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릭 유잉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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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 1992 |
{{{#!wiki style="margin:0 -10px -5px" {{{#dd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952-53 | 1953-54 | 1954-55 | 1955-56 | 1956-57 |
돈 메이네케 | 레이 펠릭스 | 밥 페팃 | 모리스 스톡스 | 톰 하인슨 | |
1957-58 | 1958-59 | 1959-60 | 1960-61 | 1961-62 | |
우디 솔즈베리 | 엘진 베일러 | 윌트 체임벌린 | 오스카 로버트슨 | 월트 벨라미 | |
1962-63 | 1963-64 | 1964-65 | 1965-66 | 1966-67 | |
테리 디싱거 | 제리 루카스 | 윌리스 리드 | 릭 배리 | 데이브 빙 | |
1967-68 | 1968-69 | 1969-70 | 1970-71 | 1971-72 | |
얼 먼로 | 웨스 언셀드 | 루 앨신더 |
데이브 코웬스 제프 페트리 |
시드니 윅스 | |
1972-73 | 1973-74 | 1974-75 | 1975-76 | 1976-77 | |
밥 맥아두 | 어니 디그레고리오 | 자말 윌키스 | 앨번 애덤스 | 애드리언 댄틀리 | |
1977-78 | 1978-79 | 1979-80 | 1980-81 | 1981-82 | |
월터 데이비스 | 필 포드 | 래리 버드 | 대럴 그리핀 | 벅 윌리엄스 | |
1982-83 | 1983-84 | 1984-85 | 1985-86 | 1986-87 | |
테리 커밍스 | 랄프 샘슨 | 마이클 조던 | 패트릭 유잉 | 척 퍼슨 | |
1987-88 | 1988-89 | 1989-90 | 1990-91 | 1991-92 | |
마크 잭슨 | 미치 리치몬드 | 데이비드 로빈슨 | 데릭 콜먼 | 래리 존슨 | |
1992-93 | 1993-94 | 1994-95 | 1995-96 | 1996-97 | |
샤킬 오닐 | 크리스 웨버 |
그랜트 힐 제이슨 키드 |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 앨런 아이버슨 | |
1997-98 | 1998-99 | 1999-00 | 2000-01 | 2001-02 | |
팀 던컨 | 빈스 카터 |
엘튼 브랜드 스티브 프랜시스 |
마이크 밀러 | 파우 가솔 | |
2002-03 | 2003-04 | 2004-05 | 2005-06 | 2006-07 | |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 르브론 제임스 | 에메카 오카포 | 크리스 폴 | 브랜든 로이 | |
2007-08 | 2008-09 | 2009-10 | 2010-11 | 2011-12 | |
케빈 듀란트 | 데릭 로즈 | 타이릭 에반스 | 블레이크 그리핀 | 카이리 어빙 | |
2012-13 | 2013-14 | 2014-15 | 2015-16 | 2016-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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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닉스 기록 보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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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유잉 (Patrick Ewing) - 1039경기 (1985~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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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닉스 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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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프레이저 (Walt Fraz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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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유잉 (Patrick Ewing) |
레드 홀즈먼 (Red Holzman)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패트릭 유잉 | |
헌액 연도 | 20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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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D428A><colcolor=#fff> 뉴욕 닉스 No. 33 | |
패트릭 앨로이셔스 유잉 Patrick Aloysius Ew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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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2년 8월 5일 ([age(1962-08-05)]세) |
자메이카 킹스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자메이카|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조지타운 대학교 |
신장 | 213cm (7' 0")[1] |
체중 | 116kg (255 lbs)[2] |
윙스팬 | 244cm (8' 0", 비공식)[3] |
포지션 | 센터 / 파워 포워드[4] |
드래프트 |
1985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뉴욕 닉스 지명 |
소속 팀 |
뉴욕 닉스 (1985~2000) 시애틀 슈퍼소닉스 (2000~2001) 올랜도 매직 (2001~2002) |
지도자 |
워싱턴 위저즈 코치 (2002~2003) 휴스턴 로키츠 코치 (2003~2006) 올랜도 매직 코치 (2007~2012) 샬럿 밥캣츠-호네츠 코치 (2013~2017) 조지타운 대학교 감독 (2017~2023) |
등번호 |
33번 - 뉴욕 / 시애틀 6번 - 올랜도[5]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
SN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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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 포지션은 센터.데이비드 로빈슨, 샤킬 오닐, 하킴 올라주원과 함께 1990년대 NBA 4대 센터 중 한 명으로,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윌리스 리드의 뒤를 이었으며, 모든 뉴욕 시민들이 사랑했던 8~90년대 뉴욕 닉스의 심장. 별명은 뉴욕의 왕(The King of New York), 동부의 야수(The Beast of the East), 호야스[6]의 파괴자(The Hoya Destroya) 등이지만, 널리 알려진 별명은 킹콩,[7] 그리고 한국 한정 고릴라.[8]
NBA 원년팀으로 2016에 70년째를 맞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닉스를 거쳐간 수많은 선수들 중 블래처리포트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닉스 선수로 꼽혔다. 블래처리포트 외에도 다수의 매체에서 역대 닉스 선수들의 랭킹을 꼽았을때 절대로 Top 3에서 빠지지 않는 선수다.
여담으로 한국 올드팬 중에서는 그의 성을 "이윙"이라고 기억하는 경우도 많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언론에서 실제로 이런 표기를 쓴 적도 있었다. Ewing을 Ew-ing으로 읽지 않고 E-wing으로 읽은 것. 한국어 화자들은 w를 음절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앞 음절을 끊는 경향이 있어서 생겼던 일. 비슷한 예로 이완 맥그리거[9], 마이클 오웬[10] 등이 있다.
2. 일생
2.1. NBA 데뷔 이전
2.1.1. 어린 시절
독특하게도 그는 레게의 고향인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아버지 칼 L. 유잉과 어머니 도로시(1928~1983 #)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농구보다도 크리켓과 축구를 하며 자라났지만, 12살에 가족들이 미국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로 이민을 간 후 그는 농구와의 만남을 시작하게 된다.2.1.2. 호야스의 파괴자
캠브리지 린지 앤 라틴 스쿨 시절에는 마이크 자비스 감독[11]에게 가르침을 받아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선수가 되어 1980년 및 1981년 <퍼레이드> 지 올 아메리칸 퍼스트 팀에 두 번 선정됐고, 1981년에는 미국 올해의 고교선수상과 맥도날드 올 아메리칸에도 선정됐다. ESPN Sports Century 유잉편에서 한 기자의 회상에 따르면 유잉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던지 다른 팀 선수들은 "불공평하잖아. 너넨 패트릭 유잉이 있는데..."라고 불평할 정도로 급이 다른 대접을 받았다. 당연히 상대팀 팬들 입장에선 악의 축 취급이어서 유잉이 문맹이다[12]를 포함해 온갖 비방과 중상모략이 이어졌다. 어쨌거나 대형 센터로서의 자질을 보이던 그에게 많은 대학들은 영입을 시도했고, 유잉은 그 중 워싱턴 D.C.의 농구 명문 조지타운 대학교로의 진학을 결정한다.
조지타운 대학교 농구부는 당시 존 톰슨 주니어(1941~2020)가 감독을 맡고 있었다.[13] 존 톰슨은 프로비던스 칼리지 시절 조 멀라니 감독의 직계 제자[14]이자 보스턴 셀틱스에서 빌 러셀의 백업을 담당하기도 했던 센터로, 이 대학 농구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선수생활 경력을 살려서 뛰어난 센터를 조련하는 데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그 첫 작품이 바로 유잉이었다.[15] 그런 덕분인지 존 톰슨은 유잉의 엄청난 덩치와 잠재력을 폭발시키면서 대학 무대를 평정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당시 대학에 입학한 유잉은 굉장히 독특한 패션을 추구했는데, 반팔 셔츠를 유니폼 안에 입은 일종의 레이어드 패션이었다. 이는 선수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유잉에 대해 전미가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걸출한 신입생의 합류와 맹활약에 힘입어 조지타운 대학은 1982년 March Madness에서 숱한 대학을 박살내며 결승까지 단번에 올라간다. 거기서 마주하게 된 대학은 바로 딘 스미스 산하에서의 첫 우승을 노리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타힐스.
당시 노스캐롤라이나는 제임스 워디, 샘 퍼킨스라는 막강한 프론트 코트를 갖추고 있었던 강팀이었다. 그러나 조지타운은 유잉을 중심으로 한 단단한 수비[16]를 통해 노스캐롤라이나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덕분에 당시 게임은 근소한 차이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접전이 이어졌다. 17초를 남긴 상태에서 1점 차이로 조지타운의 리드가 이어지고 있었고, 노스캐롤라이나의 공격 차례가 되었다. 조지타운은 1점 리드를 지키기 위해 수비를 견고히 다지고 있었고, 특히 워디에게 모든 수비가 집중적인 디나이를 시도하고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지미 블랙은 워디에게 패스를 투입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신입생 가드 한 명이 오픈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어렵사리 볼을 건넸고, 그는 노마크 상태에서 가볍게 점프슛을 성공시키며 팀을 역전시키게 된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이어지는 조지타운의 공격에서 스틸을 성공시키며 1982 NCAA 챔피언에 등극하고, 결승골을 성공시킨 신입생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마이클 조던이었다.[17][18]
첫 도전에서 고배를 마시긴 했지만, 유잉은 고작 1학년인 상황이었다. 누구도 그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또한 절치부심하며 NCAA 우승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2학년이 된 다음해에는 고작 2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았지만, 3학년이 되자 그는 다시금 팀을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당시 조지타운과 만나게 된 대학은 바로 "PHI SLAMA JAMA"라 불리던 휴스턴 대학이었다. 당시 휴스턴 대학은 전년도 파이널 준우승팀인데도 토너먼트 MOP를 수상한 최대의 라이벌 하킴 올라주원이 이끄는 강팀이었다. 자메이카산 야수와 나이지리아산 괴물센터간의 대결은 전미를 흥분시켰고,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결승전에서 유잉은 올라주원에게 판정승을 거두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MOP를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활약 덕분에 유잉은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표팀에 주전으로 당당히 선발되었으며, 조던 등과 함께 팀을 금메달로 이끈다.
이어지는 84-85 시즌 당시 동년배였던 올라주원과 조던 등 쟁쟁한 라이벌들이 드래프트를 위해 대거 얼리 엔트리를 제출한 가운데, 유잉은 묵묵히 조지타운에서 졸업을 하기로 결정한다.
여담이지만 이때 유잉이 만약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얼리 엔트리를 제출했다면, 1984 드래프트의 1순위는 유잉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대학무대에서 유잉의 가치는 타 선수들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센터 보강이 절실했던 포틀랜드가 30년 동안 두고두고 놀림당할 일도 없었을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하면 당시 기록을 보면 포틀랜드건 시카고건 모든 팀들의 1순위는 올라주원이었기 때문에 유잉을 못 뽑은 포틀랜드는 당연히 올라주원을 뽑았을 것이다. 오히려 원래 센터를 원했었고, 센터가 아닌 가드 조던을 뽑았다고 시무룩했던 시카고가 얼씨구나 하고 보위를 뽑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잉과 그 이전에 대학 최고의 선수였던 랠프 샘슨이 막강 트윈타워를 휴스턴에서 결성하고, Phi Slamma Jamma 콤보인 올라주원과 드렉슬러가 프로에서 재회한 포틀랜드가 왕조를 이룩하고, 시카고 불스는 역대 최강의 선수를 못 뽑아 하위권 탈출에 실패하는 등 NBA 구도가 크게 뒤흔들렸을 것이다.
또한 비록 센터가 아니란 이유로 밀렸지만, 당시 올해의 대학선수상을 석권했던 조던이 4위까지 밀렸는데 안 뽑는 건 미친 짓이기 때문에(원래 4위로 뽑힌 샘 퍼킨스는 조던보다 1년 선배로 6피트9인치 포워드고 조던보다 실력이 현저히 딸린다) 당연히 댈러스 매버릭스가 조던을 뽑았을 것이다. 이때 댈러스는 사상 처음으로 5할 승률 이상을 거두고 2라운드에 진출하는 등 강팀으로 발돋음하던 시기였는데, 여기에 조던이 합류했다면 단연 우승후보로 올라갔을 확률이 높다. 즉, 80년대 중반 서부에서는 레이커스 독주에 휴스턴이 그나마 견제하는 체제였는데, 두 팀의 전력은 크게 변화없이 댈러스, 포틀랜드의 전력이 크게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랬다면 보스턴이 필라델피아, 밀워키 등의 도전에 힘겨워했던 동부처럼 혼전이 있었을 것이고 기존 역사에서처럼 레이커스가 80년대에 9번이나 당연한 듯 파이널에 올라가긴 힘들었을 것이고, 매직과 버드의 평가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19]
그리고 돌아온 85년 March Madness에서 유잉은 다시금 팀을 결승으로 이끄는 기염을 토해낸다. 빌라노바 대학과의 결승에서 조지타운은 2점차 아쉬운 석패를 거뒀지만[20][21], 결승진출 3회, 우승1회, 주요 올해의 대학선수상 석권이란 화려한 이력을 가진 유잉은 역대에서도 손꼽히는 대학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다가오는 1985 드래프트는 유잉 드래프트가 될 것이란 왁자지껄한 분위기 아래 유잉은 대학을 마치고 NBA에 입성하게 된다.
2.2. NBA 커리어
2.2.1. 뉴욕으로의 입성
1985 드래프트는 앞서 말한대로 "유잉 드래프트"라 불렸다. 당시 유잉의 스카우팅 리포트 장점란에 쓰여 있는 말은 단 한 문장. "Are you kidding?" 전년도에 하위권 성적을 거둔 팀들은 어떻게든 1순위를 잡아 유잉을 영입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로터리 추첨 당일 모두의 시선은 데이비드 스턴의 손에 쏠렸다. 드래프트 당일보다도 로터리가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물론 1순위는 이견없이 유잉일테니, 누가 유잉을 뽑게 될 지에 관심이 쏠렸기 때문. 모든 팀이 사라지고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뉴욕 닉스만이 남은 상태에서 2순위에 인디애나 페이서스가 당첨되었음을 알리자 뉴욕 팬들은 그야말로 흥분으로 달아올랐고, 이후 열린 드래프트에서 유잉은 이견의 여지없이 1순위로 뉴욕에 입성하게 되었다.[22][23]
당시 뉴욕 닉스는 그렇게까지 나쁜 팀은 아니었다. 빌 카트라이트와 버나드 킹, 제랄드 윌킨스 등으로 이루어진 라인업은 닉스를 꽤 괜찮은 팀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인해 팀이 나락으로 떨어진 찰나에 유잉을 영입하게 된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유잉은 데뷔 직후 첫 시즌인 1985-86 시즌에서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50경기에 출장하며 20득점, 9리바운드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팀을 이끌었다. 결정적으로 유잉은 당초 대학 시절 선보인 뛰어난 수비력 탓에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폄하당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성적은 그의 재능이 빌 러셀보다도 대단할 것이라는 평가마저 듣게 만들었다. 물론 주전급 베테랑들이 대거 시즌 아웃된 상황에서 팀 성적은 여전히 나락인 상태였지만, 스스로도 무릎 부상으로 인해 30게임이나 결장하면서도 일궈낸 성적인 탓에 충분히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그 공로로 신인왕에 선정된다.[24][25][26]
이어지는 2년차에 유잉은 카트라이트와 함께 트윈타워를 구축하고 주 포지션인 센터가 아닌 파워 포워드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임에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여전히 애틀랜틱 디비전의 최하위에 머무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사실 이건 당시 닉스가 굉장히 불운이 심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빌 카트라이트는 84-85시즌에 부상으로 시즌아웃되고 유잉의 루키 시즌인 85-86시즌에는 단 두경기만 뛰었다. 버나드 킹은 84-85시즌 득점왕이었으나 다음 시즌 부상으로 한 경기도 못 뛰었고, 제럴드 그린은 그냥 롤플레이어였다. 킹은 유잉의 2년차이던 86-87시즌에도 불과 6경기밖에 못 뛰었고 카트라이트는 58경기를 뛰었으나 이미 하락세가 완연했다. 결국 유잉 외에 위력적인 선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덧 3년차 시즌에 접어든 유잉에게 팀은 새로운 파트너를 선사해주었다. 프로비덴스 대학의 코치를 맡고 있던 30대의 젊은 감독인 릭 피티노와 브루클린 출신의 포인트 가드 마크 잭슨이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마크 잭슨은 약점이던 가드진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면서 신인왕까지 거머쥐었고, 유잉은 그와 함께 빌 카트라이트를 제치고 주전 센터로 도약하면서 팀을 이끌면서 결국 데뷔 3년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상대는 당시 래리 버드가 이끌었던 강팀인 보스턴 셀틱스였는데, 1승 3패로 1회전 탈락에 그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유잉은 첫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더 이상 풋내기 선수가 아님을 과시하였고, 다가오는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더하게 만들었다.
2.2.2. 뉴욕의 왕
1988-89 시즌이 다가오면서 닉스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전까지 닉스를 지탱해왔던 기둥 중 하나인 빌 카트라이트를 트레이드하기로 한 것이다. 닉스 구단은 노쇠화를 보이면서 이제 유잉에게도 밀려나버린 후보 센터 대신 주전 센터인 유잉을 보좌하면서 그의 수비 부담을 덜어줄만한 블루워커 보디가드[27]를 물색하던 중, 닉스는 시카고 불스의 찰스 오클리와 빌 카트라이트의 맞트레이드를 성공시킨다.찰스 오클리는 당시 어린 팀이던 시카고 불스에서 군기반장이자 조던의 보디가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조던의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 때문에 당시 시카고 불스가 피스톤즈 배드 보이즈의 조던 룰이라 불리는 집단 다구리에서 조던을 보호하던 찰스 오클리 대신 카트라이트를 영입하기로 하자 조던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빌 카트라이트는 나이도 새파란 에이스의 분노를 한 몸에 받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실제로 조던이 카트라이트를 진정한 팀원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참고로 오클리는 조던이 위저즈로 복귀했을 때도 먼저 영입을 주도할만큼 친한 사이이며, 구단주인 현재도 사석에 조던이 나타날 때면 늘상 함께 다니는 사이일 정도였다.
물론, 불스가 이 트레이드를 한 이유는 센터 빌 카트라이트에 대한 필요도 있었지만, 87~88년 1라운드 전체 10번으로 지명한 클렘슨대학교의 파워 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를 주전으로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랜트는 구단의 기대대로 불스 첫번째 3연패 왕조의 넘버3로 대활약했다. 사실 선수 개개인의 실력만 따지면 전성기 기준 그랜트와 오클리는 비슷하거나, 골밑에서 더 터프하고 중거리슛 능력도 그랜트에 근접한 오클리가 더 가치가 있었지만 이 트래이드로 불스는 7-1이란 좋은 신장에 골밑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센터 빌 카트라이트를 구했다는 게 신의 한 수였다. 만약 오클리와 그랜트를 둘 다 데리고 있었다면, 둘 다 센터를 소화하기 힘든만큼 당시 기준으로 훨씬 더 뛰어난 오클리를 중용해야했고 결국 그랜트란 유망주는 꽃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닉스의 경우 유잉-카트라이트 트윈타워는 둘 다 순수센터에 가깝고 기동력도 그렇게까지 좋지 못해 생각보다 효율이 떨어지던 걸 파워 포워드 오클리와 바꾸면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어쨌더나 이 트레이드를 통해 닉스는 앞으로 팀의 중심은 유잉이며, 그를 통해 우승을 일궈낼 것임을 천명한 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시즌에서 닉스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기세를 보여주었다. 바클리가 이끌던 필라델피아와 버드가 이끄는 보스턴을 제치고 52승 30패라는, 전년도에 비해 파격적으로 상승한 승률로 애틀랜틱 디비전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만난 필라델피아를 3-0으로 스윕하면서 기대감을 높이던 닉스는 2라운드에서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닉스는 시카고에게 2승 4패로 탈락,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권을 빼앗기고 유잉은 대학 시절의 아픈 기억을 곱씹으며 다음 해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긋지긋한 유잉과 닉스의 조던에 대한 악연의 시작점에 불과한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다음 시즌, 닉스는 스투 잭슨을 코치로 맞아 새로운 체제를 정비하게 된다. 이 해에 유잉은 개인으로서 최고의 성적을 올리게 되는데, 전 경기인 82경기를 출장하면서 28.6득점 10.9리바운드 4블록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유잉은 처음으로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는 경사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팀은 전년대비 하락한 승수에 머무르고 말았고, 진출한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강팀 보스턴 셀틱스를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2라운드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1승 4패의 성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해에도 닉스는 유잉의 분전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당시 첫 우승을 향해 달려가던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게 3패로 스윕을 당하면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2.2.3. 갱스터의 결성, 그리고 조던. 조던. 조던.
