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역관이자 태극기의 제작자에 대한 내용은 이응준(역관)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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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7대 체신부장관 이응준[1] 李應俊 | Lee Eung-j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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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0년 8월 12일 | ||
평안남도 안주군 (現 평안남도 안주시) |
|||
사망 | 1985년 7월 8일 (향년 93세) | ||
서울특별시 | |||
본관 | 수안 이씨 | ||
호 | 추연(秋硏), 추정(秋汀) | ||
재임기간 | 초대 육군총참모장 | ||
1948년 12월 15일 ~ 1949년 5월 8일 | |||
제7대 체신부장관 | |||
1955년 9월 16일 ~ 1958년 9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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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이정수 | |
배우자 | 이정희 | ||
자녀 | 슬하 2남 3녀 | ||
친인척 |
장인
이갑 장조부 이응호 맏사위 이형근 외손자 이현 |
||
학력 |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육군무관학교 (졸업) |
||
종교 | 유교 ( 성리학) → 개신교 | ||
약력 | 제7대 체신부장관 |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
서훈 |
태극무공훈장 (1954) 무공포장 (1956) 보국훈장 통일장 (1971)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5)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 군사영어학교 (1기) |
||
복무 | 일본제국 육군 | ||
1914년 ~ 1945년 | |||
대한민국 육군 | |||
1946년~1955년 9월 18일 | |||
최종 계급 |
대좌 (일본제국 육군) 중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모슬포 제1훈련소장[2] | ||
주요 보직 |
육군 제3보병사단장 육군대학총장 육군총참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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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병 구완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일본군 고급장교로서 친일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이중적인 식민지 지식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이응준의 1년 후배인 김석원의 경우와도 매우 비슷하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초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1890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이정수(李正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06년 상경하였다. 고향선배이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노백린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기로 하였고 육군무관학교에 1908년 편입하였다. 또한, 노백린의 소개로 이응준과 동향인 이갑을 만나 그의 집에서 지내면서 육군무관학교 편입 이전 보성전문학교 1학년을 1기로 다녔다. 1908년에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남은 육군무관학교에 편입하였고 순종황제의 명령하에 1909년 9월 3일 일본 동경 소재 일본 육군 유년사관학교에 편입하였다. 조선인 일본군으로 일본 유학을 허가받아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응준은 32등으로 졸업하였으며 이는 홍사익(26등)을 이은 최고 등수였다. 그의 다른 동기들은 대한제국 김기원 장교의 남동생 김준원, 유승렬, 작가 염상섭의 친형 염창섭, 조철호, 신태영, 박승훈 등이 있다.[3]임관 직후 제1사단 제3연대에 배속받은 뒤, 치바 보병학교에서 전문 교육을 받으면서 육군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8년 8월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일본이 가담하자 블라디보스토크에 설치된 일본 파견군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통해 러시아인, 중국인, 조선인 공산주의자를 파악하고 대민 정탐 활동 업무를 담당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지청천, 김경천 등과 일본군을 벗어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할 것을 합의하고 망명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이응준은 실행하지 않았다. 이응준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독립운동을 하던 최성수에게 권총을 빌려주었다가 최성수가 체포되는 바람에 그도 헌병대로 끌려가 취조를 당했고, 그를 아끼던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 대장의 배려로 풀려났지만 대신에 망명을 포기해야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20년 이응준이 최성수에게 권총을 제공한 사건에 연루되긴 했으나 단순 도난 사건으로 처리되어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한다.[4] 이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이 때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 혹은 무기를 제공하더라도, 제공받은 이가 체포될 시 제공자까지 연루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서로 절도 혹은 강도로 입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5]
어쨌든 이응준은 우쓰노미야 대장에게 칭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그는 일본 육사 동기인 신태영과 함께 동경으로 가게 되었다.
1925년 11월 곽송령( 궈쑹링)사건이 발생하자 펑톈에서 현지 경비 업무를 담당했다. 1928년 장제스의 북벌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 제남 사건을 일으켰을 때 펑톈에 파견되었다. 펑톈에서 장쭤린 폭살 사건이 일어나자 현장으로 출동하여 경비를 섰다. 1933년 일본군 육군 소좌로서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부관으로, 1934년 8월에는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935년 7월 일본군 장교로 장기간 복무한 공적을 인정받아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6]
1936년 중좌로 진급했고 이듬해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전선에 배치되어 주로 병참 업무와 징집 업무에 종사했다. 산둥성에서는 직접 팔로군과 싸웠고 남원 전투, 석가장(스자좡) 전투, 산서성(산시선) 전투에도 참전했다. 선무공작을 맡아 대동아 건설 정신을 중국인들에게 계몽시키는 업무에 종사했고 그 후 임분 전투와 산시성 일대를 장악하는 전투에도 종군했다. 1939년 1월 훈3등 서보장을 받는다.
