36기에서 중장 1차 진급에 성공했다. 기사. 그런데 2012년 3월 9일, 특수전사령관에 취임한 지 4개월이 된 최익봉 중장이 과거 23사단장 시절 여군 부사관을 성추행 한 것이 밝혀져 보직 해임되었다.[111] 기사. 최익봉 전 중장은 그러나 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모 기업 임원으로 들어가 여전히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어쨌든 류제승은 2014년, 최후의 하나회 일원이었던 김현집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보직을 마지막으로 2016년 9월 자로 전역함에 따라 군대 내 현역 하나회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렇지만 하나회 숙청이 끝나고 십수년이 지났음에도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여전히 여의도 정치 바닥 이곳저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19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강창희(육사 25기. 예비역 중령.)가 있으며, 황진하(육사 25기. 예비역 중장.)[112], 권경석(육사 25기.)[113] 등이 있었다.

한나라당 - 새누리당 외에도 2010년 4월 30일 국회 국방위에서 있었던 천안함 피격 사건 원인 규명 회의당시 ' 군번줄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자유선진당 이진삼(육사 15기. 예비역 대장.)도 있다. 이진삼은 하나회에 9-9인맥, 즉 노태우 라인이었고 하나회 숙청이 끝나자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YS에 의해서 신한국당에 영입된 케이스다. 또한 이회창계 최승우 전 예산군수(육사 21기, 예비역 소장)는 제17보병사단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지냈으나 갈려나간 하나회 인사였다.

그래도 정계나 군대 현역 종사자들이 아닌 은퇴 모임들인 성우회, 재향군인회, 육사 동문회를 비롯한 국내 주요 예비역 장성 모임 등에서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아직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세직 같은 하나회 출신들이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니 2012년 터진 전두환 육사 사열 논란 등의 배후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관련 기사. 거기에 이들 단체가 군 원로라는 이름 하에 국내 군에 아직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만큼 군 내 하나회의 영향이 아직 완전히 제거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전역 후에 사조직 만드는 것을 뭐라 할 수 없고, 그러면서도 선배란 이름으로 조언까지 하니... 또한 하나회 멤버들은 나중에 이명박 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 중에서 이종구는 14기 동기인 이상득의 동생 이명박을 뒤에서 지원했다.

2021년 7월 14일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따르면 육군 3사단 포병대대의 초임 소위가 조부가 하나회 출신 군단장이었다고 평소 자랑하며 각종 비행을 저질러도 대대장의 비호를 받았다고 한다. 아직도 군사 반란 세력이었던 하나회의 잔당이 대한민국 육군 내에서 암약하고 있거나, 적어도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말이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이렇게 성숙해질 수 있었을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군대 사조직의 출현은 아직까지도 안심할 수 없다는 걸 역설하는 듯 2021년 5월에는 여군 집단이기주의 사조직 다룸회의 존재가 세간에 드러났다. 육군 여성 장교 사조직 구성 논란 참고. 그러나 이 조직은 알고보니 불법 사조직이 아닌 단순 친목단체로 결론이 내려졌다.

하나회의 쌍두마차였던 노태우 2021년 10월 26일 자로 사망, 그리고 얼마 안 가 하나회의 수장 전두환 2021년 11월 23일 자로 사망함에 따라 하나회의 수뇌부들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나회 핵심 세력들의 현재 재산을 추적해봤다 | 추적 60분 200221 방송

2024년 하나회 소속 문영일의 논란이 된 발언으로 인해 하나회에 대한 이미지는 재평가는 커녕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

하나회의 흔적이 아직도 대한민국 국군 진급 심사에 남아 있는데,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하는 진급 심사에 유독 육사가 압도적으로 많은 게 바로 그것이다. 딱 하나회만큼의 진급 인원만 제외하고 계산하면 모든 출신의 진급 숫자가 엇비슷해진다. 애초에 대한민국 국군은 군사정권에서의 진급 심사 방식이 하나회 먼저 진급시킨 후 남는 자리로 진급 심사를 했기 때문이다. 이걸 보고 분노한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하나회 해체였는데, 그 덕에 말년 소장이던 홍순호(학군 4기)가 중장과 대장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출신별 정원을 건드리지 않아서 아직도 육사가 장성급 장교로 압도적인 숫자가 진출하고 있다.

