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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1789년 당시의 세속 선제후국과 그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라인 동맹 및 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왕국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독일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는 독립적인 전쟁성을 가진 경우만 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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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독일 육군 Deutsches Heer 황립 해군 Kaiserliche Mar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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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 1919년 | ||
국가전쟁기[1] | ||
표어 | ||
Gott mit uns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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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건 | ||
1871년 창군 1898년 함대법 제정 1901년 의화단 전쟁 참전 1904 ~ 1908년 헤레로족, 나마족 학살 사건 1905년 제1차 모로코 위기 1911년 제2차 모로코 위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8년 러시아 내전, 핀란드 내전 참전 1919년 해산 |
육군 | 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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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의 군대. 육군과 해군으로 구성되었다. 공군은 창설되지 않았으며 육군 항공대, 해군 항공대만 존재했다.1871년 독일 통일로 창설되어,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을 계기로 1919년에 해체되었다.
2. 역사
전신은 북독일 연방의 연방군(Bundesheer)이다.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일전을 앞두고 연방 가맹국들의 군대는 작센 왕국의 작센군을 제외하고 모두 프로이센 왕국군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연방군은 각각의 독립된 군사동맹으로써의 정체성을 잃고 한 국가의 군대 형태로 재편됐다.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프로이센은 북독일 연방 가맹국이 아닌 남독일의 바덴 대공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이에른 왕국과 군사협의를 체결했다. 그리고 제국 결성과 함께 1871년 제국 헌법을 통해 연방군에서 독일 제국군/독일육군(Deutsches Heer)으로 재편되었다.
황립 해군(Kaiserlische Marine)의 경우 프로이센 해군이 주축이 된 북독일 연방 해군(Norddeutsche Bundesmarine)을 계승하였다. 창군 초기에는 보잘 것 없었으나 3대 황제 빌헬름 2세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영국과 건함 경쟁을 개시하며 세계 2위의 규모로 단숨에 올라섰다. 당시의 독일 황립 해군은 빌헬름 2세의 세계 정책을 추진하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통일 이후에는 주요 열강과의 전쟁이 없었다. 그래서 제국군은 주로 아프리카 식민지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의화단 전쟁에 참전하여 8개국 연합군을 지휘해 의화단을 분쇄하기도 하였다. 국내적으로는 지방색이 강한 독일인들을 징병제로 한데 묶음으로써 민족주의적 동질감을 부여하였다. 동시에 프로이센식 군국주의를 전 독일에 주입하는 장이었으며, 프로이센의 귀족들이 장교단을 장악하고 국정에 목소리를 내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슐리펜 계획을 통해 전쟁을 조기 종결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4년간의 소모전 끝에 1918년 패전으로 해산되었다. 유산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방위군, 그리고 나아가 나치 독일의 독일 국방군으로 계승된다.
3. 수뇌부
엄밀히 말해 '독일 제국군'은 통칭일 뿐으로, 공식적인 명칭이 아니다. 독일 제국군의 구성은 매우 복잡했다. 당대 다른 국가들도 각자 전통에 따라 육해군 간 군령 체계가 나누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으나 독일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했다. 주요 열강 군대들 중 독일보다 군령 문제가 심각했던 군대는 자그마치 세 개의 육군을 가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정도뿐이었다.[3]육군과 해군 간의 협력체는 없었으며 이 역할은 황제가 맡아야 했는데 빌헬름 2세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황제를 보좌하는 군사/해군내각은 모호한 권한과 역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황제라는 거대한 권력을 바탕으로 군사문제에 자주 개입하다보니 오히려 마찰만 짙어졌다. 그리고 독일 육군의 경우 비록 프로이센이 이끈다고는 하지만, 육군부라 할 수 있는 전쟁성만 주요 구성국별로 네 개나 있었으며 이들을 총괄하는 제국정부의 정부부처는 없었다. 심지어 바이에른군은 바이에른 국왕에 충성했고, 자체적인 참모본부도 가졌다. 해군은 육군과 달리 제국정부와 황제 직할이었으나 해군내각 외에도 제국 해군청, 해군본부가 명확한 우위 없이 병립했던 탓에 1차 세계대전 당시 황립해군의 작전 결정에 매우 악영향을 끼쳤다. 식민지 방위군(Schutztruppe)은 제국군 장교단의 지휘를 받았으나 계통상 육군과 해군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제국 외무청이나 제국 식민청에 속하여 총독의 통제에 놓였다. 따라서 통칭 '독일 제국군'이라고 불리는 독일 제국의 군사조직은 육군 네 개 또는 두 개[4]와 해군 하나, 그리고 이들 각자의 정부부처들이 황제를 중심으로 뭉친 전체를 총칭한다.
1차 세계대전 말이 되어서는 프로이센 총참모부가 개편된 육군최고사령부가 국정을 총괄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이는 국경 양쪽에 육상 전선을 둔 채 소모전을 치르는 독일의 환경 상 육군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육군의 맹주는 프로이센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실제 전선의 육군 병력들을 통솔하는 총참모부의 프로이센 장교단은 황제의 가장 큰 조언자 조직이 되었다. 전쟁은 황제 개인의 손을 떠난 지 오래였으나 그래도 제국 체제에서 황제라는 지위가 창출하는 영향력은 막강했으므로, 전쟁 중반부터 총참모부는 황제의 가까운 측근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된다. 그러나 시스템적 한계로 인해, 여전히 다른 조직들을 완전히 누르지는 못하였다. 제국 육군과 해군은 제국이 망하는 그날까지 제대로 손발이 맞지 않았다.
3.1. 최고전쟁지도자
독일 제국 최고전쟁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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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의 국왕이자 독일 제국 황제가 Oberster Kriegsherr, 즉 최고전쟁지도자로써 군을 통수했다.
3.1.1. 군사/해군내각
근세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군사내각(Militärkabinett)과 해군내각(Marinekabinett)은 내각시스템(Kabinettsystem)의 일부로, 프로이센 국왕/독일 황제에 군사적인 조언을 하는 황제 개인 직속의 비서조직이다. 군사내각은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인 1814년에 군 개혁의 일환으로 설립되어 주로 각 군의 인사 문제를 관할했다. 해군내각은 독일 제국이 건함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1889년에 설립되었다.그러나 실제로 그 역할은 매우 모호했으며, 다른 부서를 거치지 않고 황제와 독대 가능한 사실상의 비선조직이었다. 황제 직속이니만큼 정부 조직인 프로이센 전쟁부나 참모본부와는 완전히 독립된 존재였다. 군사내각장관(Chef des Militärkabinetts)은 군사 관련 주요 부서장들 중 유일하게 황제를 매 주마다 여러 차례 만나 논의할 수 있었으며 독일 황제는 군사내각과 함께 군 문제를 비밀리에 처리했다. 의회를 제치고 국정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던 빌헬름 2세의 치세에 이는 더 강화되었다.
그랬기에 군사내각은 군에 있어 매우 큰 영향력을 지닌 조직이었으나 1차대전 발발 후 공식적으로 육군최고사령부(Oberste Heeresleitung, OHL)에 속하게 되었다.
