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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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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범죄와의 전쟁 · 북방정책 · 한국예술종합학교
가족 아버지 노병수 · 막내작은아버지 노병상 · 배우자 김옥숙 · 딸 노소영 · 아들 노재헌 · 사위 최태원
관련 인물 전두환 · 김영삼
역대 선거 제13대 대통령 선거
사건사고 12.12 군사반란 · 5.18 민주화운동 · 3당 합당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기타 신군부 · 하나회 · 민정계 · 민주정의당 · 민주자유당 · 보통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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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선 전
1.1. 성장기1.2. 군인1.3. 제5공화국1.4. 대통령 선거
2. 대통령 시절3. 퇴임 후
3.1.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3.2. 비자금 사건3.3. 징역형 및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3.4. 사면 이후
4. 사망
4.1. 정부의 해외 조전 늑장 전달 논란

1. 당선 전

1.1. 성장기

1932년 8월 17일( 음력 7월 1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용진마을에서 당시 면서기였던 노병수(盧秉壽. 1901~1940)[1]그 아내 김태향(金泰香, 1907~1999)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축음기를 틀어놓고 책을 읽었으며, 불교에 조예가 깊은 할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팔공산의 대찰을 오가며 참선[2] 배웠다고 한다. 덕분에 "호흡 및 호흡관찰을 생활화" 하게 되었는데, 성인이 될 무렵에는 자동차가 땅굴( 터널)로 들어갈 때 1번 숨을 들이쉬고, 자동차가 터널을 빠져나올 때까지 천천히 숨을 내쉴만큼 호흡 수준 및 폐활량이 좋아졌다고.

8살이던 1940년에 부친 노병수가,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가는 막내동생(=노태우의 숙부) 노병상을[3] 응원하기 위해, 대구시내 시험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가 철도 건널목 사고로 인해 39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된다. 이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막내숙부가 중학교를 마치고 취업할 때까지 어렵게 살았으며, 14살 때부터 대구의 삼촌 집에서 통학을 했다고.

대구공산소학교(現 대구공산초등학교)를 졸업한 뒤[4] 대구공업중학교(現 대구공업고등학교[5])에 입학했지만, 중2 때 당시 유행하던 말라리아에 걸려 1년동안 생사를 오가는 투병끝에 겨우 목숨을 건지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의대에 진학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자 본격 학업에 열의를 보였던 것. 비록 1년이란 세월을 날렸지만, 이 무렵 닦은 학업 실력으로 10:1의 경쟁을 이겨내고 영남권 제일의 명문 학교였던 구 경북중(현 경북고등학교) 4학년 편입에 성공하여 미래의 경북 지역 엘리트들과 같이 공부하고 친분을 쌓게 되었다[6].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자원, 현병학교 기간요원(9백명중 1등을 해서 남게 됨)으로 복무 중 육군사관학교 정규생 모집공고를 보고 몇몇 친구들과 의논,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해 20:1의 경쟁률을 뚫고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다. 베프 전두환이 인문계 편입시험과 갑종장교 시험에 연거푸 물을 먹고, 충원합격으로 육군사관학교 11기에 합격한 것과 여러 모로 대조된다.

고교 시절에는 이런 시도 썼다고 한다. ( 오마이뉴스 기사, 오마이뉴스 기사(네이버))
<여름의 저녁>

여름의 저녁 뻐꾸기 울고 피리소리 들려오누나
물은 고요히 잠자고 그 속에 달그림자 떠 있어......

두던의 잔디는 부드럽고 그 위에 몸을 높인 이 몸
잠자코 나는 여름 하늘의 별을 세노라.

어디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나는 고요히 물 위에 가벼운 돌을
던지다. 물은 잔작히 파도를 일으키고 달은 너울너울 춤을 추누나.

여름의 저녁 어느덧 밤은 물속에 든 달그림자와 함께 깊어간다.
그윽한 여름 개울의 잔디 두던에 고요히 밤은 짙어간다.

중학교 시절에는 공부를 잘했고 장래희망이 외과 의사였다고 한다. 영어를 특히 잘해 육사에서 영어를 가르쳤다고도 한다. 때문에 학구파로 알려졌지만, 사실 성적이 특출나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노태우가 직접 쓴 회고록에 의하면 육사 입학 때는 200명 가운데 10위권이었지만, 졸업할 때는 67등까지 떨어져 그렇게 특출난 성적도 아니었다고 한다.[7] 사관생도 시절 태릉 타잔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체력이 뛰어났다는 설이 있는데, 딱히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럭비는 좋아해서 자기 회고록에 사관학교 시절 자랑거리가 럭비와 후배에게 저지른 똥군기말고는 없다. 그렇지만, 이 사관학교 럭비부 출신 선후배들이 대선에 출마한 노씨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는 일화도 있는 만큼[8], 사관생도 시절 인망은 괜찮았던 것으로 추정.

전두환과는 동기로 육사 생도 시절 방을 같이 썼으며[9], 노태우가 한살 형인 전두환을 옆에서 보좌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10] 두 사람 모두 자기만의 확고한 1등 영역(노태우는 영어, 전두환은[11] 체육 실력)을 구축하며, 기수를 이끄는 역할을 자주 맡았다고 한다.

1.2. 군인

파일:external/dimg.donga.com/145750489826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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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ntw11.jpg
담배를 문 소위 시절의 노태우. 월남 파병 당시의 노태우.[12] 국군보안사령관 시절
육군사관학교 11기로 동기 전두환과 함께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13] 영어를 매우 잘하고 선생님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노태우는 소대장을 완료한 이후 보병학교에서 구대장을 역임한 뒤 육군정보학교에서 영어교관을 역임했다. 5.16 군사정변이 성공한 이후로, 같이 하나회를 조직한 전두환과 더불어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되고 이후로 승승장구하며 전두환과 함께 정치군인의 행보를 걷게 된다.

대위 시절 육군방첩부대[14] 정보처 정보과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방첩대장은 바로 이후에 원수지간이 되는 정승화였다. 당시 노태우가 정보과 일을 하면서 정치 분야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자, 정승화가 이를 딱하게 여겨서 '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하지 말게. 야전 지휘를 해봐야 진짜 군인이지.' 라고 가볍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중령으로 진급한 1967년 월남 파병에 대대장으로 참전했을 당시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68년 육군대학 수료, 수경사 대대장을 거쳐 1970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서종철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을 했고[15], 1971년 연대장, 1974년에 마침내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여단장을 맡았다. 군내 노른자위 보직들을 옮겨다녔다.

전두환이 제1공수여단장 - 제1보병사단장을 거친 것처럼, 노태우는 제9공수여단장-제9보병사단장을 거쳤다. 공수여단장 시절 흥미로운 일화를 많이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공중낙하 합동결혼식이다. 공수여단 내에 나이든 부사관들은 처와 혼인신고하고 결혼생활은 오래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 28쌍을 모아서 합동 결혼식을 주선했다. 근데 그 결혼식이란 게, 신부들은 지상에서 웨딩드레스 입고 부케 들고 행주나루에서 대기하고 있고 신랑들은 양복 입고 비행기에서 낙하산 메고 창공에서 점프해서 날아오는 것이었다.[16] 그날 점프의 1번 강하자는 다름 아닌 결혼식 주례를 맡은 노태우 공수여단장이었다고.

