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최인규(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내무부장관 (1948~1998) | |||||
<nopad> 이승만 정부 | ||||||
초대 윤치영 |
제2대 신성모 |
제3대 김효석 |
제4대 백성욱 |
제5대 조병옥 |
||
<nopad> 이승만 정부 | ||||||
제6대 이순용 |
제7대 장석윤 |
제8대 이범석 |
제9대 김태선 |
제10대 진헌식 |
||
<nopad> 이승만 정부 | ||||||
제11대 백한성 |
제12대 김형근 |
제13대 이익흥 |
제14대 장경근 |
제15대 이근직 |
||
<nopad> 이승만 정부 | <nopad> 허정 내각 | |||||
제16대 민병기 |
제17대 김일환 |
제18대 최인규 |
제19대 홍진기 |
제20대 이호 |
||
<nopad> 장면 내각 | ||||||
제21대 홍익표 |
제22대 이상철 |
제23대 현석호 |
제24대 신현돈 |
제25대 조재천 |
||
<nopad> 장도영 내각 | <nopad> 김현철 내각 | <nopad> 박정희 정부 | ||||
제26대 한신 |
제27대 박경원 |
제28대 엄민영 |
제29대 양찬우 |
제30대 엄민영 |
||
<nopad> 박정희 정부 | ||||||
제31대 이호 |
제32대 박경원 |
제33대 오치성 |
제34대 김현옥 |
제35대 홍성철 |
||
<nopad> 박정희 정부 | <nopad> 최규하 정부 | <nopad> 전두환 정부 | ||||
제36대 박경원 |
제37대 김치열 |
제38대 구자춘 |
제39대 김종환 |
제40대 서정화 |
||
<nopad> 전두환 정부 | ||||||
제41대 노태우 |
제42대 주영복 |
제43대 정석모 |
제44대 김종호 |
제45대 정호용 |
||
전두환 정부 | <nopad> 노태우 정부 | |||||
제46대 고건 |
제47대 정관용 |
제48·49대 이상희 |
제50대 이춘구 |
|||
노태우 정부 | ||||||
제51대 이한동 |
제52대 김태호 |
제53대 안응모 |
제54대 이상연 |
제55대 이동호 |
||
노태우 정부 | <nopad> 문민정부 | |||||
제56대 백광현 |
제57대 이해구 |
제58대 최형우 |
제59대 김용태 |
제60대 김우석 |
||
<nopad> 문민정부 | 1998년 총무처와 정무장관(제1실)과 통합 | |||||
제61대 서정화 |
제62대 강운태 |
제63대 조해녕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행정자치부장관 (1998~2008) | ||
<nopad> 국민의 정부 | ||||||
초대 김정길 |
제2대 김기재 |
제3대 최인기 |
||||
<nopad> 국민의 정부 | <nopad> 참여정부 | |||||
제4대 이근식 |
제5대 김두관 |
제6대 허성관 |
||||
<nopad> 참여정부 | ||||||
제7대 오영교 |
제8대 이용섭 |
제9대 박명재 |
||||
행정안전부장관 (2008~2013) | ||||||
<nopad> 이명박 정부 | ||||||
초대 원세훈 |
제2대 이달곤 |
제3대 맹형규 |
||||
안전행정부장관 (2013~2014) | ||||||
<nopad> 박근혜 정부 | ||||||
초대 유정복 |
제2대 강병규 |
제3대 정종섭 |
||||
행정자치부장관 (2014~2017) | ||||||
<nopad> 박근혜 정부 | <nopad> 문재인 정부 | |||||
초대 정종섭 |
제2대 홍윤식 |
제3대 김부겸 |
||||
행정안전부장관 (2017~현재) | ||||||
<nopad> 문재인 정부 | ||||||
초대 김부겸 |
제2대 진영 |
제3대 전해철 |
||||
<nopad> 윤석열 정부 | ||||||
제4대 이상민 |
||||||
임시정부 내무부장 | }}}}}}}}}}}} |
역임한 직위 | |||||||||||||||||||||||||||||||||||||||||||||||||||||||||||||||||||||||||||||||||||||||||||||||||||||||||||||||||||||||||||||||||||||||||||||||||||||||||||||||||||||||||||||||||||||||||||||||||||||||||||||||||||||||||||||||||||||||||||||||||||||||||||||||||||||||||||||||||||||||||||||||||||||||
|
|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 1919년 3월 9일 | ||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미사리 (現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 |
|||
사망 | 1961년 12월 21일 (향년 42세)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울형무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
본관 | 경주 최씨[1] | ||
재임기간 | 제7대 교통부 장관 | ||
1958년 9월 9일 ~ 1959년 3월 20일 | |||
제18대 내무부장관[2] | |||
