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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19:13:46

이탈리아 왕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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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해군 공군
파일:이탈리아 왕국 전쟁기.svg
군기

1. 개요2. 역사3. 이탈리아 왕국군의 제식병기
3.1. 육군3.2. 해군3.3. 공군
4. 편제5. 계급6. 왕립 육군(Regio Esercito)7. 왕립 해군(Regia Marina)8. 왕립 공군(Regia Aeronautica)9. 현대 이탈리아군의 탄생

1. 개요

이탈리아 왕국군(Regio Esercito)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 1861년부터 1946년까지 존재했던 이탈리아 왕국의 군대다.

2. 역사

통일 이탈리아 왕국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 시절부터 존재했으며, 사보이아 가문 이탈리아인으로 정착시킨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이 상비군을 창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대에 들어 5개 연대로 개편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은 협상국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나 반대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추축국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리고 1943년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은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은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군과 기존 이탈리아 왕국군으로 갈라져, 이탈리아 전선 곳곳에서 충돌을 벌였고,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군으로 재통합된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같은 추축군인 독일 국방군 일본군에 비해서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은 없었고(...),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으로 대표되는 최약체 군대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 등 피치 못할 졸전의 이유가 밝혀짐으로 인해 재평가받게 되며 이 과정에서 베르살리에리 폴고레 공수사단 등 정예부대들의 활약도 널리 알려졌다. 반대로 부정적인 재평가도 이루어졌는데 흔히 독일 국방군이나 일본군에 비교하면 전쟁범죄가 없었다고 알려진 이태리 왕국군이지만, 당시 이탈리아의 전쟁범죄는 리비아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등에서는 상당히 행해졌다는 것이 발굴되기도 했다.

사실 의외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삽질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군사사에서 상당히 주목할만한 업적를 여럿 남긴 바 있는데, 단적으로 전략폭격 개념의 창시자 중 하나는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헤였다. 그리고 자폭보트와 인간어뢰를 필두로 한 해군 특수전 부대 Decima flottiglia MAS는 이미 유명하고, 공수부대 개념도 이탈리아에서 처음 나왔다.[1] 또한 묻혔지만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잠수함들을 운용해서 좋은 실적을 거둔 바 있으며, 리토리오급 전함 이라는 명품 전함을 만들어내기도 했었다.

3. 이탈리아 왕국군의 제식병기

3.1. 육군

제2차 세계 대전기의 이탈리아군 보병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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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군 보병장비
개인화기 소총 볼트액션 소총 <colbgcolor=#fefefe,#393b42> M1870/87, M1870/87/15, M91, M38
반자동소총 MAB 18/30, Mod. X, M1935, M1937, M39
기관단총 OVP 1918, MAB 18, MAB 38, MAB 38/42, FNAB-43
권총 이탈리아제 M1889, M1910, M15, M17, M23, M31, M32, M34, M35
오스트리아제 M1898, M1907, M1912
지원화기 기관총 M1914, M1935, M30, M37, M38, 브레다-SAFAT
대전차화기 기병총/대전차용 총 "S", 판처파우스트, 라케텐판처뷕세(판처슈렉)
화염방사기 M35, M40, M41
박격포 브릭시아 M35, 81mm 박격포 M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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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군의 운용장비 | 파일:gun_icon__.png 대전기 보병장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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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이탈리아 왕국군 기갑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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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 왕국군 기갑장비
장갑차 차륜 장갑차 <colbgcolor=#fefefe,#393b42> 란치아 1ZM, 피아트 611, AB 40, AB 41, AB 41 'Ferroviaria', AB43, S.37, SPA 도붕퀘 35, AS.42, 란치아 린체, AMD 35G
반궤도 장갑차 브레다 61, 피아트 727
전차 경전차 L5/21, L5/30, L2/29, L3/33, L3/35, L3/38 , L6/40, 안살도 MIAS, 르노 FT
중형전차 M.11/39, M.13/40, M.14/41, M.15/42, M.16/43 사아리아노, 3호 전차 N형G, 르노 R35G, 4호 전차 G형G, Carro armato S.O.M.U.A.G, M4A4A
중전차 P.26/40, P.43, 처칠 Mk.IA, 6호 전차 티거G
노획 차량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르노 FT, B1 bis 파일:소련 국기.svg BT-5, BT-7 1935년형, T-34 1941년형, T-60, T-26S, 그랜트 파일:영국 국기.svg 밸런타인 Mk.III, Mk.VIB, A9 Mk.1/ A9 Mk.1C.S, A10 Mk.II, A10 Mk.II C.S., 크루세이더 순항전차, 처칠 Mk.III, A13, 브렌건 캐리어
자주포/ 대전차 자주포 세모벤테 L40 47/32, 세모벤테 M40 75/18, 세모벤테 M41 75/18, 세모벤테 M42 75/18, 세모벤테 M42 75/34, 세모벤테 M43 75/46, 세모벤테 M43 105/25,
세모벤테 M41M 90/53, 세모벤테 149/40, 세모벤테 B1 bisM, 3호 돌격포 G형G, 기타
페이퍼플랜/프로젝트 P.21/42P, P.23/41P
차량 AS.42브레다 32, SPA 38R, 피아트 618, 피아트 626, 피아트 666, 란치아 로, TL 37, 피아트 508
모터사이클 구찌 알체 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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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첨자A: 이탈리아 왕국군이 1943년 9월에 항복 및 연합국 가담 후 운용
윗첨자G: 나치 독일로부터 수입/공여 받은 차량
윗첨자M: 개조차량
윗첨자P: 라이센스 생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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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기의 이탈리아군 화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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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군 화포
곡사포 <colbgcolor=#fefefe,#393b42> 105/28 Mod. 1916, 149/19 Mod. 37, Cannone da 149/28, 149/35 Mod. 1901. 안살도 149/40 Mod. 1935, 안살도 210/22 Mod. 1935
보병포 65/17 Mod. 1908/1913, 75/27 Mod. 1911, Obice da 75/13, 75/18 Mod. 34/35, 75/27 Mod. 1906, 100/17 Mod. 14
대전차포 블레르 47mm 대전차포, 75/32 Mod 37, 75/34 Mod. S.F.
대공포 브레다 20/65, 브레다 37/54, 75/27 C.K, 75/46 C.A. Mod 34, 90/53 Mod. 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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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군의 운용장비 | 파일:cannon_icon__.png 화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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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군 보병장비 선전영상

