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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191919> 이탈리아 왕국 | 이탈리아 왕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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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군 Forze Armate del Regno d'Ital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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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246><colcolor=#FFF> 존속 기간 | 1861년~ 1946년 |
편성 |
이탈리아 왕립 육군 이탈리아 왕립 해군 이탈리아 왕립 공군 |
모토 | F.E.R.T. |
병력규모 | 누적 병력 약 400만 명 |
주요 지휘관 |
이탈리아 국왕 (
통수권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이탈리아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육군 원수 로돌포 그라치아니 해군최고사령관 도메니코 카바그나리 이탈리아 공군 원수 이탈로 발보 |
1. 개요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 선전물 |
2. 역사
통일 이탈리아 왕국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 시절부터 존재했으며, 사보이아 가문을 이탈리아인으로 정착시킨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이 상비군을 창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대에 들어 5개 연대로 개편되었다.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은 협상국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나 반대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추축국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리고 1943년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은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군과 기존 이탈리아 왕국군으로 갈라져, 이탈리아 전선 곳곳에서 충돌을 벌였고,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군으로 재통합된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같은 추축군인 독일 국방군과 일본군에 비해서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은 없었고(...),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으로 대표되는 최약체 군대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 등 피치 못할 졸전의 이유가 밝혀짐으로 인해 재평가받게 되며 이 과정에서 베르살리에리나 폴고레 공수사단 등 정예부대들의 활약도 널리 알려졌다. 반대로 부정적인 재평가도 이루어졌는데 흔히 독일 국방군이나 일본군에 비교하면 전쟁범죄가 없었다고 알려진 이탈리아 왕국군이지만,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의 전쟁 범죄는 리비아나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등에서는 상당히 행해졌다는 것이 발굴되기도 했다.
사실 의외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삽질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군사사에서 상당히 주목할만한 업적를 여럿 남긴 바 있는데, 단적으로 전략 폭격 개념의 창시자 중 하나는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헤였다. 그리고 자폭보트와 인간어뢰를 필두로 한 해군 특수전 부대 Decima flottiglia MAS는 이미 유명하고, 공수부대 개념도 이탈리아에서 처음 나왔다.[1] 또한 묻혔지만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잠수함들을 운용해서 좋은 실적을 거둔 바 있으며, 리토리오급 전함 이라는 명품 전함을 만들어내기도 했었다.
3. 이탈리아 왕국군의 제식병기
3.1. 육군
제2차 세계 대전기의 이탈리아군 보병장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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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군의 보병장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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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화기 | 소총 | 볼트액션 소총 | <colbgcolor=#fefefe,#393b42> M1870/87, M1870/87/15, M91, M38 | ||
반자동소총 | MAB 18/30, Mod. X, M1935, M1937, M39 | ||||
기관단총 | OVP 1918, MAB 18, MAB 38, MAB 38/42, FNAB-43 | ||||
권총 | 이탈리아제 | M1889, M1910, M15, M17, M23, M31, M32, M34, M35 | |||
오스트리아제 | M1898, M1907, M1912 | ||||
지원화기 | 기관총 | M1914, M1935, M30, M37, M38, 브레다-SAFAT | |||
대전차화기 | 기병총/대전차용 총 "S", 판처파우스트, 라케텐판처뷕세(판처슈렉) | ||||
화염방사기 | M35, M40, M41 | ||||
박격포 | 브릭시아 M35, 81mm 박격포 M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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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기의 이탈리아군 화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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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군의 화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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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포 | <colbgcolor=#fefefe,#393b42> 105/28 Mod. 1916, 149/19 Mod. 37, Cannone da 149/28, 149/35 Mod. 1901. 안살도 149/40 Mod. 1935, 안살도 210/22 Mod. 1935 | |||
보병포 | 65/17 Mod. 1908/1913, 75/27 Mod. 1911, Obice da 75/13, 75/18 Mod. 34/35, 75/27 Mod. 1906, 100/17 Mod. 14 | |||
대전차포 | 블레르 47mm 대전차포, 75/32 Mod 37, 75/34 Mod. S.F. | |||
대공포 | 브레다 20/65, 브레다 37/54, 75/27 C.K, 75/46 C.A. Mod 34, 90/53 Mod. 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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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군 보병장비 선전영상 |
3.2. 해군
제2차 세계 대전의 이탈리아 왕립 해군 군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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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 어뢰정 | <colbgcolor=#fefefe,#393b42> M,A,S 어뢰정 | ||
구축함 호위 어뢰정 | 스피카급, 오르사급, 아리에테급, 치클로네급 | |||
구축함 | 알레산드로 포에리오급, 카를로 밀레발로급, 팔레스트로급, 제네랄리급, 쿠르타토네급, 레오네급, 퀸티노 셀라급, 나자리오 사우로급, 투르비네급, 나비가토리급, 다르도급(프레치아급), 폴고레급, 마에스트랄레급, 알프레도 오리아니급, 솔다티급(*), 코만단티 메달리에 도로급(*) | |||
잠수함 | 발릴라급, 아르고나우타급, 아르키메데급, 시레나급, 페를라급, 아두아급, 브린급, 아르고급, 아차이오급, 마르첼로급, 로몰로급(*) | |||
장갑순양함 | 산 조르지오급 | |||
방호순양함 | 니노 빅시오급(**) | |||
경순양함 |
