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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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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 7 | No. 11 | No. 22 | No. 25 | No. 34 |
<rowcolor=#000000>
빙고 스미스 (Bobby "Bingo" Smith) |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 (Zydrunas Ilgauskas) |
래리 낸스 (Larry Nance) |
마크 프라이스 (Mark Price) |
오스틴 카 (Austin Carr) |
|
<rowcolor=#ccac00> No. 42 | No. 43 | 🎙️ | - | ||
<rowcolor=#000000>
네이트 서몬드 (Nate Thurmond) |
브래드 도허티 (Brad Daugherty) |
조 테이트 (Joe Tait) |
닉 길버트 (Nick Gilbert)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등번호 43번 | ||||
얼 테이텀 (1979~1980) |
→ |
브래드 도허티 (1986~1996) |
→ | 영구 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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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60038><colcolor=#ffffff>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No. 43 | |
브래들리 리 도허티 Bradley Lee Daugherty |
|
출생 | 1965년 10월 19일 ([age(1965-10-19)]세) |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 마운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
신장 | 213cm (7' 0") |
체중 | 111kg (245 lbs) |
윙스팬 | 223cm (7' 4") |
포지션 | 센터 |
드래프트 |
1986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지명 |
소속 팀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986~1996) |
등번호 | 43번 - 클리블랜드 |
SNS |
[clearfix]
1. 개요
올스타 3인방 도허티(43번), 프라이스(25번), 낸스(22번) |
8시즌 통산 기록은 10,389 득점 (경기당 19.0 득점) / 5,227 리바운드 (경기당 9.5 리바운드) / 2,028 어시스트 (경기당 3.7 어시스트)
2. NBA 경력
2.1.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졸업 후 1986년 드래프트 1번 픽으로 클리블랜드에 입단하여 루키 시즌인 1986-87시즌 80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고, 필드골 성공률 53.8%, 평균 15.7 득점, 8.1 리바운드, 0.8 블락슛, 자유투 성공률 69.6%, 3.8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비록 신인왕은 척 퍼슨에게 밀렸지만 All-Rookie First Team에 선정되면서 본인이 NBA에서 충분히 통하는 선수임을 입증하였다.2번째 시즌 브래드 도허티는 첫 시즌보다 모든 면에서 나은 성적을 거두게 되는데 필드골 성공률 51.0%, 평균 18.7득점, 8.4리바운드, 4.2 어시스트, 0.7 블락슛을 기록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이후 88-89시즌 이 시기 기량이 만개한 마크 프라이스와 함께 브래드 도허티는 캐벌리어스의 원투 펀치를 형성하며 당시 팀 역사상 최다승인 57승을 거두게 되며 이 시즌 도허티는 평균 18.9득점, 평균 9.2리바운드, 3.7 어시스트, 평균 0.5 블락슛을 기록했다.
89-90 시즌 등 부상으로 40경기에만 출장하며 평균 16.8 득점, 9.1 리바운드, 3.2 어시스트, 0.5 블락슛을 기록하며 주춤했지만 다음 시즌인 90-91시즌 평균 21.6득점, 10.9리바운드, 3.3 어시스트, 1.1 블락슛을 기록하며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였다. 이후 91-92시즌 57%의 높은 필드골 성공률에 평균 21.5득점 10.4 리바운드, 3.6 어시스트 / 92-93시즌 필드골 성공률 57.1%, 평균 20.2득점, 10.2 리바운드, 4.4 어시스트, 0.8 블락슛을 기록하며 3년 연속 20-10 이라는 엘리트 센터의 스탯을 만들어내면서 당시 동부의 유잉, 서부의 올라주원, 로빈슨과 함께 4대 센터의 일원이 되었다. (이 시기는 오닐의 등장 이전)
93-94 시즌 등 부상으로 50경기 출장하며 평균 17.0득점, 10.2리바운드 3.0 어시스트를 기록하였고 이후 본인을 계속 괴롭히던 부상인 등 부분의 통증이 치명적인 허리디스크였다는 걸 알게 되고 결국 이로 인해 1994-95 시즌을 앞둔 채 시즌아웃됐고, 복귀를 위해 수술을 받고 재활에 매진했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안 돼서 1995-96 시즌 후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3. 은퇴 후
1996년부터 ESPN에서 대학 농구 분석가로 활동, 그 외에 자선 사업 및 개인 사업을 하며 지내오다가, 1997년 NASCAR 레이싱 팀이었던 Liberty Racing이라는 팀의 공동 소유자가 된 것을 시작으로, 현재 JTG 도허티 레이싱[1]이라는 NASCAR 팀의 공동 구단주 겸 소유주를 역임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2020년 부터는 NBC 스포츠 채널에서 NASCAR 전문 분석가 겸 해설위원[2]으로 활약하고 있다.1997년에는 그의 등번호 43번이 클리블랜드에서 영구 결번됐다.
마이클 조던과 1982~1984년 노스캐롤리이나 대학교에서 같이 뛰었으며 조던과 도허티 모두 NASCAR를 좋아해서 더 가까워졌다고 한다.
[1]
원래는 ST 모터스포츠, JTG 레이싱이라는 팀명을 썼으나, 도허티가 공동 소유주가 된 이후 도허티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2]
정작 본인은 NASCAR 레이싱 선수로 활약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NASCAR 레이싱 팀의 단장 및 구단주 등을 역임 하면서 현장에서 노하우 등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인 사업 중에 자동차 대리점 사업을 했던 경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