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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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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보병사단
第五步兵師團
ROK Army The 5th Infantry Division
파일:제5보병사단 부대마크.svg
통일의 문을 여는 천하무적 상승 열쇠부대
<colbgcolor=#e50017><colcolor=#fff> 창설일 1948년 4월 29일 (제5여단)
1949년 5월 12일 (제5보병사단)
상징명칭 열쇠부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5군단
경례구호 단결
규모 사단
역할 경기도 연천군,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1]일대 수색 및 방위
사단장 소장 윤기중 (육사 51기)
위치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1. 개요2. 역사3. 예하부대4. 출신인물
4.1. 사단장4.2. 장교/부사관4.3. 병
5. 특징
5.1. 사단가5.2. 안보관광
6. 전쟁범죄7. 사건 사고
7.1. 코로나-19 군부대 집단 감염 사건7.2. 창설 74주년 기념행사 태권도 시범단 도복 논란7.3. 2023년 28사단 간호장교 영외이탈, 무단의료행위 협조 논란7.4. 5사단 병사 구타 논란
8. 여담

[clearfix]

1. 개요

사단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사단을 둔다.
② 사단은 관할구역의 작전·훈련 및 군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대한민국 국군 제5군단 예하 보병 사단. 중부 전선 최전방에 주둔하는 철책사단이다. 주요 임무로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 일부의 GOP GP 경계를 담당한다. 사단 좌익에는 제28보병사단, 우익에는 제6보병사단이 위치한다. 별칭은 열쇠부대.

부대의 상징은 열쇠이다. 적색 바탕은 정열과 명예, 백색 원은 단결과 완전무결, 열쇠 문양은 통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의미한다. 열쇠모양은 5사단의 숫자 5에서 따왔다. ㅇ부분을 동그랗게 그려넣은 형태이다.

경례 구호는 "단결"이다.[2] 현재 국군 전 부대에 퍼져있는 5분대기조 시스템이 사단 포병여단 예하 205 포병대대에서[3] 전군 최초로 도입, 시행되었다. 또한 전군 최초로 GOP 과학화 경계시스템이 도입된 부대이기도 하다.

2. 역사

1948년 4월 29일 경기도 수색에서 제3, 4, 9연대를 기반으로 제5여단으로 창설되었다. 최초 지휘관은 김상겸 대령.[4]

창설 후 여단 주둔지가 전라남도 광주로 변경 되었고, 1949년 5월 12일, 제5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이때 제15, 20연대가 사단으로 배속되었다. 초대 사단장은 송호성 준장. 이후 1949년 7월에는 백선엽 대령이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사단은 제15연대를 전주에, 제20연대를 광주에 주둔시켜 빨치산 토벌을 주 임무로 하며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후 한국전쟁 발발 전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압에 동원되었다.

이후 1950년 6월 25일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본부의 소환으로 서울 용산에 올라와 북한군 남하 지연작전에 참여 하였다. 이 시점에는 백선엽이 1사단으로 옮겨가고 이응준 준장이 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근데 이때는 말이 지연전이지, 닥치는 대로 투입하라는 채병덕의 삽질로 말미암아 예하 부대들이 사단장조차 모르는 사이 사상당했고,[5] 이 와중에 2개 대대로 부대 건제를 유지했던 15연대는 1개 대대만 남은 1사단 13연대 재건을 위해 해체되고,[6] 20연대 역시 창동 - 미아리 축선 방어전을 위해 한강 이북에 투입되었다가 전멸하여 지휘 가능한 연대들이 사실상 없어졌다. 그래도 남은 병력들을 긁어모아 7월 1일부터 시흥전투지구사령부 예하부대로서 지연전을 전개하며 철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나마 있던 병력들까지 분산되어 17일에는 기어이 사단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후 1950년 10월 8일 대구에 주둔 중이던 제27연대, 마산에 주둔 중인 제35연대, 부산에 주둔 중인 제36연대를 근간으로 대구에서 제5보병사단을 재창설하였고, 이 연대들이 지금까지 이르게 된다.[7]

다시 재창설된 5사단은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그 중 36연대가 미 2사단 예속으로 치른 피의 능선 전투[8] 가칠봉 전투[9]가 유명하다.

이후 5사단은 1952년 10월에 강원도 351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강원도 전선을 북방으로 밀어 올렸고, 이 전선은 지금 강원도에 그어진 휴전선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강원도 화천에 주둔했던 5사단은 1953년 3월 신편된 제15보병사단과 임무교대 후 후방인 남원에서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되다 다시 전방으로 올라가 7월 금성 전투의 핵심 전투인 백암산 전투를 치른다.

