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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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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독일 국방군 육군 원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FM Ewald von Kleist
파일:Bundesarchiv_Bild_183-1986-0210-503,_General_Ewald_von_Kleist.jpg
이름 Paul Ludwig Ewald von Kleist
파울 루트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1]
출생 1881년 8월 8일
프로이센 왕국 헤센나사우 주 브라운펠스[2]
사망 1954년 11월 13일 (향년 73세)
소련 러시아 SFSR 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
부모 : 크리스토프 휴고 폰 클라이스트
배우자 기젤라 위헬 (1910년 결혼)
자손 장남: 요하네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1917-1976)
슬하 자녀 2명
차남: 휴고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1921-1973)
슬하 자녀 5명
복무 독일 제국군 (1900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 ~ 1935년)
독일 국방군 (1935년 ~ 1944년)
최종 계급 원수 (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유고슬라비아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청색 작전
주요 서훈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1. 개요2. 생애3. 진급 내역4. 주요 서훈 내역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독일 국방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독일 기갑 부대의 주요 지휘관 중 하나로 프랑스 전역, 독소전쟁에서 활약했다. 또한 독일군 장성들중에서는 드물게 주둔지 주민 유화 정책을 펼친 장군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출생 ~ 제1차 세계 대전

1881년 8월 8일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클라이스트 가문에서 태어났다.[3] 그의 가문은 에발트 외에도 두명의 원수를 배출하였다.[4] 그 외에도 보불전쟁에서 활약한 18세의 나이에 입대하여, 1900년 독일 제국군에 입대하여 제3친위 포병 연대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1908~1911년 사이에 기병학교, 일반참모대학에서 공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클라이스트는 기병 지휘관으로 탄넨베르크 전투에 참가했고 기타 동부전선의 지휘관이나 참모직을 맡았다.

2.2. 전간기

종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군 감축에서 살아남아 1932년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또한 그는 자유군단의 일원으로, 라트비아 및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군주제의 지지자였으며, 바이에른 공화국의 정치에는 지지하지 않았다. 1928년에는 브레슬라우에 있는 제2기병사단 참모총장을 지냈고,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베를린 제3사단에서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Kleist는 1931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포츠담에서 제9(프로이센) 보병 연대의 지휘를 맡았다.이후 제8 군단장으로 임명된 클라이스트는 나치당의 도발적인 라인란트 재무장에 참여했다. 한편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이 일어나고 나치당의 군부 장악이 가시화되자 클라이스트는 여기에 휘말려 잠깐 옷을 벗었다가 폴란드 침공이 시작될 때 제22 군단장으로 복귀했다.

2.3. 프랑스 침공과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프랑스 침공이 준비되고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낫질 작전'을 입안하자 독일군은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의 제41기갑군단, 구스타프 안톤 폰 비터스하임의 제14차량화군단으로 이루어진 작전의 선봉에 설 최초의 작전술적 기갑 부대인 기갑집단(Panzergruppe)을 창설하고 제1기갑집단이란 명칭을 부여했는데 그 사령관에 클라이스트가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제1기갑집단은 속칭 클라이스트 기갑집단(Panzergruppe Von Kleist)로 불리게 되었다.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집단 사령관 부임에 대해 그 휘하인 제19기갑군단장이자 독일 기갑 부대의 아버지격 장성인 하인츠 구데리안 전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을 기갑집단 사령관에 임명했다고 비난했지만, 기병 출신인 클라이스트는 구데리안만큼은 아니지만 기동전과 전차전의 원리에 대해 상당히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그때 기준으로는 구데리안이 너무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 그리고 기계화되지 않은 군대에서 기병만큼 구데리안의 주장에 가까운 병과도 없다.

하지만 클라이스트는 기갑집단의 존재에 대해 극히 회의적이었던 직속 상관들과도 대립해야 했다. A 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과 자신들의 보병대를 엄호해 줄 전차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며 제1기갑집단을 눈엣가시로 보던 제16군 사령관 에른스트 부슈 대장과 제12군 사령관 빌헬름 리스트 대장을 상대로 기갑집단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그 존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기갑 부대는 보병의 지원용이라는 느낌이 강했고, 기동전의 개념이 완전히 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기갑 부대가 무리하게 전방으로 나서는 행위는 전통적으로 전쟁의 주역이었던 보병대로부터 전공을 강탈해 간다는 편견을 주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더불어 극히 막 나가는 부하인 구데리안을 통제하고 설득하면서 제19기갑군단이 너무 위험하게 전방으로 돌출되지 않게 해야 하는 업무까지 주어졌다. 그러나 구데리안은 재량껏 군단을 움직이면서 클라이스트의 제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차들을 몰았다. 심지어 클라이스트의 진격 정지 명령서가 도달했을 때는 이미 진격하지 말라는 위치까지 진격해 있는 등의 상황을 발생시켰다.

