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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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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BD0CF><colcolor=#000> 사부아의 공자 프랑수아 외젠 Eugenio di Savo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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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탈리아어 |
프란체스코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카리냐노 (Francesco Eugenio di Savoia-Carigna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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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
프랑수아 외젠 드 사부아카리냥 (François Eugène de Savoie-Carignan) |
||||
독일어 |
프란츠 오이겐 폰 사보엔카릭난 Franz Eugen von Savoyen-Carignan |
||||
출생 |
1663년
10월 18일 프랑스 왕국 파리 수아송 호텔 |
||||
사망 |
1736년
4월 21일 (향년 72세)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
||||
아버지 | 사부아수아송의 외젠 모리스[1] | ||||
어머니 | 올랭프 만치니 | ||||
형제 | 루이 토마, 필리프, 루이 쥘, 에마뉘엘 필리베르, 마리 잔, 루이즈 필리베르트, 프랑수아즈 | ||||
서명 | |||||
종교 | 가톨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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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BD0CF><colcolor=#000> 최종 계급 | 원수 | |||
주요 참전 |
대튀르크 전쟁 (1683 ~ 1699년) 9년 전쟁 (1688 ~ 1697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2 ~ 1714년) 제6차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1716 ~ 171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3 ~ 17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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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및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인. 황제군의 야전원수였다.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피에몬테, 발레다오스타와 프랑스의 사부아를 통치했던 사보이아 가문[2] 출신이다. 흔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의 맹활약만 알려져 있는데 대튀르크 전쟁의 활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헝가리 왕국을 통째로 안겨준 공적이 더 크다.[3]
2. 이름에 대해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유럽사에서 영미권 서적 번역본을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영어이름인 프린스 유진(Prince Eugene)으로도 알려졌고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성장해서 사부아의 외젠(Eugène de Savoie) 등 여러 이름이 있는데 전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본인의 서명에는 이탈리아어인 Eugenio di Savoia나 이탈리아 혈통[4]에 자부심을 드러낸 '에우제니오'(Eugenio)라는 이탈리아어 이름에, 독일식 귀족 명칭인 von과 영어식 지명인 Savoy[5]를 더해 Eugenio von Savoy로 표기했다. 그가 실제로 활동하고 거주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즉 오이겐 공으로 불렸다.애초에 근대 이전에는 국적이란 개념이 약했고 특히나 통치가문이나 왕가는 신분에 따라 국제결혼이 잦았다. 작은 나라 통치가문의 일원이 큰나라에서 복무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굳이 국적이나 정체성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무리가 있다. 다만 스스로의 정체성에 관하여 남긴 말[6]로 유추하건데 이탈리아 혈통을 가진 프랑스 출신의 오스트리아 장군 정도로 분석할 수 있을 듯 하다. 서명도 그렇고 이탈리아 혈통을 중요시했으며 그의 행적 대부분은 본가인 사보이아 가문의 이익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사보이아 공작-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를 가문의 수장으로 받들었다. 프랑스어를 극혐했던 레오폴트 1세와는 이탈리아어로 의사소통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우제니오(이탈리아어 발음) 혹은 오이겐(독일어 발음) 혹은 외젠(프랑스어 발음)의 가계 |
국적에 대한 정체성이 어쨌든 간에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장성으로서 오스트리아가 참여한 여러 전쟁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그를 소개할 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또는 신성 로마 제국[10]의 장군으로 소개하고 있다.
