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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저서 |
<colbgcolor=#000><colcolor=#fff> 학교법인 선인학원 學校法人 善仁學院 | Seonin Corpor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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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소재지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
설립일 | 1965년 1월[1] |
해산일 | 1994년 3월 1일 |
설립자 | 백인엽 |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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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까지 태어난 인천광역시민들은 선인학원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선인학원의 규모가 거대한 점도 있었지만 비리의 수준도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인천시민이 백인엽에게 분노하고 그를 비난한다. 논란이 멈추지 않자 1994년에 백인엽은 선인학원에 대한 경영권과 소유권을 인천광역시에 헌납하고 해체된 선인학원 소속 학교들은 공립으로 전환되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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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전문대학 본관의 초기 모습[2] |
선인은 설립자인 백인엽과 그의 형인 백선엽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재단 이름에 백선엽, 백인엽 형제의 이름이 모두 들어가 있지만 선인학원의 소유권은 100% 백인엽에게만 있었다. 학원 설립 직전 형의 구명 덕분에 풀려나 학원을 설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의 의미로 형의 이름을 재단 이름에 함께 넣은 듯하다. 뿐만 아니라 재단 산하에 있는 학교 이름에 식구들 이름을 죄다 갖다 붙였다.
백인엽은 수만명의 군장병들을 영양실조에 걸리게 한 대규모의 군비리를 저질러 당시 막 집권한 박정희 정부에 의해 196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박정희의 은인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인 친형 백선엽[3] 덕분에 구명받아 10개월만에 풀려났다. 군복을 벗게 된 백인엽은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선인학원을 대규모로 키우면서 각종 비리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백인엽은 1964년 인화여자중학교와 인화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설립했고 이듬해엔 성광중학교의 교명을 선인중학교로 바꿨다. 이후 항도상업기술학교를 인수하고 효열국민(초등)학교 등을 신설했다. 또 운산기계공업고등학교(1977)와 인천대학(1979)을 설립하고 인천체육전문대학과 인천공업전문대학을 인천전문대학으로 통합(1981)했다.
선인학원 소속 학교들이 모여 있는 도화동 캠퍼스 부지는 과거에 많은 중국인들이 살았던 곳이자 묘지촌이었으나 백인엽이 학교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내쫓았다고 한다.
선인학원은 건물 안에 화장실 하나 없고 제대로 마감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내에 분진이 뿌옇게 나는 등 막장인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중고교만 있었던 시절에는 그래도 이러한 사실이 크게 공론화되지 않았다. 당시 별로 공론화되지 않은 이유가 몇가지 있다.
사실 1960~70년대 대한민국의 교육 여건은 오늘날 학생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학생 수에 비해 학교가 턱없이 모자라서 국민학교에서 2부제 수업이 일상이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건물 안에 화장실이 없는 학교는 흔했다. 서울에도 1980년대까지 건물 안에 화장실이 없는 학교가 흔했고 90년대에도 좀 오래된 학교는 대개 화장실이 건물 밖에 따로 있었는데 특히 역사가 깊은 명문 고등학교들이 그랬다. 일례로 1976년 2월까지 종로구 화동에 있었다가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한 경기고등학교는 정독도서관으로 바뀌어 지금도 교사가 남아있는데 정독도서관은 건물 안에 화장실이 없었다.[4] 1970년대 이전에 지어진 오래된 학교들은 건물 밖에 화장실이 있었다가 2000년대 이후 새로 건물 안에 화장실이 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선인학원 소속 학교는 실업계 고등학교가 대부분이었고 인천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아 지원순위가 후순위였던 경우가 많다. 당시 인천시의 특성상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맞벌이로 일했기 때문에 교육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9년 인천대학교가 설립되고 대학생들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인천대학교 입학생들은 건물 내에 화장실 하나 없는 막장 환경에 충격받았다. 당시는 대학 진학률이 20% 미만이었기 때문에 대학에 입학했다는 것만으로도 엘리트 인증이었던 시절이었다. 중고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기준으로는 정말 비싼 등록금을 내고 다니는 대학교에 화장실이 제대로 없다는 것은 엄청나게 학생들을 푸대접한 것이다.[5] 과방, 동아리방 공간조차 제대로 없어 건물 밖에 가건물 비슷한 것을 지어 이용해야 했다. 인천대 학생들은 열악한 환경에 분노하여 선인재단의 비리를 규탄하는 시위에 나섰다. 1980년초 민주화 바람을 타고 인천대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마침내 재단 소속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세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0년에 정권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개혁이 실시되었을 때 선인학원에 문교부 특별감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상상을 초월한 대규모 비리가 밝혀졌고 1981년 3월 12일 백인엽은 대검찰청 특수부로부터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당시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선인학원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여겨 "선인학원을 해체하고 국·공립으로 만들겠다"고 국회에서 발언했다. 결국 백인엽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1981년 3월 23일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이때 백선엽이 개입하여 관선 이사가 되면서 선인학원의 국·공립화는 무산되었고, 백인엽이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타협되었다. 백인엽은 표면적으로는 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났지만 재단 이사진은 백인엽의 측근들로 구성되어 있어 백인엽의 허락이 없으면 나무 한 포기 옮겨 심을 수 없었다고 한다.
