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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1:19:36

2002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연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세기
19세기 20세기 21세기 22세기 23세기
밀레니엄
제2천년기 제3천년기 제4천년기

세계 각 지역의 표기
서기 2002년
대한민국 84년
단기 4335년
불기 2546년
간지 신사년 ~ 임오
주체 91년
대만 민국 91년
일본 헤이세이 14년
( 황기 2662년)
이슬람력 1422년 ~ 1423년
히브리력 5762년 ~ 5763년
페르시아력 1380년 ~ 1381년
에티오피아력 1994년 ~ 1995년
로마 숫자 MMII년
1. 개요2. 설명
2.1. 기후2.2. 이라크 전쟁 준비2.3. 2002년 가요계2.4. HD 방송의 도입2.5.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개최2.6. 제2연평해전 발발2.7.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전성기
3. 사건
3.1. 실제
3.1.1. 1월3.1.2. 2월3.1.3. 3월3.1.4. 4월3.1.5. 5월3.1.6. 6월3.1.7. 7월3.1.8. 8월3.1.9. 9월3.1.10. 10월3.1.11. 11월3.1.12. 12월
3.2. 가상
4. 탄생5. 사망6. 데뷔
6.1. 가수6.2. 배우6.3. 스포츠6.4. 만화계6.5. 예능인6.6. 프로레슬링6.7. 아나운서6.8. 인터넷 방송
7. 은퇴/해체
7.1. 스포츠7.2. 음악계
8. 히트작
8.1. 영화8.2. 드라마/시트콤8.3. 가요8.4. 개그 코너8.5. 애니메이션8.6. 게임8.7. 특촬
9. 유행어10. 최초
10.1. 방영 프로그램 및 코너10.2. 인터넷 웹사이트
11. 출시 상품
11.1. 자동차11.2. 식음료11.3. 생활용품11.4. 화장품
12. 관련 문헌13. 달력14. 음력 날짜

1. 개요

2002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자 21세기 제3천년기의 두번째 해다.

2. 설명


21세기 첫 대규모 행사가 열린 해이다. 2000년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년도인 2002년은 현대 한국인들에게 1988년과 함께 상징과도 같은 해이며 열정과 흥분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현재까지도 한국인들 사이에서 손에 가장 꼽히는 기억에 남는 한 해로 2002년이 무조건 언급될 정도. 한국에서는 한일 월드컵 부산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1]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노무현 열풍과 대통령 선거 후보 단일화 문제, 현직 대통령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족 문제 등 임기말 김대중 정부의 2002년 정치권도 월드컵 다음으로 화젯거리였다.

지방선거는 한나라당, 대통령 선거는 새천년민주당이 각각 반씩 승리했는데, 특히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일방적인 승리가 예상됐지만 새천년민주당의 후보 경선 대회가 3월에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시작된 이래 선거 끝날 때까지 흥분과 이변으로 가득 찼다. 특히 당시만 해도 새천년민주당 내에서도 큰 존재감이 없던 노무현의 급부상이 결정적이었다.[2] 당시만 해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한 경험이 있고 정치 경력이 많은 이인제가 새천년민주당의 유력 대통령 선거 후보로 여겨졌지만, 국민 경선에서 노무현이 돌풍을 일으키며 결국 이인제는 중도 하차하고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 당시 노무현의 경선 과정은 현재까지도 정치 드라마로 불리며 종종 회자된다.[3]

국민경선에서 승리한 후 후보가 되었지만 지방선거와 8.8. 재보궐선거에서 패하는 등 노무현에게는 위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회창에게 지지율이 밀리며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자 노무현은 당시 월드컵으로 순식간에 대통령 선거 유력 주자로 올라선 국민통합21 정몽준과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투표 하루 전날인 12월 18일 밤 정몽준이 지지를 철회하며 위기가 닥쳐왔지만, 정몽준의 지지 철회가 오히려 진보 진영 지지자들의 결집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노무현은 이회창을 상대로 57만 표 차이의 극적인 당선에 성공한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나 희망돼지 같은 유권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4] 선거를 이끌었으며 인터넷을 중심으로 지지자들이 모이며 큰 역할을 해냈다. 서프라이즈 개혁국민정당, PC통신 나우누리 정치 게시판 등이 노무현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3김 시대로 칭해지던 대한민국 구 정치 세력과의 세대교체를 의미하기도 했으며, 실제 대통령 선거 2년 후인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김 중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김종필이 낙선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동교동계가 해체되면서 3김 시대는 완전히 대한민국 정계에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

빛이 있다면 어둠도 있듯이, 정치적으론 이용호 게이트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사건(홍삼게이트)이 터져 김대중 정부를 레임덕 상태로 몰아넣었고 김대중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2002년의 출생아 수는 총 496,911명으로 출산율 1.18명을 기록하였으며, 최초로 출산율 1.3명 미만으로 진입했다. 에코붐 이후 꾸준히 감소하던 출생아 수와 출산율이 이 해부터 초저출산 수준이 되었으며, 또한 통계 집계 이후 처음으로 40만명대를 기록했다.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의 만성적 문제가 된 저출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점이 된 해이며, 2002년~2016년 사이 한국 사회의 출산율은 1.1~1.2명대와 출생아수 40만명대를 기록했다. 정부는 저출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부터 출산장려정책을 도입했다.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의 여러 정책 발표를 통해 출생아 수를 높이기 위해 애썼지만, 2007년 황금돼지띠 열풍과 2012년 흑룡띠 붐 당시의 일시적인 상승을 제외하면 초저출산의 수치를 벗어나지 못했다.[5][6] 출산율의 감소는 결국 2017년 출생아수가 30만명대로 떨어지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며 2020년대에 들어서는 처음으로 인구의 자연감소가 시작되는 등 저출산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2002년의 출생아 성비는 109.9를 기록, 21세기 출생아 중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이는 2000년대 초반까지 만연했던 남아선호사상과 여아 낙태 문제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7] 이후 저출산이 심해지고 출산장려정책이 진행되면서 남아선호사상은 점차 시들어갔고,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정상 성비인 106.0을 회복했다.

