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방군 원수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제국원수 Reichsmarschall |
|||
공군 Luftwaffe |
1940
헤르만 괴링
|
|||
원수 General-feldmarschall / Großadmiral · · / |
||||
육군 Heer |
1936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1940
발터 폰 브라우히치 |
페도어 폰 보크 |
빌헬름 카이텔 |
귄터 폰 클루게 |
빌헬름 리터 폰 레프 |
빌헬름 리스트 |
발터 폰 라이헤나우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
에르빈 폰 비츨레벤1942
게오르크 폰 퀴힐러 |
에리히 폰 만슈타인 |
에르빈 롬멜1943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
에른스트 부슈 |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1944
발터 모델1945
페르디난트 쇠르너
|
|||
명예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
해군 Kriegsmarine |
1939
에리히 레더1943
카를 되니츠
|
|||
공군 Luftwaffe |
1940
알베르트 케셀링 |
에르하르트 밀히 |
후고 슈페를레1942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1945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
|||
: 1942년전까지 적용된 원수 계급장 : 1942년부터 적용된 원수 계급장 |
||||
{{{#!wiki style="margin: -12.5px -5px; color: #000; border-radius: 30px; font-size: 0.8em" | ※ 둘러보기 | }}} | ||
}}}}}}}}} |
<colbgcolor=#c0c0c0><colcolor=#000> 나치 독일 초대 제3기단장
후고 슈페를레 Hugo Sperrle |
|||
본명 |
빌헬름 후고 슈페를레 Wilhelm Hugo Sperrle |
||
출생 | 1885년 1월 7일 | ||
뷔르템베르크 왕국
루트비히스부르크 (現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현 루트비히스부르크) |
|||
사망 | 1953년 4월 2일 (향년 68세) | ||
서독
뮌헨 (現 독일 바이에른주 오버바이에른현 뮌헨) |
|||
묘소 | 바이에른주 란츠베르크 | ||
재임기간 | 초대 제1항공사단장 | ||
1934년 4월 ~ 1935년 3월 | |||
초대 콘도르 군단장 | |||
1936년 11월 ~ 1937년 10월 | |||
초대 제3기단장 | |||
1939년 2월 ~ 1944년 8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0c0c0><colcolor=#000> 복무 | 독일 제국 육군 | |
1903년 ~ 1918년 | |||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 |||
1918년 ~ 1935년 | |||
나치 독일 공군 | |||
1935년 ~ 1944년 | |||
최종 계급 | 원수 (나치 독일 공군) | ||
주요 참전 |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
||
주요 서훈 |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검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
}}}}}}}}} |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 독일 국방군의 장군. 스페인 내전, 프랑스 침공, 영국 본토 항공전, 북아프리카 전선에 참전하였으며 최종계급은 공군 원수.헤르만 괴링, 알베르트 케셀링,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에르하르트 밀히,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과 더불어 단 6명밖에 없던 공군 원수 중 한 명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제1차 세계 대전
1885년 후고는 루트비히스부르크에서 마을 양조장 소유주, 요하네스 슈페를레의 아들로 테어났다.1903년에 독일 제국 육군에 입대하였다. 1912년 임관하여 소위가 되었고, 1913년에는 중위가 되었다.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항공대로 소속을 변경했다. 그는 포병 정찰병으로서의 훈련을 받고 있었다. 교전에서는 큰 두각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정찰에는 두각을 보였다. 슈페를레는 제 7군에 배치된 공군부대를 지휘하였다. 이 공로로 그는 푸르 르 메리트의 아래급인 검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을 수훈받았다.
2.2. 전간기
1차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제국 워군 제 7군 소속 항공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 이후 자유군단에 가입하였으나 자유군단이 자연스럽게 국가방위군에 포함되면서 계속 육군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1935년 독일 국방군 공군이 재창설되면서 공군으로 전군되었고 얼마가지 않아서 소장까지 진급하였다.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위시한 국가주의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콘도르 군단의 공군 최고 지휘관으로 참전하게 된다. 콘도르 군단에서 활동하였던 인물로는 나중에 같이 원수가 되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 있었으며 슈페를레의 참모장으로써 폭격 전술을 전담하였었다. 슈페를레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을 콘도르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슈페를레와 리히트호펜은 부하들에게 평판이 높았으며, 그 중에는 이후 2차 세계대전때 활약하게되는 공군 에이스 베르너 묄더스도 속해있었다. 슈페를레는 딱히 정치적으로 물들지는 않았으며, 그와 리히트호펜은 스페인 지도자들에게는 무뚝뚝하게 대했고 독일군의 스페인 내전의 지원 자체를 그렇게 찬성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스페인인들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정권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으며, 이러한 콘도르 군단의 입장은 베를린에서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1936년에는 마드리드를 점령하려고 한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였고 전력의 20프로를 잃었다. 이 패배의 원인은 소련군 항공기인 I-15와 I-16이었다. 이후에도 스페인 공화국의 함대를 폭격하려고 하였지만 사전에 스페인 공화국의 함대는 폭격을 피하였고, 11월에는 마드리드를 폭격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하였다.