1941년 대좌로 진급했고 학병 홍보 등을 했다. 홍보의 내용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자는 선동이었다. 이응준은 징병제 실시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와 적극적인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방하면서 인력 동원에 앞장섰다.[7]
동 시기에 민족운동가 등과 교류한 것으로 그의 회고록에 적혀있으나 실제 사실유무는 알 수 없다.[8]
이런 여러가지 요소를 종합하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에 포함시키며 다음과 같은 의견을 달았다.
애국지사 이갑의 지원으로 학교를 다녔고, 그 인연으로 사위가 되었으며, 그에 대한 존경심과 동질감을 가졌다. 그런 성향으로 인해 1919년 김광서, 지석규 등과 함께 모의했으나 탈출하지 않았다.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지나, 군인으로서 충성해야 할 국가에 대한 관념이 결여되어 있었다. 직업군인이기 때문에 일제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같은 육사 출신이면서 대륙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후배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합리화될 수 없다.
여기서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나, 군인으로서 충성해야 할 국가 관념이 결여'라는 구절은 일제에 충성한 대부분의 조선인 일본군에게도 통용된다.
2.2.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당시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원산항 수송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간신히 탈출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당시 일본 육사 출신의 대다수 장교들처럼 근신하던 중[9][10] 미군정의 호출을 받게 된다. 이는 범 일본군 출신 중에서 가장 최선임이면서 고급 장교(대좌)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내 일본군 장교 중 최고위급은 이응준과 1년 후배인 김석원이었다. 동기인 신태영은 중좌.이응준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군정에 출두해서도 " 해방되는 날까지 일군에 있었던 사람일 뿐 아니라 영어도 제대로 못하니 지금 정세가 전혀 달라진 신국면 제일선에 나설 자격이 없다. 더욱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 아고우 대령이 " 일본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한 분이 어째서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못하겠다는 것인가?"라는 말에 군사고문직을 주위와 고심 끝에 수용했다 한다.
그가 챔프니 대령과 뱀부 계획을 세우면서[11] 군사영어학교를 세웠는데 60명의 1기를 선발할 때 만주군 출신 20명은 원용덕이, 국부군 출신 20명은 조개옥이 추천하기로 했고, 일본군 출신 20명은 이응준이 추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국부군, 즉 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정의 정책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대다수는 일본군과 만주군으로 채워졌다.
이때 이응준은 " 임시정부 요인들께서 말씀하시는 법통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계승하는 일이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해달라"고 말하며 광복군 출신의 유동열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1946년 9월 유동열은 '미군정 과도정부 남조선 통위부 부장(현 국방부장관격)'으로 위촉하였다. 그렇게 광복군 출신들도 하나둘씩 입대하기 시작하였다.[12]
미군정의 의지로 1946년 6월 대령으로 특별임관하고 1948년 대한민국 육군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원래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 초대 육군 총사령관으로 송호성이 부임하였으나 국군조직법에 따라 총참모장제가 도입되면서 그가 초대 육군 총참모장이 된 것이다. 참고로 송호성의 경우 6.25 전쟁 발발 후 북한 정권에 참여한 경력이 있어서 현재 육군의 역사 속에서 지워져 있는 상태다. 만약 송호성이 북에 부역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지켰다면 초대 육군참모총장 소급은 이응준이 아니라 송호성으로 되었을 수도 있다.
이응준은 강태무 표무원 월북 사건으로 초대 총참모장에서 물러난 이후 3사단장, 5사단장, 미아리전선전투사령관, 전남지구전투사령관 등을 지냈으나 이범석의 후임인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장관 신성모와의 불화로 군문을 떠났다. 이후 1952년에 육군대학총장으로 현역 복귀하였고 제주도 모슬포 제1훈련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다.[13] 3년 후인 1955년에 동계급으로 예편했는데 나이 60살이 넘은 상태였다. 그 후 체신부장관과 한국반공연맹 이사장(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등을 지내다 1985년 7월 8일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데이트 성폭행 논란
소위 시절이었던 1915년 7월 도쿄 변두리의 아오야마 연병장 근처 숲에서 함께 산책 중이던 작가 김명순(1896∼1951년?)을 데이트 강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4. 여담
- 16세 때부터 93세로 사망할 때까지 약 80여 년간 일기를 거의 빠짐없이 썼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회고 90년'이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 동생인 이영준은 3.1 만세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는데, 당시 이 장군은 육군 중위 신분으로 동생 면회를 했다.