3.2. 해군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제2차 세계 대전의 이탈리아 왕립 해군 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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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 어뢰정 <colbgcolor=#fefefe,#393b42> M,A,S 어뢰정
구축함 호위 어뢰정 스피카급, 오르샤급, 아리에테급, 치클로네급
구축함 알렉산드르 포에리오급, 카를로 밀레발로급, 팔레스트로급, 제네랄리급, 쿠르타토네급, 레오네급, 퀸티노 셀라급, 나자리오 사우로급, 투르비네급, 나비가토리급, 다르도급(프레치아급), 폴고레급, 마에스트랄레급, 알프레도 오리아니급, 솔다티급(*), 코만단티 메달리에 도로급(*)
잠수함 발릴라급, 아르고나우타급, 아르키메데급, 시레나급, 페를라급, 아두아급, 브린급, 아르고급, 아차이오급, 마르첼로급, 로몰로급(*)
장갑순양함 산 조르지오급
방호순양함 니노 빅시오급(**)
경순양함 콘도티에리급, 코스탄조 치아노급, 카피타니 로마니급(*), 타란토급, 에트나급E
중순양함 프로젝트 1923년형, 트렌토급, 차라급, 볼차노, 프로젝트 안살도E, 프로젝트 안살도 초중순양함E
항공모함 전함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 재건조 계획, 전함 임페로 재건조 계획, 아퀼라(*), 스파르비에로(*)
수상기모함 주세페 미라글리아
순양전함 1928년형(**), 1930년형(**), 1933년형(**)
전함 쿠니베르티 17,000톤 노급(**), 단테 알리기에리(**), 프로젝트 페라티(**), 콘테 디 카보우르급, 카이오 두일리오급,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급(**), 리토리오급(*), 프로젝트 UP.41형E(*)
노획함 순양함: 카타로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FR11파일:프랑스 국기.svg , FR12파일:프랑스 국기.svg
구축함: 프레무다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시베니코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류비야나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FR21파일:프랑스 국기.svg , FR22파일:프랑스 국기.svg , FR23파일:프랑스 국기.svg , FR24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1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2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3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4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5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6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7파일:프랑스 국기.svg
잠수함: 프란체스코 리스몬도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안토니오 바자몬티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FR118파일:프랑스 국기.svg
기타 2차대전기 이탈리아 포획 함선
포함 에리트레아 포함, 디아나 포함
(*) 표기: 해당 함급의 일부 또는 전부가 건조 중단된 함급
(**) 표기: 1차 세계 대전 전후 2차 세계 대전 이전 해체 및 계획 취소되었지만 편의상 틀에 넣은 함급
윗첨차E 표기: 수출용 함급, 취소선 표기: 계획만 및 취소된 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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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군의 운용장비 | 파일:해상병기 아이콘.svg 해상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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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공군

제2차 세계 대전의 이탈리아군 항공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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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colcolor=#373a3c><colbgcolor=#b0e000> 복엽기 CR.32, CR. 42 팔코, Ro.44
단엽기 C. 20x 시리즈, Re. 200x 시리즈, G.50 프레치아, G.55 첸타우로, D.520F, Bf 109G, 카프로니 캄피니 N.1z
중전투기 Ca.331, SM.91, SM.92, G.58, Bf 110G, Do 217NG, 보파이터 Mk.IFC, P-38C
폭격기 경폭격기 블렌헤임 Mk.IVC
中폭격기 Ca.311, Ca.135, BR.20 치코냐, SM.79 스파르비에로, SM.84, SM. 81 피피스트렐로, Z.1007 알치오네, Z.1018 레오네, Z.515, Ca.331
重폭격기 SM.82, P.108B, P.133, Z.506, Z.511, Z.516, Z.1011, B-24C
급강하 폭격기 Z.501, SM.85, SM.93, FC.12, Ca.355, Ba.201, Ju 87 피치아텔로G
공격기 Ba.65, Ba. 88, Ca.335, P.108A
수송기 SM. 79, SM. 75, SM. 82, SM. 95, P.108T, Ju 52G
정찰기 Fi 156G
※ 윗첨자 F: 프랑스 기체, G: 독일 기체, Z: 제트기, 취소선: 프로토타입 및 페이퍼플랜, C: 노획기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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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군의 운용장비 | 파일:jet_icon__.png 항공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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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편제

5. 계급

6. 왕립 육군(Regio Esercito)

6.1. 이탈리아 통일전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Scontro_di_Rivoli.jpg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격돌하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군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 빈 회의를 통해 구체제가 복구된 빈 체제가 들어섰고, 빈 체제의 맹주는 오스트리아 제국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수립해 이탈리아 반도 북부 대부분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 통치자들을 보내 사실상 이탈리아 반도를 철권통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파한 혁명 정신으로 이탈리아의 많은 지식인과 민족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에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자유주의 정부를 원하고 있었다. 1848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피에몬테 주에서 반오스트리아 혁명이 발생하였고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의 제후국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수도 밀라노에서 연속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북부 이탈리아의 단결을 외치며 오스트리아 제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피에몬테군[2]은 12,000명으로 구성된 군단으로 롬바르디아의 혁명을 지원하였지만, 예상 외로 혁명을 지원해주는 세력이 없었고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진압당했다. 결국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이 퇴위하고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즉위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패배를 인정하고 롬바르디아에 간섭하지 않기로 서명했다.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이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수뇌부는 자신들과 함께 싸워줄 동맹의 필요성을 느낀다. 유럽과의 관계 형성을 위하여 크림 전쟁에 참여 이후 파리 평화 회의에서 영국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의 간섭행위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하였고 두 국가가 이탈리아 반도에 관심을 두는데 성공했다. 1858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수상 카밀로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비밀협약을 맺었다. 조약의 내용은 니차(Nizza 현 프랑스 니스)와 사보이아를 프랑스에 양도하는 대신에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함께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오스트리아 정부를 자극하여 그들이 사르데냐 군대를 해산하라고 압력을 행사하자 그것을 무시하였고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 170,000명, 피에몬테군 70,000명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220,000명의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연합군은 철도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피에몬테 지역에 소집된 연합군은 롬바르디아 지역의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진입하기 위해서 티치노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홍수가 발생하여 행군 속도는 둔화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이 토리노 인근에 먼저 진입하여 연합군을 압박했다. 연합군은 알레산드리아로 이동하여 포 강에서 도하작전을 하여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 피해를 입자 밀라노의 사각 요새로 후퇴했다. 연합군은 솔페리노 전투, 산마르티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았지만, 프로이센군의 전쟁 참여를 두려워한 프랑스는 단독으로 협상하여 사르데냐-피에몬테에 롬바르디아 대부분을 양도하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이에 이탈리아 통일을 원하던 카보우르는 항의하였지만 결국 굴복하고 협상에 수락하여 물러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Calatafimi.jpg
칼라타피미 전투에서 양시칠리아 왕국군과 전투를 하는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프랑스의 독자적인 협상으로 통일의 꿈이 물 건너가고 자신의 고향 니차가 넘어갈 것이라는 사실에 분노한[3] 주세페 가리발디는 자신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하여 프랑스를 공격하려고 준비하였지만 카밀로 카보우르가 설득을 하여 남이탈리아로 가도록 유도하였고 때마침 양시칠리아 왕국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가리발디는 양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 시칠리아에 상륙한 가리발디군은 양시칠리아군과 시칠리아인의 저항을 받지만 칼라타피미 전투에서 저항군을 분쇄했다.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의 활약 이후 양시칠리아 군은 붕괴하였고 붉은 셔츠단은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나폴리를 점령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수뇌부는 그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 했지만 가리발디는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헌납했다[4]

