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이손초 전투 Battles of the Isonzo Battaglie dell'Isonzo Isonzoschlacht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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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915년 6월 23일 ~ 1917년 8월 27일 | |||
장소 | |||
이손초강 (現 [[슬로베니아| ]][[틀:국기| ]][[틀:국기| ]] 북서부 소차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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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국 | 동맹국 | ||
교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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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아르만도 디아츠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제3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피에트로 프루고니 제2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세티미오 피아첸티니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루이지 카펠로 |
]][[틀:깃발| ]][[틀:깃발| ]]루이지 카도르나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
]][[틀:깃발|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제5군 사령관|
전력 | 제2군, 제3군 | 제5군 | |
총 누적 피해규모[1] | 645,000명 | 450,000명 |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군의 5차례 승리 3차례 무승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3차례 승리 및 카포레토 전투로 동맹군의 최종적인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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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날 슬로베니아어로 소차강, 당시에는 이손초강으로 불리던 구역에서 이탈리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싸우면서 총 12차례에 걸쳐 양측 모두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격전이다. 대부분의 전투 양상이 이손초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대로 이탈리아 왕국군이 공세를 가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기본적으로 이 지역은 말 그대로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선 특유의 극히 험악한 산악지역 그 자체였다. 병사들은 매일마다 산악지대를 타고 다니며 진지공사를 하고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전투지역 산악지대의 암석질 때문에 포탄 낙하 시 돌 파편들이 튀면서 평야지대보다도 훨씬 살상력이 치명적이었다. 또 온갖 험한 고산지대와 만년설들로 인하여 수많은 병사들이 산사태, 눈사태, 낙상 등으로 사망했다. 양군 모두에게 지옥같은 환경이었겠지만 어쨌건 험한 지형은 보통 방어자에게 매우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거의 매번 공세마다 고지에 방어선을 형성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정면돌파를 시도해야만 했다. 정석적으로 이러한 요새나 험지 공략에서는 포병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이탈리아 왕국군이 병력은 더 많았지만 제대로 된 중포 수량은 오히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보다 열세인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루이지 카도르나를 필두로 한 이탈리아 왕국군 수뇌부의 한심한 지휘도 한몫했는데, 카도르나는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 희대의 똥별로서 이손초 전역에서 오로지 정면돌격만을 고집하는 인간이었다. 기본적으로 리더십 자체가 잘못된 사람이었는데 휘하 장병들과의 제대로 된 소통 자체가 없이 오로지 채찍으로만 일관하는 사람으로서 아군의 사기나 장병복지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인간성 자체가 이러니 정치력도 좋지 못해서 정부와의 관계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어떻게 고위 장교까지 갔는지 신기할 지경인데[2][3] 이 인간은 카포레토 전투의 엄청난 대패 이후에야 이손초 전역의 지휘에서 해임되었다. 그래놓고 "나는 쿠스토차[4]와 아드와에서 패배한 군대를 이끌었을 뿐이다", "이게 다 아군이 파업을 벌여서 일어난 대참사"라는 어처구니없는 변명들을 시전했다. 이런 남 탓은 휘하 장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전과가 계속 지지부진하자 카포레토 전투까지 휘하 장성을 무려 누적 217명이나 경질해댔으며 단지 낙오했을뿐인 아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즉결처형을 남발했다.[5] 이와 대조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전역 지휘관이던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병들 사이에서 "우리의 스베토" 라고 불릴 정도로 인품이 좋아서 훨씬 불리한 환경에서도 사기 저하를 크게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들 덕에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이 항상 전력상 우위를 쥐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번 더 많은 손실을 입으면서 결정적인 승리에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보다 더 큰 국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전에 세르비아 침공에서 동맹국 독일 속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한심한 전투력을 보여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쟁 수행역량은 이손초 전선에서의 엄청난 격전으로 거의 바닥을 치게 되었고 결국 이탈리아가 마지막으로 승리하는 듯 하였으나 막판에 독일 제국군의 전면 개입으로 다시 판세가 뒤집혔다.
