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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하르트 하인리치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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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20px-Gotthard_Heinrici.jpg
<colbgcolor=#666> 이름 Gotthard Fedor August Heinrici
고트하르트 페도어 아우구스트 하인리치
생몰년도 1886. 12. 25. ~ 1971. 12. 10.
복무 독일 국방군
제 4군
제 1기갑군
비스툴라 집단군
최종계급 파일:Si_4a.png 상급대장
주요참전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타이푼 작전
젤로 고지 전투
서훈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
1. 개요2. 생애3. 주요 보직, 진급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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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의 장군. 발터 모델과 더불어 방어전에서 활약한 독일 국방군의 장군으로 중부집단군이 패퇴하면서 새롭게 재편된 비스툴라 집단군의 사령관이었다. 최종계급은 상급대장.

2. 생애

하인리치는 1886년 동프로이센 굼비넨에서 태어났다. 1905년 보병 장교 생도로 입대하였으며 1914년 세계 1차대전에서 벨기에 침공에서 전공을 올려 철십자 훈장 2등급을 수여받는다. 하인리치가 배속되어 있던 보병사단은 동부전선으로 재배치되면서 마주리안 호 전투와 우치 전투에서 활약하여 철십자 훈장 1등급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1916년 6월에는 26예비군과 115보병사단의 참모장으로 보임받고 베르됭 전투에 참가하였다. 1년뒤 장군참모단에 배속되었다가 다시 7군과 8군의 참모로 복귀한다. 1918년에는 다시 보병사단으로 배속받았고 이 때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가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전간기 동안 군에 계속 남아 있었고 그 동안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하인리치는 독실한 개신교 집안으로써 나치당에 입당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특히 아내가 유대계였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히틀러로부터 아리아인의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 차별로부터 가족을 보호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프랑스 침공에서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상급대장이 이끌었던 C집단군에 소속된 1군 예하의 12군단을 지휘하였다. 하인리치의 12군단은 1940년 마지노 선의 남쪽 부분인 자르브뤼켄 지역을 돌파하는 명령을 수행하였다.

1941년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발동과 함께 동부전선으로 배치되어 귄터 폰 클루게 원수의 4군에 소속된 43군단의 지휘관으로 발령받았다. 동부전선에서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키에프 전투, 모스크바 전투에서 활약하였고 이때의 전공으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훈받는다. 1942년 1월에는 클루게가 4군 사령관에서 중부집단군 사령관[1]으로 영전하면서 하인리치가 후임으로 4군을 이끌게 된다.

모스크바에서 퇴각한 중부집단군은 방어선을 구축하고 물러나있었고 이때 하인리치가 이끄는 4군은 오르샤(Orsha)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북쪽으로는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상급대장의 3기갑군, 남쪽으로는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9군이 배치되어 있었다.1943년 11월, 하인리치의 4군은 1943년의 오르샤 공세라고 불리는 바실리 소콜롭스키 차수가 이끌었던 서부전선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다. 이후 철수 과정에서 스몰렌스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고[2] 이 일로써 잠시 4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예비군으로 편성된다.

1944년 6월에 다시 군으로 복귀하였고 4군은 소련군의 공세에서 와해되었기 때문에 새로이 1기갑군의 사령관의 보직을 맡게되었다. 헝가리에 주둔하고 있었던 1기갑군은 슬로바키아로 후퇴하면서 병력을 비교적 온전히 보존하였고 그 덕분에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에서 일어났던 슬로바키아 민족봉기가 소련군과 결탁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 공로로 1945년에 곡엽검 기사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1945년 초, 중부집단군이 거의 와해되면서 새롭게 비스툴라 집단군(바이흐젤 집단군)이 구성되었는데 처음에는 SS국가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을 사령관으로 두었으나 군인출신이 아니었던 탓에 2달만에 교체되고 그 후임으로 하인리치가 부임하게 된다. 비스툴라 집단군은 핫소 폰 만토이펠 기갑대장이 이끄는 3기갑군 및 21군[3], 9군[4]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힘러로부터 집단군 사령관직을 위임받을 시점에는 베를린으로부터 약 50k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소련군 오데르-나이세 작전을 개시, 베를린에 대한 총 공세가 펼쳐지게 되자 하인리치는 소련군의 주공이 젤로 고지의 오데르 강을 따라서 형성된 아우토반을 따라서 들어올 것임을 정확하게 예측하였다. 오데르 강의 범람원은 이미 습지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상류 저수지들을 방류하여 완전히 늪지로 만들어 소련군의 진격을 더디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젤로고지에 다른 전선의 병력을 더 투입하여 인원을 보강하였다. 젤로 고지 뒤로는 베를린을 방향으로 대전차포 및 호가 포함된 3겹의 참호와 벙커를 구축하여 대비하였다.