이후 1954년에 강원도 철원, 1960년 경기도 포천, 1971년 경기도 양평으로 주둔지가 변경 되다가, 1977년 당시 전방을 담당하던 제20보병사단에서 대대장 월북사건이 터지며 서울 근처로 재배치되는 바람에 20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여 1978년 4월 1일 현재의 주둔지인 경기도 연천에 이르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육군 사단 특성화 계획에 따라 3개의 특화사단을 지정했는데, 이 중 제5사단이[10] 1968년 1월 23일부로 공수사단으로 전환됐던 과거가 있다. 특전사에서 공수 위탁교육을 받고 자체 공수교육대도 보유했지만 1년여 만에 다시 일반보병사단으로 회귀하였다.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변경되었다.

국방개혁 2.0에 의해 상급부대인 제6군단이 2022년 11월 30일부로 해체됨에 따라 2022년 10월 1일부로 제5군단으로 예속 전환되었다.

장기적으로는 사단 재배치에 따라 제5보병사단이 최전방을 담당하게 될 예정이다.[11]

3. 예하부대

,,{{{+3 [[제5보병사단|제5보병사단]]의 예하부대}}},,
제27보병여단 제35보병여단
제36보병여단 포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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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 신병교육대는 제5보병사단/신병교육대 참고.

국방개혁 2.0 기본계획에 의거, 상비사단과 지역방위사단이 개편돼 예하 연대들 역시 2020년부로 여단급으로 격상되었다.

3.1. 사단 직할대

3.2. 제27보병여단 표범(G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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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제35보병여단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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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36보병여단 독수리 (G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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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6독수리.jpg

3.5. 포병여단 백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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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신병교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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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보병여단에서 3대대를 전환해 운용하는 곳이다.

4. 출신인물

4.1. 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역대 제5보병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1대 김상겸 예) 대령 사단장
2대 원용덕 예) 준장 사단장
3대 송호성 예) 준장 사단장
4대 백선엽 예) 대장 군영 01기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제1야전군사령관 교통부장관
5대 이응준 예) 중장 군영 01기 前 제1훈련소장
6대 이형석 예) 준장 사단장
7대 민기식 예) 대장 군영 01기 사단장 前 육군참모총장
8대 장창국 예) 준장 사단장
9대 김종갑 예) 중장 군영 01기 사단장 前 국방부차관
10대 최홍희 예) 소장 군영 01기 사단장
11대 김종갑 예) 중장 군영 01기 사단장 前 국방부차관
12대 박병권 예) 중장 군영 01기 사단장 前 국방부장관
13대 장도영 예) 중장 군영 01기 사단장 前 육군참모총장
14대 박병권 예) 중장 군영 01기 사단장 前 국방부장관
15대 김종갑 예) 중장 군영 01기 사단장 前 국방부차관
16대 박정희 예) 대장 육사 02기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위원장 대통령
17대 황엽 예) 준장 사단장
18대 이용 예) 소장 육사 07기 사단장 前 육군보병학교장
19대 채명신 예) 중장 육사 05기 사단장 前 제2작전사령관
20대 박원근 예) 소장 사단장
21대 이규학 예) 소장 사단장
22대 김익권 예) 소장 前 육군정훈학교장, 육사 생도대장, 제39보병사단장, 육군대학 총장
23대 조문환 예) 중장 사단장 초대 수도군단장
24대 강창성 예) 소장 육사 08기 사단장 前 보안사령관
25대 윤성민 예) 대장 육사 09기 합동참모의장 前 국방부장관
26대 정병주 예) 소장 육사 09기 사단장 前 육군특수전사령관
27대 구득현 예) 소장 육사 기 사단장
28대 김복동 예) 중장 육사 11기 사단장 前 육군사관학교장
29대 리범천 예) 소장 육사 12기 사단장
30대 정호근 예) 대장 갑종 05기 사단장 前 합동참모의장
31대 유재구 예) 소장 육사 13기 사단장
32대 신우식 예) 소장 육사 14기 사단장
33대 신말업 예) 대장 육사 16기 前 사단장 제3야전군사령관
34대 윤학열 예) 중장 육사 17기 사단장
35대 김봉찬 예) 소장 학군 1기 사단장
36대 이석복 예) 소장 육사 21기 사단장
37대 김석재 예) 대장 육사 23기 사단장 제1야전군사령관
38대 강신육 예) 중장 육사 24기 사단장 前 육군참모차장
39대 이장흠 예) 소장 갑종 202기 사단장
40대 안병한 예) 소장 육사 26기 사단장
41대 변상복 예) 소장 육사 28기 사단장
42대 김갑현 예) 소장 육사 29기 사단장
43대 박노식 예) 소장 육사 30기 사단장
44대 전종기 예) 소장 육사 32기 사단장
45대 권혁순 예) 대장 육사 34기 사단장 제3야전군사령관
46대 박삼득 예) 중장 육사 36기 국방대학교 총장 국가보훈처장
47대 최병로 예) 중장 육사 38기 사단장 육군사관학교장
48대 주창환 예) 소장 육사 40기 前 사단장 前 육군보병학교장
49대 정진경 예) 중장 육사 42기 사단장 육군사관학교장
50대 전유광 예) 소장 육사 44기 사단장 777사령관
51대 이상철 예) 중장 학군 28기 사단장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
52대 김흥준 소장 육사 49기 사단장
53대 윤기중 소장 육사 51기 사단장