1959년 3월 20일 ~ 1960년 3월 2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형제자매 |
남동생 최형규(1921 ~ 2009) 남동생 최상모(1922 ~ ?) |
|
배우자 | 강인화[3] | ||
자녀 | 2남 2녀 출처 | ||
학력 |
상일공립보통학교[4] (졸업)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속성과 / 1년 / 수료)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고등상업학교 (졸업) 뉴욕 대학교 ( 상학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3기) |
||
의원 선수 | 1 | ||
의원 대수 | 4 | ||
경력 |
대한교역공사 업무부장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 상무이사 유엔한국부흥위원회 뉴욕주재 한국대표 제2대 외자청장 제4대 국회의원 (경기도 광주/자유당) 제7대 교통부장관 제18대 내무부장관 |
}}}}}}}}}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공무원.할 줄 아는 것이 이승만에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라고 아첨을 하는 것밖에 없어 세간에서는 지당장관(至當長官)이라 불렀다.[5]
2. 생애
1919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광주군 구천면(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공립보통학교(上一公立普通學校)에 입학, 4학년 때인 1932년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속성과에서 1년을 공부한 실력으로 1933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보결시험에 합격했다.1941년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7년 뉴욕 대학교 상과대학에 편입학하고, 1949년 졸업하여 귀국하였다. 1949년 대한교역공사(大韓交易公社)업무부장으로 들어가 1950년 동남아시아 무역사절단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이사장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 공사의 해산으로 1951년 발족한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로 옮겨 상무이사로 재직했다. 1955년 이기붕의 알선으로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회(UNKRA) 뉴욕주재 한국대표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제네바 회담에서 한국업저버로 참석하였으며, 1956년 외자청장(外資廳長)이 되었다. 보다시피 전형적으로 무역쪽에 특화된 인사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익희와 선거에서 대결했다가 낙선하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익희의 아들 신하균을 물리치고 당선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였다.
국회의원 당선 이후 그 해 9월부터 교통부 장관으로 근무하다 1959년 3월 이기붕의 추천으로 내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최인규는 나태하게 지령을 수행하다 실수로 이기붕이 당선을 위해 부정투표한다는 지령을 언론에 유출시켰다. 임화수의 지나친 권력욕심으로 부정투표가 실행되었고 부정선거로 이기붕이 당선되었고 그 일로 인해 전국적으로 유혈충돌이 벌여졌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하여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시위대와 학생들을 발포 명령내리며 진압을 하고 체포한 시위대와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문을 했고, 그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4·19 혁명의 한 원인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3.15 선거 직후 자유당측에서 수습한다며 내무장관직을 사퇴한다. 후임으로 들어온게 홍진기 장관이다. 홍진기[6]도 혁명재판에서 유혈진압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다른 사람 모두 사형되는 와중에 소리소문없이 사면돼서 출소했다.
장관 사임 후 아내가 해외피신을 권유하자 평생 처음 빰을 때렸다고 한다. 4.19혁명 당시 아내와 여동생의 권유로 마지 못해 피해있었다. 5월 초에 법의 판결을 받겠다며 서둘러 자진출두하였다.(미망인 강인화 여사 인터뷰)
결국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으로 1961년 12월 21일 곽영주 및 임화수와 같이 교수형당한다.
