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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23:59:13

제1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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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2D53C><colcolor=#C21D2B> 제1보병사단
第一步兵師團
The 1st Infantry Di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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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First 우리는 전진부대
창설일 1947년 12월 7일(제1여단)
1949년 5월 12일(제1보병사단)
상징명칭 전진(前進)부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1군단
경례구호 전진
규모 사단
역할 경기도 파주시 일대 방위 및 수색
최전방 서부전선 GOP 강안 경계
개성공단 관련 임무, 공동경비구역(JSA) 지원
사단장 소장 양진혁 (육사 52기)
작전부사단장 준장 조웅 (학사 21기)
행정부사단장 대령 OOO (육사 48기)
참모장 대령 김상근 (학군 36기)
위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1. 개요2. 역사3. 예하부대4. 과거부대5. 출신인물
5.1. 사단장5.2. 장교/부사관5.3. 병
6. 특징
6.1. 근무환경6.2. 전진회관6.3. 사단가
7. 사건 사고8. 여담
[clearfix]

1. 개요

제1보병사단 소개영상
사단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사단을 둔다. ② 사단은 관할구역의 작전·훈련 및 군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대한민국 육군 제1군단 예하 제1보병사단. 상징명칭은 전진부대[1]. 경례구호전진. 사단사령부는 정문 기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위치하고 있다.

2. 역사

미군정이 1946년 1월 15일 창립한 국방경비대는 동년 6월에 조선경비대로 명칭을 바꾸고서 1947년 12월 1일에 3개 여단을 창설하였는데 그중 '제1 여단'(서울)이 1949년 5월 12일 '제1사단'으로 승격된 것이 제1보병사단의 시작이다. 초대 여단장은 중국 국민혁명군 및 독립군 출신의 송호성[2] 준장이었다. 그러나 일본군 출신이 군을 장악함에 따라 김구와 가까웠던 송호성 준장이 밀려나고 1948년 2월 5일에는 일본 육사 26기 이응준 대령이 제2대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49년 1월 7일에 일본 육사 27기 출신의 김석원[3] 대령이 3대 여단장으로 부임하였고 1949년 5월 12일에 여단이 사단으로 승격됨으로써 여단장 김석원 대령이 그대로 초대 사단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인 1949년 5월에는 11연대가 북한군과 개성에서 5.4 송악산 충돌( 육탄10용사) 국지전을 벌이게 된다. 이후 개성등을 포함하는 38선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9년 10월 1일에는 일본 육사 26기 유승렬 대령이 제4대 사단장을 맡았으며, 1950년 4월 22일에는 역시 만주군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 대령이 제5대 사단장으로 취임하였다.

6.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개성과 임진강 파주에서 방어전을 펼쳤고, 개성에서 방어전을 펼치다가 김포 및 파주로 분산 후퇴한 12연대를 제외하고 11연대 및 13연대, 증원된 5사단 15연대는 한강교 폭파이후 에는 한강을 도하하여 시흥지구방어사령부까지 후퇴하였다. 비록 한강도하철수 당시 변변한 도하장비가 없어 중화기는 모두 파기한채 시흥지구까지 철수하였지만, 이곳에서 분산된 12연대 및 타 연대병력까지 최대한 수습하고 중화기도 다시 보충받아, 사단 및 연대 건제를 유지한 채 지연전을 벌이며 낙동강까지 철수해 대구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여 낙동강 전선을 지켰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10월 19일 평양 탈환작전에서 북한군들을 물리치고 평양시에 가장 먼저 입성하는 부대가 되었다. 이때 선봉에 섰던 미1군단에 소속된 부대 중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4보병사단, 1보병사단 간에 평양 선봉 입성을 위한 경쟁이 붙었다. 1보병사단에는 미군 전차부대가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속도에 맞추기 위해 전차부대는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휴식, 보병부대는 낮이나 밤이나 그냥 걸었다. 당시 미군 전차병들도 '우리는 미군이지만 지금은 1사단이다'라며 협동을 강조했고, 이후 1사단 연대들간 선봉 경쟁이 붙어 동평양(11/12연대)과 본평양(15연대) 전역을 점령한 부대가 되었다. 평양 입성 다음 날인 10월 20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 선봉 입성을 기념하여 '계속 전진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라'는 의미로 전진이라는 부대 명칭을 내린다.

