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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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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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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雖, ruby=수)][ruby(死, ruby=사)][ruby(不, ruby=불)][ruby(敗, ruby=패)] [ruby(靑, ruby=청)][ruby(星, ruby=성)][ruby(鬪, ruby=투)][ruby(魂, ruby=혼)]
<colbgcolor=#001870><colcolor=#fff> 창설일 1948년 4월 29일 (제4여단)
1948년 11월 20일 (제6여단)
1949년 5월 12일 (제6보병사단)
상징명칭 청성(靑星)부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5군단
경례구호 청성[1]
규모 사단
역할 최전방 중부전선 GOP 경계
사단장 소장 김진성 (육사 51기)
위치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리

1. 개요2. 역사3. 예하부대4. 출신인물
4.1. 사단장4.2. 장교/부사관4.3. 병
5. 특징
5.1. 근무환경5.2. 사단가5.3. 청성 영광의 10대 자랑
6. 사건 사고
6.1. 전쟁 범죄6.2. 가혹행위6.3. 화기관련 사건6.4. 양파 사건6.5. 코로나-19 군부대 집단 감염 사건6.6. 천재지변
7. 여담

[clearfix]

1. 개요

사단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사단을 둔다.
② 사단은 관할구역의 작전·훈련 및 군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대한민국 육군 지상작전사령부 제5군단 예하 보병사단으로 별칭은 청성(靑星)부대이다.

대부분의 부대는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에 위치하며 사단사령부를 비롯한 몇몇 부대는 경기도 포천시에 위치한다. 철원군 지역 휴전선 최전방 GOP GP 경계임무를 맡는 사단이다. 흔히들 부르는 육군 메이커 사단 초창기 멤버로, 한국전쟁 당시 최다 전투, 최다 적 사살의 무수한 전공을 세우고, 유일무이 38선 방어 성공, 국군과 UN군 중 가장 먼저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등 수많은 전쟁 성과를 쌓았고, 대통령부대표창도 받았다.

2. 역사

이하 창설일 등 내용은 국방부 발행(1977년 12월 30일) 서울신문사 인쇄 한국전쟁사(개정판) 제1권을 참조하였다.[2]

제6사단은 최초 '제4여단'으로 7연대, 8연대, 10연대로 구성되어 창설되었다. 제6여단으로 개칭(1948년 11월 21일) 이후 1949년 8월 20일에 10연대는 제6여단에서 제8사단의 창설 연대로 예속변경 되었고, 1950년 5월 1일에 19연대[9]가 예속변경되어 들어왔다. 제6사단으로 승격(1949년 5월 12일)한 이후 1950년 6월 20일에 8연대[10]는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변경되어 춘천으로 이동하였고, 같은 날 1950년 6월 20일에 2연대[11]가 제6사단으로 배치되어 들어왔다.[12] 그러므로 7연대가 제6사단 혈통의 적자(嫡子)격인 부대라고 하겠다.

한국군의 초창기 사단으로서 창설 당시의 구성과 편제를 현재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단이다. 6사단 승격 후의 연대 편제. 한국전쟁 당시 6사단 19연대 예하였던 16포병대대는 전후 7사단으로 예속전환 되었다. 2020년대 이후에도 6.25 이전의 연대(보병여단 또는 기계화보병여단) 단대호를 그대로 가진 부대는 정말로 6사단 뿐이다. 8사단도 6.25편제를 유지하였으나 기동사단으로 개편되면서 기존 보병연대들이 해체되거나 타 부대로 다 건너가버렸고, 수도, 1, 2, 3, 5, 7사단은 전쟁 중에 격전을 겪으며 예하 연대들이 해체되거나 맞바뀌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나머지 부대들은 전쟁 중 또는 휴전 이후 창설되었다.

제6사단은 한국전쟁(6·25)직전에 현재의 편제를 구성(제 2, 7, 19 연대)하여 중부지역 요충지인 춘천 정면을 담당하였고 방어를 맡은 지역의 전선은 모두 84㎞에 이르렀다. 원주에 사단 사령부(사단장 김종오 대령)를 설치했으며 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가 춘천에 지휘소를 두고 화천을, 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가 지휘소를 홍천에 두고 인제 전면을 담당하면서 전선을 지켰다. 19연대(연대장 민병권 중령)는 사단 예비연대로서 원주의 사단 사령부와 함께 교육훈련과 부대정비 중이었다. 한편 제6사단 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은 포병학교 OAC를 마치고 돌아온 후 즉각 3개 포대장을 입교시키고, 대대 장병으로부터 훈련이 너무 가혹하다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주야간 훈련을 강행하였는데 심지어는 군의관까지도 포사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였고, 개전 시에는 3개 포대장이 모두 교육에 파견되어 공석중이었음에도 결전에 있어서의 전투력 발휘에는 지장이 없었다.

당시 국군 6사단 주요 직책 지휘관

당시의 사단의 병력은 T/O의 93%(9,300명)이었고, 장비는 105mm 야포 15문(이중 2문은 고장으로 후송)과 57mm 대전차포 12문, 그리고 2.36인치 로켓포 276문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우측에는 제8사단(이정일 대령)과 좌측에는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과 각각 연계하고 있었다.[14]

제6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에 효과적으로 대비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국군 가운데 유일하게 전선을 사수해 적의 남침을 저지한 사단이다.

개전 이전부터 평소 교육훈련, 진지공사 등을 철저히 하여 전투에 대비하였으며, 귀순한 북한병(자주포병)으로 부터 북한이 조만간 전면 남침을 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정보를 확보하고 그외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정황을 포착하여 육군본부에 보고하지만 육군본부가 대수롭지 않다고 판단하자 6사단 지휘관들은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개전 직후 국군의 사단들이 연달아 패전하며 북한군의 공격에 패주를 거듭할 때도 6사단만은 김종오 사단장의 직권으로 사단의 외출, 외박을 제한하고 유사시를 대비한 덕분에[15] 춘천-홍천 전투에서 소양강과 말고개 등 험준한 천연 지형을 이용하여 3일간 북한군 제2군단의 2사단과 7사단, 106 전차연대의 공격을 저지하며, 오히려 역습을 노릴 정도로 훌륭하게 방어전에 성공하였다.

북한군은 15사단과 603모터찌크(싸이클)연대를 추가 배치하며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6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닷새 동안이나 발목을 잡혀있어야만 했다. 그 결과 북한군 2사단은 40%에 달하는 인력과 장비를 잃으며 전멸하였고[16]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 2사단장 이청송, 7사단장 전우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북한 7사단은 12사단으로 서수가 바뀌었다.[17] 6사단의 사상자는 407명이었고 인민군 제2군단의 사상자는 6,900여 명이었으며, 다수의 전차와 자주포가 격파되었다.