시칠리아 지역까지 손에 넣은 사르데냐-피에몬테는 1861년 토리노에서 대의회를 소집했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Re d'Italia)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제 베네토 로마만을 남겨놓았으나 베네토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제국의 소유였고 로마에는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통일은 또다시 지지부진해졌다. 통일이 느려지자 가리발디는 또다시 군대를 조직하여 로마를 공격하였지만 프랑스군에게 참패하여 카프레라 섬에 구금당했다. 신생 이탈리아 왕국은 안전하게 로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1864년 프랑스와 협상하여 2년 내에 로마에서 철수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교황청은 부랴부랴 군대를 확장하였고 로마를 떠나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1866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벌어지자 프랑스군은 로마에서 철수했다.

가리발디가 이끄는 원정군의 양시칠리아 점령 이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이탈리아 통일을 발표, 직후 육군을 통합하여 이탈리아 왕국군을 편성하였다. 하지만 통일 이후 남부와 사르데냐를 중심으로 산적이 날뛰는 이탈리아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제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서 벌어진 오스트리아군과의 전투로 막심한 피해를 본 끝에 베네토 지역을 매입하는 조건으로 겨우 넘겨받았고 새로운 육군 편제를 조직했다. 군을 각각 보병, 기병, 포병으로 나누어 이탈리아 육군 설립 첫날에 32만 명의 병사와 장교 1만으로 구성된 18개 사단을 편성했다.

6.2. 20세기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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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와 전투에서 고전하는 이탈리아 왕국군
20세기 초반에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식민지가 되지 않고 남아있던 에티오피아 제국에 눈독을 들인다. 이탈리아군이 에리트레아에 1,000명에 군대를 상륙시키면서 1885년 5월에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군의 전력을 무시하고 있었고 소수의 군대만으로도 에티오피아를 쉽게 점령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5] 이후 1896년 아드와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로 에리트레아 소말릴란드 지역을 얻는 조건으로 에티오피아를 포기하게 되고 대신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린다.

눈길은 돌린 이탈리아 왕국은 오스만 제국이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 지역에 눈독을 들인다. 1897년 4월 25에 크레타에 상륙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1900년 7월 14일에 중국에서 벌어진 의화단 운동에 진압군으로 참여하면서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1911년 9월 29일에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이 시작된다. 내부에서 천천히 붕괴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이탈리아를 막을 힘이 없었다. 그나마 리비아 주둔군은 이탈리아군을 해변 지역에 붙들어둘 저력은 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1차 발칸전쟁이 폭발해 제국이 극도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이탈리아군은 10월에 트리폴리를 점령, 1912년에는 오스만 제국과 강화 협상을 통해서 리비아 지역을 습득한다. 이를 기회로 도데카니사 제도도 점령하게 되나 영유권은 논쟁적이었다.

6.3.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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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향해서 포격하는 이탈리아 포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한동안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 왕국은 1915년 5월 23일 숙적 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하고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진격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저항과 알프스 산맥의 험한 지형에 가로막혔다.