3.2. 전쟁성
Kriegsministerium. 명칭과는 달리 육군만을 관장하는 육군성이다. 프로이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전쟁성이 4개 있었다. 이들은 각자 군대의 군정권을 가졌다.프로이센의 전쟁성 장관이 사실상 독일 제국 육군의 전쟁성 장관이었으나 이 말이 곧 독일 제국 정부 직속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제국 정부 직속 조직인 국가청(Reichsamt)들 중 영방국 육군들을 총괄해 담당하는 부서는 없었다. 때문에 프로이센 전쟁성은 어디까지나 제국의 구성국인 프로이센 왕국의 정부조직으로, 나머지 구성국들의 전쟁성들과 법적으로는 동렬이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 제국과 제국 군대의 특성으로 인해, 사실상(De facto)의 제국 전쟁성으로 기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현대 미국에 연방정부의 군대인 미합중국 육군이 없고 주방위군들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되, 그 중 한 주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독일 제국 시절 프로이센 전쟁장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주로 고위 지휘관 또는 황제와 마음이 맞는 사람이 앉혀졌다.
독일 제국 시기 프로이센 전쟁장관 | ||
대수 | 이름 | 임기 |
1 | 알브레히트 폰 론 | 1859년 12월 5일 ~ 1873년 11월 9일 |
2 | 게오르크 폰 카메케 | 1873년 ~ 1883년 |
3 | 파울 브론자르트 폰 셸렌도르프 | 1883년 ~ 1889년 |
4 | 율리우스 폰 페르디 뒤 베르누아 | 1889년 ~ 1890년 |
5 | 한스 폰 칼텐보른슈타카우 | 1890년 ~ 1893년 |
6 | 발터 브론자르트 폰 셸렌도르프 | 1893년 ~ 1896년 |
7 | 하인리히 폰 고슬러 | 1896년 8월 14일 ~ 1903년 8월 15일 |
8 | 카를 폰 아이넴 | 1903년 ~ 1909년 |
9 | 요시아스 폰 헤링겐 | 1909년 ~ 1913년 |
10 | 에리히 폰 팔켄하인 | 1913년 6월 7일 ~ 1915년 1월 21일 |
11 | 아돌프 빌트 폰 호엔보른 | 1915년 ~ 1916년 |
12 | 헤르만 폰 슈타인 | 1916년 10월 28일 ~ 1918년 10월 9일 |
13 | 하인리히 슈이흐 | 1918년 ~ 1919년 |
14 | 발터 라인하르트 | 1919년 |
3.3. 총참모부
Großer Generalstab. 프로이센 전쟁성 산하의 총 참모부(참모본부)이자 독일 제국 육군의 총참모부이다. 프로이센군 외에도 작센 및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의 장교단도 참여했다. 참고로 바이에른은 자체의 총참모부도 있었다.총참모부는 전쟁성 산하이지만 제국군 내 뿐만이 아니라 국가 통치 구조 내에서 매우 자율적이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총참모부는 평시에도 전쟁 대비를 위한 철저한 계획을 수립하며, 동원 계획, 병력 배치, 군수 물자 준비 등을 전쟁성과 함께 조정했다.[5] 그리고 총참모부의 일인자인 참모총장은 카이저에게 군에 대한 사항에 대해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보고 후 군사 작전에 관한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또한 총참모부는 군사적인 결정뿐만 아니라 군사에 관한 정치적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6]
참모총장은 카이저가 직접 선출하였다. 참모차장이나 국장은 참모총장이 선출하였지만 카이저가 해임시키거나 대체시킬 수 있었다.
-
참모총장
이름
헬무트 폰 몰트케[7]
Helmuth Karl Bernhard von Moltke
알프레트 폰 발더제
Alfred Ludwig Heinrich Karl Graf von Waldersee
알프레트 폰 슐리펜
Alfred Graf von Schlieffen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Helmuth Johannes Ludwig von Moltke
에리히 폰 팔켄하인
Erich von Falkenhayn
파울 폰 힌덴부르크
Paul von Hindenburg
빌헬름 그뢰너
Wilhelm Groener
한스 폰 젝트
Hans von Seeckt
계급 원수 원수 원수 상급대장 보병대장 원수 중장 소장
임기 1871년 1월 18일 -
1888년 8월 10일1888년 8월 10일 -
1891년 2월 7일1891년 2월 7일 -
1906년 1월 1일1906년 1월 1일 -
1914년 9월 14일1914년 9월 14일 -
1916년 8월 29일1916년 8월 29일 -
1919년 7월 3일1919년 7월 3일 -
1919년 7월 7일1919년 7월 7일 -
1919년 7월 15일
3.4. 육군최고사령부
Oberste Heeresleitung(OHL). 전시에 설치된 독일 제국 육군의 총사령부. 분산된 독일 제국 내 육군 수뇌부들을 결집한 최고사령부로, 상술한 총참모부 외에도 각 군 전쟁성들과 군사내각까지 포함하는 조직이었다.총 3개 시기로 구분된다. 1기는 전쟁 초반 소 몰트케, 2기는 에리히 폰 팔켄하인, 3기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이끌었다. 특히 3기에 와서는 힌덴부르크를 보좌하던 총참모부 참모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 보병대장이 최고사령부 병참총감이 되어, 사실상 전권을 쥐고 독일 제국의 총력전 수행을 이끌었다.
해군 관련한 권한은 여전히 없었기에 해양작전에 있어서는 해군과 육군의 충돌이 잦았지만, 그래도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입안하는 등 전시체제 하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조직이었다.
3.5. 제국해군청
Reichsmarineamt. 1889년에 해군내각, 황립해군최고사령부와 동시에 수립되었다. 해군의 군정권을 가진 기관으로, 개별 영방국 정부가 아닌 제국 정부의 정부부처인 국가청(Reichsamt)중 하나다. 육군청이 없는데 해군청은 있는 이유는 독일 제국 해군이 영방국의 군대가 아닌 황제의 해군이었기 때문이다.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원수가 장관으로 있으면서 독일 제국내 굉장한 실권을 가진 곳이 되었으며 영독 건함경쟁을 추진했던 핵심 기관이자 독일의 세계 정책을 견인하는 기관으로, 킬, 단치히와 빌헬름스하펜에 황립해군공창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단치히 해군공창이 주로 구축함과 어뢰정, 또는 경순양함[8]들을 건조했다면 킬 해군공창은 중급의 함선들, 즉 순양함들을 주로 건조했다. 한편 빌헬름스하펜 해군공창은 전함과 순양전함 등의 주력함들을 전담[9]해서 만들었다.[10] 심지어 중국의 키아우초우 식민지도 그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식민청이 아니라 해군청의 관할하에 있었다.
또한 빌헬름 2세의 동생이자 황족인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해군 원수[11]가 제국해군청 해군 감찰관(Generalinspekteur der Marine)[12]을 맡고 있었다.
