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18: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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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오베르크는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 사령관이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SS 경찰고급지도자를 담당했다.
2. 초기 행적
독일 제국의
함부르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오베르크는
1914년
8월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지원입대해
1916년
9월에 소위로 승진한 후 1,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후
함부르크로 돌아온 오베르크는 소매상과
플렌스부르크의 공장에서 일하면서
1923년에 5살 연하였던 아내와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다.
1926년에
함부르크로 돌아온 오베르크는 수입과일 판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1930년 가을에 회사를 퇴직하고
함부르크 시청 가까운 곳에서 담배 소매업을 운영하였다.
1931년
6월에
나치당에 입당한 오베르크는
1932년
4월에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1933년
5월 15일에 친위대 장군이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함부르크의 친위대 조직시찰때 눈에 들어 추천을 받아
1933년
7월 1일부터 오베르크는 하이드리히의 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윽고 오베르크는 하이드리히의 오른팔이 될 정도로 위세를 얻었는데
1934년
6월 30일에 일어난
장검의 밤 사건당시에도 하이드리히의 측근으로서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후 하이드리히와 사이가 약간 벌어진 오베르크는 친위대 본부를 떠나
하노버의 참모지도자로 이동했는데
1939년에는
작센 주의 츠비카우에서 경찰서장으로도 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후
1941년
8월부터
1942년
5월까지
라돔의 친위대 및 경찰지도자로 취임한 오베르크는
폴란드의
유대인 박해정책과 노동자 차출에 전념했는데
1942년
5월부터 점령지
프랑스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도 유대인과 레지스탕스 소탕에 전념하여 그의 지배하에서 약 75,000명의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5. 전후 행적
전후 오베르크는
서독정부로부터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은사
석방되어
1962년
11월에 풀려나
플렌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