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8월 12일 국민방위군 사령관 외 5명 총살 집행 순간.
1. 개요
銃 殺 刑 / Execution by firing squad, Fusillading사형(死刑) 방법 중 하나.
2. 설명
말 그대로 사람을 총으로 쏘는 형벌이다. 총기가 개발되면서 생긴 사형법으로 다른 사형에 비해 절차가 간단하고 그나마 덜 잔인(?)하다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공개처형을 하게 되면 보통 총살형으로 집행한다. '총살'을 '사살'의 의미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총살'은 '총살형'의 줄임말로서 사형집행방식의 일종이고 사살은 사형집행방식이 아닌 경우에(주로 교전 중에) 총으로 쏴서 상대방을 죽이는 경우를 가리킨다.전쟁에 쓰는 무기를 사용한다는 특성 때문에 보통 군인 수형자들의 명예를 지켜주는 명예로운 처형으로 간주된다. 군인은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일을 하고 총을 맞아 죽는 것이 다반사인데, 이를 사형 방식으로 도입한 것으로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처럼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군인으로서의 마지막 명예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정식 재판에 의한 총살형은 대상자를 세워놓고 결박한 뒤 사살하며, 소련과 중국은 무릎 꿇리고 뒤통수를 쏴서 집행했다.[1] 소련에서는 무릎을 꿇리고 후두부에 권총을 쐈고[2] 중국은 소총을 쏜다.
20세기에는 군인뿐만이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자주 쓰였다.
경우에 따라 권총이 사용될 때도 있으나, 보통 정식으로 죄수를 처형할 땐 제식 소총을 단발로 놓고 집행한다. 현대 대다수의 국가는 필요 이상의 잔혹 행위를 최대한 자제하기 때문에 자동화기나 산탄총과 같이 신체가 심하게 훼손되는 고위력 화기를 쓰는 경우는 드물다. 단, 북한과 같은 독재 국가에서 독재자의 눈 밖에 났거나, 혁명이 성공한 후 차우셰스쿠 부부와 같이 국민감정이 좋지 않은 인물을 처형할 경우, 또는 ISIS와 같은 테러리스트들의 경우에는 보복 또는 경고의 의미로 자동화기나 중화기를 쓰기도 한다. 북한의 경우 원래는 3명이 최대 실탄 9발[3]을 쏘는데 2007년에 구호나무를 벌채후 중국으로 밀매했다는 이유로 외화벌이 책임자 오문혁을 자동소총으로 실탄 99발을 발사해 집행한 사례도 있으며 악명 높은 독재자 차우셰스쿠 부부의 사형은 자동소총으로 명중한 탄만 120여 발에 달할 정도로 아예 벌집을 만들어 버리며 집행되었다. 김정은 집권 후 북한은 4신 기관총을 공개처형에 쓰는 것으로 유명하며[4], ISIS도 자신들의 잔혹성을 과시하기 위해 산탄총, RPG-7 등 중화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드물게 총을 넘어 화포로 처형하는 포살형도 존재했는데, 1930년까지 영국 육군은 내부 반란, 배신을 한 자국 육군 장병을 대포의 포구에 머리가 위치하게 해 놓고 포를 쏴 죽이는 제도가 있었다. 세포이 항쟁 때 반란을 일으켰다 잡힌 세포이들도 이렇게 처형됐다.