콘도티에리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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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순양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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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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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기모함 | 주세페 미랄리아 | |||
순양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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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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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획함 |
순양함: 카타로
, 구축함: 프레무다 , 시베니코 , 류비야나 , 잠수함: 프란체스코 리스몬도 , 안토니오 바자몬티 , 기타 2차대전기 이탈리아 포획 함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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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 | 에리트레아 포함, 디아나 포함 | |||
(*) 표기: 해당 함급의 일부 또는 전부가 건조 중단된 함급 (**) 표기: 1차 세계 대전 전후 2차 세계 대전 이전 해체 및 계획 취소되었지만 편의상 틀에 넣은 함급 윗첨차E 표기: 수출용 함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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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공군
제2차 세계 대전의 이탈리아군 항공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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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 <colcolor=#373a3c><colbgcolor=#b0e000> 복엽기 | CR.30, CR.32, CR. 42 팔코, Ro.44 | ||
단엽기 |
C. 20x 시리즈,
Re. 200x 시리즈,
G.50 프레치아,
G.55 첸타우로,
D.520F,
Bf 10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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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전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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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기 | 경폭격기 | 블렌헤임 Mk.IVC | |||
中폭격기 |
Ca.311,
Ca.135, BR.20 치코냐,
SM.79 스파르비에로, SM.84,
SM. 81 피피스트렐로,
Z.1007 알치오네, Z.1018 레오네,
Z.515, |
||||
重폭격기 |
SM.82,
P.108B, |
||||
급강하 폭격기 |
Z.501, SM.85, |
||||
공격기 |
Ba.65,
Ba. 88, |
||||
수송기 | SM. 79, SM. 75, SM. 82, SM. 95, P.108T, AL-12P, Ju 52G | ||||
정찰기 | Fi 156G | ||||
※ 윗첨자 F: 프랑스 기체, G: 독일 기체, Z: 제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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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편제
- 육군
- 해군
- 공군
- 식민지군
- 국가안보의용민병대
5. 계급
- 계급 항목을 참고할 것.
6. 왕립 육군(Regio Esercito)
6.1. 이탈리아 통일전쟁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격돌하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군 |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이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수뇌부는 자신들과 함께 싸워줄 동맹의 필요성을 느낀다. 유럽과의 관계 형성을 위하여 크림 전쟁에 참여 이후 파리 평화 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의 간섭행위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하였고 두 국가가 이탈리아 반도에 관심을 두는데 성공했다. 1858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수상 카밀로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비밀협약을 맺었다. 조약의 내용은 니차와 사보이아를 프랑스에 양도하는 대신에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함께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오스트리아 정부를 자극하여 피에몬테군 해산 압력이 들어오자 이를 무시하였고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 170,000명, 피에몬테군 70,000명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220,000명의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연합군은 철도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피에몬테 지역에 소집된 연합군은 롬바르디아 지역의 오스트리아군을 진입하기 위해서 티치노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홍수가 발생하여 행군 속도는 둔화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이 토리노 인근에 먼저 진입하여 연합군을 압박했다. 연합군은 알레산드리아로 이동하여 포강에서 도하작전을 하여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 피해를 입자 밀라노의 사각 요새로 후퇴했다. 연합군은 솔페리노 전투, 산마르티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았지만, 프로이센 왕국군의 전쟁 참여를 두려워한 나폴레옹 3세는 빌라프란카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단독으로 협상하여 사르데냐-피에몬테에 롬바르디아 대부분을 양도하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이에 이탈리아 통일을 원하던 카보우르는 항의하였지만 결국 굴복하고 협상에 수락하여 물러났다.
칼라타피미 전투에서 양시칠리아 왕국군과 전투를 하는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
시칠리아 지역까지 손에 넣은 사르데냐-피에몬테는 1861년 토리노에서 대의회를 소집했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Re d'Italia)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제 베네토와 로마만을 남겨놓았으나 베네토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제국의 소유였고 로마에는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통일은 또다시 지지부진해졌다. 통일이 느려지자 가리발디는 또다시 군대를 조직하여 로마를 공격하였지만 프랑스군에게 참패하여 사르데냐의 부속 섬인 카프레라 섬에 구금당했다. 신생 이탈리아 왕국은 안전하게 로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1864년 프랑스와 협상하여 2년 내에 로마에서 철수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교황청은 부랴부랴 군대를 확장하였고 로마를 떠나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1866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벌어지자 프랑스군은 로마에서 철수했다.
가리발디가 이끄는 원정군의 양시칠리아 점령 이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이탈리아 통일을 발표, 직후 육군을 통합하여 이탈리아 왕국군을 편성하였다. 하지만 통일 이후 남부와 사르데냐를 중심으로 산적이 날뛰는 이탈리아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제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서 벌어진 오스트리아군과의 전투로 막심한 피해를 본 끝에 베네토 지역을 매입하는 조건으로 겨우 넘겨받았고 새로운 육군 편제를 조직했다. 군을 각각 보병, 기병, 포병으로 나누어 이탈리아 육군 설립 첫날에 32만 명의 병사와 장교 1만으로 구성된 18개 사단을 편성했다.