그래도 이탈리아군은 뚝심있게(...) 병력의 무제한적 축차 투입을 한 끝에, 1916년의 여름에 전개된 제6차 이손초 전투의 사보티노 산(Monte Sabotino) 전역에서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6] 장군이 지휘하는 제4보병사단의 활약으로 고리치아 지역을 점령하여 이탈리아 왕국군은 유리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손초 전투 자체가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의 무식하기 그지없는 소모전에 가까웠고,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수행 역량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긴 하였으나, 오스트리아군의 이손초 방어선을 제대로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1917년 10월 24일, 카포레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독일 부대의 맹공에 이손초 전선의 이탈리아군이 분쇄되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이탈리아군은 모든 공세 계획을 중단하고 방어전으로 전환한다. 이 과정에서 무능한 전술능력과 저열한 인성을 보여준 끝에 대참사를 초래한 육군 총사령관인 루이지 카도르나(Luigi Cadorna) 대장은 보직해임되고, 유능한 아르만도 디아츠(Armando Diaz) 대장이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하마터면 완전히 괴멸될 뻔한 이탈리아군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18년 춘계 대공세를 위해서 독일군 병력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빠져나가고, 이탈리아 왕국군은 유능한 디아츠 장군을 중심으로 피아베 강에서의 방어전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몇배로 갚아줌으로써 복수에 성공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합스부르크와의 오랜 전쟁에서 최종적인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사실 이 때의 이탈리아군의 승리는 역사적 의미가 굉장히 강하다.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 그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 사코 디 로마이래 이탈리아에 상전으로 군림하다시피했다. 심지어 통일 직전에도 북중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땅이다시피했고 통일 후에도 미수복 이탈리아를 점하고 대체로 이탈리아보다는 강하다고 평가받는 열강 대우를 받았는데 1차대전에서 몇백년 묵은 역관광을 해버린 셈이다. 그리고 이후 안슐루스 이전까지는 오히려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의 상전이 되다시피했으니 실익 여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역전 사례는 사실 역사적으로 찾기는 어렵다. 이런 역전의 시작은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 통일 전쟁 당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롬바르디아를 얻은 것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도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탈리아군은 명분도, 준비도, 실력도 모두 열약했던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비하면 철저히 준비된 편이었고 결국 협상국 전선의 일익을 담당한 주요 승전국 자리를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당시에도 루이지 카도르나 장군과 같은 무능한 지휘부, 늦은 미완의 통일 민족국가로서 약한 결집력, 고질적인 부정부패, 부족한 중공업 인프라와 군수능력으로 인한 난맥상 같은 이후에 더욱 증폭될 문제가 산재했고, 이손초에서의 참패 같은 참사가 있었다. 하지만 일단 참전한 이후 전반적인 이탈리아 정부와 시민들의 전쟁수행 의지는 한번도 꺾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동부 알프스 지방 바위투성이 고산지대라는 전장의 특성 때문에 당시 이탈리아 전선의 병사들은 참호전+고산지대라는 엄청나게 혹독한 환경에서 전쟁을 치루었다. 그들은 혹한의 날씨 속에서 험준한 돌산에 참호를 파고 깎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르며 물자를 날라야 했다. 여러 면에서 개개인 병사 차원에선 훗날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이탈리아군에 비해서도 훨씬 더 가혹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기 이탈리아군은 한번도 2차대전기와 비교할만한 전면적, 총체적 붕괴는 겪지 않았다. 당시 양국은 해발고도 2000~3000미터 지역의 고산 빙하지대에서도 격전을 펼쳤으며, 이 기록은 1990년대 카길 전쟁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이 히말라야 산맥 카슈미르에서 싸울 때까지 자그마치 85년간 깨지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따뜻한 기후에 익숙한 이탈리아 병사들이 낙석, 산사태, 눈사태, 혹한, 보급의 난제, 고위도 같은 당장 자연과의 전쟁이 더 무서운 환경에서 보인 분투를 보면 이 시기엔 가히 이탈리아 전군이 훗날 2차대전때 폴고레 공수사단, X-MAS 같은 소수 정예부대급 용기와 투지를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영병이나 병영부조리, 간부-병사간 상호 불신 같은 군기강 문제야 늘 있었고, 카포레토 전투 직후에는 정말로 패전의 직전까지 갔다 겨우 살아돌아왔지만 이런 절박한 상황에도 1차대전기 이탈리아는 오히려 위기감에 자원입대율이 폭증했고, 이탈리아 정부 또한 일시적 패닉 상태에서 다시 정신 차린 후 결연한 항전의지를 다졌다. 물론 이런 가혹한 전쟁에 참여하면서 이탈리아 경제와 사회가 치룬 댓가는 결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붉은 2년"이라 부르는 전국적 파업, 폭동, 노동자 봉기 등 내전에 가까운 사회적 혼란과 결국 무솔리니의 집권이란 참극으로 돌아오긴 했다. 그러나 적어도 1차대전기 당시 자체로 보면 이탈리아는 아도와 전투와 2차대전이란 그 전후에 비교해도 독보적으로 열심히 제대로 전쟁에서 싸웠으며, 치른 대가의 후폭풍이 좀 많이 심각해긴 해도 어쨋든 수백년에 걸친 원수 합스부르크에 대한 복수라는 역사적, 정치적, 전략적 목표 자체는 훌륭하게 달성했다. 역사적, 민족적 숙적에 대한 설욕과 미수복 이탈리아의 수복, 즉 리소르지멘토의 완성이란[7] 전국민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됐던 상황에선 이탈리아군도 충분히 밥값을 하고도 남은 셈이다.

1918년에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이탈리아는 해외로 원정군을 보냈으며 프랑스와 알바니아에서 일어나는 전투에 참여하였고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에 군대를 파견하여 해당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왕국은 전사자 60만 명에 부상자 90만 명 이라는 막심한 피해로 인해서 이탈리아 왕국군을 현재 편제로는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방위군 수준으로 군대를 재편성한다.

6.4. 전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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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승리를 자축하는 이탈리아의 신문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무지막지한 인명 피해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최소 인력만을 남기고서 규모를 대폭 축소한다. 그 후 전간기 동안 1922년 리비아 독립군과 충돌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여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이탈리아는 여전히 에티오피아 지역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마침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왕국군은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의 실수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대규모 부대와 많은 수의 장비를 에리트레아와 소말린란드 지역에 배치한다.

이탈리아 동아프리카 부대는 소말리아 점령을 목표로 모가디슈와 소말리아 해안을 따라서 군병력을 이동, 배치하였다. 1935년 이탈리아 왕국의 군사적 행동에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전쟁을 개시하였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발발, 10월에 말레브 강을 건너 에티오피아 제국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 진입하면서 승리하게 된다.[8]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은 국민파 반란군에게 많은 수의 무기와 병력을 파견하면서 내전 기간 동안 자신들의 무기에 대해서 실전 테스트를 한다. 사실 말이 좋아 실전 테스트지, 이탈리아에서 보낸 지원병 군단(Corpo Trupo Volontarie, CTV)은 5만 명이나 되는 완편 군단급 규모에, 전투기도 700대 씩이나 동원했고, 예산적인 측면에서도 3년 내내 이탈리아 일년 예산의 14% ~ 20% 정도의 거대한 예산을 소모하면서, 이탈리아군의 신무기 개발, 편제 재편 등의 각종 군 현대화 계획을 작살내었다.

그러면서도 마드리드 포위전의 핵심 거점 중 하나였던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같은 이탈리아인들로 구성된 제 11 국제 여단에게 패배하는 등의 졸전을 거듭한 결과, 원래 목적이었던 체제 선전 및 스페인 내 이탈리아의 영향력 강화에 실패하고, 후일 벌어질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약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는 콘도르 여단을 제외하면 대대적인 전투 병력보다는 소수의 군사 고문, 기술자 파견에 주력하면서도 존재감도 부각 시키고, 스페인 내 영향력도 착실히 늘려가던 나치 독일과 대비되어, 프랑코 휘하 스페인 국민군 진영 병사들에게 조롱당하고, 심지어 같은 동맹국이었음에도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 같은 작자들은 본인들 특기인 인종 품평을 할 때마다 가난해도 상무정신이 있는 스페인인들에 비해 말이 좋아 열강이지 정신은 썩어 빠진 이탈리아인[9][10]이란 식으로 비웃기까지 했다.