4.2. 장교/부사관

4.3.

5. 특징

5.1. 사단가

(1절)
아름다운 내 조국의 완전 통일 위하여[12]
물불을 가림없이 한데 뭉쳐 싸운다
가평 춘천 탈환전 피의 능선 가칠봉
청사에 아로새긴 전공 세운 5사단

(2절)
슬기로운 내 겨레의 자유 평화 위하여
화랑의 높은 기개 온몸 바쳐 싸운다
삼각봉과 백암산 치열한 전투에
달려든 붉은 적을 무찔러 친 5사단

후렴
조국의 깃발 아래 민족의 이름으로
새세기 선봉에서 용감히 싸워 나가는
백전백승 열쇠부대 우리 5사단

파일:제5보병사단 부대마크.svg

5.2. 안보관광

열쇠전망대라고 하여 군, 관이 뜻을 모아 1998년 4월 건립한 안보관광지가 민통선 안에 위치해 있다. 연천군과 육군 제5사단이 공동관리하고 있고 실질적인 운영은 사단 전방대대가 맡아서 하고 있다. 민간인도 민통선 출입시간때에 맞추어 간단한 신원확인을 한 후에 방문할 수 있다. 다른 민통선 지역과 마찬가지로 자전거나 이륜차, 혹은 도보로는 입장이 불가하며, 또한 기상악화 혹은 관리부대 여건상 예고없이 출입 통제 또는 강제퇴거 될 수 있다. 실제 들어갈 때 2번에 걸쳐서 신분조회를 하고 들어간다.

뭔가 북한의 도발이 일어나면 유명인사들이 많이 찾는다. 군사시설내에 위치한 관계로 사진 촬영은 전망대 앞 전방 기념사진만 허용되며 브리핑하는 관리병에게 물어보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 잘못하면 관리병은 정훈장교한테 털린다. 진짜 비무장지대를 보고 싶다면 한번쯤 와볼 만한 곳. 통일전망대같이 관광객이 우글거리는 곳도 아니고, 말 그대로의 온대 원시림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여기에는 T-본 능선 전적비가 있는데, 이는 1952년 미군 1개 소대가 중공군 1개 중대를 맞아 격퇴하여 당시 미군 소대장이었던 넬리 중위가 전사한 부하 8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다.[13] 휴전 이후 잊어졌다가 1977년 비무장지대 수색 중 발견하여 2003년부로 열쇠전망대로 이전하여 전시 중이다.

5사단, 열쇠전망대가 위치하고있는 GOP대대에는 '열쇠전망대 브리핑병' 이라는 특이한 보직이 존재한다. 이들의 주업무는 브리핑룸에 있는 사판을 이용하여 민간인, 외국인 관광객과 군 VIP들에게 사단, 비무장지대 관련 브리핑을 진행한다. 안보견학이라는 타이틀을 갖은 열쇠전망대에는 다른부대에서 견학, 정신전력 교육차원에서 자주 방문하기도 하며 특히 VIP가 많이 찾아오기 때문에 브리핑병들은 항상 긴장을 놓을수가 없다. 또한 GOP는 UNC의 관리를 받기때문에 UN군에서 정전위 확인차원에서 전망대를 방문하여 영문브리핑을 받기도 한다.[14] 때문에 브리핑병들은 주로 영어가 가능한 유학출신들을 신교대에서 미리 선출하여 뽑는다. 상급부대의 어학병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GOP대대의 용사들은 열쇠전망대에서 면회를 한다. GOP인만큼 면회 외출, 외박은 불가능하지만 열쇠전망대 내에서 음식취식이 가능하다. 면회는 주말, 공휴일에 이루어지며 열쇠전망대 브리핑병들이 면회를 관리한다.

