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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무부대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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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일 | 백인엽 | 이한림 | 김종면 | 김창룡 | |||||
6대 | 7대 | 8대 | 9대 | ||||||
정인택 | 김재현 | 하갑청 | 이소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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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엽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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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623e><colcolor=#ffffff> | |||
출생 | 1923년 2월 18일 | ||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 (現 남포시[1] 강서구역 덕흥동) |
|||
사망 | 2013년 12월 14일 (향년 90세) | ||
인천광역시 | |||
묘소 | 천안 풍산 공원묘지 | ||
본관 | 수원 백씨 | ||
호 | 운봉(雲峰) | ||
재임기간 | 제2대 특무부대장 | ||
1950년 12월 15일 ~ 1951년 1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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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623e><colcolor=#ffffff> 형제자매 | 누나 백복엽, 형 백선엽 | |
배우자 | 주광숙 | ||
학력 |
강서 약송소학교 (졸업)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졸업) 메이지대학 (경제학 / 학사) 도쿄 육군항공학교 (졸업)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
||
경력 |
선인학원 이사장 인하대학교 행정학과 초빙교수 |
||
군사 경력 | |||
임관 | 군사영어학교 (1기)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1943년 ~ 1945년 | |||
대한민국 육군 | |||
1946년 ~ 1965년 | |||
최종 계급 | 중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국 국장 | ||
주요 보직 |
제17보병연대장 수도사단장 육군특무부대장 제1훈련소장 제6보병사단장 제9보병사단장 제2훈련소장 제1군단장 제6군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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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 6.25 전쟁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육영 사업가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대한민국의 군인인 백선엽의 동생이며 선인학원 설립자.2. 생애
1923년 2월 1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형은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한 백선엽이다. 약송소학교와 숭실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육군항공학교에 입교하여, 일본제국 육군 항공소위로 종전을 맞았다.8.15 광복 이후 고향인 평안남도로 귀향하여, 평양에서 국내파 민족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의 경호대장으로 근무했다(백선엽은 조만식 비서). 그러나 소군정에 의해 조만식의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이어 감금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역시 비서로 근무했던 형 백선엽[2]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 직후인 1946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육군 장교로 임관하고 1948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6.25 전쟁 직전에 그가 근무한 곳은 당시 38선으로 고립된 최전방인 옹진반도였다. 6.25 전쟁 발발 당시 옹진지구 전투에서 17연대장으로 북한군과 맞섰다.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장, 제1훈련소장, 제6보병사단장 등을 지내고 1952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제9보병사단장, 제2훈련소장 등을 지낸 뒤 1955년 9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제1군단장과 제6군단장을 지냈으며,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을 마지막으로 1960년 예편했다.
이후에 선인재단을 세웠다.[3] 그러나 재단을 통한 온갖 비리로 허구헌날 구속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나는 정권이 새로 바뀔 때마다 늘 비리 척결이라며 잡혀간다"라고 자조적으로 인터뷰하기도 했다. 형 백선엽을 여러 번 인터뷰하고 칭송하던 월간조선조차도 백인엽의 선인재단 운영 및 비리를 수 차례에 걸쳐 고발할 지경이었다.
2013년 12월 14일에 90세로 사망했다.