1939년 4월 이탈리아군은 그리스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알바니아 왕국 침공하여 점령한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왕국 수뇌부는 자국의 전쟁 역량을 분석했는데 스페인 내전에도 참여한 군수장관 카를로 파바그로사(Carlo Favagrossa)는 적어도 1942년이 되어서야 대규모 작전이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무솔리니도 군수장관의 판단을 수용하여, 독일과 강철 조약을 맺고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준비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불가침을 선언했다. 에티오피아와 스페인에서의 전쟁으로 군의 현대화가 완료되지 못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판단과는 달리 전쟁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이탈리아도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75개 육군사단을 편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사단 편성도 실속 없이 사단 숫자만 늘린 거나 다름없어서 뻥튀기 수준이었다.[11][12] 다른 심각한 문제점들도 속속 드러났다. 기갑 장비들은 탱켓이나 경전차가 주류였고 트럭, 기관총, 군복은 품질 불량이었고 장비 수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1차대전 이후 해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인수한 야포와 중포를 2대전 발발 이후에도 대규모로 썼어야 했을 지경.[13]

게다가 지역 정보 수집도 제대로 되지 않아, 작전에 들어갈 때마다 작전 지역 현지인에게 의존하는 등의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6.5. 제2차 세계 대전

6.5.1. 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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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산맥을 오르는 이탈리아 알피니 사단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대전이 발발한 후 한동안 중립적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영국에 연합국으로 참전할 의사가 있음을 타진한 적도 있는데, 이 때 요구한 조건이 당시 영국이 감당하기엔 심각하게 무리였고,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성사되지 않았다.[14] 그리고 전세가 독일 쪽으로 기울어지자 독일의 편을 들어 참전한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서부 알프스에 전선을 형성하여 1940년 6월 10일부터 1940년 6월 25일까지 총 15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르네 올리(René Olry) 장군이 이끄는 알프스군(Armée des Alpes) 병력과 충돌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예전부터 알프스 요새 같은 방어시설을 갖춰둔 상태였으며, 방어시설을 우회하여 공세를 펼치기에는 알프스의 지형과 교통망이 영 좋지 못했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자신들보다 훨씬 수적으로 열세인 알프스군에 역으로 반격당해 밀려버린 끝에, 오히려 이탈리아의 일부 산골 마을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되는 추태를 연출하고야 만다. 이때 프랑스군 총사령부는 진지하게 이탈리아로 병력을 보내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검토하였으나 독일의 파리 점령으로 무산되었다.

그래도 독일의 낫질 작전으로 인해 프랑스가 항복함으로서 이탈리아 왕국은 통일 당시 나폴레옹 3세에게 할양했던 니차, 사보이아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성과를 얻기는 했지만, 15일이라는 전투 기간 동안 이탈리아 왕국군은 631명 전사, 616명 실종, 2,631명 부상 등의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얻은 이익에 비해 손실이 너무 컸고, 그 이익마저도 자국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님에도, 무솔리니는 알프스 전선에서의 희생을 두고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위한 희생으로는 너무 적다"(...)는 말을 남겼다.

6.5.2. 아프리카

6.5.2.1. 동아프리카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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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 전선에서 희생된 이탈리아군을 기리는 프로파간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 동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영국 식민지에는 현지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식민지 치안군 이외에는 마땅한 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동아프리카의 이탈리아군은 37만명의 병력이 있었고 325대의 각종 항공기, 중기관총 3,300문, 경기관총 5,300문, 야포 800문, M11/39 전차 24대, L3 탱케트 39대, 126대의 장갑차에 달하는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치하고 있던 영국군의 전력은 8만 6천명을 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충분히 해볼만한 싸움이었다. #

이에 베니토 무솔리니는 영국의 식민지를 집어삼킬 요랑으로 이집트, 수단, 케냐 지방에 걸친 전면공세를 명령하였고, 영국령 소말릴란드에 주둔하던 소규모 식민지 치안군은 이탈리아군의 공세를 버텨내지 못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군은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영국군은 해군을 동원, 동아프리카 해안을 포위하는 것을 시작으로 빠른 속도로 수단, 케냐 방면에서 공세를 펼쳤고, 앰바 알라지 전투에서의 패배와 곤다르 전투에서의 저항을 끝으로 1941년 11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수비대는 영국군에게 항복했고 이탈리아는 동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모두 상실하고 만다. 졸렬한 지휘로 수십만명의 식민지병들과 2개 사단에 달하는 이탈리아군을 상실한 이탈리아 동아프리카군의 사령관 아오스타 공작 역시 포로가 된다.
6.5.2.2. 북아프리카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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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이탈리아군의 세모벤테 75/18 자주포와 지휘차량에 앉아 있는 롬멜
1940년 8월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의 패배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무솔리니는 이집트로의 전진을 명령한다. 하지만 군 지휘부는 보급상에게 문제를 거론하여 작전 수행을 거부했지만 무솔리니는 이집트 정복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리비아에 파견된 25만에 군대를 동원하여 이집트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려하였던대로 보급선이 길어지자 130km 지점에서 더는 전진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영국 본토 상황이 나아지면서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였고 이탈리아는 10주만에 800km이나 전선이 밀려버렸다. 반격 직전 전력 차이는 이탈리아군 10개 사단과 2개 기갑여단 15만명 대 영국군 2개 사단 3만 6천명에 달했는데도 이탈리아군은 패배했다. 바르디아 요새와 토브룩 요새 등 중요한 군사적 거점을 잃어버렸고 많은 수의 장비와 인력을 잃으면서 이탈리아군의 사기는 바닥인 상태였다. 참혹한 패배의 원인으로는 보급 문제 말고도 영국군이 규모는 훨씬 적어도 이탈리아군의 화력으로 관통할 수 없던 마틸다 전차 따위의 우수한 장비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기계화도 훨씬 잘 되어있었단 점이 지적된다.