참고로 7사단도 부대 역사에 이승만 대통령의 밀명에 따라[4] 18일 오후 평양에 입성한 건 사실이지만 이것은 평양 점령이라기 보다는 평양 강행정찰에 가까운 성격이다. 실제 평양에 선봉 입성한 7사단의 부대는 8연대 9중대 하나뿐이고, 뒤따라 들어온 8연대와 3연대, 그리고 8연대를 얼떨결에 따라와 임시 배속되었던 1사단 15연대 1개 대대는 1사단의 전투지경선을 멋대로 침범해 정당성이 부족했고, 게다가 이 명령을 내린 이승만 대통령조차 1사단만 치켜세웠기에 정식 인정되지 않고 있다. 자세한 건 평양 탈환작전 참고.[5]

이후 중공군의 개입 이후에도 사단 건제를 유지한 채 후퇴하였다가 다시 북진해서 개전 직후 방어하였던 임진강-파주 지역에 돌아오게 된다. 이 시기 1사단이 겪은 주요 전투로는 중공군 5차 공세의 주공을 저지한 파평산 전투가 있다. 이후 6.25 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후방 재편성 및 일부부대 전용을 제외하고는 해당진지를 고수한 채 휴전을 맞는다. 물론 그동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밀려오는 중공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것은 다른 지역과 동일했다.[6]

6.25 전쟁에서는 미군이 가장 신뢰한 국군 사단으로 유명했다. 그 결과 다부동 전투 이후 미 육군 군단에 배속되어 강력한 포병 및 전차 지원을 받았으며, 정전 때까지 사단 건제를 끝까지 유지한[7] 정예사단으로 평가받았다. 미군이 항상 신뢰하는 유일한 국군 사단이었다. 백선엽 장군이 1년여의 전쟁 전반 기간 동안 사단을 안정적으로 계속 이끌기도 했다. 사단장이 승진과 보직변경으로 물러날 때는 이미 타 사단의 사단장들은 다른 인물로 여러번 교체된 이후였다.[8]

전두환 사단장이 재임하던 시기인 1978년에는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도라산 바로 밑에 있기에 도라산역 관광코스로 끼어있기도 한다. 참고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작업반으로 위장한 특전사가 진입할 때 판문점을 둘러싸고 수색대대, 중대 병사들이 전투태세를 취한 채 수풀 안에 매복해있었다.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11, 12, 15, 포병)들이 여단으로 변경되었다.

2024년 1월부로 신병교육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예하부대

제1보병사단 예하부대
제11보병여단 제12보병여단 제15보병여단
포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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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A 경비대대는 1사단 예속이 아니나 행정지원으로 엮여 있다.

3.1. 사단직할대

3.2. 제11보병여단 육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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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제12보병여단 쌍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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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15보병여단 무적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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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포병여단 으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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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거부대