6.2. 20세기 초반
아드와 전투에서 고전하는 이탈리아 왕국군 |
눈길은 돌린 이탈리아 왕국은 오스만 제국이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 지역에 눈독을 들인다. 1897년 4월 25에 크레타에 상륙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1900년 7월 14일에 중국에서 벌어진 의화단 운동에 진압군으로 참여하면서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1911년 9월 29일에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이 시작된다. 내부에서 천천히 붕괴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이탈리아를 막을 힘이 없었다. 그나마 리비아 주둔군은 이탈리아군을 해변 지역에 붙들어둘 저력은 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1차 발칸전쟁이 폭발해 제국이 극도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이탈리아군은 10월에 트리폴리를 점령, 1912년에는 오스만 제국과 강화 협상을 통해서 리비아 지역을 획득한다. 이를 기회로 도데카니사 제도도 점령하게 되나 영유권은 논쟁적이었다.
6.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향해서 포격하는 이탈리아 포병 |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한동안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 왕국은 1915년 5월 23일 숙적 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하고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진격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저항과 알프스 산맥의 험한 지형에 가로막혔다.
그래도 이탈리아군은 뚝심있게(...) 병력의 무제한적 축차 투입과, 1916년의 여름에 전개된 제6차 이손초 전투의 사보티노 산(Monte Sabotino) 전역에서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8] 장군이 지휘하는 제4보병사단의 활약으로, 고리치아 지역을 점령하여, 이를 통해 이탈리아 왕국군은 유리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손초 전투 자체가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 상호간의 무식하기 그지없는 소모전에 가까웠고,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수행 역량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긴 하였으나, 오스트리아군의 이손초 방어선을 제대로 돌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1917년 10월 24일, 카포레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독일 부대의 맹공에 이손초 전선의 이탈리아군이 분쇄되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이탈리아군은 모든 공세 계획을 중단하고 방어전으로 전환한다. 이 과정에서 무능한 전술능력과 저열한 인성을 보여준 끝에 대참사를 초래한 육군 총사령관인 루이지 카도르나(Luigi Cadorna) 대장은 보직해임되고, 유능한 아르만도 디아츠(Armando Diaz) 대장이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이탈리아군은 하마터면 완전히 괴멸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18년 춘계 대공세를 위해서 독일군 병력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빠져나가고, 이탈리아 왕국군은 유능한 디아츠 장군을 중심으로 피아베 강에서의 방어전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몇배로 갚아줌으로써 복수에 성공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합스부르크와의 오랜 전쟁에서 최종적인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사실 이 때의 이탈리아군의 승리는 역사적 의미가 굉장히 강하다.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 그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코 디 로마이래 이탈리아에 상전으로 군림하다시피했다. 심지어 통일 직전에도 북중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땅이다시피했고, 통일 후에도 미수복 이탈리아를 점유하고, 대체로 이탈리아보다는 강하다고 평가받는 열강 대우를 받았는데, 1차대전에서 그렇게 몇백년 간의 묵은 원한을 털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그 이후, 안슐루스 이전까지는 오히려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의 상전이 되다시피했으니, 실익 여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역전 사례는 사실 역사적으로 찾기는 어렵다. 이런 역전의 시작은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 통일 전쟁 당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롬바르디아를 얻은 것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도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탈리아군은, 명분도, 준비도, 실력도 모두 열약했던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비하면 철저히 준비된 편이었고, 결국 협상국 전선의 일익을 담당한 주요 승전국 자리를 쟁취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당시에도 루이지 카도르나 장군과 같은 무능한 지휘부, 늦은 미완의 통일 민족국가로서의 약한 결집력, 고질적인 부정부패, 부족한 중공업 인프라와 군수능력으로 인한 난맥상 같은, 이후에 더욱 증폭될 문제가 산재했고, 이손초에서의 참패 같은 참사가 있었다. 하지만 일단 참전한 이후 전반적인 이탈리아 정부와 시민들의 전쟁수행 의지는 한번도 꺾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동부 알프스 지방 바위투성이 고산지대라는 전장의 특성 때문에 당시 이탈리아 전선의 병사들은 참호전+고산지대라는 엄청나게 혹독한 환경에서 전쟁을 치렀다. 