보통 사형수 한 명에 여러 명의 집행인이 배속되고, 동시에 사격하도록 되어있다. 이는 누구의 총알이 최종적으로 사형수의 숨을 끊었는지 모르게 해서 죄책감을 덜기 위함이다. 교수형 시에 5명[5]의 집행인이 동시에 레버를 당기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 등지에서는 사형집행인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실탄이 아닌 공포탄이 장전된 총을 섞어서 주는 경우가 있다.[6] 다만 공포탄은 반동과 총성이 실탄보다 훨씬 약하기 때문에 총 좀 쏴본 사람이라면 바로 차이를 체감할 수 있고, 반자동 소총이라면 노리쇠 후퇴도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총을 개조하든가 단발 소총을 써야 남들이 봤을 때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물론 본인은 알더라도 남들이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차이가 있으니 의미가 없지는 않다. 이 방식이 국제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총살형 자체가 드물어진 시대다 보니 이런 저런 차이가 있다. 한편 한국이나 북한은 전원 총살형 집행 시에는 실탄을 사용하며 북한의 경우에는 머리-배-가슴 등으로 총 9발(혹은 6발)을 쏜다고 한다. 다만 이는 탈북자의 증언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상술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 때에는 집행인들 입장에서 자랑스러울지언정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느낄 일은 아닌지라 그냥 모두 실탄으로 장전해서 쏘았다.[7] 더 정확히는 상부에서는 규정대로 하라고 했는데 사형을 집행할 군인들이[8] 자기들끼리 짜고 규정대로 실탄 5발씩, 부부 모두를 처형해야 하니 총 실탄 10발과 공포탄 다수를 제공받아야 할 걸 탄창 하나씩은 갈겨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서 한 사람당 30발들이 탄창 2개씩 총 180발을 전부 실탄으로 챙겨갔다. 후일 부검해본 결과 두 사람의 몸에는 120발의 총탄이 박혀 있었으니 사수 세 명이 탄창을 다 비운 뒤에도 탄창을 갈아서 다시 발포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법의학자들은 상처의 상태를 보아 사형 집행 몇 시간 후에 방치되어 있던 시체에 누가 또 총격을 가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3. 특성
사람을 즉사시킬 수 있는 총기의 특성상 일반적으로 단두대나 교수형에 비해 빠르고 고통 없이 죽는다는 느낌과 인도적인 사형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그건 머리를 겨냥한 헤드샷이나 심장 등의 급소를 제대로 맞았을 때만 해당하고, 몸통이나 팔다리 등을 맞으면 과다출혈과 쇼크로 매우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뇌나 연수 같은 중추 신경 계통에 맞더라도 바로 의식을 잃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신경계라는 특성상 짧은 시간이나마 큰 고통을 겪고 사망한다. 주로 권력자의 미움을 받거나 죄질이 정말로 극히 나쁜 사형수에게 의도적으로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집행되는 경우도 있다.[9] 사형 집행인이 사형수에게 총을 쏠 때 조준을 잘못해서 사형수의 폐에 총알이 관통될 수도 있다.[10] 이 경우 당연히 폐에 구멍이 뚫리면서 혈액이 고여 숨을 쉬고 싶은데 못 쉬어 컥컥거리다가 정말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11]이 때문에 집행을 했는데도 즉시 절명하지 않는 경우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확인사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냥 절명할 때까지 방치하는 경우도 많지만 형장을 빨리 정리해야 하는 필요성도 있기 때문에 대개는 처형장에 있는 최고 군령권자가 권총 등으로 처리(?)한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경우 총살을 감독한 군관급 보위원이 집행 후 권총 손잡이로 사형수의 머리를 내리찍는다. 민간인의 사형을 약물주사형으로 바꾸기 이전의 중국에서는 후두부에 총알을 맞고도 사형수가 살아있으면 한 발 더 쏘는 대신, 총에 맞은 곳을 총신으로 쑤셔서 죽이는 나름대로 경제적인 총살법도 있었다고 한다. 정식 방법이 아니라 탄환 한 발이라도 아끼려고 그랬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과거 중국은 총살 집행 시 유가족에게 총알값을 청구했다. 그 말은 총알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며, 나아가서는 한 발밖에 지급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7.62mm로 지근거리에서 후두부를 쏘면 머리가 박살 나므로 살아남는 경우는 드물다.