3. 생애와 활동
수아송 백작 외젠 모리스(Eugène Maurice de Savoie-Carignan 1635~1673)와 올랭프 만치니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나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정에서 자랐다. 10살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자 재판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며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할머니 역시 바쁜 사람이었고 막내손자에게 그리 애정을 주지 않아 할머니의 저택 하인들과 고모 루이즈 크리스틴(Louise-Christine de Savoie-Carignan 1627~1689)에 의해 양육되었다. 다섯째아들에[11] 몸이 건강하지도 않고 썩 잘생긴 편도 아니라 그리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었으나, 다만 역사책 특히 유명한 장군들의 업적에 관심이 많은 점이 특이했다고 한다.상황이 이렇다보니 일찍부터 성직자 준비를 하고 삭발식까지 치렀는데, 19세 때 군인이 되기로 하여 집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신이 자란 프랑스 궁정의 군주 루이 14세에게 직접 군인이 되게 해달라고 청원하지만, 루이 14세가 내 곁에 두기엔 못생겼다며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못생겼다는 것은 핑계고 루이 14세 입장에서는 외젠의 복무를 거절한만한 이유들이 쌓여있었다. 우선 외젠의 어머니 올랭프 만치니가 수년전 남편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아 프랑스 궁정에서 추방당했는데, 그 독약을 공급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바로 라 부아쟁이었다. 문제는 라 부아쟁의 또다른 주요 고객이 몽테스팡 후작부인으로, 그녀는 온갖 기괴한 재료들을 최음제랍시고 가져와 루이 14세에게 먹인 것으로 드러났다. 즉 루이 14세는 외젠을 볼 때마다, 자신이 애인에게 속아 끔찍한 것들을 먹었던 과거가 떠올랐을 것이다. 또 그의 셋째형 루이 쥘(Louis-Jules de Savoie 1660~1683)이 사실상 적국인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복무 중이기도 했다.[12] 또한 외젠은 단순히 얼굴만 못생긴 것이 아니라, 병역을 감당하기에 신체조건이 너무 나빴다. 키가 작은 건 넘어간다치더라도, 척추측만증이 있었는데다가 심지어 다리를 절었다. 사실 병치레도 잦았지만 루이 14세가 그것까지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격이 문제였다. 젊은 시절 그는 매우 직설적이고 격렬한 사람이었다. 루이 14세가 "그렇게 무례하게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을 정도면 알 만 하다. 취향도 취향이라 여장에 문란한 생활을 즐겼다. 별명이 '마담 르앙시앵'이었다고. 대략 '늙은 창녀'[13] 정도가 될 것이다. 루이 14세 역시 그리 정숙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런 종류의 취향은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루이 14세가 이렇게 퇴짜놓은 사람이 후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세습령의 군인이 되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내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결국 그는 프랑스 밖에서 자리를 알아보다 오스트리아의 군인이 되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성장한 궁정 귀족이 루이 14세에 자리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고 나중에 프랑스의 적으로 최고위 지휘관이 된다고만 하면 이상해 보일 지 모른다. 하지만 사보이아 공국의 미묘한 정세상 위치를 감안할 필요가 있는데, 사보이아 공국은 로렌 공국과 비슷하게 신성 로마 제국의 권역이면서도 프랑스의 영향권이었지만, 엄연히 독립된 통치국이어서 외젠은 법적이나 관습적으로는 유럽 통치국가의 왕족과 같은 신분이었다. 물론 통치가문의 방계 후손들은 작위나 지참금이 떨어지기 때문에 신분을 유지하려 성직자나 군인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다만 외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파리였을 뿐, 정신적인 소속감 없이 본인 스스로 사보이아 가문 출신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녔다고 이해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의 친척 중에는 신성 로마 제국 관계자가 많았다. 이전부터 오스만 제국과 대적하며 제국군의 고위 지휘관이 된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14],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로 비텔스바흐 가문이 언제나 그랬듯이 기회만 있으면 합스부르크 가문을 누르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 야심을 가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도 있었다. 1683년부터 복무를 시작한 외젠은 초기에는 태도가 건방지다는 소리도 듣긴 했으나 계속 상관들과 레오폴트 1세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복무 10년 정도 지났을 때에는 야전 사령관 자리까지 올랐다.
대튀르크 전쟁에서는 1696년에 벌어진 젠타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무스타파 2세의 친정군을 궤멸시키며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1700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외젠은 프랑스에 비해 그다지 잘난 것 없는 병력과 본국의 부족한 지원[15] 속에서도 공을 세우고 있었다. 1702년 1월 31일/2월 1일 크레모나 전투에선 대담한 야간 습격을 결행하여 프랑스군 사령관을 사로잡는 등 명성을 올렸는데, 하지만 프랑스군이 퇴각하거나 와해되거나 하지는 않아 완전히 성공하진 못하였다. 이후 8월 루차라 전투에선 피해를 더 많이 입혔음에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지원도 받지 못하고 계속 버틸 수가 없어진 외젠은 1703년 1월에 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크레모나와 루차라의 전공으로 외젠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703년 6월에는 신성 로마 제국 전쟁 평의회의 새 수장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 보급과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험 때문이었는지 가능한 현장 지휘관이 쓸 돈과 물자를 전달하고, 군기를 잡고, 영향력보다는 공훈에 따라 진급과 영예를 주는 등 군을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를 내렸다. 그 후 북이탈리아로 돌아가 토리노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모국인 사보이아 공국을 구원하고 프랑스가 북이탈리아 전선을 포기하도록 강요하였으며, 말버러 공작 존 처칠과 함께 오스트리아-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을 이끌고 프랑스군과 격돌하여 블레넘 전투, 라미예 전투, 오우데나르데 전투, 릴 공방전 등 숱한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712년 존 처칠이 경질된 후 영국이 전쟁에서 이탈한 후엔 드냉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한 뒤 이제까지 확보한 요새들을 도로 내주고 플란데런으로 철수한 뒤 프랑스군과 대치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이런 업적 때문인지 그 나폴레옹 1세조차 '내 승리의 비결은 별 게 없다. 알렉산더, 한니발, 카이사르, 프리드리히 2세, 구스타브 2세, 사부아 공자 외젠, 튀렌 자작[16](의 전쟁기록)을 읽고 또 읽을 뿐.'라는 내용의 말을 했다고 할 정도다.
