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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주 郭永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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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하야 이후에도 계속해서 경호하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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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집행 직전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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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 1924년 1월 10일 |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율현리 (現 경기도 이천시 율현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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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1년 12월 21일 (향년 37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울교도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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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현풍 곽씨 |
묘소 | 경기도 이천시 율현동 |
학력 |
이천공립보통학교[2] (졸업) 경성공립직업학교 ( 기계과 / 졸업) |
가족 |
둘째 형 곽영환[3] 아내 신옥균[4], 장남 곽승근 손자 곽병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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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전직 경찰. 지금의 대통령경호처장 격인 경무대경찰서장이었으며 이승만의 신임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여 월권을 행사하고 시민들을 탄압하고 학살하였다. 최종 계급은 경무관이었다.[5]2. 생애
1924년 1월 10일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율현리(현 경기도 이천시 율현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경성공립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병기 병과 군조에까지 올랐다. 광복 후 경찰이 되어 구 일본총독의 관사 경비업무를 보다가, 이곳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경무대가 되는 바람에 곽영주도 그대로 경무대경찰서에 근무하게 되었다고 한다.[6]이후 그는 이승만의 눈에 들어 1950년 경무대경찰서의 경위로 승진했으며 1951년 경무대경찰서의 경감으로 승진, 1955년에는 내무부 치안국의 경무과에 전보됨과 동시에 총경에 올랐다. 1956년 경무대경찰서장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 치안국으로 다시 전보되었다가 경무관에 승진하는 등 줄곧 출세가도를 달렸다. 지금의 경찰공무원 근속 승진 운영규칙과 당시 운영규칙은 판이하게 다르다. 총경에서 경무관에 오르는데는 보통 7년이 걸리지만 곽영주는 이승만의 총애를 등에 업고 경위에서 경무관까지 7년이 걸렸으니 그야말로 파격 중에서도 파격인사라고 할 수 있다. [7]
곽영주는 이승만의 빽을 믿고 대통령 경호 임무를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며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한다. 이정재와 동향이고 잘 아는 사이었던 곽영주는 이정재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든 무조건 그의 편을 들어줬다. 그 결과 이정재는 경찰에 신고당해도 거의 체포당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신고한 사람이 잡혀가는 황당한 경우마저 발생하기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경호실장이 행정부에 사사건건 참견을 해대는 심각한 수준의 월권 행위를 저지른 셈으로 이 때 곽영주가 얼마나 설치고 다녔는지 '부부통령(副副統領)' 내지는 '곽박사'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였다. 재미있는건 이런 안하무인적인 월권 행태는 훗날의 유신 시절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도 충실히 계승한다.
곽영주는 군 장교의 진급 심사에도 참견했는데 나름대로는 자기 기준선에서 불온분자 소탕에 적극적이었는지 해당 장교의 소양보다는 당사자나 가족의 사상 관계를 캐묻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태클 걸렸던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김익렬과 박정희. 김익렬은 4.3 사건 당시 무분별한 경찰의 진압에 회의를 느끼고 빨치산과 일시 휴전을 맺은 탓에 공개 석상에서 면박당하고 끌려나갔으며 결국 1950년대 내내 찬밥 신세였다. 박정희는 형 박상희가 사회주의자라는게 문제가 되어 매장당할 뻔 하다가[8] 김정렬 당시 국방부 장관과 백선엽이 도와주어 가까스로 진급되었다고 한다.[9]
그러나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곽영주의 앞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그는 시민들의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민들을 무력 진압했는데 서대문 앞 총격 사건이나 이기붕 자택(현재의 4.19 도서관 터) 발포 사건은 그의 직접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자 곽영주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게 되었고 그대로 체포되어 장면 정권하에서 벌어진 재판 결과 단기형을 받았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혁명재판이 벌어지자 다시 체포되었는데 묘하게도 같은 혐의로 같이 체포된 홍진기[10]와 유충렬[11]이 사형 선고 후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것과 달리 곽영주는 그대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결국 곽영주는 최인규, 이정재, 임화수, 신정식과 나란히 1961년 교수형을 당했다. 당연히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과거 곽영주와 박정희의 갈등을 지적하며 곽영주가 박정희의 원한을 사서 사형을 당했다는 말도 나왔으나 이걸 빼더라도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 발포 명령, 장충단 집회 방해 사건 은폐 등 사형당해도 싼 사고들이 차고 넘쳤으며, 애초에 시비를 먼저 건 것은 곽영주 쪽이었다.
3. 여담
- 1979년 10.26 사태 당시 추하게 화장실로 도망갔다가 결국 김재규에게 잡혀 사살당한 차지철과 달리 끝까지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은 확고해서 이승만이 하야한 후에도 변함없이 그의 옆을 지켰다. 하지만 그 충성심은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라 전근대 시대 왕이나 중세 유럽의 군주에게나 어울릴 충성이었고 이런 시대착오적인 우충(愚忠)은 이승만의 눈을 가리고 권력 남용과 국민 탄압으로 이어졌다. 4.19 혁명 이후 구속된 기사에 의하면 곽영주는 깡패를 두둔한 적이 없고 부패도 일삼지 않았다며 끝까지 제대로 된 반성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4.19 혁명 이후 장남(곽승근)이 유괴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12][13]
- 1995년 월간조선 10월호에 최인규, 이정재, 임화수, 조용수, 최백근, 신정식, 한필국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을 때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 2010년 오마이뉴스가 곽영주의 손자 곽병민(1972년생)을 인터뷰했는데 자기 조상의 흑역사를 어떻게든 옹호하려고 노력하는 다른 자유당 정권 인사들의 가족들[14]과 달리 조부의 과오를 인정하면서 곽영주의 흑화 원인에 대해 아래와 같은 사견을 밝혔다.
