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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카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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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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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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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군최고사령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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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초대 국방군최고사령부 총장
빌헬름 카이텔
Wilhelm Keitel
파일:Wilhelm_Keitel.jpg
본명 빌헬름 보데빈 요한 구스타프 카이텔
Wilhelm Bodewin Johann Gustav Keitel
출생 1882년 9월 22일
독일 제국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헬름슈르트
(現 독일 니더작센 노르트하임 바트간데르스하임)
사망 1946년 10월 16일 (향년 64세)
연합군 점령하 독일 뉘른베르크
재임기간 초대 국방군최고사령부 총장
1938년 2월 4일 ~ 1945년 5월 8일
서명
파일:빌헬름 카이텔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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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프로이센 왕국군
1901년 ~ 1918년
국가방위군
1918년 ~ 1933년
나치 독일 육군
1933년 ~ 1945년
국방군최고사령부
1938년 ~ 1945년
최종 계급 원수 (나치 독일 육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기사십자 철십자장
훈일등욱일대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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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전2.2.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수장이 되다2.3. 전쟁기의 행적2.4. 실전 참여( 베를린 공방전)2.5. 전쟁범죄2.6. 전후2.7. 전범 재판2.8. 최후
3. 평가4. 기타 매체에서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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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국방군 육군 원수로 독일 국방군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 OKW)의 총장이었다. 2차대전 당시 OKW가 사실상 국방부의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에, 나치 독일에서 실질적인 국방장관 역할도 겸했던 인물이다.

강직하고 엄숙해 보이는 인상과 관료로서의 뛰어난 능력과는 반대로 군사적인 부문에서는 매우 무기력했으며, 히틀러의 예스맨으로 악명이 높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전

독일 헤름슈르트 출신으로 1901년 육군 장교로 입대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벨기에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탓에 전공을 세우지는 못하고 주로 후방 참모부에서 근무했다.

전후 군비 축소 과정에서도 경력을 인정 받아 군에 잔류할 수 있었던 4,000명의 엘리트 장교 중 하나였고, 참모 장교로 복무하여 소장까지 진급해 육군 참모본부 소속 편제부 부장이 되었다. 이때까지 카이텔은 참모본부 내에서 있으나 마나 한 인물로 취급받는, 그저 그런 장성이었다.

2.2.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수장이 되다

파일:www_google_co_uk_20171030_225559.jpg
▲ 1939년 6월 4일. 제국참전용사의 날 기념식 행사에서

이후 1937년 상관이었던 국방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육군 원수가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모함을 받아 사퇴하게 되고, 카이텔은 대장으로 진급됨과 동시에 히틀러가 기존의 전쟁성을 해체하고 새로 창설한 ' 국방군 최고사령부'(OKW)의 총장이라는 엄청난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때 히틀러는 사퇴 전이었던 블롬베르크에게 이렇게 물었다.
"카이텔은 어떤 자요?"
블롬베르크가 대답했다.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저 자기 사무실이나 지키는 자에 불과합니다."
그 대답에 히틀러는 환호했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사람이오!"

어찌 보면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보다 더 막장이다. 보로실로프는 그래도 러시아 내전 전후로 활약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을 도와준 공로로 원수 계급과 국방장관 자리를 얻었으니.[1] 거기에 사석에서 보로실로프는 스탈린과의 친분을 믿고 접시를 던지거나 뺨을 때리는 극히 무례한 행동을 하고도 별 일 없었다.[2] 그러나 카이텔은 안정적이면서 유능한 인물이기 때문에 히틀러의 신임을 얻어 뽑혔을 것이다. 풀어서 해석하자면 독재자들은 유능한 인재보다 안정적인 인물들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내정에선 안정적인 인물, 즉 예스맨이 필요했으나 국제적인 야망을 위해서는 능력이 있는 자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당시 카이텔은 행정 하나는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블롬베르크는 카이텔을 두고 '유능하나 사무실이나 지키는 자'라고 평을 했으니 히틀러가 원하는 최적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카이텔은 히틀러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무리한 요구를 군에 전달하다가 군에 해를 끼쳤다. 하지만 국방군 최고사령부(OKW)자체가 전시에는 별다른 실권이 없는 조직이었고 육해공군에 작전에 명령할 권한도 없고 그냥 협조 요청만 할 수 있는 통합군체제로 가는 과도기적 조직이었기 때문에 카이텔의 권한은 극히 미미했다.[3] 육군에서는 그나마 군 선배라 대놓고는 무시하지 않았지만[4] 카이저마리네 시절부터 따로 작전권을 행사하며 놀던 크릭스마리네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란 든든한 뒷배경이 있는 루프트바페는 아예 카이텔을 대놓고 무시했다.[5] 그런데 괴링도 무시했잖아?

