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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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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c0><colcolor=#000> 나치 독일 초대 전쟁해군 최고사령관
에리히 요한 알베르트 레더
Erich Johann Albert Raeder
[1]
파일:Bundesarchiv_Bild_146-1980-128-63,_Erich_Raeder.jpg
출생 1876년 4월 24일
독일 제국 함부르크 제국도시
사망 1960년 11월 6일 (향년 84세)
서독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재임기간 초대 전쟁해군 최고사령관
1935년 6월 1일 ~ 1943년 1월 30일[2]
서명
파일:에리히 레더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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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c0><colcolor=#000> 신체 168cm
복무 황립 해군
1894년 ~ 1918년
국가방위군
1918년 ~ 1935년
나치 독일 해군
1935년 ~ 1945년
최종 계급 원수 (나치 독일 해군)[3][4]
주요 참전 유틀란트 해전
베저위붕 작전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훈일등욱일대수장
}}}}}}}}}

1. 개요2. 이력3. 주요 보직 내역4. 진급 내역5. 주요 서훈 내역6.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germanwarmachine.com/raeder.jpg
1939년의 모습.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해군 제독.

2. 이력

파일:external/s25.postimg.org/Erich_Raeder_with_Hitler1.jpg 파일:www_google_co_uk_20171029_192144.jpg
▲ (좌)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찍은 사진, (우)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행사에서 경례[5]를 하는 에리히 레더.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유틀란트 해전 등 주요 해전에 참여하였고, 전후에는 크릭스마리네의 재건에 힘썼다. 1928년 대장으로 진급, 한스 젠커 제독의 후임으로 해군 총사령관 직무를 수행하였다. 레더는 나치 정권을 싫어하였지만 해군 재건 계획을 지지하였고, 히틀러는 그를 크릭스마리네의 수장으로 유임시켜 해군 상급대장으로 진급시켰다. 그리고 1939년에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이래 처음으로 해군 원수에 임명되었다.

프랑스 전역 종결 후 집단군 야전군 사령관들이 대거 진급하기까지, 레더는 전군에 단 3명뿐인 원수로서[6] 히틀러의 대외 행사를 수행하였다. 기록 영상 등을 보면 원수 지휘봉을 쥐고 히틀러의 뒤를 따르는 레더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1939년 제정된 기사 철십자 훈장의 1호 수훈자인데, 히틀러가 육군을 견제할 겸 국방군에서 한자릿수 내에 드는 원로인 레더 제독을 우대해 준 것이다. 단, 같은날 여러 명의 육공군 원수가 기사철십자장을 함께 받았으므로 상징적인 의미였다.

히틀러가 전쟁을 시작했을 때는 "이제 해군은 멋지게 죽을 일만 남았다."(혹은 전투명령 1호를 하달하면서 "제군,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용맹히 싸우고 장렬하게 전사하라."라고 말했다고도 한다.)고 한탄했다. 이 말은 당시 열세한 전력인 독일 해군의 암울한 상황을 설명하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7]

독일 해군을 영국 해군, 공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덴마크 노르웨이를 선수 쳐서 터는 베저위붕 작전을 입안,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항공모함 함재기에 대한 문제로 공군 헤르만 괴링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서[8] 늘상 대립하면서 고생했다.

1943년 바렌츠 해 해전에서 독일 함대가 졸전 끝에 패배하자 히틀러는 격분해서 수상함대를 해체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항의하여 사임했는데 그가 사표를 내자마자 히틀러가 기다렸다는 듯이 수리했다고 한다. 그가 히틀러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총통께 부탁드립니다. 제발 루프트바페로부터 저의 후임자와 크릭스마리네를 지켜주십시오." 자신의 후임자로 북부 해역 해군 사령관 롤프 칼스 제독[9]과 잠수함 함대 사령관 카를 되니츠 제독을 추천했고, 히틀러는 되니츠를 2 계급 특진시켜서 레더의 후임으로 임명한다.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그도 의심을 받았으나, 직접 히틀러를 알현하러 찾아와 충성을 맹세했다.

