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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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1a24><colcolor=#ffffff> 출생 | 1921년 5월 22일 | ||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외천리 (現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부용외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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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6년 3월 30일 (향년 44세) | ||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 | |||
본관 | 김해 김씨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46년 ~ 1965년 | |||
재임기간 | 제6대 연합참모본부총장 | ||
1960년 10월 8일 ~ 1961년 6월 6일 | |||
제7대 연합참모회의의장 | |||
1961년 6월 6일 ~ 1963년 5월 31일 | |||
제15대 육군참모총장[1] | |||
1961년 6월 6일 ~ 1963년 5월 31일 | |||
제8대 합동참모의장 | |||
1963년 6월 1일 ~ 1965년 4월 1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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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1a24><colcolor=#ffffff> 자녀 | 4남 1녀 | |
학력 |
부강초등학교 (17회 / 졸업) 주오대학 (법학 / 중퇴)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2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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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유교 (성리학) → 천주교 ( 세례명 : 요셉) | ||
임관 | 군사영어학교 (1기)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합동참모의장 | ||
주요 보직 |
육군
제6보병사단 사단장[2] 육군 제3보병사단 사단장 육군 제9보병사단 사단장[3] 육군사관학교 학교장 육군 제1군단 군단장 육군 제5군단 군단장 연합본부참모총장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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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
춘천전투 동락리 전투 영천 전투 백마고지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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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 태극무공훈장 수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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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당시 활약한 대한민국 국군의 장성.제6보병사단의 춘천-홍천 전투와 제9보병사단의 백마고지 전투에서의 맹활약으로 특히 유명하다. 이들 전공으로 대한민국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역대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중 가장 오랜 기간동안 재직하였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요셉이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 사단급 지휘관 중 최고의 활약을 보였던 명장이다.
북한군 최고의 명장인 방호산과 비견된다.[4]
2. 주요 경력
- 1946년 1월 28일 : 육군 참위 임관
- 1949년 3월 : 육군 대령 진급
- 1950년 6월 10일 : 육군 제6보병사단장
- 1950년 7월 15일 : 육군 준장 진급
- 1954년 2월 : 육군 중장 진급
- 1960년 10월 8일 ~ 1961년 6월 6일 : 연합참모본부총장
- 1961년 6월 6일 ~ 1963년 6월 1일 : 연합참모회의의장
- 1961년 6월 6일 ~ 1963년 5월 31일: 육군참모총장
- 1962년 1월 : 육군 대장 진급
- 1963년 6월 1일 ~ 1965년 4월 10일 : 합동참모의장
- 1965년 4월 : 예편
3. 생애
3.1. 6.25 전쟁 전
1921년 5월 22일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외천리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부용면 부강리에서 거주하였고 그는 일본 주오(中央) 대학에 법학부로 재학 중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복무 중 8.15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독립한 조국으로 귀국한 그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1월 28일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 참위(당시의 계급으로, 현재의 소위에 해당)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그는 전북 이리에서 중대장 김백일 부위(당시의 계급으로, 현재의 중위에 해당)[5]를 비롯하여 이한림, 정래혁과 함께 3연대[6] 창설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49년 1월에 1연대장, 두 달 뒤인 1949년 3월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약 3년 만에 소위로부터 대령까지 그야말로 초고속 진급한 것. 지금 관점에서는 특이하다 못해 비정상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는 당시 시대상을 살펴야 한다. 이러한 진급을 한 군인들은 보통 일본군이나 국부군, 또는 만주군에서 장교로서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따라서 신생 군대의 편제 유지를 위해, 고급장교가 필요하다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광복군과 국부군에서 활약했던 최용덕 장군의 경우, 육군 소위로 임관한 지 6개월 만에 대위로 특진하고, 두 달 뒤에는 초대 국방부 차관으로 영전했다.[7]
1949년 5월 강태무, 표무원이 이끄는 춘천 부근 6여단 8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에 걸리게 되자 월북했고, 그 책임으로 연대장이 바뀌어 김종오가 그 자리에 부임했는데 5월 8일 포천군 사직리에서 1개 대대가 월북한다는 거짓 투항책으로 북한군 2개 중대 병력을 유인해 섬멸하는 승리를 거두며 일약 군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6.25 전쟁 발발 불과 2주 전인 1950년 6월 10일 춘천시 - 인제군 지역의 38선 경비임무를 담당하는 제6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3.2. 6.25 전쟁 중
3.2.1. 화려한 전공(戰功)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6사단을 지휘, 춘천-홍천 전투에서 사단 작전지역 내에 존재하는 천연 장애물인 소양강과 북한강, 홍천 큰말고개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조선인민군의 남진을 저지, 북한의 전쟁 초기 전략을 좌절시키고 동시에 국군 주력 부대들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이 참전할 수 있을 시간을 버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향후 전쟁의 양상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이미 상황이 끝나 UN군이 참전할 가치를 못 느꼈다면 대한민국은 현존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니 그의 공로는 대단히 크다.이후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지연전을 계속 벌이던 와중 일어난 동락리 전투(음성무극리전투)에서 휘하 7연대[8] 2대대[9]가 단독으로 적 1개 연대를 기습, 전멸시켜 승리로 이끌었다. 참고로 이 전투는 육군이 최초로 인민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그 뒤 계속 남하하며 수안보, 이화령 전투 등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계속 지연시켰고,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그는 1950년 7월 15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그 뒤 낙동강 부근에 최후의 방어선이 형성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영천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의 6사단은 신녕(新寧) 지구에서 북한군 8사단의 공세를 안정적으로 저지하여 우인접 영천 방면의 아군이 실시할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공헌했다. 덕분에 김일성이 직접 남조선의 사단 중 제대로 된 사단은 6사단밖에 없으니 그걸 깨부셔야 한다!는 언급을 할 정도로 피아 모두에게 유명해졌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해 국군과 UN군이 북진을 공격적으로 하는 와중 7연대 1대대가 10월 26일에 최초로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해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나[10] 이 무렵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후송당했다.