연이은 플레이오프에서의 탈락으로 좌절감을 맛보던 닉스와 유잉에게 더 이상 플레이오프 진출은 목표가 될 수 없었다. 동부의 신흥 강호였던 시카고 불스가 첫 우승을 거둠으로써 레이커스와 셀틱스의 80년대를 마감시킨 마당에 그들 또한 우승을 통해 리그의 명문으로 위상을 새롭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그리고 그 첫 걸음을 내딛기 위해 닉스 구단은 명장을 영입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팻 라일리였다. 80년대 매직 존슨을 앞세운 쇼타임 레이커스의 수장인 팻 라일리의 영입은 닉스 구단의 우승에 대한 열망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리고 팻 라일리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운 밑그림을 팀에게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숨막히는 질식수비로 대표되는 90년대 닉스, 갱스터의 시작이었다. 화끈한 공격농구를 지향하던 팻 라일리의 레이커스와 정 반대되는 모습을 드러낸 닉스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드러냈지만, 라일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색깔에 걸맞은 선수들을 대거 영입 / 중용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인다. 자비에 맥다니엘과 앤서니 메이슨, 존 스탁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메이슨과 스탁스는 꾸준한 활약을 보여준 적이 없는 터라 닉스 구단과 라일리에 대한 팬들의 의구심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시즌, 돌아온 닉스는 그야말로 숨도 못쉬는 페인트존을 자랑하는 질식수비를 선보이며 승수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득점을 내줄바에는 파울을 안겨주마(...)라는 정신으로 하드파울과 거친 몸싸움으로 무장한 채 상대를 압도해나갔으며, 이 가운데에는 바로 뉴욕의 왕이자 닉스의 심장인 유잉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게 거친 농구를 펼치며 언제나처럼 진출한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그들은 숙적인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를 다시금 만나게 된다. 이전까지의 대결에서 닉스는 언제나 조던에게 페인트존을 유린당하며 넉다운 되는 매번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다. 라일리는 어차피 조던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아래 스탁스와 윌킨스를 번갈아붙이며 외곽을 틀어막는 한편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이고, 조던이 페네트레이션을 시도할 경우 유잉을 중심으로 오클리, 맥다니엘, 메이슨 등이 페인트 존을 방어하며 점프를 뛰는 순간 샌드위치(...)로 압살하고, 이도저도 안될 경우 하드파울을 범하는 수비 전략을 채택한다. 이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가 시도하던 조던 룰과도 유사한 전략이었는데, 룰이 허용하는 한계까지 거친 플레이를 통해 조던을 육체적으로 힘들게 하면서 그의 활약을 제한시키는 전략이었다.[28]
이는 효과적으로 작용하였고, 최종전까지 가보지도 못하던 기존의 시리즈와 달리 최종 7차전까지 경기를 끌고 가는데 성공했다. 특히 2승 3패로 뒤진 6차전에서 유잉이 경기중 발목을 삐어 절뚝거리면서도 골밑에서 잇달아 앤드원을 얻어내 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유잉 커리어 중에서도 손꼽히는 순간 중 하나.[29]
그리고 시카고 스타디움에서 열린 7차전. 고작 2라운드임에도 불구하고 양쪽의 긴장감은 파이널에 가까운 상태였다. 유잉과 닉스는 이 경기를 통해 첫 왕좌로의 등극을 꿈꾸고 있었고, 전년도 우승팀인 시카고와 조던은 왕조 건설로 이어지는 2연패를 위한 여정에서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탈락이라는 위기에 몰린 마이클 조던은 그 상황을 간단하게 끝내버렸다... 조던은 42득점 6리바운드 4어시스트 2스틸 3블록이라는 기록을 내며 그를 전담마크하던 스탁스를 6반칙 퇴장시키고, 윌킨스와 유잉은 5반칙에 몰리도록 맹활약하며 110 대 81이라는 스코어로 닉스를 초토화시켜 버린 것이다.[30] 유잉은 22점, 9리바운드를 따내며 분전했지만, 또 다시 조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91년 2월 18일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 좌측 뒷열부터 시계방향으로, 찰스 바클리, 유잉, 칼 말론,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이러한 좌절을 겪고 난 오프 시즌 동안에는 유잉에게 즐거운 경험 또한 있었다. 시즌 종료 후 벌어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2-93 시즌이 시작될 무렵, 닉스는 이제까지 활약해왔던 마크 잭슨 대신 닥 리버스를 영입하였다. 완숙미를 더해가던 유잉은 경기당 평균 24.2득점, 12.1리바운드의 호성적을 거두며 팀을 이끌었고, 더불어 더욱 다져진 조직력을 과시하던 닉스는 이 해 60승, 7할대의 성적을 처음으로 거두며[31] 동부 컨퍼런스 1위를 차지하고, 1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그렇게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인디애나 페이서스, 샬럿 호네츠를 완파하며 순항한 닉스는 또 다시 조던과 만나게 된다. 전년도의 아픔을 설욕하기 위해 전의를 다지던 닉스는 홈구장인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치러진 첫 두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게 된다. 유잉은 25점 17리바운드, 26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시카고의 페인트 존을 짓밟았고, 드디어 유잉과 닉스의 고난도 여기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연이은 4경기에서 닉스는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조던을 보좌하던 피펜의 맹활약으로 인해 4연패를 기록하게 되었고, 결국 또 다시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 불운을 겪고 말았다.[32]
여담으로 93년 동부 파이널 5차전은 닉스 팬들 입장에선 1년 뒤 '존 스탁스 경기'에 버금갈 정도로 홧병나는 '찰스 스미스 경기'로 알려진 날이었다. 일단 당시 닉스의 상황을 설명하면 닉스는 60승22패로 동부 1위/전체 2위의 호성적이었으며, 홈에서 무려 37승4패(90.2%)로 안방불패의 명성을 자랑하던 팀이었다. 물론 반대로 원정에선 23승 18패(56%)로 우승후보팀치곤 좀 아쉬운 성적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그 명성에 걸맞게 홈에선 단 한경기도 지지 않고, 1라운드 상대 인디애나와 2라운드 상대 샬럿에게 원정에서 각각 1패 씩만 하며 순항해 동부 결승에 안착한 상황이었다.
정규시즌에 닉스는 불스를 상대로 홈에서 2승, 원정에서 1승1패를 했는데, 특히 1차전에서 조던과 피펜을 둘 다 10점대로 묶으며 112대 75로 박살내기도 했다.[33] 즉 이 시즌에 닉스는 불스를 상대로 우세를 점했으며, 동부 결승에서도 4차전까지 뉴욕에서 열린 1~2차전을 닉스가, 시카고에서 열린 3~4차전을 불스가 잡으면서 불스는 92~93시즌 내내 MSG 원정경기를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운명의 5차전, 불스에선 조던이 29점 14어시스트 10리바운드(야투 45.8%), 피펜이 28점 11리바운드 1어시스트(야투 52.2%)로 준수한 활약을 하고, 유잉은 33점 9리바운드 (야투율 52.2%)로 좋은 활약을 하면서 각각 팀을 이끌고 있었다. [34] 어쨌거나 접전이 이어지던 4쿼터, 종료 1분 16초를 남겨두고 동점 상황에서 시카고의 B.J. 암스트롱이 3점슛을 꽂아넣으며 점수는 95대92로 앞서게 된다. 이후 1분동안 두 팀은 서로 질식수비에 막혀 득점을 못하다가 찰스 스미스의 자유투 1개로 95대94가 되고, 뒤이은 공격권에서 스테이시 킹의 중거리슛을 유잉이 극적으로 블럭하며 공격제한 시간이 끝난다. 그리고 닉스는 27초를 남겨두고 역전을 위한 사실상 마지막 기회를 얻게 된다.
외곽에서 스탁스가 조던을 앞에두고 드리블을 하다가 유잉에게 공을 건네주고, 유잉은 돌파하던 도중 수비수 킹과 부딫히면서 서로 넘어지는 와중에 골밑의 찰스 스미스에게 공을 간신히 건넨다. 그러나 스미스의 슛은 매치업 호레이스 그랜트에게 걸린다. 간신히 오펜스 리바운드를 잡아낸 스미스가 다시 골밑슛을 시도하지만 이번엔 헬프 들어온 조던이 재빨리 쳐낸다. 운명의 장난인지 공은 또 스미스의 손을 찾아 돌아오지만 이번엔 스카티 피펜이 뒤에서 공을 막는다. 간신히 공을 놓치지 않은 스미스가 다시 슛을 올라가지만 피펜이 또 뒤에서 슛을 막아내며 결국 닉스는 마지막 공격권을 뺐기고, 불스는 반대쪽 코트로 롱패스를 해 B.J. 암스트롱이 버저 직전 경기 마지막 득점을 하며 결국 97대 94로 경기가 종료된다. 당시 플레이: https://www.youtube.com/watch?v=4hQ9B66MbxM
시즌 최초로 불스에게 홈경기를 내준 후 맞게 된 시카고 원정 6차전, 유잉이 평상시처럼 좋은 활약(26점 13리바운드 야투율 66.7%)을 해줬음에도 반전없이 불스에게 패한 후 결국 6차전 탈락하게 된다.
골밑에서 득점찬스를 네번 연속 얻었음에도 연이어 블럭당한 스미스는 역적이 된다. 물론 골밑에서 공을 잡으면 바로 슛을 올라가는게 맞고 불스의 악명 높은 수비수 세 명에게 둘러쌓여 있는데 제대로 플레이할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겠지만, 한두번 정도 블럭당하고 나면 "아 내 능력으론 뚫는게 무리구나"하고 공을 돌렸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게 사실. 차라리 공을 빼주려다가 스틸당했다면 몰라도, 계속 블럭당하는데 무리하게 계속 슛을 올라가다 전부 놓치고 패배의 1등 공신이 됐기 때문에 그만큼 욕을 먹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대로 닉스는 홈에서 매우 강했기 때문에, 5차전을 승리했더라면 6차전을 패했어도 7차전을 홈에서 치르는 유리한 상황이었고, 라이벌들에 비해 빨리 하락세가 시작된 유잉이 아직 전성기 범위의 기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때 닉스는 유잉 시절을 통틀어 가장 팀전력이 강했고, 마지막으로 결승 상대가 됐을 피닉스 선즈는 (1년 뒤 붙게 될 로키츠와 달리) 마크 웨스트란 208cm에 평범한 센터가 주전일 정도로 센터진이 허접하고 에이스 찰스 바클리는 198cm 단신이라 유잉을 막기 힘든 팀이라 93시즌이 그야말로 우승의 적기였다는 점에서 닉스 팬들에겐 진한 아쉬움을 남기는 시즌, 그리고 시리즈였다.
2.2.4. 유잉 VS 올라주원, 그리고 내리막길
1993-94 시즌, 조던이 3연패 이후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닉스에게 동부 컨퍼런스는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파죽지세로 달린 시즌 동안 유잉은 전년과 같이 맹활약하였고, 플레이오프에 돌입했다. 2라운드에서 스카티 피펜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와 7차전에 이르는 혈투를 펼친 끝에 승리하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레지 밀러가 이끄는 인디애나와 7차전까지의 접전 끝에 승리한 유잉의 앞에 등장한 것은 바로 올라주원이 이끄는 휴스턴 로키츠였다. 대학시절 맞붙었던 사실과 현재의 경기들이 연일 매스컴에 비교 보도되는 떠들썩한 와중에 5차전까지 전적은 3승 2패로 닉스의 우위인 상태. 그러나 6차전에서 스탁스가 던진 슈팅이 올라주원에게 블록당했고, 연이은 7차전에서 스탁스가 1할대 야투율이라는 엽기적인 성공률을 보이는 상태에서 유잉은 패배하였으며 올라주원은 오래전 아픔을 설욕하는데 성공한다.사실 마지막 경기인 7차전 패배의 직접적인 책임은 스탁스에게 있었지만, 6차전까지만 보면 스탁스는 유잉과 동등한 볼륨을 유잉보다 압도적으로 좋은 효율로 기록하며 공격에 한해서는 유잉의 부진 속에서도 시리즈가 7차전까지 이어지게 해준 공신이었다. 유잉의 경우 5차전을 제외하면 극도의 부진을 면치 못했는데, 시리즈 평균으로는 18.9점을 TS% 0.390으로 기록하며 26.9점 TS% 0.556을 기록한 올라주원에게 잡아먹히다시피 했다.[35] 올라주원이 잘한 건 둘째치고 팀에서 가장 슛을 많이 던진 1옵션이, 그것도 유잉이라는 레전드 센터가 야투율도 아니고 ts%가 0.4를 넘기지 못했다는 건 팀 공격을 완전히 말아먹었다는 뜻이다. 유잉은 점퍼 비중이 높은 선수치곤 야투율이 준수하고, 자삥도 잘해 이렇게까지 효율을 말아먹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도 시리즈 토탈 ts%에서 이런 충격적인 수치를 기록한 것. 물론 수비와 보드장악에 있어선 12.4리바운드 4.3블록을 기록하며 9.1-3.9를 기록한 올라주원 못지 않은 존재감을 보였으나[36], 특기인 점퍼는 저주라도 걸린 것 마냥 빗나가며 죽을 쑤었기에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부진의 이유를 분석해보면 닉스 팀을 떠나서 유잉 개인에게 휴스턴 로키츠란 팀은 별로 좋지 않았다. 유잉은 올라주원과 비교해 비교적 공격범위가 좁고 공격패턴이 단순했는데, 이 둘은 쌍방이 특급 수비력을 지닌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양 팀의 공격이 상당히 뻑뻑하게 돌아갔다.[37] 평상시 유잉의 점퍼는 주로 패스를 받아 넣는 방식이었는데, 휴스턴의 강한 팀 수비 때문에 좋은 패스를 받아 점퍼를 넣을 만한 환경이 아니었고 이 때문에 1대1 공격을 많이 해야했다. 문제는 유잉이 1대1을 (S급 센터치고는)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그를 막는 수비수가 극강의 수비수인 올라주원이었다는 것이다. 역대 센터들 중에서도 1대1 기술의 다양성과 완성도는 그야말로 본좌급었던 올라주원과 달리, 유잉의 경우 1대1에서 주 공격루트가 페이더웨이 혹은 러닝 훅 등으로 올라주원만큼 다양하고 효율적인 옵션은 아니었다. 게다가 유잉의 점퍼는 4대 센터들 중에 가장 뛰어난 편이었지만 센터란 특성상 수비를 달고 쏘는 슛은 확률이 매우 낮았다. 때문에 결국 공격에선 답답한 모습만 보였던 것.[38]
그리고, 이 한 끗 차이로 놓쳐버리고 만 우승은 이후 그의 평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약 이 때 닉스와 유잉이 6,7차전 중 한 경기만 잡아 우승에 성공했다면 유잉은 4대 센터 중 가장 먼저 우승의 위업을 달성하는 엄청난 프리미엄 덕택에 최소한 지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승은 로키츠와 올라주원의 차지였고, 다음 시즌까지 우승을 차지해 마이클 조던에 이은 연속 우승을 달성하며 그 당시 4대 센터 서열에서 올라주원이 나머지 셋을 앞질러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해에도 플레이오프에 나선 유잉과 닉스는 전년도의 설욕을 다짐하던 레지 밀러에게 MSG에서 맹폭격을 당하며 고배를 마시게 된다. 마지막 7차전 종료 직전 2점차에서 유잉이 날린 회심의 레이업슛이 림을 들어갔다가 나와버리는 불운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조차도 올라가보지 못하고 플레이오프 2라운드 탈락의 결과를 맞았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그의 전성기를 함께한 팻 라일리도 떠나버리고,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드는 유잉에게 이제 우승은 그야말로 선수 생활의 황혼을 장식해줄 마지막 꿈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1995-96 시즌 돌아온 조던, 새로이 영입된 데니스 로드맨과 더불어 최강팀으로 자리매김한 시카고 불스는 닉스를 가볍게 물리치며 희망을 또 다시 빼앗아 버렸다. 다음해 1996-97 시즌은 스승이었던 팻 라일리와 조지타운의 후배였던 알론조 모닝이 이끄는 마이애미 히트가,[39][40] 그 다음해에는 닉스 킬러로 자리매김한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가 유잉의 희망을 앗아갔고, 마이클 조던이 또 다시 3연패를 이룩하는 사이에 어느 덧 유잉은 그저 그런 강팀의 그저 그런 에이스이자 일상과도 같은 부상에 시달리는 퇴물센터 정도로 폄하되며 선수 생활의 황혼에 접어들고 있었다.
2.2.5. 드디어 찾아온 우승 도전의 기회. 그러나
1997-1998 시즌은 닉스가 젊은 유망주들 셋에 그해 뽑은 신인까지 4명을 모두 팔아치우고 즉시전력감인 크리스 더들리와 크리스 밀즈까지 데려오며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우승에 도전했던 해였다. 우선 닉스는 FA가 된 유잉을 4년 6천 8백만 달러의 대형 계약으로 잔류시키는데 성공했다.[41] 또한 닉스의 약점이었던 유잉을 보좌할 수 있는 백업 센터로 포틀랜드의 주전 센터 크리스 더들리를[42], 찰스 오클리와 래리 존슨을 보좌할 프론트 코트의 제 3의 포워드로 당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주전 스몰 포워드로 활약하다가 오프시즌 보스턴 셀틱스와 FA 계약을 맺었던 크리스 밀즈를 데려왔다.[43] 타 팀의 주전 선수 두 명을 벤치멤버로 영입한 탓에 이 시즌의 닉스는 백업 멤버들만으로도 웬만한 중위권 팀 수준의 주전 라인업을 꾸릴 수 있는 수준의 엄청난 뎁스를 자랑했다.[44] 유명 스포츠 전문지인 스포트 일러스트레이티드(SI)에서 시즌 개막 전 우승 후보로 또 한번의 3연패에 도전하는 시카고 불스가 아닌 뉴욕 닉스를 꼽았을 정도로 이 시즌 닉스의 기대감은 컸다.그러나 닉스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재앙이 닥쳐왔다! 달리 말하자면 유잉과 뉴욕의 마지막 남은 우승의 꿈이 그대로 날아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12월 20일 밀워키 벅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유잉이 2쿼터 종료 직전 덩크를 시도하려 공중에 뜬 상태에서 매치업 상대인 앤드류 랭의 파울로 코트에 넘어질 때 오른손이 자신의 몸에 깔려버리는 중상을 당하게 된다. (당시 부상 직후 장면) 오른손을 쓰지 못해 왼손으로만 자유투 2개를 던진 뒤(당연히 둘 다 실패) 바로 코트를 떠나 병원행. 진단 결과 손목이 골절되고 인대가 찢어져버린 큰 부상으로 재활에만 최소 6개월 이상이 걸리는 치명적인 중상이었다.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사실상 유잉의 선수 생명에 확인사살을 가할 수도 있는 마지막 결정타였다. 그 전까지 10년 동안 겨우 20게임만 빠졌을 정도로 건실하게 닉스의 골밑을 지켜줬던 유잉이 없는 채로 시즌을 치른다는 것은 닉스에게는 말 그대로 재앙일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유잉은 시즌 아웃되었고 다음날 전 세계 언론의 NBA 소식 머릿기사가 "유잉과 닉스의 우승의 꿈은 이로서 끝났다"였다.
선수 생활 내내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고통받았던 유잉이었지만 이런 시즌 아웃급 부상은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유잉의 나이로 보나, 미래를 포기하고 그 시즌에 모든 것을 올인했던 팀 사정으로 보나 사실상 마지막 우승 도전 기회나 다름없었기에 너무나 안타까운 부상이었다. 슛을 던지는 오른손의 손목 부상은 이미 노장 센터가 되어버린 유잉이 가진 유일한 경쟁력이었던 미드레인지 점퍼의 정확도마저 앗아가버리는 슬픈 결과를 낳았다. 올스타 투표 1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부상으로 올스타전도 출전할 수 없게 되었는데, 애석한 것은 하필 이 해 올스타전이 본인 선수 생활 가운데 유일하게 닉스의 홈구장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올스타전이었다는 것. 유잉은 염원하던 우승의 꿈 뿐만 아니라, 뉴욕의 홈팬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 주전 센터로 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작은 꿈마저 날려보내야만 했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잉은 우승에 대한 꿈과 열망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플레이오프도 출전이 불가능한 시즌 아웃급 부상이었지만 유잉은 플레이오프때 꼭 돌아오겠다며 동료들에게 어떻게든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부상 이후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벤치에서 팀 동료들을 응원했다. 유잉이 부상당한 직후 잠깐 휘청거렸던 닉스는 전열을 추스르고 다시 승수를 쌓아나가기 시작, 결국 7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2번 시드 마이애미 히트와 난투극까지 불사하는 결전 끝에 업셋을 달성하고 2라운드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 2라운드 상대는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였고 유잉은 플레이오프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시리즈 2차전 원정경기에서 드디어 스타팅 센터로 복귀한 것이다. 6개월만의 복귀로 경기 감각이 저하돼 시리즈 동안 야투율이 35%밖에 되지 않는 등 고전했지만, 정규 시즌보다 더 치열한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경기당 33분을 출전하며 평균 14.0득점 8.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투혼을 발휘했다. 하지만 유잉이 정상 컨디션으로 뛰지 못하는 닉스에게 인디애나는 버거운 상대였고 닉스와 유잉은 또 한번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분루를 삼킨다.
2.2.6. 기적의 8번 시드, 기적의 파이널행
1998-99 시즌, 선수노조의 파업에 의한 직장폐쇄로 인해 단축시즌이 열리게 되었다. 이 즈음 유잉은 이미 전성기의 실력을 잃었고, 농구선수에게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부상에까지 시달리고 있었다. 팀 또한 더 이상 유잉에게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고, 슈팅 가드인 앨런 휴스턴을 실질적인 에이스로 여기고 있었다. 여기에 오랜 동료였던 스탁스와 오클리를 보내고 라트렐 스프리웰이라는 걸출한하지만 시즌을 치를수록 아킬레스건 부상이 악화되어 가던 유잉은 시즌 개막 후 약 한달 뒤 밀워키 벅스전에서 점프볼 후 착지 과정에서 아킬레스건에 충격을 입고 그대로 경기에서 이탈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시작된 플레이오프. 8번 시드로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마이애미 히트는 팻 라일리의 지휘 아래 알론조 모닝과 팀 하더웨이를 주축으로 그 옛날 닉스만큼 전투적인 수비를 선보이며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대부분 전문가들이 마이애미의 원-사이드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유잉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수비에 집중하며 팀을 이끌었고, 특히 최종전이었던 5차전에서 알론조 모닝을 공수에서 압도하는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8번 시드로 1번 시드를 격파하는 쾌거를 이끌어냈다. 특히 유잉은 이 당시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사실상 공격에서는 거의 참여가 불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수비에서는 그야말로 상대를 압살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1라운드 첫 경기에서 사실상 뛸 수 없던 상태였음에도 무려 32분여를 출전하면서 9득점 15리바운드 4블록을 기록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 이후로도 5차전까지 전 경기를 출전한 것도 모자라 5차전에서는 무려 40여분을 출전하며 22점 11리바운드를 기록, 무려 NBA 역사상 1번 시드를 1라운드에서 격파한 두 번째 팀이 됐다. 1라운드에서 1번 시드를 꺾으며 사기가 오른 닉스는 상위 시드인 애틀랜타 호크스를 4연승으로 스윕시키며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정규 시즌 성적은 단연 애틀랜타의 우위였고 수비의 핵 디켐베 무톰보를 축으로 탄탄한 전력을 구축한 팀이었지만, 당시 이미 인간탈환의 경지를 넘어선 유잉의 인간승리와 닉스의 신들린 플레이에 애틀랜타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4게임 연속으로 완패를 당하는 굴욕을 맛봤다.
인디애나와의 컨퍼런스 파이널 1차전에서 유잉은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보일 정도로 아킬레스건 상태가 좋지 못했다. 심지어 주변 지인들 마저 "왜 몸상태가 저지경인데 아무도 말리지 않느냐."는 반응까지 나왔을 정도. 심지어 고질적인 부상 부위였던 무릎 부상도 다시 악화되면서 사실상 공격 가담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유잉은 그 몸으로 무려 40분을 뛰며 16득점 10리바운드로 인사이드를 지키며 팀의 선승에 공헌했다. 선수 시절부터 소름끼칠 정도의 냉정함과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인디애나 감독 래리 버드마저도 경기가 끝나고 난 뒤 벙찐 표정으로 "유잉의 아킬레스건 부상에 대해서는 이골이 날 정도로 들어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유잉이 정말 부상 선수가 맞긴 한거냐? 만약 우리팀의 릭 스미츠가 오늘 그처럼 뛰었다면 앞으로 우린 그를 1년 동안은 볼 수 없었을 거다." 라는 말로 팀 패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팀 주전 선수까지 디스해가며 유잉의 투혼을 이례적으로 칭찬하였고, 레지 밀러 또한 유잉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2차전에서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진다. 유잉은 그 다음 2차전에도 변함없이 출전했으나 이미 그의 신체능력과 정신력은 한계점을 한참 지나간지 오래였다. 그 전부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시한폭탄같았던 그는 결국 2차전에서 무릎, 아킬레스건에 동시다발적으로 빨간불이 들어오고 만다. 유잉은 2차전에서 경기 종료 2초 전 와이드 오픈 찬스로 역전 찬스를 잡았지만, 그는 이미 무릎과 아킬레스건이 마비되다시피 하여 아예 하체를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상체와 양쪽 팔[46]로만 슛을 던졌다. 이 슛은 결국 여지없이 빗나갔고, 이것은 사실상 유잉의 시즌 아웃을 의미했다. 닉스 팬들은 역전을 하지 못한 것 보다 더 이상 유잉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심지어 2차전이 끝나고 난 후 더 이상 출장을 강행한다면 농구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날 수 있다는 의료진의 경고까지 받게 되었고, 유잉은 이후 3차전부터는 더 이상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고 시즌아웃 판정을 받으며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잉의 투혼에 사기가 오른 닉스는 래리 존슨과 마커스 캠비의 분전을 앞세워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8번 시드로는 사상 최초로 파이널에 진출하는 전율의 드라마를 연출해낸다.