- 부인은 독립운동가 이갑의 고명딸인 이정희(李正熙) 여사이다. 이정희는 안창호를 병수발하기 위해 모금활동을 벌이는 등 독립운동가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고 한다. 안창호뿐만 아니라 이승훈과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1897년생으로, 1985년 이응준을 사별하고, 2년여를 더 살다가 이응준이 사망한 곳과 같은 집에서 1987년 9월 29일 새벽 3시 반에 향년 91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이응준의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합장되었다.
- 그의 친일 행위와는 별개로 부인인 이정희 여사는 모금활동을 벌여 김성수, 박흥식, 방응모 등의 도움을 얻어내어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병수발을 하였고, 남편인 이응준 역시 그녀를 도와 안창호의 병수발을 했다고 한다. 다만 이응준은 대민 정탐 활동 업무를 담당했기에 의심의 여지가 있다.
- 주요 친일 행위로 지적되고 있는 학병 강연 관련하여 그의 회고록에는 그는 학병 출정에 대한 강연을 계속 거절했으나 매일신보 사장 이 모로부터 부민관과 교섭하여 의견만 제시하는 것으로 하고 김석원 등과 참석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부민관에서의 강연 내용은 학병 출정을 막거나 한일합병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내용은 아니나 일제의 조선인 차별대우에 대한 지적을 하여 일제로부터 지적을 받을 정도의 내용[15]이었다는 것이다. 참전을 종용하라는 논리가 당시 친일파 지식인들의 논리와 비슷하여 이응준 역시 친일부역자로 분류되는 주 요인이지만, 현역 일본군 대좌가 공개석상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총독부의 조선인 차별대우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실제 당시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이와 관련하여 조선군사령부나 총독부에서 호출이 없어 의아해 하던 차에 총독부 만찬에 참석을 하니 총독이 "자네가 일전에 연설을 했다지? 그 뭐 철저하게 했다며?"라고 말하며 넘어갔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 대령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으며 일본군 고위급으로부터 받은 총애가 작용했던 것 같다.[16]
- 일본군 조선주둔 사령관 우쓰노미야 대장은 일본육사 출신 조선인 장교들에 대해 호감을 보였는데 일본에서 근무하던 김석원 중위가 조선근무를 희망하자 주둔군 78연대로 끌어주고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응준의 경우도 중위시절 그와 인연이 닿았는데 점심을 같이 하기도 하고 퇴근 길엔 이응준 사무실에 들러 "나 먼저 가네."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본국으로 전임하게 되었을 때 이 장군 집에 찾아와 "차나 한잔 주게."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일본인의 언동에 불쾌할 때가 많은 줄 아나 참아주기 바라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17]
- 독립운동가 이승훈을 가까이서 받들었는데, 1930년 그가 돌아가자 장례식에 참석을 했던 일로 용산경찰서에서 형사가 찾아와서 '일본군 대위가 참석했다고 들었다.'고 하며 참석경위를 묻자 "나는 자칭뿐만 아니라 타칭도 육군 대위로 휴일을 이용하여 아는 분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무슨 문제가 되냐?" 하고 물리친 일화가 있다고 한다. 더하여 이를 연대장에게 보고하니 연대장은 오히려 "정정당당하게 군복을 입고 참석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라고 하며 일소에 부쳤다고 한다. 이응준은 회고록에 '조선총독부의 대한인정책은 민족사상 소유자에 대한 시찰이 매우 가혹했으나 군부인사들 가운데는 비교적 대범한 생각을 가지고 처신하는 인사가 간혹 있었다.'고 적었다.[18]
- 6.25 전쟁 당시 광주 5사단장으로 미아리 전선에 축차투입되며 미아리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해당 전선이 무너지자 한강을 도강하여 노량진에서 혈혈단신 병력을 수습하고 있던 김홍일 장군과 함께 수원의 육본으로 이동해서 김홍일 장군은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이 장군은 수원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 김, 이 양 장군이 채병덕을 설득해서 김홍일 장군이 시흥사를 맡게 되었다. 채병덕은 중국군 출신인 김홍일 장군을 상당히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일본육사 대선배인 창군 원로 이응준이 함께 설득한 것이 컸다.