전역의 중반쯤 이르러서는 구데리안이 클라이스트에게 해임을 요청하고, 클라이스트도 이를 받아들여 구데리안을 잠깐 해임시키는 일까지 발생했다. 구데리안은 이 점 때문에 클라이스트를 회고록에서 집단군 사령부의 명령서나 전달하는, 시대를 읽지 못하는 보수적인 기병 장군이라며 두고두고 비판했지만 클라이스트는 기갑집단을 집단군 직할이 아닌 제12군 소속으로 돌리려는 룬트슈테트와 리스트에게 강력히 반발했고 잠깐 동안 기갑집단이 제12군에 배속되기는 했어도 기갑집단 운용의 자율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또한 구데리안의 진격 상황을 A집단군 사령부가 안심할 수준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해 구데리안의 쾌속 진격을 크게 도와주었다.

이렇듯 클라이스트는 프랑스 전역에서 결국 옳기는 했지만 막 나가는 구데리안,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와 여전히 1차 대전 때의 생각을 지닌 룬트슈테트, 부슈, 리스트 등에 맞서서 기갑집단의 역할을 훌륭히 지켜냈으며 독일의 승리에 지대하게 공헌했다. 그 공으로 클라이스트는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전공을 치하하기 위해 전용 군가인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노래(Lied der Panzergruppe Kleist)'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2.4. 유고슬라비아 침공

1941년 4월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대한 침략이 시작되자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집단이 그 선봉에 섰다. 제1기갑집단은 독일의 동맹국인 불가리아에서 기동하여 유고슬라비아 제5, 6군을 궤멸시키며 유고슬라비아군 주력을 분쇄했고 수도인 베오그라드로 돌진하면서 전역을 10여 일만에 종결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점령 이후 독일은 괴뢰국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창설하는 데 도움을 줬는데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정권은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저질렀다. 당시 점령군으로 유고슬라비아에 진주한 제1기갑집단은 이 만행에 대해 방관했으며 이후 이 책임은 사령관인 클라이스트에게 돌아오게 된다. 클라이스트는 전후 리델 하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그 일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후술하지만 클라이스트는 점령지 주민 유화 정책을 적극 펼친 극소수의 독일군 사령관이었다. 하지만 나치와 히틀러는 슬라브인인 세르비아인들 학살에 긍정적이었고 클라이스트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히틀러에 정면반발하며 세르비아인을 보호할 용기가 없었고 결국 전후 학살방임에 따른 징역15년을 선고받는 결과를 야기한다

2.5. 독소전쟁에서의 활약

2.5.1. 바르바로사 작전

파일:255px-Bundesarchiv_Bild_183-2005-1017-521,_Ostfront,_-Generaloberst_von_Kleist_besichtigt_ein_Hüttenwerk_in_der_Ukraine.jpg
1941년의 클라이스트
1941년 6월 22일에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로 마침내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제1기갑집단은 룬트슈테트의 남부집단군의 기동 전력으로서 선봉에 섰다. 클라이스트는 제1기갑집단을 이끌고 작전 목표인 우크라이나로 들어가며 종횡무진 파고들며 대대적인 진격 속도를 달성했으며 이때의 전과로 클라이스트는 '전차 클라이스트'(Panzer Kleist)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다른 기갑집단 사령관들보다는 다소 애를 먹은 편이었는데 상대인 소련군 남서 전선군은 전임 사령관이었던 (당시에는 총참모장) 게오르기 주코프가 엄격히 훈련을 시켜 놓았고, 당시 사령관 미하일 키르포노스 상장이 적지 않은 대비를 해 놓았으며, 국방장관이던 세묜 티모셴코가 그 뒤로 직접 전선군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빠르게 진격하던 제1기갑집단은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중부집단군 소속인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과 협력하여 키예프 포위에 착수했다. 제2기갑집단은 북쪽에서 내려오고 제1기갑집단은 남쪽에서 올라가며 키예프 동쪽에서 집게발을 형성하며 포위망을 닫았다. 키예프 전투의 승리로 독일군은 60만에 달하는 손실을 소련에게 안겨 주었다.