기적의 8번 시드 파이널 진출의 역사를 달성할 즈음엔 전 세계의 농구팬들이 뉴욕 닉스의 투혼에 감동하였고, 파이널 상대팀인 스퍼스 팬들을 제외한 나머지 28팀 팬들 대부분이 대동단결하여 닉스를 응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록 파이널에서도 출전할 수 없었던 유잉이었지만, 늘 닉스 라커룸에는 가슴 부위에 선명하게 1999 파이널 패치가 붙은 유잉의 유니폼이 걸려있었다. 코트에서 함께 뛰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코트 위의 동료들과 함께 하겠다는, 간절히 우승을 염원하는 유잉과 동료들의 의지였다. 그러나 파이널을 앞둔 닉스는 리더인 유잉을 잃어버린 데 이어, 컨퍼런스 파이널 승리의 1등 공신이었던 마커스 캠비와 래리 존슨마저 각각 가정사와 등부상 악화로 인해 파이널 기간동안 제대로 된 컨디션으로 뛸 수가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스프리웰과 휴스턴의 트윈 테러는 건재했지만, 프론트 코트가 초토화된 닉스에게 있어 데이비드 로빈슨과 팀 던컨의 트윈 타워를 앞세운 스퍼스는 사실상 넘을 수 없는 벽이었고 모든 전문가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스퍼스의 우승을 점쳤다. 단 한명의 전문가만이 닉스의 우승을 점쳤을 뿐으로 역대 파이널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원사이드한 예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스는 감독 제프 밴 건디의 전술과 백업 멤버들의 투혼으로 매 경기를 접전으로 몰아가며 농구팬들을 열광시켰다. 스프리웰과 휴스턴의 트윈 테러는 언제나 그랬듯이 코트를 휘저었고, 정상 컨디션이 아닌 마커스 캠비와 래리 존슨을 대신해 크리스 더들리와 커트 토마스가 스퍼스의 트윈 타워를 맞아 악착같이 버텨냈다. 하지만 결과는 1승 4패로 준우승에 머무르며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고, 그렇게 유잉의 마지막 파이널은 끝이 나고 말았다.[47] 하지만 상대팀인 스퍼스 선수들도 닉스의 투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마리오 엘리는 우승 달성 후 "만약 패트릭 유잉과 래리 존슨이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갔을 것이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른다."는 말로 닉스를 인정했다. 한 마디로 팀과 우승이라는 목적 아래 인간탈환의 화룡점정을 찍은 유잉과 유잉과 함께 하나가 되어 인간승리라는 극적인 드라마를 만든 뉴욕은 "불가능이란 없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라는 격언을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솟구치게하는 기적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2.2.7.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지핀 마지막 불꽃
다음 시즌인 1999-2000 시즌에도 유잉은 여전히 닉스에서 뛰었다.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당했던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인해 유잉은 시즌 초반 20경기를 결장하였고[48], 12월 10일 필라델피아와의 홈경기에서 간신히 컴백할 수 있었다.[49] 하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38세의 노장이었던 유잉은 그 컴백 이후 정규 시즌 동안 단 한 경기도 결장하지 않고 남은 62경기를 모두 선발로 출전하면서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 더 이상 전성기와 같은 득점력을 보여주지 못하자 공격에서는 스스로 트윈테러에 이은 제 3옵션을 자처했고, 대신 유잉은 리바운드와 블로킹, 박스아웃에 집중하며 여전히 닉스 프론트 코트 수비라인의 핵으로 활약했다.매 경기가 끝날 때 마다 유잉은 골절 부상을 입었던 손목과 이미 연골이 다 닳아서 없어져버린 양쪽 무릎을 얼음팩으로 둘둘 말고, 아킬레스건을 다친 발목 부상 부위는 얼음통에 담그고 있어야 하는 처참한 몰골이었고, 진통제까지 써야할 정도로 몸상태가 만신창이 그 자체였다.[50] 그럼에도 그는 매 경기당 32.8분을 소화하며 경기당 평균 15득점 9.7리바운드로 더블-더블에 준하는 활약을 펼쳤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 유잉을 제외한 나머지 4대 센터 가운데 유잉과 같은 만 37세의 나이에 유잉보다 나은 성적을 기록한 선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 37세 시즌의 유잉과 나머지 센터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유잉: 62경기 출전, 평균 32.8분, 15.0득점, 9.8리바운드, 1.4블록
- 올라주원: 44경기 출전, 평균 23.8분, 10.3득점, 6.2리바운드, 1.6블록
- 로빈슨: 64경기 출전, 평균 23.4분, 8.5득점, 7.9리바운드, 1.7블록
- 오닐: 53경기 출전, 평균 23.4분, 12.0득점, 6.7리바운드, 1.2블록
4대 센터 중 가장 평가가 낮은 유잉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늦은 나이까지 더블-더블이 가능한 정상급 기량을 유지했던 선수는 유잉이었던 셈. 이는 나머지 세 선수가 선수 생활 전반을 운동능력에 상당 부분 의존해왔던지라 30대 후반에 그만큼 낙폭이 컸던 반면, 이미 데뷔 초 무릎부상으로 운동능력을 모두 상실했던 유잉은 그 때부터 신체능력보다는 철저한 기본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많은 나이와 만신창이가 된 몸상태에도 불구하고 저런 준수한 성적을 기록할 수 있었던 비결.[51]
모두가 닉스의 우승은 안된다고, 힘들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유잉 그 자신은 우승이라는 선수 생활 마지막 목표를 향해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졌다. 기자들이 우승에 대해 물을 때마다 유잉은 "시즌이 끝난 다음에 얘기합시다. 그 때쯤이면 내 손엔 챔피언 반지가 끼워져 있을테니까." 라는 말로 일축하며 온전히 경기에만 집중했다.
유잉의 활약으로 닉스는 세 시즌만에 다시 정규 시즌 50승 고지를 탈환하며 3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는 빈스 카터와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이끌던 토론토 랩터스. 워낙 당시 카터의 퍼포먼스가 쩔었고 마침 닉스는 정규 시즌에서 토론토에 1승 3패로 열세였던지라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뤄낸 토론토의 사기는 무척 높았고 업셋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던 시리즈였다. 하지만 유잉과 닉스는 토론토를 3연승으로 스윕시켜버리며 관광을 보내버린다. 그리고 다음 2라운드의 상대는 4년 연속으로 만나게 된 라일리의 히트. 닉스와 히트는 다시 한 번 7차전까지 가는 대 접전끝에 결국 닉스는 7차전에서 83-82의 1점차 승리를 거두고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특히 2승 3패로 뒤진 6차전에서 유잉은 무려 42분을 뛰며 15득점 18리바운드, 최종 7차전에서는 20득점 10리바운드 2블록과 더불어 결승점이 되는 역전 투핸드 덩크를 작렬시키며 위기상황에서 앞장서 팀을 이끌었다.[53]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또 다시 레지 밀러가 이끄는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만나게 되었다. 인디애나는 전년도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맹렬하게 달려들었고, 닉스 또한 주전과 백업 가리지 않고 모두가 크고 작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2년 연속 파이널 진출을 위해 허슬도 불사하며 맞불을 놓았다. 4차전까지 시리즈 스코어는 서로 2승 2패를 기록했지만 레지 밀러와 제일런 로즈의 불붙은 공격력 앞에 닉스는 결국 5차전과 6차전을 연달아 내주며 2승 4패로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6차전 종료 직전 MSG의 뉴욕팬들은 자기팀 선수들에게 기립박수를 쳐주며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잘했다고 격려해 주는 훈훈한 광경을 연출했다.
아쉽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인디애나에 패배했지만 유잉은 또 다음 시즌을 준비하며 닉스를 이끌어 가려 하였다. 그러나 주변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몇년 전부터 일부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불거져나온 유잉 무용론을 비롯해 트윈 테러를 주축으로 리빌딩을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팀은 유잉을 트레이드하는 방안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수많은 루머들이 양산되며 유잉을 들쑤시게 되었는데 유잉 본인도 이제 이런 반응들에 질렸다면서 트레이드가 된다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지경까지 갔음에도 대부분은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유잉을 트레이드하겠느냐 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몇몇 제안이 틀어져서 잔류하는가 싶었다.
2.2.8. 충격적인 이적, 그리고 쓸쓸한 은퇴
2000-01 시즌을 얼마 앞두지 않은 9월말, 닉스의 GM인 스캇 레이든[54]이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한다. 패트릭 유잉을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트레이드 시켜버린 것이다![55] 15년이란 세월을 한결같이 뛰어온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를 리빌딩이라는 명목으로 헌신짝처럼 버려버린 이 결정에 팬들은 분노하였고, 유잉은 그렇게 정든 팀을 떠나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주전 센터로 새 시즌을 맞게 되었다. 당시 시애틀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샤킬 오닐에 맞서 인사이드를 지켜줄 센터를 절실히 원했고 그 결과 유잉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유잉은 노쇠화와 부상 후유증 덕택에 제한적인 플레잉 타임만을 소화할 수 밖에 없어 기대한 만큼의 활약은 해 주지 못했다.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15년을 헌신적으로 뛰어온 친정팀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마음의 상처가 내성적인 성격의 유잉에게는 그의 얼마 남지 않은 기량마저 좀먹는 요소였다.그러나 한국팬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유잉이 트레이드된 것은 본인의 의사였다. 주된 사유는 많은 나이로 인해 더 이상 팀에 보탬이 되기 힘든데다, 시간이 갈수록 극성맞은 뉴욕 언론의 비판속에서 계속 우승 도전에 실패하면서 심적으로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트레이드 당시 기사를 보면 # 위에 언급된 유잉 무용론을 포함해 온갖 말도 안되는 비난에 질린 유잉이 2000시즌 중반에 트레이드를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팀은 "시즌 종료될 때까지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트레이드 시켜주겠다"고 약속했고, 시즌이 끝나고 트레이드 시킨 것. 또한 유잉은 2016년에 Fox Sports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당시 팀동료들로부터 "유잉이 없는게 낫다"는 뒷얘기가 나와 질린 나머지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전했다. 즉, 사실 스캇 레이든과 뉴욕 프런트는 그를 트레이드하려고 한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대체할 센터가 없었던 닉스는 유잉의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이를 잘 알 수 있는게 이때 트레이드를 보면 닉스는 뭔가 많이 받아오긴 했지만 기껏 제대로 받아온 건 전성기가 한참 지난 스윙맨 글렌 라이스였고 나머지는 즉시전력으로 활용하기 힘든 선수들에 당장은 쓰지도 못할 다수의 1, 2라운드 픽 뿐이었다. 심지어 라이스는 당시 트윈테러가 있던 뉴욕 입장에서 꼭 필요한 선수도 아니었다. 게다가 유잉이 당시 과한 연봉을 받고 있었다고는 하나 고작 1년만 지나면 만기가 되는 상황이었다. 즉, 닉스 입장에서 저딴 매물들을 받고 프랜차이즈 스타를 팔아버렸다는 것만 봐도 이 트레이드의 주요 목적이 오직 급하게 유잉을 보내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유잉은 트레이드를 요구한 걸 나중에 후회했다고 한다.
이 시즌이 끝나고 FA가 된 유잉은 올랜도 매직과 2년 계약을 맺었다. 이미 그랜트 힐이 33번을 달고 있어 본인은 3+3이자 드림팀 1당시의 배번인 6번을 달고 활약했다.[56] 비록 전성기의 실력은 완전히 잃어버린 그였지만, 데뷔 후 커리어 최초로 백업 센터의 역할을 수행하며 온전히 팀에 헌신하였고 가끔씩 전성기의 실력을 뽐내며 팀의 극적인 승리를 이끌기도 해 클래스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2001-02 시즌 종료 후 계약기간이 1년 남았지만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57] 만족할만한 선수 생활을 보냈지만 우승과 챔피언 반지를 획득하지 못한 것만은 정말 아쉽다는 소감을 남겼다.
은퇴 직후 그 분이 계신 워싱턴 위저즈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임명되었으며, 2003년 2월 28일 뉴욕 닉스의 홈경기에서 공식 은퇴식과 함께 그의 배번 33번이 영구결번되었다. 그의 마지막 인사는 "I always will be a knick, I always will be a New Yorker. Thank you very much."
뉴욕의 심장 유잉이 은퇴 직전 타향살이 중에 만난 휴스턴 로키츠의 레전드 하킴 올라주원과 펼치는 대결 한 컷.[58]
3. 플레이 스타일
한국에서만 쓰는 말이지만 이른바 4대 센터[59]라고 불리는 센터 중 하나로, NBA에서 83~87년 5시즌 연속으로 드래프트 전체 1위로 지명된 특급 센터 중 1명이다.[60]유잉은 파워, 스피드, 테크닉 등 특정 카테고리에서 리그 No.1을 논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기본기에 충실하고 골밑 안정감이 뛰어나 지금까지도 센터의 교과서이자 이상적인 모델로 평가받는다. 부상과 노화로 인해 파워 센터의 이미지를 다소 상실하긴 했지만 샤킬 오닐이 등장하기 전까진 당대 올스타급 센터 중 가장 파워가 강한 축에 들어갔으며,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커리어 전성기때는 큰 보폭으로 치고 들어가는 드랍 스텝에 이어 바로 덩크로 찍어버리는 등 파워풀한 공격루트를 많이 보여줬다.[61]
커리어의 대부분을 1옵션으로 보낸 정통파 센터답게 뛰어난 포스트업 능력은 당연히 갖추고 있었다. 로우포스트에서 훅 슛과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를 모두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는 선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우 드문데, 유잉은 이 두 기술의 장인인데다 상술했듯 힘 역시 매우 강하고 긴 팔로 인해 타점까지 높아 막기가 힘들었다. 시그니쳐 무브로는 드랍스텝, 러닝훅, 페이드어웨이가 유명하며 핑거롤도 잘 사용했다.
젊은 시절 무릎 부상 이후로는 공격의 다변화와 골밑 공격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드레인지 슈팅을 장착하였는데, 유잉의 슛은 릴리즈 포인트가 높은데다가 릴리즈 순간을 의도적으로 매우 늦게 가져가 상대 선수가 알고도 블로킹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비거리까지 매우 길어 3점 라인 근처에서도 높은 정확도를 자랑했으며 심심찮게 3점슛까지 꽂아넣었다. 라이벌 하킴과 로빈슨 역시 중거리 점퍼를 잘 꽂았지만 유잉의 미들은 그 중에서도 단연 톱이었다는 평.
외곽에서 페이스업으로 자유자재로 득점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특유의 어깨빵을 내세운 투스텝 돌파를 유용하게 잘 쓰던 선수이기도 했는데, 보폭이 매우 넓기 때문에 스텝을 크게 두 번 밟으면 3점 라인 부근에서 골밑까지 돌파가 가능했다. 유잉의 파워가 빛났던 게 이 부분으로, 파워가 딸리는 선수가 이런 플레이를 하면 수비벽에 꼴아박는 셈이라 볼을 흘리기 십상이다. 따라서 센터급 장신이지만 스피드로 돌파하는 유형[62]이 아니고서야 상대적으로 둔할 수밖에 없는 센터들은 그다지 쓰지 않는 옵션인데, 유잉의 경우 스피드는 빠르지 않지만 타고난 힘과 단단한 어깨를 가져 이를 바탕으로 강하게 돌파해 들어가면 막는 입장에선 돌파동선을 밀어내긴 커녕 튕겨져나가기 일수였다.[63]
최전성기였던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까지는 다른 4대 센터만큼은 아니더라도 운동능력이 상당히 괜찮은 편이라 속공농구에도 제법 강세를 보였다. 특히 포인트 가드 마크 잭슨과의 호흡이 환상적이어서 잭슨과 함께 뛰던 89-90 시즌엔 경기당 무려 28.6점까지 올리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킴 올라주원을 제치고 퍼스트 팀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91-92 시즌부터 득점 볼륨이 25점 이하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기량의 저하는 아니고 이때부터 부임한 감독 팻 라일리가 기존 스튜 잭슨 체제의 빠른 농구를 버리고 수비 위주의 느린 페이스 농구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약점은 바로 망가진 무릎.[64] NBA에서 유잉은 운동능력과 기술을 겸비한 센터였지만 운동능력이 빨리 꺾였다보니 빠르다거나 탄력적이라는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옅은 편인데[65], 사실 부상 전인 대학 시절의 유잉은 힘, 스피드, 점프력 등 뭐하나 빠지지 않는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파워풀하고 역동적인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66][67] 그러나 지속된 부상은 그의 운동능력을 많이 앗아갔으며, 이로 인해 전반적인 실링이 다운됨은 물론 프로 중반부터는 무릎이 워낙 안 좋아서 재빨리 움직이기 힘들어했다. 그가 명성에 비해서 리바운드가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던 이유도 프로에 데뷔할 때 쯔음에는 민첩성이 이미 대학시절보다 낙후된 뒤였기 때문.[68]
수비의 경우 라이벌 올라주원과 데이비드 로빈슨에 비해선 한 끗 떨어지는 편이었다.[69] 그러나 기본적으로 높이[70]와 파워를 둘 다 갖추고 있어서 1대1 수비에서 매우 강했으며, 올라주원이나 로빈슨처럼 빠르진 않았지만 센스가 매우 뛰어나서 도움수비를 포함한 팀 수비에서도 일급이었다.[71] 특히 시리즈 30블록을 기록했던 1994 파이널에서 휴스턴 선수들이 골밑으로 들어오는 족족 신들린 듯 쳐내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닉스는 90년대 최강의 수비팀이었으며, 이 팀에서 최고의 수비수이자 팀 수비의 핵은 바로 유잉이었다.
실제로 유잉은 루키 시즌부터 평균 20득점을 기록했을 정도로 공격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였지만, 그가 데뷔할 당시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보면 그를 "수비 전문 선수(defense specialist)"라고 부르며 "프로농구가 공격력을 보이는 시대가 된 마당에, 압도적인 수비력을 통해 게임을 지배하는 유잉의 능력은 흔치 않은 자산이다"라고 설명했다.[72] 프로데뷔 이후에도 유잉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수비력이었다.
프로시절 유잉이 공격에서 다른 4대 센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건 1대1 능력이었다. 물론 상술했듯 포스트업이 좋고 조지타운 센터들의 특기인 러닝 훅슛과 페이드어웨이가 있어 혼자서 득점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있었지만, 하킴 올라주원처럼 별격의 테크닉을 구사하거나 샤킬 오닐처럼 압도적인 파워로 찍어누르며 매치업을 시종일관 유린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주로 패스를 받아 점퍼를 넣는 편이었다.[73] 유잉이 새가슴이라는 오해를 받은 게 득점을 마구 퍼부으며 이른바 "폭발"하는 경기가 별로 없어서인데, 그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20점대 득점은 꾸준히 올려주고 감이 좋은 날에는 30득점 이상도 곧잘 기록하는 건실한 득점원이었으며 클러치 샷이나 위닝 샷을 꽤 많이 넣을 정도로 나름대로 강심장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결정적인 순간에 레이업을 놓친 적이 몇 번 있는데 가장 큰 실수는 1995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 최종 7차전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상대로 경기 종료 직전 동점으로 만들수도 있었던 핑거롤을 놓친 것이다. 이 핑거롤이 림을 들어갔다가 나와버리는 불운으로 닉스는 시리즈에서 탈락해버리고 말았는데, 아이러니하게 유잉의 핑거롤은 상당히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다. 위에 언급된대로 라이벌들에 비해 운동능력이 떨어지다보니 골대 근처에서 "내려놓는" 로빈슨이나 올라주원, 아예 덩크를 찍는 오닐과 달리 손끝 감각에 의존해 "던지는" 편에 가까웠는데, 이러다보니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74]
전체적으로 보면 디펜시브팀 숫자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S급 수비력[75], 한 때 리그 득점리더 3위를 기록했으며 몸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까진 평균 20득점대를 일관적으로 유지했던 공격력, 명성에는 다소 못미치지만 그럼에도 준수한 축에 들어가는 리바운드 능력을 가진 센터였다.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올-NBA 퍼스트 팀 (1990) 올-NBA 세컨드 팀 6회 (1988, 1989, 1991-1993, 1997) NBA 올스타 11회 (1986, 1988-1997)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3회 (1988-1989, 1992) NBA 올해의 신인상 (1986)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6) 네이스미스협회 선정 올해의 대학선수상 (1985) NCAA 챔피언 (1984) NCAA 파이널 포 MOP (1984) 네이미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8) 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금메달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
5. 평가
5.1. 유잉 무용론(Ewing Theory)
사실 유잉은 좋은 스탯에 비해 실제 경기에서 영향력은 그리 높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잉이 없었을때 닉스가 더 나은 경기력을 발휘했다는 설. 유잉 무용론을 언급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빌 시먼스이다.[76][77] 시먼스는 유잉이 빠진 닉스가 좋은 성적을 기록한 적이 있다는 걸 계기로 "스타 선수가 빠지고, 팬들/언론에서 끝났다고 하는데 오히려 팀은 잘 나갈 수 있다"는 Ewing Theory를 언급했다.[78] 또 그는 이 이론의 창시자로 본인이 아닌 친구 데이브 시릴리(Dave Cirilli)를 언급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말년에 기량이 심하게 떨어진 유잉은, 상성에서 밀리는 일부팀과 경기에서 기용을 제한적으로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말년의 유잉이라도 평균 이상의 좋은 선수였고, 커리어 전체적으로 보면 그냥 말도 안되는 소리일 뿐이다.
유잉 무용론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1999년 플레이오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이었다.[79] 당시 상황을 정리하자면, 닉스와 인디애나는 둘 다 당시 하프코트 팀이었다. 인디애나는 마크 잭슨이 볼을 피딩해주면 릭 스미츠- 데일 데이비스/앤토니오 데이비스(후보)가 스크린을 걸어주는 사이 크리스 멀린과 레지 밀러가 볼을 받아서 슛을 쏘는 득점을 하는 구조였다. 닉스는 에이스 패트릭 유잉의 포스트업을 중심으로 커트 토마스가 파워 포워드로 받혀주고, 찰리 워드가 볼을 피딩하고 앨런 휴스턴- 래리 존슨 듀오가 득점을 지원, 벤치에서 라트렐 스프리웰이 활기를 불어넣는 팀이었다.
그런데 이때 2차전 이후 부상으로 유잉이 빠지자 일시적으로 커트 토마스-크리스 더들리 체제로 갔다가 아예 더들리를 센터로 세우고 당시 스몰 포워드였던 존슨이 파워 포워드로 올라가고, 백업이었던 스프리웰을 스몰 포워드로 기용하는 스몰라인업을 세운 것이다. 문제는 당시 인디애나는 잭슨-밀러-멀린 트리오가 모두 30대 중반이라 운동능력이 떨어져서 20대 후반이던 스프리웰-휴스턴의 에너지 넘치는 백코트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존슨은 원래 파워 포워드였던 선수라 오히려 스몰라인업의 4번으로 빛났다. 저렇게 되니 인디애나는 상성에서 밀리며 남은 네 경기에서 1승3패로 밀리며 탈락하고 말았다. 이 때 스몰라인업의 위력을 본 닉스는 다음 시즌 스프리웰을 주전 SF로 올리고 (그전까지 그는 슈팅 가드가 주 포지션이었다), 존슨을 붙박이 주전 PF로 쓰게 된다. 물론 센터는 유잉.