3. 행적
3.1. 6.25 전쟁
덕장인 형과는 다른 저돌적인 맹장. 부하들에게 저지른 악행과는 별개로, 전투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뛰어났다. 개전 당시 옹진지구 전투에서 독립 제17연대를 지휘했는데, 전차를 몰고 들어온 적군과 3대 1에 가까운 병력 열세 속에서도 잘 싸웠다. 하지만 섬에 가까운 고립지였던 옹진 반도의 특성상 너무 불리했고, 철수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한 이미 철수계획도 있었기에 그에 따라 병력을 운영하였지만 생각보다 적군의 진군속도가 빨랐고, 아군의 해상철수지원은 더뎠다. 어찌저찌 도착한 수송선으로 병사들을 탈출시켰는데, 백인엽은 포를 직접 조작하며 북한군에 포격을 가하면서 아군의 철수를 원호했다. 마지막 병사들이 탈출할 때, 같이 철수하자는 병사들의 말에 자신은 북한군을 저지할테니 어서 탈출하라며 끝까지 포를 놓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수송선이 떠나고 포를 해체한 뒤 자결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참모가 말려 살았다고 한다. 다만 이는 전사편찬에 형 백선엽이 참여했다는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에만 나오는 내용이고, 그냥 병사들이 기절시켜서 탈출시켰다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뢰성에 의문이 있다.이후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 소속되어 지연작전의 기반이 되었다. 지연작전중에 평택역에서 유엔군의 오폭으로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실려갔고 이후 복귀해 낙동강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웠다. 또한 형 백선엽이 쓴 <<실록 지리산>>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전쟁 이전에 여순사건 당시 토벌대로 발령받았으며, 상당히 유능했던 지휘관이라고 언급했다.[4] 또한 그가 오랫동안 지휘했던 17연대는 북한군과 잦은 교전으로 실전경험이 풍부해 이름 높은 정예로 평가받았다.[5]
반면 부정적인 사례도 있는데, 안강-기계 전투의 일부인 비학산 전투 당시 한신 장군과의 일화가 있다. 한신은 1연대장이었고 백인엽은 수도보병사단장이었다. 1연대가 용전분투하며 치고 올라갈 즈음 포병의 화력지원이 정지되어 기세좋게 올라가던 1연대의 진격이 돈좌되었다. 알고보니 백인엽이 오랫동안 맡아온 바로 그 17연대도 같은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화력지원이 1연대로 쏠려 있자 17연대로 돌려버린 것이었다. 뒤늦게 포병관측소에서 사태의 전모를 파악한 한신 장군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곧장 사단본부로 쳐들어갔다. 당시 사단본부에는 이형근 장군의 동생인 이상근 대령이 참모장으로 있었는데, 만류하는 참모장을 던져버리고 사단장실에 박차고 들어가 권총을 뽑아들고 매우 강력하게 항의했다. 즉, 연대장(대령)이 사단장실로 쳐들어가 권총을 들고 이판사판 따져든 것이다. 그런데 백인엽 사단장은 한신의 성격을 알았기에 아무말도 못했다. 그나마 한신 장군이 던져버렸던 이 참모장과, 한신 장군을 따라온 1연대 작전주임이 간신히 뜯어말려 끝났다고 한다. 결국 이 일로 백인엽은 수도보병사단장에서 해임되었으나, 곧바로 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이 된다.
3.1.1. 살인 장군
이 문단은
상위 문서: 6.25 전쟁 학살/유엔군\
아래 내용의 출처는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6권-제2부-제2소위원회 사건(3)-1 링크이다. |
- p.507, 여수지역 여순사건 中
12연대 하사관교육대 선임하사였던 성찬호는 “백인엽은 (…) 전쟁통이니까 강력히 부하를 통솔하는 것은 좋지만, 부하이건 시민이건 빨치산이 되었건 구분 없이 죽인다 이겁니다. 너 빨치산 갖다 주었지, 이러면서, 너 밥 갖다 주었지? 밥 갖다가 주었습니다. 그러면 빵! 쏘고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314)성찬호의 증언에 따르면 백인엽은 담력 훈련을 위한 총검술 시범 대상으로 민간인을 이용하기도 했고, 시체를 전시하여 ‘주민 정신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성찬호 증언록 ,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소장
또한 당시 제12연대 2대대 5중대장이었던 임○○은 당시 백인엽이 즉결처분권을 부하장교들에게 위임하였고, 일부 장교들이 ‘즉결처분’을 남발하여 문제가 되었다고 말했다. 임○○은 휘하 장교들에게 ‘즉결처분권을 위임한’ 백인엽을 찾아가 즉결처분을 남용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315)참고인 임○○에 따르면, 같은 중대에 황해도 출신으로 대부호의 아들이었던 정○○ 소위가 즉결처분을 남용하여 자신과 갈등을 빚었다고 말했다. 참고인 임○○, 진술조서(2008. 4. 24.)