9. 기타

10. 창작물에서

11. 관련 문서 및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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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숙청 2~3년 후에 경향신문에 연재된 실록! 하나회는 당시의 시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김재홍이 쓴 관련 시리즈 칼럼도 읽어볼 만하다. , , , , , ,
오히려 노태우 회고록(2011년), 전두환 회고록(2017년)에는 관련 내용이 아예 없다시피 하다. 육사 초기 오성회가 만들어 졌다는 간단한 문장만 있고, '하나회'라는 단어는 금기어.
하나회 이후 나타난 사조직이다.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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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라는 말이 순우리말이기 때문에 한자어 변환을 할 때는 일회(壹會)나 일심회(一心會) 또는 구 명칭인 오성회(五星會)로 표기한다. [2] 그에 대비되는 '구'군부는 5.16 군사정변의 주도세력을 뜻한다. 5.16과 12.12에 모두 참여한 차규헌은 구군부와 신군부에 모두 해당한 인물이다. [3] 다만 신군부=하나회는 아니다. 신군부에 소속되어 전두환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한 인물들 중 하나회가 아닌 인물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하나회 자체가 전두환/노태우의 동기, 후배들로 이뤄졌으며 선배 장성인 차규헌, 황영시, 유학성, 보안사 특별보좌관 출신으로 전두환 밑에서 요직을 역임한 이상연(12.12 사건 당시 대령), 신윤희는 하나회 멤버가 아니다. 신윤희가 하나회 소속이란 오해가 많이 있는데, 신윤희 본인이 쓴 "12.12는 군사반란인가?"란 책 소개에서 "하나회 멤버도 아니었던 그가 장태완을 체포한 것은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대한민국 헌병으로서 현명하고 용기있는 결단이었다"는 개소리를 적었다. 이외에도 하나회가 아니면서도 신군부에서 승승장구한 인물들이 있다. [4] 핵심인들은 숙청됐지만 곁가지는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다. 상술됐듯 준장까지만 올라가도 하나회 소속이 되는 건 거의 확실했다. 게다가 군 내부에선 하나회가 숙청되었지만 여전히 정계 등에 진출한 출신 인물들이 있어서 이들의 영향력은 한동안 더 유지되었다. [5]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6] 첫번째줄 왼쪽에서 4번째, 5번째가 노태우와 전두환이다 [7] 비밀 사조직이다 보니 민병돈 전 육군특수전사령관처럼 하나회 소속이면서도 하나회의 정체에 대해서 모르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참고로 민병돈 본인은 하나회에 대해서 그냥 곱창 회식모임인 줄 알았다고 한다. 본인은 영양식이라 먹기 힘든 건데 선배들이 사준다니까 갔다고 한다. 본인의 회고 참조. [8] 해당 사조직에서 리스트에 거론된 인물들 중엔 하나회 후반기 기수와 중복 소속된 이름들도 상당수 존재했고 이들은 지속적으로 신인 멤버들을 모집했음은 문건을 통해 드러나던 바 있었다. [9] 19기의 대표 9-9라인이지만 일부 회원들의 반대로 하나회 가입이 안되어 원한을 갖고 있었다. 노태우 시절 전두환계 하나회 청산 작전에서 폭주하여 근신처분을 받았다. 이 공로로 김영삼 정부 당시 9-9라인임에도 2군 사령관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막판에 결국 가입은 했다는 설도 있다. [10] 20기의 대표 9-9라인이지만 하나회는 가입 안한 것 같다. 김진선과 함께 전두환계 회나회 청산 작전에서 활약. 그러나 적당한 선에서 바로 빠지며 노태우의 이쁨을 받고 수방사령관 까지 승진했다. [11] 이 인용문의 저 한 마디에 의해 만들어진 사조직이 하나회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군인이라면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게 당연한 이치임에도, 이 당연한 도리조차 돌아가질 못하던 당시 국군과 정계의 불안정성을 내포하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박정희 본인부터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에게 대항하는 하극상으로 정권을 잡았으니 말이다. 