사회적으론 월드컵 열기로 인해 젊은 남녀들이 불을 지르는 경우가 잦아 10대 성폭행 비율도 가장 높았던 해이며, 2002년 6월 월드컵 기간으로부터 약 10개월 뒤인 2003년 3월~4월에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일시적으로 급상승하기도 했다.[8]

10월에는 서울지검에서 범죄 혐의자가 물고문으로 숨져 현직 검사가 구속되고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옷을 벗었는데,[9] 그것도 군사독재가 아닌 민주국가에서 벌어진 터라 충격을 주었다. 날씨 상황의 경우 가히 최악이라 볼 수 있는 해인데 일조시간이 기록적으로 적어서 서울특별시의 경우 거의 1년 내내 납량이 이어졌고 사상 최악의 황사가 발생한 해다.[10] 이 해부터 황사 경보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 해에는 김해시에 큰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났다.[11]

프로야구는 사상 최저 관중을 기록하여[12] 엄청난 불황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김성근 전 감독이 이끄는 LG 트윈스가 준PO를 시작으로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가는 돌풍을 일으켰고, 21시즌 간 KBO 한국시리즈 한정 콩라인에 묶여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가 9회 말 이승엽, 마해영의 드라마틱한 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극적으로 콩라인에 탈출함과 동시에 염원이던 창단 첫 KBO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여 화제가 됐다. 그 전에 대구 오리온스 서울 SK 나이츠를 꺾고 프로농구 우승을 차지하면서, 2002년은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대구광역시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스포츠 팀 2개가 우승한 해이기도 하다.[13]

그리고 월드컵이 끝나가나 싶더니 제2연평해전으로 남북관계가 순식간에 경직되었으며, 2~3년 전 노근리 학살사건, 매향리 사격장 파동에 이어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아폴로 안톤 오노 김동성 선수 간 논란과 여중생 장갑차 압사사건으로 반미 감정이 또다시 폭발했다. 그리고 이 반미 정서는 12월 촛불집회에서 절정을 이뤄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 봄까지 계속됐으며, 현대사학계의 원로 서중석 교수는 2005년 저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통해 미군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에 대해서 '휴머니즘의 발로이자 직접민주주의의 발현'이라 평했다.

국제적으로는 일단 전년도 9.11 테러로 인하여 전세계가 계속 테러의 위협에 떨어야 했다.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조지 W. 부시가 이 해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이란, 이라크, 그리고 북한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무자비한 테러와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시금 전세계에 표명하였다. 그리고 북핵 위협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기도 한 해였다. 북한 IAEA 사찰단 전원 추방을 결정하고 핵시설 재가동화를 공식화하고, 제2차 연평해전을 터뜨려 전쟁 직전으로 갈 뻔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김대중 정부는 화해/협력노선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때 남북한 동시입장 등으로 그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 부시가 타도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담 후세인은 같은 해 10월 대선에서 100%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다음 해 이라크 전쟁으로 후세인 정권은 무너지게 된다.

다만 당시에는 북핵위기보다는 오히려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의 영향으로 반미가 부각되어 2000년대 초반의 반미감정이 절정에 이른 해였다. 2000 남북정상회담의 여파가 남아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좋았던 점도 있다.

테러 위협과 북핵 등으로 인하여 증시, 유가, 달러에 금값까지 떨어지는 그 경제 불황 속에서도 전세계 주택시장은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했다. 증시 침체 여파로 주식을 버린 투자자들이 주택 시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의 주택 가격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로 저금리 정책과 마구잡이식 부동산규제 완화 때문에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22.5%, 전국은 16.4%나 상승했다.

2000년부터 지상파 3사에서 실험적으로 도입된 HD 방송은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본방송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는데,[14] 가요순위 등 일부 프로그램이 HD로 제작된다.[15] 특히 SBS의 경우 2002 한일월드컵 주요 경기를 HD 방송으로 생중계해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전략을 구사하였고, 화면 품질에 대한 시청자들의 호응도가 매우 좋아서 월드컵 이후 한국 대표팀의 HD 방송 중계영상을 DVD판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HD 방송은 시작됐어도 정작 HD 방송을 볼 수 있는 HDTV 보급율은 단 2%에 불과해 HD 방송의 의미가 많이 없었다.[16] 홍보하려는 노력이 적었고 이 당시까지만 해도 디지털 TV의 가격이 상당히 비싼 데다가[17][18] 1980년대 초반처럼 아예 흑백에서 컬러로 볼 수 있는 식이 아니고 채널도 더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닐 뿐더러 화질이 좋다는 점 정도라서 메리트가 적었기 때문이다.[19] 또한 스튜디오 방송 일부에 한정되어 HD가 편성되고, 그마저도 SD 화질과 병행되어 방송되는 등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투명드래곤이 연재되고 긴급조치 19호, 아 유 레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 충무로의 재앙급 영화가 나타나는 등 문화계에 있어서 풍성한 한 해이기도 하다.

영화 부문에서는 전세계적으로 호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파이더맨,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 맨 인 블랙,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초대형 블록버스터의 속편 등이 이 해에 몰아서 나왔다. 덕분에 전세계 영화 관련 매출은 2001년 643억 달러에서 11.8% 증가한 719억 달러로 당시 역대 최대 수치를 기록하기도 했다.[20]

드라마 부문에서는 배우 장서희의 출세작인 인어 아가씨가 6월 24일부터 MBC에서 방영되었고, 김두한의 일대기를 그린 야인시대가 7월 29일부터 SBS에서 방영이 시작되었다. 2002년 상반기가 월드컵 열풍이라면 하반기는 인어 아가씨 야인시대 열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장서희는 2002년 인어 아가씨를 통해서 엄청난 연기력으로 열연을 펼치면서 시청자들이 복수극에 몰입도를 높이게 만들면서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고, 여기서 장서희가 열연을 한 역할인 주인공 '은아리영'의 각종 대사들도 이해에 여러 차례 화제가 되었을 정도였으며, 그 해에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까지 수상하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그녀는 복수극의 달인이 되어버린다. 야인시대는 드라마의 주 배경이 바로 청년 김두한 일제강점기 시절 모습이다. 당시 2002년도는 월드컵 여파로 인해 국민들이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는데, 바로 드라마 야인시대가 이러한 애국심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야인시대에서 유행하는 패션 또한 화제였다. 중절모와 트랜치코트 등등 모든 백화점이나 매장에 가면 손쉽게 볼 수가 있었으며, 김두한을 다룬 학습만화책들도 불티나게 팔렸다.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야인시대 놀이가 유행되어 많은 우려도 남기기도 하였고, "긴또깡", "오야붕" 등등 많은 유행어 또한 화제였다. 또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청년 김두한 역을 맡아 열연을 하였던 안재모는 2002년 하반기에 최고의 스타로 떠올라 2002년 S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는 쾌거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두 배우보다는 잘 부각이 되지는 않았지만 유동근 이미연에서 최명길로 극 도중에 배우가 교체되면서 큰 좌초를 겪고 있었던 명성황후에서 정말 열연을 보여주면서 그 해 K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한다.

게임계에서는 시장 전체적으로 희비가 엇갈린 모습,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이슈들이 있었다.

