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육군 원수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 Hermann von Eichhorn |
|
|
|
이름 |
Hermann Emil Gottfried von Eichhorn 헤르만 에밀 고트프리트 폰 아이히호른[1] |
출생 | 1848년 2월 13일 |
프로이센 왕국 브레슬라우 | |
사망 | 1918년 6월 30일 (향년 70세) |
우크라이나국 키이우 | |
복무 |
프로이센군(1866 ~ 1871년) 독일 제국군 (1871 ~ 1918년)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
주요 참전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서훈 | 백엽 푸르 르 메리트 |
학위 | 베를린 대학교 박사학위[2] |
[clearfix]
1. 개요
독일 제국군의 원수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외에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한 독일 제국군 내에서도 고참 중에 한명이다.2. 생애
아이히호른은 브레슬라우에서 1848년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요한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아이히호른[3]은 프로이센 왕국의 교육부 장관이었으며 외할아버지 역시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프로이센 왕국군에 입대했으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및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활약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받아 철십자 훈장 2급과 3급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을 받았다. 1872년 그는 프로이센 전쟁 대학에 갔다. 이곳에서 아이어혼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 카를 폰 뷜로, 프리드리히 폰 베른하르디[4] 등과 접촉했다. 1878년 아이히호른은 대위가 되었다. 1897년, 아이히호른은 제 6군단의 참모장이 되었고, 1901년부터 1904년까지 9사단을 지휘했으며, 1904년부터 1912년까지는 18 군단장이었다. 잠깐 군단장 자리에 있었음에도, 아이히호른은 시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고, 18군단이 배치되었던 테센지역의 공로훈장을 받았다. 이후 1912년에는 나중에 제 5군이 되는 제 7군단을 지휘했다. 같은 해 아이히호른은 검은독수리 훈장을 수훈받았다. 1913년 1월 1일 상급대장으로 승진했고, 1914년 5월 부대를 시찰하다 말에서 떨어졌다.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아이히호른은 이미 노장이어서 직접적으로 전쟁에 직접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었다. 그는 1915년 1월 21일에 힌덴부르크 집단군에 속하는 10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1918년 3월 5일까지 지휘하게 되었다. 그의 부대는 제2차 마주리안 호수 전투와 나로치 호수 공세에서 싸웠다. 제10군의 공세 덕분에 빼앗겼던 동프로이센의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의 부대는 8월에 코브노, 그로드노, 알리투스를 차지하고 1915년 8월 18일에 푸르 르 메리트를 수훈받았다. 1915년 9월 28일에는 백엽을 추가했다. 1917년 12월 18일 아이히호른은 원수로 진급했으며 1918년 3월 5일, 제10군 사령관직에서 내려왔다. 제10군의 사령관은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되었다. 1918년 3월 31일에는, 알렉산더 폰 린징겐[5]의 후임으로 마켄젠 집단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918년 4월 3일에는 키예프 집단군의 총사령관과 우크라이나의 총독이 되었고, 헤트만 파블로 스코로파드스키를 지원했다.
3개월 뒤, 혁명주의자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돈스코이(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Донской)가 아이히호른에게 폭탄을 던졌고 아이히호른은 그의 부관, 발터 폰 드레슬러 대위와 함께 죽었다. 이후 아이히호른은 베를린에 매장되었고, 보리스는 공개처형당했다. 이로써 독일 역사상 몇없는 전사한 원수 중 한명이다.
3. 주요 서훈 내역
-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 프로이센 왕가 훈장
- 백엽 푸르 르 메리트
- 대 붉은 독수리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