그들은 혹한의 날씨 속에서 험준한 돌산에 참호를 파고 깎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르며 물자를 날라야 했다. 여러 면에서 개개인 병사 차원에선 훗날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이탈리아군에 비해서도 훨씬 더 가혹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기 이탈리아군은 한번도 2차대전기와 비교할만한 전면적, 총체적 붕괴는 겪지 않았다. 당시 양국은 해발고도 2000~3000미터 지역의 고산 빙하지대에서도 격전을 펼쳤으며, 이 기록은 1990년대 카길 전쟁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이 히말라야산맥의 카슈미르에서 싸울 때까지 자그마치 85년간 깨지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따뜻한 기후에 익숙한 이탈리아 병사들이 낙석, 산사태, 눈사태, 혹한, 보급의 난제, 고위도 같은 당장 자연과의 전쟁이 더 무서운 환경에서 보인 분투를 보면 이 시기엔 가히 이탈리아 전군이 훗날 2차대전때 폴고레 공수사단, X-MAS 같은 소수 정예부대급 용기와 투지를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영병이나 병영부조리, 간부-병사간 상호 불신 같은 군기강 문제야 늘 있었고, 카포레토 전투 직후에는 정말로 패전의 직전까지 갔다 겨우 재기했지만, 1차대전기의 이탈리아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도 오히려 위기감에 자원입대율이 폭증했고, 이탈리아 정부 또한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 결연한 항전의지를 다졌었다. 물론 이런 가혹한 전쟁에 참여하면서 이탈리아 경제와 사회가 치른 댓가는 결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붉은 2년"이라 부르는 전국적 파업, 폭동, 노동자 봉기 등, 내전에 가까운 사회적 혼란과 결국 무솔리니의 집권이란 참극으로 돌아오긴 했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이전의 아도와 전투와 2차대전 중의 내용을 놓고 비교해볼 때, 다른 두 시기와 달리 성실히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그 이후 치른 대가의 후폭풍이 좀 많이 심각해긴 했어도, 어쨋든 수백년에 걸친 원수 합스부르크에 대한 복수라는 역사적, 정치적, 전략적 목표 자체는 훌륭하게 달성했다. 역사적, 민족적 숙적에 대한 설욕과 미수복 이탈리아의 수복, 즉 리소르지멘토의 완성이란[9] 전국민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됐던 상황에선 이탈리아군도 충분히 밥값을 하고도 남은 셈이다.
1918년에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이탈리아는 해외로 원정군을 보냈으며 프랑스와 알바니아에서 일어나는 전투에 참여하였고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에 군대를 파견하여 해당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후, 이탈리아 왕국은 전사자 60만 명에 부상자 90만 명이라는 막심한 피해로 인해 이탈리아 왕국군을 기존의 편제로는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방위군 수준으로 군대를 재편성한다.
6.4. 전간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승리를 자축하는 이탈리아의 신문 |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무지막지한 인명 피해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최소 인력만을 남기고서 규모를 대폭 축소한다. 그 후 전간기 동안 1922년 리비아 독립군과 충돌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여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이탈리아는 여전히 에티오피아 지역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마침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왕국군은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의 실수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대규모 부대와 많은 수의 장비를 에리트레아와 소말린란드 지역에 배치한다.
이탈리아 동아프리카 부대는 소말리아 점령을 목표로 모가디슈와 소말리아 해안을 따라서 군병력을 이동, 배치하였다. 1935년 이탈리아 왕국의 군사적 행동에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전쟁을 개시하였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발발, 10월에 말레브 강을 건너 에티오피아 제국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 진입하면서 승리하게 된다.[10]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은 국민파 반란군에게 많은 수의 무기와 병력을 파견하면서 내전 기간 동안 자신들의 무기에 대해서 실전 테스트를 한다. 사실 말이 좋아 실전 테스트지, 이탈리아에서 보낸 지원병 군단(Corpo Trupo Volontarie, CTV)은 5만 명이나 되는 완편 군단급 규모에, 전투기도 700대 씩이나 동원했고, 예산적인 측면에서도 3년 내내 이탈리아 일년 예산의 14% ~ 20% 정도의 거대한 예산을 소모하면서, 이탈리아군의 신무기 개발, 편제 재편 등의 각종 군 현대화 계획을 작살내었다.
그러면서도 마드리드 포위전의 핵심 거점 중 하나였던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같은 이탈리아인들로 구성된 제 11 국제 여단에게 패배하는 등의 졸전을 거듭한 결과, 원래 목적이었던 체제 선전 및 스페인 내 이탈리아의 영향력 강화에 실패하고, 후일 벌어질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약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는 콘도르 여단을 제외하면 대대적인 전투 병력보다는 소수의 군사 고문, 기술자 파견에 주력하면서도 존재감도 부각 시키고, 스페인 내 영향력도 착실히 늘려가던 나치 독일과 대비되어, 프랑코 휘하 스페인 국민군 진영 병사들에게 조롱당하고, 심지어 같은 동맹국이었음에도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 같은 작자들은 본인들 특기인 인종 품평을 할 때마다 가난해도 상무정신이 있는 스페인인들에 비해 말이 좋아 열강이지 정신은 썩어 빠진 이탈리아인[11][12]이란 식으로 비웃기까지 했다.