문제는 위에 언급된 대로 2000시즌에 인디애나와 플레이오프에서 재대결이었다. 앞서 언급된 대로 늙고 느린 인디애나는 오히려 유잉 위주의 느린 하프코트 오펜스는 감당할 수 있었으나[80], 에너지 넘치는 닉스의 스몰라인업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컨퍼런스 파이널 6경기동안 닉스는 유잉이 빠진 두 경기(3,4차전)를 모두 이긴 반면, 유잉이 뛴 네 경기(1, 2, 5, 6차전)를 전패하고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고 유잉 무용론은 절정에 달했다.
이를 근거로 빌 시먼스는 다른 유잉 이론의 해당자를 언급했다. 여기서 언급된 선수들은 1997 드래프트에서 팀 던컨에 이어 2순위로 지명된 키스 밴혼, 대학 시절의 페이튼 매닝, 켄 그리피 주니어, 엘진 베일러 등이 있다.
5.1.1. 타당한가?
이는 유잉의 활약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경기는 완전히 배제하고, 유잉이 없이 이긴 경기에만 초점을 맞춘 지극히 보고싶은 것만 골라 보는 결과론이다.일단 당시 1999년 플레이오프 경기를 보면 위에서 언급된 대로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상성상 빠르고 다이나믹한 스몰라인업엔 쥐약이었던 팀이었다. 실제로 당시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상대로는 유잉이 주전 라인업에서 빠지는게 더 유리하다. 하지만 다른 팀을 상대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게 문제였다. 스몰라인업의 센터였던 크리스 더들리나 커트 토마스가 샤킬 오닐과 매치업할 수 있겠는가?[81] 더 중요하게는 97년부터 4년 연속 혈투를 벌였던 마이애미 히트의 알론조 모닝과? 그리고 이처럼 센터가 강한 팀과 매치업했을 때 유잉이 없이는 애로사항이 꽃핀다. 유잉이 없었다면 당시 오닐을 제치고 올-NBA 퍼스트 팀에 올르는 등 기량이 절정에 달했던 모닝을 닉스가 넘는 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82] 그리고 이 동부를 평정하고 파이널까지 올라온 닉스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며 패배하는 것도 유잉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인디애나는 골밑 공격력이 비교적 약한 점프슈팅팀이라[83] 사실상 센터없이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성의 중요한 예로, 07시즌 당시 MVP 디르크 노비츠키가 이끌던 67승의 댈러스 매버릭스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게 1라운드에 패배했는데, 그렇다면 매버릭스는 정규 시즌용 팀일까? 전혀 아니다.[84][85]
무엇보다 이 이론은 당시 경기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에게조차 빈축을 샀다. 당시 닉스 감독 제프 밴건디는 유잉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멍청이들(fools)' 이라는 한 마디로 종결을 지었으며, 트윈 테러의 한 축이었던 라트렐 스프리웰 또한 '유잉 없이 이긴 경기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유잉 없이 게임을 뛰는 것은 유잉과 함께 뛰는 경기보다 몇 배는 힘이 든다'고 점잖게 일침을 놓았을 정도. 실제로 99년 히트와의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앨런 휴스턴의 0.4초 버저비터로 극적인 업셋을 달성한 경기에서는 모닝을 압도했던 유잉의 활약이 없었다면 그런 클러치 상황을 만들 수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해당 경기는 22득점 11리바운드의 유잉이 21득점 5리바운드에 그친 모닝을 압도했지만 시리즈 전체를 놓고 보면 압도까진 아니었다. 당시 말년이라 하락세가 뚜렷하던 유잉과 달리 8살이나 아래인 모닝은 만 29세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시리즈 평균 스탯으로 보면 모닝은 21.6점 8.2리바운드, 유잉은 14.6점 10.8리바운드로 오히려 모닝이 앞섰다. 그러나 상성상 모닝은 유잉을 상대하기 힘들어했는데, 중거리슛이 있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골밑에서 득점하는 정통센터였던 모닝 입장에선 키도 크고 팔도 긴 유잉이 여전히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실제로 젊고 더 에너지가 넘치는 모닝이 정규 시즌보다 리바운드가 떨어지고, 늙은 유잉은 오히려 리바운드 수치가 올라간 걸 봐도 알수 있다. 게다가 유잉은 모닝보다 평균 4분(38분 vs 34분) 적게 뛰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큰 차이도 아니다. 또한 유잉 vs 모닝만 그런게 아니라 이때 닉스에는 마커스 캠비, 크리스 더들리같이 모닝보다 키크고 높이도 높은데다 수비력이 준수한 백업센터들이 돌아가면서 골밑을 채웠고, 이들을 보좌하는 살림꾼 파워포워드 자리에는 래리 존슨, 커트 토마스 같은 터프가이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활동범위가 좁았던 유잉을 보좌했다. PJ 브라운이라는 유능한 파워포워드가 있었지만 히트는 골밑은 모닝에게 맡기고 팀 하더웨이, 자말 매쉬번, 댄 멀리같은 가드, 스몰포워드쪽이 강했고 팀 전체적으로 단신팀이었던 히트는 닉스의 골밑 높이에 모닝이 고전한 약점이 찔리면서 밀리기 시작했다. 또한 이듬해 히트와의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는 2승 3패로 뒤진 일리미네이션에서 두 경기동안 35득점 28리바운드를 쓸어담으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결정적으로 유잉이 떠난 후 글렌 라이스를 데려와 트리플 테러를 구축했던 2001년에 정규 시즌 성적의 하락은 물론, 플레이오프에서도 근 13년만에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맛보며 기나긴 닉스 암흑기의 서막을 알렸다.
애초에 이렇게 눈 앞의 승패 기록만 보고 판단하는 건 변화무쌍하며 온갖 변수가 있는 농구란 스포츠의 특성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농구가 비록 야구나 축구보다 변수가 적다고 하나 96시즌에 72승으로 최다승 기록을 거둔 챔피언 팀 불스가 꼴찌팀 랩터스에게 덜미를 잡히는 등 같은 팀의 전력이라도 컨디션이나 상성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이 시리즈에서 이긴 경기나 진 경기가 모두 동일한 조건(양 팀 선수들의 컨디션, 전술 등)에서 벌어지고 딱 유잉의 존재 유무만 차이가 난 게 아닌 이상 이걸 갖고 "유잉이 없으니 이겼네?"라고 하는 건 1차원적 발상이다. 같은 선수라도 컨디션에 따라 10점 넣고, 40점 넣는 등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유잉 무용론은 겉으로 드러난 승-패 기록, 스탯만 보기 때문에 실제 경기 내용은 반영하지 않는다. 유잉은 당시까지만 해도 포스트업에서 위력적인 선수였고, 그가 골밑에 있기만 해도 수비가 몰려 스프리웰 같은 돌파위주 선수들에게 숨통이 트인다. 또한 집중수비를 받는 주득점원이 해주는 득점은 아무 수비 없이 받아먹기로 하는 득점과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전성기급 수비력은 아니었지만 7피트 신장에 훌륭한 수비센스를 갖고 있는 유잉이 골밑에서 버티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크다.
추가로 이 유잉 무용론을 커리어 전체로 확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더더욱 생억지다. 인디애나와 상성 문제가 불거진 유잉은 만 37세로 느려질대로 느려진 선수였다. 이 때의 유잉이라면 상대에 따라 기용을 제한하는 게 말이 될 수 있지만 전성기 때 유잉은 기동력 문제가 있지도 않았다. 또한 그가 전성기가 지나고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기동력이 저하된 이후에도 아주 말년(만 36~37세 부근) 전까진 기동력 저하가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다. 워낙 하프코트에서 위력이 강했기에 당장 만 35세에 가깝던 97시즌에 올-NBA 세컨드 팀에 들엇던게 유잉이었다. 샤킬 오닐이 유잉에 밀려 이 시즌 서드 팀에 그쳤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오닐만 하더라도 발이 심하게 느려진 2000년대 중반까지 최정상급 선수로 위용을 보였다. 아무리 발이 늦어서 속공시 애로사항이 생긴다고 해도, 하프코트에서 상대방을 박살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유잉 무용론은 말년의 유잉이 일부 팀들을 상대로 상성에서 밀려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것이지, 진짜 유잉이 없어야 팀이 잘 돌아가는 게 아니다.
또한 위의 유잉 무용론의 예시로 된 선수들의 케이스가 모두 타당한 것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베일러의 경우, "그가 72시즌 초반에 은퇴하자 레이커스는 33연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면서 그를 과대평가받은 선수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당시 베일러는 은퇴를 앞두고 있어 실력이 떨어질 때로 떨어진 선수였다. 베일러가 슈퍼스타급 실력을 발휘한 건 사실상 70시즌이 마지막이었다(24점 10.4리바운드). 그 다음 시즌에 그는 부상으로 2경기에서 10점 5.5리바운드에 그쳤으며, 72시즌엔 9경기 11.8점 6.3리바운드에 그쳤다. 즉, 유잉 무용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베일러가 화려한 스탯에도 불구하고 실제론 팀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 그가 은퇴했음에도 팀이 우승했다"가 아니라, "은퇴를 앞두고 실력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팀에 도움이 못 됐었다"가 맞는 것이다.
위대한 선수들이 은퇴를 앞두고 전성기에 한참 못 미치는 기량으로 플레이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며, 스스로 현실을 인정하고 작아진 롤을 감수하며 팀에 헌신하는 모습이야말로 베테랑의 품격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유잉 또한 닉스에서의 말년 시절엔 1, 2옵션을 앨런 휴스턴과 라트렐 스프리웰에게 양보하면서 공격에서의 롤을 대폭 줄이고 수비라인의 핵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스탯상으로는 경기당 평균 15.0득점 9.7리바운드로 크게 눈에 띄는 성적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말년의 모습을 두고 과대해석하며 "봐라. 명성에 비해 실제 공헌도는 형편없네"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유잉 무용론의 가장 큰 문제가 이것이다. 해당 슈퍼스타가 잘해서 팀이 잘했을 때, 또한 그 선수가 빠져서 팀이 힘들었을 때는 안 보고, 이 이론에 맞는 일부 케이스만 보고 전체인양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유잉의 경우, 그가 빠져서 잘 나갔을 때는 말년에, 그것도 일부 경기에서밖에 없다. 베일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걸 갖고 전체인양 확장하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유잉의 리더십과 그의 가치에 대한 본 한 국내팬의 글
5.2. 애매한 팀복
각종 NBA 미디어에서 팀원들이 가장 받쳐주지 않은 90년대 NBA 스타로 종종 선정된다. 1990년대의 뉴욕 닉스는 전투적이고 투지넘치는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이름값은 많이 떨어지는 팀이었던 것도 사실. 올라주원이 95년에 드렉슬러를 얻었던 것과 달리 닉스 프런트는 유잉을 받쳐줄 올스타급 이상의 선수를 영입하지 못했다.사실 파트너가 약했던 건 어느정도 사실이긴 한게, 원맨우승에 가까웠던 91우승 이후로는 피펜이 훌륭한 2옵션으로 성장해 파트너를 이뤘던 조던, 케빈 존슨이라는 스타 포인트 가드와 함께했고 공수겸장 댄 멀리를 3인자로 둔 피닉스 시절의 바클리, 1994 원맨우승 이후 드렉슬러를 2옵션으로 두는 호사를 누린 올라주원, 던컨이라는 슈퍼 영건의 합류로 2옵션으로 내려오긴 했지만 우승을 거머쥔 로빈슨, 영혼의 파트너 스탁턴과 함께한 말론, 켐프와 슈렘프를 곁에 둔 페이튼 등에 비하면 유잉은 전성기 때 자신과 쌍끌이가 되어줄 특급 2옵션은 가지지 못했다.
5.2.1. '팀복 때문에' 우승을 못했는가?
다만 유잉이 우승을 못한게 과연 '팀복 때문인가?' 하면 그렇게 단순하게 보기는 어렵다.우선 유잉은 2옵션은 약했을지언정 사이드킥은 제법 나쁘지 않게 보급받아온 선수이다. 90년대 초중반은 앤서니 메이슨, 찰스 오클리, 존 스탁스 부터 96-97시즌 이후 앨런 휴스턴, 래리 존슨, 라트렐 스프리웰, 마커스 캠비까지 멤버 수준 자체는 상당했기 때문. 90년대 초중반 닉스 멤버들은 악과 깡으로 뭉친 터프가이들이었고 인기만 적었지 멤버 수준도 당시 불스, 포틀랜드, 피닉스, 휴스턴과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었다. 90년대 중후반 역시 전성기에서 내려왔지만 존슨은 팀원으로 쏠쏠했고 스프리웰은 이미 올스타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선수였다. 이 시점부터 유잉의 노쇠화가 서서히 시작된 것이 아쉬울 따름.
사실 드렉슬러가 오기 전인 93-94 휴스턴만 해도 올라주원을 제외하면 당시 닉스와 비교해서 확실히 우월하다고 여길 포지션은 없다. 루키 샘 카셀, 소포모어 로버트 오리, 준수하지만 역시 올스타급은 아니었던 케니 스미스, 그나마 파워 포워드 오티스 도프가 올스타전에 딱 한 번 나간 적이 있지만 그나마도 93-94 당시즌에 올스타급 선수였다고 보긴 어렵다. 찰스 오클리, 앤서니 메이슨이 더 높은 레벨선수면 선수지 절대 도프와 비교해서 떨어지는 선수는 아니었다는 것. 당시 두 팀은 실제 파이널에서의 모습이나 패넌트레이스 성적을 비교했을 때 백중세의 전력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정규 시즌 기록이나 파이널에서의 활약은 분명 하킴 올라주원의 우위였기에 적어도 해당 시즌에 한해서 유잉은 팀전력을 탓할 수 없다. 오히려 에이스를 제외한 팀전력에서 닉스가 결코 딸리지는 않았지만 정작 에이스 유잉이 올라주원에게 밀려 우승에 실패한 것이 때문. 즉, 이건 그냥 에이스 대결에서 참패한거지 팀 차원에서 밀린 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닉스가 호화멤버로 여겨질 수도 있는 98시즌부터는 유잉의 노화문제가 심했으니(만 36세) 전성기 기준으로 논하자면, 닉스에 조력자형 선수들이 많고 드렉슬러나 앤퍼니 하더웨이처럼 한 팀의 에이스를 할 법한 스타급 선수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닉스는 한 명의 슈퍼스타와 수준급 조력자들이 뒤를 받혀주는 잘 짜여진 팀이었다. 유잉 시절 팀의 황금기라고 할법한 92~94시즌까지[86] 닉스는 매우 피지컬한 수비로 상대팀의 골밑 공략을 막아 야투율을 떨어뜨리고, 확실한 공격옵션인 유잉으로 차근차근 득점을 쌓아가며 승리를 챙기는 팀이었다. 즉, 닉스는 어디까지나 피지컬한 수비로 먹고 사는 팀인데, 수비가 뛰어나면서 거친 오클리, 메이슨, 스탁스, 자비에르 맥다니엘, (거친 선수는 아니지만 운동능력이 뛰어난) 제럴드 윌킨스 등은 이름값은 뛰어나지 않더라도 당시 닉스에 필요한 인재들이었다. 물론 공격력으로 유명한 피닉스나 케니 스미스-"매드 맥스" 버논 맥스웰-로버트 오리-샘 카셀이 외곽에서 지원해주는 휴스턴이 더 뛰어난 공격진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만큼 닉스는 수비에서 더 강력한 팀이었다.
포인트는 당시 닉스는 멤버가 딱히 부족한 팀이라기보다는, 확실한 슈퍼스타 에이스와 팀컬러에 맞는 조력자들을 두고 있는 우승후보 전력의 팀이었으며, 유잉이 딱히 동료복이 없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슈퍼 2옵션의 부재를 논하기도 뭣한게, 원투펀치가 강한 피닉스, 시애틀, 유타 등은 어차피 서부 소속이이라 파이널에서 만난 적도 없다. 유잉을 매번 물먹인 불스는 조던-피펜을 보유했지만 2옵션을 제외한 전반적인 사이드킥의 질은 오히려 닉스가 더 높았고, 상성면에서도 닉스가 더 유리한 구석이 있었기에 팀 전력 탓을 하기는 애매하다. 또한 유잉의 닉스와 그야말로 숙적이었던 밀러의 인디애나는 2옵션이래봐야 올스타 딱 한 번 해본 릭 스미츠나 마크 잭슨이 꼽히는 정도였다.
애초에 닉스는 조던의 불스가 매번 가로막지 않았으면 충분히 파이널에 오르고도 남을 전력의 강팀이었으며, 실제로 에이스 유잉이 부진했음에도 94시즌에도 7차전까지 가서 정말 한 끗 차이로 우승을 놓쳤다. 운이 조금만 더 따랐다면 실제로 우승을 했을 것이다. 닉스의 불운이라면, 팀컬러 특성상 공격은 유잉이 이끄는 와중에 조력자들이 지원을 어느 정도 해주는 정도로도 충분한데 (어차피 수비로 먹고사니까) 하필 파이널 시리즈에서 유잉이 너무나 부진했고, 득점 지원을 해주던 스탁스가 하필 7차전에서 생애 최악의 부진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또한 9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선수들의 공통적인 불운인, 동시대에 여섯 번의 우승을 쓸어담은 마이클 조던의 불스가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하필 같은 컨퍼런스에서 뛰어 무려 다섯 번이나, 심지어 본인 전성기때 3년 연속으로 붙어 모두 광탈했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보면 유잉이 딱히 동료복이 없어서 우승에 실패했다고 보긴 힘들다는 것.
5.3. 저주받은 수상복
유잉에 대해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바로 그의 저주받은 수상운이다. 1990년대의 센터 뎁스는 NBA 역사상 최고 수준이었는데, 일례로 1994년, 1995년의 경우 2년 연속으로 MVP 투표 상위 5명 중 네명이 센터였다.[87] 이로 인해 1994년에 유잉은 24.5득점 11.2리바운드 2.7블록 1.1스틸을 기록하고 MVP 투표에서 상당히 표를 얻었음에도 서드 팀에도 들지 못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꼭 이 때만이 아니더라도 그는 MVP 4~5위를 여섯 차례나 기록한 선수였는데, 그럼에도 매번 올라주원과 로빈슨에게 물먹으며 커리어동안 퍼스트 팀 수상은 단 한 번에 그쳤다.2016년에는 디안드레 조던이 퍼스트 팀에 들면서 미친 센터진 뎁스로 퍼스트 팀에 한번밖에 못 올랐던 유잉이 다시 한번 부각되었다. 비록 스탯이 전부가 아니라지만 조던은 이 시즌이 평균 12.7득점 13.8리바운드 2.3블록을 기록했는데, 수비형 센터로는 훌륭하지만 문제는 그가 팀내 1옵션이나 올스타 주전레벨의 선수는 아니었다는 것. 유잉 시대에는 MVP 후보 센터도 올-NBA 세컨드 팀이나 서드 팀으로 밀려나는 일이 빈번했고[88], 퍼스트 팀은 정말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그러나 디조던은 MVP 후보에 지나가는 말로라도 언급도 된적이 없으며 올스타 레벨의 선수들 중에서도 비교적 말단 취급이었다. 유잉 시대까지 갈것도 없이 2008-09 시즌에 MVP 투표 2위에 퍼스트 팀에 오른 드와이트 하워드와 비교해봐도 디안드레 조던의 위상은 민망할 정도로 밀린다. 그런데 2015-16 시즌 수상을 통해 NBA 역대 가장 위대한 50인에 꼽히고 센터 중 역대 Top 10 안에 든다고 평가받는 패트릭 유잉과, 커리어 통틀어 올스타에 딱 한 번 뽑혀본 선수가 퍼스트 팀 횟수는 1회로 동률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것.
이는 수비 역시 마찬가지로, 아래 플레이 스타일에도 나와있지만 유잉은 경쟁자 풀에 따라서는 수비왕도 진지하게 노려볼 수 있는 선수였다. 문제는 유잉과 커리어가 대부분 겹치는 올라주원과 로빈슨이 NBA 역대로도 손꼽히는 수비수라는 것이고.. 이로 인해 유잉은 닉스라는 리그에서 알아주는 수비팀의 최고 수비수였음에도 올해의 수비수상은 커녕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조차 수상하지 못했다. 세컨드 팀이라도 많이 수상한 올-NBA 팀과 달리 올-디펜시브 팀은 그 세컨드 팀조차 3회에 그쳤으며, 커리어 내 최고의 시즌을 보낸 90시즌에는 평균 4블록을 기록하고도 올라주원과 로빈슨에 밀려 올-디펜시브 팀에 뽑히지 못했다.[89]
5.4. 4대 센터 내에서의 위치
결론부터 말하자면 4대 센터 내에서는 말단의 위치라는 데에 이견을 제시하는 이는 거의 없으며, 커리어 마일스톤에 있어서 나머지 세 명과의 간극 역시 상당히 큰 편이다. 유잉을 제외한 나머지 3인의 주요 키워드를 언급하면 아래와 같다.- 샤킬 오닐: MVP 위너, 조던과 더불어 3연속 우승 및 파이널 MVP 3연패를 달성한 단 둘 뿐인 선수[90]
- 하킴 올라주원: MVP 위너, 올해의 수비수상 x2 위너, 2회 우승 달성 및 파이널 MVP x2 위너
- 데이비드 로빈슨: 2회 우승 달성 및 조던과 더불어 MVP, 올해의 수비수상, 득점왕을 모두 보유한 단 둘 뿐인 선수
상기한 오닐의 경우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포지션 불문 NBA 역사상 Top10 내에 들어가는 선수이고, 나머지 둘은 유잉에게 없는 MVP와 DPOY를 모두 보유한 선수이다. 올라주원의 경우 플레이오프에서 훨씬 강해지는 면모를 보이며 팀 동료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1994 휴스턴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조던조차 해보지 못한 MVP+올해의 수비수상+파이널 MVP 동시 석권이라는 대업을 달성했으며 이어지는 두 번째 우승으로 오닐에 버금가는 족적을 남겼다. 오닐과 올라주원은 최전성기 기량만 따지면 무려 조던과 비교되는 선수이니 만큼 유잉과의 고점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는 것. 셋 중 그나마 평가가 쳐지는 로빈슨의 경우 파이널 MVP를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정규 시즌에는 조던&르브론에 비견될만한 2차 스탯을 뽑아내는 선수였다.
반면 유잉은 올-NBA 팀과 올-디펜시브 팀에 있어 크게 손해를 본 건 사실이나 일단 우승이 없고, MVP 수상자인 저들과 달리 MVP 포디움(Top 3)에도 들어간 적이 없다. 4~5위는 심심찮게 기록했고 보통 MVP 레이스 5위까지는 어느정도 유의미한 득표로 쳐주기에 리그 Top 5급의 기량은 자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으나, 이는 뒤집어 말하면 정말 치열하게 MVP를 두고 경쟁할만한 시즌을 보낸 적은 결국 없다는 뜻도 된다.
물론 유잉은 센터 세컨드 팀에 6차례나 들어간 선수인 만큼 수상 경쟁에서 올라주원, 로빈슨 둘 중 하나를 제낀 적은 많다. 그러나 커리어의 '고점'이 나머지 셋보다는 확연히 낮고, 무엇보다도 분명히 우승의 기회가 왔을 때 본인이 올라주원 앞에서 극악의 부진을 보이며 우승을 놓친 점이 상당히 치명적인 부분이 된다. 그렇게 부진했어도 휴스턴과의 파이널이 7차전까지 가긴 했지만, 이는 오히려 유잉이 올라주원에게 짓눌리는 와중에도 시리즈가 마지막까지 진행될 정도로 휴스턴이 닉스보다 나을 것 없는 전력이었다는 말이 된다. 당장 그 다음 시즌에 마찬가지로 올라주원에게 잡아먹혔다고 평가받는 로빈슨조차 해당 시리즈에서 23.8득점을 ts%0.554로 집어넣은걸 생각하면, 비교하는게 로빈슨에게 실례일 정도로 가로막힌 유잉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셈.