공수여단장을 마치고 청와대 경호실에서 행정차장보를 역임했다. 이후 소장으로 진급해서 작전차장보도 맡았다. 참고로 경호실 작전차장보 행정차장보는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이 자신의 권위와 세력을 키우기 위해 현역 군인들을 데려다 앉히기 위해 만든 직위들로, 처음에는 차장보가 준장, 경호실 차장이 소장이었는데 나중에는 차장보가 소장, 경호실 차장이 중장으로 높아졌다. 10. 26. 사건 당시에는 이재전 육군 중장이 경호실 차장으로 있었다.
파일:attachment/jdhntw.jpg
대통령경호실 행정차장보 육군 준장 노태우, 작전차장보 육군 준장 전두환, 그리고 경호실장 차지철

12.12 군사반란 당시 자신이 지휘하던 제9보병사단 예하 29연대를 동원하여 반란 성공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12.12 군사반란 후에는 쿠데타에 저항하다 쫓겨난 장태완 소장의 후임으로 수경사령관이 되었다.

수경사령관 시절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중 입대한 33경비단 소속 일병 유승민에게 과외병으로 옮겨 자녀의 과외를 해 줄 수 있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유승민 개인의 주장일 뿐 전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17] 만약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노소영(20세)은 당시 이미 성인이었으니 해당 자녀는 노재헌(16세, 중학교 3학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장을 단지 3일 후에, 전두환 정권이 후임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태우를 거의 강제로 전역시켰고 그는 서럽게 울었다고 전해진다. #[18]

1.3.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자 노태우는 정권의 핵심인사 중 하나가 되었지만 동시에 정권의 2인자였기에 7년동안 1인자의 견제를 받는 처지이기도 했다. 정권 초기에 노태우는 박정희 정부 당시 명실상부 2인자이자 실세로 활약했던 김종필을 찾아갔고 김종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두환 곁에 붙어있고 그렇지 않으면 숙청당할 것, 나도 10번 이상 압수수색 당해봤다."며 2인자로 처신하는 법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19]

1981년 7월 15일 대한민국 육군 대장(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예편하여 민간인 신분이 된다. 이후 정무제2장관[20],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정권의 2인자였지만, 정권의 실세이자 각종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이들은 사실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의 이른바 '쓰리허'였고 노태우는 장관급에 기용되기는 했지만 정권의 핵심적인 권력과는 거리가 있는 한직에 가까운 직책들이 주어졌다. 특히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은 국내의 사건사고가 터지면 내무부 장관이 책임지고 사임하는 일이 빈번했던 만큼 노태우에게 정치적인 데미지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결국 내무부 장관 재임 중 한일합섬 이사 고문 치사 사건, 조세형 탈옥 사건, 대구 디스코텍 화재 사건 등 일련의 사건으로 내무부 장관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번에는 민주정의당으로 가서 야당의 공세에 맞서는 총알받이 역할이 주어진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원래는 이 선거에서 고향인 대구직할시에서 지역구 후보로 출마하고 싶었으나 전두환이 "맨날 뒷줄에만 있었는데 자네도 이제 앞줄로 나와야지. 연희동에 살고 있으니 서대문구에 출마해봐. 내가 밀어줄게"라고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적잖은 부담을 느낀 노태우가 결국 지역구 출마를 고사했고 전국구로 나서겠다는 뜻을 이종찬을 통해 전두환에게 전달했다. 결국 당선 안정권인 전국구 순번 3번을 받아 큰 어려움 없이 금배지를 달았다.

12대 국회의원 당선 직후 권익현의 뒤를 이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이 노태우가 TV에 많이 나오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21] 명색이 여당 대표임에도 TV에서 그 어용 소리 듣던 야당 대표들보다 존재감이 없었다.

전두환 임기 말에 우여곡절 끝에 전두환의 정치적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후계자로 함께 언급되던 장세동은 안기부장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인기가 바닥이었고, 노신영 역시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높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 출신이라 하나회의 견제까지 받았다.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인물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전부 낙마하면서 노태우를 제외하고는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노태우가 간택된 것. 한편으로 전두환은 물같이 유해 보이는 노태우를 후계자로 앉힌 후 자신이 신설한 국가원로 자문회의 회장직을 맡은 뒤 배후에서 상왕과 같은 역할을 하려 했던 정황이 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후계자로서 5공 헌법대로 체육관 선거에 의해 당선될 예정이었으나, 6월 항쟁을 맞아 국민들의 개헌 주장을 전면 수용한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에는 본인의 역사적 결단으로 포장하였으나 후일 전두환의 기획에 합의한[22] 것이었다는 논란이 있었고 후자가 사실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다수 의견. 물론 고종사촌 처남인 박철언 등은 전자를 주장한다.

1.4. 대통령 선거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23]
"이제는 안정입니다"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 "이제는 안정입니다", "꿈도 아픔도 국민과 함께" 등과 같은 슬로건을 내걸었다. 장기간에 걸친 권위주의 정권, 군사 정권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안정을 원하는 국민들에게 호소력을 갖기 위해서 초점을 맞춘 선거캠페인을 전개했다. 당시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두고 선거캠프 내에서 "보통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하냐", "이미지가 너무 약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노태우 본인이 굉장히 흡족해했다고 한다.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24] 정치공학적으로는 상당히 뛰어난 이미지 전략으로 꼽히는데, YS의 '군정종식', DJ의 '평민은 평민당, 대중은 김대중'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많으나, 이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은 30년이 지난 작금의 사람들도 기억한다. 3김의 치열한 싸움(YS, DJ 양김이 분열하고 여기에 JP까지 싸움에 가세했다.)에서 평범한 이미지를 고수하며 오히려 그 싸움에서 한발 물러나는 듯한 이미지를 고수하면서 자기 지지층을 모으고, 군사독재 정치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던 계층이나 양김의 싸움에 지루함을 느끼던 민주화 지지층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노태우에게 관심을 갖게 만든 효과가 있었다.[25]

민주화 이후 최초의 대선이라 한국 대표 민주화 운동가였던 두 후보 김영삼, 김대중에게 처음에 관심이 쏠렸던 선거임에도 노태우의 '보통사람'이 다른 어떤 강한 단어보다 대중의 폐부를 찌르는 단어로 작용하여 노태우쪽에 유리한 영향을 주었고 결국 당선까지 되며, 이는 역대 대선 슬로건 중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대표 슬로건으로 꼽힐 정도가 되었다. 보통사람처럼 '사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슬로건과 캐치프레이즈가 어떤 슬로건들보다 대중들에게 엄청난 임팩트를 준다는 것을 확고히 보여준 사례.[26] 후에 개그맨들이 코미디프로그램에서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며 노태우 특유의 경상도 억양섞인 말투를 흉내내며[27] 대중들의 기억에도 오래 남게 된다. 주변에 1987년 대선을 겪은 어르신들이 있으면 한번 물어보라. 다른 슬로건은 몰라도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말은 거의 대부분 선명하게 기억할 것이다. 그만큼 대통령 선거사에서 길이 남을만한 명 슬로건.