레오폴트 1세, 요제프 1세, 카를 6세까지 2대 3명에 걸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해 복무했는데 덕분에 늙어 죽기 직전까지 거의 노인학대 수준으로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참전했으며,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하면서 높아진 위상을 바탕으로 본가인 사보이아 공국-사르데냐 왕국의 외교 정책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원래는 그저 방계 종친이라 그럴 위치가 아니었지만 대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위상이 수직상승한 것이다. 평생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어릴 적엔 동성애 취향소리도 나왔지만 결혼을 안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재산을 받은지라 결혼을 하기는 어려웠다.[17] 다만 죽기 전 20여 년간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동거녀와 부부처럼 지냈다. 그가 하사받은 많은 재산과 그 돈으로 지은 건축물은 고스란히 오스트리아가 통치했던 지역들[18]에 남았다. 특히, 그의 소유물이었던 벨베데레 궁전과 그 안에 있는 미술품 컬렉션은 빈 필수 관광코스에 들어가는 명물이다.
한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을 역임하였는데 군사적 성과와는 대조적으로 총독으로서의 평가는 나빴다. 외젠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직접 현지에서 통치하지는 못했고, 대신 전권대사인 프리에 후작 에르콜레 루도비코 투리네티를 내세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프리에 후작의 정책은 폭정으로 간주되어 현지인들로부터 큰 증오를 샀고, 프리에 후작을 지지하던 외젠은 결국 총독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적 평가는 나쁘지만 총독으로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 카를 알렉산더와 대조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결국 후손 없이 사망해서 친척을 뒤지고 뒤져 찾아낸 상속자가 바로 수도원에서 늙어가고 있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였다. 그녀는 외젠의 형 사부아-수아송 백작 루이 토마의 딸이었다. 젊은 시기엔 나름 부유하게 살았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휘말려 집안이 망하면서 빈곤에 허덕였고, 아무도 빈털털이 신세인 그녀와 결혼하려 하지 않자 결국 결혼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삼촌 외젠이 사망하면서 52세의 나이에 돌연 외젠이 남긴 200만 점에 달하는 유물과 성들을 비롯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에 그녀는 수도원 생활을 포기했고 1738년 4월 17일에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 공작 요제프 프리드리히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물려받은 재산을 마음껏 탕진했다가 1752년 남편에게 버림받았고, 결국 1763년 11월에 80세의 나이로 토리노에서 가난에 허덕인 채 사망했다. 벨베데레 궁전이나 기타 외젠의 재산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이 여인으로부터 사들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으며, 일부 미술품은 가까운 친척인 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에게 상속되어 토리노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참고로 프린스 칭호 때문에 왕자로 착각하거나 공작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통치 가문 후손의 특권으로 사용한 호칭일뿐 정식 작위는 아니다. 제대로 번역하자면 사보이아 공작(Duca di Savoia/Duc de Savoie)의 증손[19]이기에 공자(公子)라 번역하는 것이 맞다.
현재 그의 여름 거처였던 벨베데레 궁전이나 오스트리아 전쟁사 박물관(Heeresgeschichtliches Museum)에 가보면 그의 초상화가 벽면 가득 차지하고 있는데 나름의 미화를 거친 후인데도 잘생겼다는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불세출의 위인이기 때문에 평가가 좋은 편이며, 이탈리아계 혈통, 그것도 사보이아 가문의 종친이다보니 이탈리아에서도 토리노 왕궁, 카리냐노 궁전 등 사보이아 가문이 이탈리아 통일 훨씬 이전부터 통치해왔던 피에몬테 일대에서는 심심치 않게 동상을 찾아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를 위시한 독일어권에서는 오이겐 공자로 불린다.
