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별 명칭 | |
<colbgcolor=#f5f5f5,#191919> 폴란드어 | Najwyższy Trybunał Narodowy |
영어 | Supreme National Tribunal |
독일어 | Oberstes Nationales Tribunal Polens |
러시아어 | Верховный национальный трибуна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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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시행했던 전범 재판으로, 폴란드 영내에서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나치의 전범과 그 부역자들을 처벌했다.2. 배경
1943년 연합국은 모스크바 선언을 통해 전쟁범죄 혐의로 유죄를 받은 독일인은 그 독일인이 범죄를 행했던 국가로 송환되어서 분노한 피해국 국민들의 심판을 받도록 명시했다.폴란드는 가장 먼저 나치 독일에게 군사적으로 침략당한 국가이며 6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나치의 잔악행위의 아래에 목숨을 잃었던 만큼 전쟁이 끝나자 나치의 전범들을 국내로 송환해 단죄하고자 했다.
사실 전쟁 기간에도 폴란드 지하국은 자체적인 특별 법원을 갖추고 일부 독일 전범들을 생포해 와 형을 선고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폴란드 지하국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나치 전범들에게 자비를 보일 의향은 전혀 없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아르투어 그라이저와 같은 일부 나치 전범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지만 폴란드는 아예 무시했다.[1]
이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절멸 수용소들을 비롯한 홀로코스트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지역도 폴란드였고, 훼손된 인류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려는 취지도 있었다.
이에 따라 1946년 1월 22일, 폴란드 영토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른 전범들을 처벌하기 위해 최고 국가 재판소가 설립되었다. 판결은 단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항소는 없었다.
폴란드를 지배하며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던 한스 프랑크와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이미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당했기 때문에 기소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폴란드 라돔의 주지사였던 에른스트 쿤트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사형당했기 때문에 기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폴란드에 위치한 절멸수용소에서 잔악한 생체실험을 했던 나치의 의사들은 이미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으로 단죄되었기 때문에 역시 기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3. 재판부
판사- 에밀 스타니스와프 라파포르트(Emil Stanisław Rappaport) - 유대인 법학자이자 변호사. 즉, 유대인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을 심판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 스타니스와프 리친스키(Stanisław Rybczyński)
- 헨리크 치에실루크(Henryk Cieśluk)
- M. 도브로메스키(M. Dobromęski)
- 알베르트 아이메르(Albert Eimer)
- 유제프 젬바티(Józef Zembaty)
- 펠릭스 야로시(Felix Jarosz)
배심원단
-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아크(Stanisław Stasiak)
- 스타니스와프 스테판스키(Stanisław Stefański)
- 헨리크 보이치크(Henryk Wójcik)
- 야누시 비에르시코발스키(Janusz Wierusz-Kowalski)
- 마리안 리틴스키(Marian Litiński)
- 알빈 유라(Albin Jura)
- 프란시셰크 짐와(Franciszek Zymła)
- 펠라기아 레빈스카(Pelagia Lewińska)
- 헨리크 도브로볼스키(Henryk Dobrowolski)
검사
- 타데우시 치프리안(Tadeusz Cyprian)
- 헨리크 가츠키(Henryk Gacki)
- 예지 사비츠키(Jerzy Sawicki)
- 미에치스와프 시에비에르스키(Mieczysław Siewierski)
- 스테판 쿠로프스키(Stefan Kurowski)
4. 피고 및 형량
4.1. 사형( 교수형)
- 막스 다우메(Max Daume) - 질서경찰 대령 및 친위대 연대지도자(대령), 1939년 바베르 학살의 책임자. 사형 선고. 1947년 3월 7일에 형 집행.
- 루트비히 피셔(Ludwig Fischer) - 돌격대 집단지도자(중장), 총독부 바르샤바 주지사. 사형 선고. 1947년 3월 8일에 형 집행.
4.2. 아우슈비츠 재판
한스 뮌히는 요제프 멩겔레와 달리 반인륜적인 생체 실험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유대인들을 치료해 주는 일만 한 덕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직원들 중 유일하게 무죄 선고를 받았다.