그리고 마침내 1971년 이후 처음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약 36%의 득표율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선의 주된 이유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의 단일화가 실패하였고 여기에 김종필까지 후보로 나서며 선거가 지역대결의 양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28] 물론 민주화 열망이 가득했던 당시 비록 야권이 분열되었어도 충분히 정권교체는 가능했겠으나, 선거 막판에 북한 간첩에 의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으로 안보 불안감이 조성되기도 했고, 또한 방송사들이 노태우에게 유리하게끔 편파보도를 했으며 전두환 정권 당시의 인권유린 실태의 상당수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도 한 몫을 했다. 노태우의 최저 득표율 기록은 20대 대선까지도 깨지지 않았으며, 30%대의 득표율로 당선된 것 역시 노태우가 유일하다.

참고로 경부고속철도 인천국제공항 건설, 새만금 간척, 서울 2기 지하철 확충, 주거안정을 위한 신도시('주택 200만 호 프로젝트', 1기 신도시) 건설 등 오늘날까지 국가적 토목사업이자 개발공약 상당수가 노태우의 대선공약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실제로 임기 중에 추진되었다.

2. 대통령 시절

파일:external/blog.donga.com/201303206399126.jpg
1988년 2월,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노태우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의 취임사 제목[29]

당선 직후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과 달리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미달하여 여소야대 국회가 이루어졌고 지난해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여운이 그대로 살아있었기에 엄청난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된다. 전두환이 국가원로 자문회를 신설하여 상왕노릇을 하려하자 언론의 대대적인 비판에 합승하여 신설 명분을 공격했고 이후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대대적인 비리를 파낸 뒤 이를 빌미로 '전경환을 총선 후에 풀어주는 조건으로 구속하겠다.'는 합의를 보고 전두환의 일가를 쳐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전두환은 어쩔수 없이 상왕노릇을 하려던 자문회를 포기하면서 자신을 간섭할 최대의 난적 전두환을 처리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쿠데타의 주도자인 하나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대선공약 중 하나인 5공 청산론을 받아들여 전두환 정권의 핵심인사들을 대거 정리하고, 전두환과 이순자의 친인척들을 비리 혐의로 구속시킨다. 또한 전두환 정권에 비해 상대적이긴 하지만 군출신 인물들을 민간인으로 대체했다. 정권 말기가 될수록 본인이 졸업한 경북고등학교 출신을 권력 전면과 핵심에 고루 포진시켰다.

6.29 선언에 이어 또 한번 재야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해금을 단행했다.[30] 그리고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허용하였다.[31] 또한 정기적으로 김대중을 비롯한 주요 야당 총재들을 만나 의견을 교환하면서 국정에 이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통합행보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범죄와의 전쟁 선포가 널리 알려져 있다. 1990년 10월 13일 대통령 선언 형식으로 발표된 이 정책으로 인해 당시 사회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각종 강력.조직범죄는 철퇴를 맞았다. # 민주화 운동, 노동 운동 탄압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에 실제적으로 강력범죄 발생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조직폭력 범죄가 거의 뿌리가 뽑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노태우의 업적이다. 밀리터리 계에서 유명한 9공수여단 출신 중사의 기록에 의하면, 노태우는 이미 9공수여단장 시절에 비슷한 일을 했었다고 한다. 유흥가에 깡패들이 설치면서 민폐 끼치는 걸 직접 겪은 노태우 여단장은 이른바 "부평지역 깡패 토벌 작전"이라는 걸 시작했다고 한다. 1개 지역대 규모 특전사 병력을 퇴근 후에 사복으로 갈아입혀 유흥가에 대기시키다가 깡패한이나 조직폭력배들과 시비가 붙으면 일제히 뛰어나와 초토화시키는 것이었다고.

냉전이 끝나는 세계적 분위기에 민첩하게 대처하여 1988년 7.7 선언으로 대북비난방송을 중단하는 등, 북한에 유화적인 정책을 폈고, 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세간에서는 모처럼 대통령 별명(물태우)을 한 껏 말하며 농담 소재로 삼았지만, 노태우 정부의 대북 및 외교분야의 업적은 2010년대까지 유지되고 있는 불곰사업, 노태우 정부 이후 모든 대북 정책의 기초를 이루는 남북기본합의서[32], 또한 동구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한[33] 북방외교(= 북방정책)까지 눈부신 데가 있었다. 1988 서울 올림픽도 전에 불참하던 공산권 국가들이 모두 참여하는 성공을 거두며 Korea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불법으로 규정해 탄압해 이와 관련한 수많은 시위가 일어났지만, 전교조 사태의 후속 조치로 교원 대우 향상을 약속, 교사들 봉급이 이 때부터 인상되어 생계걱정 없는 매우 안정된 직장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된 측면도 있다.

여소야대 국회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여대야소의 정계개편을 시도하는데 첫번째 접촉한 대상은 놀랍게도 당시 제1야당이던 김대중 평화민주당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총재가 이를 거절하자 1990년 1월에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성사시켰다. 현 국민의힘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 초대 총재에 추대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 당시 3당합당에 반발하여 대학가에서 수많은 시위가 있었는데 노태우 정권은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일으켜 모든것을 덮으려 하였다.

같은 해 10월 4일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이 발생해 국군보안사령부가 국군기무사령부로 바뀌고 역할이 축소되었다. 그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민생치안 확립을 위해 10월 13일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였는데, 시기가 미묘해서 정국전환용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노태우는 대통령 후보시절 작전권 환수를 공약하고, 다음 정권 때 평시작전권을 환수받게 된다. 1991년에는 한반도 비핵화를 공식 선언하고 UN에 북한과 동시 가입하였다. 31년만에 지방의회를 뽑는 1991년 지방선거가 다시 열렸다. 기초의원 선거에서 투표율 저조로 여유있게 압승하였고 광역의원 선거에서 민자당 내 혼란으로 인한 지지율 저조와 학생운동진영에서 개혁후퇴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연쇄분신을 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선거운동기간 초기까지만 해도 민자당이 수도권에서 참패할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지만 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사건으로 막판에 역전하는데 성공을 거두며 민주자유당이 압승을 거두며 저항은 무력화 되었다.

그러나 민자당 내의 당권다툼에 따른 혼란은 여전하였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과정에서 다수 공천탈당자가 통일국민당이나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일이 벌어졌고, 국가안전기획부가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 선거구[34]에서 흑색선전물을 살포하다 4명이 적발된다. 또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이 발생하여 선거 막판에 야권지지층이 결집하였고, 야당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무당파층 상당수가 무소속 후보와 통일국민당으로 이탈하면서 결국 민주자유당은 과반에 1석 모자라는 149석을 얻는다. 한때 200석이 넘는 정당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참패한 셈.

