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국 해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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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선 | 틀:1차 세계대전/독일군 함선 | ||
관련 인물 |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 빌헬름 2세 | 아달베르트 폰 프로이센 | 막시밀리안 폰 슈페 | 후고 폰 폴 | 라인하르트 셰어 | 프란츠 폰 히퍼 | 루트비히 폰 로이터 | 헤닝 폰 홀첸도르프 |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 | 헬무트 폰 뮈케 | ||
작전 | 무제한 잠수함 작전 | 인도양 통상파괴전 | ||
단체 | 해군부, 해군 단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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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해군 원수 겸 제국해군청 해군 장관 알프레트 페터 프리드리히 폰 티르피츠 Alfred Peter Friedrich von Tirp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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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Alfred Peter Friedrich von Tirpitz 알프레트 페터 프리드리히 폰 티르피츠[1] |
출생 | 1849년 3월 19일 |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퀴스트린 | |
사망 | 1930년 3월 6일 (향년 80세) |
바이마르 공화국 에벤하우젠 | |
복무 | 독일 제국군 황립 해군 |
최종계급 |
해군 원수 ( Großadmiral) |
서훈 |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검은 독수리 훈장(Hoher Orden vom Schwarzen Adler) 붉은 독수리 훈장 대십자상(Großkreuz des Roten Adlerordens) 철십자 훈장 1급(Eisernes Kreuz I. Klassee) |
주요 참전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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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는 독일 제국의 3대 카이저인 빌헬름 2세가 해군원수(Großadmiral)로 임명했던 군인으로, 1897년부터 1916년까지 독일 제국 해군을 담당한 강력한 행정부서 독일 제국해군청(Reichsmarineamt)의 장관을 겸하기도 했었다.대륙 국가가 해군력 건설을 통해 기존의 해양 강대국에 도전하는 사례를 만든 원조격 인물이다.[2]
2. 생애
2.1. 초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통치하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의 퀴스트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이름은 말비네 하르트만(Malwine Hartmann)이었고, 아버지인 루돌프 티르피츠(Friedrich Ludwig Rudolph Tirpitz)는 변호사였으며, 나중에는 판사가 되었다. 티르피츠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랐다.2.2. 군생활
티르피츠의 해군 입대는 그의 친구 덕분에 이루어졌다. 티르피츠의 친구는 그가 해군에 입대한다고 했고, 티르피츠도 부모님의 동의를 받아 1865년, 16세의 나이에 해군 사관 후보생이 되었다. 1년 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일으켰고, 티르피츠는 영국 해협을 순찰하는 범선에 배치되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종전 후에도 해군에 남았다.2.3. 제국해군청 해군 장관 시절 활약
1871년에 독일 제국이 건국되기 전까지 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계 국가들은 제대로 된 해군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보잘것 없이 시작한 해군을 담당하게 된 티르피츠는 자신의 정치적 결단력과 카이저의 후원, 국민적 지지를 통해서 독일 제국군 내 1890년대 이후 독일의 해군력을 세계 최강으로 일컬어지던 영국의 왕립해군을 위협할 수 있는 세계적 수준의 강군으로 키워냈다.[3]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는 독일 제국이 건국되고 해군의 어뢰 개발과 어뢰정 개발에 힘을 쓰고 있었다.[4] 이후 개발된 어뢰정을 보여주기 위해 빌헬름 2세를 처음 만났다. 이후 카이저의 신임을 얻고 티르피츠는 어뢰정 담당에서 순양함 지휘로 이동해 활약한다. 이때 쯤 카이저는 티르피츠를 포함한 해군 제독들을 궁전에서 저녁식사를 초대하여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티르피츠는 카이저에게 강력히 전함의 건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카이저를 설득하여 동의를 얻은 티르피츠는 어뢰정 개발을 위해 잘 알던 해군 제독, 장교들과 함께 건조 대기 중이던 전함들로 모의 실험을 진행한다. 하지만 티르피츠의 대함대 조성 전략, 전술은 당시 해군 장관이었던 프리드리히 폰 홀만과의 의견이 맞지않아 갈등이 빚어졌다. 특히 티르피츠는 8척의 동일한 전함의 배치를 선호했으나, 홀만은 혼합함대를 선호하는 차이였다. 하지만 티르피츠의 주장이 카이저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기에 홀만은 해군 장관직을 사임하고 티르피츠는 독일 제국 정부에서 강력한 실권을 가진 제국해군청(Reichsmarineamt)의 장관으로 임명을 추천받아 1897년부터 1916년까지 장관을 역임한다.