본 사건 당시 12연대의 지휘관은 연대장 백인기․부연대장 백인엽이었으며, 이들은 직접 여수에서 주둔하면서 민간인 사살을 지휘․명령하였다. 백인엽은 백인기 연대장 사망 이후 연대를 지휘했으며, 백인엽이 제17연대장으로 전출된 이후 송석하가 12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송석하 연대장은 12연대 잔류 병력을 지휘하며 1949년 1월까지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316)참고인 오봉규, 진술녹취록(2008. 1. 25)
- p.592, 여수지역 여순사건 中
백인엽에게 즉결처분 남용을 중지해 달라 말해서 그 이후로 즉결처분이 줄어들었음. 물론 완벽하게 없어진 것은 아니었음. 우리 중대에 정소위가 있었음. 정소위가 즉결처분 명령에 불복한 병사를 쏴 죽였음. 그래서 권총을 꺼내서 “너 같은 놈은 살인마다. 이북에서 내려왔다고 사람을 죽여도 되느냐”고 막머라고 그랬음. 정소위가 쏴 봐 쏴 봐 그랬음. 그래서 내가 너 같은 놈 하나 죽여도 아무도 모른다며 겁을 줬음. 그런 놈은 군을 먹칠하는 놈이야.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즉결처분을 지시한 백인엽에게 담판을 지러 갔음. 즉결처분하는 걸 3번이나 보고서 못 참고 백인엽에게 따진 것임. 그러니까 알았다고 시정하겠다고 했음 - 임○○(22세), 12연대 2대대 6중대, 2008. 4. 24. 인천 서구 석남동 자택, 진술조서
아래 내용의 출처는 이무호, 『어느 졸병이 겪은 한국전쟁』, 지식산업사, 2009(초판 2쇄) 이다. |
- p.238
무분별한 부하 즉결 처분
한국 전쟁 초기에 17연대 연대장 P 대령은 부하에게 즉결처분을 잘 내리기로 소문난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예하 부대의 전투력 향상에는 남달리 공이 많은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제대 뒤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여기에 17연대 출신 한 퇴역 장교의 증언을 소개한다.
1950년 겨울, 17연대가 광나루 방향에서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하는 가운데 휘하 모 중대장의 운전병이 추운 날씨에 지프의 발동을 꺼뜨렸다고 해서, 그 중대장에게 운전병을 총살하라고 명했다. 중대장이 주저하자 자기 손으로 그 운전병을 총살했다.
한번은 전화 가설 장비를 잔뜩 등에 짊어지고 행군 중인 통신중대의 후미를 허둥지둥 따라가던 한 통신병이 자기(연대장)가 탄 지프의 진로를 방해한다고 해서 통신 중대장 김○○ 대위를 불러서 그 통신병을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김 대위는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부득이 그 통신병에게 총을 한 방만 쏘고는 자기 위치로 돌아가버렸다. 연대장은 한 손에 총을 맞고 신음하는 그 통신병을 자기 손으로 사살하고 나서, 수행하던 헌병 중대장 박○○대위에게 확인 사살을 명령했다. 박 대위는 명령대로 확인 사살을 했다. 박대위는 '5·16'이 있고 난 뒤에 퇴역해서 중앙청 요직에 있다가 자살했다고 들었다.
또 한번은 한 신임 육군 소위가 호 안에서 근무하다가 불시에 나타난 연대장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껌을 씹으면서 경례를 했다고 해서, 그 소위가 소속된 대대장 노○○ 대위를 불러서 그를 즉석에서 총살케 했다. 노 대위는 그 뒤 복부에 총상을 입고 육군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국 전쟁 초기에 17연대 연대장 P 대령은 부하에게 즉결처분을 잘 내리기로 소문난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예하 부대의 전투력 향상에는 남달리 공이 많은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제대 뒤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여기에 17연대 출신 한 퇴역 장교의 증언을 소개한다.