이 키예프 포위전이 전술적으로는 옳았지만 전략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말이 구데리안을 선두로 많았다. 구데리안은 제2기갑집단을 모스크바로 곧장 진격시켰으면 모스크바 점령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르바로사 작전의 초장부터 독일군의 보급 상황이 제2기갑집단이 모스크바로 진격하고 싶어도 진격할 수 없을 지경일 정도로 이리저리 삐걱대고 있었다는 것 [5]을 생각해 보면 히틀러의 결정은 나름 타당했다. <보급전의 역사>의 저자인 이스라엘 출신 교수 마르틴 반 크레벨트는 독일 기갑 집단들이 그곳까지 진격한 것도 기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키예프 포위전 이후 클라이스트는 제1기갑집단을 몰아 미우스 강을 넘어서 캅카스 지역의 교통 요충지인 로스토프에 도달했다. 그러나 겨울이 닥쳐오고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둔 소련군이 41년 동계 공세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로스토프를 점령했지만 좌측방이 돌출된 채로 위험에 처한 클라이스트는 상관인 룬트슈테트에게 후퇴를 건의했고 룬트슈테트 또한 클라이스트의 우려를 받아들이며 후퇴를 결정했다. 이것은 독일군 최초의 작전적 후퇴로 남게 되었다. 이후 룬트슈테트는 이 사유와 더불어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 책임을 지고 북부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와 함께 해임되었다.

한편 전역이 종결되기 전쯤에 모든 기갑 집단들은 기갑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제1기갑집단 또한 제1기갑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5.2. 청색 작전

파일:ebc62ec9b0e6c71b373624829872301a.jpg
로스토프에서 일본대사와 상급대장인 클라이스트
1942년이 되자 소련군은 42년 동계 공세를 시작했는데 이때 소련군은 최초로 밀집된 전차 집단들을 이용하여 이쥼 일대에서 기동 돌출부를 형성하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독일 제6군이 주둔한 하르코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파울루스는 이 공세에 당황했지만 곧이어 전황을 판단하고 빠른 진격에 따라 취약해진 이쥼 돌출부의 측방을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파울루스는 하르코프에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 내면서 근처에 있는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군에 상황을 설명하고 돌출부를 끊어 버릴 것을 요청했다.

클라이스트는 제1기갑군을 몰고 재빨리 달려와 이쥼 돌출부를 끊어 버리며 소련군을 역으로 포위망 속에 몰아 넣었다. 이로서 소련의 야심 찼던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은 작전을 주도한 티모셴코의 기대와는 달리 대패로 돌아갔으며 티모셴코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더 이상 소련군의 지휘와 작전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캅카스를 석권한다는 청색 작전이 시작되자 남부집단군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A집단군과 B집단군으로 분할됐는데 제1기갑군은 제17군과 함께 빌헬름 리스트 원수의 A집단군에 배속되었다. A집단군은 카프카스의 주요 유전이자 현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로 진격해 소련의 석유줄을 끊어 버리고 잠재적 동맹국인 터키와 연결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A집단군의 측방을 엄호해 줘야 할 B집단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발목이 잡혀 버리자 제1기갑군은 더 이상 진격할 수가 없게 되었다. 천왕성 작전을 통해 스탈린그라드가 역포위당하고 되려 소련군이 그 틈으로 로스토프를 노리고 A집단군 또한 잘못하면 포위당할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A집단군 사령관 리스트는 히틀러에게 후퇴를 주장하지만 후퇴 소리에 열받은 히틀러에게 해임당하고 그 후임으로 클라이스트가 임명되었다. 클라이스트의 후임으로 제1기갑군 사령관에는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이 임명되었다.