6. 전쟁범죄

5사단은 한국전쟁 개전 이전부터 존재했던 가장 오래된 부대 중 하나로서 건국 초와 개전 초에 벌어진 여러 학살에 다수 연관되어 있다. 여순사건 진압작전이나 개전 이전의 빨치산 토벌전 당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은 물론이며, 국군 후퇴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과 북진 과정에서 벌어진 부역자 학살 모두에 연관되어 있다. 특히 5사단 헌병대는 개전 초 후퇴 도중 전라도 일대에서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 재소자 학살에 적극 가담했다. 당시 사단장은 이응준. 5사단이 전쟁 초기 사단 해체 수준의 극심한 피해를 입는 와중에도 이러한 학살이 벌어졌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다만 전체적인 빈도로 보았을 때는 각 사단들보다는 국군 방첩대(CIC)와[15] 각 지역의 대한민국 경찰이 학살에 가장 깊게 관여되어 있다.

7. 사건 사고

7.1. 코로나-19 군부대 집단 감염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5보병사단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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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창설 74주년 기념행사 태권도 시범단 도복 논란

5사단이 창설74주년 기념행사를 했는데 태권도 시범단의 도복 패턴이 중국 인민해방군군복의 패턴과 유사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

7.3. 2023년 28사단 간호장교 영외이탈, 무단의료행위 협조 논란

1월 중순 경, 제28보병사단 간호장교 A 중위가 개인적 친분이 있던 제5보병사단 간호장교 D와 사전에 모의한 뒤 오후 1시 30분경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하고, 신병교육대에서 군 복무 중이던 에게 접근해 유행성 출혈열 2차 예방접종을 시행했다. A중위는 상부 보고 없이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한 것이 드러났으며, 이 과정에서 D중위와의 통화를 통해 다량의 타이레놀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타이레놀을 유출했다.

이에 대해 3월부터 제28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제5군단 군사경찰대가 합동 조사를 실시했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조치는 없는 상황이며, 이 사건에 대해 제28보병사단 공보정훈참모는 "감찰을 통해 일부 혐의를 확인했고 일부 사실은 당사자가 부인하는 상황이다. 법무 조사중이며 결과에 따라 법과 규정에 의거해 처리, 징계하겠다" 라는 입장을 밝혔다.

7.4. 5사단 병사 구타 논란

사건요약
2023년 2월말, 5군단 감찰실장인 대령[25]이 전역하는 병사를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다.[26]

대령의 해명글에 따르면 곧 전역하는 병사의 두발이 불량하다며 이에 대한 폭언, 그리고 폭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제대한 병사는 해당 대령을 고소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합의금으로 10만원을 제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8. 여담