1985년 10월 백인엽이 자문위원직을 만들어 복귀하면서 사실상 전권을 휘두르자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반발이 격화되었고 1986년 10월 30일에는 전국 최초로 53일간 휴교령이 내려지기까지 했다. 인천대 학생들의 학원민주화투쟁이 인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슈화되자 결국 1986년 12월 백인엽은 '대학 운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문교부에 제출하고 다시 일선에서 물러났다.
당시 인천대 시위는 매우 드물게도 운동권과 연계되지 않은 순수한 학생운동이었다고 한다.[6] 결국 1980년대 후반 새로 구성된 이사회가 나름대로 개혁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급진적인 학생들의 반감을 사서 퇴진하고 말았다.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이사회의 개혁도 성에 차지 않아 더욱 많은 요구를 했고, 재단 이사들에게 사재까지 털어 학교에 기부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이사회를 못마땅해 하던 백인엽이 배후에서 학생들을 부추겼다고 한다.
1990년 9월 11일 쏟아진 폭우로 옛 박문여자고등학교와 선인중학교 사이(동구 송림5동 103-9번지) 야산 축대가 무너져 23명이 사망하는 '송림동 매몰 참사'가 발생했다. # 선인학원이 운동장 등 부지 조성을 위해 절개하고 대충 쌓은 축대가 결국 무너진 것이었다. 분노한 유가족은 11월 1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창천동에 있었던 백인엽의 자택을 점거하고 농성을 전개했다. 그러자 농성 3일째인 11월 3일 선인학원은 보상금 전액을 지급했다. 이 사건은 백인엽이 선인학원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91년부터 백인엽의 복귀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인천대 학생들의 시위가 다시 한 번 본격화되었다. 학생들은 총장·부총장·처장실을 점거했으며 재학생의 과반수가 자퇴서에 서명했다. 1992년 초 인천 지역 각계 인사들과 시민단체들이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의 모임’을 발족했다. 시민단체들은 10만명 서명운동을 벌여 7만명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교육부는 종합감사팀을 보내 1992년 4월 17일부터 25일까지 감사를 실시했다. 1992년 6월 10일 교육부는 감사 결과에 따라 재단 이사 7명을 해임하고 관선 이사 9명을 파견하며 학원을 운영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백인엽 추종 세력인 「백파」와 이에 반대하는 「비(非)백파」간 갈등이 심화되기도 했다. 1992년 MBC PD수첩이 선인학원의 비리에 대해 방영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얻게 되었다.
인천대와 인천전문대 학생들은 상경하여 여의도 국회 앞에서 재단 비리 수사를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 결국 1993년 6월 9일 백인엽은 권한 일체를 인천시장에게 넘겼다. 인천시는 교육부, 내무부, 총무처 등 중앙부처와 협의를 거쳐 1994학년도부터 대학, 전문대학은 인천시가 관할하는 시립으로, 초중고교는 인천시 교육청이 관할하는 공립으로 전환되었다.
3. 문제점
3.1. 시설 관련
<colbgcolor=#000> |
<colcolor=#fff>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본관 (지상 12층) |
|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선인체육관 (지상 13층) |
|
옛
운봉공고와 항도실업고, 운산기계공고가 같이 쓰고 있던 건물[7] (지상 13층) |
여기에 더해 상당한 높이의 계단과 스탠드를 통해 건물에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과[11][12] 높은 경사, 따로 나누어져있지 않은 인도 등[13] 이러한 특징은 선인체육관이 집중적으로 보여줬다.
