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21:24:06

조중훈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본명이 '조중훈'인 가수에 대한 내용은 조PD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05096><tablebgcolor=#005096> 파일:한진 심볼 화이트.svg 한진그룹
회장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5096 0%, #005096 20%, #005096 80%, #005096)"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조중훈
(1945~2002)
제2대
조양호
(2003~2019)
제3대
조원태
(2019~ )
}}}}}}}}}}}}}}} ||
<colbgcolor=#005096><colcolor=#ffffff> 한진그룹 초대 회장
조중훈
趙重勳|Cho Choonghoon
파일:한진_조중훈.jpg
출생 1920년 2월 11일
경기도 경성부 미근정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미근동)
사망 2002년 11월 17일 (향년 82세)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인하대학교병원
본관 양주 조씨[1]
정석(靜石)[2]
직업 기업인
학력 미동공립보통학교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중퇴)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수료)
부모 아버지 조명희(1895 ~ 1971)[3]
어머니 태천즙(1895 ~ 1971)
형제자매 4남 4녀 중 차남
형 조중렬
남동생 조중건, 조중식
배우자 김정일(1923년생)
자녀 장녀 조현숙
장남 조양호
차남 조남호
삼남 조수호
사남 조정호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가족 관련 일화들5. 여담6. 수상경력7. 저서8. 참고 자료9. 대중매체에서10.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기업인. 한진그룹 대한항공의 초대 회장이다.

2. 생애

1920년 경기도 경성부 미근정(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지주로 직물도매상을 하던 아버지 조명희(趙命熙)와 어머니 태천즙(太天楫) 사이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학, 과학, 공작 활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조중훈은 미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4]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아버지가 차렸던 종로의 직물점이 부도나 자퇴한 후, 경성부를 떠나 국비지원교육기관이던 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수료했다. 이후 일본 고베로 떠나 후지무라조선소의 수습생으로 취직해 갖은 고생을 하며 1940년에 2등 기관사 자격증을 따서 홍콩, 마카오, 필리핀 등지를 돌았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의 유대인 상인들과 중국인 상인, 개성 인분 장수들을 접하며 상업철학을 깨우쳤다. 기사

1942년에 귀국한 후 엔진을 재생하는 데 필요한 보링 기계 1대를 사서 '이연공업사'라는 자동차 정비 업체를 세워 첫 성공을 거뒀으나 이듬해에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기업 정비령[5]'에 따라 일본의 군수업체 마루베니(丸紅) 사에 강제로 뺏겼다. 이후 일제의 강제징용 정책으로 인해 경성 용산공착장에 강제 징집되어 근무하다 해방을 맞은 뒤인 1945년 11월 이연공업사를 정리할 당시 모은 돈으로 트럭 1대를 사서 인천에 한진그룹의 시초가 되는 운수업체인 한진상사를 창업하였고, 1947년에는 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으로부터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부여받았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차량과 장비들이 군용으로 징발되기도 하는 등 잠시 침체기를 거치기도 했으나, 1953년에 인천으로 돌아와 가건물을 세워 재건에 주력했다. 1956년 주한미8군과 군수물자 수송 계약을 체결하고, 베트남 전쟁 때인 1965년에 초대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1966년에 파병되는 미군과 군수물자 수송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진그룹을 운송 및 물류 전문 재벌로 키웠다.

월남 사업 동안 전쟁터에서 목숨을 무릅쓰고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베트남 쌀이 입맛에 맞지 않는 직원들을 위해 한국에서 쌀을 공급토록 하며 현지 김치공장도 세우도록 했다. 그러나 베트남전 때 크게 성장한 한진그룹임에도, 물자를 나눠쓰고 신변을 호위해주는 등 성장을 적극 도와준 군과 파월장병들이 고엽제 후유증 문제로 고통받을 때 그에 대한 지원 요청을 외면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

조중훈은 항공 사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1960년에는 '한국항공'이라는 민간 항공회사를 세워 당시로써는 최신형 기종인 40인승짜리 콘베어 240기와 경비행기 세스나 180기를 사서 서울~부산 간 노선 취항 및 에어택시 사업으로 재미를 보았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정이 대한국민항공사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함에 따라 결국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다 운명의 장난인지 1969년 정부의 권유로 당시 부실 상태인 대한항공공사를 사실상 반강제로 인수했다. 그것도 1969년 당시 27억 원의 빚을 모두 떠안는다는 조건 하에 인수대금 14억 5,300만 원을 주고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것이다. 사실상 반강제의 인수였는데 개발도상국인 당시의 한국에서 비행기 수요자체가 전혀 없었던 시절인데다가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항공공사의 운영이 당연히 될리가 없고 국영기업이다 보니 관리도 부실하여 적자 이에 대한 처리를 위해서 물류 중심의 재벌인 조중훈에게 거의 떠맡기듯이 한 것이다.[6] 이에 대해 작은 일화가 있는데 청와대 호출이 와서 차를 타고 동생인 조중건 부회장과 함께 들어가는 와중에 이미 어떤 얘기가 나올지 둘 다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조중건 부회장은 절대로 인수를 수락하면 안된다고 했고 조중훈 회장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비서실장 정도의 측근들만 만날 줄 알았던 조중훈 회장은 대통령을 직접 대면했고, 박정희가 여러번에 걸쳐 직접 간곡한 부탁을 하자 어쩔 수 없이 수락하고 말았다. 이에 조중건 부회장이 "형님. 왜 이걸 왜 인수하겠다고 한 거요?"라고 따지자 "너라면 대통령이 말하는데 거절할 수 있겠어? 그렇다면 네가 대통령한테 가서 거절하던가"라고 했고 회사로 돌아가서도 직원들이 똑같이 항의하자 똑같이 말했다고 한다.[7] 이렇게 울며 겨자먹기로 인수하여 이름을 ' 대한항공'이란 명칭으로 변경하며 민영화해 다시 항공 사업에 뛰어든다.