1939년 4월 이탈리아군은 그리스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알바니아 왕국을 침공하여 점령한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왕국 수뇌부는 자국의 전쟁 역량을 분석했는데 스페인 내전에도 참여한 군수장관 카를로 파바그로사(Carlo Favagrossa)는 적어도 1942년이 되어서야 대규모 작전이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무솔리니도 군수장관의 판단을 수용하여, 독일과 강철 조약을 맺고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준비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불가침을 선언했다. 에티오피아와 스페인에서의 전쟁으로 군의 현대화가 완료되지 못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판단과는 달리 전쟁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이탈리아도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75개 육군사단을 편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사단 편성도 실속 없이 사단 숫자만 늘린 거나 다름없어서 뻥튀기 수준이었다. 총력전에 돌입했던 1차대전 전체 기간 동안 편성한 전체 사단 숫자가 70개 남짓이었던걸 생각하면 수치상으로는 인상적이었지만 실속은 영 아니었다.[13][14] 다른 심각한 문제점들도 속속 드러났다. 기갑 장비들은 탱켓이나 경전차가 주류였고 트럭, 기관총, 군복은 품질 불량이었고 장비 수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1차대전 이후 해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인수한 야포와 중포를 2대전 발발 이후에도 대규모로 썼어야 했을 지경.[15]
게다가 지역 정보 수집도 제대로 되지 않아, 작전에 들어갈 때마다 작전 지역 현지인에게 의존하는 등의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6.5. 제2차 세계 대전
6.5.1. 프랑스 침공
알프스산맥을 오르는 이탈리아 알피니 사단 |
그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서부 알프스에 전선을 형성하여 1940년 6월 10일부터 1940년 6월 25일까지 총 15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르네 올리(René Olry) 장군이 이끄는 알프스군(Armée des Alpes) 병력과 충돌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예전부터 알프스 요새 같은 방어시설을 갖춰둔 상태였으며, 방어시설을 우회하여 공세를 펼치기에는 알프스의 지형과 교통망이 영 좋지 못했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자신들보다 훨씬 수적으로 열세인 알프스군에 역으로 반격당해 밀려버린 끝에, 오히려 이탈리아의 일부 산골 마을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되는 추태를 연출하고야 만다. 이때 프랑스군 총사령부는 진지하게 이탈리아로 병력을 보내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검토하였으나 독일의 파리 점령으로 무산되었다.
그래도 독일의 낫질 작전으로 인해 프랑스가 항복함으로서 이탈리아 왕국은 통일 당시 나폴레옹 3세에게 할양했던 니차, 사보이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성과를 얻기는 했지만, 15일이라는 전투 기간 동안 이탈리아 왕국군은 631명 전사, 616명 실종, 2,631명 부상 등의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얻은 이익에 비해 손실이 너무 컸고, 그 이익마저도 자국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님에도, 무솔리니는 알프스 전선에서의 희생을 두고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위한 희생으로는 너무 적다"(...)는 말을 남겼다.
6.5.2. 아프리카
6.5.2.1. 동아프리카 전역
동아프리카 전선에서 희생된 이탈리아군을 기리는 프로파간다 |
이에 베니토 무솔리니는 영국의 식민지를 집어삼킬 요랑으로 이집트, 수단, 케냐 지방에 걸친 전면공세를 명령하였고, 영국령 소말릴란드에 주둔하던 소규모 식민지 치안군은 이탈리아군의 공세를 버텨내지 못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군은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영국군은 해군을 동원, 동아프리카 해안을 포위하는 것을 시작으로 빠른 속도로 수단, 케냐 방면에서 공세를 펼쳤고, 앰바 알라지 전투에서의 패배와 곤다르 전투에서의 저항을 끝으로 1941년 11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수비대는 영국군에게 항복했고 이탈리아는 동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모두 상실하고 만다. 졸렬한 지휘로 수십만명의 식민지병들과 2개 사단에 달하는 이탈리아군을 상실한 이탈리아 동아프리카군의 사령관 아오스타 공작 역시 포로가 된다.
6.5.2.2. 북아프리카 전역
북아프리카 이탈리아군의 세모벤테 75/18 자주포와 지휘차량에 앉아 있는 롬멜 |
하지만 영국 본토 상황이 나아지면서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였고 이탈리아는 10주만에 800km이나 전선이 밀려버렸다. 반격 직전 전력 차이는 이탈리아군 10개 사단과 2개 기갑여단 15만명 대 영국군 2개 사단 3만 6천명에 달했는데도 이탈리아군은 패배했다. 바르디아 요새와 토브룩 요새 등 중요한 군사적 거점을 잃어버렸고 많은 수의 장비와 인력을 잃으면서 이탈리아군의 사기는 바닥인 상태였다. 참혹한 패배의 원인으로는 보급 문제 말고도 영국군이 규모는 훨씬 적어도 이탈리아군의 화력으로 관통할 수 없던 마틸다 전차 따위의 우수한 장비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기계화도 훨씬 잘 되어있었단 점이 지적된다.
이런 이탈리아군의 상태를 본 히틀러는 북아프리카에 독일군 파병을 결정했고 에르빈 롬멜 중장을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군을 돕게 하였다. 롬멜의 지휘 아래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선전하며 배틀액스 작전은 성공하였고 영국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하면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을 목표로 전진하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의 패배로 더는 전진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미군이 횃불 작전에 성공하면서 아프리카 군단은 위축되었고 튀니지 전투에서 저항하지만 탈출로가 없어서 항복하게 된다.