실제로 선전용이라는 별칭이 농담은 아닌 게 외부는 저렇게 웅장하게 짓고도 내부는 상당히 열악했는데, 준공 검사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지어 사용한 불량 건물들이었다. 내벽 공사를 하지 않아 건물 내부는 매우 열악했고 실내 바닥에 뿌연 시멘트 먼지가 일었다고 한다.
또 수도 시설은 물론이고 실내 화장실이 없는 건물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1980~90년대까지 실내 화장실이 없는 학교는 드물지 않았지만 문제는 항도 - 운봉 - 운산 3개교의 수천명의 학생들이 함께 사용하던 13층짜리 건물에도 없다는 것이었다.[14] 중고교 건물은 물론이고 과거의 인천대학교, 인천전문대학 등 8~9층짜리 대학 건물에도 80년대까지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화장실을 가려면 1층까지 내려와 실외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는데 그마저도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학생들과 교사들이 빽빽하게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게 일상이라 사용이 어려웠다고 한다. 수세식화장실이 설치된 이후에도 겨울에는 수도가 얼어서 모두 실외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백인엽이 물러난 직후에야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고 한다.[15] 그러나 당시 뉴스를 보면 엘리베이터가 설치만 되었을 뿐 가동되지 않았다.
게다가 석면을 엄청나게 사용해서 나중에 인천대 등 선인학원 건물들을 해체할 때 석면 유출이 심각하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 선인고등학교의 창문은 1991년까지만 하더라도 옛날식 창문인데다 청소하기 매우 불편한 구조여서 유리창 바깥쪽은 아예 청소하지 못했다가 1991년에 학부모들에게 돈을 걷어 옛날식 창문을 알루미늄 샤시로 교체했다.
14개나 되는 학교들이 몇 개 안되는 운동장을 나눠 써야 했기 때문에 매우 불편했다고 한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에게, 중학생은 또 고등학생에게 쫒겨나기 일쑤였다고 한다. 또 드넓은 교지에 14개교에 달하는 학교 건물들을 계속 지으면서 신축 공사에 학생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더불어 매일같이 학생들을 동원해 제초 작업까지 벌였다고 한다.
3.2. 교육 관련
무자격 교사들의 임용 비리 문제도 끊임없이 지적되었다. 실제로 1991년에 선인고등학교에서는 학생주임겸 수학교사가 있었는데 수업 시간에 수학의 정석 유제를 풀어달라는 한 학생의 요청에 시간 내내 유제도 제대로 풀어주지 못하고 끙끙대기만 하다가 고대로 수업이 끝나 버려 개망신을 당한 흑역사가 있었다. 결국 해당 교사는 이사장의 빽(...)으로 들어온 거 아니냐는 뒷담화로 두고두고 까였다고 한다.또 선인학원은 설립자 백인엽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군대식 문화로도 유명했다. 교사들에게 예비군 군복을 입혀서 보초를 서게 하고 순찰을 돌게 했다. 이는 여교사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는데 등교 시 교문 앞에 나와 있던 여교사들까지 수통을 착용해야 했으며 순찰시 암구어를 대야 했다고 한다. 이런 전근대적인 문화에 대한 반발이었는지 1989년에 전교조가 설립된 후 선인재단 소속 학교 교사들 중 젊은 교사들이 전교조에 다수 가입했다. 훗날 선인고등학교 출신인 민주노동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평범하게 살 뻔했던 내 인생은 비리 투성이인 선인재단과 전교조 선생님들이 바꿔놓은 것'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인천전문대 학생들도 교복을 착용하고 아침 정시 등교 및 두발 단속을 받았다고 한다.(...)
선화여중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0년대 중반에 도덕 과목 문제로 '위대하신 우리 선인학원의 설립자와 이사장님은 누구인가?' 라는 문제를 주관식으로 출제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열악한 교육환경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학부모들의 반발이 생각보다는 크지 않았던 것은 당시 인천 지역의 상황이 맞물려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선인학원 소속 학교들은 대부분 실업계열이었고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기 이전 선인학원 소속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바닥이라 지원율이 낮았다고 한다. 또 소속 학생들의 학부모들은 대부분 맞벌이했기 때문에 자녀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고교 평준화 이후 평준화 지역 중에서 가장 학력이 떨어졌던 곳이 바로 인천광역시였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학력 수준이 떨어졌던 곳이 바로 이 선인학원 소속 학교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문계 고등학교였던 선인고등학교나 인화여자고등학교는 대학 진학률의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했다.