5. 출신인물

5.1. 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6><bgcolor=#F2D53C> 역대 제1보병사단장 ||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16] 송호성 준장 보정군관학교 前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
2대[17] 이응준 예) 중장 일본육사 26기 육군참모총장
3대[18] 김석원 예) 소장 일본육사 27기 前 수도사단장 국회의원
4대 유승렬 예) 소장 일본육사 26기 前경남지구 계엄사령관
5·7대[19] 백선엽 예) 대장 군사영어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제1야전군사령관 교통부장관
6대[20] 최영희 예) 중장 군사영어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제2작전사령관 국방부장관
8대 강문봉 예) 중장 군사영어 제2작전사령관
9대 박임항 예) 중장 육사 특7기 제1야전군사령관
24대[21] 전두환 예) 대장 육사 11기 국군보안사령관 대한민국 대통령
00대 최연식 예) 중장 육사 11기 육군사관학교장
00대 김을권 예) 소장 육사 13기 사단장 [22]
00대 최평욱 예) 중장 육사 16기 국군보안사령관 산림청장, 철도청장
00대 김동진 예) 대장 육사 17기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한미연합군부사령관 국방부장관
00대 길형보 예) 대장 육사 22기 육군참모총장, 제3야전군사령관
00대 송영근 예) 중장 육사 27기 기무사령관 19대 국회의원
39대 정승조 예) 대장 육사 32기 합동참모의장, 한미연합군부사령관, 제1야전군사령관
40대 황중선 예) 중장 육사 32기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41대 이성호 예) 중장 육사 33기 국방대학교 총장 국민안전처 차관
42대 신현돈 예) 대장 육사 35기 제1야전군사령관
43대 서형석 예) 소장 육사 37기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23]
44대 하창호 예) 소장 육사 39기 육군교육사령부 부사령관
45대 장경수 예) 소장 육사 41기 국방부 국방정책실 직무대리
46대 이종화 예) 소장 육사 42기 육군학생군사학교
47대 박정환 예) 대장 육사 44기 육군참모총장
48대 김홍석 예) 소장 육사 46기 국방대학교 총장
49대 강호필 대장 육사 47기 지상작전사령관, 前 합동참모차장
50대 서진하 중장 육사 49기 제3군단
51대 최창수 소장 육사 51기 사단장
52대 양진혁 소장 육사 52기 사단장
신현돈 대장 이후로 부대 명성에 비해 사단장들 대부분이 소장으로 전역하는 등 예후가 영 좋지 않았다. 허나 최근 박정환 사단장과 강호필 사단장이 대장 진급에 성공했고, 서진하 사단장도 중장 진급에 성공하여 이전보다 예후가 좋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5.2. 장교/부사관

5.2.1. 6.25 전쟁 전후[24]

5.2.2. 6.25 전쟁 이후

5.3.

6. 특징

경기도 파주시에 주둔하고 있으며 주둔 지역은 임진강을 넓게 끼고 있다. 개성공단 출입인원을 관리하는 서해지구 군 운영단(舊 도라산 CIQ)와 임진강을 건너는 통일대교도 관리하고 있어서 각종 미디어에 출연 빈도가 아주 많은 부대다.

사단이 수도권에서 가까운 최전방 지역이어서 안보견학 및 어르신들의 효도관광 코스로도 인기 있는 지역. 수도권에서 제일 가까운 최전방 부대라는 이유로 정치인, 국빈들의 외부 부대방문도 잦은 편이다. JSA 경비대대 또한 1사단의 지역에서 행정 지원 및 보급을 받지만 이쪽은 1사단 소속이 아니며 일단 유엔사에 정보작전권한이 있다. 물론 JSA 근처에 국빈이 오면 며칠 동안 그 지역엔 비상경계가 내리는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미국 국빈방문이 종종 있기도 하다. 아님, 중립국감독위원회 측 외빈이 찾아오거나 군생활 동안 외빈들이 절대로 안 오길 기도하자. 또한 1사단은 담당하는 곳이 제일 많은 사단이라 할 수 있다. DMZ수색작전, 개성공단 출입관리, GP GOP경계, 임진강 및 통일대교 경계, JSA 작전지원 등 임무가 많은 부대다.

6.1. 근무환경

지리적인 조건은 휴전선의 서쪽 끝이기도 하고 좋은 축에 속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1사단 전 지역이 지형적으로 좋은 건 아니다.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12여단과 15여단의 섹터가 임진강을 끼고 있고 비교적 평야지대기 때문에 생긴 이미지다. 11여단의 경우 담당 경계구역의 상당부분이 산악지형이라 물자 보급을 케이블카로 받아야만 하는 소초들도 있고 지형 면에서 강원도 저리가라 할 곳도 있다. 더불어 1사단 내에서는 가장 추운 곳 중 하나. 임진강과 서해안이 가까워 겨울에 강바람이 무척 강하게 부는 편이다.