약식으로는 소련식으로 무릎을 꿇리고 후두부에 직접 총을 쏴버리거나 그냥 그것도 생략하고 현장에서 사살하는 방식도 있는데, 보통 이런 경우는 전쟁 중에 자주 보인다. 상기한 중국의 처형 방식도 뒤통수나 등에 직접 사격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중국국민당 집권 시절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사형 제도가 존속하는 국가에서는, 민간인에게는 총살형을 시행하지 않는 국가라도, 사형수가 현역 군인 신분을 가진 자일 경우 총살형으로 집행하도록 군형법에 규정이 되어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예를 들면 한국 군형법 제3조에도 "사형은 소속 군 참모총장이 지정한 장소에서 총살로써 집행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다만 군형법에 해당 규정이 있는 사형제 존속 국가라고 해도 항상 군인을 총살형으로만 집행하도록 규정하는 것은 또 아니다. 예컨대 미군은 현재 평시에는 약물주사형과 총살을 병행해서 군인 사형수의 선택에 따라서 집행을 하도록 되어 있다. 단, 1961년 이후 군인에 대한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아 실제로 약물 주사형으로 집행된 미군은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총살형도 군인 선택에 따라 집행되는데 이 경우 차출된 군사경찰 소속 군인들에 의해서 집행되며 평시에는 병행이나 전시나 약물 주사 여건이 안되는 주외미군( 주일미군이나 주한미군 등 외국에 주둔하는 미군) 또는 해외 파병이나 준장 이상의 장성급 장교 사형수의 경우에는 무조건 총살로 집행한다. 1961년 전에 사형 집행을 하던 시절에도 사병(부사관, 병)은 거의 전시가 아닌 이상은 대부분 교수형으로 집행했고, 평시에 총살형으로 집행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평시에 총살형을 집행하는 것은 장교를 처형하는 경우에 한정이였다. 교수형의 경우 유명한 집행관으로 존 클라렌스 우즈 육군 군사경찰 상사가 있는데, 미 육군에서 해당 분야( 교수형)의 권위자였기에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병.부사관 사형수를 교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지금도 미군은 신분 관계없이 평시는 총살, 주사 선택 및 상황에 따라 병행이나 전시에는 무조건 총살로 사형을 집행하며, 총살 집행의 경우 안톤 도슈틀러 독일 육군 보병 대장의 처형 영상과 같은 것들을 교보재로 사용을 한다고 한다.
베트남군은 특이하게도 미군처럼 군인 사형수의 선택에 의해 총살형과 약물 주사형을 선택할 수 있다.
군대에서 군인에게 규정되어 있는 사형 방식이기는 하나, 일부 나라는 민간인에게 집행되기도 한다.[12] 나라에 따라서 민간인에 대한 사형도 총살형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고,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과거에 군사재판을 받은 민간인이 총살형으로 집행된 사례가 있다. #1 #2 그러나 군사 재판을 받았지만 교수형으로 집행된 사례도 있다.[13] 총살형이 군형법 제3조에 규정되어 있으니 군형법 제1조에 해당하는 경우만 총살당하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군형법 제1조에 "이 법은 대한민국의 영역 내외를 불문하고 이 법에 규정된 죄를 범한 대한민국 군인에게 적용한다."고 되어 있으나 군형법이 아닌 일반 형법에만 규정된 죄를 범한 군인 사형수가 교수형으로 집행된 사례는 또 없다.
특정 죄목에 따라서 민간인이라 할지라도 총살형으로 집행하는 나라도 있다. 인도네시아가 대표적인데, 인도네시아는 일반적으로 사형 방식을 교수형으로 집행하나, 사형수가 현역 군인, 악질 테러범이나 마약사범인 경우는 특별히 총살형으로 집행한다.
민간인에게 총살형을 집행하는 국가도 있긴 하나 이렇게 별도의 규정까지 만들어서 군인을 총살형으로 집행하는 국가가 많은 것은 서양에서 무기인 칼로 참수형 당하는 것을 명예롭게 보았던 영향이다. 근대 들어 무기가 총으로 바뀌자 칼 대신 총으로 죽는 총살형이 명예롭게 여겨진 것. 전근대의 전사 명예 의식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군인에게는 총살형이 아닌 것으로 처형을 당하면 당신들을 군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군인의 경우에 모든 사형을 시행하는 국가에서는 어지간해서는 총살형으로 군형법에 규정, 시행한다.[14] 조선 시대에 사약으로 죽는 것이나 중국 송나라에서 높은 신분의 여성은 봉작두로, 남성은 용작두로 요참형을 받은 것이나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왕족, 고위층들 즉 높으신 분들이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들을 예를 갖추어서 순금으로 만든 참수검으로 참수형을 시행하는 것이나 중세 서양의 귀족들이 스스로 목을 내어서 참수검에 사형당하는 게 그나마 영광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인 듯하다.
