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7 18: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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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돌격대 및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무장친위대 및
질서경찰
대장으로 많은
학살을 저지른
전범이다.
슈츠슈타펠
지휘관이지만 전선에서만 활동하며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던 형
발터 크뤼거와 달리
유대인 학살을 벌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2. 초기 행적
프로이센 왕국의 육군대령이던 알프레트 크뤼거의
차남으로
독일 제국 땅이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는 처음에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중간에 자퇴 후 칼스루에의 유년사관학교에 입교해 다시 프로이센 고급유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1914년에
독일 제국군
소위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프리드리히는 세 차례의 부상을 입고 용맹히 싸워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패전 후 잠시 군에 남아 해군의 프리기함네서 근무하다가 뤼처의 의용군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0년부터
베를린의 폐기물 처리업체에서 일한 프리드리히는
1924년부터 이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1928년에 독립업체를 세워 개업했는데
1922년에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었으며 그리고 세 아이의 수양아버지가 되기도 했다. 한편 그가 일한 폐기물 처리업체는
쿠르트 달루게도 엔지니어로 근무하여 두 사람은 서로 알게 되어
1929년
11월에 프리드리히는 권유로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1년
2월에 친위대에도 입대했지만
1931년
4월에 돌격대로 이동했다. 이것은 프리드리히보다 앞서 입단한 달루게가 당시
베를린의 돌격대 지도자였기에 그를 빼내 간 것이었다.
1932년에 돌격대 소장으로 승진한 프리드리히는
에른스트 룀의 측근이 되었다.
1933년
6월에는 돌격대 최고위인 돌격대 대장으로 승진하여 직업훈련소와 돌격대 사관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긴 장검의 밤 사건으로 룀을 포함한 많은 돌격대 간부가 숙청되었지만 프리드리히는 체포를 면했다. 돌격대의 지위는 유지되었지만 룀의 숙청 후 후임이 된 빅토르 루체에 의해 돌격대 제복의 착용은 금지되어 일시 당내에서 직무를 상실한 프리드리히는
1935년
1월에 총통이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다시 친위대로 이적하도록 명령되어 계급도 친위대 대장이 되었다.
1936년에 국경경비 책임자가 된 프리드리히는
나치당의 여러가지 이벤트에 히틀러의 대리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후인
1939년
10월 4일에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로부터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의 로즈지구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로 임명된 프리드리히는
10월 9일에는 오스트 지구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로 재부임했다. 그리고 폴란드 총독이던
한스 프랑크에게서도 보안담당 차관직을 받았다.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폴란드에서 실시된
유대인의 대학살을 비롯해 수많은 나치
전범 행위에 가담했다. 재직중이던
1942년
4월 20일에 폭탄테러로 인한 암살시도도 있었지만 무사했다. 허나
1943년
11월에 폴란드 총독이던
한스 프랑크와 불화하여 친위대 지도자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1943년
11월부터
1944년
4월까지 제7 SS 의용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에 배속된 프리드리히는 독일 지배하의
유고슬라비아에서 치안유지 활동에 종사했다. 여기서도 현지인의 학살에 관여하여 악명을 떨쳤는데
1944년
6월부터
8월까지
핀란드 북부에서 제6 SS 산악사단의 사단장이 되었다.
1944년
8월부터
1945년
2월까지 제5 산악사단의 사령관이 된 프리드리히는
1945년
2월부터 독일 남동지구 전선에서 힘러의 대리인으로 일했다.
1945년
4월부터
5월에는
오스트리아에서 남방군 집단에 속한 경찰 치안부대의 지휘를 맡았지만 독일이 항복하자 패전을 깨닫고 프리드리히는 자결했다. 그의 형인
발터 크뤼거도
5월 22일에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