2.3. 전쟁기의 행적

파일:카이텔과 친위대 지도자들.jpg
카이텔과 친위대 지도자들[6]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이전의 전쟁성을 대체하는 자리이자 기존에 존재하는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의 권한을 침해하는 기관이었지만 정작 국방군 최고 사령부가 하는 역할은 너무 모호했다. 육해공군에 협조와 통합작전에 중재는 할 수 있지만 육해공군 모두 최고사령관과 최고사령부와 참모본부를 보유하고 철저히 임무형 전술에 따라 독자 작전권을 행사했다. 애시당초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위치가 히틀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기존 군부 인원들로 이루어진 육군 최고사령부를 견제하기 위해 조직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OKW( 국방군 최고사령부)와 OKH(육군 최고사령부)가 지상군 작전에서 명목상 교류를 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OKH가 지상 작전을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카이텔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전면에 선 것은 노르웨이 침공때였다.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여 발트 해와 북해를 통해 들어오는 전략 물자의 안정적인 공급 통로를 확보하는 동시에 바다 건너 영국을 견제하려고 했는데, 작전을 짜는 이 임무가 국방군 최고사령부에 떨어진 것이다. 당연히 카이텔은 이런 총통의 지시에 극도로 흥분했고, 작전부장 알프레드 요들의 주도 하에 베저위붕 작전으로 명명된 북유럽 침공 계획을 수립하게 했다.[7] 문제는 국방부 최고사령부가 통합 작전에서 조율을 담당했으나 육군 최고사령부나 해군 최고사령부, 공군 최고사령부에 명령이 아닌 협조만을 요청할 수 있었단 것이다.
거기다 작전이 개시된 후 동원된 3군의 이기적인 주장은 수시로 부딪쳤고, 이에 대한 항의는 카이텔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카이텔은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명목상 독일 전 군의 총사령관인 카이텔은 군사적으로 하는 일이 없다시피 했다. 심지어 카이텔이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운전병과 부관 및 참모 몇 명에 불과하다는 비아냥까지 받을 지경이었으니... 되려 카이텔의 참모장이자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참모장(지휘작전부장)인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이 히틀러의 개인 참모 노릇을 하며 더 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카이텔은 OKW의 수장으로서 전시 행정 역할은 확실히 했다. 실제로 경제 부분에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실제로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에 들어선 전시 경제체제의 계획을 세운 것도 카이텔이었고, 독제 체제에서 독일 국방군의 군대 돈 관리(재정 관리)는 카이텔이 담당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부 관료가 아닌 군인이었고 육군 최고 계급인 원수의 계급장을 달고 군인으로서 베를린 공방전 이외에는 아무런 활약을 못한 건 사실이다.

어쨌든 카이텔은 베저위붕 작전의 성공을 기회로 나름 수완을 발휘해 점령지역을 계속해서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관할 하에 두게 했고, 독소전쟁 이후 동부전선은 OKH(육군사령부)가 전담하고 서부전선, 발칸반도, 노르웨이를 비롯한 기타 전선은 OKW(국방군 최고사령부)로 교통정리를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국방부 최고사령부와 육군 최고사령부의 대립은 도토리 키재기로 전락했는데, 1941년 모스크바 전투 아돌프 히틀러가 육군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하고[8] 그 어떤 장군도 히틀러의 동의 없이는 독단적으로 작전을 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방부 최고사령부의 역할은 무의미했고, 날이 갈수록 국방부 최고사령부는 히틀러의 명령 출납기관으로 전락했다.

