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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 제3대 대통령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 Idi Amin Dada Oum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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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12><colcolor=#ffffff> 본명 |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 Idi Amin Dada Oum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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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8년 5월 30일 | ||
우간다 보호령 캄팔라 나카세로힐 | |||
사망 | 2003년 8월 16일 (향년 75세) | ||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 |||
재임기간 | 제3대 대통령 | ||
1971년 1월 25일 ~ 1979년 4월 1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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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12><colcolor=#fff> 국적 |
[[우간다 보호령| ]][[틀:국기| ]][[틀:국기| ]](1925~1962) [[우간다| ]][[틀:국기| ]][[틀:국기| ]](1962~2003) |
|
배우자 | 말야무, 케이, 노라, 마디나, 사라 쿌라바 등 최소 6명 | ||
자녀 |
아들 타반 아민(1955 ~ ) 아들 자파르 아민(1967 ~ ) 아들 파이살 완지타(1983 ~ ) 딸 카디자 아브리아 아민(? ~ ) 등 최대 6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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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93cm, 126kg | ||
종교 | 이슬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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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ut I wanted to tell the boxers that the only chance to defeat the referee, who are aganist you or against the country, is to win by knock out. This is only thing.
국가의 적들을 처치하는 방법은 복싱에서 심판자를 K.O 시키듯이 하는 것뿐이다. 수단은 상관 없다.
아프리카 중부 내륙국
우간다의 제3대
대통령이자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독재자,
학살자.국가의 적들을 처치하는 방법은 복싱에서 심판자를 K.O 시키듯이 하는 것뿐이다. 수단은 상관 없다.
정치적, 종교적 분쟁이 계속되는 아프리카 대륙 특성상 수많은 독재자가 난립하지만 그 중에서도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와 함께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와 악명이 높은 인물로, 통치 기간 동안 잔학하고 극악무도한 정책을 펴 전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70년대~80년대 내내 '검은 히틀러'라는 멸칭으로 전 세계 신문에 오르내리던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탐욕스럽고 잔인하게 그려지는 아프리카 국가의 독재자의 스테레오타입을 만들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언론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다루다 보니 아프리카의 독재자들 중에선 카다피나 무가베 등과 함께 가장 높은 인지도를 지녔다.
그의 집권 기간인 8년 동안 무려 30~50만 명의 우간다 국민들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며[1] 독립 직후에는 아프리카에서도 안정적인 나라로 꼽히던 우간다의 경제까지 그의 형편없는 경제 정책으로 파탄났다.
2. 일생
자세한 내용은 이디 아민/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3. 기행
살아있는 독사를 잡아 그 자리에서 회를 쳐서 요리를 만들어 외교 사절에게 권했고, 각료회의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장관이 있으면 즉석에서 뺨을 때리는가 하면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다리 밑으로 기어가도록 명령하기도 했다.그는 엔테베 사건의 여파로 영국이 우간다와의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때인 1977년에 자신을 ' 대영제국의 정복자'로 선포하고 모든 공문서에 적히는 자신의 이름 앞에는 '모든 지상 동물과 바닷속 모든 물고기들의 군주이시며, 좁게는 우간다에서, 넓게는 아프리카에서 대영제국을 무찌른 정복자이신 종신대통령 야전원수 알하지 이디 아민 다다 박사 각하(His Excellency, President for Life, Field Marshal Al Hadji Doctor Idi Amin Dada, VC(Victoria Cross), DSO(Distinguished Service Order), MC(Millitary Cross), CBE(Conqueror of the British Empire), Lord of All the Beasts of the Earth and Fishes of the Seas and Conqueror of the British Empire in Africa in General and Uganda in Particular.)'라는 긴 수식어를 붙이게 했는데 #, 우간다 국민들은 이 호칭을 막힘없이 외워야만 했으며 이를 못 외운 측근들은 당연히 처형당했다. 반문맹이었는데도 마케레레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셀프 수여하기도 했다. 마치 사실상 반문맹이었는데도 저명한 화학자를 자칭한 엘레나 차우셰스쿠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1975년 7월에 캄팔라에서 열린 외교관 파티에서 아민이 탄 가마를 들고 가는 영국인 사업가들 |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수뇌회의(1975.7.28~8.1) 당시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유명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보복을 한답시고 빅토리아 호수 인근의 섬을 케이프타운이라고 명명한 뒤 폭격을 자행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이때 폭격이 실패하자 그는 해당 부대 지휘관 겸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된 전 공군 참모총장을 그 포격지에 묶어놓고 재폭격을 실시하고, 그렇게 참모까지 처형시키면서 성공시켰다. 이스라엘과 단교했을 때는 관저 뒤뜰 너머에 언덕을 만들어 골란 고원이라고 이름붙인 뒤 병사들에게 점령하라는 훈련을 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권투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에게 도전장을 내기도 했으며, 1975년 6월 9일에는 우간다에 거주하던 영국인 강사 데니스 힐즈(Denis Hills, 1913~2004)가 자신을 '검은 네로', '공포로, 마을의 폭군처럼 통치한다'고 묘사한 원고를 쓰자 반역죄로 기소한 후 군사 재판소를 거쳐서 힐에게 공개 총살형 선고를 내렸으나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제임스 캘러헌의 우간다 방문 때문에 감금 1달 후인 동년 7월 9일에 풀어준 적도 있었다. 1975년 9월 7일자 뉴욕 타임즈에 실린 힐즈의 회상.