4.3. 징역형
- 루트비히 라이스트(Ludwig Leist) - 돌격대 여단지도자(소장), 바르샤바의 시장 및 한스 프랑크의 전권대사. 징역 선고. 8년 복역.[3]
5. 재판받지 않은 자들
헤르베르크 랑에 | 베를린 전투에서 전사 |
한스 보트만 | 기소 전 자살 |
막스 쾨겔 | |
율리안 셰르너 | 기소 전 사망 |
오스카 디를레방어 | |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 기소되지 않음 |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 서독의 신병인도 거부 |
구스타프 바그너 |
브라질의 신병인도 거부 1980년, 사망한 채 발견[4] |
폴란드 점령 기간 동안 공범이 되어 이득을 본 독일의 전범기업 관계자들도 있었지만 냉전이 도래하고 미국과 서구권의 반공주의 논리에 따라 이들의 죄가 사면되면서 폴란드 측에서 기소해 처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6. 별개의 재판
- 카를 오토 코흐 - 친위대 연대지도자(대령),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 소장. 1945년, 친위대에 의해 처형.
- 헤르만 플로어슈테트 - 친위대 연대지도자(대령),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 소장. 1945년, 친위대에 의해 처형.
- 리하르트 토말라 - 친위대 돌격대지도자(소령),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및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건설 감독관. 1945년, 소련 NKVD에 의해 즉결 처형.
- 마르틴 고트프리트 바이스(Martin Gottfried Weiss) - 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중령), 다하우 강제수용소 소장,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 소장. 1946년, 연합군의 다하우 재판에 의해 처형.
- 발터 필러(Walter Piller) - 친위대 상급반지도자(상사), 헤움노 절멸수용소의 부소장. 1949년, 폴란드에 의해 처형.
- 헤르만 길로(Hermann Gielow) - 친위대 본부반지도자(원사), 헤움노 절멸수용소의 가스 바겐 운전병. 소련에 의해 폴란드로 신병 인도. 1951년, 처형.
- 프리드리히 빌헬름 벤첼(Friedrich Wilhelm Wenzel) - 질서경찰 소령, 1939년 바베르 학살의 책임자. 1951년 소련에 의해 폴란드로 신병 인도 및 처형.
- 파울 오토 가이벨(Paul Otto Geibel) - 친위대 여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소장,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유혈진압의 책임자.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의해 폴란드로 신병 인도 및 종신형 선고. 1966년, 옥중 자살.
- 프란츠 슈탕글 - 친위대 최상급돌격지도자(대위),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장,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소장. 서독 사법부에서 종신형 선고. 1971년, 옥사.
- 헨리크 마니아(Henryk Mania) - 헤움노 절멸수용소의 존더코만도이자 폴란드인 부역자. 2001년, 징역 8년 선고.
청산되지 못한 폴란드 내 절멸수용소 관계자들에 대한 심판은 1960년대에 서독 재판부에서 별개의 재판으로 심판했다.
21세기에도 폴란드 사법부는 나치의 전범이나 그 부역자가 노인이어도 실형을 선고하는 것을 원칙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는 나치 전범에 대한 무관용을 원칙으로 삼은 독일 사법부의 원칙과 다를 바 없다.
2009년에 폴란드 사법부는 독일 사법부와 오스트리아 적십자사의 협조로 아직 생존해 있던 디를레방어 여단 대원 11명에 대한 기소를 준비했다. 디를레방어 여단은 집단강간과 고문 그리고 학살을 저지른 악명 높은 무장친위대 부대인 데다 바르샤바 봉기를 무참히 진압했으므로 폴란드는 이들을 기필코 단죄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소하기엔 증거가 불충분했고 안타깝게도 기소에 성공하지 못했다. #[5]
7. 관련 문서
[1]
폴란드는 국민의 대다수가
가톨릭을 믿는 가톨릭 국가이다. 그 정도로 가톨릭에 대한 믿음이 큰 국가가 교황의 간청을 무시할 정도로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
강제수용소의 여성 경비원들은 일반 친위대와 별개의 계급이 부여되었다.
[3]
바르샤바의 주민들에게 유화정책을 펼치는 몇 안 되는 나치의 고관이었기 때문에 이 점이 정상참작되어 징역형으로 그쳤다.
[4]
바그너의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발견되었는데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나치 전범들을 암살할 때 사용하던 주 수법이라 모사드가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5]
당시 디를레방어 여단의 대원들도 다른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령이었기 때문에
2024년 기준으로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도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