결국 카이텔은 히틀러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전형적인 아첨꾼 및 예스맨으로 활동했으며 동료 장성들에게 라카이텔(Lakeitel)이라고 불리는 등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9] 하지만 알프레트 요들을 비롯한 카이텔의 부하들은 저 별명을 가장 증오했고, 그들은 'Vater Keitel'(카이텔 아버지)이라고 불렀다.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의 회고록에선 다른 사람들이 카이텔을 보고 '주인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당나귀'라고 비웃었다. 당시 카이텔의 보좌관이었던 장교들의 말에 의하면 히틀러가 참석한 작전회의에서 늘 "총통각하께 경례.", "총통각하, 당신은 사상 최고의 군사지도자입니다.", "총통께서 직접 나서실 수는 없습니다." 등 손발이 오글거리는 발언들을 했다고 한다.

또한 당연히 군부의 나치화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그 유명한 나치식 경례를 육군에 도입하게 했다.[10] 이런 성격의 장성들이 그렇듯 전술 능력은 범인 수준에 교과서적 이론에 머물렀다. 히틀러도 카이텔은 범장이라고 평했다. 작전 능력보다는 관리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경우이고, 카이텔 자신도 이를 잘 알았기 때문에 작전 수립에 적극 관여하지 않았다.

무능하고 졸장 수준의 전술 능력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IQ는 129로 매우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국제 표준인 SD15로 129면 상위 약 2.7퍼센트이며, 멘사 지원 조건이 SD15 130이다. #

물론 독소전쟁 프랑스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며 영국 압박에 집중해야 한다는 자기 주관을 드러내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거나 프랑스전 초기에는 히틀러의 작전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욕을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사실 히틀러의 군사적 역량이나 판단이 천하의 카이텔조차 이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워낙 막장이었던지라... 그러나 됭케르크 철수작전 때는 히틀러의 진격 중지 요청을 지지하며 프랑스 침공의 완벽한 승리를 놓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카이텔은 계속 히틀러의 아첨꾼이자 예스맨으로 활동했지만 유일하게 히틀러의 뜻에 정면으로 반기를 또 한번 든 때가 있긴 했다. 1942년에 청색 작전중 후퇴를 주장하던 A 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스트 원수에게 화가 난 히틀러는 카이텔에게 리스트를 해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카이텔은 요들을 직접 리스트에게 보내 리스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요들의 보고서를 받고 리스트의 해임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에 히틀러는 카이텔에게 유례 없는 분노를 퍼부었고, 카이텔은 언제 리스트의 해임을 반대했냐는 듯 리스트의 해임에 동의했다.[11]

1944년에는 발키리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재빠른 대처로 반란자들을 소탕하고, 부상당한 히틀러의 곁을 보좌하여 히틀러의 신임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인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권한이 확대된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가 카이텔에게 원했던 것은 언제나 충복의 역할이었다. 그나마 국방군 최고사령부에 작전을 수립하라는 히틀러의 명령도 카이텔이 아닌 요들의 몫이었다. 카이텔은 시간이 지날수록 목전에 닥쳐온 제3제국의 입지와 추락해가는 히틀러를 위해 분골쇄신했지만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2.4. 실전 참여( 베를린 공방전)

1차대전 전투 이후에 실질적으로 작전 수립 및 전투에 카이텔이 관여했던 하나가 바로 베를린 공방전이었다. 그 이유는 유능한 주요 장성급 원수 지휘관들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히틀러에게 전부 숙청 또는 해임되어 버리거나, 사망, 자살, 항복 등의 이유로 나치 독일의 최후의 순간 남아있는 군 최고 상급자는 유일한 원수인 카이텔이었던 것이다.[12]

카이텔은 나치 지도부의 베를린 탈출을 계속 건의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부하고 카이텔에게 남아있는 모든 지휘관들을 긁어모아 병력들을 지휘하여 " 베를린을 사수하라." 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고, 카이텔은 히틀러의 명에 따라 직접 작전 수립 및 전투에 임했다.