3.6. 해군본부
Admiralstab. 직역하여 제독참모부라고도 한다. 황립해군최고사령부(Kaiserliches Oberkommando der Marine)의 후신이며 1898년의 함대법 제정으로 창설되었다.해군의 참모본부이다. 제독참모라는 명칭 자체도 육군의 일반참모(Generalstab)에 대응하는 해군 단어다. 평시에는 군사적 조언만 하는 기관이나 다름없었으며, 실질적인 건함 계획 등을 주도하는 것은 제국 해군청이었다. 그러나 해군에 관심이 많던 빌헬름 2세가 해군본부를 통해 해군에 간섭하곤 했기 때문에 제국 해군청과의 우열은 불명확했다.
3.7. 해전사령부
Seekriegsleitung(SKL). 육군최고사령부에 대응하는 해군의 총사령부로, 1918년에 설치되었다.4. 편제
자세한 내용은 독일군/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4.1. 독일 제국 육군
▲ 독일 제국 육군 군단들의 관할 구역. 로마 숫자로 표기되어 있다. 로마 숫자 뒤에 .B.가 붙은 군단은 바이에른 왕국군 군단들이며, 베를린 일대에 표시된 (G.)는 근위군단(Gardekorps)[13]을 의미한다. 검게 칠해진 영역은 1912년에 막 창설된 제20군단( 동프로이센)과 제21군단( 알자스-로렌)을 의미한다.
Deutsches Heer. 독일 제국은 프로이센 왕국이 여러 소국들을 병합함으로서 성립되었다는 역사적 경위로 인해서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내부적으로는 여러 구성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러한 제국의 구조는 독일 제국군의 편제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독일 제국 육군이 독일 제국 내의 각 구성 제후국이 보유한 육군의 집합체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 좋은 예로, 제후국들의 육군이 제국 육군이라는 하나의 틀로 묶여 통합된 형태이다. 각 영방국 군대는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보장받았다.[14]
이는 독일 연방 시절 연방의 가맹국들간의 군사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군사 동맹격의 수단으로 창설되었던 ‘연방군′(Bundesheer) 시스템의 영향이며, 더 올라가면 신성 로마 제국 시절의 제국군(Exercitus Imperii)[15]에서 기원한다. 제국 육군이 각 구성 제후국의 육군의 집합체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특징은 현대 미군이 연방군과는 별개로 각 주의 주방위군을 따로 두는 것이나, 당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의 합동 육군과는 별개로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그리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각자의 방위군들을 따로 편성하고 있었던 것과 비슷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를 제외하고는 분견군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1~8 분견군이 있었으며 각 분견군은 다른 지역에 배치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 분견군들은 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런 군(Armee)들은 5~6개 (적으면 4개)의 군단(Korps)를 포함하고 있었고, 각 군단은 2개의 사단을 가졌다.
4.1.1. 프로이센 왕국군
▲1894년 포츠담 루스트가르텐에서 사열식을 하는 근위군단 소속 제1근위보병연대. 근세 척탄병들의 미트레(Mitre) 모자를 쓰고 있다.
Königlich Preußische Armee. 프로이센 왕국의 군대로, 명실상부한 독일 제국군의 맹주이다. 독일 기사단국을 이은 프로이센 공국 군대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군대를 계승하며,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 통일의 군사적 주역이다. 제국 육군 병력과 장교단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으며, 상술한 대로 프로이센군 전쟁성과 참모부는 곧 독일 제국군 전체의 전쟁성과 총참모부나 다름없었기에 프로이센군이 사실상 제국군 그 자체(Preußisch-deutschen Armee)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에서 총 19개의 군단을 보유[16]했는데, 18개 지역군단과 하위 제대들은 관할 지역 출신자들로 충원되었다. 가령 제1군단의 관할 구역은 동프로이센 일대였다. 반면 황제의 친위대 겸 일종의 수도군단으로서 베를린 일대에 주둔하던 근위군단(Gardekorps)은 관할구역이 없었으며, 프로이센 왕국 전역과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각지에서 충원되었다.[17] 규모도 근위군단이 조금 더 컸는데, 독일 제국 군단들은 각각 2개 보병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근위군단에는 여기에 근위기병사단 하나가 추가되었다. 기병 부대는 보통 여단 편제로 각 보병사단들 예하에 편제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근위기병사단은 독보적으로 거대한 사단급 기병 제대였다. 예하에 총 4개 여단이 편제되었는데 퀴레시어 중기병과 울란 창기병, 용기병, 그리고 후사르 검기병 연대들이[18] 골고루 분포했다. 그 외 근위군단에는 직할대 숫자도 더 많았다.
근위군단부터 8군단까지는 과거 나폴레옹 전쟁 막바지인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시기를 전후로 하여 프랑스군의 군단 편제를 받아들여 만들어진, 프로이센 왕국의 오리지널 군단들이었다. 한편 제9군단부터 제11군단까지는 북독일 연방 시절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대항하기 위해 작센을 제외한 영방국 연대들을 프로이센군이 흡수하여 만든 군단들이었다. 독일 제국 성립 직후에는 바덴 대공국군을 재편한 제14군단과 엘자스-로트링겐을 방위하기 위한 제15군단이 창설되었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제국군의 팽창 과정에서 총 제21군단까지[19] 늘어났다.
하술할 세 영방국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의 군대는 전부 프로이센군에 흡수되었다. 지역별로 모집되던 특성 상 각 연대별 역사와 전통, 군기는 계승되었으나 그 지휘권이나 장비 등의 독자성은 완전히 프로이센군에 종속되었다. 가령 헤센 대공국군의 제81보병연대(헤센 선제후국 제1연대)와 제80퓨질리어연대는 42보병여단을 구성하여 나사우 공국 출신의 41보병여단과 함께 프로이센 21사단에 속했다. 그리고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군대는 제91올덴부르크 보병연대와 제10야전포병연대, 제19올덴부르크 기병연대로 나뉘었고, 하노버 지역의 연대들과 함께 제국군 제19사단을 구성하는 식이었다.[20]
다만 하노버 지역의 연대들은 하노버 왕국군에서 기인했으나, 프로이센 주도의 제국에서 그 역사를 인정받지 못했다. 프로이센이 하노버를 점령해 멸망시키는 바람에 양국 왕가가 적대관계였기 때문이다. 하노버 연대들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빌헬름 2세의 허락를 얻어 과거의 전통을 공식적으로 이을 수 있었다. 그 외 인구가 너무 적어 대대 정도의 군대밖에 꾸리지 못하는 소국들은 주변 소국들의 대대들을 모아 함께 연대를 꾸리거나 프로이센 연대들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가령 제7 튀링겐 보병연대(독일 제국군 96보병연대)의 경우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후국과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작센알텐부르크 공국의 대대들이 모인 부대였다.