다만 유잉이 저 넷 중 가장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저들과 급이 다른 선수라고는 할 수 없는게, 이들의 전성기 당시 이들은 서로 대등하게 매치업하며 엎치락 뒤치락하는 수준이었지 유잉만 압도적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로빈슨이 데뷔한 89-90시즌의 경우 유잉 퍼스트 팀-올라주원 세컨드 팀-로빈슨 서드 팀이었으며, 91년은 로빈슨/유잉/올라주원 순, 92년은 로빈슨/유잉/브래드 도허티(생애 유일한 서드 팀), 93시즌은 올라주원/유잉/로빈슨이었다. 94,95,96년은 3년 연속으로 유잉이 탈락했지만, 96-97시즌에는 올라주원 다음의 세컨드 팀으로 돌아왔다. 물론 97시즌의 경우 오닐이 51경기, 로빈슨이 거의 시즌아웃된게 결정적이긴 했지만 전술했듯이 90년부터 4년 연속으로 저 세명은 엎치락뒤치락했으며 이 기간동안 이들의 평가도 비슷했다.[91] 또한 94, 95년의 경우에도 유잉은 각각 MVP 5위, 4위였다.
실제로 89년부터 92년까지는 올라주원보다 유잉의 MVP 순위가 매년 더 높았다.[92] 올라주원의 경우 랄프 샘슨이란 특급 센터와 트윈타워를 이뤘기에 팀성적 버프로 초반에 수상실적에서 유리했지만 이후 샘슨의 이탈, 팀의 몰락으로 인해 저때 점점 실적이 떨어졌었고, 유잉은 반대로 믿을만한 동료가 없는 상황에서 데뷔해 불리하다가 점점 팀이 강해지면서 성적 버프를 받게 된 것이다. MVP는 기본적으로 팀성적이 상당히 큰 변수로 작용한다. 물론 로빈슨/올라주원/오닐 모두 팀을 정상까지 이끈 공이 있으니 고점에서 확실히 유잉보다 높은 것은 확실하지만, 포인트는 올라주원이 정점에 오르기까지 세간의 평가는 유잉과 비슷하게 "최정상급 선수인 건 알겠는데 우승해서 증명해야 한다" 정도였단 것[93], 그리고 이때까지는 기량이나 평가 면에서 비등한 라이벌이었단 것. 많이 간과되는데 94년 당시 유잉은 약간이나마 하락세에 접어든 상태였다. 예컨데 92년도 정도에 파이널에 둘이 붙었어도 저렇게 발렸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다. 물론 내구성과 '짧은 전성기' 역시 실력이므로 유잉이 저들보다 아래 위치란 걸 부인하는 건 아니다.
정리하면 올라주원과 유잉의 라이벌리는, 대학시절부터 1992년까지 이어진 비등한 실력의 두 라이벌 슈퍼센터들 중 올라주원은 팀플레이어로서 한 단계 스탭업해 정점을 찍었고[94], 유잉은 끝내 그 마지막 단계를 넘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둘의 차이가 단순히 팀 차이라고 보는 것도 적절한 평가가 아니고 (분명히 올라주원이 더 뛰어난 선수라고 평가하는게 맞다), 반대로 유잉이 아예 올라주원과 레벨이 다른 선수라고 보는 것도 적절한 평가가 아니다.
팬들 입장에선 은퇴한 선수들의 커리어 전체를 보기 때문에 누적 커리어가 떨어지는 유잉의 급이 달라보일 수 있는데, 1990년대 당시에 (일단 전성기가 다른 오닐은 제쳐두고라도) 유잉 vs 올라주원, 올라주원 vs 로빈슨, 로빈슨 vs 유잉은 서로 비등한 슈퍼센터들의 매치업으로 평가받았다.[95] 무엇보다 유잉이 올라주원과 로빈슨에게 비비지도 못 할 수준이라면 1989-90 시즌 당시 전경기를 뛴 올라주원을 제치고 유잉이 퍼스트 팀에 오르거나, 1991, 1992년에도 올라주원을 제치고 1993년엔 로빈슨을 제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유잉은 도허티처럼 생애 딱 한번 저들을 제친게 아니라, 전성기 당시 지속적으로 저들과 수상 경쟁을 벌인 인물이었다.[96]
물론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유잉은 올라주원, 로빈슨, 오닐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는 누적 커리어와 스탯 뿐 아니라 실제 실력이나 커리어 고점도 해당된다. 그러나 그 차이는 '누적 커리어가 암시하는 것 만큼' 크지는 않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국내팬들 한정이긴 하지만 당시 넷의 매치업을 지켜보던 1990년대 농구팬들 사이에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4대 센터'란 말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네 명이 당대의 센터들 중에서도 서로 팽팽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역량은 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유잉이 2G-2F-1C라는 시스템으로 인해 기량에 걸맞은 수상을 쌓지 못한 건 사실이고, 부상으로 인해 무너져가면서도 투혼을 불사른 위대한 선수인 것도 명백한 사실이지만, 결국 고점과 실적의 한계로 4대 센터들 중 실력, 커리어, 고점, 대외적인 평가는 가장 떨어지는 선수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잉이 저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는 입장은 아니었고 실제로 맞붙는 상황에서는[97] 저들과 팽팽하게 대치할 수 있었던 선수이며,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4대 센터 중 말석이란 게 유잉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셈이다. 유잉은 저 네 명 중 모든 면에서 가장 떨어졌지만, 반대로 1990년대를 주름잡은 뛰어난 센터들 중 저 네 명만 저렇게 묶일 정도로 저 넷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눈에 띄는 활약상을 펼쳤다.
5.5. 현대 센터들과의 비교
90년대에는 워낙 골밑존재감이 강한 센터들이 많았기에 '90년대에 활약한 센터들이 현대 센터들을 박살낼 것이다'란 추측들도 있고 유잉 역시 이런 자신감을 표한 적이 있지만 이는 공정한 비교가 아니다.[98]일단 정통 센터들의 시대에 뛰었던 패트릭 유잉의 로우포스트 존재감이나 포스트업 스킬의 완성도가, 내외곽을 오가는 어지간한 현대 센터들보다 더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 센터들은 유잉과 달리 외곽슛과 볼핸들링, 플레이메이킹 등 외곽 공격력이 뛰어나며, 이로 인해 훨씬 넓은 공격범위를 갖고 있다. 수비에서도 마찬가지로, 로우포스트에서 맨투맨으로 버티는 수비는 90년대를 풍미한 센터들이 더 익숙할 수 있으나 현대 농구에서는 저런 식으로 좁은 범위를 수비하는 센터들이 거의 없으며 이들의 위력도 한정적이다. 애초에 핸드체킹이 존재하고 수비범위가 좁았던 90년대와 달리, 핸드체킹이 폐지되고 일리걸 디펜스 룰이 수비자 3초룰로 대체되면서 골밑 공략이 더 용이해진 쪽은 외곽에서 림으로 파고드는 슬래셔들는지 센터들이 아니며 그들의 수비 방식도 상당히 달라졌다.
8,90년대엔 센터들의 활동반경이 상당히 좁았고, 서로 간의 매치업 대결은 주로 로우포스트에서 이뤄졌다. 유잉은 8,90년대에 딱 맞는 좁은 공수 활동반경을 지닌 선수였고, 긴 슛거리와 별개로 발이 느리고 드리블 실력이 딱 정통센터 수준이었기에 외곽에서 자유롭게 공격하는 선수가 결코 아니었다. 또한 느린 발 문제로[99] 수비 역시 동료들이 뚫리면 골밑~미드레인지 정도에서 커버해주고 센스있게 헬프를 들어가는 선수였지, 현대의 수비 꽤나 한다는 센터들처럼 3점 라인 안쪽을 제한없이 커버하며 간헐적으로 가드와의 미스매치까지 버텨주는 수준은 아니었다. 즉, '로우포스트에서 1대1 매치업' 한정이라면 유잉이 상당수 2020년대 센터들을 압도할 수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현대 센터들은 로우포스트에서 1대1 매치업만 하지 않는다는게 문제. 결국 '골밑존재감이 90년대에 비해 빈약하다=내가 짱먹는다'는 단순한 논리로 접근할 수 없다는 얘기다. 20년대 센터들은 넓은 공격범위와 2대2공격에 익숙한 선수들인데, 로우포스트 부근만 커버하는데 익숙한 유잉을 상대로 굳이 로우포스트 공격만 해줄 바보가 어디있겠는가?
정리하자면 현대 농구와 90년대 농구는 스타일이 매우 다르므로, 90년대 스타일에 특화된 골밑존재감이 강하지만 공수범위가 좁고 느린 패트릭 유잉과, 로우포스트에서 존재감은 좀 떨어지더라도 발이 빠르고 공수범위가 넓은 현대 센터들은 장단점이 아예 다르다. 당연하지만 현대 농구에서는 현대 센터들이 더 장점을 발휘하기 쉽지, 90년대에 농구하던 스타일 그대로 패트릭 유잉이 재림한다면 예전만큼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 가능서이 높다. 물론 이는 유잉 개인의 실력 문제가 아니라 농구의 트렌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으로, 전혀 다른 트렌드에 맞춰 평생 실력을 키워온 선수가 아예 다른 환경에서 뛰면 안 맞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굳이 현대의 센터들과 비교하는 이유는 유잉이 4대 센터들 중 '지금 뛴다면?'이라는 IF에서 가장 기대치가 떨어지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예로 하킴 올라주원은 수비에서 로우포스트 뿐 아니라 하이포스트~외곽까지도 커버가 가능한 특별한 센터였고, 공격에서도 3점 슛까지 가능한 긴 슛거리와 정확한 드리블, 화려한 스탭을 기반으로 다재다능한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었다. 또한 데이비드 로빈슨은 올라주원만큼 다재다능하지는 않았지만 속공 피니시와 페이스업에 있어 유잉보다 훨씬 위협적이었고, 센터 포지션에서 기동성과 효율성이 극에 달한 선수라 현대농구에는 안어울릴 수가 없다.
위에서 설명하듯이 90년대 당시 유잉과 올라주원, 로빈슨은 전성기 당시 개인기량 차이가 거의 없었고, 대등하게 매치업하는 선수들이 맞긴 했다. 그러나 올라주원/로빈슨의 케이스에 유잉을 그대로 대입하는 것이 힘든 이유는 저 둘이 단순히 유잉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들 셋의 스타일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올라주원은 특유의 다재다능함을 통해 20년대형 센터로 어려움없이 컨버전할 수 있는 타입이고, 로빈슨은 딱히 컨버전할 필요도 없이 뛰던대로 뛰면 되는 타입이라면, 유잉은 딱 90~00년대에 특화된 센터였다.
이와 달리 오닐의 경우는 유잉보다 더 느리고 더 공수범위가 좁은 센터였기 때문에 현대농구에선 장단점이 더욱 극대화될 선수이다. 그러나 오닐은 골밑존재감이 규격 외로 뛰어나기 때문에 로우포스트 존재감이 예전만하지 못한 현대에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유잉같은 경우 현대 센터들과 체격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에 로우포스트에선 어느 정도 유리한 정도라면, 오닐은 압도적인 체격과 힘으로 시대불문 로우포스트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잉보다도 좁은 수비 범위와 4대 센터 중 제일 떨어지는 2대2 대처 능력으로 인해 상성이 안맞는 팀을 상대로는 수비에서 처참한 모습을 보여줄 여지도 상당하기에, 그가 현대농구에서 어떤 선수가 될지는 말 그대로 미지수.
어쨌거나 현대 센터들은 10년대, 20년대에 맞는 자기만의 스타일로 리그 내 손꼽히는 선수들이다. 현재 NBA에는 무려 백투백 MVP에 단일시즌 PER 역대 1위 및 단일시즌 BPM 역대 1위라는 괴물같은 기량의 니콜라 요키치가 독보적인 리그 최고의 센터로 자리잡아있고, 그 요키치에게 밀려 두 번 연속으로 MVP 2위를 기록한 조엘 엠비드 역시 커리어가 아닌 기량만 놓고 본다면 딱히 유잉보다 아래에 놓일 선수는 아니다.
사족으로 위 둘은 로우포스트 플레이의 완성도만 보더라도 최상급이며, 특히 요키치의 그것은 하킴에게도 인정을 받을 정도로 매우 뛰어나다. 그럼에도 이들의 로우포스트 플레이 비중이 절대적이지 않은 이유는 심플하게 다른 것도 굉장히 잘하기 때문. 예로 엠비드는 포스트업도 최상급이지만 그 이상으로 페이스업이 위협적이고, 미드레인지와 3점 등의 슈팅 옵션도 탈센터급으로 좋은 선수이다. 즉, 팝아웃 후 패스를 받아 슛 또는 페이스업의 두 가지 공격옵션을 가지고 있어 볼투입도 제한적인 로우포스트 1대1의 비중을 획기적으로 늘릴 이유가 없다.[100] 요키치의 경우 페이스업이 뛰어나진 않지만 역시나 슛이 좋고 아예 탑에서 리딩을 보는 선수이기에, 로우포스트에서 볼을 투입받는 빈도가 90년대 센터들보다야 필연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센터들의 활동 범위가 많이 넓어졌고, 설령 유잉이 아니라 올라주원급의 로우포스트 존재감을 가진 선수라 해도 로우포스트 플레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상기한 올라주원의 경우 엠비드의 플레이스타일을 비판한 바 있긴 하지만, 그 본인도 핸들링과 페이스업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선수라 지금이라면 유잉같은 정통파 센터보단 엠비드 타입에 가까워질 여지가 크다. 물론 케빈 맥헤일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포스트 테크니션인 만큼 로우포스트에서 노는 빈도가 엠비드보다야 높겠지만, 근본적으로 로우포스트 공격은 더블팀을 가장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수단인 대신 안쪽에서 수동적으로 패스를 기다리며 공간을 잡아먹는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특히 올라주원은 센터치고 볼을 굉장히 많이 쥐는 타입이기에[101], 지금처럼 로우포스트 득점원에 대한 더블팀이 더 용이한 시대에서는 레인지와 기술을 살려 아예 밖에서부터 볼 잡고 짜내는 비중도 적잖이 높아지는 건 필연에 가깝다.[102] 즉, 다재다능할수록 다른 것을 겸하는 만큼 빈도만을 근거로 로우포스트 스킬의 수준을 비교하는 건 난해할 수 밖에 없다.
6. NBA Career Statistics
- [ 정규시즌/펼치기 · 접기 ]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 시즌 || 경기수 || 시간 || 필드골 || 3점슛 || 자유투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록 || 턴오버 || 트루슈팅 ||
PER ||
85-86 50 35.4 .474 .000 .739 20.0 9.0 2.0 1.1 2.1 3.4 .526 17.4 86-87 63 35.0 .503 .000 .713 21.5 8.8 1.7 1.4 2.3 3.6 .549 18.9 87-88 82 31.0 .555 .000 .716 20.2 8.2 1.5 1.3 3.0 3.5 .594 21.9 88-89 80 36.2 .567 .000 .746 22.7 9.3 2.4 1.5 3.5 3.3 .607 22.1 89-90 82 38.6 .551 .250 .775 28.6 10.9 2.2 1.0 4.0 3.4 .599 25.8 90-91 81 38.3 .514 .000 .745 26.6 11.2 3.0 1.0 3.2 3.6 .561 23.7 91-92 82 38.4 .522 .167 .738 24.0 11.2 1.9 1.1 3.0 2.5 .563 22.8 92-93 81 37.1 .503 .143 .719 24.2 12.1 1.9 0.9 2.0 3.3 .546 20.8 93-94 79 37.6 .496 .286 .765 24.5 11.2 2.3 1.1 2.7 3.3 .551 22.9 94-95 79 37.0 .503 .286 .750 23.9 11.0 2.7 0.9 2.0 3.2 .555 21.9 95-96 76 36.6 .466 .143 .761 22.5 10.6 2.1 0.9 2.4 2.9 .516 20.9 96-97 78 37.0 .488 .222 .754 22.4 10.7 2.0 0.9 2.4 3.4 .548 21.3 97-98 26 32.6 .504 .000 .724 20.8 10.2 1.1 0.6 2.2 3.0 .557 23.3 98-99 38 34.2 .435 .000 .706 17.3 9.9 1.1 0.8 2.6 2.6 .491 19.4 99-00 62 32.8 .466 .000 .731 15.0 9.7 0.9 0.6 1.4 2.3 .516 16.9 00-01 79 26.7 .430 .000 .685 9.6 7.4 1.2 0.7 1.2 1.9 .478 12.9 01-02 65 13.9 .444 .000 .701 6.0 4.0 0.5 0.3 0.7 1.0 .497 14.4
- [ 플레이오프/펼치기 · 접기 ]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 시즌 || 경기수 || 시간 || 필드골 || 3점슛 || 자유투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록 || 턴오버 || 트루슈팅 ||
PER ||
87-88 4 38.3 .491 .000 .864 18.8 12.8 2.5 1.5 3.3 2.8 .562 20.7 88-89 9 37.8 .486 - .750 19.9 10.0 2.2 1.0 2.0 1.7 .536 19.1 89-90 10 39.5 .521 .500 .823 29.4 10.5 3.1 1.3 2.0 2.7 .579 25.4 90-91 3 36.7 .400 - .778 16.7 10.0 2.0 0.3 1.7 3.7 .472 10.3 91-92 12 40.2 .456 .000 .740 22.7 11.1 2.3 0.6 2.6 1.9 .502 19.9 92-93 15 40.3 .512 1.000 .638 25.5 10.9 2.4 1.1 2.1 2.6 .535 21.6 93-94 25 41.3 .437 .364 .755 21.9 11.7 2.6 1.3 3.0 3.3 .495 20.6 94-95 11 36.3 .513 .333 .686 19.0 9.6 2.5 0.5 2.3 2.7 .559 18.9 95-96 8 41.0 .474 .500 .651 21.5 10.6 1.9 0.1 3.1 3.8 .522 18.1 96-97 9 39.7 .527 .000 .643 22.6 10.6 1.9 0.3 2.4 3.0 .547 21.0 97-98 4 33.0 .357 - .593 14.0 8.0 1.3 0.8 1.3 2.5 .412 10.7 98-99 11 31.5 .430 - .778 13.1 8.7 0.5 0.6 0.7 0.9 .477 17.0 99-00 14 32.9 .418 - .697 14.6 9.5 0.4 1.1 1.4 1.9 .488 17.9 01-02 4 16.8 .324 .000 .588 6.5 5.5 1.0 0.3 1.0 0.5 .400 13.8
7. 여담
- 패트릭 유잉 항목이 생성된 초반에는 주인공이 유잉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용은 조던의 유잉 관광스토리가 절반이 넘었었다. 뭐 조던의 피해자야 차고 넘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유독 그는 하필 조던과 동년배에 1년 차이로 데뷔, 전성기도 겹치고 컨퍼런스까지 같은 덕분에 정말이지 매년 치이다시피 했다.[103] 게다가 4대 센터 가운데 홀로 우승 경험도, MVP와 같은 상복도, 동료들 운도 없었다. 스탯 우위도 없는 탓에 평가 또한 나머지 3인방(올라주원, 로빈슨, 오닐)에 비해 가장 안좋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은근히 자기 실력 발휘를 못하기도 했으며, 제대로 맞붙은 94 파이널에서 올라주원의 휴스턴에게 3승 4패로 1승이 모자라 우승을 놓치는 바람에 적어도 이 때 한 경기만 더 이겨서 우승을 한 번 했다면 4대 센터 중 최초로 우승을 달성한 프리미엄 때문에라도 지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게 획실했기 때문에 유잉 커리어에 있어서는 가장 아쉬운 부분.[104] 속칭 4대 센터의 첫판왕이였다. 조던 외에도 스카티 피펜[105], 앤퍼니 하더웨이에게도 인 유어 페이스를 당한 적이 있으며 그 장면들도 상당히 멋진 모습들이라 하이라이트에 자주 나온다.
- 그래도 선수 자체의 인지도나 인기로 치면 데이비드 로빈슨보다는 우위다. 세계의 중심이라 불리는 뉴욕에서 선수 생활을 했기도 하거니와 1980~1990년대 조던에 집중된 매스컴 덕분에 매년 치이는 모습이 전 세계에 방송이 돼서 그런 듯. 심지어 매년 치이는 게 불쌍해서 안티조던 유잉빠가 된 팬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였다. 한편 플레이 스타일도 중반부에 장착한 미드레인지 게임을 제외하면[106] 정말 센터의 표준과도 같기에 90년대 NBA 열풍이 불었을 당시 흔히 센터 하면 떠오르는 선수로 대부분 패트릭 유잉을 꼽기도 했다.
- 2004년 뉴욕에서 열린 레슬매니아 20에서 존 시나가 유잉의 유니폼을 입고 나와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장소가 닉스의 홈구장인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기 때문이다. 유잉을 언급하기도 했다. https://www.dailymotion.com/video/x7ugxmz
- 기본적으로 워낙 팔이 긴 편인데 흰색 보호대를 양손팔목에 착용해서 신기하게 더 길어보인다. 또한 슛폼이 부드러운 편은 아니지만 미들점퍼시 타점이 워낙 높아서 사실상 블록이 불가능 했던 센터이다. 사실 슛폼 자체는 정석에서 거리가 먼, 엄청나게 높이 팔을 치켜들고 던지면서 마지막엔 거의 한손으로만 던지는 (정석폼은 거의 마지막까지 왼손이 받혀준다) 특이한 폼인데다 슛릴리스 타이밍도 엄청 늦다. 거의 점프가 정점을 찍고 내려올때 쏘는 수준인데, 데이비드 로빈슨 역시 폼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타이밍이 느렸다. 물론 둘 다 이런 폼으로도 성공률이 높았다. 다만 슛을 릴리스할 때의 슛터치 자체는 굉장히 부드러웠기 때문에 예쁜 곡선을 그리며 림에 빨려들어가곤 했다.
- 반대로 손은 거대한 덩치에 비해 희한할 정도로 작다. 이는 긴 팔과 정반대로 센터로선 단점인데, 센터는 볼을 잡고(드리블 없이) 바로 하는 플레이가 많아 볼캐칭 및 볼핸들링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 다만 모제스 말론처럼 한 손으로 볼을 못 잡을 정도로 작은 건 아니라 결정적인 단점까진 아니었다. 원핸드 덩크도 무난하게 할 정도는 되고.[107]
- 현역 시절 내내 고질적인 무릎 부상에 시달렸다. 그 무릎 부상 덕택에 대학 시절의 괴물같은 운동능력을 상실한 채로 NBA 커리어를 보냈다. 커리어 내내 총 4차례의 무릎 수술을 받았다. 경기 때 착용한 양 무릎의 두툼한 무릎 보호대는 유잉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다.
- 선수 생활 전반을 박살낸 조던과 사이는 좋은 편이다.[108] 조던이 절친한 친구로 지내는 몇 안되는 스타 플레이어로, 조던의 워싱턴 복귀 당시 유잉은 친구의 소속팀인 워싱턴 코치로 선임되면서 새로운 경력의 첫발을 내딛기도 했다. 또 같이 영화에도 출연하기도 했고. 그 영화가 바로 스페이스 잼. 그 외에도 같이 뛰었던 동료 선수들은 물론 타 팀의 많은 선수들과도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덕택인지 은퇴식에 와서 축하해 준 선수들 중 닉스에서 뛴 적이 없는 선수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 중에서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최고의 절친은 대학 후배이기도 한 알론조 모닝.