1950년 겨울, 17연대가 광나루 방향에서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하는 가운데 휘하 모 중대장의 운전병이 추운 날씨에 지프의 발동을 꺼뜨렸다고 해서, 그 중대장에게 운전병을 총살하라고 명했다. 중대장이 주저하자 자기 손으로 그 운전병을 총살했다.
한번은 전화 가설 장비를 잔뜩 등에 짊어지고 행군 중인 통신중대의 후미를 허둥지둥 따라가던 한 통신병이 자기(연대장)가 탄 지프의 진로를 방해한다고 해서 통신 중대장 김○○ 대위를 불러서 그 통신병을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김 대위는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부득이 그 통신병에게 총을 한 방만 쏘고는 자기 위치로 돌아가버렸다. 연대장은 한 손에 총을 맞고 신음하는 그 통신병을 자기 손으로 사살하고 나서, 수행하던 헌병 중대장 박○○대위에게 확인 사살을 명령했다. 박 대위는 명령대로 확인 사살을 했다. 박대위는 '5·16'이 있고 난 뒤에 퇴역해서 중앙청 요직에 있다가 자살했다고 들었다.
또 한번은 한 신임 육군 소위가 호 안에서 근무하다가 불시에 나타난 연대장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껌을 씹으면서 경례를 했다고 해서, 그 소위가 소속된 대대장 노○○ 대위를 불러서 그를 즉석에서 총살케 했다. 노 대위는 그 뒤 복부에 총상을 입고 육군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군인으로서 백인엽은 인터넷에서 부하 병사에 대한 즉결처분과 처형 등으로 매우 유명하다.[6]
진실화해위원회의 1기 활동(2005-2010)기에 여순사건에 대한 조사를 행하면서 당시 진압군 지휘관이었던 백인엽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즉결처분과 학살행위에 대한 진술과 진상조사 내용을 발표한 적이 있다. 주로 피해자들은 민간인들이었고, 병사들의 경우 백인엽이 휘하 장교들에게 즉결처분권을 부여 및 위임하여 장교들이 남발했던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백인엽이 직접 진행하거나, 명령한 부하 병사에 대한 즉결처분과 살인행위에 대해서는 2003년에 참전용사인 이무호[7]가 한국전쟁 회고록인 <어느 졸병이 겪은 한국전쟁>을 내면서 언급한 바가 있다.
이무호는 책에서 실명을 사용하지 않고 당사자를 한국전쟁 초기 17연대 P 대령이라고 지칭했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한국전쟁 초기 17연대장이고, 계급이 대령이면서 성의 이니셜이 P인 자는 백인엽 밖에 없다. 위에서 인용되듯이, 시동을 꺼드렸다던가, 행군중인 통신병이 자기 눈에 거슬린다던가, 경례중에 껌을 씹는다던가의 이유로 즉결처분으로 병사들을 사살했다는 증언이 있었다고 소개 하였다. 이 책에서 이무호는 스스로 당시 2사단장이던 함○○ 준장에게 즉결처분을 명령받아[8] 헌병대에게 총살당할 위기에서 겨우 모면하여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 백인엽의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
일단, 책의 내용에 의하면 이무호는 백인엽의 즉결처분을 목격한 적은 없고, 17연대 소속 군인들에게 들었던 소문과 증언만 취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무호는 책에서 1950년 12월에 맞이한 신임 대대장이 17연대에서 전속해왔던 최동훈 소령이었으며[9], 1951년 1월 중공군의 38선 이남 공세로부터 최소령과 함께 퇴각하던 중에 17연대 병사들과 만나 합류하게 된 점을 언급하고 있다.[10] 위의 인용문 역시 17연대 장병들과 합류를 언급한 바로 뒷장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나무위키 본문서에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책임자가 17연대장인 백인엽으로 서술되어있던 것이 인터넷으로 와전된 상황인데( 링크1, 링크2),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행한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권 제2부 링크에 의하면, 학살에 관여한 병력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등이고, 17연대는 대전형무소의 외곽경비업무만 보았다고 조사되었다.[11][12] 게다가 17연대가 2사단에 예속되는 것은 1950년 11월이고 대전형무소 학살사건은 1950년 7월에 일어났으므로 시기가 맞지 않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백인엽과 17연대는 대전형무소 학살사건과 무관한 상황이다.