6.5.3. 발칸 반도
6.5.3.1. 알바니아 침공
이탈리아를 뱀, 알바니아를 토끼로 묘사하여 이탈리아 왕국의 침략 야욕을 풍자화한 소련의 신문 |
1939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면서 이탈리아 또한 알바니아를 합병할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합병이 불필요하다고 반대하였으나 무솔리니는 왕의 의견을 무시하고 알바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알바니아는 이를 거절한다. 이탈리아군은 22,000명의 군을 동원하여 알바니아에 상륙한다. 알바니아군은 14,500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탈리아 장교의 명령을 받는 상태였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대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에 항복을 받아내고 알바니아의 왕 조구 1세는 해외로 달아났다.
이후 이탈리아는 이탈리아의 왕이 알바니아의 왕을 겸임하는 동군연합으로 흡수했다. 몇몇 탈영한 알바니아군과 알바니아의 공산주의자들은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이탈리아군에 대항하였다.
6.5.3.2. 그리스 침공
그리스 내부로 진군하는 이탈리아 알피니 산악병 |
폴란드에서 추축군의 승리에 고무된 무솔리니는 히틀러 정권에게 이탈리아군의 유고슬라비아 왕국 침공을 제안했다. 1차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전신인 세르비아가 1년 이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고전시킨 사례도 있고 히틀러 본인도 유고슬라비아를 추축국으로 끌어들이는데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는지라 나치 독일은 이를 거절한다. 대신 독일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서 독이 양국이 공동으로 영국군을 몰아내자고 건의했다. 히틀러의 비협조에 불만이 폭발한 무솔리니는 유고슬라비아 침공은 포기하되 대신 자신의 위상은 위상대로 끌어올릴 방법을 찾는다.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뛰어넘겠다는 야심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독일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그리스 병합을 계획하게 된다. 1940년 10월 이탈리아군은 알바니아를 교두보로 하여 그리스 침공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하면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고 메탁사스 방어선으로 대표되는 방어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그리스의 험준한 산악지형과 그리스군의 견고한 방어전으로 인해서 그리스 내부로 들어가지도 못했고, 역으로 알바니아까지 밀려난다. 그 이후 서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1941년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그리스에 개입할것을 요청하였고, 독일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마침 영국이 그리스를 지원하면서 독일의 침공 명분도 생겼다.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영국군과 연합한 그리스군을 패배시켰고, 결국 그리스 전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아테네 점령 후 독일군과 파르테논을 배경으로 촬영한 기념 사진 |
6.5.3.3. 유고슬라비아 침공
유고슬라비아에서 도로 검문을 하는 이탈리아군 |
6.5.4. 동부전선
812 시베리아보병연대에 돌격을 감행하는 사보이아 기병연대 |
신속하게 3개의 사단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 군단 CSIR(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이 편성되었다. 동부 전선에 1941년 7월 중순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독일 육군의 제1기갑사단과 함께 활동하였고 두 개의 다른 이탈리아 원정부대는 이탈리아 제8군 ARMIR(Armata Italiana in Russia)로 재편성 후 1942년 4월에 다시 참가했다. 돈강 지역에서 헝가리군 및 루마니아 제 3군과 합류해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전진하였고, 이윽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자 독일 지휘부는 이탈리아군을 루마니아군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북부에 배치해 돈 강 방어선을 구축한다.
소련군의 공세 이후 후퇴하는 이탈리아 원정군 |
이탈리아군은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서 처절하게 저항하였지만 기갑전력은 경전차와 자주포 그리고 대전차무기는 소구경 대전차포와 산악포가 전부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리아군이 전멸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생각되었다.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독일군도 지원물자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몇 정의 노획한 폴란드제 Wz.35 대전차 소총을 줄 뿐이었다.
1943년 1월 14일 이탈리아군의 실질적 전력인 이탈리아 알피니 산악 군단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산악병 군단은 정예 산악사단이였지만 청색 작전에서 그들이 싸우게 된 곳은 산악이 아닌 평원이었고(...)[20] 무기 또한 빠르게 분해 조립이 가능한 65mm 산악포가 전부였고 1월 말까지 저항했지만 전멸하게 된다. 여기서 놀라운 건 알피니 사단이 추축군 사단 중 가장 마지막까지 버틴 사단이였다는 것이다. 평소 이탈리아군의 이미지가 어땠는지와 비교하면 최후까지 대단한 투혼과 전투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후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마저 소련군에게 항복하였고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제6군 전체와 제4기갑군의 대부분, 루마니아군 5개 사단, 이탈리아군 제8군이 괴멸당했고 이탈리아군은 87,795명(장교 3,168명, 부사관 및 사병 84,627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고 34,474명의 부상자가 발생해 전체 235,000명의 병력 중 114,520명을 잃었다. 대부분의 차량과 장비 역시 상실하였고 함께 원정 온 공군 전력 또한 궤멸되었다.