3.1. 총살형 요구
총살형이 총에 맞아 죽게해 군인으로서 마지막 명예를 지키게 해주는 관례로 사용되어 왔기에 주로 군인들이 요구했다.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현역 군인인 빌헬름 카이텔, 알프레트 요들, 헤르만 괴링 같은 현역 독일의 군인 사형수들이 군인이라는 신분의 특성상 군인의 전통적 사형 방법인 총살형을 요구[15]했다가 소련의 육군 소장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가 길길이 날뛰면서 반대해서 거부되었다. 군인 전범들이 총살형을 탄원했지만 기각한 이유는 판사가 "적어도 독일로 인한 2000만 명이 넘는 희생을 당한 소련 측의 반대가 있었기에, 전범(戰犯)의 처리가 하나나 둘뿐의 독일군 장교의 처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이상, 처형의 방식을 본인 자신의 의사에 따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는 이유를 들어 기각했다고 한다. 카이텔과 요들 등 군인들은 결국 소련의 반대로 교수형으로 죽었고, 헤르만 괴링도 소련의 반대로 총살형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절망해서 결국 숨겨 두었던 독약으로 자살했다.
반대의 예로 나치 집권기 독일에서 처형당한 반나치 저항 단체 하얀 장미단의 경우 남매 중 오빠인 한스 숄이 독일 육군 참전군인 신분[16]으로서 총살형을 요구할 수 있는지 문의했으나 거절당하고 단두대형이 집행되었다.
도조 히데키, 야마시타 도모유키 같은 일본군 전범들도 총살형을 요구했지만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에게 빡칠 대로 빡친 미군이 "일본군은 우리에게 해산되어 더 이상 군인 신분이 아니다"라는 명분으로 죄수복 차림으로 교수형을 집행했다. 예외적으로 혼마 마사하루 장군만 맥아더의 명령에 의해 사형 집행 전까지 후한 예우를 받고 총살형으로 죽었다. 이쪽은 소련에서 총살형을 반대하거나 하는 행동은 없었다.[17]
안중근 의사 역시 본인의 신분을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이라고 주장하며 총살형을 시켜 줄 것을 일본 측에 요구했으나 일본 측에서는 단순한 암살자로 간주해 교수형으로 형을 집행한 바 있다.
한국에는 전술했듯 무기로 사형당하면 명예롭게 여기는 전통이 없었고, 오히려 신체를 온전하게 하는 집행 방식인 사약이나 교수형이 참형보다는 낫다 여겼다. 한국 법에서 민간인은 교수형, 군인은 총살형으로 나눈 것은 단순히 서양의 법과 관습을 받아들였기 때문. 물론 명예 운운하는 건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것이라, 조선 시대 사람임에도 총살형을 요구한 안중근 의사 같은 예도 있었다.[18]
다만 군인이라는 의식이 약하고 본인 의지로 군인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닌지라 군인으로서의 명예에 대한 집착이 없는 징집병의 경우에는 덜 고통스럽게 가고 싶다는 이유로 약물주사형을 원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한다. 한국은 사례가 없고 과거 독일이 징병제이던 시절 동독[19]에서는 총살형을 거부하고 약물 주사형을 요구하는 간혹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다만 동독 징집병이 총살형을 거부하면 교수형이나 단두대 참수형에 처했다고 결론적으로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편하게는 못 가게 만든 셈. 중범죄자 외에도 탈동독하려다가 잡혀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현재의 북한과 달리 노인층[20]이나 상류층[21]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쉽게 탈동독이 가능했으나 가난한 서민층 청년은(+징집된 상태였다면) 그게 어려웠다고.
현재 사형제가 존재하고 징병제를 실시하는 국가들로 한정하면 베트남의 경우는 원하면 각 군마다 1곳이 배정된 3곳의 군 전용 집행소에서 약물 주사형으로 해준다고 한다. 실제 집행 사례가 있는지는 불명. 이유는 총살형이 군인의 명예에 해당돼서 약물 주사형을 거부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군인 사형수의 선택에 따른다. 단 장성 사형수는 무조건 총살형이다.