개전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자, 육군본부는 6사단에게 후퇴를 명령한다. 6사단은 제자리를 훌륭하게 지켜내며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유일하게 6사단이 방어에 성공했기 때문에, 후방 북한군 전력에 의해 포위당할 우려도 있었고, 전선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6사단도 후방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6사단의 초기 활약은 북한군의 전략에 큰 차질을 불러왔다. 북한군은 춘천 점령에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여 전 전선에서 남하가 지체되었으며 이로인해 단시간에 서울을 포위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고, 대한민국 국군은 김홍일 소장이 이끄는 시흥지구 전투사령부가 국군의 재편성을 통해 저지선을 확보할 시간 벌 수 있었다. 북한군은 국군의 재정비를 허용함으로서 UN군이 참전할 시간을 주고 말았다.

개전 당시 육군이 보유한 8개 사단 대부분이 한강 이북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후퇴하는 와중에도 제1보병사단, 제8보병사단과 함께 개전 이전 부대 건제를 유지한 부대로, 동락리 전투에서 7연대 2대대가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전멸(적 2,100여 명을 사살)시키며 명성을 떨쳤으며 국군 역사상 최초로 전 부대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 진천 전투에서 19연대가 수도사단과 공동 작전을 했으며, 동 연대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난 뒤 제8사단에 임시로 배속된 상태로 영천 전투에 참전하여 북한군 15사단이 재기불능이 될 정도의 타격을 가한 승전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6사단 본대 역시 같은 기간 신녕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8사단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며 적 9월 공세를 저지했다.
파일:attachment/6xx-2.jpg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병사[18]
(1950년 10월 26일 평북 초산 6사단 7연대)
그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북진을 시작하여 1950년 7월21일 7연대 3대대가 평남 개천에서 북한군 보급열차를 습격하여 열차 안에서 8대의 T-34-85를 노획하였고, 7월22일에는 7연대 1대대가 청천강가에서 김일성의 승용차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50년 10월 26일 한만국경에 위치한 초산에 도착해 국군과 연합군 중 최초로 압록강 물을 마시며 전쟁종결의 상징이 될 뻔했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최전선에 위치한 것이었고, 결국 중공군이 개입하자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한다. 그리고 1951년 4월 사창리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대규모 춘계(春季)공세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기도 했다.[19]
청성부대의 업적
가평에서 재편을 마친 6사단은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 공세에 맞선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 제63군의 3개 사단을 막아낸 뒤 UN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썬더볼트 작전')의 일익을 맡아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 일대에 포위당한 중공군 제60군 180사단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6사단은 곧이어 중공군 5월 공세 주공부대의 유일한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화천저수지의 구만리발전소를 공격했으나, 아쉽게도 중공군 주력은 구만리발전소 탈출로를 통해 이미 빠져나간 후였다(파로호 전투).

이후 한국전쟁 막바지의 금성돌출부 전투에서는 고전하기도 했다.
용문산 전투
제6사단의 주요 작전 및 전투경력

1950년
6월 25일∼6월 30일: 춘천-홍천 전투
7월 1일∼7월 4일: 횡성-원주(일부 이천)-충주로 철수
7월 5일∼7월 8일: 음성(동락리 및 무극리)지구에서 지연전 전개
7월 13일∼7월 15일: 문경(조령, 이화령)지구에서 지연전 전개
7월 16일∼8월 12일: 문경-점촌-안계(의성)-옥연동으로 철수
8월 12일∼8월 30일: 군위-조림산-신녕으로 철수
8월 30일∼9월 15일: 영천·신녕전투
9월 15일∼10월 3일: 조림산-의흥-함창-충주-원주-횡성-춘천으로 진격
10월 6일: 38도선상의 모진교 도하
10월 8일∼10월 20일: 화천-김화-금성-회양-신고산-원산-덕원-양덕-성천으로 진격
10월 20일: 성천에서 순천으로 진격, 적전에 낙하한 미 제187공수연대와 연결
10월 21일∼10월 25일: 순천-개천-희천-온정-고장-초산으로 진격
10월 26일: 국군 및 유엔군 중 최선봉 부대로서 10월 26일 한·만국경선 상의 초산 점령
10월 24일∼10월 29일: 중공군 개입으로 사단의 퇴로 차단, 부대 분산
10월 29일∼12월 12일: 초산-북창-운산-평양-상원-수안·동두천으로 철수
12월 14일∼12월 31일: 동두천 북방에서 38도선 방어

1951년
1월 1일∼1월 5일: 동두천-창동-광주-안성(죽산)으로 철수
2월 14일∼4월 6일: 죽산-여주-마석우리-가평(캔사스 선)으로 진격
4월 20일∼4월 25일: 사창리 전투
5월 17일∼5월 23일: 용문산 전투
5월 24일∼5월 28일: 용문산-가평-춘천-화천(캔사스 선)으로 진격
6월 7일∼6월 13일: 화천-백암산(어민선)으로 진격
6월 13일∼8월 30일: 수리봉-재안산에서 어민 선 방어
8월 30일∼11월 18일: 백암산-동대리-여문리(금성천 노메드 선)-949고지(미조리 선)로 진격
1월 9일: 용호동-949고지에서 미조리 선 방어
1월 9일: 미 제9군단에서 육본 직할로 배속 전환, 작전지역을 제3사단에 인계
1월 12일∼3월 20일: 양구에서 12주간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 실시
3월 23일∼3월 29일: 교암산-봉화산 지역으로 이동, 미 제40사단과 교대
3월 30일∼

1953년
∼3월 4일: 575고지, A·B고지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전개
3월 5일∼7월 9일: 금성 돌출부 전투 백암산 전투(8사단 및 5사단에 배속되어 투입된 7연대만 해당)
7월 10일∼7월 14일: 중공군의 최후 공세를 맞아 교암산으로부터 금성천 남안(삼현)으로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철수
7월 15일: 제11사단이 사단 진지를 초월하여 반격한 후 군단예비로 전환
파일:6사단 표창장.jpg
대통령 표창
자주국방 네트워크 신인균 대표는 2013년 7월 모 종편의 정전 60주년 기념특집방송에서 한국전쟁 중 가장 잘 싸운 국군 부대로 6사단 청성부대를 꼽았다. (신인균씨의 신뢰도는 사실 밀덕들 사이에 낮다.)

1위-육군 제6사단
2위-육군 제1사단(전진부대. 백선엽 장군 지휘. 다부동 전투, 평양 탈환전 등)
3위-해병대(진동리 전투, 통영 상륙작전, 인천 상륙 작전, 도솔산 전투 등)
4위-육군 제3사단(백골부대. 38선 첫 돌파, 원산 최초 입성, 현리 전투 등)
5위-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원산 최초 입성)
파일:6사단 - 6.25 전쟁 때 가장 잘 싸운 부대.jpg
또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한국전쟁 초기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국군 부대로 육군의 6사단, 8사단, 1사단을 꼽은 바 있다.

6.25전쟁 후반부인 설마리전투에서 6사단의 졸전을 경험하고 미해병대에서는 'goddam BlueStar'이라고 야유를 보내는 일도 있었다.