GP, GOP의 후방에는 FEBA 부대가 자리잡고 있는데, 적의 공격을 저지해야 하는 최전방 사단답게 훈련량과 강도가 있는 편이다. 또한 장병들의 체력 증진을 위해 기초체력단련과 군장 뜀걸음, 레그턱, 베어워크 등 전장순환운동을 포함한 전투체력단련을 매일 실시한다.

서울에서 매우 가깝기도 한데, 사단 위수지역 내로 서울 소속 버스 서울로 가는 전철이 둘 다 들어오는 유일한 최전방 사단이기도 하다.[35] 이 때문에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 거주하는 경우에도 굉장히 출타여건이 좋다. 오히려 후방에 애매한 지역에 갈 바에야 여기로 오는게 더 좋을 수도 있다.

위수지역 2011년까지는 파주시 시내, 그중에서도 금촌역까지가 대부분이었으나, 2012년에 하창호 사단장[36]이 부임한 이후 상급부대인 제1군단과의 협의를 통해 1사단 전 부대의 위수지역을 고양시까지 확장하였다. 이에 따라 일산신도시까지 합법적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현재는 서울 강북 일부 지역까지 출타가 가능하다.

여름철에는 파주의 유명한 모기와 사투를 벌이며 클로로퀸이라는 아주 독성이 강한 말라리아 약을 먹어야 한다. 약의 부작용이 심한 사람은 차라리 말라리아에 걸릴 각오로 약을 버리기도 하지만 말라리아가 잘 걸리는 지역이다보니 간간히 말라리아에 걸려서 실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거기다 말라리아의 경우 잠복기간이 6개월~1년이 넘기도 하므로 전역후 발병하는 재수없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헌혈의 집에서도 이쪽에서 복무했던 사람을 잘 안받아준다.[37] 이곳은 들쥐로 인해 전염되는 제2종법정전염병인 유행성 출혈열로 유명하다. 한탄바이러스 한탄강이 이곳 관할이다.

임진강 하류를 넓게 끼고 있다 보니 GOP 경계와 동시에 강안 경계도 맡고 있다. 실제로 95년 임진강 벼락바위 일대에서 임진강 하류로 침투하는 간첩을 격멸한 벼락바위사건도 있다. 사단가에도 언급되듯이 제3땅굴 발견 등과 함께 부대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게다가 이 부대는 전방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거점인 관계로 완벽한 진급코스이다. 그래서 장교라면 이 부대에서 한 번 이상은 복무해야 장성까지 무난하다. 이 부대에서 복무했던 장교 중 예비역 대장들이 상당히 많은 것은 괜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병들 역시 1사단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메이커 사단임에도 불구하고 선호한다.

6.2. 전진회관

전진회관
前進會館
Jeon Jin Hall
위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임당로 104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6.3. 사단가

(1절)
내 조국 삼천리를 지켜서 싸워가는
우리는 맹호 같은 필승의 용사로다[38]
송악산 10용사의 투혼을 본 받아서
옹진전투 싸워 이긴 명예로운 1사단
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날 전공을
세기에 휘날리는 당당한 사단
1사단 1사단 천하의 1사단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불러라

(2절)
세계에 이름떨친 평양성 공략작전
서울을 재탈환한[39] 우리의 장한무훈
임진강 대반격전 신벽제 봉일천들
차례로 싸워이긴 승리의 1사단
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날 전공을
세기에 휘날리는 당당한 사단
1사단 1사단 천하의 1사단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불러라