거기다가 그는 1974년에 엘리자베스 2세 대신 영연방의 수장이 되겠다며 '우간다가 지구의 지리적 심장부'라는 근거를 들며 유엔 본부를 우간다로 옮겨야 한다는 말도 한 적이 있고. 심지어 어느 날에는 갑자기 미국에 전쟁 선언을 한 뒤 바로 다음 날에 자신이 승리했다는 선언을 한 적도 있었다. 그의 기행에 대한 1977년 3월 4일자 경향신문 기사. 게다가 친 나치 성향이던 그는 ' 독일에 히틀러의 동상이 세워지지 않았다'며 캄팔라에 아돌프 히틀러의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만류해서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고 한다.
3.1. 식인 행위?
그는 식인을 했다는 것으로 매우 유명한데 젊은 여자는 처형 후 성기를 도려내 먹었다거나, 인육을 먹고 국민들 앞에서 자신이 분석한 인육의 맛을 논하거나 주술에 취해 자신의 10살 난 아들을 죽인 후 그 심장을 꺼내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하지만 정작 아민 본인은 사우디아라비아 성직자들 앞에서 사람을 죽이기는 했어도 먹지는 않았다고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결국 충실한 무슬림이 아니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성직자들은 그를 추방시키자고 건의했으나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이스라엘에 맞섰다는 점 하나로 편의를 봐주었고 무엇보다 식인 혐의에 대한 증거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다만 아민 본인의 부인은 본인의 증언이니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치더라도 그의 식인 행위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증인이 있는데, 바로 1971~1978년까지 그의 전속 주방장이던 오톤데 오데라다. 'Teufelskoche'라는 책자(한국어 번역판 제목 <날 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에서 나오길, 오톤데 오데라는 케냐에서 태어나 우간다로 가 영국인 성공회 사제에게 조리를 배워 우간다 호텔 주방 일을 하면서 경험을 쌓았는데 우간다 독립 후 케냐인 추방에 휘말려 고생하다가 반란을 일으키던 이디 아민 군대의 주방일을 돕게 되면서 이 인연으로 그의 전속 주방장이 되었다.
오데라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대식가에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면서 잔학한 기행을 하던 인간이지만 식인에 대해선 극도로 부정적이며 나아가 식인을 했다느니, 내가 사람 고기를 준비했다느니 등 온갖 모욕적인 소문이 돌고 있다고 분노했다고 하며 주방장으로 일하던 7년 동안 아민의 식인에 대해서 강력히 부정하였다.