현재는 제5군단 예하 사단으로 중부전선 철원 지역에서 GOP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제2땅굴을 발견했다. 좌측에 제5보병사단, 우측에 제3보병사단, 아래에는 국군 최초의 기갑여단 제1기갑여단과 국군 최강급 화력을 자랑하는 제5포병여단이 있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메이커 사단이다.

현재 6사단이 2018년 9월부터 19연대를 시작으로 8사단이 주둔하던 포천으로 이전하기 시작하였고 2024년까지 6사단 전 부대가 포천 지역으로 이전한다고 한다. 6사단이 방어하던 GOP 지역은 6군단 해체 후 5군단으로 편입되는 5사단과 현 5군단 예하 3사단이 1개 여단씩 주둔[20]하여 나누어 맡게 될 것이며, 앞으로는 6사단이 포천에서 5군단의 예비사단으로서 철원의 5사단과 3사단의 뒤를 맡게 된다.

3. 예하부대

제6보병사단 예하부대
제2보병여단 제7보병여단 제19보병여단
포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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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수송대대 제22전차대대 정보통신대대 군사경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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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 신병교육대는 제6보병사단/신병교육대 참고.

2020년 12월 1일, 국방개혁 2.0 기본계획에 의거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부대 규모가 격상되었다.[21]

3.1. 사단 직할대

3.2. 제2보병여단 용문산[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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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3. 제7보병여단 초산[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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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19보병여단 육탄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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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포병여단 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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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신병교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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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신인물

4.1. 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6><bgcolor=#001870> 역대 제6보병사단장 ||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34] 채병덕 예) 중장 군사영어학교 1기 2대 육군참모총장
2대[35] 유재흥 예) 중장 군사영어학교 1기 3대 제1야전군사령관, 3대 합동참모의장 19대 국방부장관
초대[36] 김백일 예) 중장 군사영어학교 1기 제3보병사단
2대[37] 유재흥 예) 중장 군사영어학교 1기 3대 제1야전군사령관, 3대 합동참모의장 19대 국방부장관
3대[38] 신상철 예) 소장 일본육사 58기 6대 공군사관학교장 10대 국회의원
4대[39] 김종오 예) 대장 군사영어학교 1기 6,7,8대 합동참모의장, 15대 육군참모총장
5대[40] 장도영 예) 중장 군사영어학교 1기 14대 육군참모총장, 3대 제2작전사령관 12대 국방부장관
6대 백인엽 예) 중장 군사영어학교 1기 2대 육군 특무부대장, 2대 6군단장
7대 김점곤 예) 소장 육사 1기 4대 합동참모차장
10대 이원장 예) 소장 육사 1기 제1군단 참모장, 합동참모본부 제2부장, 육군본부 인사국장 4,7대 국회의원
14대[41] 윤택중 예) 소장 불명
15대[42] 김재규 예) 중장 육사 2기 16대 육군보안사령관 8대 중앙정보부장
16대[43] 박현식 예) 중장 육사 6기 19대 9사단장, 11대 국방대학원장
17대[44] 김종수 예) 소장 불명
18대[45] 이건영 예) 중장 육사 7기 5군단장, 4대 제3야전군사령관 14대 국회의원
19대[46] 김종호 예) 소장 육사 8기 국방부 군수국장 16대 건설부장관
20대[47] 전성각 예) 중장 육사 8기 6대 수도경비사령관, 4대 동해안경비사령관, 22대 3군단장
21대[48] 정명환 예) 소장 육사 8기 2군수지원사령관
22대[49] 윤성중 예) 소장 육사 10기
23대 이상연 예) 소장 불명
24대 오자복 예) 대장 갑종 3기 21대 합동참모의장, 21대 제2작전사령관 26대 국방부장관
25대[50] 한철수 예) 대장 육사 12기 5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26대[51] 민경배 예) 대장 육사 14기 23대 제2작전사령관 14대 국가보훈처장
27대[52] 권영해 예) 소장 육사 15기 올림픽지원사령관 21대 국가안전기획부장
28대[53] 이해룡 예) 소장 육사 17기
29대 윤용남 예) 대장 육사 19기 27대 합동참모의장, 31대 육군참모총장
31대 한승의 예) 중장 육사 22기 19대 수도방위사령관, 40대 육군사관학교장
32대[54] 박봉식 예) 중장 육사 24기 32대 3군단장
33대[55] 남재준 예) 대장 육사 25기 36대 육군참모총장, 15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31대 국가정보원장
34대[56] 김장수 예) 대장 육사 27기 37대 육군참모총장, 17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초대 국가안보실장
35대 김학연 예) 소장 육사 28기
36대 최광섭 예) 소장 육사 29기 前 국방부 군수관리관, 前국방부 자원관리본부장
37대 허평환 예) 중장 육사 30기 육군훈련소장, 37대 국군기무사령관
38대[57] 임관빈 예) 중장 육사 32기 22대 수도군단장, 50대 육군참모차장
39대 윤영범 예) 소장 육사 33기 국방비서관, 4대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장
40대 조병오 예) 소장 학군 16기[58] 21대 육군학생군사학교장
41대 양충식 예) 소장 육사 36기
42대 임호영 예) 대장 육사 38기 26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43대 이재형 예) 소장 학군 21기[59] 44대 육군포병학교장, 前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44대 이국재 예) 소장 육사 42기 육군본부 감찰실장, 36대 육군종합행정학교장
45대 이진형 예) 소장 육사 44기 국방부 정책기획관
46대 심진선 예) 소장 육사 46기 수도군단 부군단장
47대 박정택 중장 학군 30기[60] 수도군단장
48대 김화종 소장 육사 50기 지상작전사령부 작전참모부장
49대 김진성 소장 육사 51기 사단장

4.2. 장교/부사관

장교
성명 계급 내역
고시복 예)준장 육사 2기,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 6.25 전쟁 당시 참모장.
조달진 소위 (1922.11∼2008.10) 전쟁 발발 사흘째인 6월 28일 강원도 홍천지구 말고개 전투에 참전해 북한군 자주포 10문을 파괴하는 전공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25일 경북 상주군 유곡전투에서 특공대 7명과 함께 4대의 적 전차를 파괴하는 공을 세워 '불사조', '탱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1950년 을지무공훈장, 1951년 화랑무공훈장을 각각 받았다. 2011년에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고, 한국군 최초로 미국 동성무공훈장(Bronze Star)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2020년 '6월의 호국인물'
김병주 예)대장 육사 40기, 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대령 시절 사단 포병연대장 역임.
소영민 예)중장 학사 11기, 전 육군특수전사령관. 대령 시절 19연대장 역임.
강신철 대장 육사 46기, 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위 시절 2연대 1대대 1소대장 역임.
엄용진 예)중장 육사 46기, 전 육군군수사령관. 대령 시절 부사단장 역임.
고태남 예)소장 육사 46기, 전 육군인사사령관. 대령 시절 7연대장 역임.
양태봉 소장 육사 47기, 현 육군포병학교장. 중령 시절 사단 포병연대 예하 27포병대대장과 사단 작전참모를 지내고 대령시절 사단 포병연대장 역임.
김봉수 중장 육사 47기, 현 대한민국 합동참모차장. 중령 시절 2연대 3대대장 역임. #
박성제 소장 학사 17기, 현 육군교육사령부 교육훈련부장. 중령 시절 7연대 2대대장 역임.
김동수 소장 육사 48기, 현 제3군단 부군단장. 대위 시절 2연대에서 중대장 역임.
권대원 중장 학군 30기, 현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 중령 시절 7연대 3대대장 역임.
김흥준 소장 육사 49기, 현 육군본부 정책실장. 대령 시절 7연대장 역임.
문병삼 소장 육사 49기, 현 제2작전사령부 참모장. 중령 시절 19연대 1대대장 역임.
박진영 소장 육사 49기, 현 합동참모본부 정보부장. 대령 시절 작전부사단장 역임.
이상렬 소장 학군 31기, 현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장. 대령 시절 포병연대장 역임.
윤봉희 소장 육사 50기, 현 국방부 정책기획관. 대위 시절 19연대 3대대 9중대장 역임.
한기성 소장 학군 33기, 현 제25보병사단장. 대령 시절 2연대장과 사단 참모장 역임.
강필수 원사 대한민국 육군주임원사. 원사 시절 7연대 연대주임원사와 6사단 사단주임원사 역임.