프로이센군에 완전히 흡수된 가장 큰 영방국 군대는 바덴 대공국군이었다. 1개 군단 규모였는데, 그대로 제국 육군 제14군단으로 편입되었다. 바덴의 자체적인 전쟁성 또한 1871년 12월 27일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프로이센군에 흡수된 후의 역대 14군단장들 또한 한 명을 제외하면 전부 프로이센인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테오도어 폰 바터 중장인데 그마저도 바덴이 아니라 뷔르템베르크군 출신이다. 다만 기원도 기원이거니와 지역 군단인 독일 제국군 군단들의 특성 상, 프로이센군에 흡수된 이후에도 제14군단은 바덴인들로 구성된[21] 바덴을 지키는[22] 부대였다.
그 외 작센군과 뷔르템베르크군도 전시에는 프로이센과 제국 육군의 편제에 속하였으며 자신들만의 고유 번호 외에도 프로이센군 소속으로서의 번호를 부여받았다. 다만 이들은 독자적인 전쟁성을 가지고 평시 군령, 군정권을 유지했으므로 바덴과는 달리 독자성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4.1.2. 바이에른 왕국군
▲군기.
▲1915년, 단체 기념사진을 찍은 제16바이에른예비보병연대 장병들. 제일 오른쪽의 병사가 바로 상병 아돌프 히틀러다.
Königlich Bayerische Armee. 바이에른 왕국의 군대이다. 제국의 2인자나 다름없던 바이에른의 특성 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왕립 헝가리 방위군처럼 가장 높은 수준의 자립도를 부여받았다. 전쟁부와 참모부, 사관학교는 당연하게도 수도 뮌헨에 있었다.
독립된 전쟁성과 참모부를 가지고 있었다. 바이에른 전쟁성은 군정을 담당했고, 참모부는 군령권을 행사했다. 전쟁 발발 이후 참모부는 바이에른군으로 구성된 제6군의 사령부로 재조직되었다. 바이에른 참모장교들 일부는 프로이센 주도의 총참모부에 파견되어 합동작전을 조율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전쟁장관은 상급대장 오토 크레스 폰 크레센슈타인 남작이었으며 참모총장은 콘라트 크라프트 폰 델멘징엔 포병대장이었다.
군사학교로는 프로이센 전쟁대학을 본떠 1867년 설립된 바이에른 전쟁대학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바이에른군 일반참모들을 육성했다. 1880년대까지는 군복조차 바이에른 자체적인 복장을 고수했다. 심지어 바이에른군은 제국 멸망 때까지 호엔촐레른 가문의 독일 황제가 아니라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국왕에 대해서 충성을 맹세했다.
3개 군단 규모였다. 제국군으로의 합병 직전 바이에른 섭정 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과 바이에른 전쟁장관이던 지그문트 폰 프랑크 보병대장이 온갖 개혁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두 개의 군단을 신설했으며, 1900년에 제3군단이 설치된다. 바이에른 군단들도 다른 영방국 군단들과 마찬가지로 각 군단은 2개 사단을 보유했다. 1개 기병사단과 1개 산악사단, 바이에른 왕실 근위대인 근위보병연대도 존재했다. 1군단 사령부는 뮌헨, 2군단은 뷔르츠부르크, 3군단은 뉘른베르크가 소재지다. 2군단의 경우 일부 연대들을 팔츠 지역과 북부 알자스-로렌에도 주둔시켰다. 이 세 군단들은 전시에도 바이에른군 소속이었기에, 전시에는 프로이센 식별번호를 부여받는 타 영방국 군대들과 달리 바이에른 1군단 하는 식의 고유 식별 번호를 유지했다. 제6군이 바이에른군 3개 군단과 예비군단 1개가 포함된[23][24] 야전군 제대였으며 그 사령관은 바이에른 왕세자인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이었다.
그 외 특기할 만한 부대를 꼽자면 바로 바이에른의 엽병(Jäger) 부대들이었다. 바이에른의 험한 알프스 산악 지역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던 이들 엽병부대원들은 독일 최고의 산악부대들로 손꼽혔다. 1차 대전 초 프랑스군의 강인한 알프스 엽병(Chasseurs Alpins) 부대를[25] 상대하기 위해 독일이 신설한 산악사단인 '알프스 군단(Alpenkorps)'의[26] 주축이 된 것은 바이에른 왕실 근위연대와 엽병들이었다. 다만 모두가 바이에른군 출신은 아니었고, 프로이센군과 뷔르템베르크군 등 일부 타 영방국 군대도 일부 혼성 편제되었다. 대표적인 부대가 바로 에르빈 롬멜이 초급장교 시절 소속되어 있던 뷔르템베르크 산악대대다.[27]
어찌됐건 알프스 군단 병사들은 당대 최강의 산악부대로 손꼽혔던 이탈리아 왕국군 알피니(Alpini) 연대들과도[28] 대등하게 공방을 주고받으며 명성을 쌓았다. 오스트리아 란트베어의 산악부대인 황립 및 왕립 향토총병대(K.k. Landesschützen)[29] 역시 이들의 눈부신 활약을 인정했다. 그리고 독일 산악군단의 도움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신들의 에델바이스 장식을 선물했는데, 이는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 엽병대의 상징이 된다.
루프레히트 왕세자를 제외하면 펠릭스 그라프 폰 보트머 상급대장이 특히 두각을 나타냈던 바이에른군 장성이었다. 그리고 루프레히트 왕세자의 삼촌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왕자는 보오전쟁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전부 참전한 노장으로, 조카와 마찬가지로 육군 원수에 올랐다. 훗날 국방군의 여러 고위 장성들 중에도 바이에른군 출신자들이 많이 분포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와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원수, 페르디난트 쇠르너 원수가 대표적이다. 쇠르너는 상술한 산악군단 소속이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유명한 바이에른군 출신은 이런 기라성 같은 장성들이 아니라 일개 상병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다. 훗날 독일 총통에 오르는 그는 1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징병을 피해 독일로 와 바이에른군에 입대했고, 제6예비사단 소속 제16바이에른예비보병연대에서 전령으로 4년간 복무했다. 그 외 나치당 친위대 총수 하인리히 힘러 역시 바이에른군에서 복무했다. 다만 실제로 4년간 전선에서 뛰면서 무공을 세우기도 했던 히틀러와 달리, 힘러는 후방에서만 복무했다.
4.1.3. 작센 왕국군(제12, 제19군단)
▲ 작센 제4보병연대 1대대의 군기.
▲ 1915년, 기념사진을 찍은 제1작센 근위척탄병연대 병사들.
Königlich Sächsische Armee. 작센 왕국의 군대로, 드레스덴에 자체적인 전쟁성을 가지고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의 전쟁장관은 막스 폰 하우젠 상급대장. 사관학교는 1819년부터 1866년까지 존재했으나 통일 이후 사라졌다.
2개 군단 규모였다. 본래 제1군단만이 있었으나 19세기 말 제국군의 팽창 과정에서 2군단이 신설되었다. 각 군단별로 2개 보병사단을 가지고 있었다. 기병의 경우 1913년 기준으로 제1울란연대, 제2총기병연대, 제3후사르연대로 구성되었으며, 포병은 총 4개 포병여단에 9개 포병연대를 보유했다.