-
중국 국민혁명군 및 광복군 출신인 김홍일과 일본 육사 출신인
이응준의 관계는 그들의 출신과는 무관하게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김홍일과 이응준은 1976년 『세대』의 지면을 통해 광복군,창군 시절을 회고하는 대담을 나누면서 창군기에 대해
“李=만주와 중국 출신 그리고 일본 출신 더러는 유해준, 이성가 씨와 같은 광복군도 대거 새로운 조국의 깃발 아래 모여 들었다”
“金=그때의 보기 좋았던 광경은 출신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서로 추천하고 천거하는 모습”이었다고 공감했다.
(이응준,김홍일,1976「光復軍․創軍時節」 『세대』 제14 권,통권 157호,71쪽)
또한 중국 망명 당시 김홍일 장군의 편지를 망명 3개월 만에 국내의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전달한 사람도 이응준 장군이었다고 한다.[20]
- 2015년 '민족문화사전의 대표적인 친일행적 미화 및 누락 사례 중 하나'로 논란이 되었다. 일본군 대좌 출신 이응준에 대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5월 제26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군사력 양성으로 국권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뜻의 결실이었다', '일본군에 배속되어 1941년 대좌로 진급하였으며 8·15 광복 직전 민족운동가들과 협력하기도 하였다'고 썼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배재정 의원실( 새정치민주연합)은 민족문화사전 내용을 분석, 서춘·이응준을 포함해 43명의 서술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배재정 의원은 "정부는 광복 70년을 기념하는 정부차원의 요란한 행사보다 친일부역자 기록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이 작업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일 것"이라고 밝혔다. #
-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군인 부문에 수록되었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됐다.[21] 일본군 고급장교로 복무, 일제 학병 강연과 지지, 팔로군 토벌, 시베리아 출병 등의 경력이 강하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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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 명단 | ||
외무부장관 | <colbgcolor=#fff,#1f2024><colcolor=#254170> 장택상 → 임병직 → 변영태 → 조정환 → 허 정 | |||
내무부장관 | 윤치영 → 신성모 → 김효석 → 백성욱 → 조병옥 → 이순용 → 장석윤 → 이범석 → 김태선 → 진헌식 → 황호현 → 백한성 → 김형근 → 이익흥 → 장경근 → 이근직 → 민병기 → 김일환 → 최인규 → 홍진기 → 이호 | |||
재무부장관 | 김도연 → 최순주 → 백두진 → 박희현 → 이중재 → 김현철 → 인태식 → 김현철 → 송인상 → 윤호병 | |||
법무부장관 | 이 인 → 권승렬 → 이우익 → 김준연 → 조진만 → 서상환 → 조용순 → 이 호 → 홍진기 → 권승렬 | |||
국방부장관 | 이범석 → 신성모 → 이기붕 → 신태영 → 손원일 → 김용우 → 김정렬 → 이종찬 | |||
문교부장관 | 안호상 → 백낙준 → 김법린 → 이선근 → 최규남 → 최재유 → 이병도 | |||
부흥부장관 | 유완창 → 김현철 → 송인상 → 신현확 → 전예용 | |||
농림부장관 | 조봉암 → 이종현 → 윤영선 → 공진항 → 임문환 → 함인섭 → 신중목 → 정재설(서리) → 양성봉 → 윤건중 → 최규옥 → 임철호 → 정낙훈 → 정운갑 → 정재설 → 이근직 → 이해익 | |||
상공부장관 | 임영신 → 윤보선 → 김 훈 → 이교선 → 이재형 → 안동혁 → 박희현 → 강성태 → 김일환 → 구용서 → 김영찬 → 전택보 → 오정수 | |||
사회부장관 / 보건부장관 → 보건사회부장관 |
전진한 →
이윤영 →
허 정 →
최창순 →
박술음 /
구영숙 →
오한영 →
최재유 → 최재유 → 정준모 → 손창환 → 김성진 |
|||
교통부장관 | 민희식 → 허 정 → 김석관 → 윤성순 → 이종림 → 문봉제 → 최인규 → 김일환 → 석상옥 | |||
체신부장관 | 윤석구 → 장기영 → 이순용 → 조주영 → 강인택 → 이 광 → 이응준 → 곽의영 → 오정수 → 최용덕 |
}}}}}} }}}}}}}}} |
[1]
창씨개명 당시 썼던 이름은 가야마 다케토시(香山武俊, がやまだけとし)
[2]
대령, 소장때 역임했던 육군참모총장 보단 중장때 역임한 훈련소장 직위가 최종보직에 합당하다.