4.3.

사병
성명 내역
강승윤 WINNER 멤버
2023년 6월 20일 입대, 제19보병여단에서 복무 중.
공유 배우
2008년 1월 14일 토우중대에서 복무하다가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에 전출되었다. 2009년 12월 8일 병장 만기전역.
권영재 前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Helper"
김석훈 한화 이글스 포수
김성모 만화가
같은 부대원들에게 그려 준 추억록에 6사단 27포병대대가 언급되어 있다.
김승리 대성마이맥의 국어 강사
2연대 통신병 출신.
김태현 딕펑스의 보컬
군악대에서 복무.
김정훈 가수
2009년 4월 28일 입대. 2연대 2대대 6중대 철원 GOP에서 6개월간 60mm 박격포 부포수로 복무하였고, 군의 추천으로 면접을 본 뒤 2009년 11월부터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에서 복무. 2011년 2월 28일 병장 만기전역.
김한근 사업가
사령부 부관참모부에서 복무하였다.
노우진 코미디언
7연대 7중대에서 복무했다.
박남현 탤런트
수색대대에서 복무.
박준 시인[61]
박창수 목포시의회 의원
1992년 8월 18일 입대, 야전포병, 1994년 10월 27일 병장 만기전역.
배영빈 야구선수
빈지노 래퍼
제19보병연대에서 복무
설영호 BJ
수색대대에서 복무.
손근호 울산광역시의회 의원
2000년 2월 7일 입대, 기계공작병, 2002년 4월 16일 병장 만기전역.
송광원 배우
송래퍼 래퍼
2여단 3대대에서 중대보급병으로 복무.
싸이 가수
토우중대에서 복무
아날로그 소년 가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복무하였다.
에투샤 아프리카tv, 유튜브 포켓몬 크리에이터
27포병대대에서 복무.[62]
옹성우 가수
군악대에서 복무 중.
용정원 법명 범정스님
경계병으로 복무했다고 한다.[63]
요리왕비룡 유튜버
자주 입고 나오는 야전상의에 6사단 마크, 민정경찰 마크가 부착되어 있다. GP 취사병으로 복무했다는 본인의 증언이 있다.[64]
윤다훈 배우
1984년부터 2년간 수색대대에서 복무.[65]
윤문식 배우
1965년 복무.[66]
이승윤 개그맨
의무근무대에서 복무.
장민호 트로트 가수
장동우 인피니트 멤버
제88포병대대에서 복무했다.
최하영 TRCNG 멤버이자 프로듀서
코드 쿤스트 프로듀서
하성운 가수
2022년 10월 24일 입대, 2024년 4월 23일 병장 만기전역.
한창화 경상북도의회 의원
1974년 6월 7일 입대, 통신병(유선가설병)으로 복무, 1977년 3월 29일 병장 만기전역.
항제 트위치 카트라이더 스트리머
본부대 참모소대 재정부 계약계원으로 복무했다.
G.Soul 가수
J.Seph 가수
2020년 10월 5일 입대, 제22보병사단 신병교육대에서 기초군사훈련 수료 후 제7보병여단 제3대대 개천돌진 GOP 본부중대 수송부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하였다. 2022년 4월 4일 병장 만기전역.

5. 특징

한국군 건군 모체 부대[67]이며 한국전쟁 이전에 창설된 사단 중에 유일하게 현재까지도 초창기의 구성 및 편성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사단이다.[68] 또한 한국전쟁 중 사창리 전투 외에는 패한 적이 없으며[69] 한국전쟁 중 가장 화려한 전과를 자랑하는 부대이다.

한국전쟁 개전 후, 가장 먼저 승전보를 전한 부대이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 북한군의 대대적인 기습 공세에 다른 사단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후방으로 후퇴할 때, 유일하게 6사단만은 춘천 전선 방어에 성공하며 3일간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였다. 이후 북한군에게 서울이 함락되고서야 명령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전술상 후퇴를 하게 되지만, 그 뒤 무극리 전투( 동락리 전투)에서는 1개 대대 병력으로 북한군 1개 연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리며 전 부대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는 기록을 세웠고 용문산 전투에서는 1개 연대가 중공군의 군단급 3개 사단을 괴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1950년 10월 26일에 국군과 연합군 중 최초로 압록강변 초산까지 진격에 성공하여 압록강 물을 떠다 이승만 前대통령에게 헌수하였다.

한국전쟁에서 국군 부대 중 최다 전투(154회)와 최다 적 사살(92,669명)의 기록을 세웠으며, 한국군 최초, 최다 대통령 부대표창(17회 2019. 10)을 받았다.

부대마크는 6사단을 상징하는 파란 육망성으로, 현재는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중부전선의 심장부 철원에 주둔하고 있다.
파일:용문산전투 결사철모.png
용문산전투 결사철모
경례구호
청성(靑星), 과거에는 '필승'
사단구호
雖死不敗(수사불패) 靑星鬪魂(청성투혼)
청성혼
하나, 우리는 천하에 제일 가는 청성의 용사다!
하나, 우리는 압록강 물을 마신 청성의 용사다!
하나, 우리는 싸우면 필승 하는 청성의 용사다!
하나, 우리는 조국을 수호 하는 청성의 용사다!
용문산부대 구호 수사불패 용문투혼
청포부대 구호 구국의 청성포 초탄명중 일격격멸 준비 쏴!
GOP대대 구호 잊지말자 청성투혼 다시쓰자 결사철모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승격되었다.