2.5. 전쟁범죄

독소전쟁 기간 중 카이텔은 힘러 휘하의 무장친위대가 점령지에서 벌인 전쟁 범죄에 대해서도 방임했고, 히틀러가 내린 정치위원 등 비정규 전투원에 대한 학살 명령서에도 서명하는 등 정규전의 원칙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전후 전범으로 기소되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고 결국 소련군 포로에 대한 학대와 대량 처형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는 부하인 알프레드 요들도 동일한데, 다른 나라도 자국 포로 학대는 마찬가지로 엄한 처벌을 주장한다. 미국만 하더라도 필리핀에서 일본군이 자군 포로를 학대하여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바탄 죽음의 행진에 연관된 일본군 지휘관들을 엄단했으며, 직접 학대를 명령한 지휘관뿐만 아니라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은 사령관급 장군인 혼마 마사하루 육군 대장까지 책임을 물어 미군 재판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다만 혼마 장군은 다른 일부 전범 사형수와는 다르게 후하게 예우를 받았고, 최후의 식사도 본인이 원하는 대로 비프스테이크에 샌드위치, 맥주, 식후 커피까지 청해 맛있게 먹었으며, 수의를 입고 교수형된 다른 전범들과 달리 일본 육군 군복을 입고 총살형으로 처형했다.[13] 그런데 이보다 몇배 심한 짓을 벌였던 독일군의 수뇌부도 당연히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카이텔은 히틀러가 내린 전쟁범죄 명령들을 수행을 할 것을 항상 적극적으로 명령했으며 1941년 9월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볼셰비즘에 맞서는 투쟁은 무엇보다도 볼셰비즘의 주축인 유대인을 상대로 벌이는 무자비하고 엄격하고 강력한 행동을 요구한다."

2.6. 전후

막판에 베를린이 포위당하자 탈출을 권유했지만 히틀러가 탈출을 거부했고, 남은 모든 지휘관들을 긁어모아 베를린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투에 임했다.

파일:agermansurrender.png
5월 9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카이텔

베를린 전투 이후 요들과 함께 베를린을 떠나 독일 대통령이 된 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이 이끄는 정부에 합류한다. 5월 7일에 요들이 프랑스 랭스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가 보는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긴 했지만 독일은 연합국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련에게 직접 항복해야 한다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카이텔은 5월 8일에 베를린에서 소련군 게오르기 주코프 육군 원수가 내민 항복선언문에 서명했다.[14]

일화로 항복하러 나타나서 게르만 귀족 전통으로 말채찍을 들고 인사, 물론 연합군에선 쌩깠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항복 협상을 찍은 사진을 보면 카이텔이 들고 있는 것은 '말채찍' 이 아닌 독일 육군 원수의 야전 지휘봉이고, 독일 국방군의 원수들은 관례적으로 거수 경례를 지휘봉을 들어 올리는 것 으로 대신했는데. 이 관습이 오인된 것 이다. 이 원수봉(야전 지휘봉) 경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경례 항목 참조 바람.즉, 카이텔 입장에선 군인으로써 자국군의 방식으로 경례한 것이다. 소련군에게 항복한 이후엔 그들이 제공한 식사는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2.7. 전범 재판

파일:Defendants_in_the_dock_at_the_Nuremberg_Trials.jpg
파일:빌헬름 카이텔.jpg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재판정에 들어서기 전[15]

항복 직후 4일 뒤에 전쟁범죄자로 체포당해 침략전쟁의 기획 및 전쟁범죄의 책임자로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었다. 이 때 군복의 계급장 및 훈장, 약장, 휘장 등을 전부 소련의 반대로 탈거당했다.[16] 그러나 카이텔은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하는 다른 전범들과는 다르게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면서 재판에 임했고, 오히려 자신에게 내려진 혐의를 인정했으며 사형을 선고받을 것도 각오했다고 한다.

미 육군 군의관이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정신분석가를 담당한 더글러스 케리 소령은 "카이텔 원수는 목적을 잃어버린 자로 자살 위험이 높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2.8. 최후

1946년 10월 2일 카이텔에게 소련군 포로에 대한 학대와 대량처형 혐의로 사형 판결이 내려지자 1946년 10월 5일 그는 재판장에게 군인의 전통적인 처형법으로 총살형을 집행해달라고 탄원을 하게 된다.
“나를 총살형에 처해 달라. 나는 군인으로서 국가와 총통에게 모든 충성을 다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군인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이상 군인다운 죽음의 길을 택하고 싶다.”