파일:Defendants_in_the_dock_at_the_Nuremberg_Trials.jpg
전후 1945년 6월 23일 전범으로 지목되어 소련군에 의해 베를린 리히텐베르크에서 체포되었다. 모스크바로 이송되었지만 1945년 10월 20일 열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피고였기에 다시 뉘른베르크로 보내져 수감되었다. 당 재판의 피고들은 군복 착용시 계급장, 서훈 등을 전부 소련의 요구로 강제 탈거해야 했는데, 괴링과 카이텔, 요들은 부착물이 제거된 군복을, 되니츠는 사복 정장 차림으로 재판에 임했고, 레더는 애초에 퇴역한 민간인 신분이었으므로 정장을 입었다. 그의 죄목은 침략전쟁의 공모 및 계획수립, 전쟁범죄 및 비인도적 행위에 관한 것이었는데 기소된 레더는 1946년 10월에 유죄가 확정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0]

이미 70에 가까운 고령을 이유로 감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슈판다우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1955년 9월 26일 석방되었다. 군항이 위치한 킬로 이사한 후 회고록인 <나의 생애>를 집필했다.

1960년 11월 6일에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서독 해군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고, 10년형을 마치고 만기 출소한 되니츠가 조사를 낭독했다.

3. 주요 보직 내역

4. 진급 내역

5. 주요 서훈 내역

6. 기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87-080-30A,_Erich_Raeder.jpg
1928년의 레더.

[1] 라에더로 읽기 쉬운데, 독일어 Ä(에)의 대체 표기가 AE다. 따라서 Ä와 AE는 발음이 같다. 괴테(Goethe)의 oe도 이와 같은 원리. [2] 바렌츠 해 해전의 여파로 사임 [3] Großadmiral. 일본 쪽에서는 직역하여 대제독이라고 부른다. [4] 카를 되니츠와 함께 나치 독일 해군 역사상 단 2명 뿐인 해군 원수였다. [5] 유럽 원수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원수봉을 들었다 내리며 거수 경례를 대신했다. [6] 나머지 두 사람은 육군 원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1936년),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1938년). [7] 당시 독일 해군은 Z 계획 등 전력 증강 계획을 이제 막 시작한 시점이었다.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과 U보트 함대를 책임진 카를 되니츠 (당시) 대령 등 해군 수뇌부의 계획은 1945년까지 영국 해군과 맞설 수 있는 전력을 만든다는 것이었는데, 1939년에 히틀러가 덜컥 전쟁을 시작해 버린 것이다. [8] 괴링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에이스 출신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자존심이 너무나 강했다. 해군은 물론이고 육군에서도 항공기 비슷한 게 보이면 자기 관할이라고 바락바락 우겨댔던 건 유명하다. 괴링은 "독일 상공에서 날개가 달려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전부 내 관할이다"라는 말까지 했던 사람이다. [9] 1885.5.29 ~ 1945.4.15. 스페인 전역에서 독일 해군을 지휘한 기사 철십자 훈장 서훈자. 최종 계급 해군 상급대장. 1943년 3월 1일까지 북부 해역 사령관을 맡았으며, 총사령관 인선에서 탈락한 후 예비역이 되었다가 종전 전에 연합군 공습으로 사망했다. [10] 후임인 되니츠는 포로 강제 노역, 제3제국판 무제한 잠수함 작전 등을 지시했으며 전쟁법을 어기고서라도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 확실한 전범인 반면, 되니츠와 다르게 레더는 베저위붕 작전을 계획(이마저도 목표는 OKW에서 지정했다), 실행한 것이 전부인데도 선고된 형량은 되니츠보다 높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죄형법정주의적 측면에서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다. [11] 이는 독일군, 특히 장교들 사이에서 많이 보이던 특징이다. 군복을 사비로 맞춰 입어야 했기 때문에 복장 규정이 개정되어도 무시하고 일부러 구형 복장을 따르거나 이런저런 개조를 하는 경우가 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