[3]
당시
일본군이 될 수 있는 조선인은
왕공족이거나 한일강제병합 당시에 협조했던
대한제국군의
장교들, 그리고 합병 당시에
사관생도였던 일부 인원만이 가능했다. 26기 동기로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나
김경천,
지청천,
홍사익이 있다.
[4]
일본군에서 권총은 개인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이유는 일본군이 장교에게 권총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 일본 장교들은 사비로 권총을 마련해 들고 다녔고, 권총이 싼 것도 아니다 보니 장교단 내에서 봉급이 낮은 하급 장교들의 경우 소지한 권총의 모델만 봐도 집안 사정을 대강 알 수 있었다고...
[5]
친일인명사전 역시 정부 공인기록은 아니므로 회고록이나 민간단체의 기록이나 각자의 생각을 서술하는 점은 같다.
[6]
서보장은 '국가 및 지방 자치 단체의 공무 또는 공공적인 업무에 다년간 종사하고 공로를 쌓아 성적을 올린 자'에게 수여한다.
[7]
학병 홍보의 경우 계속 사양하다가 부민관에서
김석원과 참석했고, 여기서 문제성 있는 발언을 했다.
[8]
회고록에 따르면 유진산, 장택상 등과 교류하며 "일본이 이대로는 유지되지 않을 것"이라 얘기했다고 한다.
[9]
대다수의 편견이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이 광복 후 전면에 나섰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는 대부분 만주군 출신, 만주군-일본군, 학병 출신들이 그러했고 오히려 일본육사 출신들은 소수인 데다 광복 후 대부분 근신했다.
강문봉,
박정희,
정일권 등은 만군-일본육사 계열이다.
[10]
이응준과 동기이자 후임 총장인 신태영이나 그의 아들
신응균, 1년 후배인
김석원,
이종찬 등도 자숙하다가
이승만,
이범석 등의 강권으로 늦게 군에 입대한 경우이다.
[11]
뱀부 계획은 각 도 별로 1개
중대를 배치한 뒤 병력을 모아 도마다 1개
연대 수준을 만들고 합계 2만 5천 명 남짓한 육상병력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12]
이응준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통위부장 선정에 대한 의뢰를 미군으로부터 받고 후보로 유동열, 지청천, 이범석 3인을 꼽았으며, 이 중 최선임격인 유동열을 추대하기로 했다고 한다.
[13]
백선엽의 회고록을 보면 백선엽이 중장계급으로 갓 육참총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당시 모슬포 훈련소는 여러 여건이 좋지 않아 인격적으로 원숙한 사람이 훈련소장으로 부임해야 적합하다고 생각했으며, 당시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던 이응준을 찾아가 훈련소장으로 부임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응준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노골이나마 헌신해야겠지."라고 하였고, 백 장군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훈련소장 부임과 함께 중장진급을 상신하여 진급토록 했다고 전해진다.
[14]
김경애 논문 ‘성폭력 피해자:생존자로서의 근대 최초 여성작가 김명순’, 이준식 논문 ‘일제강점기 치정사건의 사회사’ 등. 중앙선데이 기사 참조
[15]
'
내선일체를 주장하지만 실제의 차별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중략) 똑같이 의무를 다하고 나서도 차별이 계속될 경우에는 제군의 선두에서 항쟁할 생각이 있다'라는 내용.
[16]
회고록에 보면 그는 별다른 전선 경험이 없었지만 일본인 사령관으로부터 배려를 많이 받는 모습이 보인다. 1년 후배 김석원과는 대조적으로 김석원도 그의 회고록에 이응준의 이런 부분에 대해 동일한 언급을 하고 있다.
[17]
장창국 저 육사 졸업생 내용 인용.
[18]
초창기 일본 군부에서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막부 말기-메이지 시대의 유신지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19]
자서전 362page
[20]
김홍일의 오산학교 후배이자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작전참모를 맡았던 전제현 예비역 소장 증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 업단, 「전제현 장군 3차 구술면담」 2014.6.9.
[21]
친일인명사전은 "조선 청년에게도 국가 방위의 숭고한 병역의무가 부여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상의 광영이며 명예"라고 한 이응준의 글을 근거로 이응준이 '일본군 장교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한편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 군인이 되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선동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