이런 이탈리아군의 상태를 본 히틀러는 북아프리카에 독일군 파병을 결정했고 에르빈 롬멜 중장을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군을 돕게 하였다. 롬멜의 지휘 아래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선전하며 배틀액스 작전은 성공하였고 영국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하면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을 목표로 전진하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의 패배로 더는 전진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미군이 횃불 작전에 성공하면서 아프리카 군단은 위축되었고 튀니지 전투에서 저항하지만 탈출로가 없어서 항복하게 된다.

6.5.3. 발칸 반도

6.5.3.1. 알바니아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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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를 , 알바니아를 토끼로 묘사하여 이탈리아 왕국의 침략 야욕을 풍자화한 소련의 신문
이탈리아 왕국군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인 알바니아를 무력 침공한 사건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1925년부터 광물 자원 채굴 조약을 시작으로 알바니아 왕국에 경제적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1931년 알바니아 왕국이 이탈리아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서 조약 갱신을 거부하였고 1934년 유고슬라비아 왕국 그리스 왕국과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이탈리아의 영향력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1939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면서 이탈리아 또한 알바니아를 합병할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합병이 불필요하다고 반대하였으나 무솔리니는 왕의 의견을 무시하고 알바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알바니아는 이를 거절한다. 이탈리아군은 22,000명의 군을 동원하여 알바니아에 상륙한다. 알바니아군은 14,500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탈리아 장교의 명령을 받는 상태였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대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에 항복을 받아내고 알바니아의 왕 조구 1세는 해외로 달아났다.

이후 이탈리아는 이탈리아의 왕이 알바니아의 왕을 겸임하는 동군연합으로 흡수했다. 몇몇 탈영한 알바니아군과 알바니아의 공산주의자들은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이탈리아군에 대항하였다.
6.5.3.2. 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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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내부로 진군하는 이탈리아 알피니 산악병

폴란드에서 추축군의 승리에 고무된 무솔리니는 히틀러 정권에게 이탈리아군의 유고슬라비아 왕국 침공을 제안했다. 1차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전신인 세르비아가 1년 이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고전시킨 사례도 있고 히틀러 본인도 유고슬라비아를 추축국으로 끌어들이는데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는지라 나치 독일은 이를 거절한다. 대신 독일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서 독이 양국이 공동으로 영국군을 몰아내자고 건의했다. 히틀러의 비협조에 불만이 폭발한 무솔리니는 유고슬라비아 침공은 포기하되 대신 자신의 위상은 위상대로 끌어올릴 방법을 찾는다.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뛰어넘겠다는 야심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독일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그리스 병합을 계획하게 된다. 1940년 10월 이탈리아군은 알바니아를 교두보로 하여 그리스 침공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하면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고 메탁사스 방어선으로 대표되는 방어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그리스의 험준한 산악지형과 그리스군의 견고한 방어전으로 인해서 그리스 내부로 들어가지도 못했고, 역으로 알바니아까지 밀려난다. 그 이후 서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1941년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그리스에 개입할것을 요청하였고, 독일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마침 영국이 그리스를 지원하면서 독일의 침공 명분도 생겼다.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영국군과 연합한 그리스군을 패배시켰고, 결국 그리스 전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 이후 그리스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연합군이 그리스에 상륙하지만, 그리스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바탕으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계속 저항한 탓에 1945년이 돼서야 비로소 그리스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6.5.3.3. 유고슬라비아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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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에서 도로 검문을 하는 이탈리아군
이탈리아는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등을 전간기부터 후원하고 있고 아드리아 해 영토를 두고 유고슬라비아와 갈등을 빚는 등 2차대전 전부터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무솔리니 정권의 독자적인 침공은 히틀러의 뜨뜻미지근한 비협조 때문에 무산된다. 무솔리니는 그리스 침공으로 이를 대신하지만 이탈리아는 계속 아드리아 해와 발칸으로 팽창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던 와중 영국과 독일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유고슬라비아에서 친연합 쿠데타가 일어나자[15] 이탈리아군은 독일군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감행하고 짧은 시간 동안 전쟁을 수행한다. 그 이후 이탈리아군은 30개 사단을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 배치하여 치안유지를 담당한다. 하지만 30개 사단이나 되는 막대한 병력을 유고슬라비아에 주둔시킨 것은 이탈리아에게 도움이 안 되는 전력 낭비였고[16][17]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들은 이탈리아군에 계속해서 피해를 입혔고 지속적인 공격으로 이탈리아군은 많이 와해된 상태였다. 결국 1943년 네레트바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주둔 이탈리아군은 전면 붕괴되어 유고슬라비아에서 밀려나게 된다.

6.5.4. 동부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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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시베리아보병연대에 돌격을 감행하는 사보이아 기병연대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이탈리아군에 참여를 요청한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군 지휘부는 이탈리아는 현재 많은 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중이며 러시아 원정이 이탈리아의 산업력에 많은 부담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지만, 무솔리니는 지휘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원정군의 편성을 명령한다.

신속하게 3개의 사단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 군단 CSIR(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이 편성되었다. 동부 전선에 1941년 7월 중순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독일 육군의 제1기갑사단과 함께 활동하였고 두 개의 다른 이탈리아 원정부대는 이탈리아 제8군 ARMIR(Armata Italiana in Russia)로 재편성 후 1942년 4월에 다시 참가했다. 강 지역에서 헝가리군 및 루마니아 제 3군과 합류해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전진하였고, 이윽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자 독일 지휘부는 이탈리아군을 루마니아군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북부에 배치해 돈 강 방어선을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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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공세 이후 후퇴하는 이탈리아 원정군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Operation Uranus)이 시작되면서 독일 제 6군은 포위되고 루마니아 왕국군이 분쇄되어 버리자 이탈리아 원정군은 독일군에 퇴각을 요청하였지만, 독일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1942년 12월 11일 이탈리아가 예상했던 대로 이탈리아군을 소멸시키기 위한 소(小) 토성 작전이 시작된다.

이탈리아군은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서 처절하게 저항하였지만 기갑전력은 경전차 자주포 그리고 대전차무기는 소구경 대전차포 산악포가 전부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리아군이 전멸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생각되었다.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독일군도 지원물자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몇 정의 노획한 폴란드제 Wz.35 대전차 소총을 줄 뿐이었다.