교수형 집행 직전의 최인규
재판에선 자신의 죄를 인정했으며 다른 이들과 달리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처형 뒤 기자들이 최인규의 집에 찾아가 그의 아버지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 임금께 충성하다가 역 적들에게 목숨을 잃었으니 내 아들은 충신이다." 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7] 관련 기사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경기 6[8] |
[[자유당(1951년)|]] |
18,712 (43.58%) | 낙선 (2위) |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29,055 (58.64%) | 당선 (1위) | 초선[9] |
4. 대중매체에서
- 1981년 MBC 드라마 < 제1공화국>에서는 배우 남성훈이 연기했다. 이기붕 부부에게 접근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사격 명령을 내리면서 다 죽여버리라고 아주 악랄하게 나오지만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자 모든 걸 포기한 듯이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있다가 해외 도주를 권유하는 아내 따귀를 때리면서 "사내가 일을 저질렀으면 모든 책임을 져야지, 그렇게 더럽게 살 순 없다."고 일갈한다. 이후 재판에서 발포 명령을 인정하고 교수형당한다.
- 1989년 MBC 드라마 < 제2공화국>에서는 배우 남성훈이 연기했다. 늙은 이승만과 병약한 이기붕을 전면에 내세우고 실권을 행사하려는 야심가로 등장하며 그 때문에 이기붕이 민주당 구파와 막후 협상을 벌이는 것을 기자들에게 은근슬쩍 흘려서 막후 협상을 결렬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올리기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한다. 결국 부정선거에 항의한 3.15 의거가 터지자 스스로 내무장관 직에서 물러나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지만 결국 4.19 혁명이 터지고 허정 과도 정부에서 체포령을 내리자 외국으로 도피하라는 아내의 권유를 뿌리치고 체포당한다.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우린 정치범이에요. 세상에 정치범을 죽이는 나라도 있습니까? 아 그까짓 부정선거 좀 했다고 사람을 죽여요? 지들도 그 자리 가서 앉아보라 그래요. 다 똑같을 겁니다. 걱정 마시오. 한 몇 년 살다가 감형으로 나갈 거에요.
야인시대 123화 中
야인시대 123화 中
- 2002년 SBS 드라마 <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임선택이 연기했다. <공화국 시리즈>에서 해당 인물을 상당히 치밀하고 강단있게 그리는 것과 상반되게 찌질이에 가까운 캐릭터로 나온다. 121화에서 마산 시위 이후 데모데를 진압하라고 경찰에게 명령을 내린다. 123화에서 사형당하기 직전에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곽영주를 안심시키려 했는지 위와 같은 발언을 한 걸 마지막으로 극중 퇴장하면서 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5. 여담
- 동생 최형규는 1964년 박정희 정부에서 문교부 차관을 잠시 지내기도 했다. 최형규는 흥남비료공장 직공, 연탄 장사, 쌀 장사 등을 하며 재산을 모았고 택시회사, 화물운수사업을 하는 기업인으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찾아가 비밀리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1993년 사재 153억 원을 기부하여 자신과 부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딴 ‘형애장학재단’을 설립하였으며, 2004년에는 오랫동안 살아온 집을 팔아 70억원을 종로구에 기부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극구 꺼렸고, 형애장학재단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까지 6,000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지만, 장학금을 받은 학생 대부분이 최 이사장의 이름조차 모르며 그 흔한 장학금 전달식 사진 한번 찍은 적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관련 기사