어찌됐건 이탈리아 왕국군의 삽질로 점철된 전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간의 엄청난 소모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쟁 수행능력에 상당히 치명타를 안겨준 전투이다. 이탈리아군이 엄청난 사상자를 감수해야 했지만 방자 측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도 거의 대등한 수준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대부분의 전투에서 극심한 손실을 본 건 매한가지다. 험준한 알프스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12차례나 공세를 시도한 이탈리아군의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 어느정도 성과를 거둔 부분.
2. 배경
1914년 말, 이탈리아 왕국은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삼국 협상에게도 열렬한 구애를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원래대로라면 같은 동맹국인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편에 서서 참전해야 했지만, 1914년 8월 3일 이탈리아 정부는 신중하게 중립을 선언하여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육군과 해군은 유럽의 중립국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했으며, 동맹국과 협상국 양측 모두의 옆구리에 위치한 지리적 입지 덕분에 이탈리아는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는 지중해의 바닷길을 통제할 수 있는 해군력을 갖고 있었으며, 만약 오스트리아-이탈리아 해군이 연합해서 시칠리아 해협을 막아설 경우 협상국의 수에즈 운하 사용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협상국은 적극적인 정치적,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이탈리아 또한 상황을 지켜보던 중 협상국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에 1915년 4월 이탈리아가 런던 조약에 서명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이미 프랑스와 비밀리에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영국, 프랑스, 벨기에 왕국, 러시아 제국의 편에 서서 오스트리아와 싸우게 된 이탈리아는 1915년 5월 24일 오스트리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날려 전쟁에 참여한다.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본토와 옛 오스트리아 제국령이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경계를 양국의 국경으로 정하면서 정해지게 되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국경지대의 산맥 일대를 자국 영토로 확보하여 이탈리아의 침공에 완충지대를 확보는 동시에 또 마음만 먹으면 산꼭대기에서 북이탈리아의 평원지대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이탈리아 왕국군은 오스트리아의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든 간에 공세를 벌이려면 험준한 산악지대를 기어 올라가야 했으며, 국경선의 형태 역시 이탈리아 왕국군이 직면한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국경선은 거대한 S자 형태로, 트렌티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의 거대한 트렌토 돌출부가 이탈리아로 깊숙히 파고 들어오고, 프리울리 지역에서 이탈리아의 우디네 돌출부가 오스트리아 영토로 뻗쳐 있는 형상이었다. 두 돌출부 중 잠재적으로 이탈리아에 더 위험이 되는 것은 트렌티노 돌출부였다. 그러나 이곳은 도로와 철도 사정이 열악해서 제대로 된 군사작전을 벌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지휘관들도 이 지역에서 어떻게 작전을 펼쳐야 할지를 놓고 머리를 싸매야 했다.
스위스 국경지대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400마일 길이로 형성된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선은 3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트렌티노와 알프스 산맥, 그리소 이손초강 전선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손초강변을 따라 형성된 약 30마일 길이의 전선은 그래도 좀 덜 험한 언덕지대로 되어 있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거의 전 전선이 험한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에게 빼앗긴 베네치아 지방을 되찾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오스트리아와 언젠가는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이탈리아는 세 전선을 모두 요새화하면서 북부 평야지대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에 처한 구역으로 신속하게 병력을 수송할 수 있도록 후방의 전략 도로 및 철도망을 정비했다. 오스트리아 역시 국경지대에 항구적인 방어진지를 건설하면서 후방 지역의 교통망을 정비했다. 양측 모두 고정방어시설을 구축함에 따라 향후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선의 전투는 주로 정적인 진지전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3. 1915년
3.1. 1차 이손초 전투
1차 이손초 전투 | ||
날짜 | ||
1915년 6월 23일-1915년 7월 7일 | ||
장소 | ||
현 슬로베니아 북서부 소차강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지휘관 | 루이지 카도르나 |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결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술적 승리. 이탈리아 왕국군의 단기결전 시도 좌절. | ||
병력 | 18개 사단 225,000명 | 8개 사단 115,000명 |