3.2. 전후
3.2.1. 군납 비리
1962년 1월 29일 "6군단장 군사 독직 사건"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일명 ‘혁명정부’에 의해 구속돼 무기징역과 함께 거금 7,247만 1,723환 추징을 선고받았다. 당시 6군단장 백인엽의 심복 부하들은 장병 부식 납품업자들로부터 6,000여만환을 뇌물로 뜯어 냈고, 군납업자들로부터 납품액의 10% 내지 15%를 거둬 1억 212만여환을 백인엽에게 뇌물로 상납하는 등의 비리를 저질렀다. 그 결과 수만 명의 장병들이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었다. 또 6군단 예하 259수송부대의 자동차를 불법으로 후생 사업에 보내 1,000여만환을 부정 취득했고, 예하부대에 배급하는 휘발유 중 매달 200드럼씩 총 1,000 드럼을 빼돌려 500만환 상당의 이득을 취했다.여담으로 백인엽이 6군단장으로 있었을 당시인 1957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박정희가 6군단 부군단장으로 발령을 받아 경기도 포천의 군단사령부에서 백인엽 밑에서 일했다고 한다. 당연히 백인엽은 상술한 행적들과 유사한 권력 남용을 저지르면서 박정희를 포함한 6군단의 모든 장교들에게 각종 모욕행위와 가혹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13][14]
결국 참다못해 백인엽을 들이박은 박정희는 당시 참모총장인 백선엽의 중재로 1957년 9월 3일 제 7사단장으로 전보되어 강원도 인제로 갔다. 그 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얼마 후 백인엽은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을 받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백선엽이 박정희 생명의 은인이라 백인엽은 10개월 만에 풀려나왔다. 풀려난 후 백인엽은 선인학원 비리에 본격적으로 전념하게 된다.
3.2.2. 선인학원 비리
예편 후 교육계에 투신한 백인엽은 자신의 이름과 형 백선엽 장군의 이름을 딴 사학재단인 ' 선인학원'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가히 엄청났다.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이들까지 한정으로 인천광역시 출신인 사람들은 선인학원 또는 선인재단이라는 이름을 선명히 알고 있으며 지금도 인천지역 택시 기사들에게 "선인재단 정문으로 가달라"고 하면 정확히 선인고/인화여고 정문 앞에 택시를 세워줄 정도로 지역민들에게 잘 알려진 학교법인이었다.선인학원은 1980년대 당시 아시아 최대의 사학 재단으로 유명했는데, 1980년대 초반 당시 재단 산하 학교에 진홍유치원, 효열국민학교(이상 현재 폐교), 선인중학교, 인화여자중학교, 선화여자중학교, 선인고등학교, 인화여자고등학교, 인천체육고등학교[15], 선화여자상업고등학교(현 인천비즈니스고등학교), 운봉공업고등학교(현 인천대중예술고등학교), 운산기계공업고등학교(현 인천소방고등학교), 항도실업고등학교(현 인천전자마이스터고등학교), 인천전문대학(현재 인천대학교에 통합됨), 인천대학교가 있었다. 속칭 마징가 제트 체육관으로 유명한 구 선인체육관 주변(구글 어스로 북위 37도 28분 17초 동경 126도 39분 21초 주위)을 중심으로 해서 재단 소속 학교들 거의 전부가 소속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1980년대 초까지 인천지역 중학생과 고등학생 중 4분의 1 정도는 선인학원 계열 학교에 다닌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학교의 숫자가 어마무시하게 많았다.