오데라는 주방장으로 일하면서 그에게 엄청난 월급이나 보너스, 벤츠 차량, 으리으리한 집 같은 후한 대가를 받고 아내도 여럿 두며 잘 살았지만 이런 막대한 대가를 받는 대신 문자 그대로 목숨 걸고 일해야 했다고 한다. 그 예시로 하루는 오데라가 주방에 있는데 무장 친위대원들이 총기를 들고 주방으로 난입하여 자신과 주방 보조들을 끌고 갔다고 한다. 어안이 벙벙한 오데라에게 그는 무척 화를 내며 자신의 13살 아들 모제스(Moses Amin)가 오늘 저녁을 먹고 배 아파하며 병원으로 갔다고 일갈했는데, 만약에 독이 검출되면 네놈들은 아주 잔혹하게 죽을 각오를 하라고 으르렁거려서 다들 공포에 질려 덜덜 떨기만 했다고 한다. 물론 의사에게 아들이 저녁으로 나온 건포도를 넣은 달콤한 필라프를 과식했기 때문에 배탈이 난 것뿐이라는 진단을 받자 미안하다면서 씨익 웃어줬다고 한다. 그 뒤론 오데라를 비롯한 그의 요리사들은 음식 재료에 대하여 사전 점검은 물론 다들 그야말로 완벽하게 매달리며 주방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 케냐와 영토 및 여러 갈등이 빚어지면서 케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데라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강제로 케냐로 도로 쫓겨났다. 케냐인 아내 한 사람만 같이 추방 당했고 그 뒤로 30년 넘은 지금도 우간다에 가보질 못해 다른 아내나 재산에 대하여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오데라는 케냐로 도로 추방 당하면서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빈털터리로 쫓겨났고 케냐에선 오데라가 가진 음식 솜씨가 통하지 않아[3] 운전 기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아내는 가정부로 일하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러다 보니 오데라는 아민에 대하여 찬양할 생각은 없으며 거짓으로 식인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외신 기자들에게 털어놓았다. 다만 그가 워낙에 성격이 제멋대로이고 사람을 마구 죽인 건 사실이었으며 죽인 사람을 악어 밥으로 던졌다는 이야기를 친위대들이 하는 걸 들었다고 했고, 식인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뱀고기 회 같은 온갖 괴식을 즐긴 것은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특히 오데라는 90년대에 자신에게 외신 기자들이 찾아와 그의 식인에 대한 걸 물어봤을 때 대체 뭔 소리 하는지 몰라 멍 때렸고 그때서야 식인 장면을 넣은 그에 대한 영화를 보고 "저런 엉터리가 어디 있냐!"고 격분했다고 회고했다. 더불어 "그가 식인했다는 걸 내가 왜 부정하겠느냐? 그걸 증언하는 걸로 돈을 벌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내가 아민을 감쌀 것 같냐? 내가 인육 요리를 준비해서 그걸 탓할까봐 감춘다? 만약 아민이 식인 요리를 즐겼다면 나에게도 가차없이 만들라고 지시할 자였다. 뱀이나 별별 동물 생식을 준비하라고 하여 다 준비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식인 요리 준비를 거부한다? 그렇게 수틀리면 나도 얼마든지 죽일 아민이었다. 추방 당하기 전 나도 교도소에 몇 달 동안 갇혔을 때 '이제 나도 죽는구나'라며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아민이 그동안 먹은 요리들이 워낙 맛있어서 살려준다며 맨 몸으로 풀어준 것뿐이다."고 털어놨다.
결론적으로 그의 식인설은 그 때문에 죽을 뻔했던 전속 요리사마저 격렬하게 부정했고 뚜렷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위 카더라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실상 정설이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장 베델 보카사의 식인도 공식적으로는 무혐의로 판정 났음에도 보카사의 요리사는 물론이고 당시 미국 대사가 식인설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암시가 있는 증언을 남긴 것과는 완전히 대조된다.