1993학년도 학력고사[16]를 맞아 당시 선인고등학교 3학년 전체 600명 중(문이과 모두 합쳐) 100명이 전북 이리시[17]의 원광대학교에 몰빵 지원을 했는데 그 중에서 11명만 붙고 나머지들은 다 탈락했을 정도로 선인학원 소속 학교들의 학력 수준은 전국 평균을 밑돌았다.[18]
예전부터도 선인고는 원광대학교와의 커넥션이 있었는지 유독 원광대로 물량 공세를 폈다고 한다. 아예 3학년 교무실에 원광대 응시생들을 위한 숙박 안내가 별도로 붙어 있었다.[19]
4. 산하 출신 학교 목록
언급했듯이 지금은 공식적으로 공·시립화하였으므로 선인학원과는 연이 끊겼다고 봐야 한다.[20]4.1. 현재도 있는 학교
아래에 서술된 학교는 모두 1994년 3월 1일을 기해 사립학교에서 공립(시립)학교로 전환됐다. 이 중 인천대학교는 국립학교로 전환돼 대한민국의 교육기관 중 유일하게 사립, 공립, 국립을 모두 경험한 학교가 됐다.중고등학교 소속 교직원은(지방)교육공무원 및 국가공무원[21]으로, 대학교 소속 교직원은 국립대학법인[22] 직원으로 전환되었다.
개교 당시에는 백인엽 일가가 운영했던 사립학교였던 만큼 대부분의 학교들은 교명에 백인엽 일가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23] 이후에도 특성화고들을 제외하면 교명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4.1.1. 대학교
시립 법인/국립 법인으로 전환되었으며 교직원은 공무원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인천대학교
1979년 인천공과대학으로 개교했다가 그 해 말 인천대학으로 학교명을 바꿨다. 1988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1994년 시립 대학교로 전환됐고 2013년에는 국립 대학법인으로의 전환이 완료됨에 따라 국립대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2009년 대부분의 학과가 송도 새 캠퍼스로 이전했고 일부 시설만 도화동 옛 캠퍼스에 남아 있다.
4.1.2. 고등학교
-
선인고등학교
남자 일반계 고등학교. 1947년 성광중학원으로 개교했다가 성광기술학교-성광 상업고등학교-선인상업고등학교-선인종합고등학교를 거쳐 1973년 선인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꿔 지금에 이른다. 재단 캠퍼스 내에서 학교 건물을 꽤 여러 번 옮겼는데 현재 부지는 인화여중 운동장 부지다. -
인화여자고등학교 (← 인화여상 )
여자 일반계 고등학교. 1964년 인화여자상업고등학교로 개교했다가 3년 뒤 인화여자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꿔 현재에 이른다. -
인천체육고등학교
남녀공학 체육고등학교. 1975년 개교했다. 학교가 있었던 부지가 도시재생지구로 지정되면서 2012년 청라국제도시로 학교 건물을 옮겼다. 수영선수 출신인 유이가 이 학교 출신이다. -
인천전자마이스터고등학교 (← 인천전자공고 ← 항도실업고)
남녀공학 마이스터고등학교. 선인재단 실업계 도봉산 3총사에서 도를 맡았던 학교이다. 1952년 항도중학원으로 개교했다가 1954년 항도상업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1982년 항도실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꿨다.[24] 1996년 인천전자공업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2010년 마이스터고등학교로 전환과 동시에 남녀공학으로 전환됐다. 마이스터고로 지정된 후에는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는 등 과거의 오명이 무색할 정도로 실력적으로 인정받는 학교가 됐다. -
인천대중예술고등학교 (←
인천하이텍고[25] ← 운봉공고)
남녀공학 대중예술 단일 계열 특성화고등학교. 선인재단 실업계 도봉산 3총사에서 봉을 맡았던 학교이다. 1971년 운봉공업고등학교로 개교해 2012년 인천하이텍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참고로 옛 교명이었던 운봉은 사립 시절 설립자 백인엽의 호이다. 2020년부터 예술계열 과[26] 를 신설하고 기존의 있는 과는 기존의 다니던 학생들이 졸업한 2023년에 폐지했으며 2021년에 인천대중예술고등학교로 전환 개교하면서 현재는 인천을 대표하는 대중예술 계열 공립학교로 자리잡고 있다. -
인천소방고등학교 (← 도화기계공고 ← 운산기계공고 )
남자 특성화고등학교. 선인재단 실업계 도봉산 3총사에서 산을 맡았던 학교이다. 1977년 운산기계공업고등학교로 개교해 2004년 도화기계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꿨다가 2021년에 학과 개편을 통해 소방 업무에 특화된 인천소방고등학교로 재출발했다. 참고로 옛 교명이었던 운산은 사립 시절 설립자 백인엽의 형인 육군 대장 백선엽의 호이다. -
인천비즈니스고등학교 (← 선화여상 )
여자 특성화고등학교. 1970년 선화여자상업고등학교로 개교했다가 2009년 인천비즈니스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학교가 있던 부지가 도시재생지구로 지정되면서 2012년 옛 인천체고 부지 쪽으로 학교 건물을 옮겼다.