먼저, 1980 ~ 1990년대에 흥했던 오락실 게임 시장에서는 2000년을 정점[21]으로 규모가 감소되어 왔는데 이 해부터는 아예 사양 산업으로 전락됨으로써 일부 오락실들만 살아남고 나머지 수많은 동네 오락실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다만, 소형 기체 형태의 문방구 게임기 덕분에 장소는 달라도 동전 넣고 조이스틱과 버튼으로 게임을 즐기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문화만큼은 바다이야기 사태가 지난 다음인 2008년까지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2000년부터 국산 게임 시장의 주도권을 잡은 온라인 기반의 PC 게임 시장은 더욱 성장하는 시기였으며, 수많은 게임 개발 업체들이 너도 나도 온라인 기반 PC 게임에 도전하는 경향은 여전했다. 악튜러스를 개발했던 그라비티 라그나로크 온라인, 2002년 대한민국 게임 대상을 수상받은 SD EnterNET의 네이비필드, 드래곤플라이 카르마 온라인, 임진록 온라인 거상, 아스가르드 등이 정식서비스에 돌입했으며 테일즈위버의 오픈 베타 서비스도 실시했다. 그 해 연말에는 마비노기의 제작 발표가 공개되어 많은 사용자들에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반면에 패키지 기반의 PC 게임은 2002년 7월 3일에 출시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워크래프트 3가 화제가 되었지만 이 해를 기점으로 국산 패키지 PC 게임 시장은 뚜렷한 명작을 내놓지 못 하고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침체기를 겪었던 가정용 콘솔 게임 시장에서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해였는데 2002년 2월 22일에 CD DVD를 매체로 하는 플레이스테이션 2가 국내에 정식 발매됨으로써 8년에 가까운 침체기에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년 12월에는 게임큐브, 엑스박스도 정식 발매되었고, 특히 PS2 타이틀들은 액션, RPG, 레이싱 등 다양한 타이틀들이 선보이면서 철권 4, 메탈기어 솔리드 2, 귀무자 2, 진삼국무쌍 2 같은 인기 타이틀의 자막 한국어화 혹은 한국어 음성 더빙 혹은 파이널 판타지 10과 같은 대작 타이틀에 당시 최고 인기가수 중 한 명이었던 이수영 얼마나 좋을까의 한국어 번안판 발표 등 현지화 작업이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는 그 해 도쿄 게임쇼에서 스타크래프트 고스트를 3대 콘솔 타이틀로 만들 것을 발표해 화제가 되었지만 정작 개발은 중단된 상태.

e스포츠 쪽에서는 먼저 온게임넷 스타리그 2002 NATE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부터 전용준 캐스터가 투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엄전김 중계진 조합이 완성되고 이는 옥션 올킬 스타리그 2012까지 유지된다. 또한 2002 NATE배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는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에 묻혀버리면서 역대 스타리그 결승전 최저 관중을 기록할 정도로 흥행에 실패한[22] 반면에 다음 시즌인 2002 SKY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 임요환의 전승 우승이냐, 박정석 가을의 전설이냐?'라는 떡밥이 제대로 흥하면서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 결승전 관중이 공식 2만 5천명으로 스타리그 최다 관중 1위 기록을 세우면서 다시 중흥의 시기를 맞는다. 반대편 MBC GAME의 전신인 Gembc는 정식으로 KPGA투어를 런칭하여 정규 개인리그를 본격적으로 개최하였고, 이 KPGA투어는 곧 2003년 경에 MBC GAME 스타리그로 정식으로 개편되면서 양대 리그 체제의 토대가 마련된다. 또한 이 해에 게임TV의 전신인 GhemTV도 개국을 하게 되고 여기서도 GhemTV 스타리그를 개최하면서 다음 해 3회 대회까지 개최되지만 결국 온게임넷 스타리그 MBC GAME 스타리그에 비해 롱런을 하지 못하고 2003년 경에 폐지되고 만다.

또한 이해에는 우리가 많이 쓰는 네이트 드라이브(현 TMAP), 네이버 지도가 출시되어 경로를 찾을 때 한층 더 편리해졌고, 중형~고급차의 전유물이던 내비게이션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IT계에서는 PC통신 인터넷의 공존, 전환기로 여겨진다. 2002년 9월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가 1000만 명을 돌파하며 2000년부터 떨어지고 있던 PC통신의 영향력은 더욱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PC통신이 아예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넷츠고 나우누리 정치게시판 등이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 다음 해인 2003년 들어서자마자 하이텔이 기존의 VT 기반 PC통신 서비스와 단절된 완전한 인터넷 커뮤니티로의 전환을 발표하였고,[23] 이에 따라 천리안 나우누리도 인터넷 커뮤니티로 전환했으며 넷츠고 역시 라이코스 코리아와 합병해 사라지면서 PC통신은 몰락을 맞게 되었다. 2004년 천리안이, 2007년 2월에는 하이텔이 PC통신 서비스를 완전 종료하였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나우누리마저 2013년 1월 서비스를 종료하였다.

이해 9월에 네이버 지식인 서비스가 시작되었다.[24]

철도계에서는 서울지하철공사의 초저항 전동차가 완전히 퇴역한 해이다.

이 해의 고등학교 신입생부터[25] 제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과정이 적용되었으며 이 해의 중학교 신입생[26]부터 의무교육이 중학교까지 확대되고 제7차 교육과정이 2학년[27]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초등학교 제7차 교육과정이 5~6학년으로 확대되었다.[28]

아폴로눈병이 초등학생ㆍ중학생ㆍ고등학생들 사이에 대유행한 해이기도 했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2002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이었으며,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2002년 올해의 한자는 '帰 (돌아갈 귀)'였다.

국제연합에서는 이 해를 '세계 생태관광의 해'와 '세계 산의 해', '문화유산의 해'로 지정했다.

마지막으로 5월 공휴일이 없었던 해이다. 어린이날(5월 5일)과 부처님오신날(5월 19일)이 모두 일요일이었으며 그 영향으로 4월 5일 식목일 이후 6월 6일 현충일까지 휴일이 없었다. 2019년도 이럴 뻔했으나 어린이날에 대체휴일이 생겼다.

여러 빅이벤트와 2000년대 초반의 문화 때문인지 응답하라 시리즈의 차기 작품에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해이기도 하다.

주말에 겹치는 공휴일은 어린이날, 부처님오신날, 추석 연휴 중 2일 등 총 4개이다.

2.1. 기후

1~4월에는 이상 고온이, 8, 10, 11월에는 이상 저온이 매우 심했다.

1월 초에는 한파가 찾아왔지만 1월 중하순(특히 중순)은 역대 1월 중 이상 고온이 2019~2020년과 함께 가장 심했는데, 봄 수준의 날씨에 폭우도 내렸다. 겨울철로서는 드물게 최저 기온이 10°C 이상인 지역이 많았다. 특히 제주도는 1월의 늦봄 날씨였는데, 제주시는 15일 최고 기온 21.4°C, 서귀포시는 16일 최고 기온 20.7°C를 찍었다.[29] 이 영향으로 기상 관측 이후 두 번째로 1월 기온이 전달보다 높게 나왔다. 그 여파로 2월부터 4월까지 이상 고온이 찾아왔고 5월도 평년보다 높았다.