또한 조직적인 대통령 직위를 향한 충성이 아닌 아닌 박정희 개인에게 충성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애초에 민주국가는 법치로 운영되어야하지만 박정희는 본인의 절대권력을 위해 헌법을 뜯어고친 독재자이므로 '각하를 추종하겠다'는 말은 의미가 크다. 실제로 후임 대통령 최규하를 억압하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전두환이다. [12] 12·12때 기준으로 전두환 소장은 보안사령관, 노태우 소장은 9사단장, 김복동 소장은 제3야전군 부사령관(경호실 작전차장보에서 10·26사건으로 인해 좌천됨), 최성택 소장은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 백운택 준장은 71방위사단장이 된다. [13] 출처: 노태우 회고록, 1권 68페이지(2011년판). 이전 버전에는 "노태우 회고록 2장에 의하면 '웅성은 박병하"라고 작성되었는데 판본에 따라 다르다. [14] 훗날 노태우는 김복동의 여동생인 김옥숙과 결혼하여 처남 매제지간이 되었다. [15] 노태우는 다음해 준장 승진. [16] 육사 졸업 이후 각종 교육 기관에서 항상 우등의 성적을 유지하였으며, 작전통으로도 뛰어났다. [17] 이것도 입학 당시의 성적이었지만 졸업 때는 150여명 중 67등이었다. [18] 200명 정원이었지만 가입교에서 쳐낼 예정이라서 228명을 합격시켰으며 전두환 자서전에 의하면 끝에서 2등이었다. [19] 육사 11기 졸업생 156명 중 김복동만 13등으로 우수했고, 권익현 55등, 노태우 67등, 손영길 81등, 정호용 86등으로 전반적으로 성적들이 하나같이 저조했으며, 특히 전두환의 경우 126등으로 유독 세자릿수 등수로 가장 뒤떨어졌다. [20] 그나마 저 126등조차 전두환 치고는 많이 올라간 성적이다. 밤에는 연등을 하고, 아침 기상 점호 두 시간 전부터 뒷간에서 판초우의를 깔고 공부하고, 영어와 수학을 잘 하는 생도(수학은 민석원 생도)를 찾아가 개인 지도를 받는 등 열심히 성적을 올린 결과다. [21] 그러나 이들의 교육 과정은 입교 후 1년으로 변경되었다. 전두환 기수가 입학했을 때 구대장들이 이들 10기. [22] 김재홍, 軍(군) 어제와 오늘 30화, 『동아일보』, 1993년 7월 29일 p5. [23] 2020년대인 현제도 전시에 생도들 교육하여 임관시키는 예비시설이 제주도에 있다. [24] 따라서 이들은 육사 11기가 아닌 종합학교의 기수를 부여받았다. 육사 재개교 이후 이들을 복교시키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미 임관한 장교를 다시 사관생도 신분으로 내리는 것이 맞지 않다 하여 없었던 일이 되었다. [25] 육군사관학교는 이 시기에 성적 미달 퇴교자가 독보적으로 많았는데, 이것 때문에 골치를 썩은 육군사관학교 당국에서는 결국 내신의 비중을 1차 전형에서 동점자 당락 기준 수준까지 매우 크게 줄였고, 국어, 영어, 수학 딱 3과목으로만 구성된 자체 고사를 1차 전형으로 바꾸게 된다. 그 결과 양주희(69기) 같은 매우 우수한 자질이 유입되었다. 참고로 양주희는 내신이 너무 개판이다 보니 추가 합격으로 겨우 입학했지만, 공부를 엄청나게 잘했다. [26] 이들과 함께 북한군과 싸웠던 조창호는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가서 몇십 년 동안이나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서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가까스로 탈북했다. [27] 출처: 노태우 회고록, 2장, p74~75. [28] 전두환은 21사단 66연대 1중대 소대장. [29] 지지 시위를 전두환 혼자 했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는 박정희의 기획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하루 전날 11기 이동남에게 생도 지지 시위를 지시하였고, 이동남은 동기생들인 강재륜 교수, 서우인 교수, 그리고 당시 서울대 ROTC 교관이었던 전두환 등을 만나 지원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5월 17일 있던 육사 설득 과정은 당시 육본에 있던 박창암 대령(육사 생도대장 출신)이 전화로 지휘 하였는데, 그는 반대하는 강영훈 육사 교장을 쏴 죽이라며 강하게 푸시하였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육사 11기 손운익이 주역이었으며, 강영훈 교장에게 "반대도 말고 찬성도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라고 설득하여 희생 없이 생도 지지 시위를 이끌었다고 한다. [30] 공수단 출신 위관 장교 10명으로 구성 되었는데 이른바 'GD'팀이라고 부른다.