재판부 판사들도 원래는 군인 계급을 가진 자들은 총살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소련의 수석 판사인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결국 군인들도 민간인처럼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사실 카이텔의 경우 유일하게 연합군 측도 그의 범법 행위를 강조하기 위해 총살해달라는 탄원에 긍정적이었다고 하나, 니키첸코 판사는 이 역시 한 사람이라도 총살시킬 수는 없다며 반대했다.

카이텔이 사형 집행되기 직전에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이 모든 독일인들에게 있기를 바란다. 200만이 넘는 독일 군인들이 아버지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이제 나도 아들들[17]을 따라간다- 모든 것은 독일을 위해!"

《역사의 원전》에서 재인용하자면 항복할 때보다 죽을 때 용감하고 단정했다고 한다. 또한 군복의 계급장, 서훈은 전부 탈거된 상태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카이텔의 태도와는 달리 마지막 운은 좋지 못했다. 소련 측에서 나치 전범의 사형수들 전원에게 추가적인 고통을 주도록 강하게 요구해서[18] 이에 맞춰 밧줄을 짧게 조정해 표준 방식으로 교수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발판이 너무 좁게 만들어진 나머지 카이텔은 추락하면서 교수대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피투성이가 된 데다 질식으로 숨이 끊어지는데 최장 시간으로 24분이나 걸렸다고 한다. 나치의 다른 사형수들 역시 대부분 즉사하지 못했고 체코 총독 빌헬름 프리크도 카이텔처럼 낙하하면서 머리를 다쳤다.

자살한 헤르만 괴링을 포함한 11명의 사형수들은 뮌헨 근교의 화장장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화장되었고, 유골은 이자르 강의 지류인 콘벤츠 강에 뿌려졌다. 2006년에 새로 발견된 카이텔의 유언장에는 "히틀러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배신자가 될 수 없었다."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3. 평가

군인이나 정치인으로서는 무능했지만 반면 조직 내부를 관리하는 관료로서는 능력이 상당히 탁월하고 겸손했다. 나치당이나 군에서도 무능하고 아부 떤다고 무시는 당해도, 마르틴 보어만처럼 월권을 휘두르거나 권력 투쟁하거나 경쟁자들을 모함하지는 않고, 히틀러가 의도한 대로 '자리만 지키는 역할'에 충실했다. 힘러에게 권력 핵심에서 밀려난 대신 보상으로 감투 수집 덕후로 변한 괴링이 국방군 총사령관 자리를 탐내도 히틀러는 카이텔을 계속 유임시켰다.

게다가 성격도 호감형인 편으로, 비록 전술적으로는 무능한 졸장이기는 하지만 부하들을 잘 챙겨주는 덕장의 면모를 가진 인물이었다.[19] 나쁜 상황에서도 부하들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욕을 한 적도 별로 없으며 차분했다. 그게 어느정도 넘길 일이다 싶으면 타이르는 수준에서 끝냈다고 한다.

조직 관리자로서의 능력은 탁월했다. 작전권은 없어도 군부대 내 재정 관리는 카이텔이 담당했기 때문. 실제로 경제분야에 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폴란드 침공 이후 점령지의 경제계획을 짠 사람도 카이텔이였다.[20]

그 무엇보다도 부하들의 복지에 제일 신경을 쓰는 편이었는데, 장교나 부사관 뿐만 아니라 일개 병사들의 복지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일단 일선 장병들의 사기가 중요하다며 영양가 있고 맛 좋은 식단이나 , 초콜릿, 커피 같은 기호식품들을 장병들에게 더 많이 지급하면 사기가 높아질 것이라고 하기도 했으며 이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덕분에 뉘른베르크에서 그가 사형선고를 받자 카이텔 밑에서 일했던 OKW 장병들이 격렬히 반발하며 항의한 바 있다.[21][22]

일선의 야전 지휘관들과 사이가 끔찍하게도 안 좋았던 OKH의 육군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와 달리,[23] 카이텔은 그들과도 별다른 갈등이 없었고 특히 OKW의 두뇌 알프레트 요들이 히틀러의 불신임에도 불구하고 종전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옹호해 주었다. 이렇듯 국방부 장관 같은 관리자로서 발군의 조율 능력이나 뛰어난 사무 능력은 더할 나위 없이 적임인 인물.