제국해군청 해군 장관이 된 이후 티르피츠는 자신이 가진 군정권을 통해 대형 전함 건조를 목표로 했으며, 독일 해군이 영국 해군에 맞설 수 있는 규모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해군법(Flottengesetze)이라는 법을 1888년 제정하고 의회에 제출한다. 그해 6월 15일, 법 제정과 동시에 티르피츠는 카이저에게 영국을 주적으로 하는 해군 작전을 보여주어 카이저에 신임을 사고 약 4억 8백만 마르크를 투자하여 더욱 더 많은 전함을 건조시켰다. 이때부터 명실공히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의 제 1의 적이 되었다. 티르피츠는 이 해군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카이저와 함께 해임되었던 전 독일 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독일 제국의 구성국들의 대표들을 방문하여 법안 필요성을 설득하였고. 10월 19일, 해당 해군법안을 제국 의회에서 이관시켜 표결에 부친다. 폰 티르피츠는 제국 의회에 출석하여 연설을 통해 빌헬름 2세의 팽창주의를 제대로 표방하고 해군력 강화가 단지 군사적 필요성뿐만 아니라 독일 제국 경제, 기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해군 확장이 독일 조선업과 관련 산업에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 성장을 촉진할 것이라는 논리를 제시하여 경제계의 지지를 얻고 해군법안 승인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모두가 이 법안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보수주의자들은 신식 무기로 취급 받던 전함 등 해군에 대한 소비는 낭비라고 생각했고, 그럴바에는 독일 제국군에서 영향력이 해군보다 한참 앞선 육군을 강화시키는 게 더 낫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이 법안은 결국 영국을 적대시키는 법안이기 때문에 많은 의원들이 반대했으나 티르피츠의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정당들에 대한 설득 및 협상 작업, 당시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있던 협회인 함대 협회(Deutsche Flottenverein)[5]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의원들과 독일 제국군 내 육군을 압박하여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에도 비슷한 해군법안을 1900년에 제정하여 단계적 법안 방법을 통해 정치적 반발을 최소화하면서도 전함 증가 목표를 달성하는 데 효과적으로 접근하여 전함수를 19척에서 38척까지 늘렸다.
결국 이러한 군적, 정치적 작업을 통해 티르피츠는 독일 황립 해군을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해군으로 만들었다. 티르피츠는 황립 해군을 영국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해군으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는 독일 제국에 정치군인이라는 평가도 받지만 당시 독일 제국군 내에서 육군에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장기인 정치력을 힘껏 발휘하여 세계적인 해군으로 만든 것이다.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이런점에서 나타난다.
2.4. 제1차 세계 대전
티르피츠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황립 해군이 영국 해군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라고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때 휴가를 갔었다.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제국 해군은 영국 해군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했고, 유틀란트 해전에서의 무승부 이후 잠수함 작전으로 선회하지만 이 때 내린 무제한 공격 명령으로 인해 미국의 적개심을 사게 된다. 빌헬름 2세는 미국의 개입과 도덕적인 이유로 무제함 잠수함전을 꺼렸고, 루시타니아 호가 뇌격당해 침몰하는 등 사고가 연이어 벌어지자 수상 베트만홀베크의 주장을 받아들여 잠수함들의 활동을 제약했다. 티르피츠는 이에 반발하며 사표를 제출하면서 항의했지만, 빌헬름 2세는 대중에게 인기있는 군인인 티르피츠를 함부로 해임하기를 꺼렸다.[6] 그러나 결국 1916년에 3번째 사표가 수리되면서 물러나게 된다.
사임 후엔 독일 조국당을 조직해 국회에서 전쟁 수행을 강력히 지지했고, 패전 이후에도 독일 국가인민당의 의원으로써 국회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3월 6일에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훗날 나치 독일의 크릭스마리네에 의해 비스마르크급 전함 티르피츠에게 붙여졌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티르피츠'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실제 발음은 티어피츠이나 폰티르피츠 처럼 외래어표기법에 의해 티르피츠가 되었다.
[2]
구 소련의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중국의
류화칭의 선배라고 할 수 있다.
[3]
해군 내부와 전쟁성에선 양적 팽창에만 집중해 병력의 질적 수준 향상에는 무심하다는 비판도 존재했다.
[4]
티르피츠는 어뢰정 개발이 자신의 최고의 11년이라고 평가했다.
[5]
티르피츠의 주도 아래 여러 홍보 등을 펼쳐 1908년 기준 개인 회원 약 34만명, 법인 회원 약 70만명 규모의 독일 제국 내 최대 후원 조직이자 협회였다.
[6]
파울 폰 힌덴부르크도 황제에게 항의할때 사표를 내는 방식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