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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0:48:24

인도 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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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인도 육군[1]
British Indian Army
인도 왕립 해군
Royal Indian Navy (RIN)
인도 왕립 공군
Royal Indian Air Force
존속기간 1895년 ~ 1947년
편성 육군, 해군, 공군
명령체계 영국 국왕 → 인도 총독
전력 육군
1,750,000명[2]
2,500,000명[3]
최고사령관 영국 국왕
후신 인도군
파키스탄군
방글라데시군

1. 개요2. 역사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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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 제국군은 1895년부터 1947년까지 존속했던 영국군 휘하의 인도 제국의 군대이다. 구 인도군은 직접통치 지역과 간접통치 토후국 지역의 치안과 안전을 책임졌으며, 명목상 최고 통수권자는 인도 황제[4]였으나 실질적인 군 통수권은 영국에서 파견된 인도 총독이 가지고 있었다. 막대한 인력과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영국군의 핵심 병력들 중 하나였으며,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상당한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1895년에 인도의 통제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기존 영국 동인도 회사의 사병들과 영국군을 합쳐 정규군으로 편성하면서 처음 만들어졌으며, 1947년에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이후 인도 제국군의 군장이나 장비 등은 대부분 인도군 파키스탄군으로 흘러들어갔고, 일부가 방글라데시군으로 흡수되었다.

2. 역사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난 직후, 영국 정부는 마침내 무굴 제국을 멸망시키고 영국 동인도 회사로부터 인도의 통치권을 이양받아 완벽한 직접통치의 시대로 들어선다. 1858년 이전의 인도에서는 동인도회사가 용병들을 고용하거나 사병들을 길러 치안을 유지하는 형태였고, 런던의 영국 정부가 이들을 유지할 재정을 대어주었다. 그러나 인도가 본격적인 영국의 관리 하에 들어오고 더이상 사병으로만은 인도의 통제가 어려워지자, 영국 정부는 지방을 다스리는 주 정부들에게 각자 알아서 주방위군을 구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벵골 주방위군이나 펀자브 방위군, 봄베이 방위군 등이 창설되었으며, 그 뒤를 따라 여러 주들이 자신들만의 군대들을 만들어내면서 인도에 본격적으로 서구식 군체계가 도입된다.

그러나 지휘계통이 일원화되지 않고 각자 무기와 군장도 달랐던 주방위군들은 그 한계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지역에서 일어나는 소요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자 영국 정부는 이들을 폐지하고 하나의 중앙군대로 개편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1895년 영국 정부는 모든 주방위군들이 벵골, 마드라스[5], 봄베이, 펀자브를 거점으로 한 4개의 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단일군대를 만들었고, 이것이 바로 공식적인 인도 제국군의 창설으로 이어진다. 구 인도군은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인도를 크게 4부분으로 나누었고, 벵골이 동부를, 펀자브가 북부를, 마드라스가 남부를, 봄베이가 서부를 각자 하나씩 맡아 군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주요 임무는 인도인들의 폭동을 진압하거나 반란군들을 없애는 것이었으며, 첫 대외 원정으로는 청나라 원정이며, 1899년에 청나라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 당시 베이징에서 의화단을 진압한 바 있다.