1943년 1월 14일 이탈리아군의 실질적 전력인 이탈리아 알피니 산악 군단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산악병 군단은 정예 산악사단이였지만 청색 작전에서 그들이 싸우게 된 곳은 산악이 아닌 평원이었고(...)[18] 무기 또한 빠르게 분해 조립이 가능한 65mm 산악포가 전부였고 1월 말까지 저항했지만 전멸하게 된다. 여기서 놀라운 건 알피니 사단이 추축군 사단 중 가장 마지막까지 버틴 사단이였다는 것이다. 평소 이탈리아군의 이미지가 어땠는지와 비교하면 최후까지 대단한 투혼과 전투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후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마저 소련군에게 항복하였고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제6군 전체와 제4기갑군의 대부분, 루마니아군 5개 사단, 이탈리아군 제8군이 괴멸당했고 이탈리아군은 87,795명(장교 3,168명, 부사관 및 사병 84,627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고 34,474명의 부상자가 발생해 전체 235,000명의 병력 중 114,520명을 잃었다. 대부분의 차량과 장비 역시 상실하였고 함께 원정 온 공군 전력 또한 궤멸되었다.

6.5.5. 이탈리아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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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독일 공수부대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이 개시된 지 한 달만에 연합군은 시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고, 곧 이탈리아 본토로 진군한다. 그 이후 이탈리아 정계에서 무솔리니 체제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 이탈리아 원로원 투표에 의해서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여 구금되고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사실상 항복 서명을 하게 된다.

하지만 휴전 발표 이후 히틀러는 독일군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기로 결정하였고, 휴전도 개전만큼이나 무계획적으로 진행되었기에 휴전은 발표되었지만 상부로부터 아무런 명령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군은 부대에 그냥 대기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빠르게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북부의 이탈리아군을 장악한다. 독일군은 독일에 협력하지 않는 이탈리아 군인들을 사살했고, 해산되거나 탈영한 몇몇 이탈리아 군인은 파시스트 정권에 반대하는 민중들과 결합하여 독일군에 저항하는 파르티지아노가 되기도 하였다.[19]

대전 도중 반체제 저항 세력이 지하에 꽁꽁 숨어있는 소수의 전쟁 이전 정치인, 지식인에 국한되었던 독일, 일본과 달리 이탈리아는 이전까지 중도, 좌익 세력이 정계를 주름잡고 있었고, 이는 무솔리니 집권 이후에도 바뀌지 않아 국내 반체제 세력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막대했다. 그리고 무솔리니를 지지하던 이들도 끝나지 않는 긴 전쟁에서 이탈리아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자 하나둘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한다.

이는 1943년에 벌어진 봄의 밀라노, 볼로냐, 토리노 등 북부 공업 도시의 대 파업을 기점으로 연합군의 진주에 따라 이탈리아 국내 저항세력이 본격적으로 거리로 쏟아 나오기 시작했고, 이 와중 항복한 이탈리아 왕국군 중 많은 수가 해방된 남부의 나폴리에 기반한 연합군 소속의 정부군에 참여하거나, 연합군이 돌파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치 독일과 괴뢰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정권 아래 놓였던 북부에서는 빨치산에 가담했다. 1944년 가을쯤 되면 연합군 통제 아래 들어간 남부 이탈리아 왕국군과는 별개로 파시스트 점령 아래 지하 활동하는 빨치산만 해도 3만명 가량으로 규모가 크게 늘었다.

이후 북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에 있는 산장에 연금되어 있던 무솔리니를 오토 스코르체니가 이끄는 독일군 특수부대가 구출하였고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의 살로에 무솔리니를 지도자로 세운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통칭 살로 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만든다. 한편 남부의 바돌리오 정부는 연합군과 함께 싸울 병력을 모집하였고 5사단을 신설하여 연합군과 함께 밀라노와 베니스를 향해서 전진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은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은데다 독일군이 적극적으로 방어전을 펼쳐 진격이 어려웠고 이탈리아 끝까지 올라가봤자 알프스 산맥 때문에 독일 본토로는 갈 수 없어 전략적 중요성도 높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1944년 서부전선이 개막되자 모두의 관심에서 잊혀졌다. 이후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 미군 양측의 전선은 교착되고, 대신 후방의 빨치산 활동이 커지면서 이탈리아 역사학자들은 이탈리아 내전이라 부르게 된 44년 봄~45년까지 여러 빨치산 공화국 성립과 진압, 대민 학살, 파업과 도시-산촌 유격전이 중심이 된 게릴라전의 비중이 커졌다. 1945년 초 빨치산에 의해 무솔리니가 잡혀 처형된 후에 살로 공화국도 무너지고, 동시에 여러 전쟁 전 반파시스트 정파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 해방 위원회(Comitate di Liberazione Nazionale) 산하 이탈리아 빨치산들이 북부 도시들에 입성하며, 달마티아 일대엔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이 진주하면서 이탈리아의 전쟁은 끝나게 된다.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왕립 육군은 161,729명이 항복했고 73,277명이 사망하였고 12,000여 명이 실종되었으며 60,000여 명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7. 왕립 해군(Regia Marina)

자세한 것은 이탈리아 왕립 해군 문서로.
1941년, 이탈리아 왕국 해군의 모습. 영상 뒷부분에는 이에 맞서는 영국 지중해 함대의 모습이 담겼다. 출처는 British Pathé.
1943년, 연합군에 항복하는 이탈리아 왕국 함대.
Decima Flottiglia MAS - 유명한 유인어뢰 마이알레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두척을 대파시킨 해군 휘하 특수 부대. 41년부터 43년말까지 다양한 작전을 펼쳤다.