여하튼 이디 아민 식인설은 상당히 유명하기 때문에 여러 매체에서 아민이 식인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예외적으로 2006년 영화인 라스트 킹에서는 식인설에 대한 클리셰를 뒤집기 위해서인지 아민이 귀빈들을 초청한 만찬의 축사를 진행하며 "여기 있는 음식 중 사람 고기는 없습니다"라며 재치 있는 농담을 던지는 장면이 나왔다. 한편 라스트 킹 원작 소설에서는 식인설을 긍정하듯 만찬 중 아민이 자신이 식인을 한 적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주변 사람들이 얼어붙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실 말단 병사로 전쟁에 참전했을 때 식량 부족으로 모두가 아사 직전인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치명상을 입은 전우를 안락사시키고 고기를 먹었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4. 평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대중적인 악명이 높은 독재자 중 한 명이며, 그에 걸맞게 역사학자들은 잔혹성과 억압성 면에서 독재자가 난립하던 1970년대의 아프리카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악랄한 독재자로 평가하고 있다.[4] 이디 아민 치하의 우간다는 체제의 억압성과 지옥 같은 감옥에 사람을 가두고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했다는 것과 겨우 자신의 반대파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부족의 멸족을 시도한 것은[5] 나 폴 포트[6], 아돌프 히틀러[7]도 하지 않은 짓이다.단순히 매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독재자였을 뿐만 아니라 내치 면에서도 지나친 비흑인을 위시한 사업가들을 박해하는 바람에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무분별한 인도인 추방으로 우간다의 경제 기반은 뿌리까지 뽑혀버렸고, 쫓겨난 후에도 여전히 권력욕에 차있던 밀턴 오보테의 재집권과 그로 인한 반발로 일어난 내전, 이 과정에서 일어난 오보테의 학살, 요웨리 무세베니의 집권과 그에 버금가는 학살자 조지프 코니의 등장 등의 지독한 혼란상을 거친 끝에 결국 우간다는 이전에 비해 경제가 성장했다는 2021년 기준으로도 1인당 GDP가 884달러 미만인 최빈국으로 남게 되었다. 우간다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나 우간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정적인 정세를 이어온[8] 케냐의 1인당 GDP가 우간다의 2배 이상인 2,081달러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후손들의 미래까지 철저히 망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집권 기간은 고작 8년으로, 독재자치고는 그렇게 긴 기간이 아닌데도 우간다에 이 정도 해악을 저질렀으니 그가 더 오래 살아 수십 년 동안 집권했으면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것은 기본으로 보일 정도로 악행의 규모와 분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불어났을지도 모른다.[9]
5. 가족 관계
그는 최소 6~7명의 부인, 최소 30명의 내연녀들 사이에서[10] 슬하에 최대 60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었으며 신원이 확인된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집권 시절에는 흑인 여자와 백인 여자 2명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을 즐겼고 67세였던 1992년에도 막내딸을 출산했으며 사망한 2003년에도 재혼한 적이 있다.1975년 7월에는 사라 키올라바(Sarah Kyolaba, 1955~2015)라는 이름을 가진 임신 중이던 고교생 무용수가 마음에 들어 그녀의 남자친구를 참수한 후 다음 해에 캄팔라에서 당시 가치로도 약 1천만 달러가 든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려 그의 5번째 아내로 만들었다.[11]
-
장남 타반 아민(Taban Amin, 1955 ~ )
: 2003년까지 요웨리 무세베니에 반대하는 반군 단체인 서나일 뱅크 전선(WNBF)의 지도자였다. 이후 친 무세베니로 전향하여 현재는 내무안보기구 부국장 및 서나일 참전용사 및 전직 전투원 협회의 협회장을 맡고 있다. 2017년에는 하원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는데 이후 당선이 취소되었다가 법정 싸움 끝에 2020년 1월 당선에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선거에서 고작 20.7%를 받고 3위로 나가떨어졌다. 2021년에는 금 사기에 연루되기도 했다. -
아들 자파르 아민(Jaffar Amin, 1967 ~ )
: 현재 DHL에서 근무 중이다. - 아들 파이살 완지타(Faisal Wangita, 1983 ~ )
- 딸 카디자 아브리아 아민(Khadija Abria Amin, ? ~ )
왼쪽은 이디 아민의 아들인 파이살 완지타.[12] 위의 사진 오른쪽은 그에게 살해 당한 피해자. |
그 아빠에 그 아들이라고 그의 아들 중 파이살 완지타도 갱단의 일원이 되어 경쟁자 갱 동료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살인을 저질렀다. #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칼로 20번이나 찌르고 야구방망이와 맥주병, 망치, 주먹 등을 이용해서 피해자를 구타해서 사망케 해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것 때문에 과연 부전자전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2007년 4월, 런던 올드 베일리 법원의 스티븐 크레이머 판사는 그의 아들 파이살 완지타에게 살해 공모 혐의를 인정해 5년형을 선고했다. 고작 5년형만 선고 받은 이유는 당시 살해 장면이 찍힌 CCTV에 완지타가 직접 흉기를 휘둘러 살해하는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완지타는 다른 조직원들이 피해자를 난자해 쓰러트린 후 걍 열심히 스톰핑만 했다. 참고 자료.