이 선거로 노태우 정권의 레임덕은 가속화 되고, 노태우는 8월 27일 민주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9월 18일에는 민주자유당 탈당을 선언한다.[35] 하지만 당시 총선 패배는 오히려 당 대표였던 김영삼 총재에 대한 민정계의 불신론을 키운 것이지 노태우 대통령의 기반이 흔들린 것은 아니다. 노태우에게 탈당하라고 요구한 사람도 없었고 당시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관권선거 없이 중립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개각을 해야 한다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요구가 거세게 일면서 노태우는 개각을 단행하다. 여기에 더해서 노태우 스스로 민자당을 탈당하겠다고 한 것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탈당 주장은 전혀 없었던 것인데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김대중 역시도 이러한 결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재임 기간 중에 딸 노소영을 선경그룹 회장 최종현의 장남 최태원과 결혼시켰다. 여기서 끝나면 그럴 수도 있는데, 이 결혼 이후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경이 선정된다. 그러나 선경은 대선을 준비하던 김영삼 등의 반발에 밀려 사업권을 반납하게 된다. 훗날 김영삼 정부 출범 후 한국이동통신이 선경에 매각되면서 SK텔레콤이 됐고 포항제철 코오롱그룹이 1·2대주주로 경영에 참여했던 제2이통사 신세기통신 역시 김대중 정부 당시 SK텔레콤으로 넘어가면서 이동통신 시장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3. 퇴임 후

3.1.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

1995년 10월 5일, 경북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노태우는 상식 이하의 망언으로 하면서 국민들에게 비난과 논란을 일으켰다.

中國(중국) 문화혁명희생 비하면 光州(광주)사태 아무것도 아니다 노태우씨 동창모임서 발언(동아일보)
광주사태 별 것 아니다” 노태우 전대통령(한겨레 신문)
광주사태 별 것 아니다” 노태우 전대통령 충격발언 요지(한겨레 신문)
노태우 대통령 발언 요지(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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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노태우는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예전 중국에서 문혁 때 수천만 명이 희생 당하고 엄청난 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고, 해당 망언이 동아일보사 시사주간지 < NEWS+(현 주간동아)> 10월 18일자에 보도되면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MBC, KBS) 이로 인하여 노태우는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고 그 당시에 비자금 사건도 터지면서 전두환과 더불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직후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노태우는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그런 얘기를 했더라면서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는 궤변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며 답변을 유보했다.[36] 당시 노태우의 망언에 정치권까지 듫끓게 되었고 집권당인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망언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는 형식으로 수습하자고 대응했으나 국민들의 공분은 가라앉지 않았다.[37] 결국 노태우는 10월 13일, "자신의 발언으로 5.18 피해자 유족에게 상처를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광주 망언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38]

이후 2019년, 노태우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아들 노재헌이 대신 5.18 국립묘지에 방문해 사죄했다. 노재헌은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만나 5.18에 대하여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는 아버지의 뜻을 전했다.

1988년 2월 25일 김옥숙 영부인이 극비리에 5.18 국립묘지에 참배한 것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3.2. 비자금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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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징역형 및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

1995년 검찰 구속,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의 시작이었다.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로 인한 재판이었다.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22명이 고발하였으나 법원은 "성공한 쿠데타(내란)를 처벌할 수 없다"라며 공소권 없음을 내세워 방어를 했다. 그러나 이후 3건의 헌법 소원으로 헌법재판소는 1995. 12. 15. 95헌마221등 에서 성공한 내란이라도 처벌 할 수 있음을 판시하였고, 이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시효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듬해부터는 전두환 신군부 인사들과 함께 과거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및 학살 등에 대해서도 재판을 받아 제1심 (95고합1228)에서는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이후 항소심 (96노1892)에서 징역 17년으로 감형되었으며, 최종적으로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열린 상고심 (96도3376)에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인정 죄목: 내란모의참여· 살인미수· 반란모의참여·불법진퇴·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뇌물수수, 제3자 뇌물공여))[39]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전두환, 노태우는 기본적인 경호 이외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당했다.[40]

그러나 그해 말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김대중 그리고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위키백과 15대 대통령 선거, 대선 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공약 대결 논란 결국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 후인 12월 20일 김영삼 정부에 의해 사면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사면 결정 정부 간혹 복권이 되었다는 표현을 가지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투표권 등 다른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릴 수 있는 권리의 제약이 풀렸다는 것이지 전직대통령법상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일체의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3.4. 사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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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으로 이송 중인 노태우( 2013년[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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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병원에서 퇴원하는 노태우( 2019년[42])

출소 이후에는 여느 전직 대통령들처럼 대외활동을 했으며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고 여/야 대표의 예방을 받았다. 국민의 정부 시절 열린 전직 대통령 초청만찬에 전두환과 함께 모두 참석했다. 자신의 집권기간동안 사이가 나빠진 전두환과는 공식석상에서 여러차례 함께 포착되었지만, 사적인 교류는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43]

하지만 2002년 전립선암이 발병해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고, 이 후 건강이 악화되면서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시작했다. 3년 뒤인 2005년에는 혈압약 복용 경과 및 건강검진차 다시 입원했으며, # 2008년 세계일보의 단독보도를 통해 소뇌위축증으로 투병 중이라는 근황이 전해지기도 했다. #

건강이 악화되면서 대외활동이 힘들어진 그는 2004년 8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의 면담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더 이상 모습을 들어내지 않았다. 언론에 마지막으로 포착된 것은 2007년 6.29 선언 20주년을 기념한 만찬 자리에 참석했을 때인데, 공식적인 기념식은 아니고 5공과 민정당에서 일했던 인사들을 주축으로 마련된 사적인 모임이었다. 이미 이 때는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지팡이 없이 보행이 불가능했으며, 대화하는 것조차 어려워져 기자도 노태우의 발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44]

한 측근이 노태우의 건강 상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적이 있는데 과정에서 전립선 괄약근을 잘라 내는 바람에 자율신경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됐다고 한다. 이를 조절하기 위해 먹는 약이 혈압을 떨어뜨렸으며, 혈압이 계속 떨어지다 보니 말이 어눌해진 것이고, 지팡이나 보행 보조대를 사용하는 건 현기증 때문이라고. 관련기사

2006년 꽃동네의 설립자인 오웅진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건강이 악화된 터라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고, 노태우의 가족들도 함께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친구인 전두환은 여전히 걸어다녔지만 노태우는 걸어다니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결국 소뇌위축증과 암이 재발하여 자택에서 요양을 받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위 사진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모습을 철통같이 감추고 있으며, 병원에 들어갈 때도 가명을 쓸 정도였다. 같은 시기 팔순~구순을 넘기고도 건강하여 언론에 활발한 모습을 보여 온 전두환과는 대조적이었다.

석방 당시에도 추징금에 대해서는 사면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29만원 타령하던 전두환과는 달리 추징금 납부를 매우 성실히 한 편이다. 처음 불거질 때부터 수감 생활, 추징금 납부 등 모든 면에서[45] 전두환과는 정말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7년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은 직후 추징금의 90%가량을 납부하였고, 2013년 말까지 분납해서 추징금을 완납하였다. [46] 되려 화제가 안 되고 관심이 뚝 끊긴 이유가 이것일지도. 결국 그는 2000년대 중반부터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두환과는 달리 사망할 때까지 화젯거리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이 때문에 일부 호사가들은 여전히 몸이 건강하고 대외 활동이 잦은 전두환과 비교하며 '과연 욕 먹으면 오래 산다'라는 말을 꺼내기도 한다.