3.2.2. 연이은 시련
문제는 사단장이 부상당한 때에 중공군이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결국 6사단은 초산에서 후퇴하다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특히 7연대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병력만 분산철수해서 전투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이 김종오 장군의 첫 번째 대패배였는데, 일단 책임은 중공군의 개입을 가볍게 본 맥아더를 위시한 UN군 총사령부에게 있었지만, 본인 입장에서도 정말 기분 좋지 않은 일이었다.부상에서 회복된 후에는 3사단장을 맡았지만, 곧바로 참가한 현리 전투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패배의 책임은 그의 상관인 3군단 장 유재흥에게 돌아갔지만, 역시 여기서도 사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모든 장비를 버린 채 혼란에 빠진 병력들이 무질서하게 산으로 흩어져서 후퇴하는 등의 추한 모습을 연출했고, 이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그에게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중공군의 남하로 전선이 교착됨과 동시에 휴전협상이 진행되자 휴전 후 유리한 고지를 획득하기 위해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52년 5월 김종오 장군은 중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철원지역을 담당하는 9사단장에 임명됐다.
3.2.3. 백마고지 전투
김종오 장군은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한 격전이 일어났던 곳들 중의 하나인 백마고지 전투를 진두지휘하였다. 1952년 10월 철원 북방의 395고지(후에 백마고지로 명명됨)를 확보하고 있던 9사단은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고 12회에 걸친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사투를 벌여 10월 15일 최종적으로 중공군을 격퇴, 이 고지를 사수하였다.그는 적시적절한 예비대 투입과 부대 교대, 강력한 포병 및 항공전력을 이용한 입체적인 화력 지원,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고취시킨 정신교육 등으로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줌으로써 철의 삼각지를 점령하려는 적의 전략적 목적을 좌절시키는데 성공했다.
백마고지 신화를 창조해낸 그는 이후 휴전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보직 정예 초급간부 육성에 매진하였다.
3.3. 전후
휴전 후 그는 1군단장에 임명되었고 1954년 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이후 그는 교육총본부(현재의 교육사령부의 전신) 총장,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김종오 장군은 육군참모총장 재직시인 1962년 1월 국군 사상 다섯 번째로 대장으로 진급하였다.[11] 1965년 4월 19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머지 않은 1년 후인 1966년 3월 30일 오전 9시 25분, 신당동 자택에서 지병인 폐종양으로 사망하였다.[12] 향년 46세.
그는 임종하면서 "더 일할 나이에 조국통일도 못 해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고 죄송할 뿐이다. 모름지기 평생의 소원인 통일 성업을 꼭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4. 평가
6.25 전쟁 당시 한국군 명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로 1983년 국방부 선정 4대 영웅으로 이름을 올렸다. #100살까지 장수하면서[13] 자신의 전공을 알릴 기회가 많았던 백선엽 장군에 비해, 불과 40대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종오 장군은 전공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후세의 기억에서 덜 조명을 받는 비운의 명장인 셈.
다만 제6사단은 전쟁 초반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당시 6사단은 횡성에서부터 출발하며 퇴각로마다 무수한 대량학살을 벌였다. 특히 수만의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던 충북 지역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이 책임은 당시 사단장이었던 김종오 장군 역시 지고 있다.
5. 둘러보기
1983년 국방부 선정 6.25 전쟁 4대 영웅 | |||
월튼 워커 | 더글라스 맥아더 | 김홍일 | 김종오 |
● 전두환 前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 이후 선배 장군들을 몰아낸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6.25 전쟁 영웅을 선정해달라고 선배 장교인 박경석(1933) 장군에게 부탁한다. 둘은 육군대학 정규과정(박경석 중령, 전두환 소령 시절)에서 같은 기수로 교육을 받은 인연이 있다.