6~7월도 평년보다 약간 높았고 7월 말에는 폭염이 있었으나 8월이 되자마자 비가 자주 많이 내려 폭염이 약해지면서 2014년처럼 이상 저온이 찾아왔다. 8월 7일에 중부 지방에서 100mm~300mm나 되는 집중호우가 내렸고, 원주에는 305.0mm가 되는 폭우가 쏟아져서 원주를 비롯한 영서 남부 곳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했으며 도로와 철도에 토사가 덮치는 등 피해가 컸다. 서울, 수원, 천안에는 단일 강수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8월 6일의 강수량을 합해서, 서울은 329.5mm, 수원은 334.5mm, 천안은 337.5mm가 되는 비가 내렸으며, 집중호우가 쏟아진 경기 남부의 경우에는 하천 범람과 함께 농경지와 도로가 침수되거나 철도가 유실되는 등 교통망이 마비된 적이 있었다. 여기에는 태풍 루사까지 겹쳤다.

다행히도 9월은 서울의 경우 평년수준이거나 조금 높았으나 전국은 다소 낮았으며 10월이 되자 바로 늦가을이 되는 등 추워졌으며 11월에 초이상 저온과 12월의 이상 고온까지 겹쳐서 11월과 12월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서울 기준 월별 평균기온은 다음과 같다.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서울 월평균기온(°C) 0.3 2.9 7.6 13.6 18.2 22.2 25.2 24.2 21.6 12.8 4.0 1.7 12.9
평년대비 편차(°C) 2.8 3.2 2.4 1.5 0.8 0.3 0.3 -1.2 0.8 -1.6 -2.9 1.5 0.7
연 최저기온 연 최고기온 연교차
-12.0 °C(0103) 34.8 °C(0728) 46.8 °C
[순별 기온/펼치기·접기]
단위: (°C)
평년대비 편차는 순별 평년으로 비교함
  • 1분기
1월 상순 1월 중순 1월 하순 2월 상순 2월 중순 2월 하순 3월 상순 3월 중순 3월 하순
서울 순평균기온 -3.1 5.8 -1.8 2.8 0.7 5.7 5.2 9.3 8.4
평년대비 편차 -1.3 8.6 1.2 4.9 0.4 4.7 2.1 4.1 1.2
  • 2분기
4월 상순 4월 중순 4월 하순 5월 상순 5월 중순 5월 하순 6월 상순 6월 중순 6월 하순
서울 순평균기온 12.0 13.2 15.5 17.2 17.4 19.7 23.2 21.5 22.0
평년대비 편차 2.1 1.1 1.2 1.4 0.3 0.6 2.7 -0.7 -1.0
  • 3분기
7월 상순 7월 중순 7월 하순 8월 상순 8월 중순 8월 하순 9월 상순 9월 중순 9월 하순
서울 순평균기온 24.6 24.3 26.7 24.6 23.0 25.0 24.1 20.6 20.0
평년대비 편차 0.8 -0.3 0.5 -1.5 -2.9 0.8 1.2 -0.1 1.1
  • 4분기
10월 상순 10월 중순 10월 하순 11월 상순 11월 중순 11월 하순 12월 상순 12월 중순 12월 하순
서울 순평균기온 15.6 16.3 7.1 5.3 3.3 3.5 3.9 1.2 0.1
평년대비 편차 -1.3 1.6 -4.7 -4.8 -3.6 -0.2 2.0 1.1 1.3

2.2. 이라크 전쟁 준비

2002년 국제외교의 가장 큰 화제는 바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여부였다. 직전 해 9.11 테러로 꼭지가 돌아버린 미국은 9.11을 배후/지원한 세력을 종말시키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한달 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켜 탈레반 정권을 축출시켰다. 탈레반 정권이 축출되자 미국은 목표를 곧바로 이라크로 변경하고 사담 후세인에 대한 축출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2002년 신년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이 북한, 쿠바, 이란, 이라크 4개국을 '악의 축' 이라고 부르며 선언한 것이 시작이었고, 이 후 한 해 내내 미국은 이라크 침공을 위한 대내외적 준비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9월, 9.11 1주기를 맞아 추모식에 참석한 부시는 추도사를 통해 이라크 침공 계획을 직접적으로 발표하였다. 다음 달인 10월, 부시는 의회 연설을 통해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숨겨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점을 들어 무력사용을 허가하는 법안 통과를 국회에 요청했다. 상/하원 투표까지 거쳐서 가결되었고,[30] 이에 사담 후세인은 99.9%의 당선율로 대통령에 재선되는 것으로 미국에게 응대했다. 이 때부터 미국 CIA와 영국의 M16은 이라크전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날조와 거짓 정보로 쓰여진 보고서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MBC 서프라이즈에서도 이라크 보고서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왔고, 베트남 전쟁에서의 삽질과 함께 미국의 전쟁사에 아주 안 좋은 반면교사로 현재까지도 뽑히고 있는 중.

결국 이듬해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였고, 2주만에 바그다드를 함락해 후세인 정권을 축출시켰다. 이로써 후세인의 철권통치는 24년만에 막을 내렸고 그는 아들들과 함께 미군의 추격을 받아 쫓기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후세인의 축출로 20세기의 잔재까지 완벽히 청산되었고 이라크 주민들은 평화가 올 것이라 기뻐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고 아무런 명분없이 이뤄진 전쟁 때문에 이 후 20여년간 이라크 및 중동사회는 내전으로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미군은 8년 뒤인 2011년 전쟁 승전을 선언하고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시켰으며, 이라크는 민간정부의 통치 안에 어느 정도 정착하는데 성공했다.

9.11 테러와 아프간 / 이라크 전쟁을 통해 사실상 20세기에서 21세기로 세기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유는 중동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탈레반 / 후세인 두 정권이 완전히 무너졌고 이는 곧 2020년대 현재까지도 중동 지역을 휘감고 있는 내전의 시작이 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라크 전이 나기 전인 2002년이 국제 정세로 보면 20세기의 잔재가 남아있는 마지막 해라고 봐도 무방하다.