2019년 경찰청 측은 2023년 의무경찰 폐지를 앞두고 전두환과 함께 경비인력을 연내 철수키로 한다고 밝혔고, 2020년 1월 1일 갑자기 상태가 위중해져 병원에 입원했다. 측근에 의하면 위독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고령인 탓에 입원 처치를 했다고 한다. 여전히 거동 및 의사소통은 전혀 못하면서 듣는 것과 보는 것만 할 수 있는 수준이다.

2021년 4월 9일 호흡기계 이상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구급대가 긴급출동했으나 다행히 상태가 호전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 4월 10일에는 노태우의 딸인 노소영이 그의 근황을 전하기도 했다. #

4월 11일 측근에 의해 전해진 근황에 따르면, 소뇌위축증 탓에 움직일 수는 없지만 대뇌에는 이상이 없어 생각이나 의식 표현은 할 수 있다고 한다. 을 깜빡이는 방식으로 긍정과 부정을 나타내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들 노재헌 광주광역시 방문에 대해서도 "가지 말까요?"라고 물으면 가만히 있었고, "갔다 올까요?"라고 물으면 눈을 깜빡거렸다고 하며, 그런 식으로 노태우와 소통해서 노재헌 씨가 광주에 있는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수년째 건강이 안 좋았기에 가족들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관련기사

8월 21일에는 일생의 동지였던 전두환도 혈액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다.

4. 사망

파일:노태우영정.jpg
노태우 대통령 공식 영정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유족이 공개한 노태우의 생전 유언. #
2021년 10월 26일 오후 1시 46분 경,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향년 89세[47]를 일기로 사망하였다.[48] 연합뉴스, 중앙일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일환으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이후 금고 이상의 형기인 징역 17년이 확정된 적이 있어 전직 대통령 예우를 상실했으므로 국가장이 치러질지는 불분명하였으나[49] 최종적으로 사후 다음날 국무회의에서 김부겸 국무총리는 노태우의 3의 과보다 7의 공이 큰 점을 감안해 업적을 기리고 예우를 갖추기 위해 국가장을 치르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기사.

단, 국립묘지 안장과 관련해서는 이미 주무부처인 국가보훈처에서 사면 복권의 효력에도 불구하고 기왕의 확정판결된 범죄사실에 대한 소멸이 당연히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입장을 이미 밝힌 상황이었고, 본인은 국립묘지가 아닌 화장되어서 파주에 묻히고 싶다는 입장이어서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며[50] 유족 측은 "(고인께서) 장례는 국법에 따라 최대한 검소하게 해주시길 바라셨다", "장례 절차는 정부와 협의 중이며 장지는 이런 뜻을 받들어 재임 시에 조성한 통일동산이 있는 파주[51]로 모시는 것을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

하지만 6개월 전 파주시는 통일동산에 묻히고 싶다는 노태우 측 문의에 "통일동산에 장묘시설이 들어설 수 없어서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전했다고 한다. # 다만 최종환 파주시장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정부와 파주시민의 뜻을 확인한 뒤 결정하겠다"고 말해 재검토 가능성은 시사했다. # 다만, 고향 대구는 거론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사망 약 1개월 후인 11월 29일, 고인의 생전 뜻대로 파주 통일동산 경내의 동화경모공원으로 장지가 결정되었다.

오후 6시에 서울대학교병원의 브리핑이 있었다. 공식적 사망 원인은 각종 합병증과 긴 투병 생활로 인한 쇠약해진 몸 상태라고 하며, 병원 신세를 상당히 많이졌으며, 이번에 자택 치료를 받다가 갑작스레 상태가 안 좋아져서 12시 45분경 응급실로 이송되었는데, 1시간 뒤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으로 정해졌다. 노태우의 아들인 노재헌 변호사는 영국에 머물고 있는 상태에서 사망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급히 귀국길에 올랐으며, 비록 노소영 이혼 소송 중이긴 하지만 아직 사위 최태원 SK 회장은 10월 27일 조문을 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

정치권에서는 국민의힘이 수석대변인 구두논평을 통해 애도의 뜻을 표했고, 대선 예비후보들이었던 윤석열, 홍준표, 유승민, 원희룡 등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 이후 27일, 이준석 대표와 김기현 원내대표도 빈소에 찾아가서 조문을 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노태우의 군인 시절 및 정치인 시절의 행적들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북방정책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은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퇴임 이후 16년에 걸쳐서 추징금을 완납하고, 거동이 불편해 광주로 직접 갈 수 없는 대신 자녀들을 통해 사과를 하는 등 반성하는 행보를 보였기에 그의 마지막은 전두환의 행보와 달랐다고 평가하며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송영길 대표는 노태우의 딸인 노소영 관장에게 따로 전화를 걸어 조의를 표했으며 27일 빈소에 찾아가서 조문했다. #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이재명 또한 27일에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노 전 대통령에게) 빛과 그림자가 있지만 빛의 크기가 그늘을 덮지는 못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

전성기 시절의 친구였던 전두환은 사망 소식을 듣고 별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밝혔다. 하지만 그간 정정했던 전두환도 최근 들어 치매 다발성 골수종으로 인해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부축 없이는 스스로 걷거나 앉기도 힘든 상황이라 따로 조문을 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조문을 가지 못하고 전두환 명의로 된 근조 화환만 보냈다고 한다.[52] 그 대신 부인 이순자와 장남 전재국이 대신 조문을 갔다. #

우연찮게도 이 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0.26 사태로 사망한 지 정확히 42년째 되던 날이었다. #

장례는 국가장으로 결정되어 30일까지 5일장으로 진행된다. 김부겸 국무총리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 김부겸 총리는 '사망'이라는 표현 대신 '서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53] 또한 전해철 행정안전부장관은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 5.18 민주화운동 강제 진압과 12.12 군사반란 등 역사적 과오가 적지 않지만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북방정책 추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 성과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문 대통령 본인은 스케줄이 있어서 빈소에 찾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영결식도 불참하게 되었다.[54]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에 직접 조문하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55] 사실 이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는데, 10월 27일 오후에 아세안+3 화상 정상회의가 예정되어 있고 이날 저녁에는 동아시아 화상회의가 예정되어 있었으며, 다음날인 28일에는 유럽 순방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출국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을 대신해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 이철희 정무수석비서관이 조문하기로 결정됐다. 연합뉴스. 이후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에 대해 위로의 말을 들었지만, 관련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정부가 국가장을 결정하자 5.18 관련 4개 단체는 유감을 표명하고 국립묘지 안장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 한편 10월 27일에는 5.18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 씨가 노태우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노태우가 생전에 사죄의 의사를 여러 번 밝혔기에 참석했으며 국가장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이를 두고 다수의 언론들이 박씨를 5.18 유족 대표라고 보도했는데, 5.18유족회는 박씨가 유족회와 무관한 사람이며 그의 조문은 유족회의 공식 입장과 관계없는 개인 행동이라고 선을 그었다. # 박씨가 속한 단체인 5.18구속부상자회 관계자도 그의 조문이 단체 공식 조문인 것처럼 비친 것은 부적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 이에 대해 박씨는 유족 대표라는 것은 언론의 오보이며 자신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 또 YTN과의 인터뷰에서 5.18 단체들이 국가장에 강력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자신이 조문을 간 것은 전두환 등 남아 있는 5.18 가해자들이 진실을 밝히고 사죄함으로써 화해가 이루어지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여담으로, YTN에서 속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헤드라인에 '노우 전 대통령 사망'이라고 오타를 냈다. 또한 YTN 소속의 정치부 기자가 조문하러 온 최태원 SK 회장한테 " 고인 생전 인연은 어떻게 되느냐?"라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해서 최태원 회장이 그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56]