- 반면 선수 생활 동안 언론과는 썩 좋지 않은 관계였는데 이는 극성스럽기 짝이 없던 뉴욕 언론에 대해 유잉이 거의 무대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109] 말이 많아야 기사거리가 늘어나는 기자들 입장에서는 말없이 플레이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의 유잉은 썩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때때로 리그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임해야 하는 경기 후 인터뷰마저 거부하여 벌금을 물기 일쑤였다.
- 현역 은퇴 후 코치로서는 4명 중 가장 좋은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다. 워싱턴 위저즈 - 휴스턴 로키츠 - 올랜도 매직을 거쳐 2013-14 시즌부터 그 분이 계신 샬럿 밥캐츠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역임하고 있다. 오랜 코칭기간 동안 감독 수업도 꾸준히 쌓아왔으며 2013년 11월 8일부터 샬럿의 스티브 클리포드 감독이 심장 수술로 몇 경기 동안 자리를 비우게 되어 비록 정식은 아닌 감독 대행이긴 하지만 어쨌든 커리어 첫 감독직을 수행하기도 했다.[110] 2017년 4월 3일, 모교인 조지타운 대학교 농구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 현역 시절 샤킬 오닐과 같은 컨퍼런스였던 탓에 4대 센터 중에서도 유독 그와 매치업을 자주 하며 신경전이 잦았다. 특히 오닐은 경기장 안팎에서 유잉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으로 구설수에 올랐으며, 1999년 직장폐쇄 당시 선수협을 비판하며 회장이었던 유잉까지 싸잡아 독설을 날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닐은 은퇴 후 유잉에 대한 존경심을 여러번 드러내었고, 특히 자신이 진행하는 NBA Game Time 프로그램에서 유잉을 만나고 난 후 눈물을 흘리면서 유잉이 자신의 어릴적 영웅이었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유잉을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라데 영화에서 제자가 최고가 되려면 스승을 이겨야 했던 것처럼, 유잉이 자신보다 낫다는 걸 알았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스스로를 밀어붙여야만 유잉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라고. 그러면서 유잉은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위대한 승부사이자 위대한 선수로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역대 Top 5 센터에 유잉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객관적인 커리어는 오닐이 유잉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오닐의 이러한 자기고백은 당시 나름 화제가 되었다.[111][112]
- 의외의 사실은 오닐과 매치업한 선수 중 한 경기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을 쌓은 선수가 다름 아닌 유잉이었다는 점. 정규 시즌 기준으로 오닐과 매치업해서 한 경기 35득점 1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유잉이 유일하다.[113] 또한 오닐과의 맞대결에서 무려 8경기나 30득점 이상을 뽑아내 오닐을 상대로 가장 많은 30득점 이상을 뽑아낸 선수이기도 하다. 오닐이 NBA에 입성할 무렵 유잉은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던 시점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 실제로 데뷔 초창기만 해도 유잉이 오닐보다 우세했다. 골밑에서는 밀렸지만, 기술적으로 우월한 유잉이 종합적으로 더 좋은 경기를 펼친 것. 실제 유잉과 오닐이 맞붙은 경기의 스탯을 보면, 오닐의 신인 시즌과 2년차 시즌 동안 유잉은 28.2점 13.1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오닐은 24.6점 13.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 다만 팬들 사이에서는 유독 유잉이 오닐에게 처절하게 밀렸다는 인상이 강한데, 이는 첫째로 실제로 유잉이 우세한 경기력을 펼쳐도 일단 힘에서 밀렸기 때문에 겉보기로 보면 유잉이 크게 밀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닐은 유잉을 힘으로 밀쳐내고 덩크를 꽂아넣으면 유잉은 중거리 점퍼를 꽂아넣어 응수하는 식. 똑같은 2점이지만 언뜻 다가오는 느낌이 다른 것. 두번째는 둘이 같이 뛴 건 10년 정도 되는데 오닐의 3년차 때부터는 매치업에서 유잉이 확실히 밀리기 시작했고 세번째로는 두 선수가 상성이 매우 안 좋았기 때문이다. 유잉은 데뷔 초부터 무릎에 두툼한 보호대를 하고 다닐 정도로 무릎이 고질적으로 매우 안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닐이 등장하기 전까지 올스타급 이상 센터 중 최고로 꼽힐 만한 파워를 갖고도 균형을 잘 못 잡고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노년에 몸이 망가지면서 이런 성향이 더욱 심해졌는데, 이때 오닐이 막강한 파워로 툭툭 치고들어갈 때마다 픽픽 쓰러지는데다가 유잉같은 거구들이 몸까지 망가지면 한번 넘어지면 비틀거리며 잘 못 일어나는 경우도 있어 더욱 힘을 못 썼던 것이다. 하킴 올라주원이나 데이비드 로빈슨같은 민첩한 센터들은 이를 스피드로 만회했지만 유잉은 그런 스피드도 없었기 때문에 말년에 더욱 고생했다.
- 투박한 외모 덕택에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대학 전공이 미술이다. 실제로 굉장히 명석하고 똑똑한 인텔리 타입이라고 한다. 전성기 시절에 NBA 선수들이 꼽은 "월스트리트 금융가에 진출했을 때 가장 큰 성공을 거둘 것 같은 선수는?" 이라는 설문 항목에서 유잉이 1위로 꼽혔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선수협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 1993년 오프시즌때 우리나라에 유잉 농구화 홍보를 겸해서 2박 3일간 방한했던 적이 있다.[114] 사업 때문에 방문한 것이지만 그 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농구 클리닉은 물론 당시 MBC에서 방영하던 '쇼, 스포츠'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강원도 산간벽지 초등학교에 방문해 농구대를 기증하고 어린이 농구 후원 활동을 벌이는 등 짧은 시간 동안 봉사도 많이 해 주고 간 편. 은퇴한 지도 한참되었는데 그때 홍보한 농구화는 미국에서 아직도 판매하고 있다. 유잉을 잘 안다고 할수 없는 나이때의 빅뱅에 GD, 태양이 신고 나온 자료도 있고, 농구화 좋아하는 패션피플들이 좋아하신다고 한다. 유잉 초창기 시절에는 아디다스에서 유잉신발을 만들기도 했다.
- 아들로 패트릭 유잉 주니어가 있다.[115] 그 바람에 유잉은 시니어를 달게 되었다. 주니어가 NBA에 입성하자 유잉을 기억하던 많은 올드 팬들은 주니어가 아버지의 반만큼이라도 활약해주길 바랬지만, 아버지와 달리 그다지 활약하지 못했다. 하부리그를 전전했으며 닉스에서 프리시즌 경기를 뛰기도 했지만 2011년 뉴올리언스 호네츠에서 7경기 뛴 게 유일한 nba 경력이다.
- 엑소시스트 3에서 주인공의 부하 형사로 카메오 출연한 바 있다. 엑소시스트 3 문서에도 나와있다시피 영화 배경이 유잉의 출신 대학인 조지타운대와 동일한 조지타운이라 성사된 캐스팅. 비중이 엄청 크지는 않지만 꽤 나오는 장면이 많은데, 본업이 배우가 아닌 인물의 카메오 치고는 연기도 무난해 어울리는 편이다.
- 2015 드래프트 당시 뉴욕 팬들과 언론에게 거친 야유를 받은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에게 "너는 이미 뉴욕의 선수이며, 사람들은 차차 너의 진가를 알아줄 것"이라는 격려를 건넨바 있다. 뉴욕에서의 긴 커리어 동안 극성맞은 언론과 싸워온 유잉에게는 포르징기스의 처지가 남 일 같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포르징기스(a.k.a 유니콘)는 트레이드되어 댈러스 매버릭스로 떠났으며, 현재는 워싱턴 위저즈에 소속되어 있다.
- 좀 개그성 에피소드인데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가드 겸 포워드 제일린 로즈에게 도둑질을 당한 적이 있다. 로즈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실력이 늘고 있던 로즈는 유잉이 자기를 파울했다고 생각했는데 파울이 안 불리자 열 받아서 자기 위를 넘어가던 유잉의 발을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비가 걸린 모양인데 이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다음에 닉스가 인디애나로 원정을 왔을 때 우연히 공항에서 유잉의 짐을 발견했고, 디트로이트 본능이 발동해 상자를 억지로 열어보니 VCR일체형 TV가 있어 이걸 훔쳐갔다고 한다. 그렇게 훔쳐간 TV는 몇년동안 유용하게 써먹었다. 재밌는 건 여기에 패트릭 유잉의 이름이 스티커로 붙혀져 있었는데 이걸 못 뗀 상태로 계속 두는 바람에 그의 친구나 가족들 모두 로즈가 패트릭 유잉의 TV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한다.
- 2020년 5월 23일, 조지타운대 감독 재임 중 코로나19에 감염되어 검사 결과 양성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격리 치료를 받았으며, 이후 상태가 호전되어 자택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자신의 트위터에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글을 올렸다. 다행히 건강하게 완치되었다.
- 2021년 3월에 MSG를 방문했는데 그를 못알아본 구장 경비에게 제지를 당해서[116] 제임스 돌란 닉스 구단주에게 전화를 걸어 신원을 확인해줘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했다. 당연히 유잉은 “I thought this was my building. (…) Everybody in this building should know who the hell I am (…) Jesus, is this my number in the rafters or what?” 이라는 분노의 인터뷰를 남겼고, 열혈 닉스팬 스티븐 A. 스미스도 방송에 나와 직원 교육이 엉망이라고 돌란 구단주를 무지막지하게 씹어댔다.
8. 관련 자료
- 다큐멘터리
- Patrick Ewing: Standing a Tall (1993, NBA Entertainment)
9. 관련 문서
[1]
착화신장
[2]
109kg에서 체중을 불려 90년대 중반부터는 113kg 이상이었다. 당시 센터들은 2000년대 이후 센터들보다 전체적으로 체중이 적게 나갔는데,
데이비드 로빈슨의 경우 유잉보다 키가 1인치 큰데 체중은 107kg에 불과했다. 물론 로빈슨도 이후 113kg 이상으로 체중을 불렸다.
[3]
공식 측정치는 아니라 괴장된 수치일 가능성도 적지 않은 게, 예로 키는 유잉보다 조금 작지만 엄청난 어깨와 팔 길이로 유명한 그
드와이트 하워드의 윙스팬이 약 7'4.5"에 불과(?)하다. NBA라도 7'6" 이상의 윙스팬 보유자는 상당히 드물어 최상위권으로 분류될 정도인데, 센터 중 평균을 살짝 웃도는 유잉의 신장대에서 7'6"을 훌쩍 넘어 8'0"에 달하는 윙스팬을 가졌다는 건 쉽게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물론 그가
카와이 레너드나
라존 론도급의 기형적인 윙스팬 비율을 가지고 있다면 7'9"(236cm)쯤 되었을 수 있고, 이 경우 "유잉은 윙스팬이 8feet에 가깝다." 라는 식으로 알려졌더라도 이상할건 없다. 확실한 건 부풀려진 수치라 하더라도 유잉의 팔길이가 신장 대비 엄청나게 길었다는 정도다.
[4]
라이벌
하킴 올라주원과
데이비드 로빈슨에 비해 훨씬 정통센터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 이들 중 유일하게 파워포워드를 겸직한 선수다. 유잉이 데뷔할 당시 팀엔 정통센터
빌 카트라이트가 있었는데, 카트라이트가 오랜 부상에서 복귀한 시즌이자 유잉의 2년차 시즌인 86-87시즌 당시 둘이 트윈타워를 이루며 유잉이 파워포워드로 주전출장했다. 로빈슨과 올라주원 둘 다 원래 센터였던 선수와 트윈타워를 한 적이 있으나, 올라주원의 파트너
랄프 샘슨은 키가 더 큼에도 기동력이 더 뛰어나 올라주원 대신 4번을 봤고, 로빈슨의 파트너인 루키
팀 던컨은 키도 더 작고 훨씬 젊어 전체적인 운동능력이 더 좋았기에 프로 데뷔와 동시에 4번 전환, 커리어 내내 주력 포지션이 파워포워드였다. 어쨌거나 이 세명 중 유일하게 풀타임 파워포워드를 소화한게 유잉이었다.
4대 센터의 마지막 선수인
샤킬 오닐은 아예 커리어 내내 잠깐이라도 다른 포지션으로 출장한 적조차 없는 순도 100%센터였는데, 세 선수와 달리 너무 덩치가 커서 친선경기가 아니고서야 포워드 출장 자체가 불가능했던 케이스.
[5]
올랜도 매직은 창단시즌인 1989년부터 6번을 팬들에게 헌정하여 영구결번 시켰지만 유잉이 올랜도에서 뛰었던 01~02 한 시즌만 영구결번을 해제하고 유잉에게 등번호를 주었다. 유잉은 올랜도의 6번을 단 유일한 선수다.
[6]
조지타운 대학교 닉네임인 "Hoyas"를 말한다. 조지타운의 구호인 "Hoya Saxa!(What Rocks!)"에서 따온 말이다.
[7]
의외로 미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대신 다른 나라들에서 자주 쓰이는 별명. 생김새 때문도 있지만, 유잉이 뉴욕의 심장이라 불리며 활약했던 것과 더불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의 킹콩의 활약이 높은 싱크로를 보이고 있다. 사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흑인 선수에게 고릴라나 킹콩이라고 부르는 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원숭이"는 현대 사회에서는 주로 동양인을 폄훼하는데 쓰이지만, 흑인들을 폄훼하는데에도 쓰이며 애초에 생김새를 갖고 사람을 고릴라라고 부른다.
[8]
여담으로 콧구멍 사이즈가 그야말로 웅장하다. 오백원짜리 동전도 족히 들어갈만한 사이즈다.
[9]
Ew-an으로 읽어야 하는데 E-wan으로 읽은 것. 발음기호에 기반한 표기는 유언 머그레거가 된다.
[10]
Ow-en으로 읽어야 하는데 O-wen으로 읽은 것. 발음기호에 기반한 표기는 마이클 오언이 된다.
[11]
1945년 4월 11일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 출생. 노스이스턴 대학교 재학 시절 딕 듀크셔 감독 밑에서 농구를 배워 1966년 및 1968년 NCAA 칼리지 디비전(현 디비전2) 전국대회에 두 번 진출시켰다. 졸업 후 1968년 모교의 코치로 부임하여 5년을 일하다가 1973년에 하버드 대학교로 옮겨 4년 간 지냈고, 1978년부터 고향에 있는 캠브리지 린지 앤 라틴 스쿨에서 감독으로 데뷔하여 임기 7년 동안 유잉 외에 칼 홉스(전 조지 워싱턴 대학교 감독), 루밀 로빈슨 등을 발굴했다. 1985년부터 보스턴 대학교로 옮긴 후 임기 5년 동안 101승 50패라는 고승률을 자랑하며 1987-88 및 1989-90 시즌에 NCAA 전국대회 진출을 일궈냈고, 1990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로 옮겨 임기 8년 간 잉카 다레 등을 길러내며 1993년 NCAA 전국대회 때 16강까지 가는 파란을 일으켰다. 1998년 세인트 존스 대학교로 또 전근하여 임기 5년 간 메타 샌디퍼드아티스트, 펠리페 로페즈, 젠든 해밀턴, 에릭 바클리, 라버 포스텔, 오마 쿡 등을 육성하며 1999년 NCAA 전국대회 8강, 2003년 NIT 우승 등을 일궜으나 2003-04 시즌 초반부터 비 컨퍼런스 팀과의 대결에서 패배하며 사퇴 압력을 받아 2003년 12월에 경질되었고, 이후 일부 선수들의 여학생 폭행 등 코트 외적인 비행, 에이브 케이타 선수의 비리 폭로 등으로 이미지가 안 좋아지다 못해 농구부는 2004-05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권 제외, 2003년 NIT 우승 등 43승 기록 말소, 정기 조사 2년 등의 징계를 받았다. 2008년 플로리다 애틀랜틱 대학교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하여 6년 간 재직했고, 감독 외적으로 ESPN 대학농구 해설위원, 야후! 스포츠 논설위원 등도 맡았다.
[12]
문맹률이 0에 가까운 대한민국에서야 씨알도 안먹힐 소리지만, 미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엘리트급 스포츠맨, 특히 흑인 엘리트 스포츠맨을 비하하기 위한 떡밥으로 자주 이용되는 멘트이다.
[13]
1972~1999년까지 27년간 감독을 역임했으며, 1988 서울 올림픽 때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훗날 유잉의 전임 감독인 존 톰슨 3세는 그의 아들이다.
[14]
레이먼드 플린 전 보스턴 시장도 대학 시절 그의 팀메이트였다.
[15]
앨런 아이버슨같은 가드 출신도 있지만 패트릭 유잉 이래로
디켐베 무톰보,
알론조 모닝같은 NBA에 족적을 남긴 정통파 센터들이 조지타운 대학교를 나왔다. 그외 현역 선수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센터
로이 히버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센터
그렉 먼로등이 있다.
[16]
참고로 이 경기에서 그는 팀내 최고인 23득점 11리바운드 4블록을 기록하면서 군계일학의 활약을 보였다. 경기 최우수선수에 선정된 제임스 워디가 28득점 4리바운드를 기록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때 조던이 위닝샷을 성공시켜 노스캐롤라이나가 역전하지 못했다면 무조건 유잉이 최우수선수로 선정됐을 것이다.
[17]
그때는 이후 이어지는 질기고 질긴 악연을 상상조차 못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말 것이 이 둘은 절친 사이다. 실제로 여러 번의 인터뷰에서 조던은 패트릭 유잉을 최고의 센터로 뽑기도 했다.
[18]
다만 조던의 슛 이후에도 시간이 남아서 역전의 기회가 있긴 했다. 그런데 조지타운대의 포인트가드 슬리피 플로이드가 공을 몰고오다 마음이 급했는지 그만 상대팀의 제임스 워디에게 패스를 하고 만다(기록상 워디의 스틸로 됐지만 영상을 보면 스틸당한게 아니라 아예 대놓고 주는 수준이다). 긴급한 상황이라 파울밖에 할 수 없었고, 워디가 비록 자유투를 실패하긴 했지만 그의 자유투 이후 진짜 시간이 없어져서 그대로 경기가 끝난다.
[19]
고작 드래프트 한번에 NBA 판도가 흔들린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당시 이 선수들은 루키로서 혼자 힘으로 프랜차이즈를 바꿔놓는 힘을 가진 선수들이었다. 로키츠는 올라주원을 뽑기 전 29승팀에서 갑자기 48승팀이 되었으며(다만 시즌 후반에 기괴한 연패로 탱킹 의혹이 있다), 불스는 27승팀이 38승으로 올랐다. 조던은 신인으로서 올-NBA 세컨드 팀/득점 3위에 올랐으며, 올라주원은 20.6점 11.9리바운드를 올리며 올스타에 뽑혔다. 패트릭 유잉은 20점 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한마디로 이 선수들은 일반적인 루키가 아니라, 데뷔와 동시에 리그 최정상급 선수들과 어께를 나란히 하던 선수들이었다.
[20]
참고로 이 경기에서 빌라노바가 이길거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조지타운은 톱시드팀에 역대 최고의 대학 선수 중 한명이라 인정받던 유잉이 이끄는 팀이었고, 빌라노바는 별 스타플레이어도 없는 8번 시드의 그냥 그럭저럭 강한 팀이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빌라노바는 무려 필드골 성공률 78.6%라는, 그야말로 단체로 신들렸다고 할만큼 말도 안되게 슛이 터져 승리를 거머쥔다. 감이 안 잡힌다면, 보통 농구에서 팀의 필드골 성공률은 5할만 넘어도 준수하고, 6할을 넘으면 단체로 삘받은 거고, 7할을 넘으면 던지는 족족 다 들어가는 엽기적인 수준이다. 참고로 2014 파이널 3차전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전반에 75.8%를 기록했는데 전반 24분 동안 디펜딩 챔피언 히트를 상대로 21점차를 냈다. 이렇게까지 슛이 들어갔는데 2점차밖에 안 난건 오히려 유잉과 조지타운의 위엄인 셈.
[21]
당시 조지타운대는 야투 53개를 던져 29개를 넣으며 54.7%란 준수한성공률을 보였는데, 빌라노바대는 조지타운의 절반 좀 넘는 야투 28개를 던져 그 중 22개를 성공시키는 미친 효율을 보였다. 후반에는 야투 단 한개만 놓쳤을 뿐이다. 물론 유잉을 14점으로 봉쇄한 지역방어 역시 훌륭했다. 워낙 빌라노바의 슛감이 좋아서인지 조지타운은 파울로 막아보려했지만 이들은 자유투 27개 중 22개를 성공시켰다. 저 자유투 시도를 감안해도 빌라노바는 조지타운보다 훨씬 적은 공격시도를 했으며, 턴오버수도 조지타운보다 많았다(17대11). 즉 유잉의 부진을 감안해도 조지타운대가 우세했어야 정상이나, 빌라노바의 슛이 던지는 족족 적중하는 수준이라 지고 만 것이다. 조지타운대는 시즌 내내 상대팀을 평균 야투율 39%로 막아낸 좋은 수비팀이었나 저렇게까지 슛이 들어가면 이길 수가 없다. 빌라노바는 실제로 이 경기로 아직까지 역대 파이널4 사상 최소 야투시도/최고 야투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2]
당시 이 과정을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원래는 최하위팀 둘이 동전 던지기로 1순위를 결정하던 방식이 많은 부작용이 있다하여 로터리가 처음 적용된 해였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데이비드 스턴이 일부러 빅마켓인 뉴욕에 유잉을 주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고 말이 많았다.
[23]
참고로 패자 인디애나가 뽑은 선수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의 파워 포워드 웨이먼 티스데일인데, 이 선수는 인디애나, 새크라멘토, 피닉스의 주전 파워 포워드였고 15~20점 득점을 올리던 파워 포워드지만 2순위 답지 못하게 올스타에 뽑히지도 못한 평범한 커리어를 보내고, 은퇴 후엔 재즈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다가 2009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당시 이 해 드래프트에서 유잉은 최고의 선수임에 틀림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드래프트 최고의 행운아는 유잉의 닉스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타 재즈가 그리 높지도 않은 13순위로 무려
칼 말론을 뽑았기 때문이다.
[24]
하지만 이 당시 입었던 무릎 부상은 안타깝게도 이후 유잉에게 거의 대부분의 운동능력을 빼앗아가버리고 말았다.
[25]
어이없게도 이런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당시 뉴욕 팬들은 유잉에게 버스트(bust, 유망주의 실력이 기대 이하로 드러났을때 부르는 말)라며 야유를 퍼부었는데, 당시 이들은 유잉이 바로 닉스를 우승권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지만 팀성적이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24승->23승). 물론 진짜로 팀을 꼴찌권에서 우승권으로 이끄는
래리 버드같은 괴물도 있지만, 그건 진짜 역대급이고 유잉 정도의 성적이라면 bust라 불릴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뉴욕 팬들과 언론은 유잉의 선수생활 내내 과도한 기대를 걸었으며, 이에 못 미치면 주저없이 야유를 퍼부었다. 실제로 아래 언급되는 유잉의 말년 트래이드 요청에는 이런 사정도 한 몫했다. 질려버린 것이다. 유잉에 대한 뉴욕 팬들의 평가가 호평 일색으로 바뀐 건 아이러니하게 유잉이 떠난 이후였다. 떠난 다음에야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느끼게 된 것. 선수생활 내내 유잉은 팬들과 언론에게 엄청나게 시달려야 했다.