5.1. 근무환경

6사단은 2여단과 7여단이 GOP를 맡고 있는데, 다른 사단과는 다르게 한 대대가 고정적으로 GOP 경계작전을 수행하고 있다.[70] 만약 FEBA로 갈 줄 알았는데 GOP로 갑자기 차출이라도 되었다면 멘탈붕괴할지도 모른다. 군인밖에 없는 강원도에서 그것도 민간인은 들어가지도 못하는 철책선 북쪽의 국방색과 갈색과 녹색만이 있는 세상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참 쉬울지도 모른다. 2여단은 완벽한 평야지대인 반면 7여단은 평야가 있긴 하지만 GOP 하면 생각하는 전형적인 급경사가 존재한다.

그나마 후방인 사단 본부대, 포병여단, 2여단, 19여단이라고 해서 한겨울의 칼바람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말도록 하자. 초소에 바람을 막아줄 지형물이나 건물이 없기 때문에 바람이 더럽게 강하다.[71] 실제 기온이 영하 20~30도면 체감온도는 영하 45도[72]까지도 내려간다. 정말 살을 에는 추위가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다. 혹한의 대명사로 통하는 철원 지역답게 무지막지하게 춥다. 귀가 얼음장처럼 굳어 깨지는 듯한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굳이 GOP가 아니어도 사단 예하 어느 부대에 배치받게 되건 변함이 없다. 평야는 칼바람 때문에, 산이라면 기온 자체가 낮아서 일기예보에 나오는 최저기온에서 대충 5도 정도 빼면 된다. 1월 중에는 웬만해선 최저 기온이 영하 30도에서 왔다 갔다 한다. 더불어 5월 초에 눈 내리는 진풍경을 볼 수 도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렇다고 여름에는 시원할 거란 생각은 오산이다. 타 신교대에서 이 곳으로 전입 온 신병들이 주로하는 착각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겠지'가 있는데, 산골이 많은 경기도 북부지역이나 강원도 전방지역은 심할 때는 35도를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철원 시내 주변에서 철원 쿨포크 ±66이라고 써있는 홍보 문구를 가끔 볼 수 있는데, 이건 연교차가 66도라는 의미이다. 혹한기와 혹서기의 체감 연교차는 거진 80도에 육박한다. 이 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철원은 여름 - 한여름 - 겨울 - 빙하기의 4계절이라는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이게 마냥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준이 아니다.

6사단 장병들이 외출 및 외박을 나와서 놀 곳이라면 철원의 신시가지이자 실질적인 경제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동송읍이다.[73] 전방에 위치한 도시들이 다 그렇듯이 동송읍도 전형적인 군인도시이다. 휴가나 외박을 얻어 동송 시내에서 군복을 입고 다니다 보면 어디든지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경례를 할 상황이 많다. 군장점부터 식당에 이르기까지 예외란 없다.
늦은 오후까지도 업무를 보느라 옆에 행정병을 데리고 왔다갔다 하는 중령급 이상의 고급 장교들도 심심찮게 보이는[74] 이 때문에 동송읍 시내 곳곳에서 우렁찬 경례가 울려퍼지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그리고 휴가 출발자가 버스를 타는 이른 아침이나 복귀자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초저녁 쯤이면 큰길가에 군용차가 한 대 지나갈 때마다 수십 명의 장병들이 지나가는 방향 따라 도미노식으로 경례를 촤자작! 하고 또다시 촤자작! 내리는 진풍경을 구경할 수도 있다! 직접 보면 가히 장관이다. 동송 모텔값이 너무 비싸서(7만 원) 외박 나오면 차라리 펜션에 간다. 피씨방은 평일에만 회원 가입이 가능해서 대부분 주말에만 출타가 가능한 군인들은 그저 호갱이 됐다.

2018년 12월 3일 45대 사단장인 이진형 소장(육사 44기)이 떠나고 46대 사단장인 심진선 소장(육사 46기)이 취임하면서 이임 사단장인 이진형 소장의 전원 동기제[75]가 19년 1월 1일부터 폐지되고 6개월 동기제로 바뀌게 되는데, 이전 입대자들은 전원 동기제가 그대로 적용되고, 19년 1월 입대자(19년 1월 군번)들부터 6개월 동기제가 적용되고 있다. 전군동기제 시기 각종 훈련에서 최하점을 받았다는 예비역들의 증언이 인터넷커뮤니티에 돌기도 했다..

5.2. 사단가

(1절)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맹호의 기세로 싸우고 이겨
새 세기 선두 이름을 떨치며 강철로 뭉쳐진 6사단이다

(2절)
내 겨레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악랄한 오랑캐 휘몰아치며
초산 용문산 을 소탕한 전공에 빛나는 6사단이다

(3절)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내 조국 삼천만 내 겨레 방패가 되어
생명을 바쳐서 오늘도 싸우는 백전백승의 6사단이다

(후렴)
승리의 청성기를 높이 날리며 부르자 우렁차게 우리의 개가
물과 불을 가리랴 우리는 용감히 싸운다
6사단! 6사단! 대한의 6사단

파일:제6보병사단 부대마크.svg

5.3. 청성 영광의 10대 자랑

모든 육군의 부대들이 고유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6사단도 "청성 영광의 10대 자랑"이라는 부대의 10가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다.

하단부에 기입되어있는 내용은 10대 자랑에 정식으로 등록된 것이다.
<rowcolor=#fff> No. 10대 자랑 비고
#1 창군 이전에 창설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부대 제6보병사단은 1948년 4월 29일 제4여단으로 창설되었으며, 이는 대한민국 육군이 정식으로 발족한 1948년 9월 5일보다 이전에 창설된 것이다. 이후 11월 20일 제6여단으로 개칭, 1949년 5월 12일 제6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다. 보병연대 기준으로 창설 당시의 편성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단이기도 하다.[76]
#2 유일하게 38선 방어에 성공한 부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춘천-홍천 전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최초로 적 전차를 육탄공격으로 파괴한 부대 6.25전쟁 당시 춘천-홍천 전투중 춘천 옥산포에서는 심일 소위와 부사관의 육탄공격으로 적 자주포 3문을 파괴하였고, 홍천 말고개에서는 조달진 일병을 비롯한 육탄 11용사가
육탄공격으로 적 전차 10대를 파괴하였다.[77]
#4 최초로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은 부대 1950년 7월, 7연대가 북한군 15사단을 상대로 음성 무극리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는 도중, 7월 7일에 국민학교 교사의 제보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7연대 2대대가 동락리국민학교에 모여있던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이 일로 부대는 국군 창설 최초로 연대 전 장병이 1계급씩 특진하게 되었고, 대통령 부대표창 1호를 수여받았다. 이후 2대대는
이 전공으로 음성무극전승부대로 명명하게 된다.[78]
#5 국군과 UN군 중 가장 먼저 압록강까지 진격한 부대 1950년 10월 26일, 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을 탈환하여 전군 최초로 한만 국경선에 도달한 부대가 되었다. 부대는 이날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헌수하였다.[79] [80]
#6 중공군 3개 사단을 괴멸시킨 사주방어 신화창조 부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용문산 전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6.25 전쟁 최다 전투, 최다 적 사살의 전공을 세운 부대 총 154회의 전투에 참가하여 92,669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8 초병의 철통경계로 제2 땅굴을 발견한 부대 1973년 11월 20일 새벽, GOP 경계 중이던 이기태 상병과 김효섭 일병이 미세한 진동과 원인 미상의 폭음을 듣고 상부에 보고한 것을 처음으로 이후 지속적인 지하의 폭음이 보고되자 땅굴 탐지 전담반을 편성하여 시추작업을 벌인 끝에
1975년 3월 19일에 제2땅굴을 발견하였다.
#9 전략적 요충지 철원축선을 방어하며,
적 침투를 한번도 허용하지 않은 부대
1966년 철원 축선 담당 이래로 지금까지
단 한번의 적 침투를 허용하지 않았다.
#10 늘 푸른 병영운동으로 새로운 군대문화를 선도하는 부대 늘 푸른 병영 운동을 통하여 상호 존중과 배려, 자율과 창의의 정신으로 전우애가 넘치고, 미래를 꿈꾸며 준비하는
21세기형 병영문화를 선도해 나가는 부대.[81]