국가장법 제4조에는 '① 국가장이 결정되면 정부는 빈소를 설치·운영하며 운구와 영결식 및 안장식을 주관한다. ②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재외공관의 장은 분향소를 설치·운영할 수 있다'라고 하여 지자체가 분향소를 설치할 수 있지만[57] 의무 사항은 아니다. 정부 역시 빈소 운영만 의무이고 분향소 설치는 의무가 아니다. 행정안전부는 고인의 유지와 코로나19 상황, 국민 정서 등을 고려해 정부 차원의 분향소는 설치하지 않으며, 지자체의 분향소 설치와 조기 게양도 따로 권고·독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조기 게양과 분향소 설치는 지자체 자율 판단에 따라 정해졌는데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58], 충청북도, 경상북도는 분향소를 설치하고 조기를 게양했다. 반면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전라남도, 세종시는 분향소 설치와 조기 게양 모두 하지 않았다. # 인천광역시, 대전광역시, 울산광역시,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도, 경상남도는 조기는 게양하되 분향소는 설치하지 않았다. # 제주특별자치도는 조기는 게양하되 코로나19 확산 우려를 이유로 분향소를 차리지 않고 온라인 분향소 운영으로 대체했다. # 정부의 일괄 권고가 없었기 때문에 광역자치단체 외에 기초자치단체들도 일부는 분향소를 차리고 일부는 차리지 않았다.

영결식은 10월 30일 토요일 오전 11시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열렸다. 역대 대통령 영결식 당일 지상파 주요 예능들이 결방된 사례로 볼 때 토요일 예능도 결방하던 경우가 있었지만, 노태우는 공과가 갈리는 인물이기 때문에 종전과 달리 일단 예능들은 정상 방영했다. 현행 방송법에는 국가장 영결식을 의무적으로 송출해야 한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KBS 1TV만 영결식이 편성되었는데, 그조차도 중계방송 형태가 아닌 KBS 뉴스특보 형식으로 20분 간 짧게 진행했다. MBC와 SBS는 유튜브로만 생중계했고, TV에서는 정규방송을 진행했다.

영결식 사회는 손범수 전 아나운서가 맡았으며, 가수 인순이와 테너 임웅균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중 치러졌던 1988 서울 올림픽의 주제곡인 손에 손 잡고를 추모곡으로 같이 불렀다.

유족 대표와 정부 간의 논의 결과, 시신은 화장하기로 했으며, 화장하고 남은 유해는 파주시 검단사에 임시로 안치하기로 했다. 연합뉴스 화장은 서울추모공원 9번 화장로[59]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서 역대 두 번째로서 노태우의 화장은 본인이 화장해서 묻되 무덤 규모를 크게 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선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60]

노태우가 사망하면서 대한민국 제6공화국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를 주름잡았던 '1노(盧) 3김(金)'[61]의 시대는 2021년 10월 26일 부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된 2021년 11월 23일에는 그의 오랜 벗 전두환도 향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대한민국에서 20세기에 대통령을 역임한 전직 대통령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 속으로 사라졌다.

2021년 12월 9일, 파주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되었다. 고인이 원했던 파주 통일동산 인근에 실향민을 대상으로 조성된 묘역 및 납골당 시설로, 파주시와 시설 운영자가 유족의 안장요청을 허락해 장지로 결정되었다. #

2022년 5월 국가보존묘지 2호로 지정되었다. 국립묘지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된다.

4.1. 정부의 해외 조전 늑장 전달 논란

靑·정부, 노태우 유족에 '시진핑 조의' 전달 안했다
시진핑이 보낸 노태우 조전…“정부, 3일간 공개 안했다”

시진핑 중국 주석,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비롯한 해외 여러 국가에서 노태우의 유족에게 조전을 보냈으나, 정부가 이를 늦장 전달한 것 때문에 논란이 일었다.

조전을 보낸 사실이 공표되지 않고 있다가, 유족측이 뒤늦게 장례식이 끝난 이후에 중국 대사로부터 조전을 보냈다는 말을 직접 듣게 되었고, 이후에 정부가 뒤늦게 조전이 온 사실을 공개하면서 고의로 조전을 공개하지 않으려 했거나, 늑장 공개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대해 외교부에서는 “받은 조전은 모두 청와대에 전달했다. 유족에게 ‘꼭 전해 달라’는 요청이 따로 있지 않으면 외국 정부로부터 온 조전을 유족에게 반드시 전해드릴 필요는 없다”라며 해명했으나, 중국측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한중수교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조전을 유족에게 꼭 전해달라고 한 것으로 알려져 해명이 무색해졌다.

이에 대해 정부가 사과하면서 조전이 11월 1일 오전에 왔다는 것과 함께 접수국에 심의에 따라 공개할지 안할지를 결정할 수 있으며, 11월 1일 이메일로 유족에게 사본을 보내고, 11월 3일 조전 원본을 직접 보낸다고 해명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