[26]
사실 젊은 팬들은 그가 은퇴한 후 레전드로 대접받는 데에만 익숙하겠지만 90년대 당시 유잉은 은근히 평가절하를 당하는 선수였다. 하필 동시대에 워낙 괴물 센터들이 많고, 라이벌 4인방 중 가장 처지는 축이란 것, 플레이가 다소 정적이라 임팩트가 좀 약하단 것 등 때문에 "그럴듯하게 포장됐을 뿐 속빈 강정 아니냐"는 의견도 많았고, 아래 서술되는 유잉 무용론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어이없는건 이런게 농알못의 헛소리로 간주되는게 아니라 "어? 그런가?" 정도의 소수의견 정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게다가 당시는 리그에 좋은 센터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에 "엘리트 센터" 자체가 그렇게까지 희귀자원은 아니었다. 실제로 돈 넬슨은 유잉을 오닐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특A급 센터를 특A급 센터로 대체하는 사치가 가능했던 게 바로 90년대였던 것.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규모도 큰데 냄비근성이 적잖이 있는 뉴욕 미디어가 계속 우승에 실패하는 유잉을 은근히 깎아내렸고, 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니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유잉은 많이 평가절하가 되었다. 비슷한 케이스가 조던의 쓸만한 사이드킥 대접받았던 스카티 피펜이었는데, 조던은 안티도 꽤 많은 선수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 오히려 과대평가를 받는 경우도 많아 과소평가와 과대평가를 동시에 받는 특이한 케이스가 된다.
[27]
당시 NBA의 골밑은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치열한 육체적 충돌의 경합무대였다. 때문에 1대1 포스트업이나 페네트레이션으로 상대 골밑을 파고드는 상대에 대한 견제가 거의 폭력에 가까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팀들은 에이스와 팀원을 보호하고, 상대방과의 충돌에서 거칠게 밀어붙이는 선수들을 한 두명씩 꼭 갖고 있었다. 이런 선수들은 수시로 주먹다짐이 벌어지던 80년대 NBA에서 팀간의 충돌이 생길 경우 에이스를 등 뒤에 보호하고 선빵을 날리거나 몸빵을 하는 말 그대로 보디가드 역할을 수행했다. 팀원이 전부 갱스터 분위기였던 디트로이트를 제외하면. 찰스 오클리는 이런 리더십이 강한 블루워커의 표본과도 같은 선수였다.
[28]
어떤 이들은 "조던의 신경을 긁는 전략"이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닉스는 물론이고 피스톤즈의 조던룰조차도 조던을 정신적으로 무너뜨리는데 성공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거친 플레이로 인해 스카티 피펜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편두통에 시달리며 무너진적은 있다. 닉스의 전략은 어디까지나 조던을 육체적으로 몰아붙히는 것이었다.
[29]
이때 유잉은 부상으로 실려나갔다가 코트로 복귀해 활약을 펼치는데, 이를 두고 닉스의 전설적인 캐스터 마브 앨버트는 닉스 레전드인 윌리스 리드에 비유하며 "Willis Reed-like performance"라고 극찬했다. 리드는 참고로 1970 파이널 5차전에서 부상을 입어 6차전을 통째로 결장했고, 7차전 출장마저 불확실했다. 그러나 리드는 7차전에서 극적으로 선발출장해 팀의 첫 4점을 득점했다. 그의 경기 활약은 이게 전부였지만 이 플레이로 고무된 닉스는
윌트 체임벌린-
제리 웨스트-
엘진 베일러의 황금 트리오가 이끄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제치고 구단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한다. 이날 리드의 활약은 부상투혼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30]
6차전까지의 경기들이 대부분 10점 내외의 점수차였는데, 7차전은 29점차로 그야말로 압살. 그야말로 조던의 위엄이다.
[31]
여담이지만 "유잉의 닉스"가 "조던의 불스"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94-95 시즌에도 닉스가 불스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긴 했지만 이때 조던은 정규 시즌 종료 한달 전에야 돌아왔으니 "조던의 불스"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32]
조던은 32.2점 6.2리바운드 7어시스트 2.5스틸 1블럭을 올렸으나, 당시 가벼운 손목 부상이 있던 그는 절정에 오른 닉스의 골밑을 공략하지 못하고 외곽비중을 늘려야 했다. 이 때문에 외곽슛이 터진 4차전과 평타 정도에 그친 5차전을 제외하면 야투가 계속 부진했고 시리즈 총합 40%에 그쳤다. 반면 피펜은 22.5점 6.7리바운드 4어시스트 1.8스틸 0.5블럭으로 스탯은 조던보다 못했으나 야투율이 51%였고, 특히 조던이 3/18 22점으로 끔찍하게 부진한 3차전 당시 야투 12개 중 10개를 넣으며 29점으로 활약했다. 물론 야투가 부진했어도 조던이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시리즈 게임스코어는 24.4로 15.7인 피펜이나 20.7인 유잉을 여유있게 제쳤으며, 야투가 개판이었던 3차전에서 11어시스트 8리바운드, 거기에 자유투를 17개나 얻어내 16개 성공하는 등 공헌은 꾸준하게 해줬다. 이때도 리즈 최고 선수는 단연 조던이었으나 '조던치고' 못해준 반면 피펜은 평상시 기대치보다 잘해줬기에 비교가 된 것이다.
[33]
유잉은 커리어 내내 센터가 약한 불스를 상대로 강한 편이었다. 유잉은 팀이 약체화되어 3대0으로 스윕당했던 90플레이오프 당시 부진(16.7점 10리바운드)를 제외하면 항상 불스를 상대할 때 정규시즌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성적을 기록했었다. 93시즌 역시 정규시즌 24.2점 12.1리바운드 2블럭 0.9스틸 (야투율 50.3%)와 비교해 25.8점 11.2리바운드 1.8블럭 1.7스틸 (야투율 53%)를 기록했는데, 이때 닉스가 정규시즌 평균 101.6점보다 10점 가까이 낮은 시리즈 평균 92.3점을 기록했다는 걸 생각하면 정규시즌보다 득점이 오히려 오른 유잉의 활약은 충분히 뛰어났다.
[34]
닉스에선 유잉 외엔 벤치에서 출전하며 11개 야투 중 8개를 넣어 17점을 넣은 앤서니 메이슨이 좋은 활약을 해줬고, 찰스 스미스는 야투율이 3할대에 12점,
존 스탁스는 기복이 심한 선수답게 야투 11개 중 3개만 넣으며 8점에 그쳤다.
[35]
양팀 주전 10명 중 TS 40% 미만인 선수는 유잉 한 명 뿐이며, 7차전을 역대급으로 말아먹어 욕받이가 된 스탁스도 시리즈 ts%는 0.5정도는 간신히 넘었다.
[36]
당시 기준으로 역대 파이널 최다 블록 기록(5차전 8개, 시리즈 전체 30개)을 세웠다.
[37]
실제로 양팀 중 하나라도 100점을 넘긴 경기가 단 한 번도 없었다.
[38]
여담이지만 이듬해 휴스턴은 파워 포워드 오티스 쏘프를 트레이드하고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데려오는데, 드렉슬러의 존재로 확실한 2옵션을 얻었지만 대신 팀수비는 비교적 헐거워지게 된다. 94 시즌 로키츠는 NBA에서 팀 득점 전체 15위, 팀 실점 2위를 기록할 정도로 확실한 수비팀의 모습이었지만, 95 시즌엔 팀 득점은 전체 7위로 올라간 반면 팀 실점은 12위로 폭락하고 파이널에선 4경기 연속으로
올랜도 매직에게 100점 이상을 내준다. 물론 올랜도 자체가 닉스보다 공격력이 훨씬 좋은 팀이었지만 수비력 자체, 특히 쏘프의 부재로 골밑 수비력이 전년도보다 떨어졌던 것이다. 만약 닉스가 1995 파이널에 진출해 리벤지 매치를 벌였다면 적어도 유잉의 공격루트는 확실히 숨통이 트였을 것이고, 전체적으로 더 좋은 활약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39]
당시 마이애미 히트와 뉴욕 닉스는 유잉과 모닝의 조지타운 선후배 맞대결, 라일리가 키워낸 두 팀이라는 점, 동일 디비전 소속이라는 다양한 측면에서 상당한 라이벌 의식이 들끓고 있었고, 이 해 시리즈에서는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결국 난투극으로 인해 닉스는 많은 선수가 징계로 출장할 수 없게 되면서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40]
다만 라이벌 관계와 별개로 모닝과 유잉은 절친한 사이였다. 실제로 유잉은 2000년 당시 모닝이 신장병을 진단받자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으며 실제로 2003년에 적합판정 여부를 검사받았다. 그러나 모닝의 사촌이 이식에 가장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실제 이식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게 엄청난 것이 유잉이 처음 신장을 기부해주겠다고 바로 2000년 9월이었는데, 이때 그는 현역이었다. 물론 두 시즌 후 은퇴했을 만큼 선수생활의 말년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 시즌만 뛰어도 천만불 이상을 벌 수 있는데 커리어를 끝장날 수 도 있는 신장 기증을 흔쾌히 결심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은 이 다큐멘터리에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KpeD8eflT0 다만 여기에도 나와있지만 서로 형제라고 부를 정도로 절친이면서 코트 위에선 서로 죽일 기세로 경기했다고 한다.
[41]
FA가 된 첫날에 바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닉스가 제시한 계약기간과 금액에 한 번에 사인했다고 한다. 타 팀과 접촉으로 몸값이나 계약기간을 늘릴 수도 있었지만 유잉은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을 정도로 닉스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선수였다.
[42]
이미 전 시즌 최고의 전력을 맞췄던 닉스의 유일한 약점은 유잉을 받쳐줄 백업 센터가 없다는 부분이었다. 이 약점을 공격력은 형편없어도 수비만큼은 매 경기 10리바운드 2블록 이상을 보장해주던 수비형 센터의 스페셜리스트 크리스 더들리를 데려오면서 단숨에 해결했다. 오죽했으면 당시 이 소식을 전하던 국내 언론 기사 제목이 '더들리 영입으로 신나는 뉴욕' 이었다. 뉴욕은 그 댓가로 시라큐스 출신으로 신인 첫해 좋은 모습을 보여준 존 월라스를 포기해야 했다.
[43]
크리스 밀즈 한 명을 데려오기 위해 전해에 드래프트에서 뽑았던 월터 맥카티,
단테 존스, 그 해 드래프트에서 뽑은 신인 존 토마스에 샐러리 필러용으로 스캇 브룩스까지 무려 4명의 선수를 퍼줬다. 미래 따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그 해 우승만을 노리겠다는 닉스의 결단이었다.
[44]
주전으로 C 패트릭 유잉, PF
찰스 오클리 SF,
래리 존슨, SG
앨런 휴스턴, PG 찰리 워드에 벤치멤버로 C 크리스 더들리, PF
벅 윌리엄스, SF 크리스 밀즈, SG
존 스탁스, PG 크리스 차일즈-로 베스트5를 하나 더 꾸릴 수 있었다. 앨런 휴스턴이 오기 전 닉스의 주전 슈팅 가드로 활약했던 스탁스는 논외로 치더라도 나머지 네 명 모두 닉스에 오기 전엔 각자 타 팀의 스타팅 멤버로 활약했던 선수들이었다.
[45]
그 전까지 10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이 시즌 또한 출전이 유력했지만 하필 MSG에서 열리는 올스타전을 뛰지 못하게 되었다. 불운도 이쯤되면 정말 가지가지. 참고로 이 경기의 MVP는 하필 또 마이클 조던이다.
[46]
오른쪽 손목 역시 전 시즌 치명적인 골절, 인대 부상으로 사용이 거의 불가능했던 수준이었다.
[47]
당시 애석하게도 뉴욕 언론에서는 트윈 테러를 찬양하면서 부상에 시달리던 유잉을 신나게 까댔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 감독이었던 제프 밴 건디는 이에 대해 유잉의 공격력은 비록 예전만 못하지만 스탯과 무관하게 팀에게 줄 수 있는 안정감과 수비력, 정신력에서의 공헌이 있기에 비로소 파이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라며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들은 한마디로 멍청한 놈들이라고 일갈했다.
[48]
재미있는 것은 유잉이 결장했던 기간동안 유잉 대신 주전 센터를 맡아줬던 선수가 2년 전 유잉이 당했던 시즌 아웃급 부상의 원인 제공자였던 앤드류 랭이었다. 당시 밀워키 벅스 소속이었던 랭은 이후 시카고 불스를 거쳐 뉴욕 닉스에 합류하는데, 당시 닉스는 유잉의 백업 센터 크리스 더들리마저 무릎 부상으로 개막전부터 출전이 불가능하게 되자 시즌 개막을 한달 여 앞두고 급히 제 3의 센터로 랭을 영입했다. 유잉에게 부상을 입혔을 당시 고의로 파울한 것도 아니었던지라 유잉과의 관계는 별 문제 없었다고 한다.
[49]
스타팅 센터로 출전해 30분을 뛰었지만 야투를 8개 던져 단 하나도 성공시키지 못했을 정도로 경기 감각이 매우 무뎌진 상태였다. 그나마 자유투를 7개 적중시켜 7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해 팀 승리에 약간이나마 지분을 보탰다. 그 다음 경기인 보스턴과의 경기에서도 야투 11개를 시도해 3개만 적중시키며 9득점에 그치는 등 경기 감각을 되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복귀 후 세 번째 경기인 휴스턴과의 경기에선 60%의 야투율과 함께 20득점을 기록하며 엘리트 센터로서의 위용을 되찾았다.
[50]
일반인이었으면 심각한 후유증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갔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51]
이는
팀 던컨과 비슷하다. 별명이 "미스터 기본기"라는 것에서 모든 설명이 끝난다. 물론 던컨도 은퇴 시즌에는 급격한 노쇠화를 겪고 끝내 은퇴를 선언하긴 했지만. 참고로 은퇴 시즌인 2015-16시즌 당시 던컨의 나이는 무려 39세였다.
[52]
당시 국내 NBA 중계를 담당했던 SBS 스포츠에서
김성주 캐스터와 짝을 이뤄 해설을 맡았던 경향신문 유신모 기자도 2000시즌 플레이오프 기간동안 유잉의 닉스에 대한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닉스의 우승은 어렵다고 보지만, 그래도 한 경기 한 경기마다 어떻게든 끈질기게 상대를 물고늘어져 기어이 역전승을 만들어내고, 그런 경기를 하나둘씩 쌓아가며 플레이오프 관문을 하나하나 통과해나가는 닉스가 굉장히 인상깊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지켜보고 싶다는 취지의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53]
참고로 이 때 히트가 경기 막판 82:81로 앞선 상황에서
알론조 모닝이 공을 잡은 유잉에게 무리한 스틸을 시도하다가 오픈 찬스를 내주고 유잉은 곧장 투핸드 덩크를 꽂아 닉스가 83:82로 앞서나갔다. 현지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당시 경기 중계의 해설을 맡은 유신모 기자가 모닝의 실수라고 지적한 플레이였는데 공교롭게도 이후 양 팀이 수 차례 공방을 펼쳤지만 어느 팀도 득점을 추가하지 못해 경기는 그대로 닉스의 1점차 승리로 끝나버렸다.
[54]
그야말로 닉스에게 잃어버린 10년을 안겨준 악의 축 2인 중 1명.
뉴욕 닉스 항목을 참조.
[55]
뉴욕 닉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애틀 슈퍼소닉스, 피닉스 선즈 4팀이 연루되어 픽까지 포함하면 16명씩이나 움직인 초대형 트레이드였다. 뉴욕은 유잉과 백업 센터 크리스 더들리를 보내고 그 댓가로 글렌 라이스, 트레비스 나이트, 룩 롱리, 버논 멕스웰, 라자로 보렐, 블라디미르 스테파이나에 미래의 1라운드 픽 2개와 2라운드 픽 2개를 포함 무려 10명의 선수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 중에 제대로 쓸 수 있었던 선수는 글렌 라이스 하나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트윈 테러와 포지션이 중복되어 식스맨으로밖에 활용하지 못했고, 거기에다 꼴랑 1시즌만 뛰고 휴스턴 로키츠로 트레이드되어 떠났다. 리빌딩을 명목으로 받아온 1라운드 픽 2개는 한 시즌도 참지 못하고 이미 전성기가 지난 마크 잭슨과 롤플레이어에 불과했던 오델라 헤링턴이랑 바꿔먹어버려 결론적으로 스캇 레이든이 유잉을 트레이드한 명분 자체에 스스로 먹칠을 한 셈이 되었다.
[56]
그래도 올랜도 매직이 나름 유잉에 대한 예우를 해준 것이 올랜도 매직의 6번은 팬들에 대한 헌정의 의미로 영구결번된 번호였는데 유잉을 영입하며 일시적으로 영구결번을 해제하고 유잉에게 6번을 줬다. 현재까지도 유잉은 올랜도 매직 역사상 6번을 달고 뛴 유일한 선수다.
[57]
이 시즌에 가졌던 마지막 닉스 경기에서 닉스 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기도 했다. (닉스는 플레이오프 탈락했기 때문에 이는 유잉이 MSG에서 갖는 생애 마지막 경기였다) 감독이자 한때 유잉의 닉스 동료이기도 했던 닥 리버스는 레전드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를 주전 센터로 출장시켰으며(3개월만에 처음이었고 이 시즌 그가 주전으로 나온 4경기 중 하나였다) 주전 라이업 소개 당시 팬들이 그를 기립박수로 맞아주었다. 유잉은 점프볼을 따내고 첫 득점을 하는 등 6점 5리바운드(야투 2/3)으로 팀승리에 기여했다. 승부가 결정된 이후 55초를 남겨두고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와 함께 투입되어 MSG에서 마지막 슛을 날렸는데, 이게 아깝게 빗나가자 당시 닉스 가드였던 마크 잭슨은 "솔직히 들어갔으면 했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잭슨은 유잉의 2년 후배로 닉스가 초창기에 한창 성장할 때 유잉과 찰떡 호흡을 자랑했던 포인트가드였다.
[58]
이 당시 라이벌이었던 올라주원 역시 휴스턴과 계약 실패로
토론토 랩터스로 이적했는데, 휴스턴 팬들 또한 팀의 레전드가 이렇게 떠나버린 것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했었다. 뭐 그나마 올라주원은 기대보다 낮은 금액에 자기가 튕긴거였지만 유잉 역시 본인의 의사대로 트레이드 되었으며, 올라주원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59]
한국에선 후발주자인 1992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샤킬 오닐을 조기 은퇴한
브래드 도허티 대신 끼워넣는다. MVP를 수상한 적이 있는 로빈슨, 올라주원, 오닐, 그리고 이들과 대등히 매치업했으며 MVP 레이스에서 5위권에는 심심찮게 들어갔던 유잉에 비해 도허티는 레벨이 좀 떨어지는 편이었기 때문. 그래서 입성 시기가 다소 동떨어져있는 오닐을 제하고 하킴, 유잉, 로빈슨을 3대 센터로 묶는 경우도 있다. 여하튼
4대 요소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지만 저 넷이 90년대 리그 톱 센터로서 서로서로 자주 비교된 건 당연히 현지에서도 다르지 않다. 어디까지나 이러한 명칭으로 그룹화되지는 않았다는 것일 뿐 실제로 저들은 MVP 5위권에 네 명 모두 나란히 들어가기도 했을 정도로 튀는 센터들이었다.
[60]
224cm의 엄청난 키에도 뛰어난 스피드로 휴스턴의 공격을 이끌었지만 불과 3시즌만에 무릎이 망가지며 단명한 1983 드래프트 1순위 랄프 샘슨, 그 랄프 샘슨과 트윈 타워를 이루었으며 화려한 피벗을 자랑하는 테크니션인 1984 드래프트 1순위 하킴 올라주원, 1985 드래프트 1순위 패트릭 유잉, 부상으로 롱런하진 못했지만 뛰어난 패싱센스와 득점력을 보여준 86년 전체 1위
브래드 도허티, 빠른 스피드로 페이스업과 속공을 즐기는 1987 드래프트 전체 1위
데이비드 로빈슨으로 이어진다. 단, 로빈슨의 NBA 데뷔는 해군 의무복무를 마친 89년이다.
[61]
오닐처럼 다른 센터들을 미스매치 수준으로 압도하는 힘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중거리슛과 러닝/점프훅을 포함한 다양한 기술를 이용한 공격을 펼쳤다. 실제로 오닐처럼 중거리슛이 전혀 없고 극단적으로 골밑에만 치중하는데도 경기당 30점 가깝게 때려박을 수 있는 선수는 없었고, 중거리에서 득점을 못하는 선수는 골밑으로 오지 못하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결국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기에 S급 센터에겐 미들 정도는 필수였다. 그러나 오닐은 워낙에 압도적인 힘과 사이즈 및 체급대비 엄청난 운동능력을 지닌 선수라 이게 가능했던 것. 그리고 공격범위가 좁아서 그렇지 골밑에서의 득점감각과 기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62]
케빈 가넷,
케빈 듀란트,
야니스 아데토쿤보 등.
[63]
물론
샤킬 오닐처럼 파워부터 유잉을 압도하는 상대에게 통하는 기술은 아니었으나, 유잉은 이것 외에 기술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후술하는 것처럼 (노화가 본격적으로 오기 전까지는) 오히려 그를 상대로 앞서면 앞섰지 밀리진 않았다.
[64]
실제로 닉스시절 유잉의 영상을 보면 항상 두툼한 무릎보호대를 차고 있다.
[65]
이는 라이벌인 올라주원, 로빈슨, 오닐에 비하면 아무래도 떨어지는 운동능력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라주원은 벌크업을 하기 전엔 매끈한 몸과 미친듯한 운동능력으로 흑표범이라 불리곤 했고, 로빈슨은 역대 센터들 중 최상단에 놓이는 스피드를 자랑했다. 체급 대비 운동능력은 역대 최고수준이었던 오닐은 말 할 것도 없고.
[66]
일례로 신입생이던 82년
NCAA 결승에서 그는 전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던
제임스 워디에다가
샘 퍼킨스, 1학년
마이클 조던 등을 상대로 무려 4블록을 기록했다. 더 무서운 건 골텐딩이 무려 5개. 게다가 이 골텐딩은 블록이 될 수도 있었던 걸 간발의 타이밍으로 놓친 플레이인 경우가 많았으며, 이중 일부는 블록처럼 보이는데 골텐딩만 이렇게 많이 불렀다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당시 대학 중 최강전력이던 UNC 선수들이 슛을 쏘는 족족 뛰어올라 9번이나 쳐냈다는 얘기로, 그의 괴물같은 민첩성과 점프력을 볼 수 있다.
[67]
훗날 NBA 슈퍼스타가 되는
샤킬 오닐과
알론조 모닝이 유잉의 팬이 된 것도 이때였다. 실제로 오닐은 은퇴 후 여러번 밝혔듯이 어린 시절엔 유잉을 우상으로 삼았고, 오닐의 드래프트 동기이며 유잉의 대학 후배이자 절친인 모닝 역시 유잉을 좋아했는데, 둘 다 대학 시절 유잉의 플레이에 반한 것이다. 그만큼 대학시절 유잉은 야수처럼 다이나믹하고 파워 넘치는 플레이로 웬만한 NBA 선수들보다 인기가 많은 스타였다.
[68]
리바운드(특히 공격 리바운드)는 높이도 중요하지만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프로시절 유잉은 좀 굼뜬 편이라 높이나 파워에 비해 그렇게 잘 잡는 편은 아니었다.