"할아버지에게 이승만은 민주국가의 첫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인식됐던 것 같다. 당시는 민주국가의 원칙이 정리되지 않은 혼란기였는데, 할아버지가 지금 청와대 경호원이었다면 그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을 충성으로 모시는 신하였다. 사실 그러한 인식이 문제였다. 지도자보다는 국가를 더 생각했어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이승만에 대한 충성 =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인식에서 역사와의 어긋남이 시작된 게 아닐까? 할아버지가 지난 역사에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이승만 대통령과 워낙 각별한 관계였기에 월권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았을까?"
4. 대중매체에서
- 1989년 MBC 드라마 < 제2공화국>에서는 배우 이동신이 연기했다. 첫 등장시부터 이승만에게 궁중 어투를 사용해 해설자에게 까였으며 함께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보좌하는 비서관 박찬일과 경쟁하며 암투를 벌이는 사이로 묘사된다. 4.19 혁명이 발발한 이후 계엄사령관이 된 송요찬을 포섭하려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친하게 지내던 깡패 임화수와 유지광이 계엄군에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송요찬에게 "고대생 습격 사건은 시위 때문에 피해를 본 노점상들이 빡쳐서 벌인 일이다"는 식으로 뻘소리를 해대면서 이들의 체포를 막으려 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이승만이 하야하자 분노를 터뜨리고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된 이후 경무대 발포 사건 책임자로 구속된다.
[1]
현풍 곽씨 집성촌이다.
묘소도 이곳에 있다고 한다.
[2]
유지광보다는 1년 후배였다.
[3]
유지광의 셋째 형과
이정재와는 이천공립보통학교 동기동창이었다.
[4]
1928년생으로 아래 2010년 인터뷰 시점까지는 살아있었으며, 2017년에 타계했다.
[5]
사실 그가 휘두른 권력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은 계급이었다. 실제로
1960년 경무대가 폐지될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당시 치안국장이 "일개 경찰지구에 불과한 경무대경찰서원들이 스스로를 특권층으로 착각하고 경찰계통을 문란케 해온 과거사는 시정되어야 한다"고 언급한바 있는데, 이들 역시 곽영주와 마찬가지로 권한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다.
[6]
2002년 드라마 '
야인시대' 에서는 이천군 고향 선배인
이정재의 도움으로 경찰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드라마에만 나오는 이야기고 사실과는 다른 내용이다. 당시에는 일본군 하사관 경력만으로도 한국군에서 얼마든지 장성 또는 영관급으로 출세할 수 있었는데 굳이 경찰 말단 순경이 되기 위해 그런 청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곽영주가 수도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경찰서 보초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승만이 경찰서를 방문한 시간에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곽영주를 인상깊게 보고 마음에 들어 경무대
경호원으로 특채하였다는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
[7]
다만 곽영주가 순경으로 시작해 10여 년 만에 경무관으로 고속승진했다.라는 식으로 오늘날 근속 규정을 생각하면 안된다. 곽영주는 헌병 군조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말단에서 시작하지 않았으며 경감에서 총경으로 바로 승진한 건 그 당시 경정 계급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걸 떠나서라도 초고속 승진이었으며, 또한 곽영주의 승진은
공무원 사회의 인사 원칙을 무시하는 일이었다.
[8]
그 외에도 박정희의 이혼 경력을 문제삼는 등 개인사까지 들춰냈다고 한다.
[9]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고 해방 후 광복군 평진지대 중대장을 복무했기 때문에 창군기 국군을 구성한 3개
파벌(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인맥을 모두 활용할 수 있었다.
[10]
조봉암을 사형시킨 법무장관이자
중앙일보의 창업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홍석조 BGF리테일 회장,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의 아버지며
이병철과는 사돈이자
이건희의 장인이다.
[11]
지금은 폐교된
벽성대학의 설립자이며 손자가
유정현 아나운서이다.
[12]
범인 매석환(梅錫煥)은
정효주 1차 유괴 사건의 범인이기도 하다.
[13]
곽승근(郭承根)은 이후 풀려났고, 1971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치외교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했지만, 몇 년 후인 1973년 12월 심장마비로 숨졌다.
기사
[14]
최인규가 사형당한 후 기자들이 그의 연로한 아버지를 찾아갔는데 "임금(이승만)께 충성하다가 역적들(4.19 혁명 주동세력)에게 목숨을 잃었으니 내 아들은 충신이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뱉은 것이 유명하다.
[15]
2005년 <
제5공화국>에서는
전두환의 처삼촌인
이규광 역.
[16]
1989년 <
제2공화국>에서는
송원영 역, 1993년 <
제3공화국>에서는
권일과
홍종철 1인 2역, 1995년 <
코리아게이트>에서는
허문도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