6. 그 외
이디 아민의 발언들. |
*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우간다 라이트 헤비급 권투 챔피언을 지낸 적이 있다. 그는 1961년 당시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원래부터 비만은 아니었고 운동 선수답게 건장한 몸이었지만 집권하고 나서 폭식을 하기 시작하여 비만이 심해져 말년에는 성인병을 심하게 앓다가 죽었다. 그는 권투 외에도 수영 선수와 럭비 선수 경력도 있었다.
- 사우디아라비아의 해외 원조를 유도하기 위해 캄팔라의 언덕에 아프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거대한 모스크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건설비가 횡령되었기 때문에 아민의 퇴진 후는 물론 그의 사후에도 이 모스크는 한동안 완공되지 못했다가 결국 착공으로부터 30여 년 후인 2008년에야 완공되었다.
- 육식을 즐기고 영국 요리를 좋아해서 티타임을 즐겼고 카사바, 기장으로 만든 빵, 속을 채운 구운 염소고기[13]를 좋아했으며, 특히 패스트푸드를 매우 좋아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피자 등의 패스트푸드를 가족들과 같이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인 자파르 아민이 밝힌 바에 따르면 아민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KFC의 오리지널 치킨이었다고 하며 그의 전속 주방장 오톤데 오데라는 아민에게 쇠고기와 동물의 신장, 양파의 혼합물을 넣어 구운 파이와 틸라피아 요리, 양고기 필라프, 초콜릿 푸딩을 만들어줘야 했다고 한다. 참고로 오데라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고는 저녁 식사가 없다며 화 내는 모습을 여러 번이나 봤다고 한다.
- 상술한 에드워드 루구마요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현대 국가의 대통령이라 하기에는 심각할 정도로 무식한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일례로 그는 하루 종일 집무실에 앉아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긴 것은 물론, 어떤 심각한 문제에도 아침 시간의 반 이상을 집중하지 못했다고 한다.[14] 덤으로 그는 '자신이 나라를 성공적으로 통치한다면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라는 허풍도 떨었다고 한다.
-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금전 문제에 대해 서툴렀다고 한다. 젊었을 적에 은행원이 수표에 대해 '액수와 사인을 쓰면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 것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고 착각해 대량의 수표를 얻은 후 며칠 뒤 다 쓰면 다시 발행하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이 상사에게 알려져 수표에 있던 돈들이 지급 취소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 시절에도 한 측근이 그의 사치를 지적하자 ' 그렇다면 (지폐를) 찍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고지식하게 답했다고 한다.[15]
- 자동차를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스포츠카 여러 대를 보유할 정도로 스포츠카를 좋아했다. 특히 시트로엥 SM을 좋아해서 동일한 기종을 7대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직접 스포츠카로 캄팔라를 질주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경비원들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볼 정도로 많은 물건들을 사는 쇼핑을 즐겼다고 한다.
- 정치적 행각과는 완전히 별개로 인간적으로는 장난기가 많고 농담을 좋아했으며 슬랩스틱 코미디나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도 즐겨 봤고 톰과 제리의 열성 팬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몰락 후 그의 자택에서 수많은 애니메이션 컬렉션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라 키올라바 아민은 그의 사후에 전 남편에 대해 '그는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쾌한 사람이었고 매우 재미있고 친절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아프리카의 영웅이자 멋진 아버지였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나 폴 포트 같은 최악의 독재자들도 개인적으로는 자상하고 친절한 인물이었으니 '인간' 이디 아민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의외로 상당한 달변가였으며 뼈 있는 농담을 즐겨 했다.[16] 실제로 그가 한 농담은 나라 이곳저곳에서 유행어처럼 입에 오르내렸다고 하는데, 일례로 그는 이웃 나라인 탄자니아의 대통령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그의 정책을 비난하자 마치 상심한 듯 천연덕스럽게 "나는 니에레레를 너무 사랑한다. 그가 여자였더라면 흰 머리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려 했을 것"이라며 조롱했고,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담은 전보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농담들 속에는 때때로 매우 진지한 면모도 있었다.