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자 그쪽으로 들어가 주먹부대로 활약하였다. 결국 지들끼리 청와대에서 주먹질 하다가 자폭한다. [31] 다만 이런저런 일로 실제로 경호실에서 근무하지는 않았다. 전두환은 의장실 민정비서관, 최성택은 총무비서관, 노태우는 방첩대 정보과(최고회의 담당 요원), 기타 다른 육사 11기들은 다 방첩대로 빠졌다. [32] 전두환에 회고록에 의하면 오성 장군이 되자는 뜻에서 '5성회'였기 때문에 일곱 명이 모였다고 7성회라고 하진 않았다고 한다. [33] 박종규의 지시로 수경사 장교와 하사관들 벌인 시위를 했다. [34] 소장 예편. [35] 박정희의 당번병 출신, 월남전 때 중상을 입어 대령 예편. [36] 다만 이상훈의 경우 육사 동기 전두환과 친분이 매우 깊어 지지 시위 주도를 같이 했고, 이 공로로 대장까지 진급하는데 성공함은 물론 국방부장관까지 지냈다. [37] 윤필용 증언. [38] 중령 예편. 청와대 민정비서실에서 근무중 윤필용 사건 때 워낙 하나회의 핵심이라 구속되었지만 훗날 3선 국회의원으로 보상을 받았다. [39] 대령 전역 후 국회로 진출. 훗날 노태우 때 민정수석. [40] 경상북도 청송군 출신에 대령 예편. TK 출신으로, 오성회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전두환 - 노태우와 어울렸다. 에너지관리공단 감사 역임. [41] 전두환 자서전에 의하면 '민주도 하나, 나라도 하나, 충정을 바칠 곳도 하나'라는 의미라고 한다. [42] 출처 <한국의 군부정치> 한용원, 321쪽. [43] 전두환과 미국 특전부대 유학 동기다. [44] 장도영은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박정희에 반대되는 세력을 지지하였기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가 이후 쫓겨나 해외를 유랑해야 했다. [45] 사실 손영길은 이미 박정희 부관이었고 전두환은 1959년에 장인인 이규동을 통해 박정희를 개인적으로 만난 바까지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박정희를 새로 만나기 전부터 박정희와 육사 11기 간에 개인적인 인연은 많았다. 손영길도 1963년 7.6. 거사 사건 당시 전두환을 열렬히 비호해놓고 새삼 1967년도에 하나회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46] 김충환 전 의원의 친형. 아마 2000년대에는 기독자유민주당 대표로 서울특별시장 출마도 했던 김충립 목사로 더 유명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 시기 때는 한반도 프로세스 포럼 회장이자 전두환 측근으로 다시 뉴스에 많이 등장했다. 2016년 5월 경에는 전두환에게 5.18. 묘소 참배하러 가자고 제안하여 언론에 크게 탔다. [47] 하나회에 대해 꽤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하나회는 영남계 사조직이 아니며 호남의 장세동 등 비영남 출신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라는 등 황당한 소리가 꽤 많긴 한데, 그래도 김충립은 이미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1년 신동아 9월, 10월호에 '하나회 파워게임'이라는 기사를 통해 하나회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48] 당시 박정희의 계급은 대장. 보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49] 애초에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부관이 바로 위에 있는 손영길이었고, 전두환의 장인 이규동과는 같은 만주군관학교-만주군 출신에 안면까지 있었다. 