2.5.3. 캅카스 탈출

리스트가 후퇴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해임되기는 했지만 하르코프를 비롯한 주요 요충지들이 소련군에게 점령당하면서 A집단군의 후퇴는 기정사실이 되었고 클라이스트는 안정적인 후퇴를 위해 애를 썼다. 제1기갑군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돈 집단군(곧 남부집단군으로 명칭이 변경될)의 엄호를 받으며 로스토프로 밀려드는 소련군 제2근위군과 제28군과 사투를 벌이면서 우크라이나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제17군은 로스토프가 점령당함에 따라 쿠반 교두보에 갇혀 버리고 말았는데 흑해 연안인 쿠반 교두보에서의 탈출로는 케르치 반도로 통하는 흑해의 케르치 해협밖에 없었다. 클라이스트는 제17군의 해상 탈출 계획을 짜고 루프트바페의 적극적인 엄호 아래 소련군 8개 전선군에게 섬멸당할 뻔한 제17군을 무사히 탈출시키고 결국 A집단군 전체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는 이 공을 치하하며 클라이스트를 원수로 승진시킨다. 바로 직전에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켰음에도 항복한 것에 격노하여 '다시는 누구도 원수로 승진할 수 없을 것'이라던 자신의 결정을 곧바로 뒤엎었으니 클라이스트가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에 제1기갑군은 A집단군에서 빠져서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에 배속되었다. 제1기갑군은 만슈타인이 요긴하게 써먹지만, 제1기갑군은 A집단군의 핵심 전력이자 클라이스트의 본가나 다름없는지라 클라이스트로서는 뼈아픈 결정이었다.

2.6. 해임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만슈타인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대승으로 이끔에 따라 A집단군은 더욱 안정화되었다. 히틀러는 A집단군에게 크림 반도 수비와 위수를 맡겼다.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남부집단군의 우측방을 엄호하면서 흑해 연안을 통한 소련군의 우크라이나 진격로를 차단하며 만슈타인의 작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하고 류먄체프 작전으로 시작된 소련군의 하계 공세로 만슈타인이 밀려나기 시작하자 A집단군으로 들어오는 압박 또한 거세지기 시작했다. 결국 44년 동계 공세로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축출당하자 A집단군은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었다.

44년 3월에 소련군은 케르치 반도 상륙 작전을 전개하며 A집단군에 대한 대공세를 시작했다. 클라이스트는 만슈타인과 함께 남부집단군과 A집단군을 각각 우크라이나와 크림에서 후퇴하면서 전선을 재정비할 것을 히틀러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후퇴 소리에 이성을 잃어버린 히틀러는 클라이스트와 만슈타인에게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한 뒤 동시에 해임했다.[6] 이후 클라이스트는 현역에 복귀할 수 없었다.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그의 가문 사람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슈멘친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된 탓에 연좌죄로 클라이스트 원수도 게슈타포에 연행되었다.[7][8] 클라이스트 원수도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슈멘친이 반 나치 인사로서 암살자 그룹의 일원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에 동참하지도 않았고 고발하지도 않았다. 클라이스트도 방조 혐의로 처벌 받을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이미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의 처형이 있은 직후여서 나치는 클라이스트까지 사형시켰을 때 벌어질 반발을 우려하였고 클라이스트는 풀려날 수 있었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슈멘친은 종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1945년 4월 9일 사형에 처해졌고, 그의 아들로 직접 히틀러 암살을 실행에 옮기기도 했던 에발트-하인리히는 포로수용소에 갇힌 채 종전을 맞이하였다.[9]

2.7. 최후

전쟁이 끝나고 1945년 4월 26일에 클라이스트는 미군에게 체포되어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정권을 잡은 신생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요청으로 그곳으로 신병이 인도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클라이스트를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전쟁범죄 방임죄로 15년 형을 선고했다. 소련의 블라디미르 시에 위치한 포로 수용소로 인도된 클라이스트는 1954년에 동맥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 만슈타인이 전후 바로 풀려난 뒤 서독군 창설에 기여한 공로로 죽을 때까지 대우를 받았던 것과 대조적. 정작 만슈타인은 자신의 점령지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의 인종 말살 정책에 탄약과 차량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고도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은 반면, 클라이스트는 점령지 주민 유화 정책을 펼쳤던 것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 더더욱 대조적이다.

클라이스트는 1945년의 항복 이후 9년 동안 27개의의 교도소를 전전하였고, 그가 사망한 해였던 1954년에서야 엽서 크기의 편지를 한 달에 한 번 가족과 주고 받는 것을 허락받을 정도로 그가 받은 대우는 열악했다. 그해 10월 15일, 클라이스트는 세상을 떠났고 지금까지 그의 시신이 매장된 장소를 찾을 수 없다. 클라이스트는 러시아에서 사망한 최고위 독일군 장성이 되었다.