- 그가 살아있던 시절 우간다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행해지던 신고식 행사가 바로 큰 소리로 " 이디 아민 죽어라!"하고 소리 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가 대표팀 내에 프락치를 심어뒀다는 이야기가 나돌던 시절이라 정말 많은 담력을 요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 이후 밝혀진 의학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장기간의 매독 감염으로 가벼운 조울증에 걸린 상태였고 그로 인해 격렬하고 상반되는 감정과 발작, 편집증, 정신분열증을 일으켰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집권하던 1970년대 중반에 우간다에서 일했던 이스라엘 의사는 텔아비브의 신문에 '아민이 매독으로 인한 뇌 손상이 일어났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라는 증언을 남겼다. 하지만 매독 감염으로 인해 생기는 정신이상은 정신분열증보다 매독으로 인한 치매로 분류한다. 이 차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실은 절망적일 정도로 상당한 차이다. 정신분열증은 약으로 증상을 크게 완화할 수 있지만 치매는 아직도 현대 의학에서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17]
-
이디 아민 체제에서 혜택을 누린 몇몇
무슬림들은 함께 모여 그의 기념관을 세우는 것을 의논했으나 자금 지원을 부탁한
아랍 국가들은 이들의 요구를 죄다 거절했다고 한다. 물론 우간다 안의 무슬림 모두가 이디 그를 지지한 게 아니다. 그의 식인 소문을 듣고 기겁한 보수적 율법학자들이나 진보적 무슬림들은 '이것은 이슬람의 망신거리가 아니냐'면서 그를 극도로 혐오했으며, 결국 우간다를 떠나서 아랍 각지에서 그의 행위는 이슬람의 망신이라고 열심히 주장하면서 아랍 국가들이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 저항했다는 점으로 뜻이 통했을 법한 아랍권에서도 그를 외면했고
무아마르 카다피,
사담 후세인조차도 환영하지 않았다.[18] 부하들도 "사람을 먹었다는 식인종을 받아줬다간 우리만 망신 당하니 내보내라"고 충고했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여러 이슬람권 나라를 떠돌던 그의 망명을 마지막으로 받아준 나라인 사우디아라비아도 이스라엘과 맞섰기에 받아줬다고 정부에게 밝혔지만 정작 거기서도 불만이 적지 않았는데, 이유는 식인을 해서 쿠란을 모독한 극악무도한 자를 왜 받아줘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부족함 없이 넉넉히 살기는 했으나 전술한 대로 정치적 행사에서부터 그 모든 초청 자리는 일절 제외되었다. 사실 왕가에서도 얼굴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투로 대했는데 어느 왕족은 외출 도중 그와 만나자 "나를 보고 잡아먹고 싶어할지도 모르잖아?"라면서 아예 식인귀로 여기며 불쾌한 얼굴로 인사도 안 받아주고 가던 길을 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론리플래닛 지은이가 쓴 <론리플래닛 나쁜 나라들> 사우디아라비아 편에서도 언급된다.
- 미국 흑인이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포럼 'The Village Forum'에서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9위에 오른 적이 있다고 한다. 8위도 로버트 무가베이고 10위가 넬슨 만델라라는 것을 감안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는 TheTopTens에서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 1위에 오른 것과 비슷한 투표 조작이 아니라 해당 토론에 참여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좋은 지도자'의 기준을 경제적, 정치적 기준이 아닌 반식민주의, 반서방적 기준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19]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아프리카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지도자들이 드물다는 말이 되지만.[20] #
- 1975년에는 캐나다에서 이디 아민 팬클럽이 만들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코미디 방송 진행자 진 테일러(Gene Taylor, 1947~2001)가 만든 것인데, 당연히 목적은 풍자였다. #
6.1. 대중매체에서
파일:Idi_Amin_of_Uganda_1.png | |
이디 아민 영화 한국 개봉 당시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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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라드 파텔 감독의 1981년작
이디 아민, 원 제목은 'Rise and Fall of Idi Amin'.