전시에 작센군 1군단은 제국군 제12군단으로, 2군단은 제19군단으로 재편되었다. 1군단 사령부 소재지는 드레스덴, 2군단은 라이프치히이다.
4.1.4. 뷔르템베르크 왕국군(제13군단)
▲ 뷔르템베르크 보병대 군기.
▲ 1914년 7월 9일,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와 고틀리프 폰 헤슬러 원수 앞에서 퍼레이드를 하는 뷔르템베르크군.
Königlich Württembergische Armee.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군대. 1개 군단 규모였으며, 전쟁성은 슈투트가르트 올가슈트라세 13번지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전쟁장관은 오토 폰 마르히탈러 상급대장이다.
뷔르템베르크군은 10개 보병연대, 4개 포병연대와 2개 드라군연대 및 2개 울란연대로 구성된다. 이들은 전시에는 제국군 제13군단으로 재편되었다. 하지만 뷔르템베르크 제8보병연대만은 제국군 15군단 예하 39사단의 제61보병여단 소속으로 알자스 로렌에 배치되었다.
주요 출신인은 패전 당시 제국군 참모총장이었던 빌헬름 그뢰너 중장, 제국 항공대의 비행선 개발자인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중장, 그리고 독일 제국이 이끄는 리투아니아 괴뢰정부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던 빌헬름 폰 우라흐 기병대장( 민다우가스 2세) 등이 있다.
다만 가장 유명한 이는 훗날의 독일 국방군 원수 에르빈 롬멜이다. 롬멜은 1차 대전 당시 뷔르템베르크 제6보병연대(독일 제국군 제124보병연대)에서 복무했으며 우라흐 대장의 보좌관이기도 했다. 그 외 국방군 중장이자 전후 현대 독일 연방군의 대장으로서 NATO군 중앙유럽 지상군 사령관을 지냈던 한스 슈파이델 또한 뷔르템베르크군 출신이다.
4.2. 독일 제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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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erliche Marine. 독일 황립 해군의 경우에는 프로이센 시절부터 황제 직할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독일 제국 육군과는 다른 편제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이미 북독일 연방이 결성된 시점에서 모든 가맹국들의 군대는 앞서 서술했듯 프로이센 왕립 해군에 흡수되었고 새로이 창설된 연방 해군이 존재하고 있어서 제후국들이 각각 따로 해군을 가지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즉 제국 육군이 제후국들이 각각 따로 갖고 있던 육군을 하나로 통합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면, 제국 해군은 처음부터 단일 조직으로 창군되었던 것이다.
4.3. 독일 제국 의무군
Sanitätskorps. 육군과 해군의 의무부대들을 합쳐서 의무군이라는 군종을 만들었던 것도 독일 제국군의 특징이었는데, 이는 오늘날의 독일 연방군에도 계승되었다.4.4. 식민지 방위군
Schutztruppe. 해군이 직접 관할한 키아우초우를 제외한 나머지 식민지들에서 독일이 운영한 식민지인 부대들이다. 주로 탄자니아 등 독일령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운용되었다. 특히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현지인 병사들은 아스카리(Askari)라 불렸는데 이는 스와힐리어로 군인을 뜻한다.상술한 바와 같이, 독일 제국 육군이나 해군 소속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4개 영방국들의 전쟁성이나 제국 해군청 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제국 외무청, 그리고 1907년 이후로는 제국 식민청에 속했다. 각 식민지 총독들이 자기 관할구역의 슈츠트루페 지휘권을 가졌다. 다만 지휘하는 장교단들은 제국 육군 출신이었다.
4.5. 항공 전력(육군 항공대, 해군 항공대)
독립된 공군이 아니었으나, 편의상 묶어 별도의 단락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1차 대전 당시에는 공군이 실험 단계였기 때문에 당시의 일반적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제국도 독립된 공군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독일 제국 공군은 없었고, 독일 제국 육군 항공대(Luftstreitkräfte, 루프트슈트라이트크레프테)가 공군의 임무를 수행했다. 해군 역시 독자적인 항공대를 보유했었으나 육군 항공대에 비해 규모에서 열세였고,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에 나타난 루프트바페의 주축이 된 건 육군 항공대였다.[30] 물론 공군 창설 시 해군 출신들도 여럿 들어오긴 했으나 수는 적은 편이었다. 독일 제국 해군 항공대는 전투기나 폭격기 대신 체펠린 비행선을 보다 많이 운용했다.
5. 전술과 전략
그동안 제2제국의 외교와(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책임을 포함한) 독일 제국군의 전략적 능력에 대해서는 비교적 저평가가 되어왔으며 이것이 주류였지만 최근에는 조금 바뀌는 추세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작성한 내용 참조 링크)슐리펜 계획의 경우 중립국 벨기에를 친다는 외교적으로 고립을 자초하는 전략과 실전에서 쓸데없는 수정을 가해 계획자체도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는 점 등으로 비판받는데 계획을 입안했던 슐리펜에게는 변호의 여지가 있다. 슐리펜이 계획을 짜던 1905년은 러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 제국의 열악함이 여지없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슐리펜은 러시아의 열악한 동원력을 감안하고, 최초로 벨기에를 공격할 것을 프랑스로 예상했기에 벨기에는 우방으로 삼아야 한다고 계획하였다. 하지만 러불동맹으로 프랑스의 차관이 들어오고 표트르 스톨리핀과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의 경제개혁으로 러시아는 1914년까지 연간 10%를 넘어서는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내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철도를 확충하여 총동원 속도가 빨라져 당초 계획보다 훨씬 앞당겨져 35일 안에 프랑스를 쓰러뜨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러시아의 총동원령 선포와, 그에 맞춘 러시아의 동맹국 프랑스의 동원령 선포로 위협을 느낀 독일이[31] 먼저 선수를 치기로 하면서 뒤바뀐 것이다.
5.1. 짧은 전략적 사고에 대한 보론
우리가 17세기 초 유럽의 세력 판도에서 갈등 관계를 선으로 시각화(스웨덴-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트리아-에스파냐, 프랑스)해본다면 사실상 무방비 상태의 동서 속령을 거느린 브란덴부르크가 이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이후 폴란드에 이어 스웨덴이 몰락했지만, 러시아가 강대국의 위치로 부상하면서 다시 똑같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베를린에 들어서는 정부마다 동맹이냐 아니면 무장중립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할 것이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크리스토퍼 클라크, < 강철왕국 프로이센> 65p.
- 크리스토퍼 클라크, < 강철왕국 프로이센> 65p.