2.3. 2002년 가요계

2002년에는 1세대 아이돌들의 마지막 전성기로 꼽히는 해임과 동시에 1세대 아이돌들이 해체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31][32] 젝스키스 H.O.T.는 각각 2000년 5월, 2001년 2월 해체되었고, 끝까지 남아있던 1세대 걸그룹 S.E.S., 핑클 역시 2002년을 끝으로 해체하거나 활동을 중단했다.[33] 그 뒤를 이어 데뷔한 아이돌 그룹들인 밀크, 신비, 블랙비트, SWi.T, LUV, Q.O.Q 등이 하나 같이 딱 이 해에 앨범만 내고 소리소문없이 해체 내지는 개인활동을 하는 수순을 밟았다.[34] 2007년 원더걸스, 소녀시대가 데뷔하고, 걸그룹 전성기가 시작된 2009년~ 2012년 이전까지 2002년 ~ 2007년 초의 대한민국 걸그룹 시장은 침체를 맞았다.[35] 그리고 2007년 ~ 2008년까지 가요계는 과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HOT, 젝스키스, SES, 핑클이 해체한 사이 남은 1세대 아이돌 그룹인 베이비복스는 '우연'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36]

그러나 현재 힙합계의 레전드라 불리는 리쌍, MC스나이퍼, R&B가수로 손꼽히는 휘성, 후에 아시아스타라 불리는 가 데뷔한 해기도 하다. 이 해 지상파 방송 3사 가요대상은 일본에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미 엠넷 뮤직비디오 페스티벌에서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과 서울가요대상 대상을 수상한 보아와 전국적으로 '장나라 신드롬'을 일으키며 전국민적으로 사랑을 받고 KMTV 코리안 뮤직 어워드 대상을 받은 장나라의 여인천하 대결이었는데, 결국 장나라는 KBS와 MBC에서 대상을 차지하고, 보아는 SBS 한 곳만 가져가게 되면서 최종적으로는 장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참고로 골든디스크 시상식 대상은 이 차지하였다.

음반 시장이 마지막 불꽃을 피웠던 시기였다. 음반시장이 음원시장보다 점유율이 높았던 마지막 해였다. 직전 해부터 음반판매량은 떨어지고 있었고 월드컵까지 겹치면서 비록 밀리언셀러는 나오지 않았지만 2001년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이미연 베스트셀러와 god 4집, 김건모 7집의 판매량을 제외하면 2001년과 비슷했다. 이후 음반시장은 그 다음해인 2003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고, 음원시장에 점유율을 추월당했다.

다만 해외시장에선 나름 선전했던 때였는데, 보아는 일본에서 첫 정규앨범을 내 일본 음반판매 1등을 기록하여 승전보를 울렸으며, 신화, 윤미래, 조성우 등이 싱가포르, 미국, 일본 등지에 각각 진출하여 한류열풍의 밑거름을 다지는 시도를 했다. 그 외에 중국 인민라디오방송(CNR)과 일본 스카이퍼펙TV에서도 한국 가요 관련 프로그램이 방영되면서 아시아에서 한국 가요의 위상이 점차 높아졌다.

음반시장의 불황과는 별개로, 2002년에 활동한 가수들의 라인업을 보면 가히 별들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1세대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대거 활동했던 시기였다. S.E.S., 핑클, 신화, god, 베이비복스는 물론이고 장나라, 이수영, 김현정, 이정현, 엄정화 등 솔로 여가수들과 거북이, , 코요태, [37] 등 1세대 혼성그룹들과 Y2K 등 세기말을 대표했던 가수들도 활동을 했었다. 1세대 보이그룹이었던 H.O.T., 젝스키스 멤버들도 솔로로 활동하며 왕성한 인기를 누렸던 시기이기도 했다.

빛이 컸던 만큼 암흑도 있었는데, 연초부터 인기 가수였던 유승준이 미국 시민권을 받으면서 병역기피 의혹이 일자, 법무부가 입국을 거부하면서 대중들 간에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며 이에 따른 앙금은 20년 넘게 지나도 메워지지 않고 있다.

2.4. HD 방송의 도입

한편 HD 방송이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상용화되기 시작됐다. 지상파 3사에서 자사의 일부 프로그램을 HD로 시험 편성해 운영하기 시작했던 것. 가장 적극적으로 HD 방송을 밀었던 방송사는 바로 SBS로, 예능/교양 프로그램 등 일부를 HD 방송으로 제작하여 화제를 모았다.[38] SBS 인기가요, 생방송 음악캠프, 행복채널, 열린음악회, TV쇼 진품명품 등 일부 녹화 예능/교양 프로그램들을 위주로 편성되었으며 상당수의 프로그램들은 SD/HD가 혼합된 구조로 방송되었다. 2010년대에 대중화된 디지털 방송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셈. 이 때문에 S.E.S., 핑클, god 등 이 시기까지 활동했던 1세대 아이돌들은 HD 영상이 드물게 남아있다.

다만 이 시기는 시험 방송 수준으로 HD 방송이 편성이 뜸했고, 디지털 TV도 거의 보급되지 않았으며 수도권 외에는 HD가 송출되지 않아 사실상 유명무실한 수준에 가까웠다. 참고로 디지털 방송 전국화는 2006년에 완료되었으며,[39] 200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HD 방송 편성이 늘어 2010년대 초반에 완전히 대중화되었다. 참고로 아날로그 방송 완전 종료는 2013년 1월 1일에 이루어졌다.

2.5.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개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골 세레머니 모음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2002년의 기억은 바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4강 신화였다. 2001년까지만 해도 사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크지 않았다. 2000년 말 허정무가 경질되고 외국인 감독을 찾던 대한축구협회 거스 히딩크와 높은 계약금으로 계약했지만, 히딩크호는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프랑스, 체코전에서 두 번의 5:0 패배를 만들면서 국민들에게 신임을 잃는다.[40] 2002년 1월 골드컵까지 위태위태하던 그들은 2002년 5월 스코틀랜드전 4:1 대승, 잉글랜드와의 평가전 1:1 무승부,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2:3으로 석패하며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 라는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의 비장한 발표와 함께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그 후 대한민국은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을 상대로 2승 1무 1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했고 16강 이탈리아전에서는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안정환의 골든골로 2:1 승리를 거두고, 8강 스페인전에서는 이운재의 선방으로 승부차기에서 5:3 승리를 거두며 대한민국 축구 사상 첫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얻는다. 이 시기 4강 진출보다도 더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은 바로 대한민국의 응원 문화로 서울특별시청 광화문, 한강시민공원 등을 가득 채우고 응원하는 국민들과 붉은 악마의 모습은 외신들에게도 엄청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월드컵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서울시청과 광화문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모든 거리와 술집, 공공장소는 길거리 응원을 하는 인파로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으며, 축구 국가대표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41] 거스 히딩크는 대회 종료 후 명예국민 자격을 받았고 대표팀 선수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별 허가로 전원 군면제를 받았다. 또한 월드컵 폐막 다음 날인 7월 1일은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포르투갈전에서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파울루 벤투가 선수로 뛰었다.