4. 주요 참전 목록
- 대 튀르크 전쟁 (1683 ~ 1699년)
- 9년 전쟁 (1688 ~ 1697년)
-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1702 ~ 1714년)
- 6차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1716 ~ 1718년)
-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3 ~ 1735년)
5. 매체
엠파이어: 토탈 워 오스트리아 팩션의 주력 장군으로 나온다. 문명 4와 문명 5에서도 '사보이아의 외젠'이라는 이름의 위대한 장군으로 나온다.오스트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합작 TV 드라마 <마리아 테레지아>에서도 등장한다.[20] 여기서는 '호프부르크 궁전보다 벨베데레 궁전이 더 크다'는 언급이 나오면서 그가 오스트리아 황궁의 실세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작중에는 '여자가 왕이 되면 이 나라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마리아의 계승을 반대하고 로트링겐 공과의 결혼을 무산시키려는 악역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그의 생각은 상당부분 현실화됐고 마리아에게 진짜 능력 있는 충신인 킨스키를 찾아가라고 조언하는 등 진심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미래를 걱정한 충신이다.
대체역사소설 <합스부르크의 데릴사위로 살아남기>에서도 등장, 시대가 시대라 이미 70대가 다 되가는 노인으로 나오며 역사를 알고 있던 주인공이 처음에는 그를 이용하고자 제자로 받아달라며 접근했고 어찌보면 무례한 일이지만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후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에서는 원역사와 다른 주인공의 맹활약으로 라인강 전선에서 프랑스를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스페인의 발을 묶으며 역시 늙어도 그 능력은 어디 안감을 보이지만 결국 늙은 몸으로 전장에서 무리한 여파인지 전장에서 쓰러진다. 이런 와중에 외젠을 이용할 생각이었던 주인공이 함께 행동하면서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가 죽어가자 진심으로 통곡하고 어떻게든 외젠과 오래 지내려하며 외젠 역시 그를 자신의 양아들로 여기고 자신의 모든 유산을 물려주려 하는 등 아버지에게 학대받던 주인공의 또다른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보인다.[21] 여기서도 원역사의 수명대로 가며 그가 죽은 뒤 주인공은 실의에 빠져 한동안 일도 못할 정도가 되어 카를 6세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두 걱정할 정도로 주인공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6. 기타
외젠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상대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세자를 추천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외젠은 프리드리히를 먼저 추천한 적이 없다.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에 오를 경우를 대비해 바이에른과의 혼담을 지지했다. 프리드리히와의 결혼을 지지한 건 카를 6세의 시종장인 바르텐슈타인 남작이다.[출처]유럽의 여러 국가의 해군에서는 외젠의 군공을 기념하여 함명에 그 이름을 부여하기도 했다. 독일어권에서는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나치 독일 크릭스마리네의 아드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3번함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그 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이저 막스급 철갑선 3번함과 테게토프급 전함 2번함도 프린츠 오이겐 이름을 썼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영국 모니터함 로드 클라이브급(영국 함선은 프린스 유진(Prince Eugene),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 해군 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 세리에 콰트로(Quattro)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두카 다오스타급 2번함 이름으로도 쓰였다[23]. 해군 함선명은 아니지만 1930년에 창설된 이탈리아 왕국군 제1기병사단이 사단명칭으로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를 부여받았다.
무장친위대의 사단 중 하나인 7 SS의용산악사단이 사단명으로 프린츠 오이겐을 사용했다. 또한 사단가로 외젠의 업적과 찬송하는 가사가 담긴 Prinz Eugen der edle Ritter(프린츠 오이겐 고귀한 기사여)를 사용했다.
유해는 빈의 슈테판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나, 심장은 따로 적출되어 사보이아 가문의 왕실 묘당인 토리노의 수페르가 성당[24]에 안치되어 있다.
모어는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였다. 독일어는 잘 하지 못했으며 실제로 남긴 편지 중에 독일어 편지는 거의 없다.
[1]
이탈리아어로는 에우제니오 마우리치오.
[2]
1720년
사보이아 공국에서
사르데냐 왕국으로 선포하였고, 19세기에는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이탈리아 왕국을 형성하였다.
[3]
같은 시기 라이벌인
프랑스 왕국이
라인강 방면으로 진출해서
한뼘만한 땅을 얻기 위해 무지막지한 저항에 부딪치는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은 외젠 덕분에 거의 3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통째로 얻었다.
[4]
사보이아 가문은 본래
프랑스계였으나
오도네 백작이 결혼으로 피에몬테를 상속받은 이래
이탈리아반도에 거점을 마련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애매한 정체성을 가졌고, 이를 빌미로 이탈리아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프랑스에게 계속 시달리다가 겨우 벗어나게 된 16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이 아예 본거지를 피에몬테로 옮기면서 완전히
이탈리아화하였다. 다만 사보이아 공국을 호시탐탐 노리며 합병하려했던 프랑스는 사보이아 가문의 방계에게 쥐꼬리만한 땅을 영지로 주어 봉신으로 삼는 사례가 간혹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사부아느무르였고 외젠의 아버지 외젠 모리스도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수아송을 봉토로 받았다.