참고로 저기서 진홍 유치원의 진홍은 당시 백인엽의 아들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효열국민학교의 효열은 백선엽 백인엽 형제의 어머니인 방효열 여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16] 선인은 형제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고, 선화와 인화 역시 형제의 이름 앞글자와 꽃 화(花)자를 합친 것이다. 운봉과 운산 역시 각각 형제의 아호에서 교명을 따왔다(운봉이 백인엽 본인, 운산은 형 백선엽의 호다).
그런데 재단 운영이 개막장 오브 개막장이어서, 인천 지역 고교 평준화 이전 선인고등학교는 인문계임에도 불구하고 수준 이하의 학생들만 득실대었다. 여기에 견줄 만한 사람은 서남대학교로 악명높은 이홍하나 상지대학교를 개판으로 운영했던 김문기, 민립대학인 조선대학교를 사유화했던 박철웅 정도이다. 그 악평은 평준화 이후에도 지속되는 선인재단의 운영 속에서 여전히 이어졌으나, 공립고등학교가 된 이후에는 수준이 완전히 달라져서 신흥 명문고가 되었다. 아무튼 막장 선인재단의 전설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도봉산으로 불리던 악명높은 항도, 운봉, 운산 라인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도 악명이 자자하다.
결국 인천대학교와 선인고등학교 모두 막장의 극을 달리는 운영 끝에 1994년, 인천직할시에 흡수되었다.[17] 인천대학교는 2013년에 국립이 되었고, 나머지 학교는 공립들이 되어서 지금은 선인재단 따위는 없다. 사실 월간조선에서 백인엽을 취재한 이유도 바로 이런 학내 분규의 해결 때문에 기획했다. 그렇지만 인천 사람들에게 선인재단이라는 단어는 남아 있다. 물론 그것도 아주 안 좋은 이미지로··· 저 동네 저 시절에 근처 고등학교를 나왔거나 또는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백선엽'과 '백인엽'은 똑같은 존재다.
오죽하면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백인엽은 나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감옥에 가는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다. 물론 무슨 민주투사 같은 건 아니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사회기강 정리 차원에서 반드시 혼내주고 넘어갈 정도로 유명했다는 이야기.
백인엽의 막장 행각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보도한 언론 매체가 바로 월간조선. 그것도 북한 핵개발 문제로 시끄러울 때라서 나름 북한에 대한 비판이 매서운 시기였다. 그 월간조선이 그럼에도 백인엽의 막장 행각을 상세하게 취재해 보도할 정도로 재단 운영을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했으며 그로 인해 당시에도 비난을 무수히 받았는지 알 수 있다.[18]
4. 기타
- 전설적인 사채업자 명동 큰손 '백 할머니' 백희엽(1916년 ~ 1995년)이 사촌 누나다. 백희엽은 '광화문 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고성일과 더불어 '백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대한민국 사채업의 양대 거물이었고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1970~90년대 슈퍼개미(개인 주식투자가)였다. 영화 마스터에서 주인공 김재명 팀장(배우 - 강동원)이 사기꾼 진현필 회장(배우 - 이병헌)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 자금을 빌린 할머니(배우 - 박정자)가 바로 백할머니 백희엽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다.