이렇게 그럭저럭 굴러가던 인도군은 1903년에 새롭게 군사령관으로 부임한 허버트 키치너 장군이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하면서 대변혁을 맞는다. 키치너 장군은 군대가 기본적으로 평시에나 전시에나 항상 똑같은 태세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모든 병사들에게 위험한 북서부 국경 방위를 한 번씩은 수행하게 해야 한다는 등 군대 기강을 세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또한 경찰력을 보강하기 위해서 병사와 기지들을 전국에 흩어놓고 웬만한 도시들에는 군사기지가 설치되어 있도록 만들었고, 영국군의 편제에 맞추어 인도군의 편제를 개편하고 이래저래 흩어져 있었던 군 지휘소들을 묶어서 통합하여 지휘의 효율성을 강화시켰다.
파일:ww1indianarmy.jpg
행군하는 인도 제국군 병사들
인도군이 처음으로 본격적인 활약을 보인때는 바로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였다. 발발 직후 인도군의 규모는 약 215,000여 명 정도였고, 이후 영국이 주로 중동과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인도의 병력을 써먹기 위해서 막대한 수의 모집병을 데려오면서 1918년 즈음에는 이 규모가 무려 57만 명 수준으로 크게 불어나게 된다. 약 14만 명의 인도군이 프랑스 벨기에로 투입되었고, 1914년에는 인도인들로 구성된 기병대와 보병 대대가 유럽의 서부전선에 상륙하면서 독일 제국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참고로 영국 정부는 더이상 군대를 끌어오면 인도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풍습이나 언어, 문화 등을 이해하지 못했던 영국 출신 지휘관과 인도 병사들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서 개전 초기에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다. 다만 이후 소통이 개선되고 인도 병사들도 경험이 쌓이자 점차 숙련병들로 변해갔고, 1914년 11월에 발생한 이프레스 전투에서는 인도인 병사가 처음으로 빅토리아 훈장을 받는 등 용맹함을 보이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인도인들이 주로 투입된 전장은 유럽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방이었다. 약 70만 명에 달하는 인도 병사들이 중동과 메소포타미아에서 오스만 제국과 전투를 벌였고, 극도로 열악한 환경과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군대를 격퇴하는 데에 성공하며 한때는 대도시 바그다드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갈리폴리 전투나 팔레스타인 원정 등에도 참가했고, 심지어는 동아프리카까지 원정을 떠나 거의 영국군들이 싸우는 곳이라면 대부분 다 투입되었다. 이로 인해서 인도 병사들은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13,000여 개의 메달과 12개의 빅토리아 훈장을 받았으며, 총 47,746명이 전사하거나 전투 도중 실종되었고 65,216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전쟁 시기 동안 영국에 협력하는 토후국들에서 자발적으로 병사들을 모아 전쟁으로 내보내기도 했는데, 이들을 '제국 의용병'이라고 불렀으며 주로 시크인들이나 라지푸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주로 팔레스타인 시나이 반도에서 활약했다.
파일:wwiiindianarmy.jpg 파일:wwiiindianarmy1.jpg
사열식을 치르고 있는 인도 제국군 인도 병사들을 사열하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1차 대전이 끝나고 찾아온 전간기 동안, 인도군의 군사력은 상당히 강력해졌다. 전쟁 동안 경험을 쌓고 돌아온 숙련병들의 비율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고, 전쟁 시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도인 장교들이 대거 임용되면서 영국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지휘부에 균열이 일어났다. 이를 통해 20여 년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인도군은 1차 대전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는데, 전쟁 발발 직후에 인도는 이미 20만 명에 달하는 상비군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전쟁 말기에는 이 수치가 250만 명까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의용군을 끌어모으는 대기록을 쓰기도 했다. 이때 인도군에 3군단, 4군단, 15군단, 33군단, 34군단이 추가적으로 편성되었으며, 4, 5, 6, 7, 8, 9, 10, 11, 12, 14, 17, 19, 20, 21, 23사단이 새롭게 생겨났고 1944년에는 일부 공군 편대도 만들어졌다. 또한 군장 부분에서도 영국군으로부터 상당수 자립하는 데에 성공했는데, 인도군은 당시 영국군이 사용하던 브렌 경기관총을 쓰지 않고 독자적으로 빅커스-베르티에를 도입하는 등 무기나 군복에서도 영국군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그리고 인도군 상당수가 동남아시아사령부 예하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일부 병력이 중동과 이탈리아에 투입되었다.

인도군이 참여한 주요 전투에는 북아프리카 전역, 배틀액스 작전, 시리아-레바논 원정, 이탈리아 전선, 몬테카시노 전투, 홍콩 전투, 말레이 해전, 싱가포르 전투, 버마 전선의 임팔 전투 등이 있다. 대략 87,000여 명의 병사들이 이로 인해서 목숨을 잃었으며, 인도 병사들은 총 30개의 빅토리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2년 일본군은 싱가포르에서 55,000명에 달하는 인도군을 생포했고, 일본에게 군대를 요청해서 영국을 무력으로 몰아내려했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스에게 이 병사들 중 3만 명을 내주는 것으로 자유 인도 임시정부를 설립하게 된다.

한편 전쟁이 끝나고 드디어 찾아온 독립에도 불구하고 인도 제국은 내부의 민족, 문화, 종교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인도 자치령 파키스탄 자치령이라는 2개의 국가로 분단됐다. 때문에 구 인도군도 군수품과 물자들을 서로 나누어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대략 2/3 정도는 인도가 가져갔으며 1/3 정도를 파키스탄이 가져갔다. 또한 병사들의 경우 종교에 따라 각자 힌두교도들은 현대의 인도군으로, 무슬림들은 파키스탄군으로 갈라져 들어갔다. 한편 구 인도군에 속해서 싸웠던 네팔 구르카 용병들은 네팔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군에서 영국군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인도에 남아있던 영국 병사들은 인도와 파키스탄 군부에게 인수인계를 해준 직후 조용히 떠나갔으나,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종교 갈등이라는 거대한 불씨를 뒤에 그대로 남겨놓고 갔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카슈미르 분쟁이 터지면서 세계대전 시기 같은 전우였던 인도군과 파키스탄군이 박터지게 싸우는 광경까지 펼쳐진다. 참고로 방글라데시는 원래 파키스탄에 속해있었으나, 1971년에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을 통해서 파키스탄에게서 벗어나면서 벵골 동부 지방에 남아있던 인도군의 유산들을 대부분 흡수해서 방글라데시군을 창설했다.

3. 관련 문서


[1] 주로 인도 육군(Indian Army)이라 불렸었다. [2]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4] 영국 국왕이 인도 제국의 황제를 겸하였다. [5] 버마 지역도 함께 방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