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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10:32:27

요제프 프리드리히

<colbgcolor=#E8DEE7><colcolor=#000>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공자
요제프 프리드리히
Prinz Joseph von Sachsen-Hildburghausen
파일:Prinz-von-Sachsen-Hildburghausen.jpg
이름 요제프 마리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Joseph Maria Friedrich Wilhelm)
출생 1702년 10월 5일
신성 로마 제국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국 힐트부르크하우젠
사망 1787년 1월 4일 (향년 84세)
힐트부르크하우젠
배우자 사보이아의 안나 빅토리아 (1738년 결혼 / 1763년 사망)
아버지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 에른스트
어머니 발데크의 조피
형제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1세, 조피 샤를로테
1. 개요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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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장성.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 공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프리드리히는 1702년 오늘날 튀링겐에 있는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국의 힐트부르크하우젠에서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 공작 에른스트와 소피아 헨리에타 폰 발데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자녀 중 막내였으며 형제자매 중 셋이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1715년, 프리드리히의 형인 에른스트 프리드리히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프리드리히는 1719년 16살의 나이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폰 세켄도르프 장군의 부관으로서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했다. 이후 그는 사국 동맹 전쟁에 참여해 시칠리아에서 세켄도르프 보병대 참모 대위로 임명되었다.

1728년, 프리드리히는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카를 6세 사부아 공자 외젠의 총애를 받아 빠르게 승진했다. 1729년에 중령으로 승진했으며, 1730년 7월 18일엔 대령이 되었으며, 1732년 1월 17일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보병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한 프리드리히는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한 마시 백작의 추천으로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1735년 북이탈리아 전역에 참가했다. 같은해 4월 30일 중장으로 승진한 그는 파르마 전투에서 활약해 아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때 그는 얼굴이 폭탄의 잔해물로 뒤덮히면서 평생 검게 되었다.

1736년 9월 25일, 프리드리히는 야전군관으로 승진했고 1737년 합스부르크-오스만 전쟁 때 군단을 지휘해 바냐루카 공방전을 치렀으나 오스만군에게 패퇴했다. 1738년, 그는 코르냐 전투에서 아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1739년 7월 22일 그로츠카 전투 이후 제국군의 후퇴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1738년 4월 17일, 프리드리히는 사부아수아송의 루이 토마의 딸이자 사부아 공자 외젠의 유일한 상속녀인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와 결혼했다. 그녀는 프리드리히보다 20살이 많았지만 숙부 외젠 공자의 재산과 사보이아 가문 출신 후광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이었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1739년에 코모른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황금 양모 기사단에 들어갔다.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프리드리히는 코모른 총독으로서 새로 조직된 헝가리 연대를 이끌었고 오스트리아 군사 행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43년, 요제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카를로바츠, 바라주딘의 최고 군사책임자 겸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그렌저 부대의 조직과 군수품 보급을 담당했다. 이후 1744년 4월 18일 야전군 원수로 승진한 그는 이후로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1752년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와 이혼한 그는 1757년 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작센 침공 작전에 투입된 오스트리아군을 지원했다.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참패한 뒤, 그는 즉시 군대를 재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한 후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1758년 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은퇴를 요청해 허락을 받아낸 그는 이후 힐트부르크하우젠에서 조용히 지냈지만 1769년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국이 짊어지게 된 막대한 빚을 해결하기 위해 요제프 2세로부터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국의 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1780년 조카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3세가 중병에 걸려 국정 운영이 불가능하게 되자, 그는 섭정을 맡아서 공직을 대신해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을 관리했다. 그렇게 7년간 공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던 그는 1787년 1월 14일 힐트부르크하우젠에서 향년 85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