즉 전부는 아니더라도 하나회 구성원 다수와 5.16. 이전부터 개인적인 친분이 이미 있었다는 말이다. [50] 항목 가장 위에 있는 "군대 내부에도 각하를 추종하는 세력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대사가 활용되었다. [51] 군인이 충성해야 하는 대상은 군 통수권자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어야 하고, 당연히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든 군은 통수권자와 나아가 군 통수권을 위임한 국민에게 충성하여야 하나 전두환이 말한 충성의 대상은 대통령이 아니고 '박정희' 개인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52] 진급에 필요한 인사자료를 검증하는 부서. [53]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라남도 지역 계엄사령관이던 윤흥정 장군의 동생이다. [54] 여담으로 이때 전두환은 각종신고시에 부동자세를 취해 눈물을 흘릴 때 까지 눈도 깜빡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른마 '눈물 신고'라고 한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군생활 때 전두환의 1공수 여단에 있었는데 이때 일화중에서도 '눈물 신고' 이야기가 나온다. 1공수에 전입했는데 2주간 전입교육을 받는다. [55] 전두환 초대 참모총장은 함께 12.12를 일으킨 육사 10기 황영시였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회 최대 후원자라 전두환과 함께 12.12까지 참가하게 되었다. [56] 부분적인 실드이며, 준장 진급을 1번만 누락시키는 겉으로 보기에만 징계인 것처럼 처리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령을 달고 준장 보직인 제1공수특전여단장으로 보직시켜 사실상 진급에 성공한 것으로 만든 뒤 조용해지자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에도 소장으로 1차에 진급 성공해 제1보병사단장으로 영전하기까지 했다. [57] 이는 하나회 구성원으로서의 특혜보다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적극적인 옹호로 무사히 넘어갔다. 그러나 박희도는 전두환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58] 경찰로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대규모 시위발생시 공세적인 시위 진압을 위해 준비된 수도권 지역 군부대. 하나회 장교들은 충정부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도 광주광역시에 투입된 충정부대들이 잔인한 유혈 진압을 하면서 촉발된 것이다. [A] 당시에 5사단의 주둔지는 철원이 아닌 양평이었고, 20사단은 반대로 철원에 있었다. [A] [A] [62] 현재는 부대 주둔지가 부천에 있다. [63] 현재에도 육군본부, 국방부 합참 보직은 육사 출신이 거의 독점하기 때문에 대한 타 출신들이 고까워하는 경우가 많다. [64] 그 외 참모 보직을 1회 맡아야 하지만 어차피 중대장 보직의 특성 상 참모 보직을 환영하니 별 의미 없는 조항이다. [65] 사실 지만원은 김대중 집권 후 한겨레의 월남 파병 장병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보도를 기점으로 태세전환하기 전까지는, 매체를 가리지 않는 군사 전문가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66] 출처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67] 이때 손영길이 구명하였으나 후에 윤필용 사건때 배신한다. 또한 이때 정승화와 악연이 생긴다. [68] 중간에 김용순이라고 45일 한 2대 부장이 있다. 육사 5기와 8기의 갈등 사이에 새우등 터짐. 정확히는 차지철의 GD팀(중정 6국 소속)이 자기들끼리 총 꺼내고 싸우는 와중에, 무려 박정희 전 의장 공관을 포위하는 일까지 있었는데(박정희는 지방에 내려가 있었음) 이 사건으로 책임지고 김용순만 물러 났다. 