6.5.5. 이탈리아 전선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독일 공수부대 |
하지만 휴전 발표 이후 히틀러는 독일군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기로 결정하였고, 휴전도 개전만큼이나 무계획적으로 진행되었기에 휴전은 발표되었지만 상부로부터 아무런 명령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군은 부대에 그냥 대기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빠르게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북부의 이탈리아군을 장악한다. 독일군은 독일에 협력하지 않는 이탈리아 군인들을 사살했고, 해산되거나 탈영한 몇몇 이탈리아 군인은 파시스트 정권에 반대하는 민중들과 결합하여 독일군에 저항하는 파르티지아노가 되기도 하였다.[21]
대전 도중 반체제 저항 세력이 지하에 꽁꽁 숨어있는 소수의 전쟁 이전 정치인, 지식인에 국한되었던 독일, 일본과 달리 이탈리아는 이전까지 중도, 좌익 세력이 정계를 주름잡고 있었고, 이는 무솔리니 집권 이후에도 바뀌지 않아 국내 반체제 세력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막대했다. 그리고 무솔리니를 지지하던 이들도 끝나지 않는 긴 전쟁에서 이탈리아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자 하나둘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한다.
이는 1943년에 벌어진 봄의 밀라노, 볼로냐, 토리노 등 북부 공업 도시의 대 파업을 기점으로 연합군의 진주에 따라 이탈리아 국내 저항세력이 본격적으로 거리로 쏟아 나오기 시작했고, 이 와중 항복한 이탈리아 왕국군 중 많은 수가 해방된 남부의 나폴리에 기반한 연합군 소속의 정부군에 참여하거나, 연합군이 돌파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치 독일과 괴뢰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정권 아래 놓였던 북부에서는 빨치산에 가담했다. 1944년 가을쯤 되면 연합군 통제 아래 들어간 남부 이탈리아 왕국군과는 별개로 파시스트 점령 아래 지하 활동하는 빨치산만 해도 3만명 가량으로 규모가 크게 늘었다.
이후 북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에 있는 산장에 연금되어 있던 무솔리니를 오토 스코르체니가 이끄는 독일군 특수부대가 구출하였고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의 살로에 무솔리니를 지도자로 세운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통칭 살로 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만든다. 한편 남부의 바돌리오 정부는 연합군과 함께 싸울 병력을 모집하였고 5사단을 신설하여 연합군과 함께 밀라노와 베니스를 향해서 전진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은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은데다 독일군이 적극적으로 방어전을 펼쳐 진격이 어려웠고 이탈리아 끝까지 올라가봤자 알프스산맥 때문에 독일 본토로는 갈 수 없어 전략적 중요성도 높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1944년 서부전선이 개막되자 모두의 관심에서 잊혀졌다. 이후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 미군 양측의 전선은 교착되고, 대신 후방의 빨치산 활동이 커지면서 이탈리아 역사학자들은 이탈리아 내전이라 부르게 된 44년 봄~45년까지 여러 빨치산 공화국 성립과 진압, 대민 학살, 파업과 도시-산촌 유격전이 중심이 된 게릴라전의 비중이 커졌다. 1945년 초 빨치산에 의해 무솔리니가 잡혀 처형된 후에 살로 공화국도 무너지고, 동시에 여러 전쟁 전 반파시스트 정파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 해방 위원회(Comitate di Liberazione Nazionale) 산하 이탈리아 빨치산들이 북부 도시들에 입성하며, 달마티아 일대엔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이 진주하면서 이탈리아의 전쟁은 끝나게 된다.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왕립 육군은 161,729명이 항복했고 73,277명이 사망하였고 12,000여 명이 실종되었으며 60,000여 명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7. 왕립 해군(Regia Marina)
자세한 것은 이탈리아 왕립 해군 문서로.1941년, 이탈리아 왕국 해군의 모습. 영상 뒷부분에는 이에 맞서는 영국 지중해 함대의 모습이 담겼다. 출처는 British Pathé. |
1943년, 연합군에 항복하는 이탈리아 왕국 함대. |
8. 왕립 공군(Regia Aeronautica)
9. 현대 이탈리아군의 탄생
이탈리아 공화국군의 M60 패튼 전차 |
하지만 이탈리아는 여전히 입헌군주제 상태였고 움베르토 2세 또한 이탈리아를 입헌군주제 국가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46년 6월 2일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입헌군주정 유지 국민투표에서 46%의 지지밖에 얻지 못하여 움베르토 2세와 사보이아 가문은 이탈리아를 떠나게 되었고 이탈리아 왕국은 공화국이 되었으며 1948년 1월 1일 새 헌법이 제정되었고 새 헌법에 따라 엔리코 데 니콜라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이 탄생한다. 공화국이 된 이탈리아는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면서 이탈리아군은 다시금 유럽 국방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1]
이탈리아 외에도 선도적으로 공수부대를 발전시킨 나라는 소련이다.
[2]
비행부대 목록
[3]
상세 편제
[4]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중심지는
사르데냐가 아니라 수도
토리노가 있는 피에몬테였다. 그래서 당대에는 사르데냐군이 아닌 피에몬테군으로 불렸다.