- 인천 상륙 작전 당시 낙동강 전선에 있었는데,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용맹을 떨쳤다는 주장이 있어 논란이 있었으나 이는 오해이다.[19] 백인엽이 지휘하는 제17연대가 9월 15일이 아닌 18일에 상륙했기 때문이며 인천상륙작전 당시 백인엽이 선상에서 명령하달을 하는 사진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해명되었다.[20]
- 한국의 스즈란 이라고 불리었던 인천의 운봉공업고등학교 (現 인천대중예술고등학교) 의 "운봉"이 학교법인 선인학원 설립자인 백인엽의 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 이승만 대통령이 백인엽에게 "형도 군인인가?"라고 물어 볼 정도로, 대통령은 백인엽을 먼저 알고 이후에야 백선엽을 알게 되었다. 백선엽은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에서 용감 무쌍하게 싸우고, 국군 최초로 평양 입성 작전에 성공하였으며, 북한에서 부터 유일하게 건제 유지하며 후퇴하며 계속 공을 쌓았지만, 제1군단장에 부임하여 진급 신고식을 할 때서야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만난다. 이때 이승만이 한 말은 "자네가 백인엽이 형인가, 아우인가?"였다. 아무래도 백선엽은 일선부대와 육군본부를 오가던 '흔한 젊은 장교 1' 정도의 이미지였고, 백인엽은 이승만의 바로 곁에서 경호를 서던 인물이었으니... 백선엽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승만은 하야하는 순간까지 백인엽을 찾았다. " 백선엽 장군 형제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이야?"하면서 이들이 군을 이끌고 왜 사태를 정리하지 않냐며 찾은 것이다.[21]
[1]
북한 당국은 2010년 남포를 도급 도시로 삼고, 한국 이북5도의 행정구역에서 강서군에 해당하는 지역을 남포에 편입시켰다.
[2]
조만식의 비서가 백선엽 한 명이었던 것은 아니고, 조만식의 비서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 유명한
선우진 역시 유일한 비서인 것처럼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여러 비서진 가운데 한 사람이
선우진이다. 당장 소설가 김훈 부친도 비서로서 활동한 전례가 있다. 백범 암살 전후의 정황을 언론에 적극적으로 증언했고, 남북연석회의에 백범의 차남
김신과 함께 동행한 유이한 인물이기에 그런 오해가 있다.
[3]
형 백선엽과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 만든 재단이다.
[4]
실제로 여순사건 당시 반군들이 장악한 여수 시내에서 반군들과 시가전을 치러 여수를 탈환한 부대가 백인엽이 이끄는 부대였다. 참고로 그 전에는 토벌군 사령관
송호성이 선두에 나서 여수를 탈환하려 했으나 반란군의 기관총 사격이 그의 지휘 차량에 맞자 그 지휘 차량이 응사하는 도중에 고막이 파열되어 도망가는 추태를 벌였다.
[5]
부대 최하급자의 계급이
하사 였다고.
[6]
구글에 '
백인엽 즉결처분'이나 '
백인엽 부하살인' 등으로 검색하면 여러 결과가 나온다.
[7]
1930년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 태생으로 한국전쟁 며칠전에 월남하여 피난하던 중 자원입대하여 대한민국군으로 참전한 뒤 1979년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8]
이무호는 부대 재편성 대기 중 대대장 직할 연락병으로서 부상당한 대대장의 신변확보를 구실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가 헌병과 사단장에게 붙들렸고, 이유를 묻는 사단장에게 자초지종을 대답하였으나, 사단장에게 '각하'란 존칭을 쓰지 않고 '장교님'이라 썼다는 이유로 즉결처분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9]
p.168, "며칠 뒤 우리 대대에 신임 대대장이 부임해 왔다. 그는 제17연대에서 전속해 온 최동훈(崔東訓) 소령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10]
같은 책 pp.235-237
[11]
동 보고서 각주 46 : 6ㆍ25전쟁사 등 공간사에는 17연대가 재소자들의 탈옥기도를 막았다고 나와 있으나 당시 형무관들은 17연대는 외곽경비만 섰고, 미결수들의 소동은 대전형무소의 특별경비대가 저지하였고, 17연대는 외곽에서 형무소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혹은 출근하기 위해 온 형무관을 총격을 가해 형무관 김○○이 사망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특별경비대 분대장 이○○은 연와공장에 수용된 이들이 일반 미결수라고만 진술하였으나, 특별경비대 대원 김○○은 이들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면서 소동을 일으켰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해 이들은 보도연맹원으로 판단된다. 참고인 이○○ 진술녹취록(2009.1.30); 참고인 김○○ 진술 녹취록(2009.2.11); 중앙일보사, 앞의 책 제1권, 1983. 283~284쪽;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6ㆍ25전쟁사 제3권, 2006. 22쪽
