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부터
베를린의 폐기물 처리업체에서 일한 프리드리히는
1924년부터 이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1928년에 독립업체를 세워 개업했는데
1922년에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었으며 그리고 세 아이의 수양아버지가 되기도 했다. 한편 그가 일한 폐기물 처리업체는
쿠르트 달루게도 엔지니어로 근무하여 두 사람은 서로 알게 되어
1929년
11월에 프리드리히는 권유로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1년
2월에 친위대에도 입대했지만
1931년
4월에 돌격대로 이동했다. 이것은 프리드리히보다 앞서 입단한 달루게가 당시
베를린의 돌격대 지도자였기에 그를 빼내 간 것이었다.
1932년에 돌격대 소장으로 승진한 프리드리히는
에른스트 룀의 측근이 되었다.
1933년
6월에는 돌격대 최고위인 돌격대 대장으로 승진하여 직업훈련소와 돌격대 사관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긴 장검의 밤 사건으로 룀을 포함한 많은 돌격대 간부가 숙청되었지만 프리드리히는 체포를 면했다. 돌격대의 지위는 유지되었지만 룀의 숙청 후 후임이 된 빅토르 루체에 의해 돌격대 제복의 착용은 금지되어 일시 당내에서 직무를 상실한 프리드리히는
1935년
1월에 총통이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다시 친위대로 이적하도록 명령되어 계급도 친위대 대장이 되었다.
1936년에 국경경비 책임자가 된 프리드리히는
나치당의 여러가지 이벤트에 히틀러의 대리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1]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
[2]
왼쪽은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오른쪽은 돌격대 상급집단지도자 사진이다.
[3]
전투부대는 시간이 지나면 신병 받고 재충전하기 위해 후방으로 빠지고 다른 부대가 투입되는데, 발터 크뤼거는 그 시기가 올 때마다 다른 전투부대로 뺑뺑이 돌려졌다. 전투를 안 하는 부대로 간 적도 있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급해지면 바로 들어가야 하는 예비대에 떨어졌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