케냐와
나이지리아,
영국 합작 영화이며 1990년에 인창영화가 수입해 한국에서도 상영했고 이듬해 세진프로덕션에서 비디오로도 나왔다. 고기를 손으로 집어먹는 포스터와 영화 광고 어구가 상당히 무섭다. 포스터를 장식하는 고기는 영화를 보면 반대자 검시 현장에서의 인육이다. 전술했듯 그에게 죽을 뻔했던 전속 요리사도 격렬하게 부정한 그의 식인 루머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그리 평이 좋지 않고, 흥행도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서울 관객 3만 정도에 그쳤다. 구할 수 있다면 볼 만하다는 평가다. 다만 한국 비디오판에서는 인육 취식이나 반대자 머리 냉동실에 넣어두기나 독사 회 먹기 등등 잔인한 부분들이 몽땅 삭제되었다. 그때 당한 사람들이 자문에 참여했고 학자 중 하나는 본인 역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주연 조셉 올리타(Joseph Olita, 1944년 케냐 출생, 2014년 6월 2일 병으로 사망). 나중에 덴젤 워싱턴이 나온 《미시시피 마살라》(1991)에서도 이디 아민으로 잠깐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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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2006년작
라스트 킹, 원 제목은 'The Last King Of Scotland'이며 한국 개봉명인 '라스트 킹'은 제목 일부만 떼어낸 것이다. 상세 내용은
라스트 킹 문서 참고.
주연 포레스트 휘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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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 아민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다. 제목은 <장군 이디 아민 다다>(1974). 그의 진솔한 이면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사실 감독이 몇 군데 페이크임을 넣어두었다. 애시당초 감독이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이나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이랑 친했던 바벳 슈뢰더다.
페이크를 넣는 방식은 이를테면 아민이 자신은 민주적으로 통치한다고 자랑하는 장면 뒤에 의문사나 의회 해산에 대한 기록 영상을 넣는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판본을 2가지 만들었고 이 중 그에게 유리한 판본만 우간다에서 상영했다.
게다가 서구에서도 원판이 자진해서 극장에서 내려갔는데 감독이 원판을 극장에서 내린 과정도 걸출하다. 그는 우간다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을 억류한 후 감독에게 전화를 강제로 걸게 하여 극장에서 영화를 내리게 했는데, 당연히 감독은 인질들의 안전 때문에 영화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간다도 이집트처럼 사실상 치외법권이 없다고 봐야 하고 외국인들도 우간다 국법을 동일하게 적용 시켜 처벌한다. 그러니 제 아무리 우간다보다 뛰어난 서방이라도 우간다를 건들지 못하는 것이다.
우간다판 영화는 그의 선전 영화로 유명해졌지만 아민이 퇴임한 후 원판 영화가 공개되었다. 현재 한국에도 DVD가 수입되어 판매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찾아보길. 자화자찬에 쩔어있는 그의 온갖 기만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이 버마에서 일본군을 격퇴했고 모세 다얀과 자신이 절친한 사이이며 골다 메이어가 자신을 아들 같이 생각했고 피델 카스트로가 자신의 '위엄'에 감명 받아서 굴복했다는 등 거짓으로 점철된 자랑을 했다. 애초에 1946년에 영국군에 입대한 사람이 2차 대전에 참전했다는 것부터가 말이 전혀 안 되는 소리다.
- 레슬리 닐슨 주연 코믹 영화 < 총알탄 사나이>(1988)에서 그가 초반부에 잠깐 나오는데 미국 배우 프린스 휴즈 Prince Hughes (1947–2004)가 맡았다. 다만 엑스트라 수준이다. 주인공 프랭크에게 고르바초프, 호메이니, 아라파트, 카다피, 차우셰스쿠, 카스트로 등이 쳐맞는데 그 자리에 있던 이디 아민은 쳐맞고 창문 밖으로 내던져 떨어졌다.[21]
[1]
동시기 집권하던
폴 포트보단 적지만 둘 다 잔혹한 건 같다.
[2]
캄팔라의 교도소에서 쇠망치로 맞아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
[3]
요리를
영국인에게 배웠기 때문에
백인들이 주로 먹는 요리들만 할 줄 알아서 대다수
흑인들 사이에서 음식 장사를 해도 팔릴 리가 없었다.
[4]
당대 아프리카의 독재자 중 확실히 이디 아민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은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밖에 없다. 사실 응게마는 진짜로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아돌프 히틀러와 폴 포트도 능가한다고 평가받는 인물인지라...
[5]
르완다 내전이나
시아드 바레의 이사크족 학살처럼 아프리카에서 자국에 사는 특정 부족의 절멸을 목적으로 한 학살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은 특정 부족이 이전에 기득권층을 차지했던 것에 반감이 쌓인 끝에 벌어진 것이었지 아민처럼 자신의 반대파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학살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로버트 무가베의
구쿠라훈디 정도가 이에 비견된다.