[5]
나폴레옹 3세가 빌라프란카 조약으로 통수치고 빠져 나갔기 때문에 니차의 즉각적인 할양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1860년 토리노 조약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토스카나 대공국,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교황령의
볼로냐 일대를 병합하는 것을 프랑스가 승인하는 조건으로 니차와 사보이아는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6]
하지만 무력으로 점령하였기 때문에 시칠리아 사람들이 애국심을 가지기는 힘들었고 현재도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지역감정으로 남아있다.
[7]
에티오피아군은 당시의 편견적 인식과는 다르게 무기의 질과 수준에서도 유럽 군대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8]
무솔리니 축출 후,
국왕에 의해 임시 총리에 임명된 그 사람이 맞다.
[9]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참전을 제4차 이탈리아 독립전쟁(Quarta guerra d'indipendenza italiana)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 1차대전기 당시 이탈리아 지식인, 언론에서 종종 사용한 표현이다. 제3자의 관점에서 정당성은 둘째치고, 어쨋든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이 전쟁을 이탈리아 통일 이후로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여전히 '강점'하고 있던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해안 등 마지막 남은 '이탈리아 민족의 정당한 영토'의 '해방'을 통한 '이탈리아 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는 전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0]
하지만 에티오피아 전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강점 기간 내내 게릴라 전투가 계속되었으며, 1941년 초 영국군 주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로 진군하는 순간까지도 몇몇 지역은 여전히 하일레 셀라시에를 지지하는 토착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11]
예를 들어 스페인이 파견한
청색 사단은 그 히틀러로부터 '독일군과 동급'이라는 평을 들으며 찬사를 받았으며, 실제로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크라스니 전투에서 숫적으로 압도적인 소련군의 공세를 격파하기도 했다. 물론 청색 사단의 다수가
스페인 내전의 베테랑 출신의 자원병들로 구성되었음은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이탈리아의 러시아 원정군도 막상 활약만 보면 2차대전 내 이탈리아군 중 가장 활약한 대규모 전투부대라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12]
2차 대전 말기 참전하기 싫다고 땡깡부리는 스페인에 대한 침공을 단념한 이유 중 하나가 스페인인들이
게릴라전을 펼칠 것을 우려해서였다고 한다. 애초에 게릴라라는 말 자체가
스페인어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은 따지고 보면 국내외 정치적 환경이나 내부 정치경제적 환경 모두가 참전을 말리는 방향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참전을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3]
이탈리아 보병 사단 편제를 예로 들면 보병연대 2개, 포병연대 1개, 야포 36문, 대전차포 24문, 정원 14,600명 수준이고 동맹국 독일은 보병연대 3개, 포병연대 1개, 야포 72문, 대전차포 36문, 총원 18,500명으로 수적으로도 병력 차이가 나지만 야포나 대전차포 등 화포에 숫자도 더욱 적었기 때문에 전투력에 심한 차이가 났다.
[14]
본래는 이탈리아군 1개 보병사단도 3개 보병연대에 1개 포병연대 편제로 이루어졌지만, 에티오피아 침공 등을 거치면서 국외 파병 시 병참 용이성 등을 이유로 2개 보병연대에 1개 포병연대 체제로 바꿨다. 이탈리아군 내부에서도 모험적이라고 평가되어 금세 검은셔츠단 2개 대대를 육군 사단 편제마다 추가해서 인원 수는 채운다. 검은셔츠단 사단의 연대 편제는 원래 2개 대대니 어찌보면 3각 편제로 돌아갔다고 볼 수는 있는 셈. 이런 식의 편제는 1차대전식 편제를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약소국 군대인 그리스군을 상대로도 단위 부대 전투력이 떨어지는 참사로 이어진다.
[15]
7,970문의 각종 화포 중 30년대 이후에 생산된 신형은 246문에 불과했다.
[16]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 전체를 현대화할 정도의 군수 물자였다. 당장 자신들도 군대가 얼마 없는 영국에게는 불가능한 요구인 셈.
[17]
페타르 2세는 친연합 쿠데타를 일으키기는 했으나
추축국에서 탈퇴할 생각은 없었다.
[18]
뒤에 서술하는 소련 파병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전선에 귀중한 전략적 자원들을 낭비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전력을 북아프리카와 그리스 방면에 투자하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탈리아가 파병을 한 이유는 무솔리니의 허영심에 의한 행동에서 나온 것도 있었지만 독일의 요구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탈리아는 독일에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독일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19]
히틀러 정권의 비시 프랑스 점령 때도 한줌의 영토에 눈이 멀어 전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던 북아프리카나 좀 더 미래의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될 수 있었던 귀중한 병력마저 추가로 파견했으니 무솔리니의 전략적 안목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알 수 있는 부분.
[20]
원래 이들은 히틀러의 요구에 따라
캅카스 산맥에 보내질 예정이였으나 마약에 중독되기 시작한 히틀러가 변덕을 부려 캅카스를 온전히 독일의 것으로 만들고자 이들을 전혀 상관없는 러시아 평원에 보내게 된 것이다.
[21]
같은 시기
일본군도 중국에 주둔해 있던 이탈리아군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하여
베이징,
톈진,
상하이 등지의 이탈리아
조계지를 접수하고 주둔 병력의 항복을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