한국도 법률 조항만 따지고 들면 해석에 따라 교수형을 받는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돌아가지 않긴 하지만, 군인도 사형수가 되면 민간인 신분이 되어야 하고 그러면 교수형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도 논리적인 문제는 없기 때문, 병 및 부사관의 경우 병역법 제3조에 의해 1년 6개월 이상의 유기 징역이나 무기 징역을 선고받으면 불명예 제대/당연 퇴직 이후 민간인 신분이 된 채로 민간 교도소에서 복역하는데, 사형수는 저 규정에 의해서 제적을 시키지만, 또 저 조항에 제적 대상에 사형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며 사형수는 군인이라(그러므로 총살형 대상이다)고 해석하면서 필요에 의해 해석이 이랬다저랬다 한다. 실제로도 군인 신분의 사형수들은 민간 교도소로 이감되지 않고 국군 교도소에 수감된다.
4. 국가별 현황
자세한 내용은 총살형/국가별 현황 문서 참고하십시오.5. 총살형을 당한 유명 인사들
소소한 인물들까지 기입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으니 공인 인명사전에 실릴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인물로 적어주기 바람. 총에 맞아 죽었더라도 암살당하거나 전사, 저격당한 사람은 당연히 제외. 체포에 저항하다 사살된 사람도 제외. 즉 '형벌로서' 총살된 사람만 기재한다. 총살형이 아닌 그냥 총살당한 사람들은 분류:총기에 죽은 인물 참고. 즉, 일례로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족은 총기에 죽은 것은 맞지만 형벌로서 총살형을 당한 것은 아니고 소련이 형식상의 재판조차 없이 무단으로 총살한 것이다.5.1. 실존 인물
5.1.1. 국내
- 김삼룡 (1910 ~ 1950)
- 김수임 (1911 ~ 1950)
- 김윤근 (1911 ~ 1951)
- 김알렉산드라 (1885 ~ 1918)
- 박진순 (1898 ~ 1938)
- 박흥주 대령 (1939 ~ 1980)
- 손양원 (1902 ~ 1950)
- 유네스코 지하다방 인질사건의 가해자 이원모(1953 ~ 1975), 최성환(1954 ~ 1975), 윤찬재 (1954 ~ 1975)
- 유동하 (1892 ~ 1918)
- 윤봉길 (1908 ~ 1932)
- 조명희 (1894 ~ 1938) - 독립운동가이자 작가, 시인.
- 정구헌 중령 (1925 ~ 1959)
- 최영오 일병 (1938 ~ 1963)
- 최능진 (1899 ~ 1951)
- 최창식 (1921 ~ 1950)
- 제28보병사단 화학지원대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 박 이병 (1963 ~ 1985) - 대한민국에서 군형법에 따라 사형당한 마지막 인물.
- 육군 하사 수류탄 투척 사건의 가해자 신영식 (1945 ~ 1969)
5.1.2. 해외
- 기타 잇키 (1883 ~ 1937)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18 ~ 1989), 엘레나 차우셰스쿠 부부[22][23][24]
- 딩모춘[25] (1901 ~ 1947)
- 라브렌티 베리야[26] (1899 ~ 1953)
- 로베르트 블룸 (1807 ~ 1848)
- 마타 하리 (1876 ~ 1917)
- 다이이뱌오 중위 (1975 ~ 2008)
- 마리안 스포이다 (1901 ~ 1940)
- 막시밀리아노 1세 (1832 ~ 1867)
- 미셸 네 (1769 ~ 1815)
- 밀루틴 이브코비치 (1906 ~ 1943)
- 박명식[A] (? ~ 1990)
- 박헌영[A] (1900 ~ 1956?)