4.1.3. 중학교
-
선인중학교
남자중학교. 1952년 인천성광기술학교로 개교해 1954년 성광중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선인학원 인수 후인 1965년 현재의 이름인 선인중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원래의 건물은 도화기계공고가 사용하고 있으며 과거의 선인고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
인화여자중학교
여자중학교. 선인재단에 소속됐던 학교 중 유이하게 개교 후 단 한 번도 학교 이름을 바꾸지 않은 학교이다.[27] 1964년 인화여자중학교로 개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선화여자중학교
여자중학교. 1968년에 항도여자중학교로 개교했고 1969년에 선화여자중학교로 교명을 바꿔서 계속 유지 중이다.
4.2. 없어진 학교
-
인천전문대학
인천대학교보다 먼저 생겼는데 인천대학교와 통합돼 사라졌다. 1969년에 설립된 5년제 인천공업고등전문학교가 뿌리다. 1981년 인천체육전문대학과 통합돼 인천전문대학이 됐고 1994년 선인학원 소속 학교들과 함께 시립화 됐다. 2010년 인천대학교와 통합돼 없어졌다.[28] -
효열국민학교[29]
1965년 11월 개교했으나 1994년 선인재단의 해체와 시립화 과정에서 결국 폐교됐다.[30] 학교 이름인 효열은 백선엽-백인엽 형제의 어머니인 방효열 여사의 이름에서 따 왔다.[31] 효열국민학교가 폐교된 후 인화여중이 해당 부지를 사용하였으며 선인고는 인화여중 운동장 부지에 신축하였다. -
진홍유치원
정확한 개교 시점이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선인학원의 공립화 과정에서 폐원됐다. 다만 1994년 공립화 당시 재학 중이던 원생이 있어서 1994년 바로 폐원하지 않고 1995년에 폐원했다. 유치원 이름인 진홍은 백인엽의 아들[32] 이름이라고 한다.
5. 역대 이사장
- 백인엽 (1965~1981)
- 김종면 (1981)
- 신기석 (1981~1983)
- 이호 (1983~1986)
- 신능순 (1987~1990)
- 심창유 (1990~1992)
- 노창현 (1992~1994)
6. 관련 문서
- 인천전문대학
- 인천대학교/제물포캠퍼스 - 대표적인 부속 시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 선인체육관
[1]
성광학원을 인수한 건 1958년 8월이나 서류상 선인학원의 운영이 시작된 날은 1965년 1월로 결정되었다.
[2]
1980년대에 촬영된 사진으로 알려져있다. 2000년을 넘어서서
새로 도색되었다가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3]
백선엽은 6.25 전쟁에서의 공훈으로 친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군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4]
나중에 리모델링하면서 건물 안에 화장실이 추가로 설치되긴 했으나 2000년대 초까지
정독도서관의 화장실은 전부 건물 밖에 별도의 화장실이 있었다.
[5]
1979년이면 당시 새로 개교한 다른 대학교들뿐만 아니라 초, 중, 고등학교들도 신설학교면 공사립 가리지 않고 어지간해서는 수세식 화장실이 건물안에 다 있었던 시절이다. 더군다나 다른 막장사학인인
김문기,
이홍하,
박철웅,
박성기도 건물 지을 때는 최소한 화장실은 지었다는 점에서 백인엽이 얼마나 막장인지 알 수 있다. 심지어 불명예 퇴장으로 역사속 으로 사라진 부실사학인
브니엘중학교는 중학교 주제에 1976년도 아니고 1966년에 이미 학교 건물 안에 층별로 수세식 화장실을 갖췄다.