[1] 백마고지 철원 노동당사, 민간인 출입통제선 검문소를 기준으로 제6보병사단과 나뉜다. [2] 1994년 단결하면 된다. 에서 단결로 단순화하였고 1996년에 구호를 "단결! 하면 된다!"로 바꾸었다가 도로 단결로 바꾼 바 있다. [3] 1970년대에도 5분대기조가 시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4] 러시아 제국군 출신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적백내전에 참전하였고 폴란드군에서 복무하다 전역했으며 이후 독일 동프로이센에서 농장을 운영하다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유럽을 탈출, 조선으로 귀국했다...고 알려져 건군기에 특별임관했으나, 실은 군사 경력이 전혀 없는 것으로 밝혀져 파면되었다. # [5]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 5사단 예하 연대들까지 전부 쪼개서 온 전선에 축차투입 하는 바람에 사단장조차 자기 부대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파악 못했다. [6] 다만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우리가 다수인데 왜 13연대입니까"는 장병들과 이를 수렴한 연대장의 건의로 단대호가 환원되었다. [7] 그래서 혹 특정한 이유로 인해 사단 및 예하부대를 방문하게 될 경우 부대 내부에 사단 역사를 써놓은 벽이 있을텐데, 보면 이 10월 8일을 사단 창설일로 적은 곳도 있다. [8] 피의 능선 전투란 종군기자들이 신문에 Bloody Ridge라는 이름으로 보도하면서부터 생겨난 이름으로,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983고지·940고지·773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를 일컫는 것이다. 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미군 제2보병사단과 배속된 국군 5사단 36연대가 북한군 12, 24사단과 쟁탈전을 벌였고, 여기에 국군 7사단 대전차대대가 가세하는 난전 끝에 한미 양군 1개 연대 규모와, 북한군 1개 사단 규모의 사상자를 내고 한미 연합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 전투는 6.25 전쟁 사상 단일전투에서 최대의 성과를 올린 전투로서, 당시 이 승전보를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5사단에 천하무적 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9] 1951년 6월 23일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처음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 제19군단장이 양구 북방의 가칠봉 일대에 5사단을 투입하여 고지를 점령하게 한 작전이었다. 당시 북한군은 27사단과 12사단의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반격에 나섰으나, 40여 일의 치열한 격전 끝에 결국 5사단의 승리로 전투가 끝났다. [10] 나머지 두 사단은 (구)제2보병사단 제11보병사단으로서, 제2보병사단은 산악사단으로, 제11보병사단은 상륙사단으로 전환됐었다. [11] 2010년대 초 국방개혁에 따라 8사단은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전환되었는데, 이후 국방개혁 2.0에 따라서 수도, 20, 26사단에서 부대를 예속 받고 본래 가지고 있던 여단을 해체, 양주에 주둔하는 기동사단으로 바뀌었다. 6사단이 기존 8사단을 대신할 예비사단으로 선정되어 기존 8사단이 주둔하던 포천으로 내려가며 빈 자리는 3사단과 5사단을 재배정해서 대체한다. 5사단 서측의 28사단도 2025년 해체되는 만큼 3사단과 5사단의 작전구역이 상당히 넓어질 것이다. 기존에 2개 대대만 존재하던 GOP대대의 숫자가 늘어날 것이 명백한 상황. 사실상 35여단 산하 신병교육대는 사단직할로 재편되면서, 35여단 산하 대대도 GOP대대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12] 멸공의 횃불과 도입부 가사가 유사해서 음을 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13] 소대급이 중대급을 맞서 승리한 대단한 전투다. [14] 한미연합사도 자주 방문하여 브리핑을 듣는다. [15] 방첩대, 특무부대, 또는 보안대라 불리는 CIC는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확장에 직접 개입했다. 원래 국군 정보국 제2과였으나 상급기관인 정보국과는 거의 협조하지 않았고, 곧 독립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내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벌어진 수많은 학살을 기획하고 또 직접 실행했으며 이승만의 정적들에 대한 정치적 테러 역시 주도했다. 특히 미군으로부터 '폭군 네로'라고도 불렸던 방첩대 사령관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비호를 받았기에 참모총장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대한민국 국회의 의원들도 방첩대가 벌이는 불법적 학살을 보고받곤 경악하여 규탄 성명을 내거나 법 개정을 통해 이들을 저지하려 시도했으나 이승만의 비호로 이들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들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은 당연히 다른 군인들의 불만을 불러왔다. 일부 군인들은 1956년에 김창룡을 암살해버렸다. 그리고 1960년 4.19 혁명 당시 군은 이승만 정권의 진압 명령을 무시하면서 시민들의 편에 선다. 출처: 김득중, "한국전쟁 전후 육군 방첩대(CIC)의 조직과 활동" [16] 당시에는 7사단 예속 전, 5여단 당시의 5사단 시절이다. [17]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94p [18]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00p [19]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01p, 136p [20]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12p [21]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12p, 102p [22]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37p [23] 심지어 양주에 위치한 국군양주병원에도 국지도발 실상황이 걸리는 바람에 새벽부터 판초우의에 군장 내용물 죄다 짊어지고 증가초소로 튀어 올라가고 실탄이 불출되는 난리통을 겪었으니 다른 전투부대들 상황은 안 봐도 블루레이 수준. [24] 전군 최초 무인 감시 시스템이 도입된 이유도 철책이 두 번이나 뚫렸기 때문이다. [25] 원글에는 해당 대령의 이름에 모자이크가 되어 있지만 워터마크의 이름이 모자이크가 되지 않아서 실명이 보이므로 주의할 것. [26] 5사단은 원래 6군단 예하부대였으나, 6군단이 해체되면서 5군단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27] 그 덕에 당시 육군 사단 중 가장 많은 보온팩을 보급받은 적이 있다. [28] 당시 기준으로 부사관이었다면 최소 80년대에 출생해 성장기를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런 부사관들이 키가 160cm도 채 안되는 삐쩍 마른 몸으로 귀순하고 당시 군대에서 흔히 먹던(그조차도 짬 좀 찬 병사면 대충 먹는 시늉만 하다가 갖다 버려도 뭐라 안 할 정도의) 짬밥을 먹으며 경악할 정도면 말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