- 일각에서는 이승만 정부 때 일본화된 불교를 청산[10]하기 위해 시행된 불교정화운동(비구 VS 대처승)을 최인규가 주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해방 직후만 해도 민중들이 대부분 불교를 따르면서 주요 기부금(시주)이 사찰에 집중되어 있던 터라[11], 불교계에서 보유한 자금, 토지 등은 정치자금 난에 시달리는 자유당이 노리기 딱 좋았다는 요지. 이승만 본인은 효봉처럼 수행 경지가 깊은 고승들에게 존경의 뜻을 비추며,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고자 했다고 한다. 그리고 8.15 광복 전후하여 가정을 꾸리지 않은 비구승들과 대처승들 간에 송광사, 해인사 등 주요 사찰은 당장 돌려받되, 나머지는 차후 시간을 두고 조계종에 돌려주는 타협안이 만들어진 상황이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도에 입적한 서옹 선사로, 불교 정화운동이 벌어지기 전만 해도, 이제 갓 출가한 17살의 사미승인 자신을 정식 출가한 수행자라 하여 상석(上席)인 맨 앞자리에 세우고, 나이든 대처승들은 뒤에서 예불을 드리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다만, 일부 혈기 왕성한 젊은 승려들이 이 조치에 큰 불만을 품은 분위기를 눈치챈 정부 인사들이 최인규 내무부 장관을 주축으로, 이들 젊은 스님들을 부추기는 한편, 언론, 일부 주먹들을 머리를 깎아 스님으로 위장시켜 동원해 비구승들을 지원해, 결국 사단이 난 것이 해방 후 일어난 불교정화 운동의 또다른 일면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독실한 크리스천인 이승만 박사의 호감을 얻을 겸, 정치자금을 확보할 겸 겸사겸사 일을 벌였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광주 보이스카웃 건물 등 대도시 시내권의 오래된 주요 건물 중에는 본래 사찰 소유의 토지였다가 이 정화운동 후 유야무야 개신교 계열 단체에 넘어간 사실이 있다.
- < 월간조선>에서 처형 직전 사진과 함께 처형 후의 시신들까지 적나라하게 나온 보도사진 화보를 1995년 특집으로 실은 적이 있다. 조선일보 보도(텍스트) MBC 뉴스데스크 2차 인용보도 최인규를 비롯한 임화수, 이정재,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등 8인의 최후 모습이 실려 있다. 사진 촬영자는 당시 중앙정보부로 보인다고 한다.
6. 둘러보기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254170; border-right: 10px solid #254170; text-align: center; margin: -0px -11px; margin-top: -12.5px; margin-bottom: -6px" {{{#!wiki style="margin-left:10px; margin-right:-17px; margin-top: -2px; margin-bottom: -8px; display:inline-table" |
<tablebordercolor=#fff,#1f2024><tablebgcolor=#fff,#1f2024> | }}}{{{#!wiki style="padding: 0px; display: inline-table; margin-top: -2px; margin-bottom: -8px" | <tablebordercolor=#fff,#1f2024><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1f2024> | }}}}}}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254170; border-right: 10px solid #254170;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181818,#e5e5e5 |
직위 | 명단 | ||
외무부장관 | <colbgcolor=#fff,#1f2024><colcolor=#254170> 장택상 → 임병직 → 변영태 → 조정환 → 허 정 | |||
내무부장관 | 윤치영 → 신성모 → 김효석 → 백성욱 → 조병옥 → 이순용 → 장석윤 → 이범석 → 김태선 → 진헌식 → 황호현 → 백한성 → 김형근 → 이익흥 → 장경근 → 이근직 → 민병기 → 김일환 → 최인규 → 홍진기 → 이호 | |||
재무부장관 | 김도연 → 최순주 → 백두진 → 박희현 → 이중재 → 김현철 → 인태식 → 김현철 → 송인상 → 윤호병 | |||
법무부장관 | 이 인 → 권승렬 → 이우익 → 김준연 → 조진만 → 서상환 → 조용순 → 이 호 → 홍진기 → 권승렬 | |||
국방부장관 | 이범석 → 신성모 → 이기붕 → 신태영 → 손원일 → 김용우 → 김정렬 → 이종찬 | |||
문교부장관 | 안호상 → 백낙준 → 김법린 → 이선근 → 최규남 → 최재유 → 이병도 | |||