(3절)
인류의 자유평화 위하여 전진하는
제1의 용사들이 굳세게 뭉치었다
조국의 통일위해 들끓는 이 가슴들
화랑의 정신으로 단결한 1사단
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날 전공을
세기에 휘날리는 당당한 사단
1사단 1사단 천하의 1사단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불러라

(4절)
충성과 명예로써 단결된 전진부대
우리의 가슴에는 통일의 굳은 의지
3땅굴 발견하여 드높은 이 기상을
통일의 그날까지 떨쳐가는 1사단
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날 전공을
세기에 휘날리는 당당한 사단
1사단 1사단 천하의 1사단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불러라

파일:제1보병사단 부대마크.svg

7. 사건 사고

8. 여담

- 1위-육군 제6사단(청성부대. 춘천 전투, 용문산 전투 등)
- 2위-육군 제1사단(전진부대. 다부동 전투, 평양 탈환 등)
- 3위-해병대(진동리 전투, 통영 상륙작전, 인천 상륙 작전, 도솔산 전투 등)
- 4위-육군 제3사단(백골부대. 38선 첫 돌파, 원산 전투, 현리 전투[42] 등)
- 5위-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진천 전투, 안강-기계 전투 등)
참고로,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6.25 전쟁 초기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국군 부대로 육군의 6사단, 8사단과 1사단을 꼽았다.