8. 왕립 공군(Regia Aeronautica)

9. 현대 이탈리아군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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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공화국군의 M60 패튼 전차
1945년 11월 14일 연합군의 파리 조약 이후 이탈리아는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고 새로운 이탈리아 육군을 설립하기로 하였고 기존에 존재하던 이탈리아 왕국군(남부 이탈리아군)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군(북부 이탈리아군)을 해산 시킨 후 재통합하였으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아들이자 이탈리아의 차기 지도자인 움베르토 2세의 결정으로 이탈리아군으로 이름을 변경한다. 이탈리아군은 지역에 따라서 각각 4개의 구역으로 분할되었고 총 9만 명의 군인이 모집되었고 국토 안보를 위해서 3개의 사단이 신설된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여전히 입헌군주제 상태였고 움베르토 2세 또한 이탈리아를 입헌군주제 국가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46년 6월 2일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입헌군주정 유지 국민투표에서 46%의 지지밖에 얻지 못하여 움베르토 2세와 사보이아 가문은 이탈리아를 떠나게 되었고 이탈리아 왕국은 공화국이 되었으며 1948년 1월 1일 새 헌법이 제정되었고 새 헌법에 따라 엔리코 데 니콜라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이 탄생한다. 공화국이 된 이탈리아는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면서 이탈리아군은 다시 유럽 국방에 한축을 담당하게 된다.


[1] 이탈리아 외에도 선도적으로 공수부대를 발전시킨 나라는 소련이다. [2]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중심지는 사르데냐가 아니라 수도 토리노가 있는 피에몬테였다. 그래서 당대에는 사르데냐군이 아닌 피에몬테군으로 불렸다. [3] 나폴레옹 3세가 빌라프랑카 조약으로 통수치고 빠져 나갔기 때문에 니차의 즉각적인 할양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1860년 토리노 조약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토스카나 대공국,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교황령 볼로냐 일대를 병합하는 것을 프랑스가 승인하는 조건으로 니차와 사보이아는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4] 하지만 무력으로 점령하였기 때문에 시칠리아 사람들이 애국심을 가지기는 힘들었고 현재도 남이탈리아와 북이탈리아의 지역감정으로 남아있다. [5] 에티오피아군은 인식과는 다르게 무기의 질에서도 유럽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다. [6] 무솔리니 축출 후, 국왕에 의해 임시 총리에 임명된 그 사람이 맞다. [7]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참전을 제4차 이탈리아 독립전쟁(Quarta guerra d'indipendenza italiana)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 1차대전기 당시 이탈리아 지식인, 언론에서 종종 사용한 표현이다. 제3자의 관점에서 정당성은 둘째치고, 어쨋든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이 전쟁을 이탈리아 통일 이후로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여전히 '강점'하고 있던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해안 등 마지막 남은 '이탈리아 민족의 정당한 영토'의 '해방'을 통한 '이탈리아 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는 전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8] 하지만 에티오피아 전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강점 기간 내내 게릴라 전투가 계속되었으며, 1941년 초 영국군 주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로 진군하는 순간까지도 몇몇 지역은 여전히 하일레 셀라시에를 지지하는 토착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9] 예를 들어 스페인이 파견한 청색 사단은 그 히틀러로부터 '독일군과 동급'이라는 평을 들으며 찬사를 받았으며, 실제로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크라스니 전투에서 숫적으로 압도적인 소련군의 공세를 격파하기도 했다. 물론 청색 사단의 다수가 스페인 내전의 베테랑 출신의 자원병들로 구성되었음은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이탈리아의 러시아 원정군도 막상 활약만 보면 2차대전 내 이탈리아군 중 가장 활약한 대규모 전투부대라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10] 2차 대전 말기 참전하기 싫다고 땡깡부리는 스페인에 대한 침공을 단념한 이유 중 하나가 스페인인들이 게릴라전을 펼칠 것을 우려해서였다고 한다. 애초에 게릴라라는 말 자체가 스페인어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은 따지고 보면 국내외 정치적 환경이나 내부 정치경제적 환경 모두가 참전을 말리는 방향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참전을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1] 이탈리아 보병 사단 편제를 예로 들면 보병연대 2개, 포병연대 1개, 야포 36문, 대전차포 24문, 정원 14,600명 수준이고 동맹국 독일은 보병연대 3개, 포병연대 1개, 야포 72문, 대전차포 36문, 총원 18,500명으로 수적으로도 병력 차이가 나지만 야포나 대전차포 등 화포에 숫자도 더욱 적었기 때문에 전투력에 심한 차이가 났다. [12] 본래는 이탈리아군 1개 보병사단도 3개 보병연대에 1개 포병연대 편제로 이루어졌지만, 에티오피아 침공 등을 거치면서 국외 파병 시 병참 용이성 등을 이유로 2개 보병연대에 1개 포병연대 체제로 바꿨다. 이탈리아군 내부에서도 모험적이라고 평가되어 금새 검은셔츠단 2개 대대를 육군 사단 편제마다 추가해서 인원 수는 채운다. 검은셔츠단 사단의 연대 편제는 원래 2개 대대니 어찌보면 3각 편제로 돌아갔다고 볼 수는 있는 셈. 이런 식의 편제는 1차대전식 편제를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약소국 군대인 그리스군을 상대로도 단위 부대 전투력이 떨어지는 참사로 이어진다. [13] 7,970문의 각종 화포 중 30년대 이후에 생산된 신형은 246문에 불과했다. [14]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 전체를 현대화할 정도의 군수 물자였다. 당장 자신들도 군대가 얼마 없는 영국에게는 불가능한 요구인 셈. [15] 페타르 2세는 친연합 쿠데타를 일으키기는 했으나 추축국에서 탈퇴할 생각은 없었다. [16] 뒤에 서술하는 소련 파병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전선에 귀중한 전략적 자원들을 낭비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전력을 북아프리카와 그리스 방면에 투자하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탈리아가 파병을 한 이유는 무솔리니의 허영심에 의한 행동에서 나온 것도 있었지만 독일의 요구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탈리아는 독일에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독일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17] 히틀러 정권의 비시 프랑스 점령 때도 한줌의 영토에 눈이 멀어 전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던 북아프리카나 좀 더 미래의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될 수 있었던 귀중한 병력마저 추가로 파견했으니 무솔리니의 전략적 안목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알 수 있는 부분. [18] 원래 이들은 히틀러의 요구에 따라 캅카스 산맥에 보내질 예정이였으나 마약에 중독되기 시작한 히틀러가 변덕을 부려 캅카스를 온전히 독일의 것으로 만들고자 이들을 전혀 상관없는 러시아 평원에 보내게 된 것이다. [19] 같은 시기 일본군도 중국에 주둔해 있던 이탈리아군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하여 베이징, 톈진, 상하이 등지의 이탈리아 조계지를 접수하고 주둔 병력의 항복을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