-
베니토 무솔리니[29] (1883 ~ 1945) - 새뮤얼 케니언 도 (1951 ~ 1990)
- 아구스틴 1세 (1783 ~ 1824)
- 안드레이 치카틸로 (1936 ~ 1994)
- 안토니 위코 (1907 ~ 1941)
- 안톤 도슈틀러 (1891 ~ 1945)
- 알렉산드르 콜차크 (1874 ~ 1920)
- 알렉상드르 빌라플란 (1904 ~ 1944)
- 알프레트 잘베히터 (1883 ~ 1945)
- 양신하이 (1968 ~ 2004)
- 에디 슬로빅 (1920 ~ 1945)
- 에른스트 룀 (1887 ~ 1934)
- 이온 안토네스쿠 (1882 ~ 1946)
- 인루겅 (1885 ~ 1947)
- 장성택[30][A] (1946 ~ 2013)
- 장융밍 (1955 ~ 2013)
-
조아킴 뮈라 (1767 ~ 1815)
가오에 살고 죽던(?) 양반답게, 총살형 집행 사수들을 스스로 지휘하여 자신에게 총을 쏘도록 명령하고 죽었다. - 지크문트 라셔 (1909 ~ 1945)
- 체 게바라 (1928 ~ 1967)
- 치셰위안 (1879 ~ 1946)
- 천궁보 (1892 ~ 1946)
- 카와시마 요시코 (1907 ~ 1948)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1907 ~ 1944)
- 한푸쥐 (1890 ~ 1938)
- 현영철[A] (1949 ~ 2015)
- 호리우치 도요야키[33] (? ~ 1949)
- 호세 리잘 (1861 ~ 1896)
- 혼마 마사하루 (1888 ~ 1946)
5.2. 가상인물
- 과학닌자대 갓챠맨 F - 켄페라
- 건담 시리즈
- 눈물의 여왕 - 윤은성[34]
- 도쿄 리벤저스 - 쿠로카와 이자나
- 데드 스페이스 - 이사벨 조
- 마타하리(뮤지컬) - 마타 하리
- 마스크걸(드라마) - 김경자
- 밸리언트 하트: 더 그레이트 워 - 에밀
- 소설 사수 - B
- 썸머타임 - 상호[35]
- 원피스 - 토노야스
- 오징어 게임 - 대부분의 탈락자들, 병기와 장기밀매 거래를 한 진행 요원들
- 유령 - 이찬석 소령[36]
- 은하영웅전설 - 하이드리히 랑
- 일기 시리즈 - 최지오, 성가현[37]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 스파이 혹은 몇몇 인물[38]
- 펜트하우스 시리즈 - 주단태
[1]
국민당 정권 시절도 이와 같았다. 국공내전 문서의 공산군의 상해 점령 직전 영상이 있는데 그 영상을 보면 공산당 공비로 추정되는 인물을 죽일 때 꿇려놓고 후두부를 쏴 죽였는데, 이러한 처형 방식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따라한 것이다. 다른 공산권 국가들은 교수형, 구 동독의 경우는 단두대를 쓰다가 총살형으로 바꿨고, 심지어 알바니아는 스페인식 가로테를 병행하기도 했다.
[2]
이후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는 대놓고 사형을 집행하지는 않는다. 이는 소련 때 성행했던, 그리고 뒤로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고질적인
사법살인 문제 때문으로, 형을 선고받은 범죄자라면
매우 척박하고 경계가 삼엄한 곳에 죽을 때까지 가둬둘지언정 대놓고 죽이지는 않는다.
[3]
머리, 가슴, 다리 3발씩
[4]
그 피해자가
은하수관현악단 단원들(그냥
AK-47 90발을 갈겨 죽였다는 말도 있다),
장성택의 측근인
리룡하와
장수길, 인민무력부장
현영철이다. 참고로 장성택이 고사포로 처형되었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도 없는 낭설이다.
[5]
일본의 경우 3명이다.
[6]
빗나갈 경우도 생각해야 하니 딱 한 명만 실탄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1947년부터 현재까지 적용되는
미 육군 규정에서는 8정 중 1~3정에 공포탄을 장전하도록 되어있다.
"Cause eight rifles to be loaded in his presence. Not more than three nor less than one will be loaded with blank ammunition. He will place the rifles at random in the rack provided for that purpose."