[6]
나이도 비슷하고, 동시기에 집권했고 몰락했다.
[7]
물론 폴 포트와 히틀러도 소수 민족 학살을 하긴 했지만 독재자 본인만의 광신적인 신념에 기반했던 폴 포트와 히틀러의 학살과는 달리 이디 아민의 학살은 '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그 추악함이 더욱 강조된다.
[8]
1982년 케냐 쿠데타와 2007~2008년 대선 폭력 사태 같은 혼란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케냐는 우간다처럼 내전에 시달리는 일은 전혀 없었으며, 이디 아민 같은 막장 지도자가 출현해서 나라를 전반적으로 파탄냈던 적도 당연히 없었다.
[9]
이와 비슷하게 단기간에 국가가 박살난 예로
크메르 루주 치하의
캄보디아인
민주 캄푸치아가 있다. 크메르 루주는 정상적인 민주 국가의 한 대통령이 집권한 후 물러나는 시기와 비슷한 4년밖에 집권하지 않았다.
[10]
이들 중 3명은 싫증이 나서 곧바로
이혼했다.
[11]
참고로 그녀는 남편이 축출된 후 남편을 따라갔다가 1982년에 아민과 헤어지고
독일로 가서 란제리 모델로 일했다고 하며, 이후에는
런던으로 가서 1997년에는 런던에서 아프리카 요리를 제공하는 식당을 운영했지만
바퀴벌레와 썩어가는 쥐까지 발견될 정도로 위생 상황이 열악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식품안전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된 적도 있었다. 이후에도 그 식당은 위생을 일신한 채 한동안 운영하다가
토트넘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영국의 이웃들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2015년 6월 11일에
암으로 사망했다.
[12]
그의 어머니가 바로 상술한 사라 키올라바 아민이다.
[13]
내장을 제거하고 수염을 자른 후 쌀, 감자, 당근, 파슬리, 완두콩, 허브 및 향신료로 채운 후 굽고 '살아있는 것처럼' 서있는 자세로 탁자 위에 가져왔다고 한다.
#
[14]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도 어설프게나마 5개 국어를 구사한 것과 하술하듯 기발한 농담을 즐겨 했다는 것을 보면 실제로는 머리가 나쁘기는커녕 꽤나 좋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 받았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실제로
정신병을 앓고 있었으니 한 가지 업무에 집중하는 것조차도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15]
다만 어느 면에서는 아민이 무가베보다 낫긴 하다. 사실상 일자무식이던 아민과는 정반대로 무가베는 무려
영국 명문대 경제학 석사 출신이었는데도 역대급
초인플레이션을 만들어냈으니...
[16]
아민의 행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라스트 킹에서도 이러한 면모가 부각된다.
[17]
실제로
적도 기니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가 이디 아민마저 능가하는 수준의 끔찍한 학정을 벌인 것도 온갖
정신질환을 앓던 와중에
마약에까지 중독되어 정신이 망가졌던 것의 영향이 매우 크다.
[18]
사실 아민하고 저 둘을 비교하는 건 실례에 가깝다. 후세인은 몰라도 카다피는 궁지에 몰린 말년을 제외하면 아민처럼 공포 정치를 하고 반대파를 끔찍하게 죽이는 악행은 안 했다. 그 후세인조차도 아민마냥 집권기에 기행을 수시로 벌인 적은 없었으니 저 둘은 아민에 비하면 그래도 정신은 멀쩡한 독재자들이었다.
[19]
실제로 독립운동가 출신이던
콰메 은크루마(
가나)와
아메드 세쿠 투레(
기니)는 이 투표에서 각각 1위/4위에 올랐다. 8위를 기록한 무가베도 타락 전에는 만델라와 함께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20]
토마 상카라,
제리 존 롤링스,
프랑스알베르 르네,
폴 카가메 등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몇 안 되는 아프리카 독재자로 꼽힌다.
세레체 카마도 경제적으로 성공한 아프리카 지도자이긴 하나 독재자가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이므로 논외.
[21]
참고로 이 영화가 나온 해 아민은 한참 전에 쫓겨나 백수 신세가 된 지 오래였다. 나머지 인물들은 당시에도 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