물론 김재춘이 자기가 중정 부장 하려고 애꾿은 김용순에게만 책임을 지운 것이다. [69] 김종필 1926년생, 김재춘 1927년생, 박종규 1930년생, 전두환 1931년생, 노태우 1932년생, 권익현 1934년생, 차지철 1934년생. [70] 그런데 이순자는 이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는데, "어떻게 자신보다 나이가 4살이나 더 많은 사람을 하대를 하는가?" 라면서 서로 경어를 썼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남편들이 친구였던 것처럼 배우자들 간에도 우애가 돈독했으며 10년 동안 영어공부도 같이 하고 집안일과 자녀 문제 등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면서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본인 인터뷰 물론, 구설수에 오르는게 싫어서 거짓말로 둘러댔을 수도 있다. [71] 11대 대통령으로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마지막 제4공화국 대통령으로, 12대 대통령으로는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선출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 [72] 하지만 대장 진급 및 예편은 노태우의 의사가 아니라 전두환에 의한 강제적 진급 및 예편이었다. [73] 전두환과는 달리 대통령 직선제로 뽑힌 대통령이다. [74] 편제상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통제를 받지만, 사실은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의 직속 부대로 경복궁에 위치하였다. 그런데 10.26.으로 통제를 할 청와대 경호실이 차지철의 사망과 이재전 차장, 김복동 차장보의 문책성 경질로 인해 사실상 와해되어 상황실장인 정동호 대령이 경호실장 직무대리를 맡는 수준까지 와버리면서 12.12 군사반란때에는 사실상 누구의 통제도 받고 있지 않았다. [75] 중간에 전두환은 장세동을 쓰리허 견제차원에서 소장으로 진급시켰고, 명예전역시에는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76] 여기도 편제상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 직속 부하이지만, 청와대 경호실의 통제를 받는다. [77] 33헌병대는 청와대 경호실 배속 부대지만 10.26 직후 전두환이 본부장으로 취임하게 된 합동수사본부에 임시로 배속되었으며 이후 12.12때에는 정승화 총장 연행과 공관 점거에서 중요한 역할 담당이었다. [78] 12.12. 당시 쿠데타를 저지할 수 있는 주요부대 지휘관들인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을 전두환의 명령을 받아서 서울특별시 마포구 연희동의 모 요정에 유인, 1시간여 동안 잡아두었으며, 부단장 신윤희에게 수경사로 이전한 육본 지휘부와 장태완 사령관을 무장해제 시키도록 명령하였다. [79] 1979년 12월 14일 사진에서 2째줄 왼쪽에서 3번째에 있다. 조홍 문서에는 육사 13기라고 되어있는데, 밑에 명단에는 없다. [80] 사실 전두환 반란세력측과 국방부측이 신사협정을 맺었는데 국방부측이 이를 믿지 않고 하나회 입김이 없던 9공수여단이 회군을 안 했다면 12.12 사태는 진압군측이 더 유리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81] 심지어 녹음본까지 나온 상황에서 책 내용 자체가 거짓말로 도배되어 있는데 첫번째로 정승화가 김재규랑 짜고친 반란이라고 기정사실화 한 것도 모자라서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정승화의 충성스러운 부하였고 술에 취한 상태로 지휘 무모한 명령을 하는 것도 모자라 정승화의 사병이었다고 거짓말로 점철되었다. [82] 육본 헌병감 김진기 준장 직속 부하로 직속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정승화 육참총장 불법 연행에 직접 관여. 정승화 총장 연행 도중 오인사격으로 인해 반신불구가 되었다. [83] 육본 헌병감 김진기 준장 직속 부하 우경윤과 마찬가지로 직속상관 김진기 헌병감에 대한 하극상을 감행했다. [84] 사진은 특전사령관 시절. [85] 사실 이 자리는 부관병과장이자 부관병과의 몫이었지만 하나회였던 박준병이 빼앗은 것이다. [86]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부하. [87]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부하. [88]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부하. [89] 소장시절의 보직은 알려진 것이 없다. [90] 대장 진급때에는 최소 1년 이상 간격을 두는 것이 기본으로, 실제로 당시 11기 선두주자인 정호용과 12기 선두주자 박희도의 간격이 2년, 박희도와 13기 선두주자인 최세창의 간격이 2년이는데, 14기인 이종구는 최세창과 불과 6개월차였다. 