6. 사건 사고

6.1. 전쟁 범죄

6사단은 국군 창설 당시부터 존재하였던 가장 오래된 사단들 중 하나이며, 한국전쟁 개전 초반에 국군에 의해 저질러졌던 여러 학살에도 깊이 관여되어 있다. 강원도 횡성, 경기도 여주와 이천, 충북 음성, 청원, 괴산, 충주, 제천, 경북 영주와 상주 등 6사단이 퇴각한 경로상의 곳곳에서 학살이 벌어졌는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학살 조사단 일원이었던 신기철은 저서 《전쟁범죄》에서 이 지역들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부분 6사단 헌병대가 관여되어 있다고 파악한다. 특히 충북 지역에서 벌어진 보도연맹원 학살은 경찰이 관여한 비중이 적으며 대부분 국군, 그 중에서도 6사단과 2사단이 저질렀다. 당시 사단장은 김종오 대장(당시 대령)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9년 상반기 보고서에 수록된 6사단 헌병대 상사 김만식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개전 이틀 후인 6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헌병사령부를 통해 6사단 헌병대에 하달한 명령에 따라 벌어진 일이었다.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이나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사살하라"는 것이었다. 김만식 상사 역시 이 명령을 받은 바로 다음날(6월 28일)부터 학살에 가담했다.

6.2. 가혹행위

2001년에는 사단장 여군 성추행하여 불명예 전역을 당하기도 했다.

2008년 병사가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는 일이 있었다.

2014년, 6사단 포병연대 예하 포병대대 의무중대에서 임모 상병이 구타 및 성추행 등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정신병으로 의병 전역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89] 그러나 조사 과정과 결과가 매우 어이 없는 것이, 지속적으로 심한 구타를 당했는데 땅콩 몇 대 때린 것으로 취급하거나, 가해자들을 불기소처분해서 빠져나가게 했다. 28사단 의무대 폭행치사 사건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인데 뒤늦게 알려지면서 파장이 컸다. 사건 피해자는 의병전역 후, 현재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있다.[90]

2014년 8월 다른 포병대대에서 복무 중인 5선 국회의원 출신 현직 광역 자치단체장 남경필 도지사의 아들 남주성(92년생)이 후임병을 폭행, 성추행하여 수사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더구나 자신이 한 행동이 가족같아서 그랬다고 말해 놀림감이 되었다. 하지만 그 높으신 분의 빽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으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옘병 # 선거 전에 알려졌다면, 남경필 도지사 당선은 실패했을 정도로 파장이 컸음에도 쉬쉬한 것은 육군이 정권으로부터 비호를 받은 것이 아닌가란 의혹이 상당하다.

2016년 2월 7일 7연대 소속 GP에서 박모 일병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7연대의 수색중대, 특히 박일병이 속한 소대는 그중 극악의 부조리를 행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구타와 폭언욕설로 인한 선택이라고 한다. 해당 소대는 해체되고 다른 부대에서 새로운 인원들을 차출하여 편성하게 되었다. 그해 11월 24일 군인권센터에 의해 6사단 7연대 GP에서 구타 및 가혹행위로 인해 박모 일병에 대한 긴급기자회견이 열렸다.[91]

2022년 4월 7일 군인권센터에서 5군단 파견 전방 OP지역에서 식고문과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6.3. 화기관련 사건

1968년 휴가를 받은 이 부대의 하사 분대장이 경상북도 안동에 수류탄을 던져 살상한 사건이 있었다.

2002년 모 대대 중화기 중대 행정보급관이 총기( K1)를 영외 반출 후 포천 농협 총기 강도사건을 벌인 적이 있다.[92]

2008년 GP에서 수류탄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다. 관련 기사

2017년 9월 26일 강원도 철원군에 주둔한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 19연대 1대대 소속 이 모 일병(당시 만 22세)이 인근 사격장으로부터 날아온 실탄을 목 경동맥에 직격으로 맞고 사망한 사건이다. 제6보병사단 총기 사망 사건 참조.

6.4. 양파 사건

2020년 1월말 경 민간요법이라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예방을 위해 부대에 생양파를 잘라 실내에 비치하라는 지침을 내린 적이 있다. 관련 기사(이는 코로나가 아니라 당시 유행한 독감때문이다) 이러고서는 정작 싸지방, 헬스장, 피시방은 전부 금지했으나 아침 점호, 사단 훈련 그리고 민간구역에서의 40km 행군일정은 그대로라고 한다(이 또한 사단 지시는 아님).

6.5. 코로나-19 군부대 집단 감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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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천재지변

1996년 7월 26일 새벽4시25분께 강원도 철원읍 동송읍 대마리 소재 청송부대에서 호우로 인한 산사태가 발생, 내무반 2개동을 덮쳐 잠자던 군인 20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당시 내무반에는 모두 47명이 있었는데 내무반 뒤쪽에 있던 야산이 무너져 조립식 막사를 덮쳐 이중 19명이 긴급대피하거나 구조됐으나 20명은 사망하고 나머지 8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기사