부흥부장관 | 유완창 → 김현철 → 송인상 → 신현확 → 전예용 | |||
농림부장관 | 조봉암 → 이종현 → 윤영선 → 공진항 → 임문환 → 함인섭 → 신중목 → 정재설(서리) → 양성봉 → 윤건중 → 최규옥 → 임철호 → 정낙훈 → 정운갑 → 정재설 → 이근직 → 이해익 | |||
상공부장관 | 임영신 → 윤보선 → 김 훈 → 이교선 → 이재형 → 안동혁 → 박희현 → 강성태 → 김일환 → 구용서 → 김영찬 → 전택보 → 오정수 | |||
사회부장관 / 보건부장관 → 보건사회부장관 |
전진한 →
이윤영 →
허 정 →
최창순 →
박술음 /
구영숙 →
오한영 →
최재유 → 최재유 → 정준모 → 손창환 → 김성진 |
|||
교통부장관 | 민희식 → 허 정 → 김석관 → 윤성순 → 이종림 → 문봉제 → 최인규 → 김일환 → 석상옥 | |||
체신부장관 | 윤석구 → 장기영 → 이순용 → 조주영 → 강인택 → 이 광 → 이응준 → 곽의영 → 오정수 → 최용덕 |
}}}}}} }}}}}}}}} |
경기도 제4대 민의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
인천 갑 | 인천 을 | 인천 병 | 수원 | 고양 |
김재곤 | 곽상훈 | 김훈 | 홍길선 | 이성주 | |
광주 | 양주 갑 | 양주 을 | 포천 | 연천 | |
공석 | 강영훈 | 공석 | 공석 | 공석 | |
가평 | 양평 | 여주 | 이천 | 용인 | |
홍익표 | 유용식 | 김의준 | 공석 | 구철회 | |
안성 | 평택 | 화성 갑 | 화성 을 | 시흥 | |
오재영 | 공석 | 공석 | 홍봉진 | 이재형 | |
부천 | 김포 | 강화 | 파주 | 옹진 | |
공석 | 정준 | 윤재근 | 정대천 | 유영준 | |
* 이천
이기붕 사망 (1960.4.28.) * 광주 최인규 사퇴 (1960.5.3.) * 화성 갑 손도심 사퇴 (1960.5.3.) * 부천 장경근 사퇴 (1960.5.3.) * 평택 정존수 사퇴 (1960.5.26.) * 연천 이익흥 사퇴 (1960.5.31.) * 포천 윤성순 사퇴 (1960.7.1.) * 양주 을 강성태 사퇴 (1960.7.2.) |
|||||
◀
제3대
제5대 ▶
|
}}} }}}}}} |
[1]
화숙공파 31세 ○圭(규) 항렬
[2]
수석국무위원 대리 겸임
[3]
1923~?. 1984년 인터뷰 당시에는 살아 있었다.
[4]
지금의 서울상일초등학교
[5]
동시에 이승만이 하는 말에 무조건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는 국방장관
신성모는 '낙루장관'이라는 칭호가 있다.
[6]
삼성가
이건희 회장의 장인이며 이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의 초대 사장을 역임하였다.
[7]
사실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자란 이승만도 그렇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당시의 노년층은
대통령제를
선거군주제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대통령을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최고위 선출직 공무원이라는 인식보다 받들어 모셔야 할 나랏님이자 세습만 안할 뿐인 군주에 가깝게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은 군사 정변으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제3, 4공화국까지 이어져갔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에서도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대통령제를 선거군주제처럼 인식하고 워싱턴도 본인을 군주식으로 3인칭으로 일컫고 의전도 대통령 의전보다는 군주 의전에 가깝게 했었다. 물론 최인규는 3.15 부정선거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국민들을 해친 극악무도한 죄인이기에 최인규 아버지는 죄인의 부친으로써 죄인인 아들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이기적이고 추악한 변명으로
적반하장을 한 것에 불과하다.
[8]
광주군
[9]
1960.5.3 사퇴
[10]
조선총독부에서 결혼을 한 승려들만 사찰의 주지가 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여 해방 직후 전국의 주요 사찰에 모두 가정을 꾸린 대처승이 들어간 상태였다.
[11]
해방 후 정부에서 토지소유 현황을 파악해보니 전국 6대 지주와 사찰(절)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국민 대부분은 소작농이더란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