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름 |
Ernst-Robert Grawitz 에른스트-로베르트 그라비츠 |
출생 |
1899년
6월 8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주
샤를로텐부르크 (現 독일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
사망 | 1945년 4월 24일, 나치 독일 포츠담 바벨스베르크 |
복무 |
슈츠슈타펠 (1932년 ~ 1945년) 독일 국방군 |
최종계급 |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clearfix]
1. 개요
왼쪽이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 오른쪽이 카를 겐츠켄 슈츠슈타펠 중장이다. |
2. 초기 행적
군의관의 아들로 베를린 교외의 샤를로텐부르크[1]에서 태어난 그라비츠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1917년부터 종군했지만 1918년에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1919년에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베를린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는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0년에 컵 봉기당시 의용군으로 참가한 그라비츠는 1929년부터 내과의사로 일했다.3. 나치당 입당
1931년에 나치당에 입당한 그라비츠는 1932년 3월 29일에 친위대에 입대했다. 1933년에 베를린 베스트엔트 병원의 주임의사가 된 그라비츠는 1935년 6월 1일에 친위대 위생국장, 1937년에 독일 적십자사 부총재로 임명되었다.4.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에 무장친위대 위생총감으로 임명된 그라비츠는 1941년에 그라츠 대학의 명예교수가 되었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라펜스브뤼크의 강제수용소에서 수용자를 대상으로 가스 괴저의 감염에 관한 인체 실험 및 동성애 박멸을 내세워 동성애자에 대한 잔학한 생체 실험을 담당했던 그라비츠는 이후 총통지하벙커에서 히틀러의 주치의로 일했다.1945년 4월 베를린 공방전이 한창이던 당시, 패전을 직감하고 자신이 베를린을 탈출할 수 있도록 히틀러에게 요청했지만 이를 거부당하자 절망하여 4월 24일에 바벨스베르크 자택에서 가족들과 함께 수류탄을 터트려 자결했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