국경의 대부분이 산악으로 형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같은 국가도 있지만 독일처럼 적의 침공에 이토록 불리한 지세를 가진 패권국가는 아마도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Der Weltkrieg 1914-1918, Bd 1, 4p. 게하르트 그로스의 <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98p에서 재인용
- Der Weltkrieg 1914-1918, Bd 1, 4p. 게하르트 그로스의 <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98p에서 재인용
1656년 바르샤바에서의 대선제후의 승리부터 재앙에 가까웠던 중부집단군의 모스크바 전선에 이르는 독일의 전쟁들을 조사하면서, 거듭 발견되는 패턴들이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프로이센-독일은 결정적인 전장에서 최대한 빠르게 승리함으로써 전쟁을 최대한 짧게 끝내고자 했다. 물론 전쟁을 하는 모든 세력들이 그러한 고려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으나, 그 어떤 국가도 이러한 방식을 극단적일 정도로까지 끌고 가지는 않았다. 유럽사의 그 어떠한 국가도 승리를 그렇게 즉각적이고 놀라운 작전적 책략으로 냉혹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 로버트 M. 시티노, < 독일의 전쟁 방식(The German Way of War)> 309p.
- 로버트 M. 시티노, < 독일의 전쟁 방식(The German Way of War)> 309p.
프로이센 왕국군, 그리고 그 수뇌부를 이어받은 제국군과 국방군의 짧은 전략적 사고가 형성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독일의 지정학적,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부터 독일 제국에 이르기까지 호엔촐레른가의 영지는 유럽의 중심부에 존재하여 많은 이웃 세력들의 동시적인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었다. 심지어 지리적인 방어선조차도 없었다. 심장 브란덴부르크는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전히 정치적인 명칭'이었을 정도로 지리적 경계가 부재했다. 이후 독일 제국과 나치 독일 역시 동쪽 국경은 브란덴부르크의 문제점을 그대로 계승했다. 서쪽 국경 역시 유일한 방어선인 라인 강 서안 지역에 루르 공업 지대를 비롯한 경제적 심장부가 몰려 있어 아르덴과 알자스 로렌 지역에 주둔한 프랑스 군대의 위협에 매우 취약했다.
반대로 프랑스는 보주 산맥과 아르덴 산지, 알프스와 피레네에 보호받았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디나르알프스 산맥과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보호받았다. 러시아 제국은 침략자가 지칠 때까지 끝없이 후퇴할 수 있는 드넓은 영토 그 자체가 방어에의 이점을 제공했다. 바다로 보호받는 섬나라 영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탈리아 왕국 역시 삼면의 바다와 북부의 알프스가 방어선을 제공했다.[32] 독일만이 자연적 방어선이 없었다.
프로이센의 지도부는 이러한 위협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답은 외교적인 동맹 구축을 통해 한쪽의 위협을 더는 것, 그리고 고도의 군사적 능력을 갖추어 불리한 지리적 위치에 놓인 영토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군부의 역할은 후자였다. 그들은 프로이센 특유의 작전적 사고능력과 기동전 이론을 수립해야 한다는 답을 내놓는다.
이러한 지리전략적 평가로 인해 독일제국의 군부 엘리트들은 공간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 해법은 바로 양면전쟁이었고 이는 제국 정부의 위정자들에게까지 숙명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그로부터 총참모부는 양면전쟁에 과도하게 집착했고 자신의 군사적 전문성을 과신했다.(중략)
한편 총참모부가 수립한 모든 작전적-전략적 양면전쟁계획에는 독일제국의 공간적 위치로 인해 초래된 시간적인 제약들이 내재되어 있었다. 국내 대다수의 군사이론가들과 총참모부는 양면전쟁이 발발할 경우의 대안은 수세적인 장기 소모전쟁 또는 공세적인 속전속결뿐이며 장기 소모전으로는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공간적인 종심과 독일의 양호한 철도망을 이용하여 내선에 선정된 전략적 지점에서 주도적으로 신속하게 수세 또는 공세적으로 수행하는 작전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독일은 이처럼 공간적, 시간적 요인 때문에 군사적인 측면에서 이미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 독일 연방군 대령 게하르트 그로스의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98 ~ 99p.
한편 총참모부가 수립한 모든 작전적-전략적 양면전쟁계획에는 독일제국의 공간적 위치로 인해 초래된 시간적인 제약들이 내재되어 있었다. 국내 대다수의 군사이론가들과 총참모부는 양면전쟁이 발발할 경우의 대안은 수세적인 장기 소모전쟁 또는 공세적인 속전속결뿐이며 장기 소모전으로는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공간적인 종심과 독일의 양호한 철도망을 이용하여 내선에 선정된 전략적 지점에서 주도적으로 신속하게 수세 또는 공세적으로 수행하는 작전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독일은 이처럼 공간적, 시간적 요인 때문에 군사적인 측면에서 이미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 독일 연방군 대령 게하르트 그로스의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98 ~ 99p.
게하르트 그로스 대령의 설명처럼, 사방으로 포위된 독일의 지리전략적 상황에서 장기전은 승산이 없었다. 포위된 독일 내부의 한정된 자원만으로는 독일을 포위한 국가들의 무한한 경제력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었다. 실제로 이는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4년만에 증명되기도 했다. 결국 기동전과 작전적 섬멸을 통해 적의 주력을 분쇄함으로써 단기간에 승리를 가져오는 속전속결의 전투 방식만이 독일이 생존하는 방식이라고 그들은 믿게 되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수행능력이 향상되어 양면전쟁의 승리 가능성이 희박해진 때까지도 슐리펜 계획을 수정한 몰트케 계획을 유지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정학적 사정으로 인해 군사적인 대안이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결국 독일 군대의 부족한 전략적 식견은 전략을 생각할 수 없는 수세적인 지정학적, 지리적인 사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전략적인 상황은 이미 불리한 형세이며 따라서 외교가 주 업무가 아닌 군부의 입장에서는 작전적 승리, 그것도 확실한 승리만을 생각해야 했다. 이는 프로이센군과 훗날의 국방군에 이르기까지 독일 군대의 기본적인 사고 방식이 되었다. 독일 군대가 덴마크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승리를 거두고 제국을 통일한 1871년 이후 이 사고 방식은 더욱 강화된다.
다만 여기서 그들이 놓친 점이 있었다면 당시 승리를 거두었던 참모총장 대 몰트케 원수는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바탕으로 다른 국가들의 위협을 받지 않은 채 주적만을 상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훗날 빌헬름 2세 시대와 히틀러 시대의 독일 군대는 이러한 외교적 우위 상황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작전적인 승리만을 추구했고, 결과는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소모전에 휘말려 얻은 두 번의 파멸적 패배였다.
이러한 작전적 사고가 사라지게 된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외교적으로 제1세계에 완전히 편입되면서 서방의 위협이 사라지고, 대신 제2세계에 대한 서방연합군의 첨병이 되는 새로운 지리전략적 상황을 맞게 된 이후이다. 현대 독일 연방군은 초대 연방군총감 아돌프 호이징거의 시대만 하더라도 구 국방군과 제국군의 작전적 사고를 유지했으나 그 이후에는 사실상 폐기한 상태다.