[7]
이때는 집행 장면을 뉴스로 실시간 방송하고, 집행 후 한 시민이 "더 끔찍하게 죽여야 했다"고 하는 등 꽤 이례적인 모습이 많았다.
[8]
이 병사들을 뽑는 과정도 이례적이었는데 부대 하나를 정해 지원자를 받는다고 하니 부대원 전원이 신청했다. 덕분에 사형을 집행할 인원 3명을 최종 선정하는 것도 고역이어서 8명을 우선 선발한 뒤 다시 이 중에서 인원을 걸러내서 3명으로 확정했다.
[9]
교수형의 경우는 일부러 천천히 올리거나 내리는 식으로,
참수형은 일부러 실력이 나쁜 초보 집행자에게 무딘 칼을 주고 집행하는 식.
[10]
대부분 의사나 특수 부대가 아닌 이상 심장의 위치를 잘 모른다. 표적지를 붙이는 사람도, 사격을 가하는 사람도 의학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폐에 맞을 확률이 높다.
[11]
그리하야 민간인도 총살형이 규정인 중화민국에선 법을 만들어서 술/수면제/마취제 등의 의식불명 상태가 아닌 이상 사형 집행이 안 되도록 만들어 놨다. 대한민국은 반대로 사형 집행시 사형수가 온전한 판단 능력을 가진 멀쩡한 정신 상태에서만 집행을 할 수 있도록 해놨기 때문에 사형수가 숨겨둔 수면제를 갑자기 입에 털어넣고 의식불명에 빠지거나 하면 즉시 사형 집행이 중단된다.
[12]
대표적으로 중화민국이 있다.
[13]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된 8명은 사형 집행 명령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명의였지만 교수형으로 집행되었으며,
김재규와 그의 수하들은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사형 직전 이송되어서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
[14]
다만 동양권은 '무기로 사형당하면 명예롭다'는 인식이 없었다. 동양권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쪽의 사형을 명예롭게 여기는 관념은 있었다. 중국에서는
요참형으로 죽는 것과
궁형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 중 선택이 가능했는데 전자는 나름대로 명예롭게 생각하는 반면 후자는 죽는 것보다 비참할 정도로 무시와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한국에서
사약을 명예롭게 여기는 것도 스스로의 손으로 사약을 마시는 방식이었기 때문.
일본의
할복이 명예로운 죽음으로 여겨진 것도 스스로의 용기로 배를 가르는 것에 중점을 뒀지, '무기'로 죽는다는 것에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아니라서 (할복 형식이 아닌) 그냥
참수형은 불명예스러운 사형이었다. 거기다 동양권에선 유교의 영향으로 신체가 훼손되는 것을 기피하는 영향도 있어서, 외관상 시신을 망가뜨리지 않는 교수형이 참수형보다 격 있는 사형법으로 여겨졌다.
[15]
당시 독일 뉘른베르크 연합군 재판부 판사들은 군인 계급을 가진 자에게는 총살형을, 그렇지 않은 나머지에는 교수형을 선고하려고 했지만 당시
독일에 의해 뒤통수를 맞아 그로 인한 피해가 막심(2천만 명 넘게 사망했다. 소련의 남성이 너무 많이 죽어서 현재 러시아는 성비 불균형 국가 중 하나다.)했고 재판에 영향력이 강했으면서 독일을 증오한 소련 수석 판사인 이오나 니키첸코 육군 소장은 "이런 쓰레기들에겐 교수형만으로도 충분하다. 총살형은 무슨 얼어죽을 총살형이냐! 전원 교수형으로 옭아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다" 하면서 길길이 날뛰면서 반대를 했다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사형 선고를 받은 피고인들은 현역 군인들도, 그렇지 않은 자들도 전원 소련 이오나 니키첸코 장군의 반대로 인해 집행을
교수형으로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도 프랑스 판사가 군인 피고에게는 총살이 어떠냐고 제안하지만 소련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렌 돈체프 역)가 "총알은 명예로운 적을 위한 것이지 전쟁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쓰는 것이 아니오(Bullet is for the honorable adversary, not for butchers)"라고 반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16]
의대생이었는데, 동부 전선에 의무사관후보생 실습으로 동원되어 참전한 경력이 있었다.