월드컵의 인기는 폐막 이후 10월까지 계속되었다. 월드컵 이후 월드컵 기념우표와 기념 책자, 선수들의 화보집 등은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남북축구경기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도 홍명보가 성화를 들었고, 거스 히딩크가 참석했을 정도였다. 이런 월드컵 열기는 2002년 11월 20일 브라질 전을 끝으로 황선홍, 홍명보의 은퇴식과 히딩크호가 공식적으로 해체되면서 막을 내렸다.

K리그의 인기 역시 K리그 역사에 손꼽히는 시즌으로 남을 정도로 올라갔다. 1999년 이후 2000년~2001년 동안 잠시 내리막길을 탔던 K리그는 2002년 월드컵 폐막 후 7월에 개막한 뒤 275만 관중을 동원하면서 역대 K리그 관중 수 2위를 달성했다. 월드컵 스타들이 포진해있던 안양 LG 치타스, 포항 스틸러스, 전남 드래곤즈, 부천 SK 등은 특히 더욱 인기가 많았다. K리그 소식이 스포츠 뉴스 뿐만 아니라 각 방송국의 메인 뉴스에도 보도됐을 정도였으니, 당시 국민들이 축구에 대해 가지는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알 수 있다.

또한 축구 관련 자선 사업, 후원 방송 등도 많이 지상파에서 방송되었다. 말 그대로 2002년 한 해가 그냥 축구로 미친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음식점에서도 직장에서도 축구 경기에 집중했었고, 어린이집에서 고등학교, 그리고 직장에서도 일찍 마치거나 단체로 버스타고 가서 월드컵을 봤을 정도였다. 결혼식장은 당연했지만, 아이러니하게 고인의 상을 치르고 있는 장례식장에서도 월드컵을 봤었다. (요즘 같았으면 고인과 가문 모독이지만.) 그리고 치킨 피자 중화요리 등 외식 배달 비율도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보통 대한민국에서 아무 수식어 없이 '월드컵 열린 해'라고 하면 2002년을 가리킨다. 심지어 2002년생들조차 본인들 태어난 해를 '월드컵 열린 해요'라고 소개하기도 할 정도니.

2.6. 제2연평해전 발발

월드컵 3·4위전 열기로 뜨거웠던 2002년 6월 29일, 서해에 위치한 연평도 부근에서 북한 해군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한 해군을 향해 포격 도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윤영하 대위, 황도현 중사, 조천형 중사, 서후원 중사가 현장에서 전사하였으며 박동혁 병장과 한상국 중사는 중태에 빠져 2개월~3개월간 치료를 받다가 전사하였다. 또한 18명의 장병들이 부상을 입고, 참수리 357호가 반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1999년 제1연평해전 이후 3년 만의 대남 도발이었으며, 이 사건 때문에 당시 평화 무드로 가던 남북관계가 잠시 악화되었다. 월드컵 열기로 한창 달아오르던 시기에 벌어진 참극이었기에 시민들이 느끼는 충격과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NSC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해 북한의 대응을 규탄하였고, 국방부 역시 북한의 도발을 정전협정 위반으로 규정하고 북한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및 재발방지를 촉구했다. 이틀 뒤인 7월 1일 국군수도병원에서 합동 영결식이 열렸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월드컵 결승전 참석차 일본으로 출국한 상태였기에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했고 대신 7월 23일 서해교전 유가족들을 청와대로 불러 면담을 하며 위로했다. 일본 정부 역시 월드컵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며 비난 성명을 냈고, 북한의 우방국인 중국 역시 연평해전을 북한의 도발행위로 못 박으며 깊은 우려의 뜻을 나타냈다.

2000년대에는 '서해교전'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나, 이후 1999년 발생한 제1연평해전과 함께 제2연평해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현재까지 추도식도 이 이름으로 열고 있다. 2015년에는 제2연평해전을 다룬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하기도 했다.

2.7.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전성기

1990년대 말부터 어도비 플래시 플레이어로 제작된 국산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엽기송 대부분은 물론 당시 야후! 꾸러기 쥬니어네이버에 올라와있던 플래시 애니메이션과 게임 대다수가 2002년~2003년 전후로 제작되었다.[42]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로 발돋움한 이유로는 인터넷 홈페이지의 발달과 대중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열풍, 교육용 매체의 애니메이션화, 2000년 제작된 마시마로의 대흥행을 들 수 있다.

비단 어린이용 플래시 뿐만 아니라 성인층을 겨냥한 풍자 애니메이션도 제작되었으며, 오인용 연예인 지옥은 사회 풍자는 물론 군필자들의 추억을 겨냥하며 군대를 소재로 한 여러 예능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잠깐뿐이었다. 오인용의 장석조 감독이 밝히듯 플래시 애니메이션 시장은 2002년을 전후로 침체되기 시작했고 이후 이지툰, UCC 열풍이 불면서 더 이상 전성기만큼의 인기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3. 사건

3.1. 실제

3.1.1. 1월

3.1.2. 2월

3.1.3. 3월

3.1.4. 4월

3.1.5. 5월

3.1.6. 6월

3.1.7. 7월

3.1.8. 8월

3.1.9. 9월

3.1.10. 10월

3.1.11. 11월

3.1.12. 12월

3.2. 가상

4.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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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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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데뷔

6.1. 가수

구성원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 한정으로 월드컵 열풍으로 온 국민 관심이 그쪽으로 쏠려 이때 데뷔한 가수들이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경우가 좀 있다. 휘성을 제외하면 그나마 살아남은 가수도 데뷔 당시보다 그 후에 빵 터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이브, 거북이, 서인영 등. 비도 데뷔곡보다는 그해 말 후속곡 '안녕이란 말 대신'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6.2. 배우