피해규모 | 14,917명 | 10,400명 |
이탈리아 왕국군 참모총장 카도르나 대장은 이손초강 전선에서 트리에스테 제국자유도시를 목표로 공세를 펼쳐 빈으로 향하는 통로를 사정거리 안에 두면서 가능하면 세르비아 왕국군과 러시아 제국군과 연결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의 걸림돌이 되는 요소가 있었으니 바로 트렌티노 전선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트렌티노의 이탈리아 왕국군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돌파할 경우, 이손초강 전선에서 공세를 펼치는 카도르나의 군은 고립될 것이 분명했다. 국경지대를 따라 평행으로 달리면서 여러 계곡으로 지선이 건설된 이탈리아의 철도망 형태도 이런 위험을 더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도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의 철도망 역시 국경지대를 따라 평행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이탈리아와는 달리 별다른 지선이 건설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선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데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트렌티노에서 공세에 나섰을 때 공격 기세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개전 직후 이탈리아 왕국군은 국경지대에서 거의 난공불락에 가까운 방어진지를 지키고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20개 사단을 공격하기 위해 35개 사단을 동원했다. 전투가 벌어지자 양측 병사들은 가혹한 산악전 환경과 마주쳐야 했다. 카도르나는 이손초강 전선에서 공격을 계속하는 한편, 트렌티노 전선에서는 공격적인 방어를 펼치면서 카르닉 알프스의 고산지대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개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의 전쟁 준비 상태는 엉망이었다. 대부분의 군수품은 리비아의 식민지 전쟁에서 소모한 상태였고, 좌익 정치세력의 압박으로 소모한 물자들의 보충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포병, 기관총, 야전 축성을 위한 자재 역시 크게 부족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큰 활약을 보인 항공대도 개전 당시에는 벌거숭이 갓난아기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여러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왕국군은 1915년 5월 23일, 전 전선에서 공세에 나서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공세 초기, 이탈리아 왕국군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이손초강 방면에서 오스트리아 영토 내의 여러 거점들을 점령했다. 이후 이 거점들을 중심으로 양측의 전선이 안정되면서 계속해서 벌어진 소모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6월 23일, 여러 차례 벌어질 소모전 가운데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병력은 절반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이탈리아 왕국군의 한심한 지휘와 훨씬 유리한 위치에 포진한 덕분에 공격을 방어해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이탈리아 왕국군의 무식한 정면공격을 비웃었으나 이것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단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3.2. 2차 이손초 전투
2차 이손초 전투 | ||
날짜 | ||
1915년 7월 18일-1915년 8월 3일 | ||
장소 | ||
현 슬로베니아 북서부 소차강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지휘관 | 루이지 카도르나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군의 전술적 승리. | ||
병력 | 250,000명 | 78,000명 |
피해규모 | 41,800명 | 46,600명 |
1차 이손초 전투의 판박이. 포병 전력을 보충하기는 하였으나 역시 산악지대 참호와 철조망 방어선을 돌파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였고, 루이지 카도르나는 역시나 정면공격만을 고집하였기에 별 다를바는 없었다. 다만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왕국군의 전력이 2배 이상[6] 달하였기에 바토그니차 산과 카푸치오 숲을 점령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갈아넣은 인력에 비하면 큰 성과라 보기엔 힘들었다.
3.3. 3차 이손초 전투
3차 이손초 전투 | ||
날짜 | ||
1915년 10월 18일-1915년 11월 3일 | ||
장소 | ||
현 슬로베니아 북서부 소차강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지휘관 | 루이지 카도르나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결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술적 승리 | ||
병력 | 338개 대대 | 137개 대대 |
피해규모 | 66,998명 | 41,847명 |
카도르나는 이전 두 차례의 공세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포병전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그러나 전력의 집중보다는 전 전선에서의 공세 실시 + 여전한 방어선 정면돌격을 고집하였다. 반면 방어측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필요한 경우 급박한 전면에만 화력을 집중하는 것이 가능하였기에 절반 이하의 병력으로도 효율적인 방어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덕분에 산악에서 큰 혈전이 벌어졌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이탈리아 왕국군의 공세를 모조리 저지했다.