[69]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3회에 불과해 은근히 과소평가받는게 있는데, 4대 센터는 공격보다 수비력이 더 괴물들이었다. 올라주원과 로빈슨 모두 올해의 수비수상 수상자이며 동시대엔 수비로 따지면 이들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디켐베 무톰보까지 있었다. 90년대 센터 부문 경쟁이 얼마나 빡셌냐면 1999년, 2000년에 수비왕 2연패를 한
알론조 모닝이 이들한테 치여서 데뷔 후 6년 동안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한번도 못 오를 정도였다! 유잉이 그나마 89년과 92년에 올라주원을 제치고 세컨드 팀에 오른 것만 해도 대단한 것.
[70]
유잉의 신장은 7피트에 못 미쳤다는게 중론이다.
야오밍, 무톰보와의 저녁 식사를 같이 할 때(당시 야오와 무톰보는 휴스턴에서 선수로, 유잉은 코치로 있었다) 무톰보가 "사실 패트릭 키는 6피트 9인치(206cm)"라고 언급하자, 유잉이 "내가 6-9일지 모르겠지만 터프한(bad) 6-9이야"라고 되받아친 적이 있다. http://www.si.com/vault/2005/03/14/8254880/dinner-at-yaos 그러나 그는 윙스팬이 8피트에 가깝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길었다.
[71]
마이클 조던이 1991 파이널에서
존 스탁스와 찰스 오클리의 더블팀을 스핀무브로 말 그대로 농락하고 유잉에게 멋진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꽂은 전설적인 장면은 유잉에게 굴욕 장면으로 남아있지만 자세히 보면 두 동료가 베이스라인에서 털리고 그 발빠른 조던이 골밑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만에 골밑을 사수해서 블록하기 직전까지 갔다.
[72]
http://www.nytimes.com/1985/09/29/magazine/patrick-ewing-and-the-art-of-defense.html?pagewanted=all
[73]
참고로 1대1 능력이 떨어진다느니 하는 건 센터들이 30점에 가깝게 넣으며 MVP 랭킹 상위 5인 중 4인이 센터일 정도로 특급 센터들이 범람했던 90년대 기준이다. 센터들의 기량이 당시에 비해 전체적으로 떨어지는 2000~10년대 기준으로 골밑 공격력과 1대1 능력으로 유잉에 비견되거나 능가한다고 할 만 했던 센터는 2000년대 중반 까지의
샤킬 오닐, 하워드같은 역대 최고의 수비형 센터도 누르며 득점하던
야오밍, 당시 빅맨들 중 효율이 천장을 뚫었던 전성기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정도를 제외하곤 없었다. 애시당초
뉴욕 닉스는 팀 구성상 유잉에 대한 공격 의존도가 무척 높은 편이었는데, 정작 그 유잉의 1대1 공격력이 별볼일 없었다면 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을리 만무하다.
[74]
사실 긴 팔과 큰 키에 비해 상당히 작은 손 탓에 레이업을 잘하기에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다. 물론 진짜 작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농구공을 소프트볼처럼 잡는 빅맨들에 비해서일 뿐. 여하튼 이 때문에 공을 흘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75]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알론조 모닝은 수비왕 2연패에 빛나지만 7년차가 된 1999년이 되어서야 올-디펜시브 팀에 처음 이름을 올렸고, 자기보다 5살이나 많은 데이비드 로빈슨에게 1998년까지 매년 밀렸다. 그런데 올라주원은 수비력이 로빈슨과 최소 동급인 선수인데, 그 올라주원을 전성기 때 올-디펜시브 팀에서 밀어냈던게 유잉이다. 유잉도 1990년대만 피했다면 수비왕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그는 공격도 잘 했지만 무지막지한 수비력으로 1픽을 먹은 선수다.
[76]
http://proxy.espn.com/espn/page2/story?id=1193711
[77]
물론 시먼스가 이를 처음 언급한 것은 아니고, 후술되는 99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이후 유명해진 설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1994 파이널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슬금슬금 나오기도 했다.
[78]
즉, 엄밀히 말해 정식 명칭은 "유잉 무용론"이 아니라 "유잉 이론"이지만 부정적인 뉘앙스가 숨어있는 건 마찬가지이다.
[79]
그 전까지는 까놓고 말해 잘하는데 우승 못한다고 까내리는 억지에 불과했다. 1994 파이널에서 못 했다고는 하나(공격한정. 수비와 리바운드는 평상시처럼 강력했다. 당시 기준 파이널 기록이었던 한 경기 8블록/시리즈 30블록을 기록할 정도. 평균 블록과 리바운드 둘 다 올라주원을 앞섰다), 플레이오프 전체에서 21.9득점 11.7리바운드 3블록을 기록했으며, 무엇보다 당시 닉스는 유잉의 부진 때문에 졌다. 유잉 무용론은 "유잉이 필요없다'는 이론이므로 유잉이 빠지고 나서 팀이 잘 나가야 성립하는 설인데, 이 때 닉스는 유잉이 빠지고 잘 나간 적이 없으므로 의미가 전혀 없다.
[80]
당시 인디애나하면 가장 먼저 레지 밀러가 떠오르지만 사실 인디애나는 골밑라인이 매우 두터운 팀이었다. 릭 스미츠, 데일 데이비스, 앤토니오 데이비스 3인방은 모두 올스타에 한번씩 선정된 (각각 98,00,01년) 수준급 빅맨들이었다. (다만 앤토니오 데이비스는 99시즌을 끝으로 이적해 00시즌엔 데일-릭의 듀오) 게다가 223cm에 달하는 스미츠, 211cm인 데일 데이비스의 빅 라인업은 전성기 유잉이라면 모를까, 30대 후반 노장인 유잉에겐 버거운 상대였다.
[81]
더들리는 종종 매치업하긴 했고, 박살이 났다. 심지어 오닐 하일라이트에 빠짐없이 나오는, 오닐이 더들리를 무자비하게 밀어붙히고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먹은 다음 대놓고 밀어서 넘어뜨리는 플레이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열받은 더들리가 공을 오닐에게 던져 싸움이 날 뻔하기도 했다.
[82]
스몰라인업의 가장 큰 약점이 포스트플레이가 위력적인 정통센터다. 이 때문에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시가 이끌던 마이애미 히트가 잘하긴 하지만 슈퍼스타급은 아니었던
로이 히버트에게 골밑이 박살나며 고전했다. 참고로 히버트 역시 느린 정통센터였으며, 센터를 더블팀하기 좀 더 용이해진 지역방어가 있었음에도 이 정도 위력이었다.
[83]
데일/앤토니오 데이비스 듀오는 수비와 리바운드 등 궂은 일에 특화된 빅맨들이었고, 릭 스미츠는 수준급 공격수였으나 골밑을 폭격하기보단 점프슛으로 득점지원을 하는 선수였다.
[84]
댈러스 입장에선 환장할 만한 것이, 06시즌 팀 사상 역대최고승과 파이널에서 첫 두 경기를 이기고도 역전패했던 매버릭스는 그야말로 칼을 갈고 다음 시즌을 준비했고, 06-07시즌 전성기를 달리는 노비츠키를 필두로 절정의 위력을 보이며 상대한 29개팀 중 28개팀을 상대로 전적에서 우위였다. 그러나 단 한 팀, 04-05시즌 중반부까지 매버릭스를 이끌어 이들의 장단점과 이들의 감독 에어버리 존슨(당시 코치)의 스타일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던 돈 넬슨 감독이 이끄는 워리어스에게는 3전 전패를 당했다. 리그 모든 팀들을 상대로 해볼 만했지만, 호구잡혔던 단 한 팀과 맞붙은 것. 사실 1라운드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상대전적에서 앞서도 댈러스가 워낙 정규 시즌에서 압도적이었던지라 "고전하겠지만 그래도 댈러스인데"하는 시각이 많았고 업셋을 점치는 이는 소수였다. 결과는 2006-07시즌 1라운드 사상 최다 승수(-25승) 업셋이라는 굴욕으로 이어진다.
[85]
이는 2017-18시즌
토론토 랩터스에게도 해당된다. 당시 창단 최고 성적(59승 23패)으로 동부 컨퍼런스 1위까지 차지했을 정도로 대부분 팀들에게 강했지만, 단 한 팀,
르브론 제임스가 버티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는 단 한 번도 우위를 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는 2라운드에서 39년만에 1번 시드의 4전 전패 스윕패로 이어지는 굴욕으로 이어졌다.
[86]
오해할 수 있는데 파이널에 오른 99시즌은 조던의 부재와 불스의 몰락으로 동부의 경쟁력이 떨어진 사이 닉스가 파이널에 오른 것이지 팀으로서 전력은 이때가 더 강했다.
[87]
1994년의 경우 올라주원-로빈슨-피펜-오닐-유잉 순이었고 95년은 로빈슨-오닐-말론-유잉-올라주원 순이었다. 또한 1993 시즌에는 막강 루키 듀오인 오닐과 알론조 모닝도 나란히 20-10을 넘기고 나란히 올-NBA 팀 입성에 실패했다.
[88]
유잉 본인도 1993년도에 팀을 60승으로 이끌며 유력한 MVP 후보였지만 세컨드 팀에 그쳤다.
[89]
이 시즌 블록 순위는 1위 하킴 올라주원 4.6개, 2위 유잉 4개, 3위 로빈슨 3.9개, 4위 마누트 볼이 3.2개로 이어졌다. 또한 상위 9명이 전부 센터였다.
[90]
이후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해서 4번째 우승을 추가했다.
[91]
올라주원의 평가가 급격하게 올라간 것은 첫 우승을 달성한 1994년 플레이오프 직후였다. 무관인 시절엔 팀성적도 받쳐주지 않는데다 코칭스태프와의 마찰까지 있어 훗날
케빈 가넷이 무관인 시절이었을 때처럼 "혼자만 잘하고 팀을 끌어올릴 수준은 아닌 것 아니냐"는 식의 부정적인 시선이 있었던 선수였다.
[92]
물론 유잉은 89년에야 처음 MVP셰어를 받았지만 올라주원은 85년부터 88년까지 12,4,7,7위에 올랐다. 89년엔 올라주원 5위/유잉 4위, 90년엔 올라주원 7위/유잉 5위, 91년엔 올라주원 18위/유잉 11위, 92년엔 올라주원은 아예 순위 밖이었고 유잉은 5위에 올랐다.
[93]
올라주원이 30대에 접어들기 전까지 MVP순위 5위가 최고였다는 걸 보면 당시 그의 평가가 어땠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올라주원은 92년까지 세차례 퍼스트 팀에 리바운드왕 2회, 블록왕 2회, 89년도엔 24.8득점 13.5리바운드 3.4블록 2.6스틸, 90년도엔 24.3득점 14리바운드 4.6블록 2.1스틸이란 미친 스탯을 기록한 괴물이었다. 즉 '개인기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과연 팀을 우승으로 이끌 수 있는가?'는 꼬리표가 남아있었다. 실제로 올라주원은 4대 센터들 중 가장 강한 클러치 플레이어로 인정받지만, 94년 우승 전까지만 해도 오히려 클러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있어 1994년 플레이오프 당시 하위시드인 피닉스에게 홈2연전을 패하며 0승2패로 몰리자 '쫄보들의 도시(choke city)'란 조롱을 받기도 했었다. 포인트는 우승하기 전까지 올라주원과 유잉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큰 차이가 없었단 것이다.
[94]
MVP 투표순위와 올NBA팀 실적으로 보면 유잉과 올라주원은 92년까지 거의 엎치락뒤치락하다가 93시즌 MVP 투표에서 올라주원이 2위를 하며 격차를 좀 벌이고(유잉은 4위), 몬스터 시즌을 보낸 94시즌을 기점으로 올라주원이 확 위상이 올라간 것에 가깝다. 물론 그 전까지 올NBA퍼스트팀은 올라주원이 3회, 유잉이 1회였지만 MVP 최고순위는 유잉 4위, 올라주원 5위였다.
[95]
1994 파이널에서 유잉이 올라주원을 막을때 찰스 오클리와 앤서니 메이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면, 올라주원 역시 유잉을 막을때 오티스 소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물론 똑같이 고강도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양측의 퍼포먼스는 올라주원의 우위였고 그게 결국은 시리즈의 향방을 갈랐다.
[96]
비슷한 케이스가 바로
팀 던컨 vs
케빈 가넷이다. 둘의 커리어 전체적으로 보면 던컨은 우승 5회, 파이널 MVP 3회, 퍼스트 팀 10회로 우승 1회, 올해의 수비수상 1회, 퍼스트 팀 5회인 가넷과 급이 다른 선수로 보일 수 있지만, 이들의 전성기 때는 실제로 둘이 대등하게 매치업했으며 대등한 라이벌로 평가받았다. 이들의 전성기 때는 '커리어를 떠나 실력으로 따지면 누가 위인가'가 진지하게 논의되었을 정도이다.
[97]
물론 위에 언급했다시피 1994 파이널 당시엔 올라주원이 압승했으며, 이에 따라 커리어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98]
유잉의 발언은 현대 농구를 폄훼한다기보단 본인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해당 인터뷰도 정색하고 진지하게 한 얘기가 아니라 인터뷰어와 서로 웃고 떠드는 분위기에서 내가 짱먹을꺼란 식의 얘기였으며, 애초에 레전드들은 자기가 뛴 시대를 고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99]
당시 기준으론 그렇게 느린 선수는 아니었지만 현대 센터들과 비교하면 매우 느리다.
[100]
물론 유잉도 미드레인지의 장인인 만큼 픽앤팝에는 능했지만, 위협적인 페이스업을 곁들일만한 속도나 드리블은 없었다.
[101]
그래서 턴오버가 어지간한 PG 수준으로 많았다.
[102]
사실 엠비드에 대한 올라주원의 비판은 옵션 간 선호도에 대한 의문에 가깝지, 엠비드의 스킬 자체를 까내린 적은 없다. (물론 엠비드의 로우포스트 테크닉이 올라주원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103]
조던의 팀에게 유잉만큼 많이 물 먹은 레전드는 없다.
찰스 바클리는 커리어 통틀어 조던에게 플레이오프에서 3번 졌고(피닉스 1회, 식서스 2회), 캐브스의
브래드 도허티,
마크 프라이스는 4번 졌으며,
알론조 모닝은 2번 졌고,
칼 말론&
존 스탁턴도 2번,
도미니크 윌킨스와
레지 밀러는 1번만 만나 1번 졌다. 그러나 유잉은 조던의 팀을 무려 5번이나 만나 전패했다. 그것도 그 중 1번만 1라운드 탈락이고 2라운드 3번, 3라운드 1번이었다. 더 중요한 건 62년생이던 유잉이 전성기 나이이던 90년대 초반에 3년 연속으로 조던의 팀을 만나 3년 연속 탈락했단 것. 특히 조던의 팀보다 팀전력이 우위를 점한 유일한 시즌인 93시즌 컨퍼런스 결승에서 홈코트 어드밴티지까지 얻고 첫 두경기를 따냈지만, 5차전을 동료 찰스 스미스의 삽질로 놓치고 결국 패한 것은 그야말로 한 맺힐 경험.
[104]
이는 유잉 팬들이 가장 애석하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도 큰 차이가 아닌 단 1승이 모자라 3승 4패로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기 때문. 반면 그만큼 플레이오프에서 올라주원이 보여준 퍼포먼스가 어마어마했다. 유잉 못지 않은 피해자로 데이비드 로빈슨이 있는데, 로빈슨은 정규 시즌에선 올라주원과의 맞대결에서 여러번 우위를 점했으나, 1995년 플레이오프에서 역대급 하이라이트 필름에 절대 빠지지 않는 드림쉐이크와 함께 호되게 털리며 이미지가 훅 가버린 탓에 로빈슨이 늘 올라주원에 발렸다고 세간에 잘못 인식이 되어버린 예가 있다.
[105]
여담이지만 1994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피펜이 유잉에게 덩크를 먹이고 뒷걸음치는 유잉을 손으로 마구 밀치며 넘어뜨린게 피펜의 가장 유명하고 멋진 덩크라 하일라잇에 자주 나온다. 그런데 이 때문에 빡친 유잉과 닉스 선수들 사이 싸움이 날 뻔한 적이 있었다. 물론 피펜이 인성에 문제가 있었다거나 한 건 당연히 아니고 당시 그만큼 불스와 닉스 사이의 라이벌 관계가 극에 달했으며[117] 실제로 이 시리즈 도중 관람온 데이비드 스턴 총재 앞에서 양팀이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만큼 두 팀 사이의 라이벌 관계는 치열했으며,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조던과 유잉 역시 주먹다짐을 할 뻔했었다. 여담으로 피펜의 준시그니처라고 할수 있는 에어 모어 업템포 닉스 색상이 2017년 출시되었는데 피펜이 유잉을 상대로 인 유어 페이스를 하는 장면이 인솔에 그려져 있을 정도이다.
[106]
슬램덩크의 영향인지 아마추어 농구를 연상하는 건지 정통센터는 중거리에서 슛을 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NBA 기준으론 오히려 옛날부터 모든 정통센터들은 중거리슛 능력이 있었다. 60년대 윌트 체임벌린부터 시작해 윌리스 리드, 카림 압둘자바, 모제스 말론, 로버트 패리쉬, 유잉, 로빈슨, 올라주원, 알론조 모닝 등 슈퍼스타 센터들은 거의 모두 중거리슈팅력이 있었다. 빌 러셀같은 수비형 센터를 제외하고 공격력이 뛰어난 슈퍼스타 센터들 중 아예 슈팅력이 없는 선수는 사실상 샤킬 오닐 뿐이었다. 즉, NBA에서 센터의 표준은 오히려 어느 정도 중거리슈팅력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07]
NBA 관련 글을 보면 palm (한 손으로 공을 움켜잡는 것)을 못 한다는 묘사나 본인의 언급이 나오는 선수들이 종종 보이는데
카멜로 앤서니,
케빈 듀란트,
코비 브라이언트, 그리고 빅맨인데도 거의 일반인 수준으로 손이 작은
모제스 말론 등이 있다. 그런데 코비는 본인 입으로 공을 한 손으로 못 잡는다고 한 선수인데 사진을 찾아보면 분명 경기 중 공을 한 손으로 잡고 수비와 대치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이들이 "한 손으로 못 잡는다"는 의미가 경기 중 자유자재로 한 손으로 잡고 마음대로 갖고노는 수준이란 걸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구공은 표면의 돌기가 있고 그 재질 덕분에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손 크기와 악력이 있으면 한손으로 잡는게 크게 어렵진 않고, 특히 NBA 규격 농구공은 국제규격 공보다 더 잡기 쉽다. 코비의 경우에도 보듯 손이 작다곤 해도 20cm는 가볍게 넘기는 저 선수들이 실제로 공을 못 잡을리는 없다. 그러나 palming을 잘하는 선수들은
마이클 조던처럼 공을 마치 핸드볼처럼 쥐고 허공에다 휘젓거나 한손으로 잡고 패스를 하는 척 하다가 다시 끌어와서 슛을 하는 등 갖고 노는 수준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공이 손 안에 쏙 들어와 그냥 가볍게 쥐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여야 한다. 악력을 이용해 겨우 잡는 수준이면 손가락까지 힘을 주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저런 볼핸들링은 못하고, 위에 언급된 선수들은 손가락까지 이용해야 공을 잡는 수준이기 때문에 "한 손으로 못 잡는다"고 하고 다니는 것이다. 즉, 정지상태에서 잠깐 한 손으로 잡는 것까지만 가능하다면 NBA 기준으론 palming이 불가능한 것이다.
[108]
조던의 불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다섯 번이나 만나 전부 다 졌다. 조던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적이 13번에 불과하고 초창기에는 팀 전력이 매우 약해서 1라운드에서 광탈당하곤 했다는 걸 생각하면 유잉의 닉스는 거의 연례행사급으로 불스에게 깨진 셈. 특히 불스의 첫 스리핏 기간인 91~93 시즌에는 3년 연속으로 불스에게 패배했는데, 93 시즌 닉스가 유잉 시대 최고성적인 60승을 거뒀고 홈코트 어드밴티지도 있었으며 시리즈 초반 2승0패로 앞서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점. 유잉 시절에 유일하게 불스에게 거둔 플레이오프 승리는 94년이었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때는 조던이 없었다. 조던은 이를 두고 "마치 동네 깡패(bully)가 형이 없을때 동생을 괴롭힌 것 같았다"라고 표현했고, 복귀한 이후 붙은 96 시즌에 4승1패로 승리했다. 다만 이때 닉스는 불스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배를 안긴 유일한 동부팀이었다.
[109]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유잉이 뉴욕에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대개 풋볼이나 야구, 농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뉴욕을 거친 많은 스타급 선수들이 언론과 투닥거리다 진저리를 치며 먼저 뉴욕에서 떠나버린 케이스가 많았던 반면, 유잉은 아무리 가십성 기사를 써도 상대를 해주질 않았고 이게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며 15년까지 이어지자 언론이 먼저 제풀에 나가떨어진 케이스.
[110]
하필이면 감독 데뷔전이 친정팀 뉴욕 닉스전이었다. 결과는 패배. 감독으로서의 첫 승리는 2013년 11월 13일 보스턴 셀틱스 전에서 기록.
[111]
사실 오닐의 말투 때문에 국내 팬들 사이에서 그가 유잉을 무시한다고 오해가 생긴 것도 있는데, 오닐은 "유잉이나 모닝같은 Georgetown boys는 한쪽으로 페이크하고 다른 쪽으로 멍청한 러닝점프훅(dumb-ass running jump hook)을 날린다"고 묘사했는데 정작 본인의 레파토리를 설명하면서도 똑같이 "멍청한 러닝점프훅"이라는 단어를 썼다. 전직 NBA 선수들이 여러 노가리를 까는 NBA Open court란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진 중 하나가 오닐이고 이 프로에서 오닐은 유잉에 대해 여러번 언급한 바 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오닐은 결코 유잉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기가 성장할때 패트릭이 터프(mean)해서 좋아했으며,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선수들을 꼽으면서 유잉의 맹렬함(ferocity)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였다.
[112]
사실 샤킬 오닐은 승부욕과 자존심이 너무나 강해서 자신들의 우상을 현역시절엔 오히려 깔아뭉개는 경향이 강했다.
데이비드 로빈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자신이 존경하던 로빈슨을 대상으로 "로빈슨이 내가 어렸을 때 나를 무시했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지어내면서까지 승부욕을 불태웠던게 오닐이다. 그런만큼 존경하는 유잉 역시 저런식으로 폄훼했던 것. 자세히보면 오닐이 유잉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것은 거의 커리어 초창기로, 아직 유잉과 닉스가 오닐과 매직에게 무서운 라이벌로 존재하던 시절이다. 말년의 초라해진 유잉을 상대로 폄훼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을 한 적은 없다.
[113]
다만 플레이오프까지 포함시킨다면 하킴 올라주원이 1995 파이널에서 오닐을 상대로 35득점 1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적이 있다.
[114]
1993년은 농구화 대유행의 절정기로 샤킬 오닐의 시그내쳐 제품인
리복 샤크 어택이 출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절이었다.
[115]
참고로 아버지와 진짜 많이 닮았다. 왕콧구멍까지
그대로 빼다박았다.
[116]
accosted라는 표현을 쓴 걸로 보아 경비가 단순제지 정도가 아니라, 험한말까지 곁들인 모양.
[117]
조던이 불스는 이끌던 91~93시즌 3년 연속으로 닉스를 탈락시켰다. 그러나 닉스 역시 92,93시즌에 불스가 가장 고전한 팀이었으며, 거친 플레이로 불스 선수들을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