6.3. 스포츠

6.4. 만화계

6.5. 예능인

6.6. 프로레슬링

6.7. 아나운서

6.8. 인터넷 방송

7. 은퇴/해체

7.1. 스포츠

7.2. 음악계

8. 히트작

8.1. 영화

8.2. 드라마/시트콤

8.3. 가요

8.4. 개그 코너

8.5. 애니메이션

8.6. 게임

8.7. 특촬

9. 유행어

10. 최초

10.1. 방영 프로그램 및 코너

10.2. 인터넷 웹사이트

11. 출시 상품

11.1. 자동차

11.2. 식음료

11.3. 생활용품

11.4. 화장품

12. 관련 문헌

13. 달력

1월 2월 3월
1 2 3 4 5 1 2 1 2
6 7 8 9 10 11 12 3 4 5 6 7 8 9 3 4 5 6 7 8 9
13 14 15 16 17 18 19 10 11 12 13 14 15 16 10 11 12 13 14 15 16
20 21 22 23 24 25 26 17 18 19 20 21 22 23 17 18 19 20 21 22 23
27 28 29 30 31 24 25 26 27 28 24 25 26 27 28 29 30
31
4월 5월 6월
1 2 3 4 5 6 1 2 3 4 1
7 8 9 10 11 12 13 5 6 7 8 9 10 11 2 3 4 5 6 7 8
14 15 16 17 18 19 20 12 13 14 15 16 17 18 9 10 11 12 13 14 15
21 22 23 24 25 26 27 19 20 21 22 23 24 25 16 17 18 19 20 21 22
28 29 30 26 27 28 29 30 31 23 24 25 26 27 28 29
30
7월 8월 9월
1 2 3 4 5 6 1 2 3 1 2 3 4 5 6 7
7 8 9 10 11 12 13 4 5 6 7 8 9 10 8 9 10 11 12 13 14
14 15 16 17 18 19 20 11 12 13 14 15 16 17 15 16 17 18 19 20 21
21 22 23 24 25 26 27 18 19 20 21 22 23 24 22 23 24 25 26 27 28
28 29 30 31 25 26 27 28 29 30 31 29 30
10월 11월 12월
1 2 3 4 5 1 2 1 2 3 4 5 6 7
6 7 8 9 10 11 12 3 4 5 6 7 8 9 8 9 10 11 12 13 14
13 14 15 16 17 18 19 10 11 12 13 14 15 16 15 16 17 18 19 20 21
20 21 22 23 24 25 26 17 18 19 20 21 22 23 22 23 24 25 26 27 28
27 28 29 30 31 24 25 26 27 28 29 30 29 30 31

14. 음력 날짜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 양력 월일 일진
1월 임인 2월 12일 신해
2월 계묘 3월 14일 신사
3월 갑진 4월 13일 신해
4월 을사 5월 12일 경진
5월 병오 6월 11일 경술
6월 정미 7월 10일 기묘
7월 무신 8월 9일 기유
8월 기유 9월 7일 무인
9월 경술 10월 6일 정미
10월 신해 11월 5일 정축
11월 임자 12월 4일 병오
12월 계축 2003년 1월 3일 병자