여기에 14기 2번째 대장 민경배가 대장으로 진급한 것이 이종구 진급 2년 후였다. 그리고 이미 중장 진급 때부터 13기 선두주자를 1년차로 추격하고 있었다. [91] 1985년 12대 총선에서 여당에 반강제투표 기시 거부로 좌천 [92] 전두환과 노태우도 맡았던 직 [93] 85년 12대 총선에서 여당에 반강제투표 기시 거부로 좌천 [94] 물론 이병태는 일산신도시 실언 이후로 김영삼에게 볼 때마다 "XX" 소리 듣고 결국 경질되었다. [95] 의외로 김영삼 정부가 막 출범했을 때 단행했던 하나회 숙청 때는 칼날에서 비껴났다. [96] 조남풍과 마찬가지로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에는 살아남았으나 뒤에 교체되었다. [97] 2군사령부 위수지역이 상당히 넓기는 하나 후방지역 특성상 전방인 1, 3 야전군에 비해 중요도도 낮았고 전시가 아닌 이상 공을 세울 길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여긴 군단에 비해 급이 낮은 관구사령부가 있었으며 1982년 관구사령부 해체부터 1987년 9, 11군단 설치 전까지 군단도 없었다. [98]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2년 군제개혁 이전의 합참의장은 실전부대에 대한 명령권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군령권 군정권을 모두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가지고 있었고 대한민국 육군참모차장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으로 가는 코스였다. [99] 설에 의하면 전두환에게 갈굼당하고 한강에 가서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100]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 사실이 묘사되었는데,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전두환을 만난 노태우는 해당 군 인사를 통보받은 후 자택에 돌아와서 심복인 박철언에게 "내는 허수아비가 될 생각이 없어. 사람들이 물태우라고 내가 진짜 물이가?"라고 말하며 격노하는 장면이 나온다. [101] 노태우의 아내 김옥숙과 전두환의 아내 이순자도 원래는 서로를 ' 재국이 엄마', ' 소영이 엄마'로 부르며 허물없이 지냈으나,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 후 김옥숙은 태도를 바꾸어 "우린 (누구처럼) 체육관 대통령이 아니에요~"라며 이순자를 은근히 비웃었다는 일화에서도 노태우의 속마음이 잘 드러난다. '형님'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고 알려진 건 사실이 아니다. [102] 신임 육군참모총장인 '하나회의 황태자' 이종구도 계파로 따지면 전두환계에 속했으나, 노태우의 경북고등학교 후배인 그는 제6공화국에서는 노태우에게 충성했고 후일 국방부장관까지 오른다. [103] 황영시, 정호용, 박희도, 최세창 등 전임 3군사령관들은 모두 2차 보직으로 영전했다. [104] 노태우의 9사단장 및 9공수여단장 시절 부하들로, 노태우의 직계 군맥들을 부르는 말이다. 참고로 전두환의 1사단장 및 1공수여단장 시절 부하들로 이루어진 전두환의 직계 군맥은 1-1 인맥이라 불린다. 각각 9땡 인맥, 1땡 인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05] 육사 15기로, 5공화국에서는 전두환계 동기들에게 밀려 찬밥 신세였다. 15기 선두 주자는 전두환 직계로 3군사령관에 오른 고명승이었으나 그는 영전하지 못하고 전역했고, 고명승보다 1년 반이나 진급이 늦은 이진삼이 참모총장을 차지했다. [106] 대표적인 인물로 엄삼탁이 있다. [107] 노태우의 9사단 시절 참모장으로, 12.12. 군사반란 때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대놓고 구라를 친 후 노태우의 명령으로 전방 병력을 서울로 불법 출동시켰다. 