[17]
사실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했다.
할힌골 전투의 승리로 일본은 소련을 두려워하게 되어 히틀러의 소련 전선 참전 요구에도 영 미적지근했으며, 패색이 짙어진 1945년에는
만주 작전으로 만주의
관동군을 아예 가지고 논 수준이였다. 거기다 승전으로 40여 년 전
러일전쟁의 패배의 한을 풀었기에 딱히 아쉬울 것도 없었을 것이다. 반면 독소 전쟁의 소련처럼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지옥 같은 경험을 했다. 그래서 소련 수석 판사가 독일 전범 총살을 길길이 날뛰며 반대한 것처럼 미국도 일본 전범 총살을 길길이 날뛰며 반대한 것이다.
[18]
동양에서도 무인이나 군인이 전장에서 죽는 것은 명예롭게 여겼다. 그런 인식 때문인지 나관중은 삼국지연의를 집필할 때 자연사한 장수들 중에 몇몇을 전장에서 죽거나 전장에서 얻은 부상으로 죽었다고 각색했다. 이런 인식이 있어서인지 서양의 관념을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이다.
[19]
1980년대 후반에야 사형이 폐지되었고 그 전에는 간간이 집행했다.
[20]
노동 능력이 거의 없고 복지 비용만 많이 나가니 동독 정부에서도 다 알면서도 그냥 눈감아 줬다고 한다.
[21]
매우 비싼 수수료와 통행료를 지불하고 해외여행 허가를 받아 여권 받고 합법적으로 제3국 출국하고 그대로 튀면 되었다. 다만 당시 동독에서 적성국으로 지정한 서방 국가로 튈 경우 잔존 재산은 몰수당했다고.
[22]
총살형 대상자들 중 집행 과정 그 자체만으로 가장 유명하다. 심지어 루마니아의 마지막 사형수이다.
[23]
다만 사후 부검 결과 차우셰스쿠의 실제 사인은 총살이 아니라 총살 직전에 발생한
심장마비라고 한다. 당시 차우셰스쿠는 71세의 고령이었는데 그 정도 나이에 총살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몰렸으니 어마어마한 공포감으로 인한 심장마비도 충분히 일어날 법하다.
[24]
한편 한 프랑스 신문에서는 익명의 루마니아 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차우셰스쿠가 처형되거나 그 직전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외국 은행 계좌의 비밀번호가 담긴 가방의 행방을 묻는 고문을 받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총살 장면은 그 후 연출되었으며 부인 역시 총살 장면이 촬영된 시점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링크
[25]
병 치료 외출 때 유람 잘못 했다가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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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추하게 죽었는데, 죽이지 말라고 엉엉 울부짖으며 발광하기에 입에 재갈을 물리고 총살시켰다 한다.
[A]
북한인이어서 차후 통일되면 한국인 항목으로 이동 될 수 있음.
[A]
[29]
형벌로 총살형이 아닌 레지스탕스들이 무단으로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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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이 처형되기 전에 측근이었던
리룡하,
장수길을
장성택이 보는 앞에서 고사총으로 총살하였다.
[A]
[A]
[33]
모리 구니조가 학살죄를 뒤집어씌워서 총살형을 받았다. 의례 소총 5발로 총살당했다.
[34]
경찰들에게 배를 쏘이고 즉사하였다.
[35]
그것도 알몸상태로 희란 앞에서 희란의 막장남편인 태열에게 총살당했다. 이후 태열은 망연자실하여 나와서는 자살한다.
[36]
사실은 이때 죽을 것처럼 보였으나, 후에 생전의 모든 기록이 말소되어 431이라는 번호만을 부여받은 채 핵잠수함에 탑승하게 된다. 나머지 승무원들도 전부 번호로만 존재.
[37]
이쪽은 강태현에 의해 전신이 벌집이 될 정도로 난사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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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의 스파이가 나오는 미션 및 몇몇 요인을 호위하거나 움직여야 하는 미션에서 미션에 실패하면 아군의 요인이 총살형당하는 범용 미션 실패 동영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