[1] 아버지도 엄청난 장신으로, 키가 무려 189cm였다고 한다. 2020년대 현재 기준으로도 남성이 189cm이면 보기 드문 엄청난 키인데, 평균 신장이 현재보다 10cm가량 작았던 당시로써는 그야말로 거인이 따로없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유전 덕분인지, 노태우도 젊은 시절 키가 178cm로 꽤나 컸다(나이를 먹고는 175cm로 줄어들었다). 현재도 178cm이면 대한민국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보다 큰데, 노태우가 태어난 1930년대 당시로써는 평균을 훨씬 넘는 매우 큰 키이다. 사실 아버지 키가 189cm인데 아들 키가 178cm이면 아버지에 비해 아들이 많이 작은 편이기는 하다. 또한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도 아버지 노태우과 할아버지 노병수의 장신 유전자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185cm의 장신이다. [2] 사실 제대로 된 불교 사찰이라면, 신도들에게 기도보다는 참선과 계율의 합리적인 준수를 더 강조하며, 108배와 호흡관찰법을 중점적으로 가르쳐준다. 기도로 복을 빌며 의지하는 기복적(祈福的)인 모습보다는, 108배로 하체를 튼튼하게 하고, 호흡하는 본인의 모습과 마음 상태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취지. [3] 문구점 운영으로 살림이 비교적 넉넉했으며, 어린 노태우를 돌봐주었다고 한다. [4] 아래 어린이날 영상에 따르면 소학교 시절 반에서 1~5등을 했다고 한다. [5] 평생의 친구 전두환도 이 학교 출신이다. [6] 이맹희 회장의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도, 대구공고에서 편입한 동기생 노태우가 정호용, 김윤환, 김복동과 더불어 학과 성적이 우수했다는 일화가 실려있다. [7] 출처: 노태우 저, 노태우 회고록 1권 中 [8] 다만, 선후배들을 확실하게 챙겨준 전임자에 비해, 이런 인사 측면에서 다소 손색이 있었기 때문에 95년 노 씨의 구속 당시 서운해 하는 후배의 인터뷰 조선일보에 실리기도 하였다. [9] 이 무렵의 육군사관학교는 한 번 방이 배치되면 큰 사유 없이는 배정이 바뀌지 않아, 같은 방 식구끼리 미운정 고운정 주고받으며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군사 반란을 일으킨 그룹도 살펴보면 기숙사 방을 같이 쓰면서 인연이 닿은 경우다. [10] 전두환은 갑종장교를 지원했다가 탈락하고 시간을 낭비하다 뒤늦게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1] 어느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전두환이 여단장을 맡은 공수특전여단에서는 실제로 주먹을 주고받으면서 훈련할 것을 지시받아 정기적으로 간부부터 말단 병사까지 치고받으면서 무술을 익혔다고 한다. [12] 오른쪽은 같이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었던 박희도 [13] 1955년에 임관했으며 그의 군생활의 시작은 제5보병사단 27연대 3대대 11중대 3소대장이었다. 여담으로 현재는 5사단이 철원에 있지만 당시엔 양평에 있었다. [14] 이 부대는 육군보안사령부를 거쳐 국군보안사령부가 되어 노태우가 훗날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으며 1991년에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었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현재의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개편되었다. [15] 서종철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관생도 시절 이들의 교관이었으며 노태우의 수석부관 전임자가 전두환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을 끝으로 예편 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KBO 초대 총재를 지냈다. 참고로 그룹 '샵'의 멤버 서지영의 할아버지다. [16] 출처 : 노태우, 노태우 회고록, 조선일보사. 예스24, 밀리터리 계에서 유명한 9공수여단 출신 잇빨중사도 이에 대해 기록한 적이 있다. [17] 그러나 명문대 출신 과외병 암암리에 존재했던 당시 시대상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18] 현재도 한 번씩 나오는 상황이다. 장성을 달려면 정치력 혹은 행정력이 뛰어나야 하는데, 국방부 고위직 혹은 중앙정부의 국가안보 쪽에 사람이 없거나 하면 대장을 반강제 혹은 강제로 전역시켜서 국방부 장관이나 국가안보의 요직에 앉히는 방식으로 멀리 갈 것 없이 문재인 정부의 정경두 전 국방부장관이 합참의장을 단 지 얼마 안 되어서 전임 장관의 궐위로 인해 이런 식으로 임명되었다가 서욱에게 장관기를 넘겼고 현재는 교수를 하고 있다. 국방부장관으로서의 평판과 달리 정경두는 군인으로서의 평판은 좋았기 때문에 정경두의 군인 시절을 기억하던 전현직 군인들 중에는 "그냥 군인으로 명예롭게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괜히 국방부장관 잘못 달아서 말년에도 욕 먹으면서 사신다."라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19] 이 일화는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도 나온 바 있다. [20] 현재의 여성가족부장관과는 다른 기능이었다. 제2정무장관실이 처음 신설되었을 때에 이 자리는 안보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었으나, 나중에 노태우 본인이 대통령 되고 나서야 여성 및 아동청소년 복지 기능의 기관으로 개편시켰다. 그래서 노태우는 여성가족부 장관을 한 게 아니다. 하지만 조직 간판은 그대로 두고 역할을 바꾸는 바람에 노태우가 여성가족부 장관을 지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21]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노태우가 TV에 연이어 등장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전두환이 노태우를 청와대로 소환시키더니 "야! 너 그렇게 대통령이 되고 싶어? TV에 매일 나오면 대통령이라도 되나? 그렇게 나와서 떠들면 난 뭐가 돼?"라고 갈군다. 이후 노태우를 집무실에서 내보낸 뒤 스피커폰으로 비서실에 전화하더니 "방송국에 전화해서 TV에 노태우 얼굴 좀 그만 나오게 당장 조치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이 결코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닌 셈. [22] 대통령을 사실상 거저(...) 먹으려다가 경쟁을 치러야 했으니 처음에는 거세게 반발하였다고 한다. [23] 하나회 부두목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씻으려고 내건 슬로건이다. [24] 노태우의 실제 성격이 잘 반영되어있는 슬로건이기 때문이다. [25] 지금과 달리 당시의 민주화 지지층들은 콘크리트 지지층보다는 캐스팅보트에 더 가까워서 그 전부가 민주당계 정당이나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화 지지층이 지금처럼 무조건 민주당계 정당만 찍는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변모한 것은 노풍을 타고 노사모라는 거대한 팬클럽의 지지로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다. 이때 노무현을 지지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민주당계의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굳건히 남아 있다. [26] 단순하게 노태우가 당선됐기 때문에 기억한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으나, 눈을 감고 87년 이후 대선에서 당선자나 낙선자들의 슬로건을 정확히 기억해보자. 대부분 대선 시에 일어났던 사건이나, 선거홍보광고(예. 이명박은 배고픕니다,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 온갖 음해에 시달렸습니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병풍 사건,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 그래서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등등...) 등을 더 많이 기억하지, 슬로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보통사람' 빼고 잘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만 봐도 사람이라는 단어의 힘을 알 수 있다. '보통사람'만큼 대중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임팩트를 줬던 슬로건은, 오히려 낙선자였던 18대 대선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다' 밖에 없다. 이 경우 임팩트가 컸던 나머지, 오히려 당선됐던 19대 대통령 선거 과정 중에서도 지지자들마저 실제 슬로건인 '든든한 대통령'보다 '사람이 먼저다'를 더 많이 기억했고, 일반인들 중에는 지금도 19대 대선에서 '사람이 먼저다'를 계속 쓴 줄 아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이 있다. (대신 '사람이 먼저다'는 두산의 역대급 광고로 꼽히는 '사람이 미래다'를 차용한 광고라서 참신성에서 '보통사람'보다 많이 부족하다.) 