● 박경석 장군은 혼자서 4대 영웅을 선발할 수 없다면서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한림 장군, 제2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병형 장군, 제3보병사단장을 역임한 박정인 장군을 초청하여 회의를 했는데, 만장일치로 김홍일 장군, 김종오 장군,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을 선정했다. 당시에는 6.25전쟁에 참여한 장군들 거의 생존했고 이들에게 여론조사를 했을 때도 역시나 만장일치로 위의 4인이 선정됐다.
● 탈북민 출신의 기자 주성하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대한민국의 생존을 결정지은 것은 백선엽이 아니라 김종오라고 평가하며 그가 지휘한 춘천 전투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북한에서 제작된 드라마 소설 '50년 여름'[14]에서는 춘천 전투에 대해서 드물게 고전을 면치 못한 전투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김일성 일가를 띄우기 위해서는 흰색도 빨간색이라고 우기고 볼 인간들조차 춘천에서의 전투를 '고전', '패배'라고 그리고 있을 정도였으니[15] 김종오가 지휘하는 대한민국 국군과 맞섰던 춘천에서의 전투는 뭐라 쉴드를 치거나 할 수 없는 북한의 빼도박도 못할 대패였다는 소리다. 동시에 주성하는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도 사흘 동안 더 남하하지 않고 머무른 것도 춘천에서의 저항이 큰 원인이었으며[16] 김종오와 춘천 전투가 아니었다면 북한은 계획대로 바로 부산까지 들이닥쳤을 것이고 백선엽이 낙동강 방어선을 지휘하거나 미국의 인천 상륙 작전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호평하고 있다.[17]
[1]
제7대 연합참모회의의장 겸임
[2]
당시 계급은 대령
[3]
백마고지 전투
[4]
방호산 역시 북한군에서 북한군 6사단을 지휘했고, 김종오 역시 국군 6사단을 이끌었으며, 북한군 6사단과 국군 6사단은 각 북한과 남한에서 전시에 가장 큰 활약을 보인 부대였으며, 심지어 둘이 해당 부대를 이끌때, 해당 부대의 학살 혐의도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5]
인력풀이 매우 적던 건군 초기였기 때문에, 중위 중대장 - 대위 대대장은 물론 대령 사단장도 흔했다.
[6]
현재 해당 연대는
7사단 예속이다.
[7]
사실 최용덕 장군은 국부군 공군 소장 출신으로 소위로 임관하는 것은 다분히 불합리한 인사였긴 했다. 군경력이 비슷한
김홍일 장군도 특별임관 형식으로 곧장 준장에 임명되었으니.
[8]
현재의
제7보병여단. 6.25전쟁 발발 이전부터 현재까지 편제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부대이다.
[9]
음성무극전승대대
[10]
사실 국군 사단 중 압록강변까지 도달한 부대는 이 연대를 제외하면 없기에 지금도 6사단 내에서 초산 연대로 별칭된다.
[11]
첫 번째는 백선엽 대장, 두 번째는
정일권,
이형근 대장 공동(육군총참모장을 역임한 정일권 장군과 대한민국 국군 군번 1호의 주인공인 이형근 장군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 동년 동시에 진급시킴) 네 번째는
박정희 대장이었다.
[12]
현역 때도 증상이 있어 미국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두 차례 수술 받았다. 당시 유족으로 부친(당시 68세)/모친(당시 67세)/처/4남 1녀의 자식들이 있었다.
[13]
1920년에 태어나 2020년까지 살았다.
[14]
1990년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총 22장으로 구성된 장편소설로 1950년 6.25 전쟁 제 1단계 작전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서울과 대전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그리고 있다.
# 해당 드라마 집필진은 노동당 비밀 문서까지 열람할 수 있을 만큼 '당에 대한 충성'이 보장된 사람들이다.
[15]
실제로 북한은 춘천 전투 직후 2군단장 김광협을 해임하고 무정으로 교체하였으며, 2사단장 이청송은 최현, 7사단장 전우는 최충국으로 교체했다. 전쟁 시작 며칠만에 군단 지휘관을 싹 교체하는 것은 웬만해서는 보기 드문 일인데, 뒤집어 말하면 주성하의 지적마따나 김일성이 춘천 전투에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6]
주성하는 조선인민군의 작전 계획은 6.25 전쟁 발발 초기 춘천을 하루 만에 점령하고 3일 뒤에는 수원을 점령해서 대한민국 국군의 배후를 차단한다는 것이었는데, 춘천의 김종오 예하 6사단이 조선인민군 2군단을 상대로 닷새나 막아내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조선인민군의 작전 계획을 무위로 돌렸고, 결국 배후 포위망 형성에 차질이 생긴 김일성은 서울에서 사흘을 허비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17]
또한 1952년 10월 김종오가 사단장으로서 지휘했던
백마고지 전투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그들의 '항미원조'(?) 전쟁에서 유일하게 패배했다고 인정한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