3.4. 4차 이손초 전투
4차 이손초 전투 | ||
날짜 | ||
1915년 11월 10일-1915년 12월 2일 | ||
장소 | ||
현 슬로베니아 북서부 소차강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지휘관 | 루이지 카도르나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결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술적 승리 | ||
병력 | 28개 사단 | 10개 사단 |
피해규모 | 49,500명 | 32,100명 |
3차 이손초 전투 종료 후 단 일주일만에 실시된 공격. 카도르나는 전략적 요충지인 고리치아를 점령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초기에 188고지를 점령하며 공세가 잘 진행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고리치아 마을은 강력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교두보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마을을 둘러싼 여러 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공격해오던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무시무시한 화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왕국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방어진지에 병력을 연거푸 투입하면서 공격을 퍼부었고, 그 과정에서 양측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이런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왕국군은 난공불락의 방어진지에서 버티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인내심이 부족한 카도르나는 그때까지 27명의 장군들을 해임한 상태였으며, 이후 수개월에 걸쳐 더 많은 장군들을 해임시켰다. 이손초 전선에서 벌어진 최초 4차례의 공격에서만 전사, 부상, 포로, 실종 등의 이유로 이탈리아 왕국군은 16만 1,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14만 7,000명을 잃었다. 엄청난 사상자 수로 인해 병력에 구멍이 생긴 이탈리아 왕국군은 더 많은 예비역들을 현역으로 소집했다. 그중에 예비역이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도 이손초 전투에 참전하였다.[7]
이 공세는 1915년의 마지막 공세였으며 무작정 공격만을 명하던 루이지 카도르나의 똥같은 지휘에 감명받은 이탈리아 왕국 장병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카도르나는 말 안듣는 병사들이 적발될 경우 10분의 1형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4. 1916년
4.1. 5차 이손초 전투
5차 이손초 전투 | ||
날짜 | ||
1916년 3월 9일-1916년 3월 15일 | ||
장소 | ||
현 슬로베니아 북서부 소차강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지휘관 | 루이지 카도르나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결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술적 승리 | ||
병력 | 286개 대대 | 100개 대대 |
피해규모 | 1,882명 | 1,985명 |
겨울이 닥치면서 전투의 열기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까지 확산되면서 이탈리아 왕국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무렵 이탈리아 왕국군은 여전히 야포, 그중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방어진지를 부술 중포가 크게 부족했다. 이후 샹티이에서 열린 협상국 수뇌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이탈리아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야포와 중장비를 제공해주기로 합의했다.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참모총장 회첸도르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주력을 동부전선에 돌려주기를 원했다. 동부전선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맡기고 여기서 차출된 독일 제국군 사단들을 서부전선으로 투입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얻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콘라트는 콘라트대로 생각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트렌티노에서 결정적인 공세를 가해 이탈리아의 평야지대를 빠르게 가로질러 이탈리아 북부의 중요 도시들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콘라트는 결정적인 공세 장소로 아시아고 고원 지역 일대를 선정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이와 같은 공세 계획을 알게 된 독일 제국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 대장은 크게 놀랐다. 당시 독일 제국군은 프랑스의 베르됭 요새를 공략 중이었고, 강고한 프랑스군 요새를 공격하느라 1문의 중포라도 아쉬운 판이었다. 하지만 콘라트는 자신의 공세를 위해 상당수의 중포대를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동부전선에서 싸우고 있던 여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사단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팔켄하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포병대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더라도[8] 겨우 18개 사단의 병력으로는 공세를 성공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전투는 베르됭 전투로 인한 연합군의 압박을 덜기 위한 목적도 겸하여 이루어졌다. 다만 전투기간 중의 지독한 안개로 인하여 양측 모두 엉뚱한 곳으로 포격을 가하는 등 여러모로 혼란한 전투였고 전투의 강도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4.2. 트렌티노 공세
자세한 내용은 트렌티노 공세 문서 참고하십시오.4.3. 6차 이손초 전투
6차 이손초 전투 | ||
날짜 | ||
1916년 8월 6일-1916년 8월 17일 | ||
장소 | ||
이탈리아 고리치아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지휘관 | 루이지 카도르나 |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군의 승리. 고리치아 지역 확보. | ||
병력 | 22개 사단 | 9개 사단 |
피해규모 | 51,000명 | 41,835명 |
이탈리아 왕국군의 공세로 시작되었다. 카도르나는 이번에는 꼭 승리해야 한다면서 숫적 우위를 앞세운 정면 돌격을 명령하여 병력을 갈아넣다시피 했는데 끈질기게 공격을 펼치던 이탈리아 왕국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이러한 물량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면서 결국 8월에는 괴르츠(고리치아)를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내줘야만 했다. 마침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방어선을 돌파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왕국군의 공격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카도르나는 15마일 길이의 전선에서 최대 4마일까지 전진하며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손초강 너머에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방어선을 형성하여 그 이상의 진격은 하지 못했다.