7. 여담



[1] 과거엔 필승이였으나, 2017년 4월 1일부로 부대의 상징명칭을 따라 청성으로 바꼈다. [2] 그 외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육군 / 7연대 창설 1기 서근석 중령의 회고 [3] 1946년 11월에는 제9연대 증설을 비롯하여 1948년 5월에 이르기까지 제10·11·12·13·14·15연대 및 독립기갑연대 등 8개연대를 증설하여 모두 16개 연대로 증편되었다. [4] 각 연대의 창설일 - 1연대(1.15) 5연대(1.19) 7연대(2.7) 4연대(2.15) 6연대(2.18) 3연대(2.26) 2연대(2.28) 8연대(4.1) 9연대(11.16) [5] 현재 충북대학교/캠퍼스의 일부다. 이 곳에 7연대 창설지 표지석이 설치되어있다. 7연대 최초의 군번은 170001이었다. [6] 연대 수가 늘어남에 따라 여단(旅團)창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47년 12월 1일 3개 연대를 1개 여단으로 한 제1·2·3여단을 창설하고 1948년 4월 29일 제4·5여단을 창설하였다. [7] 충주 이마트 앞에 6사단 창설 6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제6보병사단 창설지 표지석(2008년 6월 14일) 파일:제6보병사단창설지_기념비.png [8] 1948년 11월에 다시 4개 연대를 증편하는 한편, 1949년 1월에 제7여단을 창설하였고, 그 해 6월까지 3개 연대를 추가 편성하여 총 6개 여단에 20개 연대로 확장하였으며, 5월 12일에는 6개 여단(1·2·3·5·6·7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키고 제8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후에 수도사단으로 개칭)를 창설함으로써 남조선경비대로 발족한 이후 3년 5개월 만에 8개 사단(22개 연대)의 정규육군으로 성장하였다. [9] 제5사단 소속에서 예속변경, 남원지구 공비 격멸전 이후 배치 [10] 1949년 5월 4일에는 8연대의 2개 대대(대대장 강태무, 표무원)가 월북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대대장이었던 강태무와 표무원이 훈련을 명분으로 휘하 대대원들을 속이고 강원도 현리 부근에서 월북했으나, 북한군에게 투항하기 전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챈 중대장과 부대원이 저항하여 그 중 3개 중대가 포위망을 뚫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8연대는 현재 7사단 예속되어 신조차도 버릴 것 같은 땅에서 주둔하고 있다. [11] 제2사단 예하에서 예속변경, 옹진 은파산 전투(1949년 8월 13일 ~ 11월15일)를 끝마치고 서울로 복귀후 6월 18일부터 6월 23일까지 홍천으로 이동하여 8연대와 교대후 즉시 전선에 투입되었다. [12] 이런 까닭으로 2연대와 19연대는 당면한 전투의 지형은 고사하고 짐도 풀지 못한채 북한군의 남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13]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 당시 가해자 대대장과 피해자 사단장 사이에 끼어있는 연대장으로 복무중에 저 대형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지급받았던 급여를 깡그리 몰수당한 채 군대에서 쫓겨났다. [14] 1950년 한국 전쟁 개전 당시 육군의 전투부대는 8개 사단 67,900여 명으로서 지원 및 특파부대를 포함하여 96,000여 명이었다. 전쟁 기간 중에 제1·2·3군단과 10개 사단을 추가로 창설하여 1953년 7월 휴전 때에는 보병 18개사단으로서 병력은 55만으로 증강되었다. [15]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개전 직전 한 6사단 병사가 탈영하여 월북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증언의 출처는 당시 6사단 헌병대 상사 김만식. [16] 군사적 개념에서 20% 이상의 손실이 나면 편제를 유지할 수 없고 전투 속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전멸이라고 취급한다. 현대적인 사단은 전투 병력만으로 구성되지 않고 공병, 군수, 의무 등의 지원 부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사단의 편제를 보면 보병 3개 연대를 빼고 25%가량이 지원 부대이며, 연대도 비슷한 비율로 지원 부대를 갖췄다면 실 전투 병력은 60%를 넘지 못한다. 공세 상황에서 사단의 40%가 갈려나갔다면 전투 병력의 대부분이 갈려나갔다고 봐도 크게 과언이 아니다. 즉, 그야말로 개박살이 난 것. [17] 특히, 국군 정훈 내용에 따르면 북한군 2사단은 '6.25 직전 북한군 최후 전투사열' 당시 최우수부대 평가를 받을 정도의 정예였다고 하니 더더욱 6사단의 우월함이 돋보인다. 김광협 대신 2군단장으로 부임한 인물은 연안파의 거두인 무정이다. [18] 사진 속 주인공은 신찬균 예비역 대령(1931년 ~ ). 서울 선린상업학교 재학 시절 학도병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북진 6사단 7연대 선봉에 서서 압록강에 다다랐고, 당시 지휘관이던 임부택 대령에게 보고한 뒤 흐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전설의 인물이다. 이 일로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는 영광을 안았고, 6개월간의 광주보병학교 훈련 뒤 11사단 20연대 12중대 소대장으로 임관한 그는 베트남 전쟁까지 참전한 후 1979년 10월31일 30사단 90연대장을 끝으로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다. 2021년 현재도 매우 정정하시다. [19] 중공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신병들이 대부분인 2연대와 19연대를 차례대로 휩쓸자 6사단은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만다. 게다가 2연대의 방어진지를 탈환하려던 7연대마저도 실패하게 되자 수시간 만에 6사단의 방어선이 완전히 뚫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미 해병 1사단과 동측의 미 24사단 사이에 대규모의 돌파구가 형성되고 말았고, 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패주하는 병력 일부를 수습하여 화악산과 석용산 일대에 방어선을 다시 형성하고자 했으나 이조차도 실패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엔군은 군단 예비대였던 영국군 제27여단에게 6사단을 엄호하고 중공군의 남진을 막게 함으로써 중부전선 붕괴를 막았다. [20] 각각 예비대로 지정되어 있는 5사단 35여단과 3사단 23여단이 담당 할 것으로 보인다. [21] 1960년대에 이미 사단 예하의 연대를 여단으로 개편한 미군 등 선진 군대의 흐름을 수용하고 보병연대의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2012년에 ‘국방개혁 2012~2030’을 기획하면서 정책문서에 공식적으로 반영됐다. 개편되는 보병여단은 부대구조와 전력구조 측면에서 이전의 연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수준의 도약적 발전을 이뤘다. 보병·동원사단에 편성된 보병여단은 정찰소대 등으로 강화된 3개 보병대대와 더불어 보강된 참모부와 직할부대가 편성됐다. 지휘통제·정보·화력·작전지속지원 기능이 대폭 강화돼 독립작전 수행이 가능할 수준으로 그 능력이 향상된다. 