어찌됐든 항공 사업을 다시 시작한 이상, 조중훈은 먼저 국내선에 일본산 여객기인 YS-11기를 사들인 뒤 당시 외국 항공사들이 독점한 국제선 노선에 눈을 돌려 그 해 서울 ~ 사이공(현 호치민) 노선을 열고, 1971년에 미주 노선까지 확대했다. 이런 해외 비즈니스 수요로 걱정했던 것보다 재정이 안정화되었고 1980년대 후반 올림픽 개최로 인한 해외관광객 수요증가 및 1990년대 해외여행과 해외유학붐에 따른 비행기편 증가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는 다혈질적인 측면은 있었다고 하나 KAL 대표로서 일찍 일어나 오토바이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직접 달려가 정비 현장을 시찰하며 직원들의 노고를 격려하기도 했다.

1967년에는 대진해운( 한진해운 전신)을 세워 해운업에도 손을 벌렸다. 하지만 결국 파산크리. 그 외에도 1961년 8월에는 ' 한진관광'을 세워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사서 서울 ~ 인천까지 운행하기 시작했고, 1967년에 삼성그룹으로부터 동양화재도 사들여 금융업을 개시했다. 1968년에 학교법인 인하학원을 인수해 육영 사업까지 확장했다. 1987년과 1988년엔 부실기업 대한선주와 대한조선공사를 각각 인수해 우량기업으로 키워냈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진 대의원 선거에서 거수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에어버스 A300 여객기의 성공적인 운용 및 에어버스의 외국 판로 개척을 열게 한 공로로 199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중 2등급인 그랑도피시에를 받았다.

1999년 4월, 상하이 KAL기 추락사고에 책임을 지며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직을 장남 조양호에게 넘기고 그해 10월에 탈세 사건으로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았다.

이후에는 공식 석상에 대체로 나타나지 않았고[8] 2002년 11월 17일에 사재 1천억 원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인하대 의대 부속병원 병상에서 숨을 거뒀다.

사후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으며, 동월 21일 서울 김포공항 대한항공 본사 격납고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유해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하갈동 선영에 안장됐다.

3. 가족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범한진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가족 관련 일화들

자녀로는 고명딸이자 맏이인 조현숙,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 조수호 전 한진해운 회장,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이 있다.

친동생으로는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이 있다. 조중건 고문은 서울 중앙고등학교(42회)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UC 버클리에서 수송학을 전공했다.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후 5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다. 이후에도 조중훈 회장과 함께 2인자로 한진그룹을 키우는데 전력을 다했으나 아들 조양호회장에게 그룹을 물려주기 위한 과정에 다툼이 일어났고 말년에는 좋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5. 여담

6. 수상경력

7. 저서

8. 참고 자료

9. 대중매체에서

10.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2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4

[[무소속(정치)|
무소속
]]
6,301 (27.2%) 당선 (1위) 초선
1978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서울 종로 1 8,277 (26.3%) 재선
1981 1981년 대통령 선거인 선거 4,469 (21.1%) 당선 (2위) [9]
역대 선거 벽보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서대문4.jpg
파일:종로1 조중훈.jpg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4)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서울 종로 1)
파일:선거인단 종로1 조중훈.jpg
제12대 대통령선거인단 선거 (서울 종로 1) }}}}}}}}}


[1] 문강공파 19세손, 시조 22세손 중○(重○) 항렬. 노론 4대신 중 하나인 조태채가 그의 직계 8대조이다.( 족보) [2] 정석비행장, 정석항공관, 학교법인 정석인하학원, 정석항공과학고등학교 정석대학 한진그룹 산하 공익재단의 명칭이 그의 호를 딴 것. [3] ( 족보) [4] 현재 미동초에 남아 있는 조중훈의 학교 기록에 의하면, "승부 근성이 강해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 기억력과 상상력이 뛰어나고 공작 활동을 좋아한다."고 나와 있다. [5] 일제 말기 조선에 있는 모든 물자와 산업시설들을 군수지원체제로 바꾸고자 한 제도. [6] 당시에는 이런식으로 국가가 경영하다 부실해진 기업이나 호텔들을 재벌들에게 팔아치우는 조치들이 흔했다. [7] 다만 이 과정에서 비하인드가 하나 있다면 그래도 이미 인수가 결정난 가운데 조중훈이 용기내서 한 마디를 했다고 한다. "각하, 정말 어려운 상황이 오면 어떠한 부탁이든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얘기를 했고 박정희가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물론 조중훈은 박정희가 사망할때까지 한번도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으나, 자기가 떠넘기듯 기업을 인수하라고 하는 부탁도 들어준 한진을 향한 온갖 지원이 많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8] 별세 1년 전인 2001년 3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청운동 자택의 빈소를 찾아 "우리나라의 거목이 졌다"는 멘트를 남겼다. [9] 1위는 정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