4.4. 7차 이손초 전투
7차 이손초 전투 | ||
날짜 | ||
1916년 9월 14일-1916년 9월 18일 | ||
장소 | ||
현 슬로베니아 북서부 소차강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지휘관 | 루이지 카도르나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군의 전술적 승리. | ||
병력 | 240개 대대 | 150개 대대 |
피해규모 | 약 2만명 | 약 2만명 |
이 전투는 루이지 카도르나가 아주 약간은 레벨업을 했는지, 모든 전선에 걸친 전면 공격이 아닌 노바 바스 지역을 향한 핀 포인트 공세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방어선 완파에는 실패하였으나 병력이 부족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이러한 지속적인 출혈은 갈수록 치명적이었다.
4.5. 8차 이손초 전투
8차 이손초 전투 | ||
날짜 | ||
1916년 10월 10일-1916년 10월 12일 | ||
장소 | ||
이탈리아 몬팔코네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지휘관 | 루이지 카도르나 |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군의 공세 실패. | ||
병력 | 20개 사단 | 14개 사단 |
피해규모 | 55,000명 | 38,000명 |
이탈리아 왕국군의 공세는 큰 손실과 함께 실패하였고, 방어선 돌파에 실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가인 안토니오 산텔리아가 전사하였다.
4.6. 9차 이손초 전투
9차 이손초 전투 | ||
날짜 | ||
1916년 11월 1일-1916년 11월 4일 | ||
장소 | ||
현 슬로베니아 북서부 소차강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지휘관 | 루이지 카도르나 |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군의 제한적 진격. | ||
병력 | 225개 대대 | 170개 대대 |
피해규모 | 39,000명 | 33,000명 |
현 슬로베니아 브르토이바 방면으로 가해진 이탈리아 왕국군의 공세. 역시 공세는 실패.
이전까지 있었던 이손초 전투와 별 다를바 없는 구도로 이루어졌지만 이 전투를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이탈리아 전선 유지력은 거의 한계에 달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공세를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더 큰 손실을 안기며 방어해냈지만, 아무리 손실이 많아도 주저없이 지속적으로 공격을 가해오는 근성의 이탈리아 왕국군을 상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서서히 한계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전투를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독일군의 지원을 적극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지휘계통은 서서히 독일 제국군의 통제하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 종료 후 12월 13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영 방면에서 대규모 눈사태가 발생하였는데, 무려 1만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였고, 역사에 기록된 가장 큰 순수 눈사태 인명피해로 기록되었다.
겨울이 닥치자 양측 모두 대규모 작전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 동안 이탈리아 왕국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소규모 습격과 정찰 이상의 활동은 벌이지 않았다.
1917년 1월 로마에서 열린 협상국 회의에서 카도르나는 영국과 프랑스가 8개 사단과 중포 300문을 지원해준다면 트리에스테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쳐부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동맹국의 전열에서 이탈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중포를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2~3개월간 대여하는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당시 그리스의 살로니카에 대한 동맹군의 압박이 커지면서 마케도니아 지역 역시 협상국의 지원을 시급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또 3월에 시작된 러시아 혁명 덕분에 러시아 전선에서 비교적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동부전선의 부대들을 이손초와 트렌티노 전선으로 돌릴 수 있었다. 이런 불리한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카도르나는 이손초강에서 10번째와 11번째 공격을 가했다.