6. 전쟁 범죄
자세한 내용은 독일의 전쟁범죄 문서 참고하십시오.7. 제식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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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급,
1914급, 1916급, 1917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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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보트 | ||
항공모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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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양함 Kleiner Kreuzer |
코모란급, 클라스 플레밍급, 카이제린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루이제급 | ||
헬라, 가젤급, 브레멘급, 쾨니히스베르크급(1905), 드레스덴급, 노틸러스급, 콜베르크급, 마그데부르크급, 카를스루에급, 그라우덴츠급, 필라우급, 비스바덴급, 쾨니히스베르크급(1915), 브루머급, 쾰른급 | |||
대형순양함 Großer Kreuz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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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데어 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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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급,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급, 비텔스바흐급, 브라운슈바이크급, 도이칠란트급 | ||
나사우급, 헬골란트급, 카이저급, 쾨니히급 | |||
바이에른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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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지아들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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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계급
9. 대중매체
독일 제국군은 비록 훗날의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 수준의 전쟁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라 나치보다는 덜 하지만 이쪽도 전쟁범죄가 있었고[33] 서구권 세계에서는 적이었던 건 마찬가지라 FPS나 액션 게임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적으로만 등장한다. 독일에서 만든 양질의 전쟁 게임이 많아야 그나마 자기 나라 군인이 주인공인 작품이 보일 텐데 폭력에 대한 규제와 검열이 탑급인 독일에서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그래도 어쨌건 독일 국방군이 설친 2차 세계 대전에 비하면, 1차 세계 대전은 제국주의 시절 열강들 사이의 싸움이란 인식이 있다 보니 영화 레드바론처럼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도 이따금 있다. 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연합군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봐야 나치 독일과 일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것과 다르게, 1차 세계 대전에서는 그놈이 그놈이라는 인식이 많은 데다 특히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와 같은 유럽 이외 영토에서는 독일의 식민지이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의외로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독일에 대한 반감보다 심한 편이다.
- AAA급 FPS 게임에서는 배틀필드 1에서 처음 나왔다. 캠페인에서는 미국과 영국 시점에서 적으로 등장한다. 적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프롤로그 시네마틱에서 미군 제 369 보병연대 소속 흑인 병사랑 서로 총을 겨누다 이내 전쟁의 허무감에 허탈한 표정으로 무기를 거두거나 블랙번 파트 마지막 부분에서 그라프 체펠린이 추락하면서 블랙번 일행에게 다가오자 블랙번 일행과 싸우는걸 멈추고 자기도 살기위해 비행선에서 블랙번 일행과 같이 뛰어내리는 등 그들도 역시 지옥같은 전쟁 한복판에 내던져져 살고자 발버둥치는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싱글플레이로는 플레이 못하지만 멀티플레이로는 플레이 할 수 있다.
- 블랙옵스2 좀비 모드에서 1차 대전이 배경인 Origin 맵에서 독일 제국군 좀비가 나온다.
- 베르됭에서는 소총부대, 돌격대, 산악부대, 후방지원부대 등으로 나뉘어지며, 모든 진영을 플레이할 수 있다. 보통 연합군보다 화력이 강하고, 또한 비주류적인 매력과 슈탈헬름을 착용했다는 간지 때문에 은근히 인기 있는 진영. 그러나 서양유저들 대다수는 협상국 진영을 더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지라 만날 프랑스군, 영국군, 미군, 벨기에군에게 원 역사처럼 동네북 취급을 당하며 털린다.
- 토이 솔져스에서도 등장하는데 독일군 전용 미션들이 있으며 그 미션들에서 독일군이 되어 영국군을 막아낼 수 있다. 참고로 1인칭 시점 게임이 아니라 3인칭 시점의 타워 디펜스 게임이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 1918 모드
- Men of War - 모드 중 하나인 World War I에서 나온다.
- 원더우먼에서 주 악역으로 등장한다. 배틀필드 1처럼 일반 병사들의 인간미를 잘 그려냈다.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 1936년의 독일 제국군이 구현되어있다. 1차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승리한 세계인 탓에 육해공 모두 세계 일류급으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지만 전체적으로 구식 교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는 게임상에서 온갖 디버프로 나타난다.
-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는 주인공이 속한 세력으로 등장한다
- 교토 애니메이션에서 만든 바이올렛 에버가든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속한 가상의 국가 라이덴샤프트리히의 군대는 독일제국군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강력하게 추정된다. 착용하는 군복은 1차대전 후반기 독일군의 제복과 매우 흡사하고 착용하는 철모도 슈탈헬름이다. 제식 소총도 게베어 1898게열로 보이고 장교가 루거 P08권총을 사용하는 모습도 여러 번 나온다. 사실 국가 이름부터가 독일어 냄새가 심하게 난다.
-
영화 레드바론
주인공 세력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붉은 남작'으로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기 때문.
[1]
현재 독일에서는 사용 자체는 가능하나,
헌법수호청은 이를 불순한 목적으로 사용 시 경찰이 회수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극우 집단이 하켄크로이츠의 대체제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2]
예수의 탄생을 예지하는
마태오 복음 1장 23절에서 유래한 문구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Siehe, eine Jungfrau wird schwanger sein und einen Sohn gebären, und sie werden seinen Namen Immanuel heißen”, das ist verdolmetscht: Gott mit uns.)
[3]
추가적으로 꼽자면
영국 역시 본토의
영국군 휘하에 자치정부의 군대들을 두었다.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은 평시에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다 전시에는 안작(ANZAC)이라는 명칭으로 연합 체계를 꾸렸으며 캐나다 역시 독자 군대가 있었다. 식민지 인도 제국 역시
인도 제국군, 그리고
인도 번왕국들의 자체적인 군대들이 병립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각 지방 귀족들이 왕을 위해 사병들로 구성한
연대들을 이끌고 모이던 중세적 국가체제의 잔재이다. 즉 독일 제국군이나 신성 로마군, 또는 오헝 제국군과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 훗날 영국의 식민지들과 해외 영토들이 독립함에 따라 이들은 해당국의 군대로 계승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영국군은 하이랜더 연대나 아일랜드 연대 등 명목상으로나마 각 지방의 영지들에서 기원한 부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군에서 갈라져 나온
말레이시아군 역시 조호르주 술탄의 군대인
조호르군을 두어 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4]
전시편제대로 프로이센이 뷔르템베르크와 작센군을 흡수했을 때.
[5]
이는 헬무트 폰 몰트케(대 몰트케)가 참모총장으로서 군사적 권위를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고 그 후임 참모총장들도 비슷하게 권위를 부여받아 활동하였다.
[6]
헬무트 폰 몰트케(대 몰트케)가 참모총장 시절 프로이센 종신 상원의원이라는 지위를 겸했다. 이를 통해 그와 총참모부 내 참모들은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하여 군사적 필요가 있는 부분은 국가 정책의 우선적으로 반영되도록 했다. 이는 대 몰트케가 단순한 독일 제국군 군사 지도자를 넘어 제국 종신 상원의원인 상태로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총참모부 소속 참모진들도 하나의 정부 관료 비슷하게 정부 정책의 관여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7]
1883년 카이저의 칙령으로 헬무트 폰 몰트케(대 몰트케)는 군사적 사항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평시에 황제를 상주할 수 있었으며 참모총장이 전쟁성에 예속되는 것이 보통의 일이었지만 대 몰트케는 1888년 은퇴할 때 까지 예외적으로 군의 장비 문제에 한하여만 통제받았으며 나머지 사항은 전쟁성 밑에 예속되지 않았다.