[12]
동 보고서 각주 47 :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1950.6.27 제17연대 연대장 백인엽 대령에게 ‘제17연대는 대전에 피난중인 정부 경호임무를 수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제17연대는 1950.6.27 대전 선화국민학교로 이동 집결하여 정부경호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1950.7.1 국방부 정훈국장 이○○대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의 명령과 경찰의 보고를 받고, 제17연대 병력을 형무소 경비로 보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제1권(개정판), 1977, 484쪽; 중앙일보사, 앞의 책, 제1권, 1983. 283~284쪽; 참고인 이○○ 진술녹취록(2009.1.30), 참고인 김○○ 진술녹취록(2009.2.11), 참고인 정○○ 진술녹취록(2009.2.11), 참고인 김○○ 진술
[13]
당시 박정희의 당번병인 박환영 씨의 증언에 따르면 부대에 비상이 걸리면 박정희도 철모에 완전군장을 하고 대열의 선두에 섰는데, 백인엽 군단장은 지휘봉으로 박정희의 철모를 탁탁 치면서 무슨 훈계 같은 걸 하곤 했고 박정희는 그런 대우를 받고도 꾹꾹 참고 일절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일과가 끝나면 과음하여 당번병이 업고 숙소로 돌아오는 일들이 잦았다고 한다. 게다가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박정희가 더 많다. 즉 백인엽은 빽으로 진급했다는 이야기인데 이 때문에 백선엽만 아니었으면 박정희가 분노해서 훗날 군사정변 일으킬 때 백인엽을 자기 손으로 혁명재판에 넘겨 사형 판결을 내린 후에 하루 빨리 집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백인엽 못지 않은 악행을 저지른데다, 백인엽보다 더 심하게 그를 하대하는 짓까지 저질렀으면서 정작 군 내부에 자기 세력을 만들지 못한
곽영주는
혁명재판에서 진짜로 사형을 언도받았고, 그 해에 골로 갔다.
[14]
곽영주는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 경력을 문제 삼아서 소장 진급을 막으려고 들었다. 즉,
곽영주는 박정희의 진급을 막는 것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매장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나마 백인엽의 형인 백선엽이 박정희를 보호해주면서 소장 진급에 성공했다. 그러자 곽영주는 박정희의 전 부인이었던
김호남과의 관계를 들먹이며, 그의 사생활이 문란했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이러니 박정희가 곽영주에게 악감정을 안 가질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정작,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 곽영주가 본인에게 했던 행동 그대로
청죽회에게 똑같이 행동했다. 이유인 즉
하나회에게 진급 길을 터 줘야 했는데 그걸 자꾸
청죽회가 훼방을 놓아서였다.
[15]
2012년에
청라국제도시로 이전하였다.
[16]
실제로 백선엽은 6세, 백인엽은 3세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17]
원래는 5공 초기에 인천시에 흡수될 예정이었으나, 백선엽 자신이 직접 관선이사가 되어 백인엽을 서류상으로만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조건으로 국공립화를 막았다.
[18]
그리고 지금 월간조선은 사학 비리 비판은 1도 없이
상지대 구 재단
김문기 이사장을
문민정부의 민정계 표적수사 희생양이라 미화할 정도로 극우화되었다(...)
[19]
관련내용
[20]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m/20200703/1/BBSMSTR_000000010026/view.do
[21]
당시 백선엽은 4성장군이고, 백인엽은 3성장군이었다. 특히 백인엽은 4.19 직전까지 포천에 주둔한 6군단장으로 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입할 위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