5. 1917년
5.1. 10차 이손초 전투
10차 이손초 전투 | ||
날짜 | ||
1917년 5월 12일-1917년 6월 8일 | ||
장소 | ||
현 슬로베니아 북서부 소차강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지휘관 | 루이지 카도르나 |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군의 제한적 진격. | ||
병력 | 400,000명 | 200,000명 |
피해규모 | 150,000명 | 125,000명 |
이제까지 막대한 인력을 갈아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왕국군은 여전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이손초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거의 한계 직전까지 몰아붙이기는 하였으나 문제는 독일 제국군의 개입 정황이 이탈리아 군에게도 서서히 포착되고 있던 것.
이탈리아 왕국군은 독일 제국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해오기 전에 대규모 공세로 결정적 승리를 못박아 두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선 대부분에서 대규모 공세를 입안했다.
초기 공세는 성공적으로 돌아갔다. 동원된 전력부터가 역대 이손초 전투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거대하였기 때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비해 거의 2배의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가혹할 정도로 방어선에 꼬라박기식 공격만을 명하던 루이지 카도르나의 지휘에 이탈리아 왕국군의 사기 또한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던 탓에 트리에스테 방면 외의 공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이번에도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2배에 달하는 엄청난 전사자를 기록하였다.
5.2. 11차 이손초 전투
11차 이손초 전투 | ||
날짜 | ||
1917년 8월 18일-1917년 9월 12일 | ||
장소 | ||
현 슬로베니아 북서부 소차강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
지휘관 | 루이지 카도르나 |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군의 전술적 승리. | ||
병력 | 530,000명 | 180,000명 |
피해규모 | 158,000명 | 115,000명 |
이 전투는 독일 제국군의 전면개입인 카포레토 전투 이전의 마지막 이탈리아 왕국군의 공세였다.
역시 독일 제국군의 본격적 개입 이전에 끝장을 보려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대규모 공세 2.
8월 말, 이제 이탈리아 왕국군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사기는 붕괴되고 있었고, 슬라브계 병사들은 전쟁을 지속할 의욕 자체를 잃은 상태였다. 협상군은 중포대를 보내달라는 카도르나의 요청에 응하여 영국군의 6인치 포대를 카도르나 군에 배치했다. 팔켄하인의 뒤를 이어 독일 제국군 참모총장이 된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이탈리아 왕국군이 12번째 공세에 나설 경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붕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러던 와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저번 1916년에 일어난 브루실로프 공세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어 동부전선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 독일한테 동부 전선을 전부 맡아달라고 요청을 보냈고 이에 독일은 제안을 거부하는 대신 이탈리아 전선에 최초로 독일의 증원병을 보내기로 하면서 콘라트에게 대규모 지원 부대를 파견했다. 지원 부대에는 돌격대를 사용한 신전술을 훈련받은 독일 제국군 부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돌격대원들은 공격시 신속하게 전진하여 적의 완강한 저항 거점은 우회하고 후방 깊숙히 진출하여 적 사령부나 포대를 공격하도록 훈련받았다.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에는 에르빈 롬멜 소위도 배속되어 있었다.
초기 이탈리아의 북부 지역 공세는 크게 성공하여 약 10km를 전진하였으나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강력한 반격에 더 이상의 눈에 띄는 공세성과를 내는 것에는 실패하였다. 같은 고지를 서로 뺏고 뺏기는 처절한 전투 끝에 물량이 깡패라고 버티기 힘들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일부 지역에서 후퇴하는 것으로 전투가 종료되었다. 이탈리아 왕국군이 일부 지역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고 안 그래도 그동안의 소모로 인해 상태가 좋지 못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큰 손실과 부담을 안겼지만 독일 제국군이 오기 전에 이손초 전선을 완전히 붕괴시킨다는 전략적 목표는 실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이 입은 손실은 니벨 공세 당시의 프랑스군보다도 많았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손실 중에서도 포로가 매우 많았는데 그나마 사기는 그동안 높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또한 사기가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여담으로 이 전투는 양국의 군주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카를 1세가 모두 전선을 시찰한 전투였다.