하지만 슈페를레는 콘도르 군단의 사기를 유지하였으며 이후 콘도르 군단은 Bf 109와 같은 신식 전투기로 전투력을 보강하였다. 슈페를레는 공화국의 스파이를 검거하게 되었고, 공화국군의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마을의 렌타리아 다리를 공격 대상으로 지정했지만 게르니카에서 남동쪽으로 10km 떨어진 게르니카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당시 참모장이었던 리히트호펜은 공화국군은 게르니카를 통해 후퇴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슈페를레와 폭격에 대한 작전을 수립하였으며, 게르니카의 남쪽과 동쪽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여 공화당군을 포위하고 파괴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43대의 폭격기가 마을에 50톤의 폭탄을 투하하였고 이것이 그 유명한 게르니카 폭격이다. 이에 대해서는 큰 논란이 있었는데, 사실 폭격의 목적이 군인이어서 합법적이지만 이 폭격때문에 사망한 민간인들에게는 아무런 구호조치나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리히트호펜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슈페를레 또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킨 게르니카 폭격에 관여하였다. 이후 뉘른베르크 최고사령부 재판에 슈페를레도 회부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내용만 기소되었기 때문에 콘도르 군단에서의 행적은 처벌받지 않았다.
아무튼 이 게르니카 폭격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 국민전선의 승리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슈페를레는 콘도르 군단에서의 전공으로 1937년 11월 1일, 항공대장(General der Flieger)[1]으로 진급한다. 하지만 이후, 빌헬름 파우펠과의 충돌로 히틀러는 빌헬름과 슈페를레를 모두 해임하였다.
뮌헨 회담 당시,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 측 대표단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일부러 험상궂은 인상의 슈페를레 장군에게 이들을 대접케 하기도 했다.
1938년 2월 1일에는 스페인 내전 이후 슈페를레는 3 항공함대(Luftflotte 3)의 사령관이 되었다. 히틀러는 그의 공군을 다른나라들을 위협하는데 사용하였다. 1938년 2월 12일 히틀러는 슈페를레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오스트리아 연방 총리 쿠르트 슈슈니그와 만나도록 초청했다. 빌헬름 카이텔, 발터 폰 라이헤나우도 참석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2차 세계대전이 개전되었으나 폴란드 전선에서는 별다른 임무가 없었다. 연이어 프랑스 전선에서 3 항공함대(Luftflotte 3)[2]를 이끌고 지상병력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프랑스 전역에서의 승리로 말미암아 슈페를레는 주요 지휘관들과 함께 원수로 진급하였고 개인적으로는 2계급 특진이 이루어졌었다.이후 루프트 바페는 영국 본토 항공전을 대비하여 재편성되었다. 2항공함대는 원수 알베르트 케셀링이 지휘하였으며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쪽 지방을 담당하였고, 노르웨이에 사령부를 두었던 5항공함대는 상급대장 한스-위르겐 슈툼프에 의해서 북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폭격을 담당하였다. 슈페를레의 3항공함대는 파리에 사령부를 두고 웨스트컨트리, 웨일스, 미들랜드와 북서잉글랜드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본토 항공전이 길어짐에 따라서 3항공함대의 임무는 야간 공습으로 교체되었고, 주간 공습은 2항공함대에 위임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런던에 대한 직접적인 공습이 개시되었는데 이전부터 런던 공습을 강력하게 주장해온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이 결정을 환영하였지만 슈페를레 본인은 Bf 109의 항속거리와 잔존 영국 공군기의 전력을 고려하면 무모한 작전이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를 제외하면 공군 참모총장 한스 에쇼넥 장군을 포함한 주요 지휘부는 런던 공습에 동의하고 있었고 그나마 런던 공습을 자기 선에서 막아왔던 헤르만 괴링 또한 그간 성과가 기대에 못미쳤기 때문에 기존의 방법을 바꿔서 런던 공습을 승인하게 된다.[3] 결국 본인 이외의 주요 지휘관들이 전부 런던 공습에 동의했기에 슈페를레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런던 공습에도 불구하고 당초 기대했던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본토 항공전의 실패 이후 한동안 임무가 없었다. 잠깐 북아프리카 전선의 에르빈 롬멜의 기갑군을 지원하는 임무가 부여되었으나 곧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하면서 서부전선의 항공전 본업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항공전력 자체가 수적으로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연합군 공군과의 교전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이었고 곧 3 항공함대 사령관의 직위에서 해임되고 오토 데슬로흐 상급대장으로 교체된다.[4]
이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최고사령부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무죄로 판결나면서 풀려난다. 이후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뮌헨에서 1953년 사망한다.
3. 여담
사냥하는 슈페를레 |
[1]
독일군 계급에서는 상급대장의 아래, 중장의 위에 해당하며, 미군 기준으로는 중장급에 해당함.
[2]
3항공함대는 나중에 서부 공군사령부로 변경된다. 다만 슈페를레는 변경 이전에 해임당한다.
[3]
한참 전부터 일선 부대서는 영국 공군은 조만간 전멸이라고 했는데 그게 몇주씩 잡아늘이면서 피해도 누적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영국 공군이 기습적으로 베를린에 공습을 가했다. 그 와중에 에쇼넥 장군은 런던을 공습하면 잔존 영국 전투기들을 끌어내서 소모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고 괴링도 이를 받아 들인것.
[4]
해임 이후 3 항공함대는 서부공군사령부로 개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