소련군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하는 1벨라루스 전선군은 일단 캬츄샤 다연장로켓으로 먼저 포격을 하고 시작했으나 하인리치는 포격 대상이 되는 참호를 피해 다음 참호로 병력을 이동하는 식으로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독일군의 시야를 방해하기 위해 소련군이 조사(照射)한 서치라이트는 먼저 진격중이었던 바실리 추이코프 상장의 제 8근위군의 실루엣이 드러나게 해주었고 이때 하인리치의 방어병력들은 드러난 소련군 위치에다가 포격하여 소련군의 피해가 늘어만 갔다. 여기에 베를린 점령에 대한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의 보이지 않는 경쟁도 압도적인 전력차에 비해서 소련군 피해가 늘어만 가는 것에 한 몫 하였다. 거기다가 늪지로 변해버린 지형적 상황은 진격을 매우 더디게 하였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쇠르너 원수가 이끌던 중부집단군 예하 4기갑군이 소련군 원수 이반 코네프의 1우크라이나 전선군에 의해서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하인리치의 병력들도 더 이상 젤로 고지를 사수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다중의 수비라인을 형성해 놓은 탓에 소련군의 진격은 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 등의 병력에 의해 또 다시 타격을 입으면서 늦춰졌다. 하지만 4월 19일 끝끝내 젤로 고지의 마지막 방어선이 뚫리면서 비스툴라 집단군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하인리치는 베를린이 아닌 베를린보다 더 서쪽으로 퇴각할 것을 최고사령부에 요구하였다. 당연히 국방군 최고사령관인 빌헬름 카이텔이라 쓰고 히틀러라고 읽는 원수는 위치 사수를 지시하였다. 하지만 만토이펠의 3기갑군 소속 7기갑사단과 25기갑척탄병사단이 베를린을 지나서 북쪽[5]으로 이동하는 것이 확인됨에 따라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만토이펠과 하인리치를 모두 각 사령관에서 해임시켰다. 비스툴라 집단군의 후임 사령관으로는 [6] 쿠르트 슈투덴트 상급대장이 부임하기로 하였으나 슈투덴트가 영국군에 의해서 체포되면서 사령관 대행이었던 티펠슈키르히 보병대장이 종전까지 명목상으로나마 지휘하게 된다.

하인리치는 베를린을 구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카이텔에 의해서 베를린으로 초치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부관 헬무트 랭에게 하인리치 본인의 직속 부하이자 부관의 상관이었던 에르빈 롬멜의 사례를 말하며 베를린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영국군에게 포로가 된다.[7]

이후 웨일즈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미국으로 보내졌고 1948년에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미군의 독일군 군사작전사(史)에 대한 연구를 도와주었고 그 밖의 전후 전사(戰史) 관련 집필 활동에 고문으로써 참여하였다. 이후 1971년에 카를스루에에서 사망한다.

3. 주요 보직, 진급 내역



[1] 모스크바 공방전에서의 퇴각을 이유로 히틀러에 의해서 페도어 폰 보크 원수와 발터 폰 브라우히치 원수가 각 중부집단군 사령관 · 육군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된다. [2] 하인리치는 나치의 폭압적인 인종차별 정책이나 파괴행위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부전선에서 소련군 정치장교 및 볼셰비키에 대한 처형만큼은 일선 부대 관리의 예방적 방어의 차원에서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3] 쿠르트 폰 티펠슈키르히 보병대장, 나중에 임시로 비스툴라 집단군 사령관이 된다. [4] 테오도어 부세 보병대장. 9군 예하 56기갑군단장이 나중에 베를린 방어사령관이 되는 헬무트 바이틀링이다. [5] 탈주는 아니고 노이브란덴부르크의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재집결이었다. [6] 해임 이후 하루 동안 쿠르트 폰 티펠슈키르히 보병대장이 임시로 맡았다. [7]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은 롬멜에게 히틀러는 2가지 옵션을 주었다. 첫번째는 모든 명예가 지켜지는 자살, 두번째는 베를린에 출두하여 히틀러에게 해명을 하고 법정에서 무죄를 입증할 것. 롬멜은 히틀러에게 출두하기도 전에 사고를 위장한 암살을 당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첫번째 즉 자살을 선택하였다. [8] 나중에 기갑사단으로 전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