자신의 직위가 분에 넘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이만큼 높은 자리에 앉혀준 히틀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의외로 매우 용감했다고 하며 교수형으로 사형되기 전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태연하고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4. 기타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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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과오를 저지른 스탈린을 국방장관 레프 트로츠키가 심하게 디스했으나, 보로실로프가 이때 스탈린을 변호해서 스탈린은 별 처벌받지 않고 지나갔다. 트로츠키의 가장 큰 정적이 스탈린이었음을 보면, 보로실로프는 스탈린 집권의 1등 공신인 셈. 러시아 내전에 관해서는 러시아 이외의 나라들(한국 포함)은 큰 관심을 가질 소재가 아니고, 2차 대전때 보로실로프, 부됸니 같은 사람들이 워낙 삽질을 한 지라 무시받는 경향이 있지만 나름대로 오합지졸 적군을 이끌고 잘 훈련된 백군과 싸워가며 그 넓은 러시아 전역을 수복한 사람들이다. 단지 세상이 너무 바뀌면서 걸맞지 않은 높은 자리에 올랐던 게 문제... 일단 스탈린 시기에 좀 유명했던 사람들은 전부 혁명가이자 투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며 주목받은 인간들이 많다. [2] 심지어는 겨울전쟁에서 대패하고 와서, 스탈린이, "너 이 무능한 놈." 이라고 질책하자, 보로실로프는 " 유능한 장교 다 죽여놓고 왜 나에게 삿대질이야." 라고 대들었다고.팩트폭행 [3] 예를 들어 육군참모총장인 프란츠 할더는 직급으로 치면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부장 알프레드 요들과 동급이었지만, 할더는 요들을 제끼고 상급자인 카이텔을 상대했다. 이는 할더가 육군 최고사령부와 총참모부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행동이라고 추측된다. [4] 물론 군 후배들이나 그랬고, 육군에서도 선배인 룬트슈테트에게는 전화통화로 '되먹지 않은 놈'이라는 쌍욕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카이텔은 이걸 또 히틀러에게 고자질했고, 결국 룬트슈테트는 해임 크리. 물론 카이텔에게도 할 말은 있었는데, 룬트슈테트가 욕만 한 것이 아니라 '연합군과 강화협상을 해야 한다'는 당시로는 위험한 발언을 했기 때문. 하지만 결국 그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히틀러 자신도 연합군과 어떻게든 강화를 하려고 애쓰는 상황이 오게 된다. [5] 이 덕에 그의 부하 장병들(특히 알프레트 요들)은 이런 공군과 해군의 행적을 아니꼽게 보았고 역시 그들도 똑같이 무시했다. [6] 왼쪽부터 카를 볼프, 테오도어 아이케, 리하르트 슐체-코센스, 빌헬름 카이텔, 율리우스 샤우프이다. [7] 물론 이 일을 알게 된 육군 최고사령부는 경악했지만 사실 육군은 프랑스 침공 계획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했고, 노르웨이는 공군과 해군의 협조가 필요한 만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전면에 서야 했다. [8] 물론 군 통수권자인 국방군 총사령관 지위도 계속 유지. [9] '똘마니'를 뜻하는 독어 단어 'Lakai'와 카이텔의 이름을 이용한 언어유희이다. [10] 이후 하인츠 구데리안은 이를 국방군 전체의 표준으로 만들었다. [11] 다만 이 때는 나름 권총을 꺼내놓고 사직서를 쓰는 정도의 강한 항의 표시는 했다. 결국 요들 등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고. [12] 카이텔을 제외하고 이때까지 그나마 남아있던 국방군 최상급자는 역시 원수였던 발터 모델이 거의 유일했으나, 베를린 공방전이 벌어지기 직전 루르 전역에서 히틀러의 네로 명령을 저지함과 동시에 독일이 전쟁에 패배했음을 인정하고 그가 이끌던 B집단군의 모든 장병들을 전역, 해산 시킨 뒤 자결했다. 때문에 카이텔은 지금으로써 독일의 마지막 원수이다. [13] 다만 직접 명령을 내린 츠지 마사노부는 전범재판을 피해 동남아에 은거 중이었기 때문에 피해갈 수 있었다. [14] 전쟁 중 거의 유일하게 존재감 있는 일이었다. 여담으로 카이텔이 항복선언문에 서명할 때 베를린 표준시로는 5월 8일 22시 43분이었으나(따라서 서방 연합군이었던 미영프 등은 5월 8일을 기념한다.) 