[1] 투표율은 월드컵 때문에 당시 역대 최저였다. [2] 노무현이 처음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2001년 12월까지만 해도 그의 지지율은 고작 2% 정도였다. [3] 이인제는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8개월 후인 2002년 12월 자유민주연합으로 이적했는데, 이 때문에 이인제의 철새 이미지는 더욱 확고히 자리잡히고 말았다. [4] 이 때문에 노무현은 선거사상 최소 비용으로 당선된 후보가 되었다. [5] 출산 붐이 일었다는 2007년과 2012년 역시 2002년의 수치를 넘치 못했다. [6] 특히 카드대란으로 경기가 한창 심란하던 2004년~2005년의 출산율이 가장 심각했다. 특히 2005년생은 43만명을 기록해 2000년대에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했다. [7] 이 때문에 2002년생 여자의 인원은 저출산+최고 성비라는 조건 때문에 다른 세대에 비해 훨씬 적다. 한창 남녀성비 차이가 극심하던 90년대의 평균 성비가 110이었는데, 저출산으로 인구는 줄어들었지만 성비는 90년대의 평균과 똑같이 나오니 당연히 여성의 인구가 적을 수 밖에 없다. [8] 하지만 사회적인 저출산 기조를 막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소폭 상승에 그쳤다. 결과적으로는 2003년 전체 출생아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9] 물고문을 했던 검사는 홍경령 검사(연수원 21기)였고, 지휘계통에서 홍 검사의 상관이었던 서울지검 3차장인 정현태(연수원 10기) 검사는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까지 사표를 쓴 마당인지라 검사장 승진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정 차장검사는 알짜보직에서 해임되고, 고검으로 내쫓겼으며 사실상 권고 사직 수준이다. 이후 15년을 더 고검에서 재직하다가 2017년에 정년 퇴직했다. [10] 발생일수는 전년도인 2001년보다 적은 16회지만 역대 두 번째로 많이 발생했던 해다. 하지만 피해, 정도가 사상 최악의 황사였다. 국내산업 전체가 크게 피해를 입었고, 학교도 휴교령이 떨어졌다. 누런 황사에 뒤덮인 세상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고 현격하게 떨어진 가시거리 때문에 국내선 항공이 결항되고, 길거리 노점상과 상인들은 장사를 포기해야 했을 정도였다. [11] 중국 여객기 추락 사고, 김해 한림면 수해 등. 다음해인 2003년에는 대구광역시에서 태풍 매미 상륙, 대구 지하철 참사 등 큰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12] 한 경기 당 최저 관중도 이 때 깨졌다. [13] 준우승한 팀은 모두 서울 연고 팀이었다. [14] 첫 스타트는 SBS에서 2002년에 방영된 대망부터, MBC는 2003년 다모부터, KBS는 2004년 해신부터 도입되었다. [15] 2002년 당시 HD로 방송되던 프로그램은 < SBS 인기가요>, < 생방송 음악캠프>, < 열린음악회>, < 도전 1000곡>, <생방송 행복찾기>, <행복채널>, <아침마당> 등. [16] 현재 선명한 화질로 나오는 유튜브에 인기가요나 예능 프로그램은 모두 보정하거나 방송국에서 구해왔거나 개인이 DVR로 녹화한 자료로, 화질이 별로 좋지 않은 파일들은 방송을 녹화한 것이다. [17] 그래서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식 방식 대신에 유럽식 방식으로 쓰자고 제안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일단 당시 기준으로는 유럽식 디지털 TV의 가격이 미국식 디지털 TV에 비해 가격이 싼 데다 화질이 상당히 떨어지기는 했어도 다채널 구현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동방식도 미국식에 비해 우월했기에 그랬던 것. [18] 당시 TV가격은 아날로그< HD Ready(분리형)<내장형 순으로 비쌌다. [19] 그 당시 유일한 다채널 방송은 디지털 위성방송인 스카이라이프 뿐이였다. [20] 영화진흥위원회(세계 영화시장규모, 2006) [21] 비트매니아의 국내판인 비트스테이지, 댄스 댄스 레볼루션, 펌프 잇 업, EZ2DJ 같은 리듬 게임 열풍의 공이 컸다. 특히 펌프 잇 업이 가장 흥행해서 펌프 잇 업으로만 구성된 오락실인 펌프방이 성행했을 정도. [22] 심지어 이 대회의 흥행 실패로 변길섭의 우승 경력과 강도경의 준우승 경력도 덩달아 묻히게 되었다. [23] 하이텔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2004년 한미르와 함께 합병되어 포털사이트 파란이 런칭되었다. [24] 정식 개시일은 10월 1일. [25] 일반적으로 1986년생. [26] 1989년생 [27] 1988년생 [28] 당시 6학년인 1990년생이 제7차 교육과정을 초등학교부터 첫 혜택을 받게 되었다. [29] 참고로 2020년 1월 7일에는 아예 제주시의 평균 기온이 18도를 넘으며 1월 사상 최고 기온을 경신하게 된다. 이는 2020년 1~3월 이상 고온 문서 참조. [30] 이 당시 조 바이든, 힐러리 클린턴 등이 찬성표를 던졌고 버니 샌더스, 딕 더빈 등은 반대에 투표했다. 당시 무명 정치인이었던 버락 오바마 역시 이라크전에 반대했다. [31] 하지만 모든 1세대 아이돌이 해체된 것은 아니다. 베이비복스, 슈가, 쥬얼리, NRG 등의 1세대 아이돌들이 남아있었기 때문. 그러나 동방신기 등이 등장한 이후 크게 힘을 쓰지 못했고 쥬얼리를 제외하면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32] 1세대 아이돌은 2004년까지 전성기를 이루고 아이돌 시장에서 퇴장하였다. [33] S.E.S.는 2002년 12월 19일 해체했고, 핑클은 공식적으로는 해체하지 않았지만 정규 4집과 마티즈 2 광고모델 계약 해지 이후에는 완전체로서의 활동이 전무해 사실상 해체나 다름 없는 상태가 되었다. [34] 어디 인지도가 낮은 회사를 대표했던 그룹들도 아니고 현재 3대 기획사라 불리는 SM, YG, JYP에서 실력을 다졌던 그룹들이었다지만 당시 YG는 규모가 지금과 비교하면 훨씬 작은 소속사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빅뱅이 데뷔하기 이전 YG의 이름을 널리 알린 휘성은 이 2002년에는 신인이었고, SE7EN, 거미, 빅 마마 등의 또 다른 가수들은 2003년에 데뷔하였다. 그 이전에 지누션 원타임으로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엄연히 이들만으로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SM엔터테인먼트 DSP 미디어와 같은 위치에 있게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2007년 빅뱅 거짓말의 대히트와 2009년 2NE1의 센세이셔널한 등장, 그리고 2012년 싸이 강남스타일의 글로벌적인 인기로 YG는 현재 우리들이 잘 아는 대규모의 회사로 성장하였다. 즉 YG는 2007년 전까지만 보면 이름이 잘 알려진 중소기획사에 해당하는 시기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는 보이그룹의 현재진행형 레전드인 빅뱅도 2007년 거짓말이 히트곡으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35] 보이그룹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데, 2003년 말에 동방신기, 2005년에 슈퍼주니어, SS501이 데뷔해서 몇 년 동안 인기를 끌었다. [36] 참고로 2003년엔 1세대 아이돌 출신 그룹인 NRG도 '히트송'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37] 특히 샵은 2002년을 끝으로 해체했다. [38] 특히 SBS는 월드컵 기간동안 57경기 중 31경기를 HD로 방송하였다. [39] 2003년 PSB를 시작으로 HD 송출이 시작되었다. [40] 당시 거스 히딩크에 대한 비판 여론은 어마무지하게 높았다. 대부분 외국인 감독 하나가 들어와서 개최국 망신시킨다가 비판의 내용이었다. [41] 서세원쇼에서 서세원 김남일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희화화하다가 거의 핵폭탄급 비난을 받고 프로그램을 급히 종영시켰을 만큼, 그들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은 대단했다. [42] 다만 엽기송을 필두로 한 허무송, 패러디송 등 여러 플래시 노래가 유행한 건 바른손, 엔토이 등이 출범한 2003년 이후부터다. [43] 그리고 개막전 경기에서 그 유명한 세네갈 쇼크가 나왔다. [44] 역대 선거 중에서 스포츠 경기 때문에 관심이 떨어진 선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도 그럴것이 이시기는 우리가 16강 경쟁을 하고 있었고, 1승을 해서 국민적인 분위기가 매우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이기도 하고... [45]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유일무이한 골든골 승리다. 안정환은 월드컵 골든골은 역대 3번째다. 4년 전 프랑스 월드컵에서 16강전에서 프랑스의 로랑 블랑이 처음으로 넣었고, 본 대회에서 16강전의 세네갈의 앙리 카마라, 대한민국의 안정환, 8강전의 일한 만시즈가 그 주인공이다. 일한 만시즈는 3위·4위전에서 우리나라 상대로 2골을 기록했다. [46] 한편, 이탈리아는 36년 전의 월드컵에서 북한에게 져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이탈리아 팬들이 귀국 선수들을 향해 토마토와 날계란을 던지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47] 이 경기에서 홍명보는 월드컵 역사에 오래오래 남을 흑역사인 [48] 같은 펜싱선수인 남현희와는 다르다. [49] 역대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중 가장 큰 피해액을 남기고 갔다. 그러나 다음 년도에... [50] 해양사고 전반으로 따지면 도나 파즈호(여객선), 강아(江亞)호(증기선), 몽블랑호(화물선, 핼리팩스 폭발사고)에 이은 4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낸 사고이다. [51] 원래는 11월 27일 발매예정이었지만, 본격적으로 공장에서 생산하기 위해 제작된 마스터 디스크가 파손되는 바람에 일주일 연기되었다. [52] 실제 사용되는 글자는 신자체인 이다. [53] 2000년대 들어 선보인 3대 콘솔 게임기가 이 해에 모두 국내 출시되었다. [54] 작품 속 십투사들 각자 출생연도와 나이에서 밝혀졌다. [55] 작중 5화에서 2002년이라고 표기된 세가와 온푸의 사진집이 나온다. [56] 원래는 1998년 팬클럽으로 데뷔했음. 2002년 데뷔는 솔로 데뷔이므로 취소선을 침. [57] 이미 개리는 1996년 스머프, 길은 1998년 X-Teen으로 각각 데뷔했다. [58] 지난 2000년 SBS 7기 아나운서 윤현진, 박찬민, 이혜승과 같이 시험 본 이력이 있었는데, 혼자 떨어졌다는 후문. [59] 1994년 윤도현 1집 수록곡. [60] 1999년 윤도현밴드 4집 수록곡. [61] 2002년 KBS 가요대상 대상/MBC 최고인기가수상/KMTV 대상 수상곡 [62] 2002년 골든디스크 대상곡 [63] 음반의 발매는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둔 1997년에 이루어졌지만 2002년에 길거리 응원 및 월드컵 붐이 불면서 재유행하였다. [64] 2002년 SBS 가요대전 대상/서울가요대상 대상/엠넷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 수상곡 [65] 2002년 오리콘 싱글차트 1위 및 그해 일본의 유일한 밀리언셀링 싱글. [66] 디알무비에서 운영했던 캐릭터 홍보용 매거진이자 연예신문인 FAPER라는 사이트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67] 9년 전인 1993년에 발매된 별의 커비 꿈의 샘 이야기를 리메이크한 게임이다. [68] 교보생명 CF 중에서 [69] 동산C&G로부터 인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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