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Alfred Saalwächter 알프레트 잘베히터 |
출생 | 1883년 1월 10일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주 노이살츠안데어오데르[1] (현 폴란드 루부스키에주 노바술(Nowa Só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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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년 12월 6일 (향년 62세)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복무 |
독일 제국 해군 나치 독일 전쟁해군 |
최종계급 | 상급대장 |
주요참전 |
베저위붕 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
서훈 |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잠수함 전투 휘장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독일금십자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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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부해군집단사령부가 있었던 파리에서의 잘베히터 |
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알프레트 잘베히터는 1883년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주에서 공장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1년 독일 제국 해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였으며 SMS 몰트케, SMS 헤르타에 승선하여 훈련 과정을 거쳐 1904년에 소위로 임관하였다. 1908년에 2 어뢰전대장 및 SMS 그나이제나우에서 근무하였다. 1910년에는 1함대 사령관인 휴고 폰 폴 제독의 부관으로써 SMS 하노버에서 근무하였고, 1911년 대위로 진급하면서 SMS 베를린에서 근무하였다. 1912년에는 붉은 독수리 훈장(Order of the Red Eagle)을 수여받았다.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1915년 잘베히터는 대해함대(대양함대)의 기함이었던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SMS Friedrich der Grosse)함의 부관이 되었다. 1년 뒤에는 U보트 함대로 옮겨졌으며 해군 잠수함 학교 과정을 수료한 1916년에는 U-25, U-46, U-94함을 지휘하였다. 당시 독일 제국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노선을 택하면서 U보트 U-46의 함장으로 비스케이 만에서 12월 16일부터 27일간 상선 6척을 격침시켰다. 그 중에는 프랑스 상선도 있었는데 가라앉고 있는 프랑스 상선에서 선장과 선원을 구조하여 포로로 수용했다. 때가 크리스마스 때다보니 구조한 포로들을 부상한 잠수함 갑판에 앉혀놓고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크리스마스 카드를 선물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반 선원들은 구조하여 육지로 돌려보냈지만, 선장은 구조하지 않고 격침된 배와 함께 침몰하게 두었다고 한다.
일련의 기여로 인해서 1급 철십자 훈장과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을 받았다. 종전 무렵인 1920년 초에는 잘베히터는 독일 제국 해군을 계승한 독일 전쟁 해군의 소령으로 진급하여 SMS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에서 근무하였었다가 종전이 되면서 해군 본부에 합류하였고 1926년에는 경순양함 SMS 아마존의 함장으로 진급하였다. 1927년에는 SMS 슐레지엔의 함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중령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지속적인 진급을 거듭하여 1935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1937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38년에는 당시 북해 해군기지의 사령관이 되었다.
1939년에는 해군 최고사령부에 노르웨이의 해군거점에 대한 점령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노르웨이 해역에서의 영국의 영향력 강화에 따른 독일에의 위협에 대한 내용 및 노르웨이 일대의 점령이 가져올 지리적 이점에 대하여 강조한 내용이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9월에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잘베히터는 서부해군집단사령부 사령관으로 북해에서의 작전을 펼쳤다. 서부해군집단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예하 함대사령관인 해군 중장 헤르만 보엄, 빌헬름 마르샬과 귄터 뤼첸스와의 마찰이 있었던 편이었다.1940년에는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여 동부해군집단사령관인 롤프 카를스 제독과 함께 잘베히터는 베저위붕 작전에 참가하였고 이때의 전공으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개전 초기 에리히 레더가 대서양에 대한 주도권을 위해서 프랑스 브레스트에 해군기지를 설치할 계획을 수립하였고 히틀러에게 보고하자 잘베히터는 여기에 반대하는 의사를 내비친 바 있다. 주된 이유로는 덴마크 해협을 대형함이 지나서 와야 한다는 점과 영국과 너무 가까워서 영국 공군의 폭격에 대한 위험성이었다. 우려의 시선은 잘베히터만은 아니었으나 결국 브레스트에 해군기지를 설치, 확장하게 되었고 나중에 실제로 영국 공군의 주된 폭격 목표가 되었고 결국 케르베로스 작전을 실행하여 빌헬름스하펜에 있는 북해의 해군기지로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 프린츠 오이겐함을 옮겨와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잘베히터의 판단이 맞았던 셈이다.
그해 여름에는 북대서양 영국해협에서 영국 해군과의 전투를 수행하였고, 영국 본토 항공전의 전초전이었던 해협 전투(Kanalkampf)에 독일 공군과 함께 어뢰정인 슈넬보트들을 통한 영국 수송선단에 대한 공격을 지원하였다.
1941년에는 서부해군집단사령부의 관할 영역에 있었던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지휘 책임자기이도 했다. 5월 24일 새벽, 후드를 격침시킨 뒤 프린츠 오이겐함은 탈출했지만 비스마르크함은 유류시설의 문제로 탈출하지 못한 상황에서 5월 24일 오후 7시에 기함 비스마르크에 탑승하였던 함대 지휘관인 귄터 뤼첸스 제독[2]은 서부해해군집단사령부에 연락을 취하였으나 잘베히터는 축하의 메세지와 함께 탈출했다면 북해에서 10~14일간 작전을 지속할 것을 명령하였다. 심지어 비스마르크가 영국 해군 레이더에 쫓기는 상황에서 서부해군집단사령부는 오후 9시에 스캐퍼플로에서 전함 3척이 사라진 것을 알려왔고 그 중 하나는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함일 것이라고 알려오기도 하였다.[3]
이후 되니츠 제독에게 U보트를 파견할 것을 지시하였다.[4] 참고로 비스마르크의 후퇴와 관련해서는 서술하였듯이 승전에 대한 정보만 받았을 뿐 세부적인 전후 결과에 대해서는 몰랐었다. 해당 지역이 서부해군집단사령부의 관할이었지만 잘베히터가 에리히 레더가 결정해야 될 부분이라고 판단했고 에리히 레더는 아돌프 히틀러에게까지 보고를 올리게 된다.
1942년에는 2월에는 케르베로스 작전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그해 9월에 서부해군집단사령관이 테오도어 크란케 제독으로 교체되었고 1942년 11월 퇴역하였다.
2.3. 종전 이후
1945년 6월 종전 이후 잘베히터 제독은 소련에 전쟁범죄로 기소되어 투옥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아 12월에 총살되었다. 대전 내내 서부전선에서만 종군한 제독이 뜬금없이 소련으로 끌려가 죽은 셈인데, 이는 소련의 대독일 보복성 조치가 이상한 방향으로 번진 결과였다. 정작 동부전선에서 학살을 방관한 전적이 있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육군 원수 같은 사람들은 끌려가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육해공군 중 적당히 높은 장군, 제독들 중 본보기로 몇 명 죽이기 위해 차출하려다 재수없게 당첨되어 죽은 것이다.당연히 소련도 이건 억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소련 스스로 저지른 과오를 인정할 분위기가 냉전기 때에 있을 수 없었고, 결국 잘베히터 제독은 소련이 해체된 이후인 1994년에 러시아 연방 군검찰청에 의해 복권되었다.[5]
[1]
Neusalz an der Oder
[2]
비스마르크 함장은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
[3]
이미 비스마르크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유류시설이 피탄되어 누유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그 때문에 탈출하는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4]
물론 비스마르크 출격 이전에 논의가 된 상황이었다.
[5]
출처: Andreas Weigelt et al. Todesurteile sowjetischer Militärtribunale gegen Deutsche (1944–1947). Schriften des Hannah-Arendt-Instituts für Totalitarismusforschung. pp.5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