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미하엘 작전 운터네멘 미하엘 Operation Michael Unternehmen Micha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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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의 독일군 춘계공세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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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18년 3월 21일 ~ 1918년 4월 5일 | |||
장소 | |||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 생캉탱과 아미앵 사이 지역 | |||
동맹국 | 협상국 | ||
교전국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프랑스 제3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캐나다 자치령| ]][[틀:국기| ]][[틀:국기| ]] [[호주| ]][[틀:국기| ]][[틀:국기| ]] [[뉴질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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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틀:깃발| | ]][[틀:깃발| ]][[에리히 루덴도르프| ]]
영국군: [[틀:깃발| 프랑스군: [[틀:깃발| ]][[틀:깃발| ]][[페르디낭 포슈| ]] |
]][[틀:깃발| ]][[더글러스 헤이그| ]]|
병력 | 약 750,000명 |
영국군: 약 430,000명 프랑스군: 약 180,000명 기타 연합군: 약 12,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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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 약 240,000명 |
영국군: 약 178,000명 프랑스군: 약 77,000명 미국: 77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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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독일 제국군의 전술적 돌파 성공, 전략적 실패 협상국의 전략적 성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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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 |||
독일 제국의 정예부대 손실 협상국의 백일 공세 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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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엘 공세(Operation Michael)은 1918년 봄,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독일 제국군이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감행한 대규모 공세 작전이다. 이 작전은 총 4개의 작전으로 구성된 독일군의 1918년 춘계공세를 구성하는 첫 번째이자 가장 큰 규모의 작전이었다. 작전명 "미하엘"은 독일의 수호천사 미카엘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각각의 암호명들은 미하엘(Michael), 게오르게테(Georgette), 블뤼허-요르크(Blücher-Yorck), 그나이제나우(Gneisenau)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프로이센 장군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독일군은 이 작전을 통해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의 연결을 끊어 내고, 영국군을 고립시켜 궁극적으로 협상국의 항복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비록 초기에는 성공적인 진격을 이어갔으나, 독일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이 작전에서 소모된 독일군 정예 부대의 손실은 이후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2. 배경
1917년 말,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고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음에 따라,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있던 약 50개 사단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반면 당시 서부전선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전해의 전투로 인해 피로와 소모가 누적된 상태였고,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독일 군부는 서부전선에서의 전략적 돌파구를 마련하고 협상국에 결정적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이에 독일군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연결부를 파괴하는 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작전 구역으로는 피카르디(Picardie) 지방의 생캉탱과 아미앵 사이의 지역이 선정되었다. 당시 이 구역은 전쟁 발발 초기부터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연합군에 의해 겨우 지탱되는 곳이었기에, 독일 군부는 이곳에서의 전격적인 공격이 전선을 무너뜨릴 것으로 예상했다.
3. 준비 과정
1918년 3월,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지휘 아래 약 75만 명의 병력, 6,600문의 야포, 3,500문의 박격포, 326대의 전투기가 생캉탱 전선 일대에 집결했다. 작전 계획은 생캉탱 부근의 영국 제5군 방어선을 돌파해 남서쪽으로 진격, 영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연결을 끊어 내어 양군을 격리시키고, 영국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것이 작전의 최종 목표였다.공격 준비를 위해 독일군은 밤낮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고 부대 배치를 진행했다. 특히 기습의 성공을 위해 라디오 통신을 자제하고 연락병을 활용했으며, 야간에 부대를 이동시키는 등 연합군의 정찰을 방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수개월 전부터 쌍안경과 사진 판독을 통해 영국군 방어선의 약점을 파악하고, 집중 공격 지점을 선정했다. 기습 공격의 성패는 화력의 집중에 달려 있었기에, 독일군은 공격 전날까지도 포병 부대의 전개와 폭격 계획 수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모든 준비는 극도의 보안 속에서 이루어져, 작전 개시 직전까지 연합군은 독일군의 공격 징후를 거의 포착하지 못했다.
4. 전투
1918년 3월 21일 새벽, 독일군 포병의 맹렬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5시간에 걸쳐 영국군 진지에 약 350만 발의 포탄이 쏟아졌고, 최전선 참호는 말살되었다. 안개까지 더해져 시야가 크게 제한된 가운데, 독일군 돌격대가 영국군의 전선 후방으로 은밀히 침투했다. 영국군은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측면에서의 공격까지 받아 혼란에 빠졌다. 결국 최전선이 무너지고 독일군은 한때 영국군이 지배했던 솜 전투의 옛 격전지를 가로질러 진격해 나갔다.23일에는 생캉탱 동쪽의 크로자 운하마저 돌파당했다. 독일군의 전진은 아미앵 남동쪽 45km 지점까지 이어졌고, 영국군 방어선에는 최대 60km에 달하는 돌파구가 생겼다. 아미앵 함락 위기까지 고조된 상황에서, 프랑스군의 증원이 속속 도착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필사적으로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하고자 했으며, 루덴도르프 역시 보급선 신장에 따른 어려움으로 공격 속도가 둔화되는 상황이었다.
3월 26일, 연합군 수뇌부는 아미앵 인근의 두양에서 긴급 회동을 갖고,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의 단일 지휘체제 구축과 증원군 급파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연합군의 저항이 조직화되었고, 독일군의 측면을 위협하는 역습도 시도되었다. 독일군은 아라스 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아미앵 공략도 교착 상태에 빠졌다. 공세 개시 2주만에 독일군은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미앵과 파리는 연합군의 손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5. 결과
작전 결과 독일군은 프랑스 북부 1,200km^2 의 영토를 탈환했다. 영국군도 7만5천여 명의 포로와 1,300문의 야포를 상실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작전의 주요 목표였던 영국군 포위와 아미앵 함락은 달성되지 못했다. 독일군 정예 부대도 24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탈취한 지역도 4년간의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황무지였기에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았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 관계는 오히려 이 위기를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미하엘 공세의 실패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을 상실했다. 이후에도 후속 공세를 개시했으나 뚜렷한 성과 없이 막대한 희생만 치러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미군마저 속속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결국 독일군은 전쟁 지도력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전의를 상실한 채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반면 연합군은 이 전투를 통해 방어 경험을 축적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 간의 협력체계를 다질 수 있었다. 이는 몇 달 후 연합군의 대반격인 백일 공세의 밑거름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미하엘 공세는 독일군의 패배를 재촉하고 협상국의 승리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