2.8. 평가

페도어 폰 보크 원수가 1942년 당시 바쿠 유전 지대를 향해 질주하던 클라이스트에 대해서 '클라이스트는 오직 진격만을 원했다'고 감탄하며 기록할 만큼, 기갑부대의 특성을 살린 기동전에 가장 숙련되고 이해도가 높은 지휘관이다. 기갑부대를 활용한 기동전술에 대해 상당수의 OKH가 비관적이던 1940년 프랑스 침공때도 기갑 기동전술을 받아들여 구데리안과 최고사령부 사이에서 협의점을 찾아 중재하려고 노력하였고 여기에 더해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A집단군을 무사히 쿠반 방어선까지 퇴각시켜 장비와 병력을 온존한 것은, 공격과 방어 모두에 탁월했을 뿐 아니라 직전에 6군이 소멸되어버린 충격적인 참패 이후에도 클라이스트는 A집단군의 전열을 유지하여 퇴각할 만큼 뛰어난 리더십의 소유자라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클라이스트는 동부전선에서 나치의 인종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적극적인 유화 정책을 펼쳤다. 이를 위해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 출신으로, 러시아와 러시아인, 러시아 문화를 잘 알고 언어도 유창한 오스카 리터 폰 니더마이어 중장, 에른스트 쾨스트링 소장을 참모로 임명하였고 클라이스트는 이들의 조언을 적극 받아들이며 그의 점령지에서만 무려 82만 5천명이 스탈린 정권과 반대하여 싸우게 된다. 이중에는 카자크으로만 구성된 정예 기병 연대도 있었고, 후일 이들은 클라이스트가 퇴역한 후인 1944년 9월에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안드레이 블라소프 휘하의 러시아 해방군으로 재편되었다.

나치당의 징용 총책임자 프리츠 자우켈과, 동프로이센 대관구장 출신의 악명 높은 우크라이나 판무관 에리히 코흐는 클라이스트에 대놓고 반발했지만, 클라이스트는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부하들에게 점령지 민간인을 노동에 동원할 때 실제로 자원한 사람들만 선발할 것을 강조할 정도였다.[10] 자우켈과 코흐도 명문 프로이센 귀족 가문 출신에, 장병들에게 신망이 두텁고 히틀러의 존중을 받는 클라이스트를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非 슬라브 계 러시아인들을 대우하여 참전시킨 것이 1948년 전범 재판에서 '러시아인들을 분열시킨' 죄목으로 기소되어 소련의 증오를 한 몸에 받은 비운의 명장이다. 소련군에 폰 클라이스트 일가의 저택이 넘어가지 않도록, 스스로의 손으로 저택을 폭파시켰던 클라이스트의 아들도 육군 대위로 러시아군 포로수용소에서 10년의 형기 끝에 1956년에야 풀려났다.

하지만 폰 클라이스트 원수는 살아서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비롯한 유가족들도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난 탓에, 기갑 부대의 명장이자 프로이센 군인으로서 누구보다 기사도 정신에 충실했던[11] 그의 전적은 아직도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3. 진급 내역

4. 주요 서훈 내역



[1]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폰클라이스트'가 되지만 '클라이스트'로 널리 알려졌기에 관용적 예외가 인정된다. [2] 독일 헤센 주 브라운펠스 [3]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시조로부터 18대 후손이다. 클라이스트 가문 종친회 홈페이지 참조. [4] 프리드리히 그라프 폰 클라이스트, 헤닝 알렉산더 폰 클라이스트가 모두 클라이스트 가문 사람들이다. [5] 기동전으로 유명한 독일이었지만 독일의 보급체계는 말이 중심이었고 프랑스, 폴란드와 달리 정비되지 않은 도로 상황은 라스푸티차에 독일군 군수체계를 취약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6] 만슈타인과 클라이스트가 해임된 이후 남부집단군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A집단군은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각각 히틀러의 신임이 두터운 발터 모델 원수와 페르디난트 쇠르너 상급대장이 임명되었다. [7] 동 시대에 '에발트'란 이름의 클라이스트가 세 명이나 있어서 헷갈리기 쉽다. [8] 이때 많이 연좌죄로 게슈타포에게 연행되었는데, 에리히 펠기벨의 가족도 연좌죄로 연행되었다. [9] 에발트-하인리히는 명망 높은 저술가이자 정치가로서 2차 대전, 냉전, 냉전 이후 평화의 시대와 21세기를 모두 경험하였고 2013년에 세상을 떠난다. [10] Correlli Barnett 《Hitler's Generals》 [11] 독일군 야전 사령관 중에선 가장 전쟁범죄와 거리가 먼 편이었던 발터 모델 정도의 비판조차 받을 건덕지가 없다! [12] 계급만 올라간 것으로, 급여는 이전 계급과 동일하다. 혹은 명예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