[6]
당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등 운동권에서 몇 차례 연대 제의를 했으나 인천대 학생들은 "순수하게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는 운동일 뿐"이라면서 운동권의 연대 제의를 거부했다고 한다.
[7]
현
인천대중예술고등학교,
인천전자마이스터고등학교,
인천소방고등학교.
[8]
로동당의 건물보다는
김일성종합대학 건물과 비슷하다.
[9]
이것이 문제를 많이 야기했는데 선인재단 교사(敎舍)들은 지금은 물론 당시를 통틀어서도 고층 중에서도 상당한 고층이었다는 점이다. 21세기에도 중·고등학교가 8층이 넘어가는 곳은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곳은 70~80년대부터 그랬으니 말 다했다.(...)
[10]
사실
북한에서는 아직까지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11]
지금은 이러한 높은 계단들을 통할 수 없도록 학교마다 펜스로 막아 놨다.
[12]
건물마다 스탠드와 계단의 기능이 혼용된 듯 하다.
[13]
참고로 시립화 이전까지는 인도는 물론 도로에 아스팔트조차 깔려있지 않았다. 이후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도로와 인도가 일정 부분 나누어지긴 했으나,
2019년 에서야 부지 내 도로가 전체적으로 재정비 된다.
[14]
여학교들도 마찬가지.
[15]
불행 중 다행으로 현재
청운대학교 인천캠퍼스로 사용되는 인천대 본관에는 설립 당시부터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16]
1992년 12월 22일에 치러진 최후의 학력고사였으며 1994년도 대학입시부터는
대학수학능력평가로 바뀌었다.
[17]
1995년에 전북 익산군과 도농 통폐합되어
익산시가 되었다.
[18]
수도권의 대도시에서 같은 수도권 지역이 아닌 먼 타지로 몰빵했음에도 10%만 붙고 나머지는 다 탈락했을 정도면(...)
[19]
당시 학력고사는 자신이 지원한 대학교에서 하루는 필기시험을 치르고 하룻밤을 묵은 뒤 면접을 봐야 해서 타지에서 온 수험생들은 이틀 밤을 자야 했다.
[20]
아래 산하 학교에서 오래 근무하신 선생님들께 '선인재단'을 언급하면 매우 기분 나빠하는 듯하다.
[21]
교사
[22]
국립대학법인인천대학교설립·운영에관한법률에 근거
[23]
선인중&선인고의 선인은 당연히 백선엽의 선과 백인엽의 인을 합친 것이고 여학교인 선화와 인화는 선과 인에 여성의 이름에 주로 쓰이는 한자인
꽃 화(
花)를 붙인 것이다.
[24]
특이하게 다른 학교들과 달리 교명의 어원이 불분명한데 운봉은 백인엽의 호, 운산은 백선엽의 호, 효열은 두 형제의 모친인 방효열, 진홍은 백인엽의 아들인 백진홍에게서 따 왔지만 유일하게 항도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25]
엄밀히 말하면 전환이 아니라 폐교하고 다시 개교하는 형식이었다.
[26]
실용음악과, 실용무용과, 연기예술과, 드론영상과
[27]
인천체고 역시 개교 이후 줄곧 인천체고라는 교명을 유지하고 있다.
[28]
건물은 아직 남아 있다. 건물이 10년 이상 관리 없이 방치되었기 때문에 그 외관이 다소 흉물스러울 수도 있다.
[29]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뀐 1996년 3월 이전에 폐교되었으므로 국민학교로 기재한다.
[30]
효열국민학교가 폐교되면서 선인재단 부지에는 초등학교가 없다. 그나마 서화초등학교가 인천대 제물포캠퍼스 북쪽으로 있긴 한데 서화초등학교는 1966년에 따로 개교한 공립학교라 선인재단과는 접점이 없다.
[31]
실제로 백선엽은 6세, 백인엽은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음이 잘 알려져 있다.
[32]
몇째 아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백인엽이 슬하 4남 3녀가 있는
다둥이 아빠인 데다 전처 사이에 2남 2녀, 후처 사이에 2남 1녀로 자식들이 서로 이복형제들이기 때문에 족보가 워낙 복잡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