지역방위사단은 통합방위작전과 해안경계작전 및 예비군훈련을 병행해야 했던 예하 대대가 통합방위작전에 더욱 전념할 수 있도록 여단 직할부대로 해안경계작전을 전담하는 부대와 예비군훈련을 전담하는 부대가 편성된다. [22] 막사 자체는 2000년대 중후반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23] 직할대대 중 가장 전방에 위치 [24] 2024년 기준. [25] 중대장(대위), 소대장(중위), 행정보급관(상사). [26] 용문산 전투에서 맹활약을 해 붙여진 이름. [27] 2018년 11월에 19연대 주둔지 이전한 후에는 원래 19연대본부가 쓰던 주둔지로 이전. [28] 이름의 유래는 초산 전투로 이때 압록강까지 진출해 강변의 물을 떠 대통령에게 보냈다. [29] 압록강 초산까지 먼저 도달했다. [30] 춘천전투, 동락리전투 당시 충북 음성에서 국군 첫 승전보를 알렸다. [31] 인천 상륙 작전 이후 개천시까지 가장 먼저 도달했다. [32] 대포병레이더 운용 [33] 천무 운용 [34] 초대 제4여단장(창설~1948.08.29) [35] 2대 제4여단장, 초대 제6여단장(1948.08.29~1949.01.15) [36] 3대 제6여단장, 초대 6사단장(1949.01.15~1949.05.14) [37] 1949.05.14~1950.01.15 [38] 1950.01.15~1950.06.10 [39] 6.25 전쟁 초기 사단장(1950.06.10~1950.10.31) [40] 1950.10.31~1952.01.10 [41] 1961.12.29~1963.09.05 [42] 10.26 사건의 주동자(1963.09.04~1966.01.21) [43] 1966.01.12~1967.07.03 [44] 1967.07.03~1968.05.28 [45] 1968.05.28~1969.06.18 [46] 1969.06.18~1971.06.05 [47] 1971.06.05~1973.08.18 [48] 제2땅굴 발견(1973.08.18~1975.07.11) [49] 1975.07.11~1977.08.20 [50] 1980.06.03~1982.01.16 [51] 1982.01.16~1984.01.18 [52] 1984.01.18~1986.01.16 [53] 하나회 회원 [54] 1993.10.27~1995.10.23 [55] 1995.10.23~1997.10.28 [56] 1997.10.28~1999.11.09 [57] 2004.10.25~2006.05.02 [58] 전남대학교 [59] 경기대학교 [60] 순천향대학교 [61] 별의 평야라는 금학산을 배경으로 한 시가 존재. [62] 남경필 도지사 아들도 이곳에서 복무하였다. [63] 일명 꽃스님으로 알려진 스님. 현재는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내에서 군종법사로 복무중이다. [64] 공개된 사진의 녹색 비표 및 용형상 흉장을 감안하면 제2보병여단( 용문산부대) 수색중대 출신으로 추정된다. [65] KBS1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2000년 1월 17일 방영분에서 언급. [66] KBS1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1999년 4월 26일 방영분에서 언급. [67] 국군의 모체부대가되는 국방경비대의 최초창설부대는 1연대이며 1연대는 현재의 수도기계화보병사단 1기계화보병여단이다. [68] 포병연대는 전후에 편성되었다. 전쟁 당시 6사단 19연대 예하부대였던 16포병대대는 최초의 포병대대들 중 하나이며, 전후 7사단 포병연대로 예속변경이 되었다. [69] 참고로 장도영 당시 사단장도 이를 오점으로 여겨 용문산 전투 전 군장검사에서 "지금까지 우리 청성부대는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는데 너희가 사창리 전투에서 망쳐 놓았다." 며 말할 정도였다. [70] 7여단의 경우에는 2015년 4월 23일 이후로 GOP를 맡는 부대를 한 대대로 고정 중이다. [71] 밤에 걸쇠를 걸어놓은 위병소 문이 바람 때문에 열릴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불어서, 바람 소리와 관련된 괴담이 상당히 많기도 하다. [72] 온도계가 얼어붙는다 [73] 갈말읍 일대를 '신'철원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군청소재지라는 점 빼면 동송이 신철원보다 훨씬 더 발전하였다. [74] 좁은 동송 시내에 군인 관사가 아파트 형태로 밀집된 탓에 굳이 업무 때문이 아니라도 시내에서 고급 장교를 보는 경우가 매우 많다. 퇴근 후에 동네 슈퍼마켓에서 잠깐 장을 보다가 운동복 차림의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께서 "수고가 많구먼." 하길래 "감사합니다." 하고 가볍게 목례했는데 어째 얼굴이 익숙해서 다시 봤더니 사단 참모장이더라는 어느 영외 거주 간부의 일화도 있다. [75] 2016년 12월 1일부터 시행했다. [76] 단, 위에서 언급한대로 16포병대대는 전후 예속전환 되었다. [77] 조달진 일병은 이 전공을 인정받아 일등병에서 하사를 건너뛰고 이등중사로 2계급 특진을 하였다. 하지만 심일 소위의 전공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전공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 기관은 육군 군사(軍史)연구소. 즉 육군이고 전공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쪽은 국방부 산하의 군사(軍史)편찬 연구소이다. 기사 [78] 이때 노획한 북한군의 군장비에 소련 제품의 표시가 있어 소련이 전쟁에 개입하였다는 증거로 UN에 보내지기도 하였다. 제보한 국민학교 교사의 이름은 김재옥으로 후일 육군 소위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던 중 1963년, 살인사건에 휘말려 남편(당시 계급은 중령)과 같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이 없는 것은 이 살인사건의 주범은 대대장에게 원한을 품은 옛 병사였는데 정작 그 대대장은 당시 이미 다른 곳으로 전근간 상태였다. [79] 7연대의 부대 명칭이 바로 초산부대이다. [80] 6사단에서는 이 일을 자랑삼아 압록강 물을 다시 마시자는 구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81] 10개 맞출려고 끼워놓은 흔적이 역력하다. 물론 일부 부대에서는 정말로 부조리 및 악습이 개선되었다. 전군 최초로 전원동기제를 실시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23년 현재에도 6개월 동기제가 시행되고 있으며 부조리근절을 위해 불필요한 악습을 없애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82]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16p [83] 출처3: 신기철, "전쟁범죄" 121p [84]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18p [85] 참고로 예비검속의 법적 근거는 당시 한국 국내법에 존재하지 않았다. [86] 방첩대, 특무부대, 또는 보안대라 불리는 CIC는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확장에 직접 개입했다. 원래 국군 정보국 제2과였으나 상급기관인 정보국과는 거의 협조하지 않았고, 곧 독립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내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벌어진 수많은 학살을 기획하고 또 직접 실행했으며 이승만의 정적들에 대한 정치적 테러 역시 주도했다. 특히 미군으로부터 '폭군 네로'라고도 불렸던 방첩대 사령관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비호를 받았기에 참모총장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대한민국 국회의 의원들도 방첩대가 벌이는 불법적 학살을 보고받곤 경악하여 규탄 성명을 내거나 법 개정을 통해 이들을 저지하려 시도했으나 이승만의 비호로 이들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들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은 당연히 다른 군인들의 불만을 불러왔다. 일부 군인들은 1956년에 김창룡을 암살해버렸다. 그리고 1960년 4.19 혁명 당시 군은 이승만 정권의 진압 명령을 무시하면서 시민들의 편에 선다. 출처: 김득중, "한국전쟁 전후 육군 방첩대(CIC)의 조직과 활동" [87] 출처2: 신기철, "전쟁범죄", 119p [88]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95p [89] 참조 [90] SBS 뉴스토리와 KBS 추적60분에서는 김상병이란 가명으로 나왔다. [91] 참조 [92] 근데 검색해 보면 나오지만 이 농협은 은근히 자주 털린 듯했다. [93] 심지어 색깔도 같은 청색 계열인데다 바깥쪽에 띠가 둘러져 있는 것까지 비슷하다. [94] 독수리 부대가 한 때(2012년) 필승 뒤에 사랑합니다를 붙이게 변경했었으나 공식석상에서는 필승으로 경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