하나회의 황태자 이종구 못지않게 이쪽도 화려한 진급 코스를 달렸는데, 인사참모부장-수방사령관-기무사령관-3군사령관으로 최고 실세 보직들을 모두 역임했으나 참모총장 진급을 눈앞에 두고 김영삼에게 철퇴를 맞는다. [108] 본래 하나회의 라이벌 조직인 청죽회 소속이었지만 12.12. 군사반란 이후 하나회에 들어왔다. 이때 기존 하나회 회원들의 반대가 있었고, 이때 겪은 설움까지 갚아주려고 했던지 지나치게 전두환계를 공격하다가 하나회 내부의 극심한 반발이 이어지자 노태우가 자제 명령과 금족령을 내렸다. 김영삼발 하나회 척결 작업이 시작되자 자신은 하나회가 아니라며 살아남으려고 했고, 한 번은 살아남았는데 계속 말이 나와서 얄짤없이 예편당했다. [109] 이렇듯 임기 말 군 인사로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낸 전두환보다 좀 더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수족들을 깔아둔 노태우가 한 수 높았다고 볼 수 있지만, 김영삼은 이들을 싹 다 예편시켜 버리고 군 인사 관행(차기 참모총장은 후임 기수로 이어지는 것)을 뒤엎어 관례상 한미연합사부사령관을 끝으로 예편해야 할 17기 김동진을 총장으로 임명했다. 그 때문에 육사 18기는 참모총장 혹은 합참의장을 배출하지 못한 정규 육사 기수로 남았다. [110] 안광찬 소장은 제65보병사단장, 한미연합사 부참모장과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지냈으며, 2002년 예편 이후 참여정부에서 국방부 정책실장과 국가비상기획위원장을 지냈다. 좌우 양쪽에서 능력하나는 인정받았다는 소리. [111] 이 사건의 나비효과로 육본 정보작전참모부장이었던 장준규 소장이 중장 진급 후 특전사령관에 보임되었다가 제1야전군부사령관, 제1야전군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112] 다만 이 쪽은 예비역 중장임에도 주미대사관 국방무관직을 수행하며 소장 진급을 임기제 진급 비스무리하게 하며 사단장직을 하지 못 했고, 유엔군 키프로스 사령관을 중장 계급으로 지내긴 했으나, 이 역시도 우리 군 소속이 아닌데다 유엔군에 파견을 간 형식이었는데다가 임기제 진급과 다를 바 없는 진급이었다. [113] 창원시 갑 17~18대 국회의원. 광주 북구 갑 국회의원이던 강기정과 18대 국회 전반기 행안위 간사를 맡았었는데, 이 시기에 강기정 의원이 웃으면서 권경석 의원 입을 틀어막아 소위원회의 진행을 방해하는 기행을 벌였다. 이후 강기정이 정무수석과 광주광역시장을 맡으면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사실 권경석도 하나회 출신이긴 한데, 박정희 대통령 재임 중인 1977년에 일찌감치 소령으로 예편하고 바로 유신사무관에 특채되어 부산직할시 5급 공무원으로 입직하고 오랫동안 공무원 생활을 했기에 하나회와의 연결 고리는 작은 편이다. [114] 이진삼은 육사 15기로 전두환 정부 시절에는 민병돈, 고명승 등에게 밀리며 제21보병사단장과 육군정보사령관 같은 요직이 아닌 곳에서만 일했지만 노태우가 집권하자, 제1야전군사령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같은 요직에서 일했다. 이진백은 갑종장교 출신인 그의 동생이었는데, 형의 빽으로 8사단장, 정보사령관을 지내며 잘 나갔다. [115]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현지임관 사병 출신이 대부분이다. 과거에는 3사, 학군, 학사장교들보다 기수도 훨씬 높고 비중이 높았었다. 대체로 하나회보다는 선배들이었고 한국전 직후 1954년에 임관한 육사 11기에게는 최대의 경쟁자였다. 한국전으로 임관한 갑종 장교는 학군, 학사가 생기기도 전에 임관한 사람들이다. [116] 여기에는 상당히 우스운 상황이 있다. 원래 전두환은 자기 아들들의 병역을 얼렁뚱땅 넘기기 위해서 석사장교라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것 때문에 생기는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훈련은 거의 비슷하게 하되, 현역으로 제대로 복무시키는 학사장교 제도를 같이 만든 것이다. [117] 그런데 정작 퍼스트 건담도 2019년 와서야 국내방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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