[5]
블레넘 전투에서 함께 활약한
존 처칠과 친분이 있었고,
사보이아 백국 시절의 먼 조상
피에트로 2세 같은 경우 젊은 시절
잉글랜드 왕국
헨리 3세 휘하에서 활약했다.
[6]
나에게는 적과 맞서는 열정적인
이탈리아인의 심장, 군주에게 충성하는
프랑스인의 심장, 동료들과의 우정을 중요시하는
독일인의 심장 3개의 심장이 있다.
[7]
사보이아 왕조 직계가 단절된 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위를 계승한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이 이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 출신이다. 현재 사보이아 가문의 당주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도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의 직계이다.
[8]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외할아버지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와 외젠의 할아버지 톰마소 프란체스코가 형제였다. 즉, 두 사람은 6촌 관계.
[9]
당시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외젠의 6촌이었다. 실제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창기에 반강제로 처가인 프랑스 편을 들어 참전했으나 외젠이 이탈리아 전역으로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 간섭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나기 위해 합스부르크 편으로 갈아탔다.
[10]
대튀르크 전쟁 한정.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일 때 헝가리 국왕 자격으로 전쟁을 벌였으나
헝가리 왕국과 그
동군연합인
크로아티아 왕국의 국력으로 오스만 제국 상대가 불가능해서 불가피하게 황제 자격으로
제국의회를 소집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방어를 명목으로 제국
영방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제국군을 모아 상대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국마저 무너지면 독일 본토까지 오스만 제국이 밀고 들어올 것을 알았던
개신교 독일 제후들도 대 오스만 문제는 합심하여 지원했다.
[11]
다만 넷째 형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었다.
[12]
반면 수아송 백작이 된 맏형 루이 토마는 당시 프랑스군에서 복무하고 있었는데, 미인으로 유명했던 그의 부인이 루이 14세의 작업을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프랑스군에서 쫒겨났고, 나중에 재정이 궁핍해지자 외젠의 주선으로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했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도중 전사했다.
[13]
직역하면 그냥 '옛날 부인'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젊은 아가씨들에게 밀려 뒷방 신세가 된 늙은 윤락녀라는 의미로 봐야 할 것이다.
[14]
루트비히 빌헬름의 어머니 루이즈 크리스틴은 톰마소 프란체스코의 딸이었으니 외젠과 루트비히 빌헬름은 서로 사촌지간이다. 고모 루이즈 크리스틴은 외젠의 어린 시절 자녀들을 내팽개치고 놀러다닌 올랭프 만치니를 대신해 외젠 일가를 돌보아주었다.
[15]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을 통치했으나 오스트리아 중심의 단일한 중앙집권을 이룬 것이 아니라 군주만 공유하는
동군연합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에서는 각국 국왕으로서 따로 통치하고 있었다. 이미 파리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마친
절대왕정의 프랑스와 비교하면 국력을 집중하는 것이 어려웠다. 심지어 1703년에는 헝가리 왕국 동부의
에르데이에서는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독립전쟁이 일어나 후방에도 신경을 써야했다.
[16]
이상 나폴레옹 1세가 꼽은 7대 명장
[17]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피에몬테의
수도원 2곳의 재산을 연금 명목으로 외젠에게 하사하여 수입을 보장했는데, 하필 자금 출처가 수도원이어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조건이었다.
[18]
빈의
벨베데레 궁전이 가장 유명하지만
헝가리 라츠케베(Ráckeve)에 있는 외젠의 성(Savoyai Kastély)도 알아주는 건축물이다.
[19]
외젠의 증조할아버지는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사보이아 가문이 아직
왕을 칭하기 전이었다.
[20]
참고로 이 드라마는 체코에서 시청률 40%를 넘었다고 한다.
[21]
주인공이 빙의한 대상이 원역사의
프리드리히 2세여서 오스트리아행 이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는 등 온갖 학대를 당해왔고 원역사에서
하노버로 도망가려 시도하는 걸 비틀어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
[출처]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p.67
[23]
이때는 이탈리아어로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Eugenio di Savoia)
[24]
사보이아 가문 사람들은 보통 백작 시절에는 오트콩브 수도원, 국왕 시절에는 수페르가 성당에 안장되었다. 수페르가 성당은 외젠과 함께 싸웠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토리노 공방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지은 성당인데, 토리노 공방전 도중 외젠과 함께 지형을 살피러 수페르가 언덕에 올라갔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자그마한 성당을 보고서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성모를 위한 성당을 지어야겠다 다짐하고 실제로 이겨서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