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2년 8월 15일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사보이아 공국 동맹군이 루차라 인근에서 맞붙은 전투. 승패가 명확하게 가려지지 않았지만 외젠이 작전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프랑스군이 전략상 이득을 챙겼다고 볼 수 있다.2. 배경
1701년 6월 말 이탈리아 북부 일대로 진군한 사부아 공자 외젠 휘하 오스트리아군은 카르피 전투, 키아리 전투에서 잇달아 프랑스군을 격파해 프랑스의 연합국인 밀라노 공국을 위협했다. 급기야 1702년 2월 크레모나 전투에서 이탈리아 방면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이 생포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루이 14세는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을 급파해 외젠과 맞서게 했다.외젠은 거듭된 승리를 거뒀지만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병사들에게 봉급을 줄 길이 막막해졌다. 이에 외젠은 이탈리아 북부의 풍요로운 도시인 만토바를 공략해 물자와 자금을 확보하기로 결정하고 1702년 여름 만토바를 포위한 후 공성전에 착수했다. 이때 방돔 공작은 6월에 크레모나에 도착하여 프랑스군을 규합한 뒤 7월 26일 구아스탈라로 진군해 오스트리아 분견대와 짧은 교전을 벌인 끝에 격퇴했다. 이후 그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오스트리아의 편을 든 보르고포르테를 포위 공격해 며칠간의 교전 끝에 항복을 받아낸 뒤 8월 초 포 강의 우측 강둑에 위치한 루차라 마을로 진군했다.
외젠은 적이 이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자 적군이 모데나와 미란돌라의 보급 기지와 아군 간의 보급로를 위협할 것임을 직감하고 즉시 만토바에 대한 포위를 해제했다. 이후 그는 루차라 마을을 구하러 진군했지만 8월 14일 루차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프랑스군이 루차라 마을을 점령한 후 방어 태세를 갖춘 뒤였다. 전력상 열세인 데다 적이 수비에 유리한 지형에서 방어 태세를 갖춘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수도 없다고 판단한 외젠은 다음날 전투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 총사령관: 사부아 공자 외젠
- 병력: 25,000명
3.2. 프랑스-사보이아 공국 동맹군
- 총사령관: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 병력: 30,000 ~ 36,000명
4. 전투 경과
당시 루차라 마을 북쪽엔 세라글로와 로버로 운하가 포 강이 마을에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져 있었다. 외젠은 이 운하 쪽으로 은밀히 이동해 포 강을 건넌 뒤 적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비스콩티 장군의 좌익, 방데몽 장군의 우익,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이끄는 중앙으로 나누고 2개 종대로 편성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8월 15일 아침과 이른 오후 동안 운하를 통해 포 강을 건너 프랑스 진영을 에워쌌고, 프랑스군은 적군의 동태를 전혀 모르다가 적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직전에야 알아챘다.오후 5시경, 외젠은 총공격을 명령했다. 프랑스군은 적의 갑작스런 공격에 놀랐고 몇몇 병사들은 진지에서 달아나기도 했지만 방돔 공작이 재빨리 병사들을 수습해 반격에 나서면서 혼란이 금세 수습되었다. 오스트리아군 우익은 적을 상대로 4번에 걸쳐 돌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던 반면, 좌익은 프랑스군의 격렬한 반격에 직면해 고전했다. 외젠 본인이 이끄는 중앙군 역시 한때 적을 밀어붙였지만 곧 적이 수적 우위를 활용해 반격하면서 점점 밀렸다.
전투는 자정이 될 때까지 이어지다가 어둠이 완전히 깔리자 비로소 종결되었다. 외젠은 밤중에도 전장에 그대로 주둔했고, 프랑스군은 다음날 아침에 적을 공격하지 않고 숙영지에서 방어 태세를 갖췄다. 이로서 루차라 전투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