[8]
SMS 엠덴함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9]
물론 사기업들의 비중도 높았다. 가령
도이칠란트급 전함 건조는 빌헬름스하펜 해군공창 외에도
킬의 게르마니아 베르프트 사 조선소와
슈테틴의 불칸 사 조선소,
단치히와
엘블롱크의 쉬샤우 베르케 사 조선소가 나누어 맡았다. 그 외 킬의 호발츠베르케나
브레멘의 AG 베저 사,
함부르크의 블룸 운트 포스사 등 다수의 민간 조선소가 제국 해군 주력함 건조에 참여했다.
[10]
빌헬름스하펜 해군공창은 세 황립해군공창들 중 패전 이후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아
티르피츠와
샤른호르스트,
그라프 슈페 등 국방군 해군의 주력함들을 건조하는 조선소가 된다. 국방군 해군 주력함 건조에는 사기업인 도이체 베르케 사, 블룸 운트 포스사도 참여했지만 빌헬름스하펜 조선소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2차 대전 패전 이후에는 호발츠베르케 사와 합병하여 연방군 해군의 해군공창(Marinearsenal)으로 재편되어 지금에 이른다. 현재는 일종의 독일 해군의
종합정비창으로 기능하고 있다. 2022년에는
코로나 19로 어려움을 겪던 구 동독 출신 사기업 MV 베르프텐 로스토크사도 합병했다.
[11]
형이었던 빌헬름 2세와는 다르게 군사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
[12]
독일 제국 해군의 전반적인 운영, 훈련과 장비 상태를 최종 감독하고, 해군 내 전략적 조언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핵심적 직위이다.
[13]
제3군단의 관할 구역 안에 근위군단이 같이 있는 형태였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두 군단 모두
베를린에 사령부를 두었으나, 근위군단들의 예하부대들은 사령부와 같이 베를린 일대에 주둔한 반면 3군단 예하부대들은 그 외곽
브란덴부르크 주 일대에 분산배치되어있는 형태였다.
[14]
가령 보병 병과
이등병 계급명의 경우 프로이센은 머스켓총병(Musketier), 바이에른은 보병(Infanterist), 작센은 그냥 병(Soldat)이라고 서로 다르게 불렀다.
[15]
여기서 제국군은 황제의 사병인
황제군(Kaiserliche Truppen)이 아닌 제국의회의 결의로 구성되는
제국군(Reichsarmee)을 의미한다.
[16]
하술할 작센, 뷔르템베르크군, 바이에른군을 제외한 수치다. 전시편제대로 작센과 뷔르템베르크군을 포함하면 총 22개 군단이 된다.
[17]
이 전통은 훗날 독일 국방군의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이 물려받는다.
[18]
다만
마켄젠 원수가 입고 다니던 토텐코프(해골) 문양 군복으로 유명한 제1근위후사르연대와 제2근위후사르연대는 근위기병사단 소속이 아니다. 이들은
단치히 주둔 17군단의 제36사단 소속이었다.
[19]
이 중 제19군단은
작센 제2군단이다.
[20]
참고로
독일 연방 시기에 올덴부르크는
브레멘,
함부르크,
뤼베크와 연합한 올덴부르크-한자 여단을 운용했었다. 여단 해체 이후 각 자유시들의 군대 또한 출신지역 이름을 단 연대로써 프로이센군에 흡수되었는데, 이들 자유시들에 기반한 연대들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기반한 프로이센군 연대들과
메클렌부르크 대공국들의 연대들과 함께 17사단을 구성했다.
[21]
단,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주를 기반으로 하는 제40퓨질리어연대만은 예외다. 이 연대는 지역적인 인접성 때문에 제14군단의 28사단 소속 제55보병여단에 배속되어 바덴군과 함께 움직였다.
[22]
다만 39사단과 29사단 소속 부대들 일부는 알자스-로렌 남쪽 끝자락도 관할했다.
[23]
여기에 제국군 제21군단이 추가된다.
[24]
독일 제국의 예비사단 및 예비군단들은 1차 대전 발발 이후에 자원자와 예비군 등을 모아 편성한 부대들이다.
[25]
1870년대에 이탈리아 알피니 연대를 상대하기 위해 프랑스군이 신설한 산악부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26]
이름은 군단이지만 실 규모는 사단급이다.
[27]
그의 대대는 원래 루마니아군을 상대하다
카포레토 전투를 앞두고 산악군단에 편입되었다.
[28]
알피니는 1870년대에 창설된 부대로, 현대
산악부대의 본가다. 상술한 프랑스의 알프스 엽병, 그리고 독일 엽병대에 큰 영향을 준 오스트리아의 황립 및 왕립 향토총병 모두 알피니 연대를 상대하기 위해 창설되었던 부대들이다. 동시에 알피니의 운용 방식과 그 편제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알피니는
베르살리에리 연대 등과 함께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정예부대 중 하나로 손꼽혔으며 이는 오늘날의
이탈리아군에서도 마찬가지다.
[29]
티롤 후백국의 향토방위대이다. 1906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가 흩어져 있던 오스트리아 산악엽병부대들을 한데 그러모아 창설했다. 주축이 된
티롤인들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자 오래된 산악 수렵 전통을 지닌 이들이었기에 산악전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이들은 독일 권역 산악부대의 대선배라고 할 수 있으며, 독일 외에도
폴란드군 산악부대인 포드할레 총병대(Strzelcy podhalańscy) 역시 이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30]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국가인민군 공군(Luftstreitkräfte der nationalen Volksarmee)과
오스트리아 육군 항공대(Österreichische Luftstreitkräfte)의 명칭도 원어로는 루프트슈트라이트크레프테(Luftstreitkräfte)다. 다만 편제상의 차이(국가인민군 공군은 독립 공군)와 번역 문제 때문에 한국어로 옮기면서 명칭이 달라졌다.
[31]
'7월 31일에 도착한 러시아의 동원에 대한 문서를 확인하고 난 후, 몰트케와 베트만-홀벡은 모두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모두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독일은 7월 31일 총동원령을 발동하고, 러시아에는 군사적인 조치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만약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전쟁에 직면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프랑스에게도 입장을 질문하였으나 프랑스는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게 행동한다는 답을 남기며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선언한다.' 국방부 연사편찬연구소, 「군사」2014,9 47P
[32]
다만 오스트리아-헝가리 멸망 이전까지만 해도 남티롤과 이스트리아 반도 일대의 통로가 오스트리아에 속했기에 이탈리아는 자칫하면 북부 평야를 잃을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실제로
카포레토 전투 당시의 재앙적 패배에서 실현될 뻔한다.
[33]
자세한 내용은
독일의 전쟁범죄 문서의 1번 문단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