카포레토 전투 이전의 마지막 이손초 전투이며, 1915년의 1차 이손초 전투부터 시작해서 이 시점까지 이손초 전선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의 총 누적 사상자는 645,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누적 사상자는 450,000명에 달했다.
5.3. 12차 이손초 전투
자세한 내용은 카포레토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이 전투에서 새로 편성된 오스트리아-독일 혼성 제14군은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완전 승리 직전까지 가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제14군 사령관이었던 오토 폰 벨로는 과거에 이미 숱한 승리를 거두었던 유능한 장군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군사정보부는 동맹군 공세의 시기와 장소를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었다. 동맹국이 공격에 나설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 전선을 지키고 있던 것은 카펠로 대장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제2군이었다. 그러나 지병에 시달리던 카펠로는 10월 20일 지휘관직에서 물러났다. 적의 공격을 눈앞에 두고 방어책임자가 물러났다는 것은 방어하는 쪽보다 공격하는 쪽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9]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10월 24일 새벽, 벨로가 카포레토 부근에서 공세를 시작하면서 더 분명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독일군의 참전과, 이전과 다른 대규모 독가스 공격은 이탈리아 왕국군에게는 엄청난 치명타였다. 결국 이탈리아 왕국군은 베네치아까지 후퇴하여 자칫 잘못하면 파국을 맞이할 뻔했지만 다행히 동맹국도 더 진격해서 전과확대를 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이탈리아 왕국군을 내쫓는 것에 만족하여 공격을 멈춘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단독으로 피아베강에 공격을 가했지만 이탈리아 왕국군도 재정비를 하여 결국 실패한다.
5.4. 제1차 그라파 전투
1차 그라파 전투 | ||
날짜 | ||
1917년 11월 13일-1917년 11월 26일 | ||
장소 | ||
현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그라파 산 | ||
교전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이탈리아 왕국 |
지휘관 | 오토 폰 벨로 (독일) |
마리오 니콜리스 디 로빌란트 아르만도 디아츠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군의 방어 성공 | ||
병력 | 9개 사단 | 5개 사단 |
피해규모 | 약 43,000명 | 약 21,000명 |
카포레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독일 연합군은 곧바로 이탈리아 왕국군의 그라파 산으로 진격한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방어에 성공해낸다.
[1]
카포레토 전투 제외.
[2]
아버지 라파엘레 카도르나(Raffaele Cadorna)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 당시 사르데냐 왕국군의 지휘관으로 맹활약했다. 영웅의 아들이라 나름 군 지위 승진때 우대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보여준 결과는
호부견자의 전형.
[3]
다만 이손초 전역에서 카도르나는
군수보급 방면에서는 의외로 괜찮은 능력을 보였다. 이런 점 때문에 평시에는 좋은 근무평정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4]
이탈리아 통일전쟁 당시 사르데냐-피에몬테 군 12만명이 오스트리아 제국군 8만에게 무참한 패배를 당한 전투. 숫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이탈리아 왕국군은 8천명 이상이 사상했고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5~6천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5]
그런데 골때리게도 무솔리니가 집권한 후인 1924년 카도르나는 공훈을 인정받아 원수 계급장을 달게 된다. 무솔리니 본인부터가 이손초 전투에서 개고생을 했었기에 카도르나가 좋아서 그랬다기 보다는 정치적 이유로 추측된다.
[6]
이탈리아 왕국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29개 대대에 대항해 260개 대대를 동원하여 공격에 나섰다.
[7]
무솔리니는 후일 자서전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역경 중 하나였다고 이 당시를 회고했다. 실제로도 수류탄에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참고로 그는 카포레토 전투 두 달쯤 전에 전역했다.
[8]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2,000문의 야포를 동원했고, 그 가운데 500문이 중포였던 데 반해 이탈리아 왕국군은 겨우 588문의 야포와 36문의 중포밖에 없었다.
[9]
이탈리아 왕국군도 공세를 계획했지만, 이 일로 공세를 연기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