모스크바 표준시로는 다음날인 5월 9일 00시 43분이었기 때문에 소련과 그 후신인 러시아는 5월 9일을 승리의 날로 기념한다. [15] 항복 문서에 서명할때와 복장 자체는 동일하나, 그 때 부착하고 있던 계급장, 약장, 훈장, 휘장을 모두 분리한 맨 군복 차림이다. 이유는 아래에도 언급했다시피 소련의 반대로 탈거되었다. [16] 괴링과 요들 장군 등 전범 재판에 회부된 군인 피고들은 훈장, 약장 등 군복의 치장들을 소련의 반대로 전부 다 강제 탈거해야 군복을 입을 수 있었다. 현직 해군 소속인 카를 되니츠 제독과 전직 제독인 에리히 레더 제독의 경우 사복 정장을 입고 재판을 받았다. [17] 죽은 독일 군인들을 뜻한다. [18] 수석 판사인 니키첸코부터가 나치 전범 군인들의 총살형에 길길히 날뛰며 반대하고, 전원 예외없이 교수형으로 집행할 것을 요구할만큼 소련은 나치 독일이라면 치를 떨고있었다. 국제협약따윈 안중에도 없이 독소전쟁을 승인하여 엄청난 수의 소련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죽인 나치 독일의 사형수들도 소련에게 속죄하기 위해, 똑같이 편하게 죽지 말고 사형수들에게 있어 가장 불명예스러운 처형방식이며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교수형으로 비참하게 죽음으로서 소련에 속죄하라는 것이었다. 소련측은 나치의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본인의 처형이 총살형이 아니라 교수형으로 집행된다는 것에 반발하여 자살하자, 괴링도 교수대에 비참하게 매달리게 하여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했는데 속죄조차 하지않고 편하게 자살했다며 분노했다고 한다. [19] 비슷한 예로 전혀 스타일은 다르지만 요제프 디트리히 또한 전술 면에선 '돌머리'로 불렸으나 '파파 제프' 라는 별칭을 가질 정도로 부하들에게 사랑받는 걸걸한 상남자 스타일의 사령관이였다. [20] 참고로 회사 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을 가더라도 재정 관리는 상당히 꼼꼼하며 그 조직 내에서 핵심 인력들 중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기기 때문에 카이텔은 비록 야전 능력은 제로급이라 할지라도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상당히 꼼꼼한 성격이며 행정 및 관리 능력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인재 중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1] OKW 장병들이 절대적 갑인 승전국들의 판결에 격렬하게 항의했던 건, 어떻게 보면 불이익을 당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카이텔을 옹호했다고 볼 수 있다. 카이텔이 야전에서는 무능했을지 모르지만 그와 별개로 부하들의 두터운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뛰어난 행정 능력과 탁월한 리더십으로 부대를 이끌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조직을 단합시키며 탄탄하게 운영하는 등의 조직 내부를 총괄하는 관리자로서는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고 그로 인해 부하 장병들의 신임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볼 때 평시였다면 카이텔은 부하들에게 존경받는 군인으로서, 찬사를 받으며 성공적인 군 생활을 마감하고 명예롭게 전역했을 것이다. [22] 실제로 도조 히데키도 카이텔처럼 군사적인 부문에서는 매우 무능했으나 부하들에게는 매우 잘 챙겨 줬기 때문에 도조의 부하들은 이례적으로 도조에 대한 평가가 매우 좋다. 자세한 내용은 도조 히데키 문서의 평가 문단 부하 부분 참조. [23] 반면 프란츠 할더와 카이텔은 조직 내의 암투와 달리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병무국 시절부터 함께 근무해 인연이 있었고, 참모총장에 할더를 추천한 이가 카이텔이었으며, 전쟁 초창기에 카이텔이 히틀러와 군부를 매끄럽게 소통하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24] 심리학자로 죄수들이 자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상담역으로 배치되었다. [25] 주인공 슈타우펜베르크와 프롬이 만나는 신에서는 프롬과 막 싸우고 나온 상황이었고 심지어 히틀러 앞에서 프롬을 약 올리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