문재인 캠프 측도 '사람이 먼저다'가 워낙 대중 기억 속에 많이 남은 걸 알아서 두 번째 대선 슬로건 홍보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고 '적폐청산'이라는 구호 홍보에 더 신경을 썼다. (실제 19대 선거운동 중 일부는 확성기로 유세할 때 즉흥적으로 "사람이 먼저인 나라만들 든든한 대통령! 기호 1번 문재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먼저다를 섞어서 홍보를 하기도 했다.) 보통사람이나 사람이 먼저다는 모두 동시대 코미디 프로에서 패러디가 될만큼 응용하기 쉬운 매력도 있어서 더 일반인들의 기억에 쉽게 퍼지고 남았다. 그만큼 '사람'이 들어간 슬로건은 대중들에게 쉽게 퍼지고 다수의 기억에 오래 남는 효과가 있다. '사람이 먼저다' 보다 훨씬 유명하고 임팩트 있었던 대선 슬로건이 있긴 했다.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 그러나 손학규는 경선을 통과 해보질 못해서... [27] 10년이 넘게 지난 2000년대초에 개그맨 심현섭이 노태우와 전두환과의 대화를 패러디하며 "친구야"라는 유행어를 밀었지만, 90년대의 "보통사람" 패러디 개그만큼 오래가지 못했다. 다른 예로, 1977년생인 허준(게임 캐스터) 켠 김에 왕까지를 하다가 저 멘트를 비슷하게 써먹은 적이 있다. [28] 그리고 당시는 지금처럼 여론조사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던 시절이라 소위 ' 전략적 투표를 위한 표 몰아주기' 같은 것이 일어나기 어려웠다. [29] 이 슬로건은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낸 김학준 교수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0] 재야인사뿐만 아니라 6·25 전쟁을 전후해서 납북이나 월북했던 몇몇 인사들의 작품에 대한 해금도 이 무렵에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지용, 홍명희 등등... 물론 이에 대한 평가는 진영에 따라 다르지만... [31] MBC 코미디언 최병서가 우연히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MBC를 방문했던 노태우를 만나 성대모사를 선보이자, 노태우가 감탄하여 대통령을 코미디 대상으로 삼아도 좋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다만 최병서에 의하면 이후 방송에서 정치인 풍자 코미디를 할 때에도 안기부 등으로부터 약간의 압력을 받았다고도 한다. [32] 특히 김대중"남북문제 해결의 길은 이미 열려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이 바로 그것이다"며 호평하여 아예 실무책임자였던 임동원을 삼고초려 끝에 영입하고 국민의 정부 통일부장관 국정원장에 임명하여 대북정책 기조를 맡긴다. [33] 폴란드를 시작으로 소련 중국, 베트남,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헝가리등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와 수교를 맺거나 관계를 회복한다 [34] 민주자유당 김만제, 민주당 홍사덕, 신정치개혁당 이신범 등이 출마 [35] 실제 탈당은 10월 5일에 이루어졌다. [36] 노태우,자신의 광주사태 발언 공식 사과 [37] 盧泰愚(노태우)씨「光州(광주)」발언 커지는 파문…정치권“술렁” "경솔한 언동 [38] 盧泰愚(노태우)씨「광주발언」공식사과 기자회견"5.18피해자가족에 상처줘 미안" 국민회의등 與野(여야) 수용태세 盧泰愚(노태우) [39] 노태우와 전두환은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 하지만 검찰측의 상고로 함께 노태우와 전두환에 대한 것도 이심되었다. 참고로 상고심 판결문에는 노태우의 죄목이 명확히 알기 힘든데, 그의 죄목에 대해서는 항소심 판결문인 '95노1892'을 참조 바람. [40] 단, 예우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해석이 곧 전직 대통령으로서 재임하였던 역사적 사실까지 당연 부정된다는 의미로 보지 않는다. [41] 그 이전에도 폐에서 한방용 침이 발견되는 등 희한한 일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42] 생전 마지막으로 포착된 노태우의 모습이다. [43] 2004년 1월 참여정부가 주최한 전직 대통령 초청만찬이 두 사람이 함께 참석한 마지막 공식석상이었으며, 이 날 만남을 끝으로 10여년간 일절 교류를 나누지 않은 체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2014년, 전두환이 10년만에 노태우의 자택을 찾아 극적으로 화해를 했으며 이것이 두 사람의 생전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44] 측근의 해설에 따르면 6.10 민주 항쟁에 비해 6.29 선언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서운함을 느끼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45] 노태우는 검찰에서 소환명령이 내려오자 바로 대검찰청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고,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수감될 때도 간략한 인터뷰만 하고 조용히 교도소로 들어갔다. 그러나 전두환은 골목성명을 발표한 뒤 합천으로 도주했다가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압송되어 교도소에 수감됐다. 교도소 안에서도 조용히 지냈던 노태우와 달리 전두환은 단식투쟁을 하는 등 교정당국과 갈등을 빚었다. [46] 2013년 추징금을 모두 납부한 후 "국민께 내세울 건 아니지만, 1만분의 1이라도 할 도리는 했다"란 말을 남겨 오래 회자됐다. [47] 출생신고가 4개월 늦었기에 호적상 나이 기준으로는 향년 88세에 사망하였다. [48] 2015년에는 후임 대통령 김영삼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었다. [49] 애초에 국가장이 아예 불가했다면 행정안전부 의전 담당자가 불가 입장을 밝히면 될 뿐인데, "유족과 상의 후 국무회의를 통해 결정할 사안"이라고 했고 국가장법에서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예우하지 않기로 한 전직 대통령을 국가장 적용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세부적인 사안은 정무적인 판단을 지켜봐야 했다. [50] 국립묘지법 제5조 제4항 제3호 국가유공자법 제79조 제1항 제2호에 해당하는 사람의 안장을 금하고 있는데 노 전 대통령은 형법 제87조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람에 해당한다. [51] 파주는 교하동을 본관으로 하는 교하 노씨의 선산이 있고 노태우가 사단장을 맡았던 제9보병사단이 관할하는 곳이기도 하다. [52] 불과 5일 전 친동생인 전경환이 숨졌을 때도 조문을 가지 못하고 근조 화환만 보냈다고 한다. [53] 국가장법에 따라 문재인 정부에서는 서거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 [54] 다만 청와대에서는 '문재인 대통령' 이름으로 된 근조 화환을 빈소에 보냈다. [55]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사망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빈소에 조문은 했지만 영결식에는 불참했다. [56] 아무리 최태원 회장이 부인 노소영 관장과의 이혼 문제로 인해 노 전 대통령 일가와 현재 소원하다고 해도 아직 최태원 - 노소영 부부의 혼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고 최 회장도 상주 명단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최태원 회장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노태우의 사위이다. 해당 기자의 질문은 그런 기본적인 사항도 숙지 없이 기자일을 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정확히는 대타로 투입된 기자, 통칭 '풀러'가 노태우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도 없이 단톡방(통칭 '풀방')에서 나온 질문만을 고대로 읊었기 때문에 나온 해프닝이다. # 그러니까 기자들이 단체로, 노태우와 최태원이 무슨 관계였는지 아예 모르고 있었다는 뜻. 물론, 공식적으로 노태우의 사위로서 상주의 한 사람인 최태원이 10분 정도 조문을 하고 빈소를 떠난 상황 역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심지어 빈소에서도 부인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나왔다. [57] 과거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과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 때도 서울광장 등에 분향소가 차려진 바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때는 서울역 광장과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분향소가 차려졌으나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설치한 덕수궁 대한문 앞 시민 분향소를 더 많이 찾았다. [58] 대구는 고향이라서 그런지 분향소 뿐만 아니라 현수막까지 걸어놨다. [59]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대로12길 74 [60] 그리고 공교롭게도 한 달 뒤인 11월 27일에는 전두환도 같은 곳에서 화장되었다. [61]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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