[1] 공식별칭은 천하제일 전진부대. 천하제일은 직속 상급부대인 1군단의 별칭이다. [2] 김구가 장제스에 위탁 교육을 맡긴 조선 청년들 중 하나로 국부군에서 장교를 하고 이후 독립군에 편입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아래 국군 창립군의 장교가 되고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였으나 이후 여순사건 진압 등에서의 책임을 물어 일본군 출신들(이응준, 채병덕 등)에 밀려 점차 요직에서 밀려났다. 그리하여 6.25 전쟁 발발 후 청년방위대 고문이었던 장흥 대령의 권유에도 피난을 가지 않다가 한강 철교를 건너지 못한 3명의 장교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에 북한에 납북되었고 대남방송을 하거나 북한에 투항한 국군포로부대인 해방사단을 지휘하기도 했으나 후에 반혁명분자로 몰려 북한 양덕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위에 대남방송과 거꾸로 총을 돌린 것 때문에 초대 조선경비대사령관이었던 송호성은 대한민국 국군에서 사실상 병적이 말소되어 버렸다. 하지만 최근 송호성이 북한에 납북된뒤 한 대남방송 등은 자의로 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어 논란이 있다. [3] 초대 1사단장. 김석원은 중일전쟁의 공로로 히로히토 천황에게서 공3급 훈장을 받은 일본 육사 27기 출신이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있는 인물이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에는 일본군 평양병사부에서 대좌로 근무하고 있었다. 말년에는 성남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4] 이는 서울 탈환 선봉을 미 해병대에게 빼앗긴 트라우마가 있는데다 미군에 배속 1사단이 미 1기병사단과 엎치락 뒤치락한다는 소리까지 들리자 미군과 협의 없이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지시한 결과이다. [5] 당시 대동강을 기준으로 우측을 동평양, 좌측을 본평양이라고 하며 12여단은 동평양에, 15여단은 본평양에 먼저 입성하였으며 북한의 주요시설이 본평양에 위치하여 있어 15여단의 입성시기 기준으로 선봉입성했다. (12여단과 15여단에서 모두 복무한 정훈장교가 확인) [6] 김만술 소위 지휘하의 국군 1개 소대(11연대 6중대 2소대)가 중공군 1개 연대와 싸워서 이긴 베티고지 전투가 대표적인 예. 참고로 2소대는 24명이 전사하고 12명이 생환하였다. [7] 일단 빛나는 전공의 6사단조차 사창리 전투에서 간부고 병사고 무질서하게 패주해 이 오욕을 씻기 위해 용문산 전투에서 분투했을 정도다. [8] 한 부대를 계속 이끌어 나가면 예하 부대들 상황이 어떤지 잘 파악할 수 있으며, 예하 장병들도 큰 사고없이 잘 이끌어 나가면 신뢰감이 쌓이는 등 유리한 점이 많다. [9] 군사경찰대대와 사단 법무부, 유격대와 함께 주둔하고 있다. [10] 보병사단 전차부대 중 최초로 K-1 전차를 장비하였으며, 반대로 7사단은 최초 전차대대인 제1전차대대를 예속받았다. [11] 헌병대에서 2014년 대대 편제로 개편되었다. [12] 의무근무대에서 대대급으로 격상. [13] 화생방지원대에서 대대급으로 격상. 22.9.1부 [14] 지상작전사령부 직할 부대이다. 다만 제1보병사단에서는 행정지원을 받는 형식. 신병도 제1보병사단 신병교육대의 훈련병 일부(기수당 10명 정도)를 차출한다. 여담으로 제1보병사단장도 JSA로 출입 하려면 1주일 전에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 [15] 대한민국 최초로 창설된 6개의 포병부대 중 하나다. [16] 초대 제1여단장 [17] 2대 제1여단장 [18] 3대 제1여단장 겸 제1사단장 [19] 6.25 전쟁 초기 사단장 [20] 6.25 전쟁 초기 15연대장 및 13연대장 → 부사단장 → 사단장 역임. 백선엽이 2군단장 전출 후 3일 만에 1사단으로 복무하면서 사단장 역임 기간은 3일 천하로 종결. [21] 제3땅굴 발견 [22] 아들은 학사 28기 출신의 김충기 준장(진)이다. [23] UN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한국군 수석대표로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 및 지상구성군사령부 참모장 겸직 [24] 6.25전쟁 당시의 장교 보직 자료는 백선엽의 "老兵이 걸어온 길"(국방일보 연재) 19~69 참조 [25] 김석원 장군 수도사단장 부임시 수도사단 전보 [26] 전투 중 중상을 입어 후방으로 후송 [27] 6월 26일자 부임 [28] "老兵이 걸어온 길" 28편에 따르면 잠시 동안 김점곤과 함께 12연대장을 동시 역임 [29] 김석원 장군 수도사단장 부임시 수도사단 전보 [30] 전쟁 발발 당시에는 5사단 작전참모였으나 "老兵이 걸어온 길"에 따르면 전쟁 초기에 1사단과 5사단이 통합되면서 1사단에 합류함. [31] 후일 제17대 광복회장 역임 [32] 예비역 소장. 제12대 국방대학교 총장 [33] 모종의 사유로 잔여기간은 공익 대체 복무 [34] 정확히는 작전화학병 [35] '서울 가는 전철' 한정으로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이 다니는 제5보병사단 제28보병사단도 있다. [36] 육사 39기, 춘천제1고 졸업. [37] 복무 후 2년 동안 헌혈 불가 대상으로 분류되며 예외적으로 혈장헌혈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입대 전까지 전혈헌혈만 해왔던 사람은 전역 후 혈장헌혈을 처음 해보는 경우가 많은데 소요시간이 오래 걸린다. [38] 이 부분을 동요 뽀뽀뽀를 패러디하여 우리는 귀염둥이 뽀뽀뽀 친구로다로 개사하여 부르는 용사들도 여럿 있다. [39] 1951년 3월 14일 2차 서울 재수복을 의미한다. [40] 629포병대대 [41] 이게 그때 당시에 사격제원으로 로켓탄(RAP)에 장약을 8호를 사용해 실제로 적 GP 부근 DMZ를 타격할 수 있었으나, RAP탄의 로켓추진마개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발사되어 넘어가지 않고 남측 구역에 낙하하며 끝이 났다. 낙탄 직후 남측에서는 북측에 오발 사고임을 즉각 통보하였고 북측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42] 다만 이건 사단 전체가 와해돼 패주한 경우라 자랑거리가 아니다. [43] 당시 전방병력을 빼려면 한미연합사 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